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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영혼 | 인문/사회/역사 2011-10-16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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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도시개발, 길을 잃다

김경민 저
시공사 | 2011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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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젠 앗제는 공공기관이 고객인 상업사진가였다. 그의 일은 어디까지나 고객이 지정한 건축물과 풍경을 찍는 것이었고 그 결과물은 유리원판으로 십여장씩 개인 고객들에게 백여장씩 공공기관에 팔려나갔다. 그가 하는 일은 그와 같은 일을 하던 다른 동료들처럼 파리를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었다. 그러나 앗제의 사진은 특별햇다.

앗제는 “20세기 사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사진가들 자신이 사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어떻게 사진을 찍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도록 만든 장본인이다.” 영혼이 없는 상업사진이라 치부하기엔 “그의 작품의 아름다움은 당혹스럽다.” 앗제는 기록을 남긴다는 의뢰의 목적대로 파리를 찍었다. 그러나 다른 동료들과 달리 그가 찍은 파리는 ‘앗제의 파리’라 불린다. 앗제의 파리는 “동적이며 만져질 듯한 생동감이 느껴”진다. “앗제의 이미지를 관객들이 어떻게 바라보고 그 안으로 빨려드는지 관찰해보라. 우리는 사진의 공간을 소유하고 이를 되찾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이 들게 하는 사진가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앗제의 사진은 “위안과 놀라움과 감동을 선사하기는 하지만 좀처럼 매혹시키는 법은 없다.” 앗제는 무대의 주연이 아니라 조연만 찍었기 때문이다. 앗제에게 도시는 “사람들이 움직이고 무언가를 소비하며 정신적인 휴식을 찾는 공간”이엇다. 그러나 앗제가 찍은 사진은 그 도시의 드라마 자체가 아닌 드라마의 배경인 미장센이었다. 건물에 사는 사람과 그들의 삶보다는 그 배경인 건물을 찍엇고 사람들이 사고 소비하는 자체보다는 그 대상인 상품들과 그 상품이 놓인 진열장을 찍었다. 무엇이 그를 그런 배경에 몰두하게 했을까?

더군다나 앗제의 사진작업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옛날을 다루는 영화에 보면 커다란 삼각대 위에 올려진 카메라에 고개를 쳐박고 천으로 얼굴까지 가리고 찍는 사진사를 볼 수 있다. 앗제가 들고 다닌 사진기는 그런 사진기엿다. 건물을 찍기 위해선 그런 커다란 사진기가 필요했다. “큼직한 뷰 카메라와 그에 딸린 올망졸망한 가방들을 끌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일이 얼마나 힘든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예순여덞이란 나이까지 앗제가 헤라클레스 같은 괴력을 내야 했던 이유는 아마도 소유욕이었을 것이다.

“’저는 옛 파리(Vieux Paris)의 모습은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소유하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옛 파리의 모습은 하나도 빠트리지 않았다고? 사실과 다르다. 앗제의 파리는 보행자. 노동자 계급, 좁고 지저분한 안뜰을 감추고 있는 전기 산업화 단계의 별볼 일 없고 미천한 파리엿다 ‘다른 사람들’의 파리가 아니더라도 그저 보통 사람들의 파리일 뿐이다.” (이상 Gerry Badger ‘외젠 앗제’에서 인용, 요약)

그가 찍은 보통 사람들의 파리는 “오스망과 황제가 의도했던 것이 무엇이든 간에 ‘위험한 계급’과 불건전한 가옥과 산업을 도심에서 추방하는 일”(데이비드 하비)때문에 밀려나 사라져 버릴 운명에 놓인 것들이었다. 오스망이 만든 “널찍한 거리를 거니는 부르주아의 파리나 부르봉 왕조의 파리는 앗제의 진정한 관심 밖이었고 그의 거대한 계획과는 무관햇다.”

“오스망의 업적은 근대 도시계획의 위대한 전설이 되었다. 황제의 지원을 업고 자본과 노동의 잉여를 광대한 공공사업계획으로 흡수하는 수단으로 무장한 그는 수도의 사회적 경제적 삶의 공간적 틀을 재조직할 일관성 있는 계획을 고안했다. 오스망은 ‘다양한 지역적 상황을 충분히 적절하게 조화시킬 수 잇도록 상세하면서도 전반적인 계획’을 추구햇다. 도시공간은 하나의 전체로서 파악되고 다루어지며 그 안에서 도시의 상이한 구역과 상이한 기능들은 상관관계를 맺고 활동하는 전체를 형성한다. 도시공간의 전체성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 때문에 오스망은 대도시 지역 내 공간질서의 합리적 진화를 위협하는 불균등한 개발이 진행되던 근교를 병합하기 위해 격렬한 투쟁을 벌여야 했다. 1860년대에 그는 끝내 승리했다.” (데이비드 하비 ‘파리, 모더니티의 수도’)오스망의 승리 덕분에 우리는 모두가 아름답다 말하는 오늘날의 파리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공짜 점심은 없다.

“발터 벤야민에서 미셸 푸코에 이르는 비판적 지식인들은 오스만의 도시 계획이 프랑스혁명 이후 폭동과 소요의 중심이 된 파리를 권력의 입장에서 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평가한다. 거미줄같이 복잡한 골목길로 흩어지는 군중들을 통제하는 방법은 미로를 없애고 대로를 건설하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겉으로 내세운 대로 건설의 목표는 비좁고 비위생적이고 불편한 파리를 개방적이고 위생적이고 편리한 도시로 만드는 것이었지만 실질적으로 파리 시민들에 대한 일상적 감시의 효율을 높이고 신속하고 용이하게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서 였다는 것이다. 오스만 이전의 ‘오래된 파리’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오스만의 도시계획은 기억으로 가득 차 있으며 다양한 모습의 매력적 파리를 파괴했고 그 결과 파리는 영혼이 없는 도시가 되었다고 한탄한다.” (정수복)

앗제에게 사진은 권력에 밀려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파리의 영혼에 대한, 상상적 소유였다. “그것은 프루스트적인 의미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고자’하는 개인적인 추구이고 두번째는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인 소유, 즉 자기가 속한 계급에게 프랑스의 문화를 되찾아 주고자 공공 문서 보관소에 조심스럽게 자기만의 소리를 불어넣는 행위를 가리켰다. 그러므로 앗제의 광범위한 테마는 여러 평자들이 결론지었듯이 단지 프랑스 문화유산의 목록을 작성하고 그것이 지닌 정신을 고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화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뛰어난 감수성과 감각있는 눈으로 기록하는 것이었다. 앗제의 작품이 지니는 정령숭배적 경향이나 우울증, 사랑스러움 등은 모두 여기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그럴듯한 이야기를 해줄 인물, 그의 삶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것이다. 이점이 앗제가 지닌 진정한 가치이며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 시적인 답변을 제시하는 사진작업을 해온 모든 작가들에게 그가 남긴 유산이다.” (Gerry Badger)

그러나 앗제의 유산이, 앗제의 파리가, 무엇이었건 역사의 승자는 오스망의 유산이고 오스망의 파리였으며 그의 파리는 이후 전설이 되어 모든 도시계획의 모범이 되었다. 그리고 도시의 영혼이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오스망과 앗제의 투쟁은 지금도 계속된다.

오스망에게 파리는 제국의 수도다워야 했다. 그런 파리에서 “저소득층이 모여사는 슬럼은 없어져야 할 대상이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전반에 유행했던 도시미화운동은 오스망의 모범생이었다.

19세기 미국에서 시작된 도시미화운동은 “열악한 주거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중산층 이상의 계층은 저소득층 때문에 도시가 불결해지는 것을 방치할 수 없었고 유럽도시가 주는 낭만이 미국에도 필요하다는 유럽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무엇보다” 당시 유행했던 사회다윈주의는 “도덕의식과 시민의식이 부족한 열등한 저소득층 때문에 도시가 열악해졌다”고 암시햇다. “도시는 윤리적 질서가 있어야 하고” 시민은 마땅히 지역사회의 윤리적 가치를 공유하고 “시민의식과 시민문화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도시의 주거환경을 아름답게 바꾼다면 저소득층 주민들을 계도할 수 있다고 보았고 아름다운 도시건설에 매진했다. 도시는 아름다운 환경과 함께 그 기능이 원활해야 긍정적인 이미지를 창출한다고 믿었다.”

좋은 생각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선 “도심에 사는 저소득층 주거지”는 사라져야 햇다. 그렇게 사라진 공간에 “그들은 넓은 오픈 스페이스와 고대로마식 기념물인 거대한 건물, 아름다운 거리 조형물, 공원”을 새웠다. 오늘날 센트럴 파크를 중심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뉴욕은 그때 만들어졌다. 그리고 아름다운 뉴욕은 ‘그들만의 도시’가 되었다.

“런던과 파리에 공원이 건설되자 뉴욕에서도 거대한 공원이 바람직하게 여겨지기 시작했고 아직 건물이 들어서지 않은 넓은 지역을 공원용으로 남겨두었다. 센트럴 파크가 건설되어 모양새를 갖추고 매력적인 모습을 띠게 되자 이 공원은 자석처럼 주택가를 북쪽으로 끌어들이는데 일조했다. 뉴욕의 부자들이 센트럴 파크 근처에 정착할 무렵 그들은 정말 굉장한 부를 자랑햇다. 센트럴 파크는 위치상의 이유로 인해 초기에는 주로 부자들만 찾는 장소가 되었다. 또한 부자들의 핍스 애버뉴로의 이주가 절정에 달했을 때 그들은 핍스 애비뉴의 공원 쪽에 저택을 짓기 시작햇다. 많은 수의 대부호들이 이곳에 와 살면서 다른 지역에서 축적한 재산을 향유했다. 뉴욕의 오페라하우스에 박스석을 보유하는 것, 센트럴 파크에서 타고 다닐 마차를 소유하는 것, 핍스 애비뉴에 저택을 가지는 것 그리고 뉴포트에 루이 16세 시대 건축양식의 휴일용 별장을 두는 것이 네바다에서 온 은광왕들과 여왕들, 피츠버그에서 온 철강황, 시카고에서 온 곡물왕,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철도왕, 클리블랜드에서 온 석유왕들이 지닌 야망의 절정이었다.” (마크 기로워드)

아름다움은 공짜가 아니다. 아름다움은 대가를 낼 수 있는 사람의 것이다. 오스망의 파리는 아름답지만 프랑스인들은 그 아름다움의 대가를 지금도 치뤄야 한다.

“파리의 거리를 따라 나란히 서 잇는 그 많은 5층짜리 건물들이 선사하는 기적적인 통일감을 즐기는가? 그것 역시 오스망의 작품이다. 오페라 거리는 어떠한가? 마찬가지이다. 프랑스의 그 모든 화려함 아래에는 깨끗한 물을 쓰레기로부터 분리해주는 하수시스템이 놓여있다. 이 역시도 오스망 덕분에 생긴 것이다. 1853년부터 1870년까지 오스망은 파리에 있는 건물 절반 이상을 없앴다. 오스망은 사실상 도시를 구하기 위해 도시를 파괴햇다.

‘사람들이 없는 도시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셰익스피어의 말이다. 사람들에게는 건물이 필요하다. 도시는 건품을 새로 짓거나 증축함으로써 성장하고 도시가 건물을 짖지 않을 때 사람들은 도시의 인접성이란 마술을 경험하는 것을 방해받는다. 도시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사실상 도시의 일부를 파괴해야 한다. 파리를 보존하기 위한 오스망의 현대적 욕구는 과거 적정한 돈만 있으면 누구나 즐길 수 있었던 파리를 오늘날 부자들만 즐길 수 있는 부티크 도시로 바꾸어 놓았다.

파리의 역사는 그곳에서 무일푼으로 성장기를 보냈던 위대한 예술가들의 이야기로 가득하지만 오늘날 어떤 가난한 예술가들이 파리 중심부에서의 생활을 감당할 수있는가? 장소가 건설활동을 과도하게 제한할 경우 경기침체가 계속되면서 물가는 꾸준히 오르는 스테그네이션에 빠질 위험이 커진다. 도시의 역사가 도시를 구속한다면 도시는 그 가장 위대한 자산인 ‘개발능력’을 잃게된다.” (에드워드 글레이저)

몰론 오스망의 제자들은 역사의 구속을 받지 않았다. 제자들은 오스망에게서 아름다움이란 가치만 빌렸고 오스망의 수제자였던 미국의 도시미화운동은 “태평양을 건너 인도와 아프리카의 영국식민지까지 전해졌다.” 그리고 “20세기 중반에는 파시즘 정권의 도시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무솔리니 치하의 로마 그리고 나치 정권의 베를린 개조계획은 기본적으로 도시미화운동을 사상적 토대로 삼았다.” 파시즘과 오스망(그리고 그 제자인 도시미화운동)은 같은 시선으로 공간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권력의 시선이라는.

