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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_ 비현실적인듯 무섭도록 익숙한 | 나의 서재 2020-10-08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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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오라시오 키로가 저/엄지영 역
문학동네 | 2020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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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자연의 운명 앞에서 연약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졸렬한 희망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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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자연의 운명 앞에서 연약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졸렬한 희망이란!

섬뜩한 광기, 자기 파괴적인 사랑, 재앙이 되어버린 집, ‘죽음’이 ‘삶’처럼 떠돌며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공포를 경험케 하는 단편들!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에서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목 잘린 닭」은 마시니, 베르타 부부의 백치 아이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들 부부에게는 네 명 아이들이 있었는데 이들 모두 백치라는 운명 앞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아이들은 입을 헤벌리고 혀를 내민 채 초점 없는 멍한 시선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거나, 이따금 그들이 노는 벽돌담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따라 흉내 내는 것을 제외하면 종일 무기력하고 멍한 어둠에 세계에 빠져 지내곤 했다. 물론 이 네 백치 아이도 한때는 부모의 인생에 커다란 기쁨이었던 적이 있었으나, 어느 새 부부는 짐승 같은 자식 넷을 구원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사라지자 서로를 헐뜯고 탓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서로에게 고통스러운 나날이 계속되던 중, 다른 형제들과 달리 건강하고 사랑스러운 딸아이가 태어났다. 이미 백치 아이들에 대한 애정이 식은 지 오래인 부부는 하녀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딸 베르티타에게 온갖 사랑과 애착을 쏟아 부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슨 이유에서인지 백치 아이들은 하루 종일 머물러 있던 벽돌담 앞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침 부엌에서는 하녀가 닭의 목을 자르고 피를 뽑아내고 있었다. 시뻘게…… 시뻘게…… 아이들은 닭의 목에서 시뻘건 피가 흘러나오는 광경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고, 뒤늦게 이를 알아차린 하녀가 아이들을 부엌에서 내쫓았다. 점심을 먹은 후, 산책을 하러 나간 부부가 잠시 이웃집 여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베르티타는 형제들이 놀고 있는 붉은 담벼락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어린 여동생이 끈덕지게 담벼락을 오르는 광경을 백치의 아이들은 무심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어찌된 영문인지 초점 없이 멍하던 아이들의 시선에 활기가 살아났다. 마치 오랜만에 먹이를 찾은 짐승처럼 그들의 얼굴은 탐욕스럽게 실룩거렸고, 급기야 여덟 개의 눈동자가 동시에 베르티타를 향해 손을 뻗기 시작했다. 백치가 되어버린 아이들의 삶이 곧 공포였던 부부에게 닥친 비극은 그렇게 베르티타를 겨냥한다.

 

 

 

   이렇듯 「목 잘린 닭」은 순수한 광기, 죽음의 공포, 집요한 욕망, 인간의 어리석은 희망을 집약한 소설로, 짧지만 강렬한 충격과 섬뜩한 여운을 남긴다. 근대 단편소설의 거장이자 라틴아메리카 환상문학의 선구자로 손꼽히는 오라시오 키로가의 대표작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는 열여덟 편에 이르는 작품을 수록한 단편소설집이지만, 수록작 「목 잘린 닭」처럼 어느 하나 빠짐없이 놀랍도록 인상적이다. 흥미롭게도 이들 작품은 모두 공통된 주제를 관통하고 있는데,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이다.

 

 

 

낭만적 사랑이라는 거짓에 대하여

 

 

 

   낭만적 사랑이라는 것은 환상이라는 관념 속에서만 오롯이 존재하는 것일까. 낭만적 사랑의 거짓된 허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몽상에 빠져있는 이들은 ‘사랑에 놀아난 바보’가 되고, 현실 감각을 지닌 교활한 속물들은 끊임없이 대상을 욕망하거나 서로를 좀먹으면서 불화할 뿐이다.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속에는 아름다운 외모를 내세워 신분상승을 꿈꾸거나(「사랑의 계절」, 「이졸데의 죽음」), 사치스럽고 속물적이며 도무지 만족할 줄 모르고 히스테리를 부리다 남편의 손에 비극을 맞이하는 여인(「엘 솔리타리오」)이 등장한다. 진실된 마음으로 서로를 위해 사랑을 쏟아 부었던 부부는 자신들이 낳은 아이들이 온전치 못하자 서로의 탓이라 몰아붙인다(「목 잘린 닭」). 순수한 사랑을 꿈꾸었던 연인들은 현실이라는 속물적 근성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져내리고 (「사랑의 계절」, 「이졸데의 죽음」), 착란 증세에 빠졌을 때에야 비로소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연인(「뇌막염 환자와 그녀를 따라다니는 그림자」)에게 사랑은 그저 환영에 가깝다.

