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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 경제를 말하다 | 경제경영 2011-11-02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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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경제학이 깔고 앉은 행복

요하네스 발라허 저/박정미 역/홍성헌 감수
대림북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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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하는 일에는 목적이 있다. 시장에서 사람이 하는 일 역시 목적이 있다. 그러나 시장이 어떤 목적이 있는가는 말하기 힘들다. 시장 역시 사람이 만든 제도인 한 정부나 학교, 기업처럼 존재이유 즉 목적이 있게 마련이다. 시장이 있는 이유는 거래를 하기 위해서다.

문제는 그 거래의 이유이다. 거래 자체로는 목적이 될 수 없다. 거래는 무언가를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시장에서 거래를 하는 이유는 제각각이다. 평균을 내 대표값을 얻을 수 없다는 말이다.

삶의 목표를 행복이라 흔히 말한다. 시장의 거래 역시 그 행복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칸트가 보기에 행복은 순수하게 경험적인 개념일 뿐만 아니라 누구나 자기 나름의 행복관이 있다는 점에서 너무나 상대적인 개념이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은 어떤 윤리적인 법칙의 확실한 기반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 칸트의 입장이다.”

경제학 역시 마찬가지 입장이다. 거래를 통해 사람들이 얻으려는 “행복과 이익에 대한 개인의 생각을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주류경제학에선 시장의 목적을 말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경제학의 대상은 분명하지 않고 무의미한 것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거래의 목적이 무의미하다면 거래 자체 즉 거래를 통해 얻는 이익을 대상해야 한다고 경제학자들은 말해왔다.

거래의 이면에 있는 목적 즉 “행복은 이로써 완전히 사적인 영역으로 밀려났다. 행복의 개념을 이익의 개념과 맞바꾼 경제학은 이익에 대해 형식적인 말만 늘어놓는 것에 만족하게 되었다. 이 돈이 나중에 어떻게 쓰여야 할까 하는 문제나 일반적으로 경제의 의미를 묻는 문제는 공적인 논의에서 제외되는 ‘약한’ 주제에 속할 뿐이다.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개인이 나름대로 평가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경제학은 호모 에코노미쿠스를 얻었다. 호모 에코노미쿠스 모델의 두드러진 특징은 목적이 없는 인간이라는 점이다.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거래를 위해 거래를 한다. 그 거래를 왜 하는지 목적이 없다.

“호모 에코노미쿠스 모델은 어떤 행위의 동인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제공하지 못한다. 이익 개념을 형식적이고 추상적으로만 파악하므로 모든 것을 사적인 이익으로 이해한다. 달리 말해 경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호모 에코노미쿠스 모델 외에도 동기나 의도, 감정 또는 경험에 대한 주관적 판단 등에 대한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호모 에코노미쿠스 모델은 그런 것에 대해 아무 정보도 주지 못한다.”

고전적인 예를 들어보자: 당신은 두가지 세계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첫번째 세계에서 당신의 연간소득은 5만 달러인 반면, 사회 전체의 연평균소득은 2만5천 달러에 불과하다.

두번째 세계에서 당신의 연간소득은 10만 달러인 반면, 사회전체의 연평균소득은 20만 달러에 이른다.

하버드 의대생과 교직원을 대상으로 한 이 실험에서 절반 이상이 첫번째 세계를 선택했다. 호모 에코노미쿠스 모델대로라면 이익이 극대화되어야 하니 당연히 사람들은 두번째를 골라야 한다. 그러나 반 이상의 첫번째를 골랐다. 사람은 단순히 더 많은 소득과 더 높은 소비를 원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소득이 만 달러 이상이 되면 소득은 생존과는 상관이 없다. 그 이상의 소득은 사회적 의미를 갖는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익이 무슨 의미인가를 호모 에코노미쿠스 모델은 설명할 수 없다.

이익이 무슨 의미인가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더 큰 문제를 일으킨다.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자신의 행동에 관한 한 전적으로 예측가능한 존재이다.” 그러나 하버드 의대의 실험에서 드러나듯 의미를 설명할 수 없을 때 예측 역시 할 수 없다.

