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블로그 | 랜덤블로그 쪽지
Memento mori
http://blog.yes24.com/swordsou1
태그 & 테마링 | 방명록
검혼
읽은 책에 대해 끄적거리는 연습하는 곳입니다
프로필 쪽지 친구추가
12월 스타지수 : 별110
댓글알리미 비글 : 사용안함
전체보기
잡설
취중잡설
나의 리뷰
Memento
m o r i
살림지식총서
영화
태그
고궁을 나오면서 자살사건 눈사람자살사건 와장창 류근 상처적체질 notsure 달리봄 수동형인간
2017 / 10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월별보기
새로운 글

2017-10 의 전체보기
[소년이 온다-한강]삶의 이유보다 중요한 죽음의 "이유" | Memento 2017-10-31 08:52
테마링
http://blog.yes24.com/document/9955525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eBook]소년이 온다

한강 저
창비 | 2014년 05월

        구매하기

삶의 이유보다 중요한 죽음의 "이유"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죽음은 끝이다. 하나의 세계가 사라진다. 기억과 의미가 다시 찾을 수 없는 영원한 세계로 넘어간다. 바스러진다. 다음 세계를 경험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종교는 다음 세계를 상정하지만, 현실적으로 다음 세계를 증명한 이는 없다. 끝이다. 하지만 끝나지 않는다. 종말 한 세계와 이어진 또 다른 세계, 다른 삶은 상처 받는다. 파괴된 세계는 끝났지만, 또 다른 세계와 이어져서 계속된다.

삶에는 이유가 없어도 좋다. 그러나 죽음엔 명확한 근거가 필요하다. 죽음, 그 자체를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의 삶을 위해서. p.7 <별을 스치는 바람>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를 읽으며 내내 이 글귀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삶이라고 이유가 필요 없을 리 있겠는가. 삶이 힘들고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은 "이유"를 찾는 과정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의 이유보다는 죽음의 근거, 이유가 절실하다. 왜냐하면 살아남은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삶의 이유를 찾기보다 죽음의 이유를 찾는 일이 더 어렵다. 누구도 이유를 명확하게 증명할 수 없는데다가, 증언해줄 이도 이미 없기 때문에.

현대사에서 집단적인 죽음은 여러 차례 있었다. 식민지와 분단시대에 모순은 6.25전쟁을 통해 한반도를 죽음을 일상으로 만들었다. 전쟁에는 이유가 없었다. 내가 아니면 네가 죽어야 한다. 살아남기 위한 일이 이유라면 이유다. 형제고, 이웃이고, 같은 민족이고 중요하지 않다. 살기 위해서 다른 이유는 필요 없다.

광주민주화 운동은 집단적인 죽음의 기억이다. 게다가 베트남 전쟁의 경험은 (황석영의 표현대로) 자국민에게까지 그 폭력을 행사하게 만든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유"를 찾아 해매이게 만들었다. 죽은 사람은 세계가 파괴되어 끝이 났다. 반면 살아남은 사람은 살아남은 대로 이유를 찾아 떠돌았다. 살아남은 일이 죄책감이 되어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p.141"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있다는 치욕과 싸 p.186"우는 그들을 향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설픈 위로? "먹는다는 것"조차 "허기를 느끼며 음식 앞에서 입맛이 도는 p.118" 삶의 근원적인 치욕을 맛본 그들에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면 과거로 시간을 돌리는 길이겠지만, 불가능한 일이다. "학살 이전, 고문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 p.239" 혹자들은 말한다. 간첩이 있었다고. 그들은 폭도였다고.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p.157" 양심을 지녔던 사람들. "인간의 본질"에 대해 회의하고, "오로지 끈질긴 의심과 차가운 질문들 속에서 살아 p.133"가야했던 생존자들에게 우리가 할 말은 그 뿐일까. 그들의 피 값으로 오늘날을 누리는 우리는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까. 죽은 자들만이 "희생자"일까.

