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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 '몽환화' 미리보기 3회 | 읽을거리 2014-05-13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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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3

 

얼굴이 붉어졌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 수 있었다.
다카미는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소타를 물끄러미 바라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들고 있던 가방에서 핑크색 휴대전화를 꺼냈다.
“앗! 휴대전화가 있네?”
“학원 다니다 보면 아무래도 늦을 때가 많아서.”
“좋겠다. 우리 집은 아직 안 사줘.”
“없는 게 나을지도 몰라. 마약이야. 손에서 놓을 수가 없거든.”
그럴 것 같지만 그래도 역시 갖고 싶다. 휴대전화가 있었다면  지금 바로 번호를 교환했을 텐데.
소타는 컴퓨터로 메일을 한다. 그 주소를 다카미에게 가르쳐주었다. 그녀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휴대전화를 만졌다.
“지금, 가모 군 주소로 메일을 보냈으니까 나중에 확인해.”
“알았어. 도착하자마자 답장할게.”
다카미는 “응”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다시 한 번 휴대전화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나 이제 가봐야 해.”
“나도.”
“그럼 또 보자.”
그녀는 손을 살살 흔들고 휙 등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한참 바라본 후에 소타도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가족과 만나 단골 장어 집에 갔다. 뭘 하고 있었는지 어머니가 물었지만 별것 없었다고만 대답했다. 아버지와 형은 소타에게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방에 틀어박혔다. 장어는 모두 먹어치웠지만 맛은 느낄 겨를이 없었다. 오직 다카미만 생각했다.
중학교 입학 선물로 받은 컴퓨터를 켜고 제일 먼저 메일을 확인했다. 친구가 보낸 메일도 있었지만 그런 것은 뒤로 미뤘다. 수신 목록을 재빨리 훑었다.
있다!
제목은 ‘다카미입니다’였다. 본문을 보니 ‘잘 부탁해’라는 글과 함께 윙크하는 이모티콘이 붙어 있다. 소타의 가슴이 꽉 조여왔다.
그날 밤부터 소타의 인생이 변했다. 매일매일이 즐거워 견딜 수 없었다. 자신을 둘러싼 공기도 어쩐지 색깔이 다르게 보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제일 먼저 컴퓨터 앞으로 달려가 메일을 체크했다. 늘 다카미의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물론 소타도 매일 메일을 보냈다. 대단한 내용은 아니다. 축구 시합 중에 헤딩하려다가 친구와 박치기를 했다거나 티셔츠를 뒤집어 입고는 하루 종일 모르고 지내서 부끄러웠다거나 같은 별것 아닌 이야기였다. 일단 다카미와 메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아무리 하찮은 내용이라도 그녀는 꼭 답장을 해줬다. 그에 대해 또 답장을 보내고, 하루에 수십 번 이상 오갈 때도 있었다.
당연히 메일만으로 성이 차지 않았다. 그날처럼 직접 만나 얘기하고 싶다. 그런 의미의 메일을 보내자 ‘정말, 나도 만나고 싶어’라는 답이 왔다. 그 순간 소타는 컴퓨터 앞에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여름방학을 맞아 두 사람은 우에노 공원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어머니에게는 친구와 놀기로 했다고 하고 집을 나섰다. 우에노 공원에 도착한 다카미는 파란 셔츠에 반바지 차림이었다. 유카타 때와는 달리 활동적인 인상을 받았다. 반바지에서 뻗어나온 다리가 가늘고 길었다. 소타는 가슴이 두근거려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그보다 더 똑바로 볼 수 없었던 것은 얼굴이었다. 시선이 절로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 결국 마주 앉아 얘기할 때 다카미에게 지적을 받았다.
“가모 군, 그거 좋지 않아. 얘기할 때는 상대의 눈을 봐야지.”
“아, 미안해. 맞는 말이야.”
사과를 하고 소타는 다카미의 얼굴을 정면으로 봤다. 눈이 마주친 순간 주눅이 들어 고개를 숙일 뻔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그리고 그녀의 아름다움을 다시금 확인했다. 큰 눈에는 마음이 빨려들어갈 것 같은 빛이 담겨 있었다. 매끄러운 살결, 완벽하게 좌우대칭을 이룬 윤곽은 하얀 도기 꽃병을 연상시켰다.
“왜 그래?” 다카미는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응? 아무것도 아니야.”
또 눈을 피하고 말았다.
