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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21 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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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연재] 2화 | 읽을거리 2014-06-10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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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삼의 자객


어둠이 내려앉은 한강변.

바람은 밤을 타고 강을 넘어와 훈신勳臣이 숨어 사는 기와집을 삼킬 듯 으르렁댔다. 기와집 뒤로 널찍하게 자리 잡은 대숲도 밤새 바람에 시달렸다.

집 안에는 개미 새끼 하나 어른거리지 않았다. 어둠과 바람이 모든 움직임을 집어삼켰고, 마당에는 뿌연 흙먼지만 피어오를 뿐이었다. 그러나 바람은 완강한 밤에 피로를 느낀 듯, 새벽녘이 되자 어둠보다 먼저 수그러들었다. 잦아진 바람 소리가 되레 더 음산하게 들렸다.

반정공신으로 군호君號까지 받은 김흥진 대감이 대궐 근처 북촌에서 사대문 바깥으로 거처를 옮긴 것은 웬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김흥진은 이를 두고 스스로 은거에 들어가노라 말했지만 그가 어디로 옮겼는지 세상에 알려진 마당이라 은거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저 자성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것뿐이었다.

이름난 반정공신에게 줄을 대려는 사람들은 여전히 대문에 줄을 이었다. 그들을 맞이하고, 돌려보내느라 하루 종일 마당을 종종거린 노복은 녹초가 되어 깊은 잠에 빠졌다. 그러다 문득 눈을 떴다.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지만 몸에 밴 종의 본성이 어떤 기척 같은 것을 감지하게 만든 탓이었다.

노복은 잠결에 윗몸을 일으켜 행랑채 방문을 열고 어둠이 드리워진 마당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 순간 날개를 펼친 새 한 마리가 바람을 타고 내려와 담장에 내려앉는가 싶더니 사뿐히 마당에서 멈추었다. 그러고는 발소리도 없이 마당을 밟고 걸어갔다. 허공에서 착지할 때는 분명히 날짐승이었건만 마당을 걷는 모습은 영락없는 들짐승이었다. 하늘과 땅을 동시에 밟는 짐승이라……. 노복은 자신이 본 것을 믿을 수 없어 문지방을 움켜쥔 손바닥에 힘을 주고 마당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검은 형체는 허공을 밟듯 넓은 마당을 가로질러 사라졌다. 그러자 짙은 어둠 뿐, 조금 전 그가 보았던 날짐승 같기도 하고 들짐승 같기도 한 형체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본 것이 무엇인지 노복은 알 수 없었다. 걸어 다니는 날짐승인가? 아니면 두 발 달린 들짐승인가? 그런 짐승이 세상에 있기는 한가? 노복은 필히 헛것을 봤거나 아니면 귀신을 봤다고 지레짐작하고 말았다.

귀신이라……. 병자년 오랑캐의 난 이후로 장안에 흉흉한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귀신을 보았다는 소문도 그중 하나였다. 하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청나라 군인에게 붙잡혀 심양瀋陽으로 끌려갔고, 온 장안에 시체가 나뒹굴었으니 그런 소문이 없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어제만 해도 동네 우물에 빠져 자살한 아낙을 둘이나 건져 땅에 묻어주었다. 들리는 말로는 심양으로 잡혀갔다 돌아온 사대부의 정실인데,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혔다는 이유로 아무도 반겨주지 않아 우물에 몸을 던졌다는 것이다. 그런 여인이 한둘이 아니었고, 귀신을 보았다는 자도 그만큼 많았다.

갑자기 한기를 느낀 노복은 서둘러 문을 닫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귀신도 이불 속까지는 쫓아오지 못하리라는 듯. 노복은 제 아무리 한 맺힌 귀신도 새벽이 되어 날이 밝으면 다 제 갈 길로 갈 터이고, 귀신이라 해도 최고의 세도가 김흥진 대감의 집안에 해코지를 할 수는 없겠지 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그 검은 형체는 김흥진 대감이 잠들어 있는 방 앞 대청마루에 서 있었다. 노복이 한 가지는 제대로 보았다. 그것은 날짐승도 아니었고, 들짐승도 아니었다. 그는 이신李臣이었다.

이신은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마당을 잠시 둘러보고 뜻밖의 감회가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이미 김흥진을 만나기 위해 여러 번 찾아왔던 곳이지만 그때와는 달랐다. 어둠에 잠겨 있다 해도 그에게는 구석구석 모르는 곳 없는 친숙한 집이었다. 뱀을 잡겠노라며 쑤시고 다니던 집 뒤꼍의 대밭, 한여름에도 서늘한 기운이 돌던 안채의 광, 흙장난을 배운 툇간 옆 진흙더미……. 모든 것이 익숙했다. 그러나 이 집과 이 집에서 보낸 어린 시절이 그리워 이 바람과 어둠을 뚫고 이곳까지 온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언젠가는 이 장소에서 칼을 들고 서리라는 것만은 막연히 예감하고 있었다.


