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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의 수수께끼-주강현] 발전이라는 대의명분에 놓쳐버린 자신 | Memento 2020-09-18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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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주강현 저
서해문집 | 2018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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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이라는 이름하에 놓쳐버린 우리 자신, 그것이 무엇인지 탐구하는 책이다. 우리가 소흘히 여겼던 것들에서 우리의 뿌리, 우리 문화의 힘을 탐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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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던 학교 정문에는 Y자 모양의 교차로가 있어서 Y로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중간에 I자 모양의 탑이 있었다. 인근 잔디밭에서 술자리가 이어지다보면 슬슬 말거리라 떨어질 때쯤, Y로와 탑의 진실(?)에 대해 알려주곤 한다. 남녀의 성기와 관련된 음양의 이야기. 특별나거나 유별날 얘기는 아니었다. 어느 동네, 어느 지역에나 한 가지 이상씩 있을 법한 그런 얘기였다. 학교는 발전이 필요했다. 건물이 바뀌었고, 와중에 Y로는 사라졌다. 그 자리엔 다른 광장이, 누구도(학생 만은 절대 못들어간다.) 들어갈 수 없는 잔디밭이 생겼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이런 식으로 발전(?) 해 왔다. 미신타파, 개화, 근대화. 다양한 이름의 발전. 당장 먹고 살기 바빴기에, 명분은 충분했다. 누구보다 빠르게 발전했고, 그만큼 급격하게 과거로부터 단절을 추구했다. 그렇게 누구보다 열심히, 너무도 정신없이 달려왔다. 살만해졌다고 생각하지만 아직도 부족하다. 아무리 앞으로 빨리 달려나가도 채워지지 않는다. 무언가를 깨닫고 뒤돌아보는 순간, 때는 이미 지났다.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렸음을 깨닫는다. 민속학자 주강현의 <우리 문화의 수수께끼>는 이런 깨달음의 반성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게 무엇인지를 차근차근 알려준다.

도깨비 없이 태어난 세대를 위하여라는 책의 부제는 우리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급하게 채워 넣은 발전은 우리의 문화를 급속도로 대체했다. 외국의 문화가 우리의 것이라 생각하고 산다. 저자가 지적했듯 우리가 아는 도깨비의 모습은 사실 일본의 오니라는 것이 대표적이다. 엄숙주의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본다. 국뽕도 잘못되었지만, 지나치게 무시하는 것도 잘못이다. 우리네 성문화가, 장승과 마을()나무가 계도되어야 하고, 베어넘겨야 할 미신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외국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우리의 옛 것은 그렇게 사라져가고 있다.

우리 문화의 정본이자 교과서’”라는 출판사의 평가는 지당하다. 지나친 국뽕도, 과도한 자기비하도 아닌 적당한 선에서의 우리 문화를 평가한다. 그리고 우리가 지나쳐 버린 많은 것들을, 사소하게 여겨져 무시하던 것들을 돌아본다. 문화의 힘은 여기서 나온다. 세계화를 지나 세방화를 넘어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힘은 우리 내부에서 나오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 문화의 뿌리가 어디인지 책과 함께 살펴보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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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성풍속의 이중성에 주목한다. 매우 엄숙하기만 했을 것 같지만, 정자 민중의 생활 속에서 유전하던 성풍속은 참으로 인간적이기만 했다. 비록 유교의 덕목 탓에 남근신앙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하더라도 그들 남근조차도 마을공동체의 공유물로 만드는 민중의 슬기를 보여주었다. p.124

민중의 삶 속에서 성과 반란의 욕구는 분명 역사책의 상식을 앞서 가고 있었다. ... 전통시대의 성관념은 성의 과감한 노출조차도 공동체의 산물로 여기는 분위기였다. 마을 입구에 버젓이 남근이 서 있어도 음탕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수백년 동안 마을 사람이 오고가는 길목에 남근을 세워두고, 그것도 1년에 한 번씩 줄다리기가 끝나면 옷을 입힌다고 짚을 감아주었다. 오히려 공개된 사회적 성 상징물을 묵인하는 건강한 분위기다. / 오늘날은 어떤가. 만약 선남선녀가 오고가는 신촌 네거리에 남근을 세워둔다면 외설 시비로 논란이 거듭될 것이다. p.125

비슷한 것만 나오면 중국의 영향 운운하는 주장은 하나의 모화주의에 다름이 아니다. p.138

도깨비는 실제로 괴상한 짓을 많이 한다. 그러나 단순하게 인간에게 해코지만 하는 미물은 아니다. 허깨비가 몹쓸 환상이라면 도깨비는 쓸 만한 환상이다. 쓸 만한 환상은 꿈을 불러일으키고, 그 꿈은 문화를 다채롭게 한다. 꿈을 불러일으키는 도깨비가 곳곳에서 출몰하던 (p.154) 조선시대에 구전문학도 르네상스를 맞았음을 상기해보라. p.155

일본의 오니가 우리 도깨비로 둔갑하여 동화채과 텔레비전을 장식한다. 아이들은 오니를 우리 도깨비로 착각한다. p.165

문화란 어떤 영향 관계에 놓였다고 하더라도 일방적인 경우는 없다. 늘 상대적 독자성을 지니고 발전하기 마련이다. p.180

오늘날 생태 환경 문제가 나날이 심각해지면서 자연으로 되돌려주는 리사이클링의 중요성이 부쩍 주목받고 있다. 쓰레기를 재생하는 문제가 늘 제기되지만, 리사이클링은 되돌려주기 위해 또 다른 열량을 요구한다는 문(p.200)제점을 지니고 있다. 그런 점에서 비추어보면, 똥돼지문화는 어쩌면 가장 완벽한 리사이클링이란 생각이 든다. ... 수세식 화장실이 보급됐고, 똥은 그야말로 물에 씻겨 강물로 흘러들어갔다. (p.201) ... 폐기물이 아니라 영원한 재생품이던 똥을 버림으로써 우리가 얻은 게 무엇인가. ... 깨끗한 수세식 처리가 완벽한 해결책이 아니라 도리어 새로운 환경 훼손의 시작임을 안다면, 우리의 서구식 청결관은 쳥결도덕주의에 불과하다. p.202

돼지 사육과 사료 문제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돼지고기를 금기 식품으로까지 만들게 된 원인도 거기서 찾을 수 있다. 이슬람교도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것,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는 그 원인을 자연 환경이 변하면서 사료가 불충분해진 데서 찾았다. p.206

역사는 늘 그랬다. ’바련이라는 이름으로 대량학살을 자행했고, ’발견이라는 이름으로 무참히 파괴했다. p.319

<황금가지>는 우리 자신의 당나무를 깊이 성찰할 것을 요구하는 듯하다. 왜 우리는 자신의 것을 포기하거나 침묵하는 것일까? 내가 그의 황금가지를 끌고 온 이유는 바로 우리의 황금가지가 자라나기를 기다리는 마음에서다. p.384

도대체 미신이란 무엇인가? ’문명인의 관점에서 야만인을 덜 개화된 인종으로 비하해서 보는 것과 같이 미신이란 다분히 제국주의적, 인종주의적 편견에서 나온 것이다. 어떤 사회에서 믿음으로 인정되는 것은 그 사회의 구성원에게 당당한 정신이 된다. 이에 반해 바깥 사회의 국외자에게는 미신이 된다. 더욱이 마을나무는 우리에게만 있는 것도 아니고 전 세계적으로 거론되는 것인데, 이를 미신나무로만 몰아댄 우리의 편협한 이해방식이 안타깝다. p.402

