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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도 권력이다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 리뷰 2017-09-15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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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리베카 솔닛 저/김명남 역
창비 | 2017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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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으며 책을 읽은 게 얼마 만인지 모른다. 책이 더럽혀지는 게 싫어서, 평소 책을 읽다가 기억하고 싶은 구절을 발견하면 노트에 따로 적는데, 이 책도 처음엔 그렇게 읽다가 도중에 관두고 바로 밑줄을 그었다. 기억하고 싶은 구절을 죄다 받아 적다가는 펜과 노트가(내 손목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밑줄 그은 문장들은 앞으로 여러 번 반복해 읽으며 씹어먹고 삼켜먹으리라.


이 책을 쓴 리베카 솔닛은 1980년대부터 환경, 반핵, 인권운동에 열렬히 동참한 현장운동가이자 예술평론과 문화비평을 비롯한 다양한 저술로 주목받는 작가다. 한국에선 '맨스플레인'이라는 신조어를 유행시킨 책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로 주목받았다. 최근에는 한국 독자들의 열렬한 반응과 페미니즘에 대한 높은 관심에 보답하기 위해 저자가 직접 한국을 방문해 강연을 하기도 했다. 


이 책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는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의 후속편 격이다. 사회 전반이 여성에게 강요하는 침묵을 비롯해 신세대 페미니스트, 남성 페미니스트, 강간 문화, 젠더 이분법, 여성 혐오 범죄, 페미니즘과 소셜미디어의 관계, 문화예술 분야의 남성 중심주의 등 세계 전역에서 불거지는 페미니즘 이슈에 관한 저자의 견해와 통찰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글이 실려 있다. 


나를 인터뷰하던 영국 남자는 내 정신의 산물을 논하는 대신 내 육체의 산물을, 혹은 그 결핍을 논하자고 고집부렸다. 그는 무대에서 내게 아이를 갖지 않은 이유를 캐물었다. 내가 어떤 답을 내놓아도 그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의 입장은 내가 반드시 아이를 가져야 하고 그러지 않은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에, 내가 실제로 낳은 책들을 논하는 대신 내가 아이를 낳지 않은 이유를 논해야만 한다는 것인 듯했다. 


내가 무대에서 내려왔을 때, 스코틀랜드에서 내 책을 낸 출판사의 홍보 담당자는 - 가냘픈 이십 대 여성으로 분홍 발레 슈즈를 신고 예쁜 약혼반지를 낀 사람이었는데 - 열받아서 잔뜩 찌푸린 표정이었다. "저 사람은 남자한테는 절대로 그런 걸 안 물을걸요." 옳은 말이었다. (나는 요즘 저 말을 질문으로 바꾸어 질문자들의 의도를 좌절시키는 데 사용하곤 한다. "남자한테도 그런 걸 물으시나요?") (15~16쪽)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듯 이 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주제는 여성에게 강요되는 '침묵'이다. "남편은 아내를 때려서 침묵시키고, 강간을 저지르는 데이트 상대나 지인은 피해자의 "싫다"는 말이 자기 몸에 대한 권한은 자신에게만 있다는 뜻임을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사회의 강간 문화는 여자의 증언에는 가치도 신뢰성도 없다고 선언하며, 낙태 반대 운동가들은 여성의 자기결정권마저 침묵시키려고 하며, 살인자들은 여자를 영원히 침묵시킨다." 


극단적인 예만 들었다고? 이건 어떤가. "어떤 여자들은 온라인에서 끈덕진 괴롭힘을 겪다가 입을 닫아버리고, 대화 중에 상대가 끼어들거나 말을 가로채는 일을 겪으며, 얕보이거나 깔보이거나 무시당한다." 여성은 침묵을 강요당하는 동시에 침묵하지 않을 것을 강요당한다. 이를테면 진심이 아니어도 상대에게 상냥하고 친절하게 굴 것. 주변 분위기를 파악하고 센스 있게 처신할 것. 특히 연상의 남성이 관심이나 아양을 요구할 때 기꺼이 응할 것. "어떤 남자들이 젊은 여자들에게 그러듯이 낯선 사람이 우리의 관심과 아양을 요구하며 그것을 내놓지 않으면 혼내주겠다는 태도로 다가올 때 우리가 그의 바람을 충족시키지 않을 권리도 그런 권리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처참한 발견은 집 밖에서는 사실상 내게 삶, 자유, 행복 추구의 권리가 없다는 것. 세상에는 그저 내 젠더 때문에 나를 미워하고 해치고 싶어하는 낯선 이가 많다는 것. 섹스가 너무 쉽게 폭력이 된다는 것. 이것을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공적인 문제로 여기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123쪽, <걷기의 인문학>에서 인용) 