그러나 권력의 시선으로 재편된 공간의 아름다움은 “피상적인 시각효과”일뿐이엇다. 그렇게 만들어진 도시는 영혼이 빠져있었고 외모만 아름다운 성형미인에 불과했다. ‘사람들이 없는 공간의 성형으로 영혼도 치유한다는 전제가 잘못된 것이다. 도시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도시가 아름다워졌다해도 지역주민들의 의견이 무시되고 도시개발의 피해가 저소득층에 집중되었다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매력있는 세계 도시 서울
한강을 서울의 도시 브랜드로
한강을 도시발전 전략의 거점으로 서울의 도시혁신촉진
고품격 시민 문화 창조
상징적 건축물 조성을 통한 서울의 이미지 제고
밤이 더 아름다운 한강 야경 연출
모뉴먼트”
서울시의 ‘한강르네상스 마스터플랜’의 키워드들이다. 어딘가 많이 들어본 것이다. 60년대 이후 미국에선 포기한 도시미화운동의 키워드를 반복하고 잇다. “도시미화운동 방식이 태동한 역사적 배경과 그 진행 방식이 21세기 서울에서 재현된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한강공원을 단장하고 접근성을 높여 시민들에게 편의를 제공한다는 것은 그 가치를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8개 정비 구역이 기본적으로 부동산 개발이라는 특성을 갖고 있으나 주민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서울시가 일방적으로 진행한다는 점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과거의 재개발과 달리 서울시가 배제하려는 사람은 저소득층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8개의 정비구역은 압구정동과 동부이촌동, 반포의 고소득층 주거지역에서 일반 서민들이 사는 지역까지 모두 포함한 광범위한 지역이다. 그런데도 서울시는 일방적인 계획안을 발표했고 주민들의 반발은 거세다. 2009년 9월 강남구청이 압구정 주민 6천명을 대상으로 주민투표를 실시한 결과 98%가 반대했다. 가끔 일간지에 압구정 주민들이 ‘공공성’ 회복에 반대한다는 뉘앙스의 기사들이 실린다. 여기서 무엇이 ‘공공성’이냐는 것이다. 기존 아파트를 철거하고 오픈 스페이스와 공원을 더 많이 만드는 것이 ‘공공성’이 될 수는 없다. 오픈 스페이스의 직접적인 수혜자는 거주민일 것이다. 그들은 본인이 거주하는 초고층 주상복합건물에서 내려다보는 한강의 절경과 공원의 쾌적함을 매순간 즐길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오픈 스페이스를 즐기기 위해 많은 돈을 주고 아파트를 구입해서 거기에 살” 수 있는 것이다. “이미 제값을 지불하고 즐기기 때문에 진정한 공익은 간접적인 수혜자들이” 가끔 지나며 느끼는 심리적 안정감과 쾌적함이 전부이다. “오픈 스페이스를 늘려 공공성이 획적으로 증대될 거라는 서울시의 주장만큼 공공성의 양이 엄청나게 증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공성이라는 이름 뒤에 제값을 지불하고 사는 중산층 이상의 고소득층이 공공성의 혜택을 받는다면 이것이 과연 얼마나 공익일 수 있는가”

강북 뉴타운 계획에서 서울시가 말하는 공공성 역시 마찬가지이다. 서울시는 ‘강북에 고품격 주거환경과 교육여건을 조성하여 지역간 격차를 해소하고 삶의 질을 개선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떻게? 뉴타운을 만들면 주민의 소득이 올라가는가? 계획의 비밀은 추방이다.

“시범지구와 제2차 뉴타운지구의 주민구성을 보면 세입자가 전체의 72.53%에 이른다. 특히 영등포 지역 뉴타운은 전체 세대의 86.8%가 세입지다. 뉴타운지구 주민의 월평균 가구 소득은 187만원으로 서울시 전체 평균 303만원의 2/3 수준이며 세입자 가구 중 순자산 4000만원 이하는 66.6%이다. 주민의 대부분은 저소득층임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소득이 단기간에 획기적으로 오르지 않는 이상 아파트 입주자격을 얻는다 한들 입주비용을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임대아파트를 많이 지어야 함에도 비중은 17%를 넘지 않는다. 오히려 임대아파트가 없는 지역조차 있다.

기존 거주민의 낮은 소득수준과 신규공급된 아파트가 중대형 위주인 점을 볼 때 기존 거주민이 재정착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2007년 자료에 의하면 뉴타운 재정착률은 17.1%에 머문다. 따라서 지역격차해소라는 목표는 기존주민들의 소득향상을 통해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라 저소득층 주민들을 중산층으로 바꿔치기함으로써 격차해소를 줄이는 것이다.

뉴타운 정책의 목적이 기존 거주민의 삶을 개선하는 데 있음을 밝혔는데도 현실에서는 기존 저소득층의 지역 커뮤니티가 붕괴되면서 새로운 중산층타운으로 변모하고 잇다. 구청 입장에서는 중산층이 들어옴으로써 주택가격이 상승하고 주변상권이 활성화되어 자신의 수입인 세금이 증가할 수 있기 때문에 내심 이를 조장하는 경우가 많다. 서울시의 22개구가 뉴타운을 경쟁적으로 추진하는 이유다.”

누구를 위한 고품격이며 누구의 삶의 질인가? 한세대 전에 끝난 냉전을 우리는 아직도 살고 있듯이 우리는 100년전의 도시계획 패러다임에 따라 아직도 살고 있다.

20세기 초반까지 “미국의 도심재개발과 도심을 관통하는 고속도로 건설은 대규모 강제이주를 동반햇다. 피해자의 상당수는 흑인을 비롯한 저소득층이었다. 집에서 쫓겨난 그들을 받아줄 정부의 임대 아파트 수는 매우 한정되어서 입주가 아주 힘들었다. 그야말로 흑인 저소특층에게는 절망적인 상황이엇다. 언론사의 보도는 재개발의 부정적인 측면에 비판적이라기보다 재개발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정치인들에게 동조적이었다. 이는 저소득층 주민들의 대규모 이전을 전제로 한다는 점과 임대료 상승의 폐단으로 저소득층이 가장 큰 피해를 입는다는 점에서 서울에서 진행되는 뉴타운 개발의 폐해와 비슷하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미국과 유럽의 도시계획은 달라졋다. “미국의 주택 재개발의 과거 모습은 현재의 우리와 많이 닮았지만 현재 모습은 매우 달흐다. 단적인 예는 공공조직이 주민의 이익을 대변하여 공공 디벨로퍼로서 도시재개발 사업을 주도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한국의 공공기관은 주민을 대변하지 않는다. 공공기관에게 주민은 계획을 통보해주어야 하고 단지 설명해주어야 하고 동의만 해주면 되는 수동적인, 권리가 없는 ‘대상’일 뿐이다.

“도시개발구역이 지정되기 2년 전에 일방적으로 서부이촌동 아파트를 편입한 계획안을 발표한 것은 지역 커뮤니티의 이익을 수호하는게 아니라 무시하는 것이다. 이런 도시계획 절차상의 문제 되에도 용산국제업무지구의 개발사업자를 선정하는 절차를 들여다보면 여기에도 시민들의 요구를 반영하는 절차가 없다는 걸 알게된다.

우리나라와 비교해 미국은 개발과정에서 시민들의 의견을 반영하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해놓았다. 뉴욕시의 경우 개발행위는 세단계를 거치는데 첫째 단계인 지역주민협의체에서 개발에 대한 승인을 얻어야 시 의회와 시장의 승인을 얻는 과정으로 나아갈 수 있다. 따라서 뉴욕의 디벨로퍼들은 지역주민협의체의 승인을 얻기 위해서 지역 주민들의 요구사항을 정확히 인지하고 이를 만족시켜야 한다.

그러면 한국에선 어떤가? “공무원들을 사석에서 만나 개발사업활성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면 대부분이 환지방식(개발 후 토지를 주는 방식) 대신 수용방식(돈을 주고 주민을 내보내는 방식)을 선호한다. ‘개발방식이 깔끔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역주민이 개발과정에 개입하면 번거롭기 때문에 주민의 참여를 막아버린다는 것이다.”
왜 이런 차이가 있는 것일까? 목소리를 내는 지역 커뮤니티가 있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지역 커뮤니티는 말 그대로 지역주민들의 모임이다. 다만 미국의 지역 커뮤니티가 우리나라와 다른 점은 지역 커뮤니티에 많은 지역 주민이 참여하며 교육, 범죄, 경제활동, 그 밖의 사회 이슈 등 지역의 문제점에 대해 의견을 교환한다. 따라서 매우 자연스럽게 지역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 리더가 된다. 또한 이들은 부동산 개발이라는 특수한 목적으로 모인 게 아니어서 우리나라의 주택조합과는 차원이 다르다. 우리나라의 조합은 주택개발이라는 경제적 목적을 위해 뭉친 것이지 자녀들의 교육이나 지역의 경제 활동 활성화, 범죄 같은 이슈에 대해 묻고 토론하는 집단이 아니다. 어찌보면 미국에서 지역 커뮤니티가 활성화된 이유는 미국의 장점인 민주주의의 역사에 뿌리를 둔 것인지도 모른다. 특정 이슈에 대해 주민들이 의견을 교류함녀서 타협점을 찾고 합리적 선택을 하기 위해 자생적으로 지역 커뮤니티가 활성화된 것이다.”

한국 공무원의 눈에 주민은 ‘대상’일 뿐인 것도 이상할 것은 없다. 시민이 시민인 이유는 그들이 집단을 이룰 때이다. 그런 시민이 없을 때 국가의 눈에는 사람이란 없다. 마음대로 움직일 숫자만 있다. ‘사람들이 없는 도시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도시의 영혼은 사람이다. 그리고 사람이 모인 커뮤니티이다. 그러나 서울에는 영혼이 있는가? 아니 있었던 적이 잇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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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의 미래 | 경제경영 2011-10-08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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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달러제국의 몰락

배리 아이켄그린 저/김태훈 역
북하이브 | 2011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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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전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국제체제는 중심부와 주변부 경제로 나뉜다. 중심부는 대외 준비금으로 사용되는 통화를 발행하는 엄청난 특권을 누리며 자신들의 분수에 넘치는 생활을 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중심부를 따라잡기에는 한참 멀리 떨어진 주변부는 저평가된 환율 유지를 바탕으로 수출주도성장에 몰두한다. 그 결과는 중심부 국가가 자국 통화표시로 발행한 저수익 대외준비금의 대규모 축적이다. 1960년대에 중심부는 미국이엇고 주변부는 유럽과 일본이었다. 이제는 아시아 신흥시장이라는 새로운 주변부가 등장했다. 중심부는 여전히 미국이고 분수에 넘치는 생활을 하는 경향 역시 여전하다.

미국은 적자를 계속 내면서도 달러의 가치는 주변부 통화에 대해서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 이는 주변부 국가들이 미국 시장 점유율을 유지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주변부 중앙은행들은 자국 환율이 절상되지 않도록 시장에 개입하여 달러를 매입한다. 1990년대 외환위기를 통해 얻은 교훈, 즉 세상은 위험한 곳이며 대외 준비금 축적을 통해 정부는 금융흐름의 갑작스런 변동에 대비해야 한다는 교훈으로 인해 이런 경향이 더 강화되었다. 준비금을 늘리려는 아시아 중앙은행들이 미국이 쏟아내는 달러표시 증권을 기꺼이 흡수해가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공공지출을 억제해야 하는 압력을 별로 느끼지 않는다. 미국은 다른 채무자에 비해 낮은 금리를 지불하면서 외국 중앙은행과 정부에 채권을 매각했다. 그 결과 달러는 별로 절하되지 않는다. 이는 프랑스가 1960년대에 불평햇던 ‘과분한 특권’이엇다.

이 상황은 1950-60년대와 흡사하기 때문에 이 시기를 제2의 브래튼우즈라 부른다. 본래의 브레튼우즈 체제가 20년의 좋은 시절 동안 존재햇다면 신브래튼우즈도 마찬가지엿다.

시장에 맡겨두면 후발경제의 통화가치는 오른다. 생산성이 신속하게 오르기 때문에 통화의 가치는 오른다. 통화절상은 고도의 생산성이 고도의 생활수준으로 전환되는 방식이다. 시장의 압력은 영원히 병속에 머물러 잇지 않는다. 본래의 브레튼우즈 체제에서 시장의 압력은 1970년대 초에 폭발햇다.” (저자의 ‘글로벌 불균형’)

신브레튼우즈 체제가 유지된 이유는 아시아 중앙은행들이 달러를 샀기 때문이다. 유일한 국제통화인 “달러를 사들이면 대미환율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와의 환율도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그러면 아시아 지역 내의 부품교역에서도 상당한 혜택을 누릴 수있었다. 대부분의 교역이 달러로 정구되고 결제되기 땝문에 대미환율을 안정시키는 일은 대단히 중요했다. 환율방어는 달러의 축적을 촉진했다. 또 다른 요인은 미국 채권시장이 자랑하는 풍부한 유동성이었다. 유동성이 풍부하면 낮은 비용으로 쉽게 매매할 수 있었다. 이러한 유동성을 해외투자자들이 제공했다는 점에서 달러는 보유통화와 국제통화로서 특권을 누리는 셈이엇다.”