우리는 아직도 죽음에 "이유"를 주지 못했다. 집단적 죽음 앞에, 세계와 우주의 파괴 앞에 우리는 조롱밖에 주지 않는다. 지겹다고 그만하라 외친다. 보상을 바라냐고 말한다.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느냐고. 단지, 어째서 죽어야만 했고. 왜 죽어야만 했고. 진실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지 않는다. 조롱만이, 이념만이, 이익만이 중요하다. 살아남은 자는 "이유"가 필요하다. 보상과 복수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죽음의 "이유"에 너무나도 박하다. 언제가 되어야만 우리 사회는 이유에 박하지 않을까. 진실이 "캄캄한 데로"가지 않고 "저기 밝은 데" "꽃 핀 쪽으로 p.266" 나오기를 기원한다.

 -------------------------------------------------------

치욕스러운 데가 있다, 먹는다는 것엔. 익숙한 치욕 속에서 그녀는 죽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배가 고프지 않을 것이다, 삶이 없으니까. 그러나 그녀에게는 삶이 있었고 배가 고팠다. 지난 오년 동안 끈질기게 그녀를 괴롭혀 온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허기를 느끼며 음식 앞에서 입맛이 도는 것. p.118

그녀는 인간을 믿지 않았다. 어떤 표정, 어떤 진실, 어떤 유려한 문장도 완전하게 신뢰하지 않았다. 오로지 끈(p.132)질긴 의심과 차가운 질문들 속에서 살아 나가야한다는 것을 알았다. p.133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p.142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양심. (p.156)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p.157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색 전구가 하나씩 나가듯 세계가 어두워집니다. 나 역시 안전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p.184)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p.185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p.186

저는 그 폭력의 경험을, 열흘이란 짧은 항쟁 기간으로 국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체르노빌의 피폭이(p.223) 지나간 것이 아니라 몇십년에 걸쳐 계속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허락된다면 앞으로 십년 후에도 후속 논문을 쓰려고 합니다. 부디 저를 더와주십시오. 기억을 더듬어 증언을 보태주십시오. p.224

그 여름으로부터 이십여년이 흘렀다. 씨를 말려야할 빨갱이 연놈들. 그들이 욕설을 뱉으며 당신의 몸에 물을 끼얹던 순간을 등지고 여기까지 왔다. 그 여름 이전으로 돌아갈 길은 끊어졌다. 학살 이전, 고문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 p.239

엄마아,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네.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쪽으로 가, 꽃 핀 쪽으로. p.266

그들이 희생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 오해였다. 그들은 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남았다. 그 도시의 열흘을 생각하면, 죽음에 가까운 린치를 당하(p.295)던 사람이 힘을 다해 눈을 뜨는 순간이 떠오른다. 입안에 가득 찬 피와 이빨 조각들을 뱉으며,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밀어올려 상대를 마주 보는 순간.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를, 전생의 것 같은 존엄을 기억해내는 순간. 그 순간을 짓부수며 학살이 온다, 고문이 온다, 강제진압이 온다. 밀어붙인다. 짓이긴다, 쓸어버린다. 하지만 지금, 눈을 뜨고 있는 한, 응싱하고 있는 한 끝끝내 우리는 ...... p.295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0) 트랙백(0)
이 리뷰를 | 추천 0        
[별을 스치는 바람1,2 - 이정명] 윤동주 평전과 영화 동주를 보기 전이었다면!!! | Memento 2017-10-25 21:05
테마링
http://blog.yes24.com/document/9944700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eBook]별을 스치는 바람 1