 

 

 

그전까지만 해도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도스토옙스키의 말이 절실하게 가슴에 와닿았다. “삶에서 순수한 추억보다 아름답고, 우리를 단단하게 단련시켜주는 것은 없다.” 네벨은 열여덟 살 때의 아름다운 추억을, 때묻지 않은 순수함을 여태껏 가슴에 묻고 살아왔다. 그런데 그 추억이 지금 비탄에 젖은 채, 하녀나 쓰는 허름한 침대 위에 힘없이 쓰러져 있었다. / 「사랑의 계절」 중에서 39p

 

 

호화스러운 생활에 대한 갈망, 풍족한 결혼생활에 대한 환상, 그 모든 것이 마치 내 영혼에 난 상처처럼 도드라져 보였죠. 속물적이고 추악한 것에 스스로를 도매금으로 넘겨버리고 나 자신을 팔려고 내놓은 나는 우리 둘의 관계를 너무나도 원했던 여인의 마음에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치욕적인 상처를 남긴 겁니다……. / 「이졸데의 죽음」 중에서 67p

 

 

고열 속에서 단 두 시간 동안 지속되는 꿈속의 사랑은 낮이 되면 감쪽같이 사라진다. 그래서 만일 환한 대낮에 사랑에 빠질 만한 누군가가 나타난다면, 더 이상 그녀와 깊은 밤에 덧없는 사랑을 나누지 못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나는 그림자, 아니 환영을 사랑하고 있는 셈이다. / 「뇌막염 환자와 그녀를 따라다니는 그림자」 중에서 247p

 

 

 

 

 

 

환상이라는 지독한 광기, 그것이 아니면 도무지 버틸 수 없는 현실

 

 

 

   환상과 광기의 텍스트. 키로가의 단편 속 인물들은 어느 누구 하나 온전히 사유하지 못하고 환상이라는 지독한 광기 사이에서 떠돈다. 몽유병에 걸린 것처럼 배 안을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다 바닷속으로 몸을 던지는 선원들(「사람들을 자살하게 만드는 배」), 신혼의 단꿈이 사라지자 이내 환영을 보거나 착란 상태에 빠져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여인(「깃털 베개」), 마약에 빠진 묘지기와 죽은 지 8년째가 되어서도 여전히 마약을 갈구하는 해골의 대화를 담은 이야기(「내 손으로 만든 지옥」), 광견병에 걸린 개가 마을 전체를 공포로 몰아가는 기이한 광경(「광견병에 걸린 개)」까지. 이들은 모두 현실과 화해되지 못한 채, 환상 혹은 지독한 광기에 물리거나 자신을 몰아가지 않으면 도무지 버틸 수 없는 비참한 현실의 말로를 보여준다. 죽은 뒤 땅에 묻혀 온전한 육신마저 사라진 순간에도 코카인 한 방울이라고 얻을 날만을 기다리며 살아왔다고 고백하는 저 해골을 본 이상, 우리는 죽어서도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없는 지난한 삶의 굴레에 절규할 수밖에 없다.

 

 

 

“아! 지난 팔 년 동안 내가 얼마나 극심한 고통을 겪었는지 당신도 알아야 해요! 온몸이 얼어붙은 채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팔 년을 보냈다고요!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서도 난 오직 코카인 한 방울이라도 얻을 날만을 기다리며 살아왔어요!…… 그래요, 모든 게 코카인 때문이죠…… 그런데 당신은?…… 아, 그 냄새는…… 혹시 클로로포름?” / 「내 손으로 만든 지옥」 중에서 294p

 

 

어머니가 개를 그토록 두려워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가난해서 제대로 먹이지도 못하면서 개를 많이 기르는 곳이면 어디든 그렇듯이, 여기도 밤만 되면 굶주린 개들이 집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그렇다고 함부로 총을 쏘거나 돌이라도 집어던지면 녀석들은 정말로 사나운 짐승으로 돌변했다. 개들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어슬렁거리면서 다가오는데, 움직임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그러고는 주린 배를 채우려고 눈에 띄는 것이면 뭐든-이런 상황에서 이 말이 적절하다면-뺏어 간다. / 「광견병에 걸린 개」 중에서 308p

 

 

 

 

 

 