그러나 신브레튼우즈 체제 역시 2008년 폭발했다. 팍스 브리태니커의 아름다웠던 시절, 벨르 에포크가 그랬던 것처럼 신브래튼우즈, 또는 글로벌 불균형은 팍스 아메리카나의 벨르 에포크였다. 그러나 아름다운 시절은 끝났고 앞으로 팍스 아메리카가 어떻게 될지 세계경제가 어떻게 될지는 불확실하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미국의 패권은 끝났다는 것이다. 팍스 브리태니카를 지탱하는 세 기둥은 군사력과 산업력, 금융력이었다. 팍스 아메리카나를 떠받쳤던 것 역시 그 세가지였다. 그러나 영국이 그랫던 것처럼 산업경쟁력이 먼저 흔들렸고 이라크에서 군사력이 흔들린 다음 금융위기로 금융력도 흔들렷다.

“안정성은 국제거래에 널리 쓰이는 통화가 갖추어야 할 필수조건이다. 용도가 지급수단이든, 회계수단이든, 가치저장수단이든 간에 안정성은 수출자와 수입자 그리고 투자자가 가장 먼저 찾는 조건이다. 금융위기만큼 통화의 지위에 치명적인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는 일은 없다. 금융위기가 불거지면서 달러의 국제적 역할에 대한 의문이 자연스럽게 제기되었다. 미국이 고품질 금융상품의 발행국으로서 경쟁우위를 가진다는 주장은 이제 농담으로 치부되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고품질의 상품을팔고 우리는 그들에게 고품질의 금융자산을 판다’라는 말은 ‘그들은 우리에게 유독성 장난감을 팔고 우리는 그들에게 유독성 채권을 판다’는 말로 대체되었다.”

저자는 지금의 미국이 1차대전 직후 영국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16-17세기 유럽 최강국이었던 스페인 제국은 한때 세계 금과 은 총량의 80%를 가진 가장 부유한 국가였다. 다른 국가들은 모두 스페인을 위해 일했다. 그러나 한 국가가 이토록 많은 부를 가지면 그 국가는 부를 창조하는 능력을 잃어버린다.” 쉽게 돈을 벌게 된 ‘스페인 제조업자들은 더 이상 힘든 생산활동을 하지 않았다. 손에 들어온 주문을 다른 국가에 대량으로 하도급을 주었다. 영국의 방직업, 네델란드의 조선업, 이탈리아의 농장업과 북유럽의 어업이 스페인을 대신해 제품을 만들었다. 스페인을 부를 믿고 무절제한 소비와 대외 확장만 추구하다 생산이 위축되고 재정이 파탄나고 실업률이 급증했다.

세계의 맹주 자리를 차지한 영국은 스페인 제국과 같은 기로에 섰다. 부지런하고 성실한 노동으로 계속 부를 창출할 것인가 아니면 군사패권과 금융패권으로 다른 사람의 노동성과를 나눠가질 것인가? 이미 많은 부를 거머쥔 영국인들은 스페인처럼 후자를 선택했다.

역사는 놀랄만큼 반복된다. 미국은 200년 동안 고통스런 노동을 통해 거대한 부를 창조한 후 스페인과 영국처럼 점차 부의 창조능력을 상실했다.미국은 달러 발행 특권을 행사하면서 세뇨리지 수익과 자본 투자수익을 얻는 데만 혈안이 돼 귾임없이 자국 산업을 외국에 수출하고 있다. 미국인은 거액의 이익을 얻는 대가로 부의 창조능력을 상실하고 있다.” (쑹홍빙)

패권의 세 기둥 가운데 경제력은 나머지 둘의 뿌리이다. 그러나 경제력이 흔들린다고 나머지 둘이 당장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1차대전 이전 영국이 그랬던 것처럼.

“미국은 1870년에는 총생산에서, 1912년에는 총수출에서 영국을 따라잡았다. 그래서 미국이 계속 런던의 무역금융에 의존하고 달러가 국제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언뜻 이해되지 않는다.” 그 나라의 금융력은 그 나라 통화에 대한 수요에 기초한다. 그 나라 통화의 수요가 있다는 말은 그 나라에서 사올 것이 많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규모가 크고 경쟁력있는 경제라면 그 국가의 통화에 대한 수요가 많을 수 밖에 없고 통화에 대한 수요는 그 나라 금융서비스에 대한 수요를 낳는다. 영국이 금융패권을 쥘 수 있었던 것도 산업혁명 이후 월등한 경제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왜 유럽 국가들은 줄지어 1870년대에 금본위를 채택했는가?” 답은 간단하다. “세계적 경제대국이자 해외금융의 주요원천인 영국이 금본위제를 채택”했기 때문이다. 영국이 금본위를 채택했기 때문에 최대교역국이었던 “유럽 2위의 산업국 독일도 영국을 따라 1871년 금본위제를 채택했”고 다른 나라들도 그 뒤를 따랐다. (저자의 ‘글로벌라이징 캐피털)

2차대전 이후 달러가 파운드의 지위를 대신한 것은 당연했다. “2차대전 후 25년 동안 달러는 최고의 지위를 누렸다. 2차대전을 통해 국력이 강화된 나라는 미국뿐이었다. 미국경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으로 성장햇다. (고립된 소련을 빼면) 미국은 세계 산업생산의 절반을 차지했다. 달러는 전 세계에 걸쳐 자유롭게 거래되는 유일한 통화가 되었다.”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1차대전 후에도 미국은 그런 위치였다는 점이다. 왜 달러는 파운드의 지위를 더 일찍 차지하지 못햇는가? 저자는 그 이유를 닉슨 쇼크 이후에도 달러가 패권을 유지한 까닭과 같다고 말한다. 미국의 금융력, “런던에 비해 뒤떨어지는 경쟁력이었다. 런던에는 쉽게” 깊고 넓은 “투자시장이 있었다. 그래서 리스크가 줄고 이율은 낮아졌다. 투자자들이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에 은행들은 안정된 가격에 매매할 수 있었다. 전문용어로 말하자면 런던 시장은 풍부한 유동성을 제공한 셈이다.” 시장에 유동성이 풍부하면 그에 비례해 불확실성이 줄어든다. “이러한 투명성은 더 많은 투자자를 런던으로 끌어들여 유동성을 늘렸다.”

그러나 뉴욕은 전혀 그런 시장을 갖고 잇지 않았다. 그 때문에 “미국의 월등한 경제규모에도 불구하고 1차대전 전까지 프랑스 프랑, 독일 마르크, 스위스 프랑, 네델란드 길더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리라, 벨기에 프랑, 오스트리아 실링이 달러보다 나은 대접을 받았다. 또한 외환보유고 점유율을 보면 파운드가 약 절반, 프랑스 파랑이 30%, 독일 마르크가 15%였다. 달러는 보유통화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조차 못했다.”

런던의 경쟁력 때문에 경제규모에서 미국과 독일이 영국을 추월한지 오래엿지만 여전히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영국의 파운드였다.

그러나 금융력은 경제력을 따라가게 마련이다. “1차대전 동안 미국은 세계의 순수창과 곡물창 역할을 하면서 엄청나게 수출을 늘렸다. 미국의 다국적기업들은 남미와 아시아로 사업영역을 넓혔다. 덕분에 미국은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또한 1차대전은 유럽 무역금융시장의 수급을 왜곡했다. 유럽정부들이 전시동원체제에 돌입하면서 무역금융시장을 운영할 자본이 귀해졋다. 독일과 영국 은행들은 수입에 필요한 환어음을 인수해달라고 뉴욕은행들에게 요청했다. 뉴욕은행들은 신용을 제공했다. 국제금융시장의 지형이 바뀐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1915년부터 금 대비 파운드의 가치가 심하게 요동쳤다. 이러한 불확실성은 파운드의 매력을 크게 떨어트렷다. 여전히 금에 확고하게 연동된 달러라는 대안을 감안하면 파운드이 매력은 더욱 떨어졌다. 그래서 미국뿐만 아니라 남미와 아시아의 무역업자들도 달러로 거래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1920년대 후반기에 달러 표시 해외 환어음의 액수는 파운드 표시 액수보다 두배나 많았다. 1924년에는 다른 나라들의 달러 보유액이 파운드 보유액을 앞질렀다.”

같은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1차대전 전만 하더라도 파운드의 지위는 확고하게 보였고 런던의 경쟁력은 절대적이었다. 국제통화로서 파운드의 현직 프리미엄은 절대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파운드가 1차대전으로 타격을 받은 것처럼 달러도 고질적인 재정적자로 타격을 받았다. 또한 연준이 뉴욕에 환어음시장을 육성하려고 노력했듯이 중국정부도 상하이를 국제금융중심지로 육성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면 의문점은 왜 달러가 1970년대가 아니라 지금 몰락의 징후를 보이느냐이다. 신브레튼우즈 체제가 흔들리는 이유인 미국의 적자는 브레튼우즈 체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상황은 지금과 유사한 점이 많았다. 현재의 중국과 인도처럼 빠르게 성장하던 유럽과 일본은 불가피하게 달러를 축적하기 시작햇다. 그들은 달러가 계속 가치를 유지할 수 있을지 걱정했다.”

그러나 “지금이 1960년대와 다른 점은 달러의 대안이” 없었다는 것이다. 닉슨 쇼크 이후에도 “환율은 달라졌지만 국제통화체제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다른 통화들은 여전히 달러에 연동되었다.” 1970년대는 달러에 유리하지 않았다. 연이은 “평가절하, 인플레 등은 달러의 위상을 전혀 높이지 못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달러로부터의 이탈은 일어나지 않았다. 석유거래 통화를 늘리겠다는 OPEC의 논의도 흐지부지되었다.해외 정부와 중앙은행들도 다른 통화로 옮겨가는 실질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달러의 지배가 계속되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최대의 경제대국이자 교역국이었으며 가장 큰 금융시장을 갖고 잇었다. 주요 경쟁통화인 마르크를 발행하는 독일의 경제규모는 미국에 비하면 작은 수준에 불과했다.” 경제규모가 작다는 것은 그 경제의 통화로 가능한 금융시장의 크기도 작고 금융시장이 작기 때문에 그 통화로 살 수 있는 금융상품도 작다는 말이다. 독일은 “그래서 중앙은행과 해외투자자들에게 매력적인 시장이 아니었다.” 사정은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대안이 없다면 달러가 어떤 어려움을 겪어도 문제 될 것이 없다. 브레튼우즈 체제가 무너진 이후에 그랫듯이 달러에 대한 우려는 기우에 그칠 뿐이엇다.”

그러나 1999년 유로와 함께 사정이 달라졋다. 경쟁자가 나타난 것이다. “지금이 1960년대와 다른 점은 달러의 대안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해외 정부와 중앙은행들이 보유고를 점진적으로 분산시키면서 부드럽게 전환 과정을 진행할 수 있다. 유럽중앙은행은 해외 정부와 중앙은행들에게 유로를 공급할 수 있다. 중국인민은앻 역시 위안을 공급할 수 있다. 전환과정에서 변동환률제로 묶인 유로와 달러의 상대적 가치도 조금씩 조정될 것이다. 이 경우 달러는 국제금융시장과 국제통화체제의 안정성을 위협하지 않고도 절하될 수있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달러의 국제적 역할이 거의 줄어들지 않앗다는 것이다. 국제거래에서 다른 통화의 사용은 뚜렷하게 늘어나지 않았다. 외환시장에서도 달러의 지위는 굳건하다. 달러는 85%의 외환거래에 사용된다.”

아직 신브레튼우즈 체제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전히 예를 들어 “중앙은행들이 보유통화를 다변화하려면 달러 외 다른 통화로 표시되는 채권시장과 예금시장이 미국만큼 풍부한 유동성을 가져야 한다.” 유력한 경쟁자인 유로 채권시장은 “미국보다 작고 유동성도 부족하다” 더 심각한 문제는 “유로가 나라 없는 통화라는 것이다. 단일 정부의 부재는 달러에 대항하는 유로의 힘을 약화시키는 주요인이다. 유럽에 경제적 문제가 생기면 회원국 사이의 복잡한 의견조율을 거쳐야 한다. 가령 한 나라가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은 재정위기에 빠지면 회원국들이 힘을 모아 도와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회원국들이 부담을 어떻게 나눌지 합의한 다음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이러한 과정은 신속하게 이루어지기 어렵고 합의가 결렬될수도 있기 때문에 예상 밖의 사태에 대한 우려가 처진다. 그래서 다른 나라의 중앙은행들은 섣불리 유로를 축적하기 어렵다. 그리스에서 발생한 금융위기가 단적인 예다.”

그러면 위안화는 어떨까? 현재로선 위안이 달러의 지위는 고사하고 지역통화로 자리잡는 것도 힘들어보인다. 중국은 전후 미국이 그랬던 것처럼 “지속적인 무역흑자를 내는 동시에 위안의 국제적 활용도를 높이려 하고 있다. 다른 나라들이 위안을 확보하려면” 미국정부가 전후 마셜플랜으로 유럽에 달러를 공급하고 미국기업들이 해외투자를 했던 것처럼 “중국도 대출이나 투자를 해야 한다. 실제로 중국은 이러한 움직임을 보이고 잇다. 중국정부가 앞으로 어떤 변화가 올지 알고 잇다는 증거다.