이정명 저
은행나무 | 2015년 01월

        구매하기

윤동주 평전과 영화 동주를 보기 전이었다면!!!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소박한 꿈이 있다면 '평범한 삶'이다. 남들 보기에 민망하지 않게, 하지만 특벼라헤 부족하거나 모나지 않게. 남드러처럼 그렇게 사는 일이 내 꿈이라면 꿈이다. 누군가는 평범은 죄악이라 말했다. 그 말대로 스스로 채찍질하며 평범하지 않는, 본인만의 개선을 가지는 일이야 말로 자아실현의 정도일지 모른다. 아니면 애당초 평범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모든 인간은 개별적이고 특수한 존재니까. 하지만, 평범한 가정에서 평범한 재능을 지니고 태어나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한 둘쯤 있어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스스로 자위해 본다.
 그럼에도 부끄럽다. '평범함'을 추구하는 삶은 어쩌면 '체념'과 '포기'의 내면화다. 스스로의 능력이 시대를 아파하고, 시대를 건너기에 너무나도 미약하다. 스스로 단념하고 평범하고자 애써 꿈이라고 포장하는걸까. 부끄럽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지만 혼자 아파한다.
 시대를 살아가고자 하는 이런 고민은 어느 시대, 어느 누구나 가지고 있다. 특히 윤동주는 이런 부끄러움(?)의 대명사다. 시대의 아픔을 가지고, 시대를 건너고자 했다. 그러나 그 길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항상 부끄러워했던 사람.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쉽게 쓰여진 시>는 그 부끄러움을 가지고 무엇을 아파했는지 알 수 있다. 남의 나라에서 시인이라는 천명을 지니고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그. 지식인으로서 부끄러워하며 식민지 시대를 건너고자 했다. 하지만 감옥에서 옥사했다.
 <별을 스치는 바람>은 윤동주의 수감 생활을 재구성한 미스터리 팩션이다. 기록이 없는 (부족한) 윤동주의 수감생활을 사실과 허구를 섞어 만들었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다. 다소 터무니 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소설을 기존의 작품들과는 조금 다르다. 영화 <동주>는 부끄러움을 주제로한 시인의 일대기라면 <별을 스치는 바람>은 '자유'에 대한 갈망과 '문자의 힘'을 주제로 한 미스터리 물이다. 영화는 윤동주가 주인공이었다면, 소설은 일본인 간수가 중심이다. 영화 속 동주가 실재 모습에 가깝다면, 소설 속 동주는 다분히 이상적인 모습이다.
 소설의 큰 배경은 식민지 치하의 감옥이라는 공간이다. 더불어 수감자와 간수의 관계는 갈등을 더욱 증폭한다. 따라서 '자유'에 대한 의지는 이야기의 중요한 축을 담당한다. 다음은 '문자의 힘'이다. 소집 통지서를 받은 간수는 "문장을 이루지도 못하는 글자들이 나의 삶을 옥(p.134)"죈다고 토로한다. 반면 재소자들의 편지(우편)와 윤동주의 시는 옥죄어진 삶에서 견딜 수 있는 힘을 준다. 죽음과 치유라는 양면성을 가진 문자의 힘은 세상을 변화시킨다. 왜 조선시대에 한글에 대해서 격론이 벌어졌는지, 기어이 일제가 한국어 사용을 금지시키려 했는지,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을 실감케 한다.
 한 간수의 죽음으로 시작된 소설은 동주의 죽음을 거쳐 또 다른 간수의 회상으로 끝난다. "진실은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는 것(p.392)"이라는 진술은 글의 힘을 넘어 소설의 의미를 넌지시 말한다. 비록 소설이지만, 지어낸 이야기지만, 우리는 진실을 기억해야 하고, 그것을 기억하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겠다. 그렇기에 다시 부끄럽다. 우리는 얼마나 이 시대를 기억하고 해석하는가. 시대를 건너고자 하고, 얼마나 아파하는가. 먹고사니즘 만큼 숭고한 주의는 없지만, 인간은 빵만으로만 살 수 없다. 인간은 의미를 구하는 존재다. 장미가 필요하다. 이 시대, 이 아픔에는 어떤 '장미'가 필요할까. 실마리는 '먹물'이고, '문자'다. "기록이 불태워지고 감추어졌다 해도 진실은 여전히 그곳에 있(p.393)"다. 소설 속 '자유'와 '문자의 힘'은 현 시대에도 유효하다. 윤동주의 고민과 부끄러움 역시 유효하다. 내가 키울 장미는 이미 여기저기 자라고 있다.
소설에 대해서 아쉬운 점이있다. <윤동주 평전-송우혜 저>과 영화 <동주>를 보기 전에 이 소설을 봤다면 더 좋았겠다. 앞의 두 작품의 인상이 너무도 강하기에, 소설에 몰입하기가 어려웠다. 덕분에 이런 저런 정리되지 않는 고민을 해본다.