욕설은 결코 단순한 욕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한다. 따라서 욕설은 인간 심층심리와 행동 방식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민속문화의 하나다. p.521

신화를 단순한 허구나 전설 같은 이야기로 여기는 풍조는 근대 이래의 지나친 계몽주의적 지식관에서 비롯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신화학자 쿠르트 휘브너가 갈파한 신화의 명예 회복을 꿈꾸며, 우리 신화 속에서 여신과 남신의 자리를 찾아볼 필요가 있다. 신화의 원형이야 말로 어쩌면 오늘날 우리 삶의 비밀을 보여주는 청동거울이기에. p.526

하늘과 땅의 통치자, 올림포스 신들의 왕인 제우스의 가부장제 신화를 우리 여시 답습하는 중이다. 지금, 우리는 새로운 여신은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이 땅은 아직까지 간 큰 남성이 살고 있는 가부장적 사회다. 물론 조금식 균열을 보이고 있는 중이기는 하다. p.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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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렇게 불리는 것이 불편합니다-이건범 외] 유예된 논쟁, 예견된 분쟁 | Memento 2020-09-13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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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나는 이렇게 불리는 것이 불편합니다

이건범,김하수,백운희,권수현,이정복,강성곤,김형배,박창식 공저
한겨레출판 | 2019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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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한 시대에 호칭의 문제는 관심 밖이 었다. 첨예한 갈등과 대립의 씨앗을 남겨둔 셈이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야만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갈 수 있지다. 이 책은 그 시작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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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관관계에서 호칭은 가변적이다. 누구냐에 따라, 어떤 사람과 있느냐에 따라, 상황에 따라 변한다. 호칭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사람의 정체성은 하나로 정해지지 않는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 남성이자, 한 가정의 아들이자, 한 직장의 일원이고, 누군가의 배우자가 될 사람이다. 여기에 누군가의 친구이자, 선배이기도, 후배이기도 하다. 여기에 친밀한 정도에 상황적 맥락까지 추가 된다면 같은 사람도 무궁무진한 호칭을 가질 수 있게 된다. 호칭의 다양성은 어쩌면 축복일지도 모른다. 다양한 나의 정체성을 대변해주는 만큼, 개인의 존재가 풍부하게 비쳐질 수 있는 면이 있기도 하다.

문제는 호칭의 강압성이다. 호칭은 내가 호출 당하는일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 불러주지 않는다. 사회적 위치, 신분적 차이, 문화적 맥락 등 여러 조건들에 따라 불합리하게 불려진다. 특히, 조선 후기부터 시작된 가부장적 제도의 정착은 현재 다양한 논쟁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한겨레출판에서 나온 <나는 이렇게 불리는 것이 불편합니다>는 이러한 논쟁을 살펴보기에 적합하다. 한겨레에서 책을 쓴 이유는 서두에 나오듯, 본인들의 기사에서 호칭 문제로 호되고 논란을 당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도 이게 왜 문제가 되었는지 이해가 잘안되지만, 이 책이 그 논란의 해명에 그치지지 않기를 바랬다. 제목과 목차를 보고 책을 집어든 이유는 우리 전체 사회에 호칭의 문제에 대해서 궁금했지,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 부분들은 많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p.233p.240에서 <한겨레>에서 문제가 생겼던 사안이 책을 쓰게 된 계기라고 했고, 그 계기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분석을 빙자한 소극적 해명 혹은 시대의 흐름이 본인들의 표현에 따르지 못했다고 오해할 수 있는 내용일지 모른다. 개인적으로 해당 문제에 대해서 자세히 모르기에 일반적인 기준으로 본다면 저자가 제시한 보다는 가 적절하다고 본다. 뉴스는 객관성을 중시하는 만큼 이라는 표현보다는 를 통해서 누구든 동등하게 평가함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의 문제는 호칭의 사용을 공평하지 못하게 했다는 점이지, 개인적으로 가 잘못되었다는 건 아니라고 느낀다.

호칭은 인정의 문제라는데 깊은 공감을 한다. 결국은 상대방을 어떻게, 얼마만큼 존중해주고 인정해주냐는 차이점에서 문제가 생긴다. 호칭은 오랜 역사적 맥락을 지니겠지만,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문제점이 있다면 바꿔야 겠다.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 줄 방법을 찾아가고 고민해야 할텐데, 쉬운길은 아닐테다. 책에 소개된 다양한 호칭 문제들에 대해서 동의하는 부분도, 이건 아니다 싶은 부분도 많다. 각 기업에서 실시한 호칭의 변화도, 시민단체에서 실시했던 캠페인의 한계도 여기서 비롯되었을 테다. 시대가, 시대 의식이 바뀐만큼, 호칭도 따라가야 했지만 우리는 많은 것을 놓치고 살아왔다. 결국 미뤄진 토론은 싸움으로 번질 수 밖에 없다. 그렇게라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뀐다면 좋은 현상이겠지만...

언어에 민감하신 분들이셔서 그런지 고유어를 많이 써서 좋다. 언어나 호칭등에 관심이 많으신게 드러난다. 그러나 그만큼 영어식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 다양한 저자들이 참여한 만큼 개개인의 특성의 차이까지 강제할 수는 없었을 테다. 하지만 불필요하게 느껴질 정도로,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부분도 있다. 전문적인 용어라 어쩔 수 없다지만, 반드시 그런 단어를 써야 했는지는 의문이다. 누군가의 글을 첨삭하거나 할 처지는 아니지만, 호칭과 국어의 얘기를 하면서 굳이 외국의 전문적인 용어만을 차용해서 쓰는 모습은 좋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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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칭은 인정의 문제고, 인정의 출발점이다.(p.26) ... 누군가 나를 부르는 호칭에는 이 정체성의 일부분이 담겨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기대하는 호칭으로 불리길 원하고, 그런 기대와 현실이 어긋날 때 자신이 남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여긴다. 그것은 곧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부정 또는 도전으로 느껴진다. p.27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호칭은 단순히 정체성 인정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서열 인정의 성격을 강하게 띤다. 그래서 호칭을 둘러싼 갈등은 그 양상이 치열하고 졸렬하다. p.27

호칭은 개인이 속한 크고 작은 사회에서 그의 정체성과 서열을 인정받으려는 욕구와 바로 맞닿아 있다. p.28

호칭 문제는 단지 인간관계와 사회구성이 복잡해진 데에서 비롯하는 것만은 아니다. 민주사회라는 선언과 갑질 사회라는 현실의 충돌이 더욱 결정(p.31)적이다. p.32

호칭은 인정의 문제이므로, 호칭을 개혁함으로써 새로운 인정의 문화, 서열(p.34) 인정이 아닌 인격 인정의 문화를 시작할 수 있다. p.35

우리 사회의 호칭 민주화에서 관건은 나이지위남녀의 차이에 따른 호칭의 서열을 어떻게 녹여버릴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세가지는 어쩔 수 없는 차이를 인격의 차이로 확대시켜 차별을 정당화하는 전통적인 서열 기준이다. p.35

나이는 왜 깡패 노릇을 하게 되었을까?(p.40) ... 나이는 다른 무엇으로도 왜곡되지 않는 공평한 서열 기준이라는 믿음이 있어서다. ... 사회적 조건이 결부되지 않은 자연상태에서 가장 공평한 서열 기준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이에 따른 호칭과 높임법은 공평한 서열 기준에 걸맞는 권리와 의무일 뿐이다. p.41