위안화가 국제거래에 폭넓게 사용되면 중국은 국제수지를 관리하기 위해 굳이 외환보유고를 둘 필요가 없다. 미국처럼 필요한만큼 위안화를 더 찍어내면 그만이다.” 중국정부는 2020년까지 위안화를 국제통화로 자리잡게 할 생각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선 많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중국이 위안화의 위상을 높이려면 자본시장을 개방하고 풍부한 유동성을 제공해야 한다. 그러면 상품거래뿐만 아니라 금융거래에서도 자유롭게 위안화를 사용할 수 있다. 문제는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하냐다. 금융시장의 안정성과 자유화를 조화시키려면 까다로운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우선 금융시장의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 또한 은행을 영리화하고 감독과 규제를 강화하고 합리적인 통화정책 및 재정정책을 추진하며 더 큰 규모의 자본흐름을 수용할 수 잇도록 환율의 유연성을 확대해야 한다. 다시말해 중국은 은행대출과 고정환율제에 기반을 둔 성장정책을 포기해야 한다. 이일은 결코 쉽지 않다.” 예를 들어 “상하이에 전면 개방된 위안 표시 채권시장이 열린다면 중국정부가 자금흐름을 관리하는데 지장이 생긴다. 중국인들은 위안화로 수익이 보장되는 채권을 예금의 매력적인 대안으로 볼 것이다. 그려면 중국식 성장모델의 기반이 위협받게 된다.” 쉽지 않고 빨리 되기도 힘들다. 그러므로 “위안이 달러를 대체한다는 것은 예상가능한 시나리오가 아니다”는 것이 대다수의 의견이다. 그러나 1차대전 전후로 “미국이 10년이 안되는 기간에 달러를 국제통화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중국정부가 세운 목표는 이미 달성한 전례가 있다.” 그리고 달러가 국제통화로 데뷔한 때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이 매우 비슷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저자는 위안이 지역통화 이상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2020년까지 10년동안 연 7%로 “성장한다 해도 GDP가 미국의 절반에 불과하다 결국 위안화는 2020년에도 달러보다 작은 도약대를 가질 수 밖에 없다. 위한표시 채권시장의 유동성도 달러 표시 채권시장에 견줄 바가 못될 것이다. 그만큼 위안화의 국제보유고 비중은 제한될 것이다. 결국 유로 보유고가 유럽지역에 집중되듯이 위안 보유고는 아시아 지역에 집중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국제통화체제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저자의 답은 “국제통화의 다변화다. 세계경제가 갈수록 다극화되면서 달러의 독점체제를 허물고 잇다.” 언제 그렇게 될지는 달러의 “현직 프리미엄의 정도에 달렸다. 국제통화를 향한 경쟁은 현상유지 편향의 영향을 받는다. 수출자와 수입자 그리고 채권 발행자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통화를 쓰는 것이 이득이다. 물론 현상 유지의 대상은 달러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달러의 독점은 깨질 것이다. “21세기의 세계경제 규모는 풍부한 유동성을 가진 복수의 금융시장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하다. 달러 유로 위안이 주요 국제통화로 나서겟지만 시장을 전부 차지하지는 못할 것이다. 세개의 국제통화를 수용할 여지가 있다는 것은 곧 더 많은 국제통화를 수용할 여지가 있다는 뜻도 된다.” 저자는 그 후보로 인도의 루피와 브라질의 헤알을 (조심스럽게) 추천한다.

물론 복수통화가 달러의 몰락일 필요는 없다. 파운드 시절에도 파운드는 독점을 누리지 못했다. 그러나 미국의 국제적 위상을 약화시킨 근본적인 요소가 달러의 국제적 위상도 약화시키고 있다. 그것은 바로 세계의 다극화다. 더 이상 세계 총생산의 대다수를 차지하지 않는 나라의 통화인 달러를 국제교역의 청구와 결제에 사용해야 하는 이유는 명백하지 않다. 달러가 외환보유고의 대다수를 차지해야 하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이다. 세계경제가 다극화됨녀 통화체제도 다극화되는 것이 논리적이다.”

지금까지 “미국은 ‘눈물을 흘리지 않고도 무역적자를 감당할 수 있었다’. 해외의 상품과 기업을 사들이는데 필요한 자원을 그냥 찍어낼 수 있는 능력은 데스텡 프랑스 재무장관이 불평했던 바로 그 과분한 특권(이책의 원제목)이었다.” 그러나 경쟁은 더 이상 그런 특권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달러가 경쟁에서 이기지 말라는 보장은 없다.”

“역사적으로 대표적 국제통화는 언제나 대표적 강대국이 발행했다. 강대국은 국제관계를 결정할 군사력과 통화를 뒷받침할 정치력을 가진다. 미국은 2차대전 후 연합국들에게 달러를 떠받치라고 요구할 수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더 이상 그런 힘을 가질 수 없을 것이며 달러의 특권은 사라질 것이다. 물론 앞으로도 달러는 국제통화로 남을 수 잇겠지만 그러기 위해선 예전과 달리 “재정 건전성을 회복해야 할 뿐만 아니라 경제 전반의 기초체력을 강화해야 한다. 영국이 2차대전 후에 초강대국의 지위를 잃은 것은 순채무국이 되었기 때문이라기보다 경제적 성과가 빈약하여 국가재정이 곤궁해졌기 때문이다. 지정학적 영향력을 근본적으로 좌우하는 것은 실상 환율이나 대외부채가 아니라 경제의 기초체력이다. 다시 말해서 미국이 현명하게 대처하면 최악의 사태를 피할 수 있다. 좋은 소식은 달러의 운명이 중국이 아니라 미국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평점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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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누구십니까? | 인문/사회/역사 2011-10-08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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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신의 역사 1

카렌 암스트롱 저/배국원,유지황 공역
동연출판사 | 1999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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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동기 중에 신학생이 있었다. 군대에 있을 때 서로 많은 말을 했었는데 그 친구가 들려준 이야기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중세에 고명한 수도승이 있었다. 어느 날 지나다 그 수도승이 기도하는 것을 들으니 이런 내용이더라는 것이다. “신이시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같은 말만 계속 반복되는 기도였다고 한다. 지금도 그 친구가 신앙의 길을 걷고 잇는지는 모르겠다. 그 친구가 그 이야기를 들려주며 하고 싶었던 말은 그 질문은 기독교인이면, 누구나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며 해결되지 않는 질문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17살에 수녀가 된 저자를 떠나지 않았던 의문이기도 했다.

“나는 결코 선지자와 신비주의자들이 묘사하였던 그 신을 만나지 못하였다. ‘신’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언급하게 되는 예수 그리스도도 내게는 고대 말기와 밀접하게 연된 전적으로 역사적인 인물로만 생각되엇다. 나침내 나는 아쉬워하며 수녀원 생활을 떠나야 했고 좌절과 부적응이라는 짐을 벗어버리자 신에 대한 신념이 조용히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수녀원을 떠난 이후 저자는 인간은 종교적 인간이라는 것을, 종교는 인류에게 자연적이라는 것을, 신이란 인간 스스로 언제나 다시 창조되어온 잠정적인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것들을 삼십여년 전 내가 수녀원 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배웠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가지게 되었다. 만약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세 종교의 탁월한 신앙가들로부터 하늘 위에서 세상으로 강림하는 신을 기다리는 대신 내 자신을 위하여 신에 대한 감각을 의식적으로 창조해야 한다는 것을 들었더라면 나는 많은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토록 감동을 선사하는 시나 음악처럼 신이 창조적 상상력의 산물임을 일깨워 주었을 것이다. 종교는 극히 실용적이다. 우리는 앞으로 어느 특정한 신 개념이 논리적, 과학적으로 건전한 것인지보다 얼마나 유용한지가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게 될 것이다. 더 이상 효능이 없어지자마자 신 개념은 변화하며 어떤 때는 아주 급진적으로 달라지기도 한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시대 이전의 대부분 유일신론자들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진의 신 관념들이 신성불가침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잠정적이라는 것을 알고 잇었기 때문이다. 신 관념은 전적으로 인간이 만든 것이고 그 관념들이 상징하는 표현불가능한 실재와는 전혀 분리된 것이다.”

이책은 그 관념의 역사이다. 아브라함과 모세 그 후의 선지자들의 신 그리고 예수의 신은 모두 다른 신이엇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 신은 인간으로선 표현불가능한 것이기에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인간이 초월을 경험한다는 것은 삶의 진리이다. 그러나 거의 모든 주요 종교는 이 초월성을 일반적인 언어 개념으로 표현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유일신론자들은 이 초월성을 ‘신’이라고 부르면서도 중요한 단서조항을 덧붙였다. 예를 들어 유대교는 신의 신성한 이름을 발음하는 것을 금했고 이슬람은 신을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그리는 것을 금했다. 이러한 규율은 곧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실재가 인간의 모든 표현을 초월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징표였다.”

저자는 묻는다. “미국인의 99%가 ‘신을 믿는다’고 답했다. 문제는 과연 그들이 믿는다는 신이 어떤 ‘신’인가 하는 점이다. 신들을 창조하는 작업은 인간이 항상 해 왔던 일인 듯하다. 어떤 종교적 관념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면 곧 다른 것으로 대체되어 왔다.” 그 예가 지고신 또는 천신이라 저자는 말한다 (이 예는 저자의 이후 저서에도 반복되어 언급된다) 그러나 만물의 창조자로 여겨진 그 신은 인간에겐 너무 먼 존재였다 (중국의 天, 한국의 하느님도 그 예라 생각된다) “인류학자들에 따르면 이런 신은 너무나 소원하고 너무 고귀한 탓에 결과적으로 열등한 영들과 더 접근가능한 신들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신화를 만들고 신들을 경배했던 것은 자연현상에 대한 어떤 실제적인 설명을 찾고자 함이 아니다. 상징적 이야기나 동굴 속의 벽화나 조각들은 그들이 경험한 경탄을 표현하고 이 압도적인 신비를 자신들의 삶과 연결시키기 위한 노력이었다.” 종교는 거룩함(聖)의 느낌을 표현한 것이다. ”우리는 그런 신화들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너무 복잡하고 파악하기 어려워 다른 방법으로는 표현하기 힘든 실재를 묘사하기 위한 비유적 노력이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고대인들은 이러한 신적인 삶에 참가함으로써만 자신이 진정으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같다.”

그러나 하늘님이나 天 또는 고대 팔레스타인의 만신전에 기록된 최고신 엘은 너무 먼 존재였다. 팔레스타인에 널리 받아들여진 신은 그보다 실제적인 힘을 가진 더 낮은 위계의 얌-나하르(바다와 강의 신)나 바알(비를 내리는 폭풍의 신) 등이었다.

“가나안에서 엘은 결국 최고신 대부분과 같은 운명을 맞아 기원전 14세기에 엘 숭배는 시들해지기 시작햇다. 대신 사람들은 역동적인 폭풍의 신이자 신성한 전사인 바알을 섬기기 시작했다. 기원전 6세기까지 이스라엘의 종교가 사실상 이 지역의 다른 민족들이 섬기는 종교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축의시대) “이스라엘의 종교는 실용적이어서 우리가 걱정하는 것 같은 사변적인 구체적 사항에는 별반 관심이 없었다. 따라서 우리는 아브라함이나 모세가 오늘날 우리와 비슷한 방식으로 그들의 신을 믿었으리라 가정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초기 족장이었던 아브라함, 그의 아들 이삭, 그의 손자 야곱이 단 하나의 신을 섬긴 유일신론자였으리라 짐작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닌 것같다. 실제로 이들 초기 히브리인은 차라리 가나안의 이웃들과 여러 종교적 신념을 같이 나눈 ‘이방인’이라고 하는 편이 더욱 정확할 것같다. 그들은 분명히 마루둑, 바알, 아나트 등과 같은 신의 존재를 믿었다. 혹은 그들이 모두 동일한 신을 섬기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브라함의 신, 이삭의 ‘무서운 자’나 친족’, 야곱의 ‘전능한 자’는 모두 다른 세명의 신이었을 수도 있다.”

저자는 아마도 아브라함의 신은 가나안의 최고신인 엘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엘은 최고신일 뿐이므로 하위신인 바알 등의 다른 신을 배척할 필요가 없다. “이 신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엘 샤다이(산악의 신)라고 소개하는데 이는 엘의 전통적 칭호 중 하나다. 엘은 그들에게 족장이나 두목처럼 자상한 충고를 하고 방랑생활을 인도했으며 누구와 결혼할 것인가를 말해주며 꿈속에 나타나 계시했다. 가끔 그들은 인간의 모습을 한 신을 보았다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이는 훗날 이스라엘인에게 저주받을 관념이 되고 만다.” 후대 8세기 무렵의 성서기자들이은 “그 누구도 신을 이와 같은 방법으로 ‘보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은 이것이 충격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은 족장들이 신과 가까웠다는 옛날 이야기들이 적절치 못하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현현에 담긴 의미는 신과의 은밀한 접촉을 신성모독으로 생각했던 후대 유대교의 유일신론보다는 오히려 일리아드의 정신과 더 가깝다고 할 수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신에 더 가까웠던 아브라함의 신은 출애굽의 신과 다르다. “출애굽의 신은 잔인하고 편파적이며 살인적인 신이며 ‘야웨 사바오트(군대의 신)’라고 알려지게 될 전쟁의 신이기도 하다. 이 신은 심히 편협한 성격이어서 그가 좋아하는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동정하지 않는 단적으로 부족적인 신이다. 오늘날의 일부 학자들은 출애굽 이야기가 이집트의 (팔레스타인) 종주권과 가나안의 그 동맹자들에게 대항하여 일으킨 농민들의 성공적인 반란을 신화적으로 각색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출애굽에 대한 이런 해석은 저자의 이후 저작에 반복된다.