---------------------------------------------------------------------------------------------

(1권)
삶에는 이유가 없어도 좋다. 그러나 죽음엔 명확한 근거가 필요하다. 죽음, 그 자체를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의 삶을 위해서. p.7
시간은 언제나 너무 늦게 오거나, 아니면 너무 빨리 온다. 우리는 언제나 너무 빨리 만난 사랑 때문에, 너무 오래 만나지 못한 사람 때문에, 그리고 너무 늦게 알아버린 진실 때문에 아파한다. p.56
증오는 두려움의 다른 이름이다. 모든 국가와 체제는 책을 두려워했고 책과 불화했다. 책 때문에 나라는 망하고 군주는 쫓겨났으며 귀족들은 망명했다. p.83
"순진하고 무력한 것이 죄는 아니지만 죄의 빌미는 될 수 있소. 자신을 지키지 못하는 자를 지켜 주는 자는 없을 테니까." p.115
스무 자도 되지 않는 파편 같은 글자들, 문장을 이루지도 못하는 글자들이 나의 삶을 옥죄어 왔다. 그때 그는 알았다. 전쟁터에서 죽어 가는 모든 군인들은 문장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것을. 사람을 죽이는 것은 총탄도 포탄도 아니었다. 그것은 글이었다.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고 사람들을 죽이는 데에는 한 줄의 글로 족했다. p.134
전쟁의 광기가 언어를 초월해도 그 야만성을 증거 할 것은 결국 언어밖에 없을 것이다. 가장 순결한 언어만이 가장 참혹한 시대를 증언할 수 있는 것이다. p.312
승전? 전쟁에 이긴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전쟁과 싸워 이기는 인간은 없다. 죽음과 싸워 이기는 인간이 없는 것처럼. 전쟁이 끝나면 모두가 패자다. 승자조차도 자신이 얻은 승리 때문에 고통 받고 파멸 당한다. 그러니 이기는 자에게도 지는 자에게도 위로가 필요하다. 전쟁으로 상처 입는 것은 똑같으니까. p.354
문장은 말하는 자의 심경을 반영하지 않는다. 문장은 바로 말하는 자 자신이다. p.381
(2권)
모든 일은 일어날 어떤 일의 전조다. 시간은 그 자체로 완결되지 않고 사건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없다. p.20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거나 희망 때문이지." p.29
"그래. 이 전쟁이 우리를 악마로 만들겠다면 좋아, 우린 악마가 되자. 하지만 이간의 심장을 가진 악마가 되자." p.226
어떤 쪽이 진정한 그의 얼굴이었을까? 야수의 얼굴을 한 천사? 천사의 탈을 쓴 야수? 어쩌면 그 모든 것이 그의 진실한 모습일지 모른다. 진실은 때로 수많은 얼굴을 가졌으니까. 우리는 때에 따라, 장소에 따라, 이익에 따라 악인이기도 하고 천사이기도(p.242)하며, 교활한 사기꾼이기도 하고 사기를 당하는 자이기도 하며, 간악한 밀고자이기도 하고 밀고의 희생자이기도 하지 않던가? 그 모든 얼굴이 거부하지 못할 우리들 자신의 진실인 것이다. 동주의 처지를 이해하고 동정하는 척하면서도 공습경보가 울리면 그를 죽음의 감방 속에 내버려둔 채 혼자 방공호로 숨어드는 나 자신처럼. 결국 나는 내가 가장 경멸하는 인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p.243
모든 존재는 심연의 상처를 가지고 있으며, 위악은 억압된 선이 스스로를 지키려는 몸부림이라는 것을. 그러므로 위악은 선의를 가진 자만이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악한 자들은 악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위선을 행할 뿐이다. 하지만 선의를 강변하는 가장 극단적인 그 방식은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고 결국 자신 또한 파멸시키고 만다. 그렇다면 스기야마는 선한 사람이었을까? 그에게 선의가 있었을까? 있었다면 어떤 선의일까? p.258
진실은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는 것이죠. 기록이 불(p.392)태워지고 감추어졌다 해도 진실은 여전히 그곳에 있습니다. 나의 기록이 소실되고 나의 진술이 사라져도 제가 본 진실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p.393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0) 트랙백(0)
이 리뷰를 | 추천 0        
[찌질한 위인전-함현식]위인전은 늘 나를 좌절케 한다. | Memento 2017-10-20 17:51
테마링
http://blog.yes24.com/document/9934813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eBook]찌질한 위인전