황량한 삶과 나란히 선 죽음이라는 공포

 

 

 

   결국 사랑과 광기는 현실과 분절되지 못한 채 죽음으로 나아간다. 코카인이라는 지옥에 빠져든 스스로에게 내릴 수 있는 단죄는 죽음뿐이며(「내 손으로 만든 지옥」), 베개 속에 기생해 살던 괴물에 의해 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피를 빨리고 만다(「깃털 베개」). 뱀에 물린 뒤 빠르게 흘러가는 강 위에서 표류하다 죽음을 맞이하고(「표류」), 강한 마취 성분이 있는 천연 꿀을 마셨다가 식인 개미떼에게 잡아먹히며(「천연 꿀」), 죽음의 사자를 발견했지만 끝내 농장 주인의 죽음을 막지 못하는 것을 보면(「일사병」) 죽음이라는 대자연의 질서 앞에서 인간은 그저 나약한 존재일 뿐임을 실감하게 한다. 이처럼 ‘죽음’이 ‘삶’처럼 짙게 깔려 있는 키로가 문학의 그로테스크한 광경은 매우 비현실적인 듯하지만 또한 무섭도록 익숙한 풍경이라 독자들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든다.

 

 

 

“허풍쟁이 같으니!” 그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아뇨. 저 사람 말은 결코 허풍이 아닙니다.” 병색이 완연한 승객이 말했다. 그는 고향에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가는 길이었다. “만약 저 사람 말이 다 허풍이라면, 그 또한 집요하게 떠오르는 생각에 휘말려 결국 바닷속으로 뛰어들었을 테니까요.” / 「사람을 자살하게 만드는 배」 93p

 

 

18, 24, 8을 더해보세요. 쉰 시간 만에, 그러니까 이틀 남짓 사이에 우리집은 죽음과도 같은 정적에 휩싸이고 만 겁니다. 갑작스러운 비극 앞에서 우리는 속수무책이었어요. 아내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었습니다. 난들 뭘 어쩌겠습니까? 아내라도 지키기 위해 늘 곁을 얼쩡거릴 수밖에요. 그러다보니 집안은 정적뿐이었지요. 이틀 전만 하더라도 우리 곁엔 사랑스러운 세 아이가 있었는데 말이에요…… (중략) 나는 호화롭지만 불길한 기운이 짙게 드리운 집을 가리키며 말했죠. 루비처럼 빨간 재앙의 불길이 천천히 타오르고 있던 그 집을 말입니다. / 「내 손으로 만든 지옥」 중에서 296p

 

 

 

   키로가가 이토록 사랑, 광기, 죽음이라는 주제에 천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해설에 따르면 키로가의 삶은 죽음이 그림자처럼 들러붙어 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유년 시절에 가족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가 오발 사고로 죽고, 의붓아버지마저 엽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장면을 눈으로 목격했으며, 친구와 아내까지 잃는 비극적인 사건을 경험했다고 한다. 훗날 자신에게 닥친 죽음의 그림자를 발견하기 전까지, 이 기구하고 처참한 운명 앞에서 문학을 위로로 삼고 그 속에서 고유의 문학적 성취까지 이루어냈으니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끈덕지게 달라붙던 죽음의 공포가 결국 글을 쓰게 만들었다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까. 글은 가장 가깝고 익숙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말을, 나는 키로가의 문학을 통해 좀 더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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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살인마_ 살인자는 나였다 | 나의 서재 2020-10-04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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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단지 살인마

최제훈 저
현대문학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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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차례 잘려나가는 손가락, 피의 퍼포먼스 속에 숨어든 비틀린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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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 살인 속에 숨어든 모방 살인, 살의의 전이 그리고 악의의 진실!

차례차례 잘려나가는 손가락, 피의 퍼포먼스 속에 숨어든 비틀린 윤리!

 

 

  사람이 둘 이상만 모이면 어김없이 손가락, 연쇄살인, 사이코패스 같은 단어가 흘러나온다. ‘단지 살인마’는 연일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차지한다. 언론은 ‘단독’ ‘속보’를 앞세워 단지 살인마에 의해 벌어진 것으로 추측되는 네 건의 살인사건을 시시콜콜 파헤치고, 경찰은 전방위적인 수사를 펼치지만 쓸 만한 단서를 포착하지 못한다. 범행 장소는 목포-대구-서울-원주, 범행 대상은 청년-여고생-노파-중년 남성. 그야말로 동서남북,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은 이 비정형적인 범행 행각에 대중은 서슬한 공포를 느낀다. 누구든 표적이 될 수 있으므로. 흉기-무차별 폭행-둔기-익사, 별개의 사건으로 보아도 무방한 네 건의 살인을 하나로 꿰는 표식은 차례차례 잘려나가는 손가락뿐이다.