저자는 ‘축의 시대’에서 엘에서 전쟁의 신 야웨로 신도 신의 성격도 바뀐 이유를 암흑시대 때문이라 본다 (암흑시대에 대해선 ‘축의 시대’ 리뷰에서 상세히 다루었다). “암흑시대에는 축의 시대 민족 가운데 둘이 나타났다. 미케네의 폐허에서는 새로운 그리스 문명이 탄생했으며 가나안의 고지대에서는 이스라엘이라 부르는 부족 동맹체가 나타났다. 가나안의 붕괴는 매우 점진적이었다. 기원전 15세기 이후 이집트 제국의 일부였던 해안 지대 평원의 넓은 도시 국가들은 이집트가 물러나면서 하나씩 붕괴했다. 이 도시들의 몰락으로 기원전 1200년 직전 고지대에 새로운 정착지 네트웤이 형성된다. 이 네트웤은 북쪽으로 갈릴리 남부, 남쪽으로 베르셰바까지 뻗어있었다.” (축의 시대)

출애굽은 이집트 땅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단지 이집트가 가나안에서 물러나는 과정을 그렇게 신화화했을 뿐이라는 것이며 이스라엘인은 해안지대의 혼란을 피해 고원지대로 이주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학자들은 이집트 대탈출 이야기는 역사적 근거가 없는 것으로 대체로 합의를 보았다. 성경의 가장 오래된 부분들은 야훼가 원래 남쪽 산들의 신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다른 부족들이 남쪽에서 고지대로 이주하면서 야훼를 데려왔을 가능성이 있다. 해안의 도시 국가들에서 이집트의 지배를 받으며 살았던 이스라엘인은 자신들이 실제로 이집트로부터 해방되었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이스라엘인이 원래 가나안 원주민이면서 외지인이라 주장한 것은 그들이 가나안 사회에서 주변인이었기 때문일 것이라 저자는 추측한다. “고고학자들은 고지대에서 상당한 사회경제적 분열, 심한 인구변화, 경쟁하는 종족집단들이 200년에 걸쳐 펼친 사활을 건 투쟁의 증거를 발견했다.” 이스라엘인을 만든 집단과 부족들은 “모두 숙고 끝에 가나안의 오래된 도시 문화에 등을 돌리겠다는 용감한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진실로 외부인들이었으며 주변부에서 산 경험은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외부 기원설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반가나안 논쟁에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여러 민족으로 이루어진 가족에서 신참자였으며 (암흑시대의) 트라우마와 격변의 산물이었고 늘 주변으로 밀려날 위협에 시달렸다. 이스라엘인은 이에 반발하는 정체성과 서사를 발전시켜 나갔다.” (축의 시대)

그들이 이주한 고원의 삶은 그들이 떠나온 해안지대만큼이나 폭력적이엇다. “초기의 정착자들은 자신들이 식민지로 만들려는 땅을 차지하려고 싸워야 했을 것이다. 성경에는 요르단 강변에서 거둔 위대한 승리의 기억이 보존되어 있다. 남쪽으로부터 이주하여 모압의 영토를 통과하려던 부족들은 그들이 강을 건너는 것을 저지하려던 현지의 집단과 싸워야 했을 것이다. 정착민들은 일단 한 마을에 자리를 잡으면 이웃들과 공존하려고 노력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갓 태어난 사회의 안전을 위협하는 사람들에 대항하여 단결해야 했다. 포위를 당한 상태에서 늘 적의 공격에 대비하여 전쟁을 준비하며 살게 된 사람들은 전투적 믿음을 발전시켯다.” (축의 시대)

이런 환경에서 그들이 섬긴 야훼는 당시 가나안에서 유행했던 바알과 별 다를 것이 없었다. 당시 인도로 침입한 아리아인들이 그랬고 그리스인들이 그랫듯이 폭력이 난무하는 영웅시대(또는 암시대)의 신은 힘과 전쟁의 신이엇다. 폭풍의 신인 바알은 “전차를 타고 하늘의 구름 위를 돌아다녔으며 다른 신들과 싸움을 했고 생명을 주는 비를 내렸다. 초기에 야훼 숭배는 바알 숭배와 아주 흡사햇다. 성경의 아주 오래된 텍스트에서는 야훼도 바알처럼 신성한 전사로 등장한다. 이 시절 부족들은 폭력적이고 위험한 삶을 살았으며 그들의 신의 지원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축의 시대) 그렇기에 야훼는 그 당시의 다른 신들처럼 잔인하고 편협한 신이었다.

“유월절 축제는 예리코 공격에서 시작된 약속의 땅을 차지하기 위한 성전을 준비하는 행사였다. 예리코의 성벽은 기적적으로 허물어지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소건 양이건 나귀건 모조리 칼로 쳐 없애버렸다.’ 야훼는 전쟁의 신이었다.” (축의 시대) “야훼가 진정 아브라함의 신이라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 신은 분명히 아브라함과 친구처럼 마주 앉아 함께 음식을 나눴던 신과는 다른 모습이다. 야훼는 공포를 자아내게 하고 인간과 거리를 두고 있어야 함을 주장한다. 고대의 천신들이 인간의 관심사를 돌보기에는 너무 멀리 잇는 듯 여겨졌기에 새로운 신들인 바알, 마르둑, 대지의 여신은 인간과 친근하도록 개념화되었는데 이제 야훼는 다시 한 번 인간과 신의 간극을 벌려 놓은 것이다.” 이스라엘인이 아직 일신교도가 될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야훼는 특별한 신이었지만 그들은 다른 신들의 존재도 인정하고 그들을 섬겼다. 야훼가 유일한 신이 되는 것은 기원전 6세기 말이다. 최기에 야훼는 신들의 모임에 속한 ‘신성한 자들’ 또는 ‘엘의 아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축의 시대) “그들은 전쟁 때 야훼의 능숙한 군사적 보호가 필요할 때는 그 언약을 기억했으나 평온한 시절에는 옛 관습을 쫓아 바알, 아나트, 아쉐라를 섬겼다.” “초기 이스라엘 사람들이라면 신성함을 하나의 신적인 존재에만 한정짓는 것을 의아하게 여겼을 것이다. 다수는 다른 형태의 신성함도 원했다. 이는 결국 야훼만을 섬기고 싶어하는 소수와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이스라엘과 인도에서도 새로운 적대적 땅에서 하나의 사회를 유지해 나가는 일의 불안정성과 어려움 때문에 믿음에 폭력과 호전적 이미지가 들어왔다. 그러나 사람이란 높은 수준의 긴장을 무한히 유지하며 살 수는 없는 법이다.” (축의 시대)

미치광이 율법학자 엘리야가 등장하는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다. “야훼 종교가 결국은 대중적으로 인기가 높은 이방종교에 흡수될 위험이 언제나 존재했다.” “야훼는 전사신이었다. 그는 농업이나 다산의 전문가가 아니었다. 따라서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풍년을 보장받으려고 당연하게 바알과 아나트의 고대제의를 거행했다. 바알은 땅을 비옥하게 하는 신이엇기 때문이다.” (축의 시대)

엘리야가 바알과 야훼의 신성력 대결에서 바알의 사제 450명을 학살한 사건은 유명하다. 미치광이 율법학자라 불릴 충분한 이유이다. 엘리야가 대표한 것은 ‘야훼 유일 운동’이었다. 그가 바알을 부정한 것은 아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페니키아의 신이지 이스라엘의 신이 아니란 말이다.

그러면 엘리야가 만난 신은 어떤 신이었는가? 저자는 그것을 ‘감추어진 신성’이라 부른다. “’ 이제 곧 나 주가 지나갈 것이니, 너는 나가서 산 위에 주 앞에 서 있어라, 크고 강한 바람이 주 앞에서 산을 쪼개고 바위를 부수었으나 그 바람 속에 주깨서 계시지 않았다. 그 바람이 지나고 난 뒤에 불이 났지만 그 불 속에서도 주께서 계시지 않았다. 그 불이 난 뒤에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가 들렸다. 엘이야는 그 소리를 듣고서 외투 자락으로 얼룩을 감싸고 나가서 동굴 어귀에 섰다.’ 광충과 노도와 같은 거친 자연 현상 속에 거한다고 여겼던 이교의 신들과 달리 야훼는 초연한 영역에 거하는 신이었다. 즉 야훼는 말로 표현되 ㄴ침묵이라는 역석처럼 거의 감지할 수 없는 미세한 바람 소리를 통해 경험되엇다.” “이것은 초월의 순간이다. 야훼는 자연 세계에 내재한 신성을 드러내는 대신 분리되어 다른 존재가 되었다.”

저자는 엘리야의 신은 당시 달라진 사회조건을 반영한다고 말한다. “새로운 번영이 구가되면서 상인계급이 출현했다. 왕과 사제, 신전과 왕궁으로부터 시장으로 권력이 이동했다. 새로 형성된 부는 지성적 문화적 융성으로 이어졌고 개인 양심의 발달로도 이어졌다. 도시에서 변화의 행보가 가속화됨에 따라 불평등과 착취가 더욱 두르러졌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려던 흐름이 축의 시대를 형성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야훼 유일 운동은 그중의 하나였다는 것이다.

엘리야의 야훼는 “다른 신들이 사회적 정의라는 근본적 의무를 게을리 했다고 비난햇다. 엘리야도 가난하고 억압당하는 자들에 대한 동정과 배려를 강조햇다.” 그러나 “사회정의에 대한 관심은 새로운 발전도 아니었으며 이스라엘과 유다에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약자 보호는 오래 전부터 고대 근동 전역의 공통된 정책이었다. 중동 전역에 걸쳐 정의는 종교의 핵심적인 기둥이었다.” 오히려 엘리야의 야훼는 그 초월성 때문에 구분된다. 이는 저자가 축의 시대의 ‘초월적 돌파’라 말하는 성격을 선취하는 것이다.

“오늘날 거룩이란 말을 도덕적으로 탁월한 상태를 가리킬 때 사용한다. 그러나 히브리어의 카도쉬는 도덕성 그 자체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타자성 곧 철저한 분리를 의미한다. 시나이산에 나타난 야훼의 현현은 인간과 신적 세계 사이에 갑작스럽게 벌어진 엄청난 간극을 강조했다. 이제 천사들은 ‘야훼는 다르시다! 다르시다! 다르시다!’라고 외쳤다. 이사야는 인간에게 주기적으로 강림하여 황홀과 두려움으로 인간을 압도하는 바로 그 초자연적 감정을 경험했다. 이러한 전율하는 경험은 ‘두렵고 황홀한 신비’이다. 두려운 것이란 그것이 일상적인 위안으로부터 우리를 갈라 놓는 심각한 충격으로서 찾아오기 때문이고 황홀한 것이란 그것이 역설적으로 제어할 수 없는 매력을 발산하기 때문이다. 이 압도적인 경험은 음악이나 성적인 것에 비교되며 말이나 개념으로 표현될 수 없다. 실재에 관한 우리의 일상적인 도식에 기초하지 않는 ‘전적인 타자’에 대한 이런 감각은 어떻게 보면 있다고 표현될 수조차 없다. 축의 시대에 새롭게 정립된 야훼는 아직도 군대의 신이엇지만 더 이상 단순히 전쟁의 신은 아니었다. 또한 야훼는 이스라엘만을 열정적으로 편애하는 단순한 부족신도 아니었다. 이제 야훼의 영광은 더 이상 약속의 땅 이스라엘에 국한되지 않고 세계에 가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초월해야 할 대상인 탐욕, 증오, 자기 중심주의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초월해서 나아가야 할 목표인 신을 규정하는 데 집중하면 공격성과 호전적인 배외주의를 드러낼 위험이 생긴다. 자유는 축의 시대의 핵심 가치였다. 따라서 훗날 축의 시대 현자들 가운데는 엘리야의 고압적 전술을 ‘해롭다’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도 않은 영성응ㄹ 강요하는 것은 역효과를 낳았다. 본진적으로 규정불가능한 초월을 두고 교조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축의 시대)

그러나 이후 이스라엘인은 이러한 신을 받아들였고 그들은 신의 실재에 대한 “아주 독창적인 개념”을 발전시킨다. “그것은 이 신과의 경험이 곧 한 인격과의 만남이라는 것이다. 그 무시무시한 타자성에도 불구하고 야훼는 말을 건네고 이사야는 대답할 수있었다. ‘우파니샤드’의 현인들에게는 이런 일을 상상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브라흐만과 아트만이 대화를 나눈다거나 만난다는 생각은 신을 지나치게 의인화하는 부적절한 것이다.”