우리 사회의 위계질서는 한 개인의 삶에서 나이를 기준으로 처음 세워지고, 그것은 호칭과 높임말로 뚜렷하게 틀지워져 굳는다. p.44

서열 기준은 곧 인정 기준이다. p.45

이 자연적 평등에 기초한 서열은 어떤 방법으로도 바꿀 수 없는 것인지(p.45)라 너무도 폭력적이고 권위주의적이다. ... 오직 나이 든 사람들만의 천국이다. 그러니 한국 사회에서 나이는 사회적 불평등에 반감을 지닌 사람들이 자연적 평등을 빌미로 디미는 유일한 잣대이지만, 어찌 보면 못난 자들이 인정받기 위해 마지막으로 디미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p.46

1980년대 후반의 민주화로 정치적 권위주의가 무너진 뒤에도 큰 변화가 없었으나 결정적으로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혼란에 빠졌다. 나이와 직위가 발을 맞추는 연공서열체계가 순식간에 무너진 것이다. p.51

일터에서 호칭과 높임법은 이 서열 질서를 확인하는 신분증 노릇을 한다. p.55

인정 욕구는 인간관계의 친밀성이라는 속성과 대화관계의 사회적 성격에 따라 달라진다. p.74

말 문화는 계속 바뀌므로 훗날을 대비해 이름 없는 일자리, 새로운 일자리에 번듯한 이름을 붙이는 일을 쓸데없다고 내팽개쳐선 안 된다. p.90

조직 분위기가 억압적이지 않다면 반드시 수평적이어야만 창의력이 높아진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p.105

우리는 시간과 대화의 힘을 믿어야 한다. 새 신을 처음 신었을 때는 발이 편할 수 없지만 신다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편해지는 것처럼 새 말과 새로운 호칭도 그렇다. p.124

말은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만들어 낸다. 현실이 말의 체계를 통해 파악되는 한, 말은 우리의 생각을 지배할 뿐 아니라 현실을 만들어나가는 체계이자 구조다. 말이 말로 그치지 않는 것이다.” -임지현 교수 p.134

우리는 이 호칭을 가짐으로써 우리가 원하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나하고 이야기 좀 하자고 요구할 수 있는 강력한 언어적 능력(권능)’을 지니게 되었다. 물론 그 요구를 받아들일지의 여부는 상대방의 권력과 더 큰 관계가 있다. p.153

호칭은 모든 대화의 첫 번째 관문을 여는 열쇠다. p.153

그러나 대화는 아무렇게나 시작되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지켜야 할 규칙이 있고, 예의가 있으며, 공동체의 인습이 있다. 다시 말해서 말하는 사람이 임의로 무언가를 말하는 것 같지만 그 구조 속에서 타당하게 인정되는 언어 사용법을 중심으로 대화가 전개되는 것이다. 이것이 대화의 규칙이다. p.154

한국 사회는 더욱더 평등한 사회를 지향하면서도 언어적으로는 끊임없이 차별화’, ‘차등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을 큰 문제로 꼽지 않을 수 없다. 사회의 지향점과 언어 사용의 실태 사이에 서로 모순이 생기는 것이다. 말로는 4차산업혁명이라는 거창한 목표를 내세우면서도 사실은 사회구조를 유지시켜나가는 접착제로서의 언어는 아직도 1차산업혁명 이전의 사회를 모델로 삼고 있는 셈이다. p.161

현재 한국 사회를 풍미하고 있는 호칭의 다양성은 사실 사회적 우위를 차지하려는 측과 바닥으로 내몰리지 않으려는 또 다른 세력 간의 숨가쁜 수싸움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p.171

사회 혁신 에너지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한다. 일상에서 나날이 사용하는 언어를 새로운 가치에 걸맞게 바꾼다면 익숙지 않은 새로운 것을 사용할 때마다 새로운 삶과 새로운 사회에 대한 새로운 책임감이 솟구치지 않겠는가. p.172

어린이는 어른의 물리적 과거가 아니다. 대개 좀 작을 뿐, 본연의 오롯한 인격체다. 함부로 다루지 말아야 할 것이다. p.277

필자의 주장은 앞에서 압축, 제시 됐다. / “상대에게 꼭 들어맞는 호칭을 힘들여 찾기 보다 맥락에 맞는 상황어를 발굴하는 것이 가치가 있다.” “대인고나계의 상대성을 일일이 따져 고정적 호칭을 찾기 보다는 새로운 호칭을 위한 기제를 개발하는 게 훨씬 더 의미 있다.” p.277

미래는 초연결사회의 특징을 띌 것이라 한다. ‘연결을 위해서는 협력연대가 밑받침돼야 함은 물론이다. 그것도 익숙한 것과의 물리적 결합이 아닌 이종간의 화학적 결정이 절실하다. 바로(p.278) 잡종과 혼성의 힘, 하이브리드다!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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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을 쏘다-이상아] 비교해서 읽어보는 재미 | Memento 2020-09-12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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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경성을 쏘다

이성아 저
북멘토 | 2017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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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을 쏘다와 1923 경성을 뒤흔들 사람들을 함께 읽어보면 재미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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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재미는 다양성에 있다. 같은 주제, 같은 내용이라도 저자가 누구냐에 따라 달라진다. 큰 뼈대는 바뀌지 않더라도, 표현하는 방식, 무게를 두는 지점은 저자별로 다르다. 역사를 표현할 때도 마찬가지다. (소설이지만) 삼국지나 초한지 같은 고전도 전체적인 줄거리는 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판본들이 존재한다. 이문열의 삼국지와 같이 정석이나 표준으로 통하는 작품도 있지만, 다양한 판본이 존재한다. 맣은 저자들과 판본 덕에 원전의 생명력이 길어진다. 소설가 이성아 <경성을 쏘다, 김상옥 이야기>와 기자 출신 김동진의 <1923 경성을 뒤흔든 사람들>은 역시 그렇다. 전작은 김상옥이라는 인물에, 후자는 의열단에 초점을 맞췄지만 전체적인 큰 줄기는 유사하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만들었기에 큰 줄기는 동일 할 수밖에 없다.

역사도 인문학의 한 갈래로 결국은 문학 작품이다. 역사와 소설은 상상력을 동원한다는 점에서도 동일하다. 가장 큰 차이는 실재한 사실에 어느 정도 기반을 두느냐 일 텐데, 역사 소설의 경우에는 이 경계가 더욱 모호해진다. 역사 역시 망각된 부분이 많은 만큼 상상력을 기반으로 추론을 해야 하며, 역사소설도 마찬가지다. 간혹 이런 창작물과 관련해서 역사적 진실 논란이 발생한다. 지나친 왜곡이나 상상력이 가미된 경우 소비자의 오해를 살 수 있다고 걱정한다. 이것은 비단 역사소설이나 사극에만 해당하는 부분이 아니다. 전통적인 역사서도 충분히 빠질 수 있는 위험이다.