예감의 근원은 꿈이었다. 그렇다. 모든 것은 꿈 때문이었다. 반복되는 악몽이 두 달 가까이 그를 괴롭혔다. 끝없는 불면에 시달리던 이신이 가까스로 잠에 빠질 때마다 그를 찾아왔다.

꿈은 언제나 소리로 시작되었다. 바람이 숲을 훑고 지나가는 소리. 멀리서 나뭇잎이 서로 몸을 부비며 바스락거리는 소리. 이어 그 소리는 개울물이 졸졸 흘러가는 소리와 뒤섞였다.

꿈속에서 그는 개울물 소리를 따라 눈을 밟으며 걸었다. 주변은 온통 흰 눈 천지였다. 그러나 온천수가 올라오는 개울에는 김이 안개처럼 피어오르고, 그 옆으로 복사꽃이 피어 꽃잎이 물 위로 떠내려가고 있었다.

따뜻한 개울물에서 빨래를 하던 여인이 당혜唐鞋를 벗어 들고 떠내려오는 꽃잎을 잡는다. 여인은 고개를 돌려 이신을 보더니 방긋 웃는다.

선화…….

선화는 꽃잎이 든 당혜를 가지런히 눈 위에 내려놓는다. 노련한 갖바치 이신이 만들어준 선화의 당혜는 꽃잎처럼 붉다. 선화는 나뭇가지를 들고 시를 썼다. 그녀가 좋아했던 왕유의 시.


복숭아꽃은 붉고 밤비를 머금었고,

버들은 푸르고 봄 안개를 띠었다.

꽃송이 떨어지나 머슴은 쓸지 않고

꾀꼬리 우는데 은자는 그냥 잠을 자는구나.


선화의 당혜에서 꽃물이 흘러나와 눈을 붉게 물들인다. 아니다, 저것은 꽃물이 아니다. 꽃물이 저렇게 붉을 리가. 저것은 피다. 이신은 중얼거렸다. 그러나 말은 입 밖으로 새어나오지 못했고, 이신의 귀에는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달려가는 발소리로 가득 찼다. 나뭇잎 소리, 물소리는 눈밭을 물들인 붉은 핏빛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개울로 사람의 형체 같은 것이 떠내려온다. 화살을 맞은 청나라 군사의 시체였다.

이신은 선화의 손목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내 당혜! 여보, 내 당혜가 저기…….”

이신은 선화의 말을 듣지 않고 내달렸다. 그새 개울마저 붉게 물들어 있다. 이신이 선화를 안아들고 개울을 뛰어넘자 끝없이 펼쳐진 눈밭이 나타났다. 복사꽃은 간 데도 없었다. 눈으로 뒤덮인 강, 얼음 덩어리로 변한 강이었다.

청나라 군사들이 도처에 깔려 있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수많은 피란민들이 군사들을 피해 얼음 위를 달리고 있었다. 그 사이로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누이와 누이의 손목을 잡고 달려가는 꺽쇠의 모습도 스쳐 지나갔다. 그들을 불러 세울 겨를도 없이 정신없이 선화의 손목을 잡고 앞으로 달렸다.

누군가 이신의 앞을 막았다. 김흥진이었다. 이신은 그를 밀쳤으나 그는 완강했다. 아, 칼이 있다면……. 누군가 내게 칼을 다오, 이신은 쏟아지는 눈발로 온통 부옇게 변해버린 허공을 향해 외치면서 몸을 돌려 반대쪽으로 내달았다. 미처 걸음이 따라오지 못한 선화의 몸은 얼음 위에 쓰러지다시피 해 끌려왔다. 이 강만 지나면 다시 복사꽃 피어 있는, 온천수가 솟는 개울가로 돌아가리라. 꿈이라 믿음은 강했고, 조급함도 절실했다. 이신은 선화의 손목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왔다. 이신이 돌아보자 김흥진이 활을 들고 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허둥댔다.

그때 얼음이 깨지기 시작했다. 앞서 걸어가던 어머니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머니!”

여동생도, 꺽쇠도 이어 물속으로 꺼져버렸다. 얼음은 점점 더 넓게 갈라졌고, 사람들은 촛불 꺼지듯 한순간에 물속으로 사라져갔다. 이신은 선화의 손을 잡고 뒷걸음질 쳤다. 화살이 날아와 선화의 어깨에 박혔다. 선화가 얼음 위로 굴렀다. 흘러나온 피가 눈을 물들였다. 그 순간 발밑의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가 이신의 예민한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또 다른 화살이 선화의 어깨에 박히는 것을 본 것과 동시에 이신의 몸은 얼음장 아래로 빠져버렸다.