이스라엘인들에게 야훼와의 계약은 인격과 인격의 만남으로 재정의된다. 그리고 “일신숭배는 예배협정이엇다. 야훼유일운동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야훼에게만 희생을 드리고 다른 신들에 대한 신앙은 무시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이런 입장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신성한 자원이 축소되고 친숙하고 사랑하던 신성한 의무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이제 중동의 신화적이고 종교적인 합의와 단절하는 외롭고 고통스러운 여행을 떠나는 길에 나설 참이엇다.” (축의 시대)

그리고 그렇게 외로운 길로 그들을 이끈 야훼는 이전의 야훼가 아니었다. 헤브라이 예언자들은 “신을 파열, 뿌리 뽑기, 박살내는 타격으로 경험하고 한다. 아모스는 신을 자신에게 익숙한 모든 것을 낚아채 가는 파괴적인 힘으로 경험햇다. 그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느꼈다. ‘사자가 으르렁거리는데 겁내지 않을 자 있겠느냐? 주 야훼께서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 전하지 않을 자 있겠느냐? 헤브라이 예언자들은 신비주의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인도의 현자들처럼) 스스로 시작한 규율잡힌 오랜 탐구 끝에 내부로부터 깨달음을 경험한 것이 아니었다.아모스의 경험은 인도나 중국의 축의 시대의 특징이라 할 수 잇는 깨달음과는 매우 달랐다. 그는 외부로부터 오는 어떤 힘에 사로잡힌 느낌을 받았다. 이힘은 그의 의식적인 삶의 정상적인 질서를 헝클어놓앗다. 이제 그는 자기 삶을 마음대로 할 수 없엇다. 야훼가 목적을 가지고 통제하는 에고의 자리를 차지하여 아모스를 완전히 다른 세계에 던져버린 것이다.” (축의 시대)

그렇게 자신의 말이 아니라 야훼의 말을 해야 했던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이 저지르는 불의”에 분노했다. “이사야는 외면적으로 제의를 준수하는 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느꼈다. 이스라엘인은 그들 종교의 내면적 의미를 발견해야만 했다. 야훼는 희생보다도 공감(compassion)을 더 원한다. 선지자들은 스스로 모든 것에 우선해야 하는 공감이라는 의무를 발견했다. 바로 이것이 축의 시대에 형성된 모든 주요 종교의 특징이 된다.

아모스는 사회정의와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한 최초의 선지자였다. 아모스의 계시를 통해 야훼는 억눌린 이들을 위해 대변하며 말 못하고 무기력하고 가난한 이들의 목소리가 되어 주었다. 아모스 예언의 첫째 줄에서 야훼는 유다와 이스라엘을 포함한 중도 모든 나라의 고통을 생각함녀서 예루살렘에 있는 그의 성전에서 사자후를 발ㄴ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인만큼이나 사악했다. 그들은 잔혹함이나 가난한 자들에 대한 압제를 모른 척했으나 야훼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계약은 신이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했음과 따라서 모두가 온당하게 취급되어야 함을 말하고 잇다. 신은 단순히 이스라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정의를 위하여 역사에 개입하신 것이다.” 그래서 야훼는 이스라엘을 부수기로 결정한다.

“아모스와 호세아는 둘 다 이스라엘 종교에 중요한 새로운 영역을 도입햇다. 그들은 올바른 윤리적 행동이 없으면 제의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주장했다.” 더 이상 참지 않는 야훼의 분노와 함께 “기원전 6세기에 이스라엘은 본격적으로 축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이번에도 변화의 촉매는 걷잡을 수 없는 충격적인 폭력의 경험이엇다. 새로운 축의 시대 전망을 창조한 사람들은 처음으로 바빌로니아에 끌려간 사람들이엇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시무시한 공허를 들여다보앗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었기에 몇몇 사람은 슬픔, 상실 모욕의 경험에서 새로운 전망을 창조할 수 있었다.” (축의 시대)

이 시대의 예언자는 예레미야이다. “그는 선지자가 되는 것을 싫어했고 자신이 사랑하는 백성을 저주해야 하는 것에 심히 부담을 느꼈다. 예레미아는 아모스나 호세아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이 자신을 장악했다고 느꼈다. 관절을 마비시키고 심장을 쪼개고 마치 주정뱅이마냥 비틀거리게 만드는 고통으로서 신을 채험했다. 선지자가 느꼈던 두렵고 황홀한 신비라는 이중적 체험은 동시에 거친 폭력과 달콤한 유혹으로 경험된다. 선지자들의 신은 이스라엘인에게 중동의 신화적인 사고 방식으로부터 스스로를 단절하고 당시 주류적 흐름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갈 것을 종용했다. 예레미야의 고뇌를 통하여 우리는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충격과 혼란을 의미햇는지 볼 수 있다. 야훼의 종교는 아직 내재적인 신적 원리인 아트만과 비교할 만한 것이 나타나지 않앗다. 야훼는 외부의 초월적인 실재로 경험되었던 탓에 덜 이질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어떻게든 인간화될 필요가 있었다.”

“예레미야는 뒤에 남은 사람들이 아니라 기원전 597년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구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 시련의 시기를 견디면 그들은 더 내적인 영성을 얻게 될 터였다. 야훼는 그들과 새로운 언약을 맺을 것이다. 이번에는 모세와 맺은 낡은 언약처럼 언약이 돌판에 새겨지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모든 것을 잃었기 때문에 내면으로 향했다. 각 개인은 자신을 책임져야 했다. 그들은 축의 시대의 더 내적이고 직접적인 앎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저자는 욥기가 이 당시에 쓰여졌을 것이라 추측한다. 이유없이 잔인해지는 신, 단지 재미삼아 내기 승부를 위해 인간을 갖고 노는 신, 그 신은 무엇인가? 바빌로니아에 끌려간 유대인 중 상당수가 믿음을 잃엇다. 그들에게 신은 알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에스겔의 환상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에게 건네진 두루마리에는 ‘신명기’ 저자들의 율법의 서와는 달리 분명한 지침이 없었다. 확실한 것은 전혀 없고 정리되지 않은 슬픔과 고통의 외침뿐이엇다.

성전 신앙에서 피는 핵심이었다. 그러나 이제 에스켈은 피를 살인, 무법, 사회적 불의의 상징으로 바꾸엇다. 제의는 이제 축의 시대의 새로운 도덕적 의무에 따라 해석되었다. 이 사회적 범죄들은 우상숭배만큼이나 심각했으며 이스라엘은 임박한 재난을 두고 남을 탓할 수 없었다. 에스겔이 그리고 아마도 추방당한 사람들 가운데 일부도 고통을 소화하고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고 심장이 부서지는 것을 감수했기 때문에 그들은 인간적인 존재가 되었다.

이제 성전은 사라졋지만 이스라엘은 세계 나머지 땅과 다른 삶을 살아 여전히 신성함에 참여할 수 있었다. 회복된 공동체를 보여주는 이환상은 미래를 위한 세밀한 청사진도 아니고 설계도도 아니었다. 인도 사람들이라면 만다라, 즉 명상응ㄹ 위한 이콘이라고 부를 만한 것으로서 신을 중심에 둔 제대로 질서 잡힌 생활의 이미지였다. 야훼는 자신의 백성이 추방당했을 대도 함께 있었다. 따라서 이 백성은 이교도와 구분되어 마치 여전히 성전 옆에서 사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 이교도와 친하게 사귀거나 동화되지 말고 영적으로 야훼 주위에 모여야 한다. 성전을 내면화하고 그것을 내적 현실로 만들어야 한다.

그들은 추방당한 상황에서도 하느님이 다시 돌아와 머물 수 잇는 공동체를 창조할 수 있엇다. 그들 모두가 고대 제사장의 율럽을 따라 삶으로써 가능한 일이엇다. 이것은 놀라운 혁신이었다. 민족의 성전이 파괴된 이스라엘은 사제들의 나라다. 모든 사람이 성전에서 신성한 존재를 섬기듯 살아야 한다. 아느님이 여전히 그들 가운데 살아 계시기 때문이다. P 기자의 율법은 삶 전체를 제의화하는 것이엇지만 그는 이 고대의 성전 율법을 이용하여 추방의 경험에 기초한 새로운 윤리적 혁명을 개시했다.

삶의 모든 세세한 면에서 하느님의 다름을 모방하면 야훼가 신성한 만큼 신성해질 수있으며 하느님이 있는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신성한 삶을 살지 않았으며 그것이 그들이 지금 추방을 당한 이유다. 하지만 회개를 하면 야훼는 적의 땅에서도 그들을 기억할 것이다. 이것은 공감에 기초한 율법이었다.” (축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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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의 견유 | 인문/사회/역사 2011-10-06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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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도올의 도마복음이야기 1

김용옥 저
통나무 | 2008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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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기행문인 ‘달라이 라마와 도올의 만남 2’에서 저자는 미켈란젤로의 예수상과 간다라미술의 불상을 비교하면서 이런 말을 한다: “예수의 모습과 싯달타의 모습의 이러한 차이는 우리에게 중요한 관념의 차이를 나타내준다. 보다 신적인 예수는 우리에게 인간적으로 다가오는 반면, 보다 인간적인 싯달타는 우리에게 신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것은 기실 역사적으로 대승불교가 우리에게 끼친 해악 중의 하나다. 싯달타라는 인간이 증발되어 버린 것이다.”

붓다의 신적 이미지는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싯달타가 붓다가 되었을 때 이미 그는 인간이라 보기 곤란했기 때문이다.

3권에서 달라이 라마는 해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해탈을 원하지 않습니다. 해탈이 마음의 모든 것의 완전한 종지이며 무라고 한다면 나는 그런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윤회가 더 좋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것보다 훨씬 더 재미있으니까요!”
“그럼 붓다는 재미없는 사람이겠네요?”
“ 그렇습니다. 붓다는 이미 다르마 자체입니다. 어떤 구체적 형상으로는 다시 구현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붓다의 깨달음에 있다. 붓다가 깨달은 것은 無我였다. 무아는 말 그대로 자아를 초월하는 것이며 항상 그렇게 있는 ‘나’란 인격은 없다는 말이다.

“복음서에는 예수의 제자들의 다채로운 초상이 그려져 있기 때문에 서양의 독자들은 초기 불교도에 대해서도 비슷한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아난다와 데바닷타는 빅쿠들의 무리 가운데 두르러졌지만 그들의 초상은 복음서의 생생한 성격 연구에 비하면 여전히 상징적이고 양식화되어 잇다. 심지어 붓다의 최고 제자들이라 할 수 있는 사리풋타와 목갈라나도 언뜻 보기에는 인격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무색무취의 인물들로 제시된다. 붓다와 아들의 관계에 대한 감동적인 삽화도 없더. 우리는 인물이 아니라 이미지만 얻게 된다.

붓다는 서구인들이 그들의 영웅에게서 높이 사는 독특한 자질이나 개성을 소멸시킴으로써 해방을 얻었다. 그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붓다와 빅쿠들은 잘 구별되지 않으며 빅쿠들 역시 모두 작은 붓다로 묘사되고 있다. 빅쿠들 역시 붓다와 마찬가지로 인격이 사라지며 따라서 개인으로서의 특성도 사라진다.

경전의 텍스트들은 빅쿠들의 마음속에 묻힌 비밀을 파헤치는 것을 거부하여 이런 익명성을 유지한다. 또 깨달음의 성취 이전에 그들에게 있었을 만한 성격상의 기벽도 드러내지 않는다. 여기서 예외적인 사람들이 데바닷타와 아난다라는 것은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 데바닷타는 자기중심주의로 가득한 사람이었다. 상냥한 아난다는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서구인들이 이런 식의 인격 상실을 비난한다면 빅쿠들은 아마 자아의 포기는 닙바나라는 내적 평화를 얻기 위해 얼마든지 치를 수 잇는 대가라고 대답할 것이다. 닙바나는 자아에 갇혀 있는 사람은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카렌 암스트롱, ‘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

그렇기에 인격을 가진 보통 사람에게 깨달은 자란 (인간같지 않은) 신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런 싯달타의 형상이 신적으로 그려진다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러나 문제는 형상을 만든다는 자체이다.