차이는 표현 방식에 있다. 개인적 취향에 따라 취사선택할 수밖에 없다. 좀 더 생동감 있고, 인물에 이입을 하고 싶다면 소설가 이상아의 책이 맞을 테다. 개인의 생각과 마음까지 상상하는 소설은 인물을 더 세밀하게 묘사할 수 있다. 감정이입이나 인물의 행동까지 추론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와 닿을 수 있다. 좀 더 객관적으로 사건을 보고 싶다면 논픽션에 해당하는 기자 출신의 김동진의 책을 보면 된다. 소설보다는 생동감이 덜하고, 딱딱할 수 있지만, 다양한 사료들이 소설보다 좀 더 객관적으로 제시 될 수 있다. 각자 장점이 있고, 재미가 있다. 중요한 것은 얼마만큼의 엄밀성을 가지느냐다.

두 책을 비교해서 보면서 독립운동이 떠오른다. 독립의 길은 다양하게 이어져 있다. 그럼에도 방법의 차이, 생각의 차이로 얼마나 분열되었던가. 이는 우리 민족의 역량 문제보다 일제의 견제와 탄압, 시대적 흐름, 인간이라는 존재에 근원적 문제겠지만, 이 두 책의 모습과 유사하다. 독립운동을 기억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 기억의 목적은 동일하다. 의열단 이야기는 김동진에 의해 시작되고, 이상아의 소설로 되살아나서, 영화 <암살>로 전 국민에게 각인되었다. 혹자는 정치적, 이념적 프레임으로 불편할 수 있겠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이러한 이야기들이 우리의 과거를 기억하고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독립운동의 목표가 결국 조국의 독립이었듯, 기억을 되살리는 문제들도 결국 우리 사회를 낫게 만들기 위함이다. 방법과 방향의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가 잊어서 되는 기억은 없다. 좋건 나쁘건 그 기억의 영향들은 우리 속에 존재한다. 우리는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오히려 기억을 직시하고, 토의하고, 싸워야 한다. 그 수많은 방향 속에서 수많은 갈등 끝에 더 나은 길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역사와 소설, 인문학의 힘은 여기서 비롯되지 않을까. 거창한 게 싫다면 그저 재미로 두 책을 비교해서 읽어보는 것도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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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의 백성으로 태어난다는 건 원죄 같은 것이었다. 갓 태어난 너를 보며 기뻐할 수만은 없었던 아비를 이해할 수 있을지. 선교사들이 뭔가를 가르쳐 준다길래 무작정 다녔던 교회에서 원죄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 모두 죄인이라는 식의 숙명론적 올가미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온몸으로 거부감이 들었다. 모욕감까지 들었다. 그런데 갓 태어난 너를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말이 바로 원죄란 말이었다. 모욕감이나 거부감은, 그러니까 식민지 백성이라는 나 자신에 대한 자각이었던 것이다. p.43

형님은 두려움과 공포의 차이를 알아요?” / “말해 보게.” / “두려움은 예상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것이죠. 반면 공포는 미지에 대한 거예요. 물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물을 모르기 때문에 무서워하는 겁니다. 물에 뛰어들 용기만 있으면 공포는 사라지죠. 총을 한 방이라도 맞아 본 자가 한 방 더 맞는 게 별게 아니라는 걸 아는 것 처럼요. 가장 나쁜 건, 죽음 바로 직전까지 갔다 오는 거예요. 지옥문 앞에서 돌아온 자, 갔으되(p.112) 경험하지 못한 것, 그게 공포로 남는 거 아니겠어요?” / “무슨 말인지 알겠네. 끔찍하고 잔인한 육체적 고문 앞에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이겠지. 하지만 그런 식의 이성적인 추론을 넘어서는 자도 있네. 그게 처음이든 백 번째든, 끝내 이겨 내겠다는 의지를 가진 자들 말이야.”/ “그런 사람이 따로 있다는 거예요?” / “나는 그렇게 믿어. 한 인간의 운명은 그 지점에서 갈린다고 생각해.” / “운명이 갈린다.”/ “똑같은 상황에서 누구는 목숨을 걸고 누구는 일신의 영달을 추구한다. 그것을 가르는 것이 무엇인 거 같은가?” / “글세요, 양심 같은 거?” / “양심, 그렇지만 목숨을 걸기에는 좀 약하지 않나?” / “그럼 뭔가요?” / “나는 존엄성이라고 생각하네. 자기 존엄성.” / “존엄성?” / “자존감이 강한 사람들은 정말 지켜야 되는 게 뭔지 알고 있지.” / “그들이 그런 사람들인가요?” (p.113) / “그들은 영혼이 순결한 사람들이야. 존엄성이니 이런 걸 생각도 하지 않는 순결한 영혼.”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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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이정모] 정치적 선명성이 강점이자 약점 | Memento 2020-08-29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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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

이정모 저
바틀비 | 2018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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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장점은 다음과 같다. 재미있고 쉽다. 과학적 태도를 익히기에 좋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선명하다.(마지막은 단점일 수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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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어렵다. 어린시절 세상의 무서움을 모를 때, 꿈이 과학자였다. 세상 모든 일을 다 해낼 수 있을 것 만 같았던 시기였다.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재능이 없음을 깨달았다. 과학자에게 가장 필요한 재능은 실패를 이겨내는 힘이었다. 실재로는 수학에 약해서였지만, 사실 그것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과학자는 매일 실패하는 사람들(p.340)”임을 알았다면 꿈조차 꾸지 않았을 테다. 그런 나에게 이정모 관장의 <저도 과학이 어렵습니다만>은 제목만으로도 울림이 있었다. “스스로를 사이언스 커뮤니케이터라고 부르는 사람으로 서울시립과학관 관장, 국립과천과학관 관장을 역임하고 계시다. 나름 과학의 대중화를 선도하고 있는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책의 첫 번 째 강점은 쉽고 재미있다. 글을 쓰면서 느끼는 점이지만, 제일 어려운 부분이 어려운 부분을 쉽게 쓰는 것이다. 대부분의 글을 쓰다보면, 있어보이게 하기위해 쉬운 부분을 어렵게 쓰곤 한다. 이정모 관장의 글은 다르다. 과학이 쉬울리는 없겠지만, 최대한 쉽게 쓴다. 게다가 위트까지 들어있다. 가벼운 마음으로 과학적 이야기에 빠져들 수 있다.

두 번째 강점은 짧은 분량의 글 안에 과학 이야기와 생각할 거리들이 다양하다. 특히, 과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은 깊게 새겨봄직하다. 우리는 과학이 진실이자 신앙인 시대를 살고 있다. 알쓸신잡에서 유시민이 과학자는 제사장이라고 평했는데, 현 시대의 상황을 잘 진단했다고 본다. 하지만 이정모 관장은 이러한 상황을 경계한다. 과학은 틀린 것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만(p.10)” 그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과학이란 옳고 그름을 가르는 게 아니다. 과학이란 의심을 통해서 잠정적인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p.142)”이므로, 지식의 집합체가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태도이자 사고방식(김상욱, p.11)”이다. 그래서 과학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연습이 필요하고, 이 책은 그 연습을 위해 가장 좋은, 쉬운 방법이 될 수 있다.

마지막 강점은 정치적 선명성이다. 되려 약점이 될 수 있겠지만, 선명하게 본인의 정치적 입장을 표명한다. 아인슈타인이 에이브러햄 링컨 탄생 130주년에 한 말을 인용하며, “과학자에게는 자유로운 과학 연구를 위해서 정치적으로 적극 나설 의무가 있습니다.”(p.223)고 주장한다. 여기에 눈살을 찌푸리며 정치 과학자라고 욕할지 모르겠다. 분명히 정치적인 계산만으로 행동하는 과학자가 있다면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위선이고 과학을 무너뜨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계산으로 데이터를 조작하고 부정을 묵인하고 도덕적 문제에 침묵한다면 절대적으로 잘못이다. 하지만, 자신의 과학, 세상을 대하는 태도이자 사고방식을 올바르게 표명하는 거라면 적극적으로 정치적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서로간의 적극적인 정치 속에서 과학이 또 한 단계 발전할 수 있는 동력이 되지 않을까도 싶다.