저자는 다시 의미를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그 의미는 무엇인가? 그 의미는 만족, 더 넓게 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행복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행복에 대한 정의는 칸트가 말했듯이 불가능하다. 저자는 행복의 의미를 내용이 아닌 형식으로 정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첫번째 가능한 형식적 정의는 욕구의 만족으로 행복을 정의하는 것이다. “신공리주의는 행복, 더 엄밀히 말해 ‘이익’이란 소망이 실현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고객이 구매행위에서 선택하는 것은 바로 그가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가 이미 말했듯이 행복을 만족으로 정의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우선 “선택이 반드시 바람과 일치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한 바라던 바가 실현되는 것은 정말 믿을만한 행복의 척도가 될 수 없다. 어떤 결정이나 행위, 경험 또는 상황이나 나중에 가서야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밝혀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런 것에서 굳이 행복을 찾으려 애쓰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더군다나 “소망은 비합리적이거나 일관성이 없을 수도 있다. 운동에 재능이 없으면서 익스트림 등반가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은 건드리는 것마다 황금으로 변하기를 바라는 마이더스 왕처럼 행복해지기 어려울 것이다.”

문제는 소망실현이란 개념 자체의 불안정성만이 아니다. 소망 자체 역시 행복을 정의하기에는 불안정하다. “로또에 응모한 사람은 최대한 큰 성과를 거둘 수 있기를 소망하고 바라던 대로 당첨이 되면 곧 욕구는 더 높아진다. 그러나 당첨이 되어도 대부분 제한적으로 일시적으로만 행복해질 뿐이다.”

저자는 그러한 행복을 덧없는 것, 에피소드적 행복이라 말한다. 저자는 “에피소드적 행복이 아니라 삶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에 관심을 둔다.” 그리고 아마르티아 센이 제시한 대로 저자는 그 기준으로 “소망실현과 쾌락증대라는 공리주의적 기준보다 삶의 기회라는 평가기준을 우위에 둔다.” 아마르티아 센”에 따르면 인간의 행복에 가장 결정적인 것은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재산이나 자원을 소유하느냐가 아니다. 그보다는 그 사람의 능력이나 사람의 기회가 바로 성공적인 삶에 이르는 열쇠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자신의 목표와 소질, 능력에 부합하고 스스로 결정하는 삶을 살 수 있느냐는 것이다. 행복이 곧 성공적인 삶의 다양한 모델을 실현할 수 있는 실질적 옵션 내지 선택가능성이라고 이해하는 셈이다.”

행복을 성공적인 삶으로 정의한다면 경제에 대한 윤리적 판단이 가능하다고 저자는 본다. “시장과 경쟁은 경제에서 대단히 효과적인 수단임이 입증되었으나 그 자체는 아무런 가치도 없고 그저 모든 사람의 삶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수단일 뿐이다. 인간은 언제나 경제적 존재 그 이상임에도 대다수 사회에서 자기 생애의 많은 부분을 경제활동에 할애한다. 그래서 대부분 경제활동으로 생계를 유지할 돈을 버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소질이나 능력을 펼치고 뭔가 의미있는 일을 하고 싶어한다. 이점에서 경제활동 자체가 성공적인 삶에서 중대한 고유 가치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저자는 경제에 대한 가치판단이 가능해진다고 말한다. 저자가 인간다운 경제라 부르는 것은 두가지 기준을 만족해야 한다. “첫째 모든 사람의 삶이 지속적으로 성공할 수 있도록 물질적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둘째 경제활동은 그 자체가 성공적인 삶에 유익한지 아닌지를 보고 평가를 받기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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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기원 | 인문/사회/역사 2011-11-02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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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상식의 역사

소피아 로젠펠드 저/정명진 역
부글북스 | 2011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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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국에서 인()이란 글자는 원래 천자를 말했다. 그러나 춘추시대에 인()이란 말은 제후들도 가리키게 되었다. 그리고 공자의 업적은 인()을 사()계급까지 넓힌 것이다. ()이란 말의 역사는 중국에서 정치적 권리가 어떻게 확산되었는가의 역사이다.

 

() 즉 사람이란 말은 오직 정치적 권리를 가졌을 때만 쓸 수 있는 말이었다. 정치적 권리가 없는 사람은 인이 아닌 민()이라 불렸다. ()의 자형은 꼬챙이로 눈을 찌르는 모양이다. 민에게 요구되는 것은 의무 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정치적 권리를 가진 사람만이 온전한 사람이라 불릴 수 있었다.

 

언제 어디서나 사람은 평등하지 않았고 언제나 다른 사람보다 더 평등한 사람이 있게 마련이었다. 남보다 더 평등한 사람만이 온전한 사람으로 대접받을 수 있었다.