함현식 저
위즈덤하우스 | 2015년 07월

        구매하기

위인전은 늘 나를 좌절케 한다.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이번 추석 때, 웅진 위인전전기 세트가 아직도 친척들 집을 전전하며 생존해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내가 초등학생 때 읽었던 책인데 전국을 여행하며 조카들에게까지 꿈과 희망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 뿌듯했다고나 할까. 내가 읽었다고 표시해둔 흔적까지 그대로 살아 있었다.(읽어보기는 한건지 모르겠다...) 그 책들은 어린 시절 친구였다. 시골 깡촌에서 위인전은 방향타였다. 한 권 한 권 읽어나가며 위인이 되지 못하더라도 특별한 사람이 되어야 겠다는 다짐을 하곤 했다. 비싼 돈을 들여 사주신 부모님은 당시에는 흐뭇 하셨을 거다. 결국 위인전이 빛을 발하지 못해 평범하게 밥 빌어먹고 겨우 살아가는 현실이 함정이긴 하지만.

웅진 위인전기를 읽으면서 아직도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김유신이 자신의 말의 목을 자르는 장면인데, 당시 나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우선 무서웠다. 죄 없는 말이 불쌍했다. 이내 자신의 애마의 목을 칠 정도로 의지를 다졌다는 내용은 의지박약인 나에게는 크나큰 충격이었다. 죽은 사람이 산 사람에게 이처럼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다니. 위인들은 평범한 사람과는 다르다. 뛰어나고 훌륭한 사람이다. 그래서 개개인의 지표가 되고, 때로는 신의 위치까지 이르기도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반대의 효과가 났다. 어릴 때 위인전은 읽으며 꿈과 희망을 키웠지만, 커가면서 느낀다. 위인전은 나를 좌절시키기 위해 만든 간악한 책이라는 사실을. 위인의 위대함은 아이들의 꿈과 희망이자 동시에 압박이 된다. 나는 저렇지 못한데, 결국 평범하게 살 수 밖에 없구나. 닮으려 해도 닮을 수 없다. 나는 그 위인이 아니기 때문에. 남들과 다른 업적을 이뤘기 때문에 위인이다.

<찌질한 위인전>은 이런 의문 던진 책이다. 위인은 무엇 때문에 위대한가. 위인이란 누구인가. 결론은 위인 역시 우리와 같은 사람이고 인간이다. 그렇기에 한계를 가진다. 그 한계가 바로 찌질함이다. 그들도 찌질하다. 위대한 업적만이 그를 구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찌질함을 극복해가는 과정이 그가 위대한 이유라는 말이다. 여기가 이 책이 일반적인 위인전과는 다른 차이점이다. 어릴 때 읽은 위인전은 철저하게 사람은 배제한다. 그렇기에 업적만 남고 그만큼 위대해 진다. 하지만 이 책은 사람다움, “찌질함을 전면에 부각시킨다. 그럼에도 이를 극복했다. 그렇기에 위인이다. 오히려 후자가 더 위인의 위대함을 부각시키는 효과가 있지 않을까.

저자의 의도야 무엇이든 간에 어쨌든 사람으로서의 위인들을 복원한 시도는 위인을 더 부각한 꼴이 되었다. 슬프게도 이 위인전은 두 배로 나를 좌절시킨다. 어릴 때와 달리 지금부터 피켜스케이팅을 1만 시간을 한다 해도 김연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다만, 1만 시간이라도 해보지 않은 나를 반성해 본다. 가슴 아프다. 위인전은 예나 지금이나 나를 좌절케 하고 부끄럽게 한다. 내 어린 친척들은 웅진 위인전을 보고 좌절하지 않기를.