나도 과학을 모른다.”는 저자의 말은 겸양의 표현이든, 인간의 유한함을 의미하든, 과학이란 학문의 위대함을 의미하든 결론적으로 한 가지를 보여준다. 과학은 단순 학문이 아니라 살아가는 태도임을. “틀린 것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만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있(p.10)”. 한때 모든 학문이 과학적이라는 말로 객관성을 얻으려 노력했고 나름의 성과(비판도 있겠지만)를 냈다면,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생활에서의 과학적 태도가 필요한 때인지 모른다. 가짜뉴스가 판치고, 극단적인 의견들이 넘쳐나는 지금. 지금 알고 있는 사실이 진리가 아님을, 언제든 증거들이 쌓이면 뒤집힐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가는 것. 이런 삶의 태도가 중요한게 아닐까. 오히려 과학이 신앙이 되어가는 시대에 과학적인 태도가 가장 부재하다는 게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다. 과학과 불가분의 관계 속에 살지만 비과하적 태도가 많아지는 지금 이런 글들이 많이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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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지식으로 여긴다면 우리는 매일 틀린 지식을 쌓고 있는 셈이다. 틀린 것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만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p.10

칼 세이건은 과학은 단순히 지식의 집합이 아니다.(p.10) 과학은 생각하는 방법이다라고 했다. 존경하는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는 과학은 지식의 집합체가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태도이자 사고방식이라고 했다. p.11

지식을 쌓는 것은 부지런하기만 하면 되지만 생각하는 방법과 삶의 태도를 바꾸는 데는 연습이 필요하다. p.11

창의성은 심심할 때 나온다. 좀 쉬자. p.35

당장은 무용해 보여도 언젠가는 우리 삶을 바꾸는 것이 과학이다. p.47

과학적이라는 것은 최대한 간단하게 잘 설명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버려야 할 오컴의 면도날 ... 것은 탐욕이며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것은 바로 염치. 염치만 있으면 누구나 과학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p.108

과학이란 옳고 그름을 가르는 게 아니다. 과학이란 의심을 통해서 잠정적인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 이야기가 멈추면 그것은 과학이 아니다. p.142

믿음을 좋아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남을 해롭게 한다.” <맹자> p.143

사람들은 왜 이상한 것을 믿는가?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심은 진실로 가는 첫걸음이다. p.177

대화의 기본은 팩트와 스토리를 구분하는 것이다.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사실인지, 아니면 내가 머릿속에서 지어낸 스토리인지 스스로 알아야 한다. 스토리 없이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상대방에게 먼저 팩트를 이야기하고 확인해야 대화가 된다. p.201

과학은 의심하고 질문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것은 상대방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다. p.202

약학 칼럼니스트 정재훈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항상 세 가지를 의심해야 한다. 자신의 눈, 자신의 기억 그리고 다른 사람의 말이 바로 그것이다.” p.207

권위에 도전하고 신화를 부숨으로써 사회를 진보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과학인데, 때로는 오히려 권위와 신화를 공고히 만드는 데 과학이 복무하기도 한다. p.221

과학자에게는 자유로운 과학 연구를 위해서 정치적으로 적극 나설 의무가 있습니다. ... 과학자는 ... 어렵게 얻은 정치적, 경제적 신념을 똑똑히 밝힐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아인슈타인이 에이브러햄 링컨 탄생 130주년에 한 말이다. p.223

자연에 평화로운 죽음이란 없다. 그것이 바로 자연사다. p.244

인간 사회가 동물의 왕국과 다른 것은 서로 존중하고 공정한 규칙 안에서 경쟁하고 협력하기 때문이다. 동물의 왕국이 재미있다고 인간 사회마저 동물의 왕국처럼 만들면 안 된다. 자연을 반면교사로 삼고 인간 사회를 더욱 명랑한 곳으로 만들려고 고민하기 위해 필요한 곳이 바로 자연사 박물관이다. p.244

놀면서 사회를 배우고, 스스로 규칙을 만들며, 위험을 감수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호모 사피엔스의 결정적인 장면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모든 동물 가운데 유년기가 가장 길다. 부모는 자식들을 오랫동안 돌봐야 하며 자식들은 성장하기 전까지 한참을 놀았다. 이에 반해, 네안데르탈인은 가능한 한 빨리 자라서 연장자의 자리를 채워야 했다. 그들은 유년기가 훨씬 짧았다. 유년기는 놀면서 배우고 사회성과 창의력을 개발하는 시기다. 네안데르탈인은 호모 사피엔스에 비해 인지능력이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p.253

종을 가리지 않고 모든 수컷은 암컷을 꼬시기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한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은 부질없는 짓이다. 지구에 살고 있는 수컷 가운데 죽기 전에 암컷 곁에 한번이라도 가본 개체는 전체 수컷 가운데 4%에 불과하다. 나머지 96%의 수컷은 평생 짝짓기 한 번 못해보고 생을 마감한다. 여기에 비하면 인간 남성은 정말로 복받은 존재다. p.287

철학자는 자신이 누군(p.309)지 찾는 사람이고 천문학자는 자신의 위치를 찾는 사람’ p.310

본질에 접근하는 수준에서 문화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과학의 대중화다. (p.310) ... 그저 쉽고 재밌게 설명한다고 해서 과학 대중화 운동은 아닌 것이다. p.311

도마뱀 꼬리 잘라내기는 힘센 놈들이 자신의 죗값을 힘없는 약자들에게 온전히 덮어씌우고 빠져나가는 행위를 표현하는 말이다. 이런 데 도마뱀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 도마뱀은 그들보다 훨씬 훌륭하다. 도마뱀은 남의 꼬리가 아니라 자기의 꼬리를 잘라낸다. 엄청난 자원을 포기한 것이며 이후의 삶도 만만치 않을 것을 잘 알면서 잘라낸다. 그리고 일생에 단 한 번만 꼬리를 잘라낸다. / 그런데 돠뱀 꼬리 잘라내듯 곤경을 모면하는 사람들은 어떠한가? 자기가 아니라 남을 도려낸다. 거의 모든 것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부분을 포기할 뿐이다. 그리고 꼬리 자르기를 한 번만 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들은 평생을 그렇게 산다. 도마뱀이 그들보다 훨씬 훌륭하다. / 재생능력은 하등한 생명체에게만 있다. 왜 인간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는 것일까? 몸이 불편해진 사람들을 아직은 멀쩡한 사람들이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손과 발과 눈이 다른 사람을 위해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p.327

과학자는 매일 실패하는 사람들이다. p.340

변화는 도둑처럼 찾아온다. p.366

이제는 완전히 다른 시대다. 부모의 지난 인생 경험이 자식에게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 시대다. 부모가 살았던 시대는 자식이 살아갈 시대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부모의 권고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야 하는 시대다. 다만 부모의 애정만은 가슴에 품으면서 말이다. p.368