 

 

 

살의로 일그러진 인간의 어두운 욕망을 그린 블랙 코미디

 

 

 

   시작은 가벼운 호기심이었다. 단서 하나 남기지 않고 네 건의 살인을 저지르는 주도면밀한 악마에게도 어떤 패턴이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숫자와 차트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자기 절제와 매매 타이밍, 숨겨진 패턴을 투시하는 혜안을 지녔다고 자부하던 전업 투자자 장영민은 프라모델 대신 탐정놀이로 가볍게 시간을 때우는 것도 괜찮겠지 하는 마음으로 사건에 접근하기 시작했다가 마침내 특별한 패턴 한 가지를 포착해내고야 만다. 시나이산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린 열 가지 계율, 그는 희생자들이 정확히 십계명의 순서에 따라 살해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또 다시 다섯 번째 희생자가 나온다. 사인은 질식사, 영어 학원 강사로 일하는 30대 남자 황성찬은 천안으로 들어가는 국도변 풀숲에 쓰러져 있었고 다섯 손가락이 모두 잘린 모습이었다고 한다. 조사 결과 황성찬은 어릴 적부터 소문난 사고뭉치에 빠듯한 형편에도 미국 유학을 가겠노라 떼를 썼다가 이내 마약 사건에 연루돼 부모를 곤경에 빠뜨린 일이 있는데, 공교롭게도 십계명의 다섯 번째 계율 역시 ‘부모를 공경하라’였다.

 

 

 

약간의 현대적 변용을 허용한다면, 희생자들은 정확히 십계명의 순서에 따라 살해되고 있었다.

1. 나 이외에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보스를 바꾼 조직원

2. 우상을 만들지 말라-아이돌 그룹의 사생팬

3.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친 노파

4.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주말로 없이 일을 시킨 공장 사장 / 28p

 

 

 

 

 

 

   장영민의 추측대로라면 이제 여섯 번째 계명 ‘살인을 하지 말라’에 따른 희생자가 나타날 차례다. 문득 고교 시절, 자신을 찹쌀모찌라고 불렀던 양승범을 떠올린다. 학교 폭력과 집단 따돌림, 모두가 외면하고 있는 가운데 버젓이 자행되었던 성폭력까지. 덕분에 사회불안장애자가 되어버린 자신의 비참한 현실 앞에서 그는 거듭 되뇐다. ‘살인을 하지 말라, 살인을 하지 말라, 살인을…… 꼭 심장을 멈추게 해야만 살인은 아니다. 열일곱 살 소년의 인격을 무참히 짓밟는 것도 살인이다. 지금 내 머릿속에 박힌 생각이 그 증거’라고 말이다. 장영민은 사이버 흥신소에 의뢰해 양승범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다. 그리고 운명의 날, 여섯 번째 계명은 마침내 실행된다. 스스로 단지 살인마를 가장한 장영민에 의해 양승민의 손가락이 잘려나간다.

 

 

 

“사람 기억 중에서 말이야, 제일 질긴 게 쪽팔린 기억이더라.”

“응?”

“이건 시간이 흘러도 당최 사라지거나 희미해지지가 않아. 다른 기억들은 적당히 퇴색되고 나한테 유리하게 왜곡되기도 하던데, 얘는 안 그래. 오히려 갈수록 과장되고 비비 꼬이면서 어떻게든 나를 괴롭히려고 안달이지.” / 64p

 

 

사후 세계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다. 숨이 끊어지는 순간 누전차단기 떨어지듯 암흑 속에 묻히고 끝나는 거라고. 하지만 갓 생겨난 주검을 마주하고 있자니 뭐라도 있기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저게 내가 아등바등 살아온 세상이구나, 하고 돌아볼 수 있는 초월적인 무언가가. / 71p

 

 

 

 

  소설을 읽고 있으면 불현듯 이런 의심이 든다. 단지 살인마를 가장했던 장영민처럼, 어쩌면 수많은 모방범들이 악명 높은 연쇄살인사건의 이름을 빌려 버젓이 살인을 하고 우리 주변에 숨어들어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때문에 단지 살인마가 손가락을 하나씩 자르는 행위를 ‘현대문명에 대한 완강한 거부를 상징’하는 동시에 ‘인간성 상실에 대한 경고를 점층법적 절단 의식에 담은 것’이라고 분석하는 저 의미심장하고 진지한 해석 따위는 이내 우스워지고 만다. 그렇게 손가락을 하나씩 자르는 행위가 한낱 퍼포먼스로 전락하는 사이, 독자들은 ‘살인자’는 누구도 아닌, 나를 비롯해 어느 누구도 될 수 있다는 평범성에 전율하게 된다. 다시 말해, 살의와 악의는 어느 소수의 광신자나 반사회성 인격 장애자에게서만 보이는 특이 행동이 아니라 우리 사회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품고 있는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섬뜩해지고 마는 것이다.