 

누가 온전하게 사람이라 불릴 수 있는가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장소에 따라 달랐다. 왕과 제후만 사람이라 불릴 수 있었던 고대중국에서 이라 불리었던 그 기준이 실제론 혈통이었다면 공자 이후로는 능력이었다. 그에 비해 고대 로마에선 재산이 기준이었다.

 

“Only money made a high political career possible. Patrician blood had long become a liability. Money. It ruled the world. Without it, a man was nothing. Money. How to get it? How to get enough of it to enter the Senate? Dreams, Lucius Cornelius Sulla! Dreams!

 

Money again. Money, money, money. Though power entered into it too. One should never forget or underestimate power. Which drove which? Which was the means, which the end?” (Colleen Mccullough, ‘First Man In Rome’)

 

로마 이후에도 유럽의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재산이 기준인 것은 의회민주주의가 자리잡았던 근대영국과 식민지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투표에 관한 논쟁이 벌어질 경우 그에 대한 대답은 언제나 개인의 부에 따른다는 것이었다. 식민지의 휘그당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또 유권자로서든 아니면 공무원으로서든 그 자격의 기준은 똑같이 부였다. 투표권에 관한 영국인의 사고에서는 오직 소득을 낳을 토지를 가진 사람들만이 진정으로 독립적인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독립적인 사람들만이 공동체의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에서 판단을 건전하게 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재산이 없거나 생계를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는 사람들, 말하자면 여성만 아니라 어린이와 노예, 소작인, 하인, 장인, 도제들은 스스로 정치적 결정을 이성적으로 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시민의 권리와 의무가 걸린 문제에서 특히 더 그런 식으로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우리에겐 낯설다. 우리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누구에게나 정치적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이면 당연히 권리가 있다고, ‘인권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권이란 개념은 최근의 발명이다. 인간이 있어온 시간의 대부분 동안 인권이란 알려지지 않았고 사람이 다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러나 지금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사람이면 다 같은 사람이다. 역사적 시간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평균을 벗어난 비정상이라 할만한 시대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우리의 시대는 비정상이 되었는가? 이책이 묻는 질문이다. 저자는 그 답을 한 가지 개념의 역사에서 찾는다.

 

영국인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신화는 자유롭게 태어난 잉글랜드인의 신화다. 이는 이미 17세기부터 주창되었지만 19세기에 수차례의 정치개혁을 거치면서 비로소 확신되기에 이르렀다. 전제정 밑에서 신음하는 우상 숭배적인 대륙사람들과 달리 자유를 만끽하는 독특한 섬나라 인종이라는 이미지는 잉글랜드가 개신교 국가로 선회한 튜더 시대까지 소급되지만 자유롭게 태어난 잉글랜드인이라는 명제를 만들어내는 데 가장 결정적으로 작용한 사건은 명예혁명(1688)이었다. 프랑스 공화국에서 프랑스 혁명이 차지하는 위상에 맞먹는 영국의 명예혁명은 의회와 왕정 같은 영국의 오랜 제도에 대한 보편적 믿음을 가져왔다.” (박지향)

 

그러나 그 믿음은 엄청난 대가를 치루고 얻은 것이다. “1700년경 런던은 적대심으로 상처 입은 도시였다. 한 세기에 걸친 종교전쟁과 정치혁명은 불신을 유산으로 남겼다. 사법적 또는 신학적 전문성을 자랑하던 유서 깊은 중심지들에 대한 불신과 진리 탐구와 의사결정의 낡은 방법에 대한 불신의 골이 깊었다. 권위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가 아주 힘들었다.”

 

길고 긴 내전을 낳았던 권위에 대한 불신은 사상적 차이를 인정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용인하는 관용을 낳았다. “대화는 관용과 질문하고 토론하는 능력에 좌우된다.” 그리고 대화의 상대를 인정하는 관용은 서로 옳다는 주장들 사이의 차이를 조정하거나 적어도 희석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던 영국인들이 어느날 갑자기 관용을 배운 것은 어렵게 얻은 사회적, 정치적 안정을 오래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표현의 자유가 영국의 기본적인 요소로 정착되었다.