물에 빠진 이신은 한껏 숨을 참고 위로 헤엄쳤으나 얼음의 입구는 보이지 않았다. 얼음 위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선화의 몸이 얼음을 통해 비쳐 보였다. 이신은 필사적으로 얼음을 두드렸지만 얼음은 완강했고 물살은 그의 몸을 점점 선화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다. 언제 벗겨진 것인지 선화의 당혜가 이신의 눈앞으로 흘러갔다. 이신은 손을 뻗어 그것을 잡아보려 했으나 그마저도 소용없었다. 이신의 몸은 한없이 가라앉고 있었다. 그의 부질없는 손짓을 비웃기라도 하듯 김흥진의 웃음소리가 이신의 귀를 가득 메웠다. 올라가야 해, 저 위로, 얼음 위로. 이신은 외쳤지만 물이 입과 코로 마구 들어왔다. 귀로는 김흥진의 웃음소리가 밀려들어 아예 고막을 찢듯 울렸다.

죽여버릴 테다! 이신은 벌떡 일어나 칼을 잡았다.

물에서 나온 듯 온몸이 땀에 젖고, 김흥진의 웃음소리는 여전히 귀에 남은 채였으나 이신은 실상 그것이 바람소리임을 깨달았다. 꿈은 언제나 그렇게 끝났다. 깨어난 뒤 부질없이 잡은 칼을 내려놓아야 했고, 꿈이어서 선화를 더 쫓아갈 수 없다는 열패감이 싸늘하게 그를 휩쌌다.

더는 견디기가 어려웠다. 이 열패감, 이 불면, 이 악몽과 원한. 이제는 갚아야만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잠을 이룰 수가 없을 테고, 이어지는 불면으로 가시처럼 곤두선 그의 신경이 언제 폭발해버릴지 스스로도 장담할 수 없을 터였다.

김흥진을 죽여야 한다. 이신은 중얼거렸다. 황제는 자신의 꿈에 나타난 적은 반드시 찾아 죽였다. 적이 아니라 해도, 누구든 꿈에 본 자는 죽였다. 그러지 않으면 잠을 이룰 수 없다고 하였다. 설령 잠을 방해하는 악령이라 해도 황제는 반드시 찾아내 죽였을 것이다. 이신은 황제의 칙사勅使, 조선을 감시하기 위해 파견된 황제의 오른팔이었다. 이미 황제가 지배하는 속국이 된 조선에서 그가 황제의 오랜 습관을 쫓는다 한들 아무도 탓할 수 없으리라. 게다가 기왕 죽이기로 결심하였다면 며칠을 더 망설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이신은 서둘러 옷을 집었다. 그리고 칼을 향해 손을 뻗다 잠시 망설였다. 그의 눈앞에는 두 개의 칼이 있었다. 황제가 하사한 칼과 아버지의 칼이었다.

얼마 전, 종로를 돌아다니다 검을 파는 곳에서 우연히 아버지의 칼을 찾았다. 이신은 첫눈에 그 칼을 알아보았다. 아버지가 손수 만들었고, 임금을 시해하려는 무리들이 거병擧兵한 계해년(1623) 그날, 아버지는 그들과 맞서기 위해 그 칼을 허리에 차고 나갔다. 서둘러 집을 나서던 아버지의 뒷모습을 이신은 아직도 또렷이 기억했다.

칼은 그사이 여러 사람들의 손을 거치면서 마구 다루어진 탓에 많이 험해져 있었다. 그러나 이신이 그 칼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아챈 약삭빠른 장사치는 어마어마하게 높은 금액을 불렀다.

“임진왜란 때 대원수가 쓰시던 칼이라 합니다요.”

“아니. 반정 때 폐주 광해의 내금위장이 쓰던 칼이다. 역도의 칼임을 알지 못했느냐? 그래서 이렇게 모셔두었느냐?”

그러자 장사치는 안색이 파래지면서도 끝내 할 말을 다했다.

“칼이면 칼이지 대원수의 칼과 역도의 칼이 뭐가 다르겠습니까요? 불취어상不取於相이라고, 부처님께서도 상을 취하지 말고 본질을 보라 하셨습니다요.”

“장사치의 문자가 제법이로구나. 그래, 어찌 칼뿐이겠느냐. 따지고 보면 대원수와 역도가 한끗 차이일 뿐.”

이신은 장사치가 부르는 값을 다 주고 아버지의 칼을 사 머리맡에 두었다.

하지만 그 칼을 들고 나갈 수는 없었다. 아직 날을 벼리지도 못한 터였다. 이씨 왕조의 신하가 되라는 뜻으로 아버지가 이름 붙여준 이신李臣과 황제의 칙사가 되어 이씨 왕조를 감시하러 와 있는 이신 사이에는 칼 한 자루로 메워질 수 없는 지난한 세월과 환멸의 간극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신은 황제가 하사한, 분신과도 같은 칼을 쥐고 집을 나섰다. 앞으로 어떤 경우에도 그는 아버지의 아들이 아닌 황제의 충복으로 살거나, 혹은 죽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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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

강희진 저
비채 | 2014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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