둘이서 많은 대화를 나눴다. 다카미의 집안은 대대로 의사라 그녀나 동생이 뒤를 이어야 한다.
“의사라니, 힘들겠다.”
“가모 군의 집은?”
“우리는 경찰관. 그런데 아버지는 올해 정년이라 이제는 집주인이라고 해야 하나. 맨션 같은 걸 임대하고 있거든.”
“어머, 역시 부자구나.”
“그런 건 아니야.”
다카미와 나누는 대화에 푹 빠져 있다 보니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다음에 만날 약속을 하고 그날은 헤어졌다.
재회한 것은 닷새 뒤였다. 장소는 역시 우에노 공원. 다카미는 원피스 차림이었다. 바뀐 헤어스타일 때문인지 무척 어른스러워 보였다.
그녀는 박식하고 말을 잘하는 데다 남의 얘기도 잘 들어주었다. 소타는 말하는 데 자신이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다카미와 있으면 말이 술술 나왔다. 아마도 교묘하게 유도되는 것 같았다. 이날도 시간이 빨리 지나갔다. 그러나 큰 수확이 있었다. 다카미가 친근하게 ‘소타 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점이다. 소타도 ‘다카미’라고 불렀다. 부끄러웠지만 이내 익숙해졌다. 그 사실이 무엇보다 기뻤다.
그후로는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났다. 사실은 더 자주 만나고 싶었지만 다카미가 학원을 많이 다녀서 좀처럼 시간을 낼 수 없었다. 공원에서 만나는 것뿐만 아니라 함께 영화를 보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 관람은 곧 후회했다. 영화는 재미있었지만 보고 있는 동안에는 다카미와 얘기를 나누지 못했다. 애써 만났는데 그래서야 의미가 없다.
집에 돌아오면 조금 전에 헤어졌는데도 금방 만나고 싶어졌다. 곧바로 컴퓨터를 켜고 메일을 보냈다. 즐거웠다, 또 만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어쨌든 그녀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스스로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을 제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장밋빛 일상은 느닷없이 끝나버렸다.
어느 날 밤, 저녁식사 후에 소타가 방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아버지가 불러세웠다.
“소타, 할 얘기가 있으니까 잠간 여기에 앉거라.”
거실 소파를 가리킨 아버지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그것이 소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요스케는 사정을 아는지 말없이 앉아 있었다. 어머니는 부엌에서 설거지 하는 중이었다. 소타가 소파에 앉자 맞은편의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요즘 여자애와 만나고 있는 것 같더구나.”
이 말에 소타는 절로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어떻게…….”
어째서 아버지가 다카미에 대해 알고 있는 걸까. 짚이는 구석이 하나도 없다.
“혹시 컴퓨터 메일을…….”
그렇다면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아버지의 다음 말은 소타에게서 반론의 기회를 빼앗았다.
“컴퓨터 살 때 이미 얘기했을 텐데. 불시에 내용을 체크할 거라고.”
“아…….”
그랬다. 분명히 그런 약속을 했다. 그때는 그다지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일 년이 지나 약속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내용을 보고 있었단 말인가.
“최근에 네가 좀 이상하다고 네 어머니에게서 들었다. 밖에 자주 나가고 공부에도 관심이 없는 것 같다고. 그래서 찜찜했지만 메일을 봤다. 하지만 이번이 처음이야.”
소타는 고개를 돌렸다. 분하지만 할 말이 없다.
“소타, 너는 아직 중학생이야. 여자친구를 사귀기에는 너무 일러.”
“이상한 짓을 한 건 아니야. 만나서 얘기한 게 다라고.”
“지금 그럴 때니? 게다가 넌 해야 할 일이 많아.”
“하고 있어. 공부도 빼먹지 않고 하고 있다고.”
“거짓말 마. 하루에 수없이 메일을 주고 받으면서 어떻게 공부에 집중하니.”
이 말에 소타는 아버지를 노려봤다. 메일을 죄다 읽었다고 생각하니 새삼 분노가 치밀었다.
“뭐냐, 그 얼굴은?”
아버지가 매섭게 쳐다봤지만 소타는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문으로 향했다.
“아직 얘기가 끝나지 않았어!”
아버지의 고함을 뒤로하고 거실을 벗어나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방에 틀어박혀 컴퓨터를 켜고 메일함에 남아 있던 다카미와 주고받은 메일을 모두 삭제했다. 그다음 새 메일을 써서 송신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잘 지내? 나는 무척 재미없는 일이 생겨서 엄청나게 열 받았어. 자세한 이야기는 못 하지만 정말 어른은 형편없는 것 같아. 빨리 다카미를 만나고 싶어. 다카미의 얼굴을 보면 마음이 후련해질 것 같으니까.