 

문제는 불신과 자유 덕분에 태어난 산만한 도시 세계의 왁자지껄한 소리와 다양성위에서 어떻게 질서를 세울 것인가였다. “영국의 상류층과 중산층의 입장에서 볼 때 혁명 후 가장 큰 도전 중 하나는 극단적 다원론을 누그러뜨릴 초법적 방법들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이해와 오해를 구분하고 기본적인 사상들에 대한 의견일치를 어느 정도 촉진하되 그 모든 것들을 종교적 관용과 표현과 언론의 자유 안에서 이루는 것이 급선무였다.”

 

유력한 해법으로 상식이 제시된다. 공동체의 누구나 공유하는 상식은 공통의 정체성이 세워질 최소한의 권위가 되어줄 것으로 보였다. 그럴 경우 폭넓게 받아들여진 핵심적인 가정들을 바탕으로 형성된 공동체는 과도한 개인주의와 정치적 증오, 당파성에 대한 해독제가 될 것이다. 정치역역에서 상식의 적이 당파성이해관계라면 종교에서 경멸해 마땅한 상식의 적은 광신이었다. 상식의 옹호자들은 상식을 그 모든 적들에 맞설 성채로, 또 불필요하게 학식을 자랑하거나 사변적이거나 난해하거나 광적인 것에 맞설 성채로 높이 평가했다.” 극단주의자들에게 한 세기를 끌려다닌 사람들이 내린 결론이었다. 상식은 토론의 한계를 그어의견충돌이 낳을 적개심을 누그러뜨릴 것으로 여겨졌다.”

 

상식이 한계를 긋는 구체적인 방식은 이런 식이었다. 극단으로 흐르는 이상주의자들과 달리 보통사람들은 현실의 상식적 세계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나 지적으로 그들보다 우수한 사람들보다 더 뛰어난 경우가 종종 있었다. 여기서 상식의 옹호자들은 세상 실정을 잘 알고 있고 그것을 정확히 말하는 본능을 타고 났다는 이유로 보통사람들을 옹호하면서 상식의 적들을 공격했다. “과연, 상식의 가치에 대한 암묵적 동의는 18세기 첫 몇 십 년동안 휘그당의 과두체제와엘리트 사회의 결속에 필요한 토대가 되었다.”

 

더 이상 정부나 교회가 검열을 하지는 않았다. 대신 상식이 검열관의 자리를 차지한다. “상식의 옛날 개념이 개인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심판관과 검열관이었다면 이제 그 개념은 문화적 규제의 수단으로 일반화되고 집단화된다. 상식은 표현에 대한 형식적 규제를 철폐했다고 자랑하는 모든 사회들의 특징이라 사회학자들이 말하는 구조적 검열이 되었다.”

 

문제는 그 상식의 누구의 것이냐, 이다. 물론 상식은 인민(people)의 것이다. 그러나 여성은 상식을 배울 수는 있지만 부족하다고 여겨졌고 가난한 자들도 상식이 적은 것으로 여겨졌다. “18세기 초에는 상식도 심미안처럼 노력 여하에 따라 키울 수 있는 미덕으로 여겨졌다.” 문제는 미덕으로 불린 상식의 소유자는 합리적이고 착실하고 멋을 알고 덕을 갖춘 중류층과 상류층 사람들로 이뤄진 예의 바른 대중과 같은 뜻이었다. 상식의 옹호자들은 상식의 적(실제로는 그들의 정적)을 상식의 소유자인 인민의 편에서 공격했다. 그러나 그들이 내세운 인민은 상상의 산물일뿐 시골과 도시의 골목에서 만나는 현실의 인민이 아니었다. 상식의 이런 비현실성 때문에 결국 상식의 주창자들의 의도와 달리 상식은 상식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분쟁의 중심이 되었고 조화를 위해 고안된 개념이 정쟁의 무기가 되었다.

 

이런 추상성 때문에 상식(common sense)은 프랑스어권에서 양식(bon sens)로 변형된다. 사전적으로 영어의 상식과 불어의 양식은 거의 호환가능하다. “양식은 기본적인 추리능력과 일상적인 식별능력으로 정의되었으며 몽테스키외가 표현했듯이 모든 사람들에게 두루 받아들여질 기본적인 진리들을 얻게하는 사물들을 서로 정확히 비교할 줄 아는 능력으로 여겨졌다.”

 

양식을 가진 사람, 교양인(homme de bon sens)이 누구인가가 문제이다. 교양인은 사물들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이성과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이용하는 사람을 말한다. 정의상 (상식의 소유자인) 영어의 people과 다를 이유는 없다.