창의성이란 하늘에서 툭 떨어지는 게 아니다. 무슨 괴상한 생각을 해내는 게 창의성이 아니다. 해 아래에 새로운 것은 없다. 창의성이란 있는 것들을 이렇게 엮고 저렇게 편집하여 새로운 것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창의성의 근본 바닥에는 기억된 지식이 있다. 기억이 없으면 창의성도 없다. p.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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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와 선비-백승종] 우리에게 선비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 | Memento 2020-08-27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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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신사와 선비

백승종 저
사우 | 2018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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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 다시 선비(정신)을 소환하는 이유는 한국의 새로운 길을 제시할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그 새로운 길은 외국이 아닌 우리 내면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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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킹덤> 시리즈의 유행으로 세계적으로 갓이 유행했다. GOD와 발음의 유사성 때문일까. 정작 한국인들은 의아한 반응이었다. 사실 갓 하면 답답한 마음이 든다. 상투와 비실용적인 도포와 함께 고지식하고 답답한 선비의 이미지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조선사회를 이끌었던 선비라는 존재는 우리에게 아픈 역사의 원흉으로 기억한다. 근대화 시기에 성리학에 매몰되었던 그들은 고고한 이상을 실현하기는커녕 지금까지도 역사의 상처를 남겼다. 물론 선비의 잘못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각인된 이미지는 긍정적이지 못하다. 그런 와중에 우리가 부정적으로 생각할 만한 문화를 해외에서 주목해주니 멋쩍은 기분이 든다.

<신사와 선비>는 묻는다. “오늘의 우리에게 선비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 (p.287)” 과거의 고리타분한 유물일까. 아니면 역사의 과오에 불과할까. 저자는 대척점에 있는 두 존재를 비교하여 설명한다. 동양(한국)에 선비가 있다면 서양에는 신사가 있다. 이 둘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지는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주목하는 것은 차이점이다. 서양의 신사는 자기 문명의 성장 동력이 되었다면, 동양의 선비는 그렇지 못했다. “서구에서는 신사의 길이 결국 시민의 길이 되었다. 그러면 선비의 길에도 과연 그에 상응하는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일까? p.11” 이를 통해 우리가 잊고 살았던 선비라는 존재에 질문을 던진다.

결론적으로 책은 우리의 선비들은 지나치게 낭만적이고 낙관적이었다.(p.287)” 평한다. “‘인간의 선한 본성을 회복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이상적인 선언은 학자나 사회의 선생으로서 역할을 할 때는 무방하다. 오히려 권장할 만하다. 문제는 국가를 경여하고 운영함에서다. 세상일은 이상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물론 이상 없이 현실만으로 살아갈 때, 그 현실은 지옥에 가까워질 수 있다. 그럼에도 현실적인 면을 고려하지 못한다면, 국정 운영자로서는 아마추어일 수 밖에 없다. 정치든, 삶이든 결국은 이상과 현실 간 타협의 연속이다.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수기치인의 성리학적 정치는 분명 이상적이고 좋은 의도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현실은 이상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갓과 같이 선비 역시 되살아 날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전통의 계승이란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복원하는 일이 아니며 세월의 간격을 뛰어넘어 후세가 공감하는 가치와 태도를 되살리는 것이면 족(p.13)”하다. 그래서 책은 힘줘 말한다. 선비 혹은 선비정신은 한국 사회를 구할 길이다. 우리는 잊어버린 문화유산에서 시민들이 높은 문화적 수준에 도달한 분권적 사회를 지향하는 것. 지식인과 시민이 공고한 연대를 구축한 사회 (p.379)”를 만들어가는 법을 배울 수 있다.

한국인이라면 조선에 대해서 부정적인 감정을 가진 사람들이 꽤 있다. 우리가 지금껏 문제라고 생각하는 수 많은 굴레들이 이 시기에 유래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상 500년의 왕조를 유지한 사례는 흔치 않다. 그것도 무력을 동원한 통치가 아닌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할지 모른다. 그 체제가 500년 동안 무너지지 않았던 이유는 분명 어떠한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대의 지배층이었던 선비는 분명 어떤 탁월함을 지녔을 테다. 저자는 그 힘을, 우리가 잊고 살았던 탁월함에 대해 얘기한다. “문화적 전통은 단속적으로 후세에 영향을 준다.(p.12~13)” 그렇기에 지금 선비에 대해 고민할 시기다. 한국 사회의 새로운 길은 멀리 있지 않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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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심서>에는 한 가지 흥미로운 대목이 발견된다. “지혜로운 선비는 평소에 서류를 잘 정리해둔다. 임기가 끝난 그다음 날 소리 없이 관아를 떠나는 것은 맑은 선비의 법도다. 모든 장부를 투명하고 바르게 마감하여, 절대 이러쿵저러쿵 잡음이 나지 않게(p.5)하는 것이 지혜 있는 선비가 할 일이다.” p.6

신사의 길과 선비의 길에는 서로 비슷한 점이 많았으나, 양자를 동일시할 수는 없다. 신사의 길은 중세 기사도에서 비롯되어, 결국 근대 시민사회의 미덕으로 승화되었다. / 선비의 길은 그렇지 않았다. 조선 500년 동안 숱한 역사적 굴곡을 겪으며 선비의 길은 더욱 세련되고 빛났으나, 퇴락한 점도 없지 않았다. 그러다가(p.10) 조선왕조의 멸망과 더불어, 선비는 명맥조차 잇기 어렵게 되었다. p.11

서구에서는 신사의 길이 결국 시민의 길이 되었다. 그러면 선비의 길에도 과연 그에 상응하는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일까? p.11

문화적 전통은 단속적(p.12)으로 후세에 영향을 준다. ... 전통의 계승이란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복원하는 일이 아닐 것으로 믿는다. 세월의 간격을 뛰어넘어 후세가 공감하는 가치와 태도를 되살리는 것이면 족하다. p.13

기사도라는 중세적 유산이 신사도로 변형되어, 근대 시민국가의 건설에 이바지한 것이었다. p.19

기사도 정신은 서양 중세 귀족문화의 정수라고 볼 수 있다. 기사의 도덕성이 강조되었고, 전통적인 상무정신이 문자로 고정되었다. 기사는 영주에 대한 봉사를 신성한 의무로 받아들였다. 기사와 왕 또는 영주의 관계 역시 법제화되었고, 거기에 종교적 신성함까지 부여되었다. p.34

하나의 제도와 관념이 후대에도 어떤 의미를 가진다면, 거기에는 모종의 사회문화적 맥락이 숨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전통의 재발견은 그 전통이란 것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되리라는 사회문화적 확신에서 출발한다. 망각된 과거의 역사적 사실이 화려한 수사의 옷을 입고 부활하는 배경이다. p.38

어느 사회에서든지 지배층은 그들의 가치관에 합당한 도덕과 규범을 상정한다. 또한 그들은 계급적 취향에서 비롯한 독특한 미적 관점을 공유하기 마련이다. 지배층의 미학적 관점과 도덕 규범은 역사의 용광로에서 녹아, 하나의 독특한 세계관을 형성한다. p.83

사상적인 측면에서 보면, 사이고 다카모리 등은 구한말의 위정처사파에 해당했다. 그들은 유교적 세계관을 옹호했고, 서구 지향의 근대화를 끝까지 반대했다. 그런 점에서 양자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런데 일본은 사무라이의 나라였으므로, 무력투쟁을 통해 나라의 장래가 결정되(p.89)었다. 조선은 선비의 나라여서 끊임없는 논리적 공방이 계속되었다. 결과적으로 저들은 6개월간의 전쟁을 통해 장차 국가가 나아갈 방향을 결정지을 수 있었다. 그에 비해 조선의 찬반양론에는 끝이 없었다. 어느 편이 더 나았을까. 대답하기 난처한 문제다. 그러나 어느 편이 더 효율적이었는지를 묻는다면 그 대답은 간명하다. p.90