아잔타 석굴 가이드가 “저보고 묻더군요. ‘소승과 대승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제가 머뭇거리고 있으니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불상의 유무지요. 소승에는 불상이 없고 대승에는 불상이 있습니다.” (‘달라이 라마와 도올의 만남 3’)

“붓다를 사람의 형상으로 시각화할 때 그것은 불교의 무아론의 근본취지에 어긋날 뿐 아니라 붓다를 하나의 실체로서 신격화하고 우상숭배의 대상으로 전락할 위험성이 크다. 그러기 때문에 붓다는 제자들이 진리만에 의거하여 살 것이며 자기라는 인간의 형상에는 집착치 말 것을 당부한 것이다. 불상이란 1세기말경 대승운동이 태동되면서 생겨난 것이며 불교사에서 매우 이질적인 것이엇다.” (‘달라이 라마와 도올의 만남 2’)

“대승불교는 불상을 도입하면서부터 엄청난 대중운동으로 발전 도약하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기는 했지만 그러한 계기를 통해서 자멸의 길을 걸었다고도 말할 수 잇다. 즉 불교의 진면목은 무신론이었는데 불상을 도입하면서 오히려 유신론으로 전락해버렸다. 불상숭배를 중심으로 한 대승불교에 대한 일반재가신도들의 불교이해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고 천당에 가고자 하는 유일신관과 별 차이가 없은 모습이 되고 말았다.” (‘달라이 라마와 도올의 만남 3’)

저자는 기독교에서도 동일한 전락이 일어났다고 말한다. 그 전락을 이해하려면 먼저 기독교는 아시아의 종교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공관복음서가 말하는 예수의 생애는 사실이 아니라 신화로 읽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티머시 프레케와 피터 갠디는 ‘예수 미스터리야 명제’란 가설을 세웠다. 이들의 가설에 의하면 예수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이 아니라 이집트, 지중해연안, 근동지역에 광범하게 유포되어 있었던 미스테리아 비교의 신화적 운동의 유대인적 버전 속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는 神人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는 역사적 실체가 아니라 신화운동의 한 가상적 주체이다. 이 가상적 주체야말로 우리 자신이 모두 그리스도가 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기능을 가지는 신화적 운동의 주체라는 것이다. 그것이 곧 미스터리야 비교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오시리스-디오니소스와 관련된 신화들의 골자를 간추려내면 곹 예수의 신화적 삶이 구성된다는 것이다.

1. 오시리스-디오니소스는 肉化된 신이며, 구세주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다.
2. 그의 아버지는 하나님이며 어머니는 인간동정녀이다.
3. 그는 3명의 양치기가 지켜보는 가운데 12월 25일 동굴이나 허름한 외양간에서 태어난다.
4. 그는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세례의식을 통하여 다시 태어날 수 잇는 기회를 준다.
5. 그는 결손식장에서 물을 술로 바꾸는 이적을 행한다.
6. 그가 나귀를 타고 읍내로 의기양양하게 입성할 때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그를 찬양한다.
7. 그는 세상의 죄를 대속하여 부활절 무렵에 죽는다.
8. 죽은 직후에는 지옥으로 떨어졌다가 사흘 후에는 죽은 자 가운데 일어나 광영 속에 하늘로 올라간다.
9. 그를 따른 자들은 그가 최후심판의 날에 심판관으로서 되돌아오기를 기다린다.
10. 그의 죽음과 부활은 그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빵과 포도주 의식으로써 기념된다.
이것은 예수의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의 삶과 공통된 이집트, 근동지역 신화의 매우 보편적인 설화양식이다. 따라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 이야기의 골력은 당대에 유행하고 있던 흔해빠진 이야기라는 것이다.”

미스테리아 가설은 예수의 부활과 동일한 구조의 신화가 “이집트에서는 오시리스, 희랍에서는 디오니수스, 소아시아에서는 아티스, 시리아에서는 아도니스, 이탈리아에서는 바카스, 페르시아에서는 미트라스”에서 반복된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 신인들은 모두 동일한 신화적 존재이며 이 신화는 기전원 3세기부터 이 지역에서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조셉 캠벨이 말한대로 이러한 신화들은 ‘동일한 해부학적 구조’를 갖는다” (‘달라이 라마와 도올의 만남 3’)

그러나 복음서 내러티브가 해부학적 구조를 공유하는 다른 신화들과 다른 점은 “뮈토스적 세계와 로고스적 세계를 혼융하는 기묘한 신념체계를 자신의 실존적 삶의 의미로서 받아들이게 만드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고대인은 신들이 하늘에 있다고 여겼지만 실제로 어느 신을 하늘에서 보았다면 아연실색했을 것이다. 시간 문제에서도 고대인이 하는 이야기를 액면 그래도 받아들여 헤파이스토스가 얼마전에 재혼을 했다거나 아테네가 근래에 몹시 늙엇다고 알려주면 그는 마찬가지로 아연해 앳으리라. 그러면서 신화의 시간과 일상의 시간 사이에는 그 자신이 보기에도 막연한 유추적 관계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것을 그러나 일종의 정신적 혼수 상태에서 그 이질성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현실화’시켰을 것이다.” (폴 벤느)

1세기의 헬레니즘 세계는 지금 우리와 그리 큰 차이가 없이 개명된 합리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과 우리를 가르는 것은 그들은 신화의 언어를 알아들었다는 것이다. 신화의 언어는 ‘믿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 언어가 말하는 내용이 사실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대부분의 근대 이전 문명에는 생각하고 말하고 배우는 두가지 인정된 방식이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이를 뮈토스와 로고스라고 불렀다. 둘 다 중요했고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우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둘 다 중요했고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우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둘은 상충관계가 아닌 상보관계로 각각의 고유한 기능이 있었고 둘을 뒤섞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엇다. 신화는 로고스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혼란스러운 세상을 창조적으로 살아가도록 돕는 기능을 했다. 신화가 신에 관한 이야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실은 로고스의 소관 밖에 잇는 인간적 곤경의 좀더 비극적이고 이해하기 힘든 측면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신화는 심리학의 원시적 형태로 일컬어져왔다. 신화가 실을 잡고 미궁을 빠져나가거나 지하세계로 내려가거나 괴물과 싸우는 영웅을 그렸다고 해서 그것을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로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한 신화는 우리가 접근하기 어렵지만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알 수 없는 마음의 영역과 타협하도록 돕기 위해 만들어졌다. 사람들은 자기 마음 속의 미궁으로 들어가서 자기 안의 괴물들과 싸워야만 했다. 프로이트와 융이 인간정신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계획했을 때 본능적으로 주목한 것도 바로 이런 옛 신화엿다. 신화는 역사적 사건을 정확히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신화는 본래 행동을 위한 프로그램이었다. 신화는 우리가 올바른 영적 혹은 심리적 자세를 갖게 할 수는 있었지만 다음 단계로 나아가 신화의 ‘진실’을 만드는 일은 우리 손에 달려 있었다.” (카렌 암스트롱 “신을 위한 변론’)

붓다의 본생담이 그 좋은 예이다. “불교도들은 예나 지금이나 본생담의 이야기를 싯달타 전새으이 다양한 전기문학장르로 파악하지 그것을 역사적 사실로서 이야기하거나 강요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본생담의 주제는 매우 단순하다. 자기헌신이며 희생이며 자비며 사랑이다. 역사적 싯달타가 얼마나 오랜 시간을 거친 자비행을 통하여 해탈을 이룩할 수 있었나 하는 대승정신의 드라마틱 프리젠테이션인 것이다. 즉 자타카는 사실적 스토리로서의 역사성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보시의 메시지를 구현하기 위한 신화적 선포로서 그 일차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와 도올의 만남 3’)

“예수의 전기도 자타카와도 같은 하나의 문학적 양식으로서 초대교회에 유행했던 하나의 현상이었”다. 그 현상의 의미는 죽음에서 드러나며 그 죽음의 의미는 당시 헬레니즘 문명에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었던 소크라테스의 죽음이었다. “소크라테스를 아주 이성적인 철학자로만 생각하며 그가 아테네의 청년들을 타락시켯다는 죄목으로 재판을 받고 사형에 처해지는 과정이나 예수가 바리새인의 율법을 거부하고 예루살렘성전을 뒤엎고 유대인의 왕으로서 혁명을 꾀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재판을 받고 사형에 처해지는 과정에 동일한 스토리의 구조가 있다는 것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아테ㅐ네의 준법정신 때문에 사형을 달게 받은 것이 아니라 사후의 새로운 삶에 대한 종교적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도피할 수 있는 사형을 오히려 자초했다고 하는 그러한 과정이 예수의 스토리와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 (‘달라이 라마와 도올의 만남 3’)이다.

예수는 소크라테스와 달리 부활함으로서 죽음의 의미를 완성한다. “복음서 내러티브의 대전제는 이미 부활로 확정되어 있다. 부활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하며 죽기 위해서는 수난의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수난에 이르기 위해서는 체제를 뒤흔드는 많은 혁명적 언행을 해야 한다. 그 혁명적 언행 속에 또 우리의 인과적 상식을 뛰어넘는 이적이 점철되어 잇다.”

그런 내러티브의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바울의 말대로 우리의 삶과 무관한 객관적 물리적 사태로서 믿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죽음과 부활을 나의 실존적 고통의 심연에서 직접 체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죽고 내가 부활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롬 6:6~7) 죽어서 천당 가기 위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복음의 주된 내용 속에 포함되어 잇지 않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사망의 몸에서 벗어나 의로운 삶을 살기 위한 끊임업없는 몸부림이다.”

그러므로 “죽음과 부활의 전제가 없는 예수는 예수가 아니다. 그러나 사실 그러한 예수는 예수가 아닌 그리스도인 것이다. 다시 말해 죽었다 부활한 예수로서 묘사된 예수가 바로 우리를 구원할 구세주로서의 그리스도라고 하는 초기 기독교인의 신상속의 예수일 뿐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분명 초대교회의 케리그마의 소산인 것이다. 선포 즉 케리그마의 대상이 되는 예수는 예수의 색신이 아닌 예수의 법신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법신과 색신을 분리하지 않으며 예수의 법신이 곧 색신이라 믿는다.”

이것이 문제라고, 원시기독교가 대승기독교로 전락한 이유라고 저자는 말한다. “예수에게 인성을 부여해야만 가현론의 픽션을 벗어날 수 잇다고 한다면 그 인성은 매우 정직한 보편적 인성이 되어야 한다. 예수는 부활의 예수가 될 수가 없다. 역사적 예수는 죽었다 다시 살아날 수는 없다. 예수에게 그러한 이적과 부활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예수가 아닌 그리스도일 뿐이며 이성의 논의를 벗어나는 불합리한 신앙의 특수상황에 속해버릴 뿐이다. 부활의 예수는 기독론의 핵심이며 초대교회의 프로라간다이다. 기독론으로 예수에 접근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화운동의 ㅎ산 고리를 캐는 작업일 뿐이다. 죽음과 부활이라는 주제는 동서고금의 모든 신화의 전형적 양식이며 그것은 융이 말한 집단무의식의 한 아키타입일 뿐이다. 예수의 신성만을 고집하며 인성을 왜곡한다면 그러한 예수는 신화적 예수가 되고 말 뿐이다.

과연 그러한 신화적 요소를 배제하고 기독교는 기독교일 수 있는가? 나는 당당히 외친다: 오히려 기독교에서 그러한 신화적 요소를 배제할 때만이 기독교는 진정한 기독교가 된다! 이적과 부활이 없이도 예수는 예수일 수 잇다. 아니 그것이야말로 예수의 참모습이다.”

저자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도마복음이 ‘또 다른 예수’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문헌비평에 따르면 도마복음은 바울의 서신들 그리고 공관복음보다 선행한다. 그리고 공관복음이 도마복음과 상당량을 공유하는 자료들을 비교하면 도마복음의 내용이 공관복음의 원형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잇다. 그리고 도마복음과 공관복음의 공통자료인 “Q자료 속의 예수에게는 탄생설화도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어떠한 이야기도 없다. 예수는 과연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견하고 산 사람이었을까? Q자료 속의 예수는 전혀 그러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것은 다름 아닌 공고나복음서의 사실이다. 따라서 최후의 만찬이니 하는 그럴싸한 드라마도 없다. 나의 피니 살이니 하는 죽음과 부활을 전제로 할 때만 의미를 갖는 그런 언어가 그림자도 없다. 자신의 이해에 있어서도 ‘하나님과 자신’을 아버지와 아들의 친근한 관계로 파악하는 언어는 있지만 아버지가 파견하여 천상(빛)에서 지상(어둠)으로 중생을 구원하기 위해 내려온 자라는 식의 그리스도(메시아)적 이해가 전무하다. 예수는 오직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을 뿐이다. 천국은 천당이 아니다. 천국이란 하늘구름 위에 붕 떠 있는 어느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하나님의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새로운 질서가 지배하는 나라를 의미한다. 예수가 선포한 것은 로마의 지배나 율법의 지배나 바리새인 대제사장의 지배가 아닌 하나님의 직접적 무매개적 지배엿다. 그것은 이 땅위에서의 하나님의 지배였다.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 하늘에 구현된 그런 질서가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요청이다. 바로 이 말씀의 주인공이 예수인 것이다. 역사적 예수의 실상인 것이다.”