 

그러나 “18세기 영국에서 상식이 검열법이라는 정교한 도구가 없는 가운데 공동체의 규범을 유지하면서 단속의 기능을 수행할 것을 약속했다면 유럽 대륙에서는 상식과 비슷한 양식이사회적으로 공유된 상식을 공격하고 해체하는 무기로 사용되었다. “영국의 맥락에서 보면 상식은 사람들이 사물들을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격려하게 되어 있었다. 반면 유럽 대륙에서는 상식의 프랑스어 상대인 양식은 사람들을 현혹하는 외양 밑에 있는 것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뒤엎기 위한 노력으로 넌센스를 드러내는 인간의 잠재력을 의미했다.”

 

영국의 상식과 대륙의 양식이 달라진 이유는 정치적 맥락이 달랐기 때문이다. 질서를 세우려던 영국과 달리 구체제의 프랑스는 여전히 관습이 보통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조화를 이루며 사는 준칙의 원천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그런 국가였다. 암묵적 일치에 의존했던 만민일치는 근대초기 유럽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신성불가침한 규칙의 원천이었다.관습은 임금과 고용조건에서부터 부채의 엋산까지 근대초기 경제적 삶의 중요한 측면을 모두 결정했다. 또한 계급구조를 떠받쳤다. 당연히 종교적 관행도 지배했다.” 그런 맥락에서 건전한 상식 즉 양식은 관습의 넌센스를 드러내고 공격하는 무기로 쓰인다.

 

오늘날 우리가 포퓰리즘이라 부르는 선동적 정치 스타일은 그 시대의 정치이론은 (상식과 양식이 대표하는) 계몽운동 문화의 다양한 갈래들이 결합하면서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 결합의 폭발력이 처음으로 증명된 것은 미국혁명에서 였다.

 

페인이 상식이란 책자로 주장했듯이 미국혁명의 이념은 상식과 양식이 결합이었다. 페인은 미국인들에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것과는 다른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설득했다. (양식) 국가 정체성에 변화를 줘야할 뿐 아니라 집단 상식이 자신들을 통치하도록 해야 한다는 사상으로(상식) 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식과 양식의 결합은 인민주권이란 공화주의 개념을 정당화하고 그것을 현실에 구현하는 것을 실험하도록 햇다.” 저자는 이 예상치 못한 결혼민주주의 상식을 낳았다고 말한다. 페인이 교묘하게 만들어낸 상식의 이중성덕분에 “1776년이 다 가기 전에 이미 상식은 새로운 형태의 인민통치에 근본적으로 필요한 버팀목이 되었다. 이 형태의 통치에는 인민들이 각자 타고난 실용적이고 건전한 판단을 내릴 능력을 통해 주권자가 되지만 그들의 판단력은 상식에 의해 정의되고 제한을 받는다.”

 

그러나 영국의 상식도 프랑스의 양식도 그랬듯이 상식을 대효한다고 지나치게 주장하고 나서는 곳에는 언제나 위험이 도사린다. 상식을 대신하여 말을 한다거나 상식에 호소한다는 주장은 초기에 양식을 옹호했던 사람들이 잘 알았듯이 바탕에 기만을 깔고 있다.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에서 진정으로 대중적인 것은 거의 없다. 어느 것이든 절대로 보편적이지도 않으며 폭넓게 교감이 이뤄지지도 않았다. 상식도 그것이 대체하고자 하는 것들만큼이나 추상적이다. 상식을 상기시키는 사태가 벌어지면 언제나 사회의 한 부류가 다른 부류의 희생을 바탕으로 득을 본다. 무엇보다 상식을 상기시키는 것은 논쟁을 부른다. 그것은 곧 상식이 정치적이라는 뜻이다.”

 

그 이유는 칸트가 말하듯이 상식은 진리의 법정과는 거리가 한참 멀기 때문이다. 칸트에 따르면상식은 지식주장에 요구되는 비판적 조사를 사전에 차단하는 수사적 방편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또 대중의 판단도 협잡꾼들만 영광을 누리게 만들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식은 정치질서에 대한 비전을 낳은 것이 아니라 (포퓰리즘이란) 정치 스타일을 낳았을 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상식은 여전히 민주주의의 기둥 중 하나로 남아 있는 포퓰리즘의 인식적 토대이며 또 포퓰리즘을 정당화하는 바탕이 되어주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민주주의의 영원한 위협의 하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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