베네딕트의 일본관은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나의 관심을 끈다. 첫째, 그의 평가는 중요한 사안을 모두 이항대립으로 설정했다는 사실이다. 얼핏 보면 객관적이고 균형잡힌 관점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런 식의 평가는 인류사회의 어느 집단에게나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 (p.95) 둘째, 일본에 대한 베네딕트의 호기심과 긍정적인 관점이 내게는 충격적이다. 이 책이 출간된 시점은 2차 세계대전이 막 끝난 뒤였다. 그러므로 그의 연구는 미국이 한창 일본과 전쟁을 벌이던 1940년대에 진행되었다. 그런데도 베네딕트는 적국인 일본이 모든 면에서 최고 수준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 베네딕트가 니토베의 책으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p.96

서양인들이 일본의 역사와 문화에 호감을 가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 생각에는 서너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첫째, 17세기부터 일본은 네덜란드와 부단히 교류했다. ... 둘째, 19세기 후반 서양에 다량으로 전파된 일본의 다색판화도 일본 문화에 대한 평반을 좌우했다. (p.97) ... 또한 에도시대에 일본에서 생산된 도자기 역시 서양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 셋째, 일본은 비 서구 지역에서는 유일하게 서구식 근대화에 성공한 나라였다. ... 이에 더해 니토베 같은 일본의 근대적 지식인들은 서구인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책자를 다수 간행했다. p.98

기사와 사무라이의 차이(p.100~102), 선비와 사무라이의 차이(p.102~103)

지난 1000년 동안 기사도는 유럽 사회의 변화를 추동한 힘이었다고 단언해도 좋을 것이다. p.104

클라크는 <맬서스, 산업혁명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신세계>라는 책에서, 세계 주요 국가의 역사적 인구통계를 비교, 분석했다. 다각(p.108)적인 연구 고찰을 통해서 그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이전, 영국의 상류층은 하층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수의 자녀를 출산했다는 것이다. (p.109) ... 상류층의 사회문화적 특징이 영국 사회의 모든 영역으로 확산되었다. ... 인구 증가와 가치관의 변화가 산업혁명의 주요한 동인이며, 산업혁명의 효과를 배가시켰다. (p.113) ... 상류층의 자녀들이 사회 각 부문에 진출하자, 사회윤리 또는 가치관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p.117

이러한 영국의 인구 동향은 일본 및 중국과는 완전히 달랐다. 동아시아의 강대국에서는 상류층의 인구 증가가 저조했다. 하층민의 자녀 수보다 약간 많은 정도였다. 왜 그랬을까. 일본과 중국의 상류층은 자녀의 신분이 강등될까 염려했다. 그래서 출산율을 낮추는 데 힘을 쏟았다는 것이다. p.114

내가 강조하고 싶은 사실은 영국 산업혁명의 주축은 젠트리였다는 점이다. p.129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된 것은 1750년경이었다. 혁명이라고 표현했으나, 그것이 말 그대로 혁명적이지는 않았다. 기술혁신의 과정은(p.130) 대단히 복잡했다. 산업화 과정 또한 순탄하지 않았다. p.131

18세기 영국인들이 경험한 역사적 변화 가운데서 나의 주목을 끄는 것은 세 가지다. 첫째, 기술상의 발전과 진보가 눈부셨다. ... 둘째, 영국의 사회적 분위기에는 유별난 점이 있었다. (p.133) 나라처럼 사업 기회를 적극적으로 보장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들은 사유재산권을 신성시했다. 특허권까지도 인정하는 사회가 영국이었다. 셋째, 영국인들의 세계관에 큰 변화가 일어났따. 여기에는 칼뱅주의의 영향이 컸다. 그들은 근면한 태도로 생업에 종사하여 재산을 증식하고자 노력했다. 칼뱅주의자들의 이러한 윤리관은 노동과 선업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다. p.134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가장 먼저 일어난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여덟 가지로 정리하고 싶다. 1. 농업생산력의 발전, 2. 인구 증가, 3. 기술상의 진보, 4. 지리적 이점, 5. 사회간접자본의 발달, 6. 영국의 세계 지배, 7. 정치적 안정, 8. 사상적 이유. p.136

20세기에 인류사회가 겪은 많은 변화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것은 무엇일까. 자유와 평등이라는 시민적 가치의 보편화가 아닐까 한다. 전통사회의 최대 약점이었던 권위적이고 위계적인 사회질서가 마침내 그 수명을 다했다. 영국의 젠트리가 선도한 산업혁명이 인류의 삶을 근본적으로 혁신한 셈이다. p.148

기독교는 보편종교다.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는 거듭된 도전과 위기에도 불구하고, 서양의 역사를 견인하는 놀라운 힘을 잃지 않았다. p.153

스포츠맨십 교육을 유난히 강조한 학교는 영구의 퍼블릭스쿨이었다. 중세 기사도의 영향을 받은 것이(p.157) 명백하다. 퍼블릭스쿨에서는 스포츠맨십을 젠틀맨십, 곧 신사도의 실천으로 간주했다. 청소년들이 신사다운 성품을 기르는 데 가장 중요한 교과목이 스포츠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페어플레이란 곧 신사도였고, 그 근본정신은 기사도에 맞닿았다. p.158

19세기 후반부터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영국과 프랑스의 선례를 따랐다. 그들 역시 시민교육에 박차를 가했다. 고전인문 교육을 교과의 중심으로 삼고, 시민의 인격을 도야했다. 유럽 각국은 애국적이며, 질서 있고, 건강한 시민을 키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따. 그 과정에서 신사도의 핵심 가치인 예절과 명예심, 애국심과 희생정신, 지도력과 근면, 성실이 강조되었다. 또 신사도를 강조하는 스포츠가 학교 교육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체육 활동의 일환으로 시민생활 속으로 깊이 파고 들었다. p.166

인간의 삶에 쾌락을 선사하는 선을 추구한다. 반면에 불행의 원천인 악을 피한다.’ 이런 주장은 중국 고대의 철인 맹자의 성선설과도 유사하다. 조선 선비들의 심성론과도 맥락이 일치한다. / 그러나 동서양의 철인들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었다. 선비들은 개인과 사회의 도덕심을 배양하는 데 중점을(p.169) 두었다.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도덕보다는 인간의 권리를 강조했다. 그들은 인간의 쾌락 또는 행복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자연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즉 인간은 누구나 자유와 평등의 권리를 가지고 있는 바, 이것은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천부의 권리라는 확신이었다. 선비들은 끝내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다. p.170

근대사회의 지배권을 행사한 것은 부르주아지였다. 그런데 그들의 가치관과 행동양식은 젠트리 또는 전통귀족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신사도는 근대사회를 거쳐 현대의 시민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측면이 적지 않다. p.182

유럽인들은 중세 이후 수백 년 동안 많은 역사적 경험을 축적했다. (p.194)편으로 그들은 기사도와 신사도의 전통을 의식적으로 계승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법과 기독교 신앙의 영향 아래 근대 자본주의의 싹을 틔웠다. 그리하여 현대사회는 시민의식이라 불리는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기에 이르렀다. p.195