그러면 역사적 예수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저자는 견유학파의 현자에 가깝다고 말한다. 예수가 살았던 갈리리 지방은 “그 아이덴티티가 남방의 예루살렘을 포함한 유대지역보다는 비옥한 초승달지대의 개방적 선진문명에 더 근접해 있엇고 더 동화되어 잇었다. 당시 두로와 시돈의 찬란한 역사에 예루살렘을 비교한다는 것은 우리의 상식적 관념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다. 갈릴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예루살렘은 변방의 촌락에 지나지 않았다. 역사적 예수의 입장에서 이 도시들을 감지하는 느낌을 말한다면 주변의 고라신과 벳새다가 충청도의 작은 도시에 비유된다면 두로와 시돈은 뉴욕 맨해튼의 느낌이었다. 당시 지중해연안 최대의 도시였다. 최근의 스칼라십은 예수운동이 당대에 이미 페니키아문명권에 전파되었다는 사실을 당연한 것으로 숙지한다.” 예수 자신도 페니키아문명권과 같은 아람어를 사용했다.”

당시 헬레니즘 시대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한 것은 지식이 아닌 지혜였고 우주의 원질에 대한 통찰이기보다는 인생의 아타락시아의 체득이엇다. 아타락시아란 과도한 쾌락이나 고통 그 어느 것에 의하여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평정이었다. 그것은 도마복음에서 안식(rest)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욕망으로부터의 해탈이엇다. 이 해탈을 가장 철저하게 구현하려고 했던 사람들이 견유학파였다. 예수야말로 디오게네스의 제자엿다는 역사적 아이러니 또한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예수는 견유학퍼족 리얼리즘을 철저히 실천한 사람이었다. 예수는 그의 운동에 가담하는 제자들에게 돈을 담은 전대는 물론 지팡이나 가죽샌달도 그리고 속옷조차도 지니지 못하게 햇다. 지나치는 사람들과 문안인사조차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견유학파의 덕목은 최소한의 질박한 삶이엇고 모든 세속적 가치에 대한 절제였다. 예수가 비유를 잘 들기로 유명한데 견유학파의 사람들이야말로 비유의 천재엿다. 역사적 예수는 갈릴리의 견유였다.” (2권)

도마복음의 예수는 철저히 현자였다. 현자로서 예수는 종말론적 예수와는 거리가 멀다고 저자는 말한다. “예수공동체는 철저히 지혜담론의 공동체였으며 그 지혜담론적 성격이 후대에 내려오면서 점차 묵시담론적 틀 속에서 재해석되어 갔다. 묵시담론은 물론 기독론의 형성과 관련되며 그것은 유대국가의 멸망이라는 긴박한 현실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교회는 종말론적 공동체의 성격을 띤다. 묵시담론은 선택된 자들의 폐쇄적 사유에서 기인되는 것이며 지혜담론에 어떤 긴장감과 긴박감을 부여한다.

불트만은 말한다: ‘종말론적 분위기라는 것은 기대나 계산이나 희망이나 염려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선민이라는 의식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선민의식은 선택된 자들과 선책되지 않은 자들의 분별을 초래한다. 그리고 이러한 분별은 선택된 자들은 하늘에 속하고 선택되지 않은 자들은 땅 즉 세계에 속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것은 곧바로 하늘은 빛이고 세계는 어둠이라는 이원적 사유로 연결된다. 여기에 플라톤적 사유가 결합되면 하늘이라는 이데아만이 실재하는 것이 되고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그림자며 실재하는 것이 아니며 멸절의 대상이 된다. 여기에 도덕적 이원론까지 더하면 선택된 자들만이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들이며 선택되지 못한 이 세계의 사람들은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악의 구현체가 된다. 그러니 이 세계는 멸절의 종말로 치닫지 않을 수 업6t다. 그것이 최후의 심판이다.

공관복음서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이 세대’라는 표현은 바로 이런 종말론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심층구조적 언이다. ‘이 세대가 왜 이렇게도 악할까? 이 세대가 기적을 구하지만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줄 것이 없다.’ (눅 11:29, 마 12:39 막 8:12)

그러나 예수는 유대인의 선민의식을 거부한 갈릴리 사람이엇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외치는 그에게는 철저한 인간평등사상이 있었다. 그리고 이 세계에 대한 저주 아닌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이것이 바로 지혜담론의 핵심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의 핵심사상이었다. 묵시담론은 후대 기독교공동체의 성격에서 발생한 것이다. 예수는 오히려 묵시담론을 거부한 사상가엿다. 도마복음서에는 묵시담론이 없다. 이것이 바로 도마복음서의 성격이 Q복음서보다도 더 오리지널한 예수의 담론을 드러내고 있다고 추론케 만드는 한 근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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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일본 재발견

이우광 저
삼성경제연구소 | 2010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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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은 SERI에 연재되었던 글들을 책으로 묶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일관된 주제가 없다. 단지 일본이란 주제로 글들을 묶은 것에 불과하다. 물론 이책의 글들은 2000년대 일본, 정확히는 헤이세이 불황 이후의 일본을 정치, 경제, 사회로 나누어 이전과 어떤 점이 달라졌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나 그 측면들이라는 것이 큰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디테일에 더 주목하고 있고 그 자체로 완결된 글들을 모은 것이기 때문에 이책을 요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1장에선 일본의 신세대들의 생각과 라이프스타일을 설명하는데 할애되었다면 2장은 장기불황기를 거치며 떠오른 새로운 경영자를 살펴보면서 일본의 경영철학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살펴보고 있고 뒤에선 좀더 전통적인 정치, 경제를 다룬다. 이것저것 다양한 내용을 한권으로 볼 수 잇다는 점이 이책의 장점이다. 그러나 하나의 리뷰로 그 내용들을 요약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러므로 여기선 이책의 경영전략에 관한 부분만 정리해본다.

“일본에서는 전통 게이샤들이 있는 유흥가를 하나마치라 한다.” 그러나 하나마치는 교토 밖에선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 이유는 교토 하나마치의 오차야 시스템 때문이다. 오차야는 게이샤의 가무와 요리를 즐기는 좌석을 제공하는 곳이다. 특이한 것은 교토의 “오차야에서는 게이샤나 요리사를 직접 거느리지 않고 전부 아웃소싱한다. 한국은 물론 도쿄나 오사카 등지의 요정이 게이샤와 요리사를 보유하는 것과는 다르다. 오늘날 요정은 쇠퇴하는 반면 하나마치가 번창하는 것은 그만큼 경쟁력 있는 시스템을 갖춘 덕분이 아닌가 싶다. 요정이 수직통합 시스템이라면 하나마치는 수평분업 시스템이다 그런데 이 분업은 고객에 대한 서비스를 극대화하기 위한 분해(unbundling) 시스템이다. 오차야의 경영자인 오카상은 손님에 대한 접객 서비스를 극대화하기 위해 게이샤와 요리 등 서비스의 모든 구성요소를 분해해 아웃소싱하고 이를 다시 조합하여 최고의 서비스를 창출한다. 따라서서 오카상이 얼마나 독창적인 감성으로 서비스를 코디네이트하느냐에 따라 사업의 성패가 달렸다. 게이샤가 소속된 오키야와 게이샤 그리고 요릿집은 오카상의 부름을 받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며 기능을 향상한다. 요컨데 분해의 장점이 발휘되는 시스템이다.”

80년대 일본식 경영을 말할 때 반드시 언급되던 케이레쓰 시스템 역시 이러한 논리로 운영되었다. 케이레쓰 시스템의 특징은 “장기적, 안정적 지속적 거래”이다. “단발성 거래라 이익이 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장기적 혹은 전체적으로 이익을 낼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래방식이다.” 이런 장기적, 안정적 거래는 신뢰를 전제로 하고 신뢰를 강화한다. “일본 기업들은 양자 간에 신뢰를 구축하는 것뿐 아니라 다자간 네트웤으로 신뢰관계를 구축하는 것도 특징이다. 협력회사, 자회사, 모회사 등 거대한 기업 계열 관계가 이에 해당한다. 기술이나 정보가 유출되지 않는다는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기술이나 신제품을 공동 개발하는 시스템이다. 이런 시스템이 바로 세계적 부품, 소재기업을 키워내는 배경이다.”

이런 시스템의 특징은 ‘제조현장을 통합하는 조직능력’이다. “여기서 통합이란 의미는 제조현장에서의 팀워크, 정보공유, 업무호흡, 미세한 조정, 까다로운 고객에 대한 대응, 장인 정신과 같이 정량화하기 어려운 요소들을 말한다. 일본 기업들은 조립 메이커, 부품업체. 소재업체간의 긴밀한 협력으로 통합을 이루어내는 조직 능력이 다른 나라의 기업보다 탁월하다. 일어에 스리아와세란 말이 있다. ‘서로 부딪치며 세밀하게 맞추어나간다’는 의미인데 표준화되거나 정해진 것이 아니라 세밀한 니즈나 용도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말한다. 일본이 강점을 갖는 부품, 소재, 장비는 대부분 이러한 통합형 제품이다. 한국이 일본에서 수입하는 제품이 대부분 그렇다.”

일본기업의 통합력은 스리아와세를 필요로 하는 장기적 관계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다. “물론 거래 기업간의 관계를 고정시킴으로써 비용이 발생할 수도 잇다. 최근 일본 기업들이 계열 구매를 시장 구매로 돌린 것도 비용절감을 위해서다.” 실제 일본기업들이 80년대부터 동남아, 중국으로 생산거점을 옮기고 아웃소싱을 확대한 것은 비용절감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부품, 소재 등 스리아와세가 필요한 제품에 자신의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일본기업들은 스리아와세가 가능한 일본내에선 수직통합을 그대로 유지하고 그럴 필요가 없는 범용부품에선 수평분업을 추구해 최적의 비용구조를 만들려 햇다.

그러나 통합력이란 장점은 단점이 되기도 한다. 저자는 일본이 따라잡힌 이유를 ‘이노베이션 딜레마’라 말한다. “D램을 예로 들어보자. 1980년대 D램의 주요 용도는 전화교환기나 대형 컴퓨터였다. 그래서 일본기업들은 고도의 기술로 고장이 잘 나지 않는 D램을 만들어 반도체 대국이 되었다. 이때 일본에는 고성능, 고품질 반도체를 만드는 기술 문화가 정착된다. 발주 업체에서도 보통 25년 정도를 보증하는 품질과 신뢰성을 요구했다. 문제는 D램의 수요가 전화교환기에서 PC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시장에서는 고품질보다 저가의 반도체를 요구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고품질 반도체를 만들려는 일본기업들의 기업문화는 변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D 램의 제조원가가 비싸져 경쟁력을 잃었다. 이런 현상은 D램뿐 아니라 액정이나 시스템LSI 등 전자산업의 여러분야에서 발생하고 있다.” 클레이튼이 지적한대로 스리아와세에 능한 일본기업은 기존고객의 니즈에 너무나 충실했기 때문에 새로운 수요에 맞출 수 없었다. 스리아와세는 고품질, 고성능에 유리하다. 그러다보면 “고객이 요구하는 것 이상의 고성능, 고품질 제품을 만들고 그 때문에 가격이 비싸져 고객들이 외면한다.” 물론 그런 시스템이 더 유리한 시장이 있다. 소위 명품 시장이다. 명품은 “기능 이상의 고가격에도 불구하고 비즈니스는 성립된다. 그런데 일본 기업들은 고품질 제품을 만들줄은 알아도 고가격으로 사주는 시장은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 제품에 맞는 고객을 창출하거나 아니면 고객이 요구하는 가격의 제품을 만들어 시장을 창출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실제 일본기업들은 그 논리를 따라 고급시장에 치중했다. 이번 금융위기에서 일본이 심각한 타격을 입은 이유이기도 하다. 금융위기로 수출시장이 타격을 받으면서 일본은 위기의 진앙인 미국보다 훨씬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문제는 “수출의존도가 일본보다 훨씬 높은 한국이나 중국 또는 독일보다도 일본이 훨씬 더 심각한 타격을 입은 것이다.” 그 이유는 “일본은 수출에서 차지하는 부가가치의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비교적 값이 싼 원재료를 수입해 높은 기술력으로 가공, 부가가치를 훨씬 높인 제품으로 수출하기 때문에 수출 감소로 인한 타격이 상당히 크다는 것이다. 일본의 소재, 부품, 장치 업체들의 경쟁력이 다른나라보다 높은 탓에 타격이 더욱 컸다.” 그리고 “고부가가치화를 위해 신흥국 시장보다 미국이나 EU 같은 고급 시장에 주력한 것도 큰 타격을 입은 이유 중 하나다. 물건을 싸게 만드는 데 별로 자신이 없는 일본기업들은 높은 기술력으로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을 고급시장에 수출하겠다는 전략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선진국 시장이 증발”해버렸다.

“이런 배경에서 최근 일본기업들의 전략이 크게 바뀌고 있다. 선진국 시장보다 신흥국 시장을 중시하겠다는 것이다. 최근 일본에서는 ‘볼륨존’을 중시하는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신훙국의 중산층 시장을 노리라는 이야기다. 이 전략으로 성공을 거둔 사례는 이미 유명해졋다. 혼다는 베트남 시장용 이륜차를 개발해 중국 제품을 몰아냈고 스즈키 자동차는 인도 시장에서 50% 가까운 점유율을 차지하고 잇다. 일본기업들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신흥국 시장용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잇다는 방증이다. 더욱이 ‘저가제품생산’이야말로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분야하는 주장도 제기되고 잇으니 기술적으로 앞선 일본기업들이 그런 제품을 생산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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