--------------------------------------------------------------------------------

그들이 위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어쩌면 우리에게 남긴 어떤 업적이나 작품과 같은 결과때문이 아니라 그곳에 닿기까지의 과정 때문일지 모른다. p.9

대개 명분이 그럴듯할수록, 우리는 그것을 기반으로 더욱 가열찬 찌질함을 전개한다. 행위 자체는 별로 찌질하지 않더라도 그것을 굳이 명(p.152)분으로 합리화할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p.153

인류사에서 먹고사는 일만큼 유구하고 절박한 명분이 어딨겠나. ...... 애석하게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답이 아니다. 이것도, 저것도 답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사이에서 끝없이 묻고, 고민하는 일이다. 그것이 비록 주저하는 모습으로 비춰질 수 있을지라도 그런 식의 고민은 여러모로 우리가 찌질함의 나락에 빠져 절망할 가능성을 줄여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런 고민은, 나와는 다른 선택을 한 누군가에 대(p.207)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도 한다. 절대적 찌질함은, 절대적 확신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p.208

인간은 대개 가장 몰상식하고 비합리적인 행동을 할 때 신의 지위를 이요하고 그것을 남용하게 마련이다. 신은 죄가 없다. 다만 인간이 신의 이름으로 죄를 저지를 뿐이다. p.345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0) 트랙백(0)
이 리뷰를 | 추천 0        
[살인자의 기억법-김영하]“내가 나를 모르는데 넌들 나를 알겠느냐” | Memento 2017-10-12 18:06
테마링
http://blog.yes24.com/document/9918845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eBook]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저
문학동네 | 2013년 08월

        구매하기

“내가 나를 모르는데 넌들 나를 알겠느냐”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삶은 기억과 망각의 싸움이다. 매 순간 마다 남겨야할 이야기와 지워야할 이야기를 선택한다. 기억들이 모여 라는 정체성을 형성한다. 내가 누구인지는 기억을 기초로 하여 만들어지지만,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기억은 망각을 전제로 한다. 선택한 기억 외에는 잊혀 진다. 만약, 불가피한 일로 인해 망각의 부분이 지나치게 커진다면? 만약 내 기억이 모두 잘못되었다면? 그래서 내가 아는 내가 아니라면?

김영하의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은 치매에 걸린 노년의 살인자가 시간이라는 악, “망각이라는 괴물과 사투를 벌이는 이야기다. 시간과 노인이라는 관계, 이를 극적으로 만드는 치매라는 장치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큰 틀이다. 노년의 살인자는 짧은 분량, 빠른 호흡의 문단속에서 사라져 가는 기억을 붙들고 헤맨다.

과거 기억을 상실하면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게 되고 미래 기억을 못 하면 나는 영원히 현재에만 머무르게 된다. 과거와 미래가 없다면 현재는 무슨 의미일까. p.105

사라져가는 기억, 희미해지는 정체성, 현재에 갇혀버린 주인공은 망상 속을 헤매고 다닌다. 자신이 살인자이기에 살인자로 기억하는 걸까, 자신을 살인자로 기억하기에 살인자로 기억하는 걸까. 호접지몽 고사처럼 무엇이 진짜이고 경계는 어디인가. 살인자로서의 기억과 살인자로 믿는 기억은 분별이 있을 진대.

잔인한 살인자(로 믿는 이)도 시간을 이길 수 없다. 시간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악에 스러져가는 이야기는 고민을 던진다. 정해진 결론은 없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넌들 나를 알겠느냐는 노랫말처럼, 누군들 알겠는가. 이 소설의 가장 큰 재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

사람들은 악을 이해하고 싶어 한다. 부질없는 바람. 악은 무지개 같은 것이다. 다가간 만큼 저만치 물러나 있다. 이해할 수 없으니 악이지. p.131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 p.166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0) 트랙백(0)
이 리뷰를 | 추천 0        
1
진행중인 이벤트
트랙백이 달린 글
내용이 없습니다.
스크랩이 많은 글
내용이 없습니다.
많이 본 글
오늘 37 | 전체 43092
2005-12-30 개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