한편 서구사회는 개인의 주체성을 강조하면서도, 합리적 판단 또한 중시한다. 그들은 자신의 권리와 의무만 구별하는 단계에서 벗어났다. 자치와 연대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하는 분위기다. 서구 시민사회는 여러 가지 여사적 경험을 겪으며 점차 저항적 존재로 성장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권력의 부당한 요구에 순응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시민들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가 현대 시민사회의 미덕으로 부각된다. 21세기 서구의 시민권은 대략 그와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p.195

수기치인은 순수한 도덕적 개념이다. 나 신과 온 세상을 교화 한다는 것이다. 가르쳐서 크게 변화시키는 실천적 행위다. 물리적으로 외압을 가해서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형정이다. 순전히 도덕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은 예악이다. 선비가 추구한 수기치인의 길은 예악을 매개로 한 것이었다. p.206

조광조는 경연에서 여형의 사례를 자세히 아뢰었다. 그와 그의 부조를 표창하자고도 주장했다. 조광조는 여형의 예를 들어,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타고난 귀천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누구든지 정심성의로 수기에 전념한다면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주장했다. 조광조에게 사노 여형의 사례는 여간 고무적인 것이 아니었다. / 그런데 불행히도 1519(중종 14) 겨울, 조광조의 시대는 일찌감치 막을 내리고 말았다. p.222

성리학자들은 예악을 형정보다 앞세웠다. 그들은 물리적인 힘(형정)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았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교화를 통해서 살 만한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 같은 시기 서양에서도 예절에 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 서양 사람들에게 예절이란, 신분과 교양의 차이를 드러내는 수단이자 정중하고 품위 있는 사교생활을 위한 도구였다. 그에 비해 조선 선비들의 관점은 전혀 달랐다. 선비들은 예절을 성리학적 이념의(p.232) 정화라고 확신했다. p.233

김장생과 송시열 등이 추구한 예학에 폐단이 없지 않았으나, 거기에도 순기능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예의와 질서를 회복함으로써 도달하고자 한 구극의 세계가 있었다. 그것은 무한히 평화롭고 조화로운 대동의 세계였다. 차별과 대립이 완전히 소멸된 유교의 이상이 바로 대동 세계였다. 수기에 관한 송시열의 인식은 17~18세기 노론의 공통적인 가치관이기도 했다. p.234

가난하면 자신의 몸을 홀로 착하게 하고, 영달하면 천하를 모두 착하게 만드는 것이다.” (<맹자> 진심장) 그는 이것이야말로 선비가 벼슬에 나아갈 때든, 집에 있을 때든 꼭 명심해야 할 가르침이라고 여겼다. p.237

천인합일설은 미신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주자연의 이치를 본받아 아름답고 조화로운 세상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선비들의 굳센 의지를 표현하는 개념이었다. p.254

우리의 선비들은 지나치게 낭만적이고 낙관적이었다. 인간의 선한 본성을 회복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선비들의 이러한 신념만으로는 현실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고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어려웠다. p.268

조선 선비들의 이상을 세 가지 측면 ... 천인합일에 관한 그들이 철학적 모색 ... 하늘의 명령에 순응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 그들이 그린 천명도 ... 시끄러운 세상사를 잊고 조용히 자연에 묻혀 살면서도 언제나 자신을 다련하고 후학을 기르기에 여념이 없던 선비들의 일상 p.286

오늘의 우리에게 선비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선비들은 지나치게 추상적인 개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또 자연과 사회현상에 대해서도 체계적, 분석적으로 접근하지 못했다고 비파할 수도 있다. / 그러나 솔직히 말해 조선의 선비들에게는 현대인에게 결핍된 많은 미덕이 있었다. ... 우리는 지난 한 세기 동안 망각한 채 살았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소중한 문화적 자산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p.287

어지러운 세상에서 창고한 뜻을 세우기도 어렵지만, 그러면서도 심신을 온전히 지키기란 더욱 곤란한 일일 것이다. p.325

평생 인과 선을 실천에 옮기며, 도리에 어긋나지 않게 애 쓰는 것. 이것이 출처의 근본이었다. p.331

선비답게 산다는 것은, 허다한 난관을 뚫고 마지막 순간까지 내면의 높은 지향을 견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요체였다. p.333

16세기부터 조선 사회는 윤리적 인간의 시대를 맞이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모든 선비들이 윤리적으로 완벽했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누구라도 윤리적 하자가 발견되면, 세인의 호된 비판을 피하기 어려웠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다. 조선 사회처럼 윤리적 기준이 높은 사회에서는 자칫하면 위선으로 흐르기 쉬운 법이다 실제로 선비들의 언행을 살펴보면 위선이 의심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물론 위선은 금물이다. 그러나 그 역시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p.333

성리학을 근간으로 운영되었던 조선 사회의 굵직한 폐단을 몇 가지만 예시해보자. 첫째가 서얼차대, 둘째가 당쟁의 폐단, 셋째가 문체반정, 넷째가 금서를 통한 사상의 탄압, 다섯째가 위정척사를 내세운 쇄국정책이었다. p.339

풍속이 임금보다 무섭다, -장자 p.343

겉으로 보면, 조선왕조는 중앙집권적 국가였다. 그러나 그 실질은 달랐다. 조선은 마을공화국의 연맹체나 다름없었다. 선비들이 건설한 조선 사회의 실상은 우리가 지레짐작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난다. ... 그로부터 우리는 한국 사회가 나아갈(p.378) 방향을 발견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시민들이 높은 문화적 수준에 도달한 분권적 사회를 지향하는 것. 지식인과 시민이 공고한 연대를 구축한 사회라야 희망이 있다. 이야말로 비인간적 차별과 양극화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한국 사회를 구할 수 있는 길이다. p.379

서당은 선비들의 정치적, 문화적 활동 거점으로 훗날 서원의 모체가 되었다. 또한 성리학을 연구하는 장소이자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공간이었다. p.416

조선시대의 스승과 제자는 정치적 운명을 함께했다는 점이다. 김종직의 제자들, 즉 정여창의 동문들은 거의 전부 무오사회와 갑자사화 때 중형을 받았다. 이렇듯 스승과 제자는 단순히 지식을 주고받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학문적 이상을 공유하는 운명공동체였다. p.492

한국의 어느 기업이 공생자본주의를 실천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내 생각에 유교자본주의는 동아시아의 현주소가 아니다. 그것은 앞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미래의 꿈이다. 만약 선비의 전통을 제대로 계승한다면 언젠가는 유교자본주의를 구현할 수 있을 것이다. p.501

바우만의 분석에 따르면, 시민들은 이러한 해방(자유)’를 원하지 않았다. 갑자기 확대된 자유란 무능의 동의어다. 인간이 책임과 의무를 버리면 권리도 사라지기 마련이다. 현대사회의 비극은, ‘사람들이 자유로움 그 자체를 싫어하고, 해방의 전망에 오히려 분노할 수 있다는 점이다. p.504

이 책을 통해 우리가 미래사회에 영감을 제공하는 전통의 가치를 함께 확인했기를 바란다. 이 시대의 좌표를 역사적으로 조망하는 기회가 되었다면 실로 다행이겠다. p.509

좋은 사회란 자신이 속한 사회가 결코 현재로는 충분하(p.509)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입니다.” -지그문트 바우만 p.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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