 

 

 

다른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었다. 이번 사건 역시 모방 범죄일지 모른다는. 이전 다섯 건의 사건들 또한 단독범의 소행이 아닐지 모른다는. 이 만만찮은 가능성을 애써 무시한 이유는, 만일 범인이 서로 알지 못하는 다수라면 십계명에 따른 전개가 신비의 영역으로 넘어가버리기 때문이었다. 그쪽까지 헤아릴 여력은 없었다. 일곱 번째 계명이 어사무사했지만 일부러 찾아보지 않았다. 난 그만 손 털었으니 알아서들 하라지. / 87p

 

 

“우린 선택을 한 거예요. 평생을 괴로움 속에서 사느니 목숨 걸고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기로. 그렇죠?”

손동식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잘한 짓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었잖아요. 우리야말로 피해자고, 궁지에 몰린 생쥐처럼, 그러니까 말하자면…… 전쟁. 그래요, 작은 전쟁을 치른 거죠.” / 138p

 

 

 

   영화 <살인의 추억>을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진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진범이 지난 해 세상에 드러났다. 아이러니하게도 진범 이춘재는 이미 자신의 처제를 성폭행 및 살해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부산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다. 그런데 이춘재의 정체가 밝혀지기 전, 이미 연쇄살인범 유영철은 “범인은 다른 사건으로 오래 전부터 수감돼 있거나 죽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살인행각을 멈추지 못할 것”이라 주장한 바가 있다. 경찰이 이춘재의 심리를 분석한 결과에서도 “성범죄와 살인을 계속하면서도 죄책감 등의 감정 변화를 느끼지 못하게 되자 감정 상태에 따라 살해하면서 연쇄살인으로 이어지고, 수법도 점차 가학적인 형태로 진화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소설 속 장영민에게서도 유사한 형태로 드러난다.

 

 

 

   단지 살인마에 의한 희생자인지 모를, 일곱 번째 희생자가 또 다시 나타나고 그러는 동안에 장영민은 ‘잠시 성찰할 틈도 없이 계속되는 자기복제’ 속에서 점점 범죄에 무감각해지고 스스로도 ‘한없이 가벼워져 휘발되는’ 듯한 ‘윤리적인 소멸’을 느낀다. 잠시 무감각해져 있었던 투자 타이밍에 대한 감각도 돌아오고, 여행지에서 버킷리스트를 즐길 계획까지 세우는 등 점차 자신이 저지른 범죄와 분리되는 과정으로 이행하기 시작한다. 어느 날, 우편함에 꽂힌 편지에서 ‘단지 살인마, 전화 요망. 010-XXXX-XXXX’이란 메시지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이제 장영민은 자의에 의해 선택한 살인을 타의에 의해 멈출 수 없는 복잡한 시험대에 오른다. 그는 살인을 멈출 수 있을까. 이미 가속도가 붙어버린 그의 범죄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을까.

 

 

 

 

 

 

   소설 『단지 살인마』는 차례차례 잘려나가는 손가락, 피의 퍼포먼스 속에 숨어든 개인과 사회 전체의 비틀린 윤리를 냉정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한 평범한 소시민이 연쇄살인의 형식을 빌려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과정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 범죄가 작동하는 방식과 모든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 살인과 관련되어 있는 어두운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아울러 손가락을 자르는 연쇄살인범의 살인 패턴, 완전범죄를 꿈꾸는 모방 살인, 또 다른 살인자와의 공모에 이르기까지, 추리소설의 특성과 철저히 살인자의 시선에서 그의 심리를 따라가는 전개 방식은 마지막까지 몰입도를 높인다. 이 책을 읽고자 하는 예비 독자분들이라면 망설임 없이 질주하는 작가의 역량을 유감없이 즐기면서 그 속에 들어있는 사회적인 메시지를 함께 숙고해보시기를 추천 드린다.

 

 

 

        

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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