어떤 남자들은 말한다. '여자만' 그런 일을 당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시끄럽게 구느냐고. 남자도 사는 게 힘든 건 마찬가지인데 왜 그렇게 민감하게 구느냐고. 저자가 벨 훅스를 인용한 대목을 보자. "가부장제가 남자들에게 요구하는 첫 번째 폭력 행위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 아니다. 그 대신 가부장제는 모든 남자에게 정신적 자기절단을 행할 것을, 자신의 감정적 부분을 도려낼 것을 요구한다. 만일 자신을 감정적으로 불구화하는 데 성공하지 못한 남자가 있다면, 가부장제의 다른 남자들이 그의 자존감을 공격하는 힘의 의식을 틀림없이 거행해준다." 


결국 여성의 문제는 남성의 문제다. 여성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남성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사실 이 모든 문제의 원흉은 남성도 여성도 아니라 가부장제다. 가부장제는 남성에게 많은 특권을 안겨주는 동시에 많은 대가를 치르게 만든다. 남성으로 하여금 생래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여성성을 절단 또는 배제하게 한다. 남성이 이른바 '여성의 전유물' - 이를테면 분홍색, 치마, 눈물, 아름다움, 감정 표현 - 을 '대상화' 이외의 방식으로는 즐길 수 없게 한다. 


남성이 자기 본연의 모습으로 살지 못하고, 자기 안의 또 다른 자아를 억누르고, 태어나 세 번 울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해" 한 번 말 못하는 멍청이로 사는 것은 결국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만든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 탓이다. "감정이 죽여야만 하는 것이라면, 살해의 표적은 여성이 되기 쉽다." 자신의 감정을 죽이면서 사는 남자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여자를 볼 때 살인 충동을 느끼기 쉽고 폭력적인 발언 또는 행위로 분출할 가능성이 높다. 


여성의 문제는 또한 모든 인간의 문제이기도 하다. 동성애 혐오는 여성 혐오와 함께 가부장제가 낳은 폐단이다. "여자애 같다거나 계집애 같다는 말은 오래전부터 남자아이나 성인 남자에게 모욕으로 쓰였고, 게이 같다거나 호모 같다는 말도 마찬가지였다." 여성 문제에 눈뜨면 성 소수자 문제에 눈 뜨게 되고, 인종 문제, 이민자 문제, 아동 문제, 노인 문제, 장애인 문제 등에 관심 가지게 된다. 결국 이렇게 각자가 스스로 소수자임을 인식하고 소수자끼리 연대하다 보면 지금의 다수자가 소수자가 되는 세상이 올 것이다. 그들이 우리의 문제를 자신들의 문제로 인식하는 때가 올 것이다. 


얼마 전 나는 무지권(privelobiliviousness)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보았다(특권을 뜻하는 'privilege'와 무지 혹은 무심함을 뜻하는 'obliviousness'를 합한 것이다-옮긴이). 특권 있는 사람, 재현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곧 의식할 필요가 없는 사람, 실제로 자주 의식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과 같다는 걸 표현하기 위해서다. 이것은 이 나름대로 일종의 상실이다. (241~2쪽) 


'여자가 읽지 말아야 할 책 80권'라는 글에서 저자는 <에스콰이어>지에 실린 '남자가 읽어야 할 최고의 책 80권'이라는 글을 소개한다. '남자가 읽어야 할 최고의 책 80권'중에 여성 작가의 책은 딱 한 권(플래너리 오코너의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 그나마도 "그녀는 좋은 여자가 되었을 것이다. (...) 일분마다 한 번씩 평생 그녀를 총으로 쏴주는 사람이 곁에 있었더라면."이라는 대목을 인용해 저자를 실망시켰다. 나머지 79권의 책도 다르지 않다. 존 스타인벡, 잭 런던, 어니스트 헤밍웨이, 잭 케루악,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이들의 책을 읽는 건 문제가 아니지만 이들의 책'만' 읽는 건 문제가 될 만하다. 


저자는 남성에게 나 아닌 존재가 되어보는 경험을 선사하고, 보다 넓은 세상을 체험할 수 있는 책의 목록을 소개한다. 도리스 레싱, 루이즈 어드리크, 엘레나 페란떼, 필립 러빈, 라이너 마리아 릴케, 버지니아 울프, 스즈끼 슌류우, 에이드리언 리치, 빠블로 네루다, 마르꼬스 부사령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제임스 볼드윈 등. 사람들이 이런 작가들의 책을 읽는다면, 여자들이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텐데. 사람들이 점점 책을 읽지 않고 그나마도 여자 작가의 책은 여자만 읽으니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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