문장 마지막에 분노를 나타내는 이모티콘을 붙이고 송신했다. 다카미니까 아마도 바로 답장을 줄 것이다.
송신 후에 금방 보낸 메일을 메일함에서 삭제했다. 전부터 이렇게 했다면 아버지에게 들키지 않았을 텐데. 지금까지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의 어리석음에 화가 났다.
답장을 기다리는 사이 인터넷 서핑을 했다. 여름방학 숙제가 남아 있지만 공부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화가 나서 할 맘이 생기지 않았을 뿐이라고, 결코 메일을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변명했다.
이상하네. 시계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메일을 보내고 한 시간가량 지났는데 아직도 다카미의 답장이 없다. 이런 일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또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다카미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소타는 더는 참지 못하고 다시 메일을 썼다.

조금 아까 메일을 보냈는데 제대로 간 건가? 살짝 걱정이 되어서.

송신 버튼을 클릭했을 때 불길한 예감이 소타의 가슴을 스쳤다. 혹시 다카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그래서 조금 전 메일에도 답장을 하지 못한 걸까.
진정이 되지 않아 컴퓨터 앞을 떠날 수 없었다. 결국 이날 밤은 씻지도 못하고 내내 메일을 기다렸다.
다음 날 오후, 소타는 집을 나서서 역 앞으로 향했다. 그곳에 공중전화 부스가 있어서였다.
오전에 다시 한 번 다카미에게 메일을 보냈다. 일단 메일이 갔는지 아닌지만이라도 알려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역시 답장은 없었다.
전화 부스에 들어가 카드를 넣고 다카미의 휴대전화 번호를 눌렀다. 어쩌면 연결되지 않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불안해졌다. 얼마 후 호출음이 들렸고 네 번 울린 후에 연결되었다.
네, 하는 목소리. 다카미가 틀림없다.
“아! 여보세요. 나야, 소타.”
응, 하는 나지막한 목소리의 대답.
뜻밖은 아닌 듯했다. 전화를 받기 전부터 소타라는 것을 안 것 같다.
“무슨 일 있는 거야? 어젯밤부터 여러 번 메일을 보냈는데 못 받았어?”
다카미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전화 상태가 좋지 않아 안 들리나 싶어 “여보세요?” 하고 다시 불렀다.
“듣고 있어.” 다카미가 말했다. “메일은 왔어. 미안해, 답장 못 해서.”
말투가 딱딱하다. 거리를 두는 느낌이었다.
“무슨 일 있어?”
또 말이 없다. 초초함이 마음속에 싹텄다. 틀림없다, 무슨 일이 있는 거다.
“다카미…….”
다카미가 목소리를 냈다. “저기 말이야, 이쯤 하자.”
“이쯤이라니…….”
“만나는 거 말이야. 만나거나 메일을 주고받는 것도. 그리고 전화도.”
“……왜?”
“그러니까.” 그녀의 목소리에는 살짝 짜증이 섞여 있었다. “이제 끝내자고. 우린 아직 중학생이고 공부도 해야 하니까.”
“말도 안 돼. 어째서…….”
혼란스러웠다. 다카미는 왜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는 걸까.
깜짝 놀랐다. 어젯밤 아버지가 한 말을 떠올렸다.
“혹시 누구한테 무슨 얘기를 들었어? 우리 아버지가 연락한 거야?”
“아니, 그런 게 아니야. 내가 그러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너도 즐거워했잖아.”
“즐거웠어. 하지만 즐겁다고 다가 아니니까.”
“정말 끝이야? 다시는 못 만나?”
“응, 가모 씨에게도 그 편이 낫다고 생각해.”
“가모 씨라니…….”
“여러 가지로 고마웠어. 그럼 안녕.”
“아니, 잠깐 기다려.”
뚝 하고 전화가 끊겼다.
소타는 전화 부스 안에서 수화기를 든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집에 돌아오며 생각했다. 아버지는 메일을 통해 다카미의 신원을 알아냈을까. 그리고 부모에게 연락해 둘이 만나지 않도록 이야기를 한 걸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다카미의 신원을 알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소타도 그녀의 집이 어딘지조차 모르고 있다. 이바라는 성이 흔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적은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그녀 스스로가 그런 사실을 부정하고 있다.
그후 몇 번 메일을 보냈지만 다카미의 답장은 오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 공중전화에서 걸려오는 전화는 무시하기로 한 모양이다. 그래도 끈질기게 걸었더니 결국 그 번호는 없는 번호라는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이렇게 소타의, 한여름, 이라고도 할 수 없는 짧은 사랑이 끝났다. 다카미와 만나기 전의 생활로 돌아왔다. 다만 하나만은 변했다.
다시는 나팔꽃 시장에 가지 말자. 그렇게 결심했다.

 


몽환화

히가시노 게이고 저/민경욱 역
비채 | 2014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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