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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의 시간들_ 어디에도 없지만,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 | 나의 서재 2019-02-15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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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저/최성은 역
은행나무 | 2019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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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도록 신비한 문학적 정취를 이루어낸 올가 토카르축만의 기묘한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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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축, 신화와 전설의 축을 정교하게 얽어낸 폴란드 문학의 정수!

놀랍도록 신비한 문학적 정취를 이루어낸 올가 토카르축만의 기묘한 판타지!

 

   ‘폴란드’ 하면 내겐 무엇보다 아우슈비츠의 역사로 통하는 나라다. 일명 ‘죽음의 수용소’라 불리며 나치스가 유대인 대량학살을 감행한 바로 그곳. 1939년 나치스 독일의 침입을 시작으로 서부 지역은 독일에, 동부 지역은 소련에 분할 점령된 뒤 유대인 학살과 냉전 체제, 사회주의 시대가 중첩된 그 거칠고 무거운 역사를 견뎌온 만큼 폴란드 문학하면 독립에의 갈망, 역사 속에서 이름도 없이 스러져간 개인의 역사들이 무게를 이루는 작품들이 슬며시 떠오른다. 그래서 현재 폴란드에서 두터운 독자층을 확보하며 가장 권위 있다는 니케 문학상에서 ‘독자들이 뽑은 최고의 작품’으로 선정된 작가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는 이유로, 비교적 근래에 읽었던 고전 <이별 없는 세대>를 떠올리며 전쟁이라는 공포의 상흔들을 문학이라는 힘을 빌려 남기려 했던 또 하나의 작품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기대감으로, 한편으로는 다소 무거운 마음으로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이것은 어쩌면 인류에 대한 이야기다

 

 

   ‘태고는 우주의 중심에 놓은 작은 마을이다.’

   <태고의 시간들>은 마치 ‘아주 멀고도 먼 아득한 옛날’을 더듬게 하는 어느 신화 속의 마을 혹은 실제 폴란드 어느 작은 마을의 지명 같은 낯선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마치 소우주를 연상케 하는 이곳은 대천사 라파엘, 가브리엘, 미카엘, 우리엘이 동서남북의 경계를 지키고, 깊고 어두운 흑강과 생기발랄한 백강이 가로지르며 온갖 욕망과 성스러운 우화들이 뒤섞인 공간이다.

 

 

 

 

 

 

   이야기는 1914년 여름, 느닷없이 러시아 군인이 찾아와 남편 미하우를 전쟁터로 끌고 가면서 홀로 뱃속의 아이를 키워야 했던 게노베파를 중심으로, 어떤 식으로든 전쟁을 견뎌내야 했던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가 함께 펼쳐진다. 술 취한 남자들에게 몸을 파는 것으로 삶을 연명하다 숲속에서 홀로 아이를 낳고 치유와 예언의 능력을 갖게 된 크워스카, 호황을 누렸던 사업이 전쟁으로 인해 몰락하고 기묘한 게임에 빠져 스스로 침잠의 상태에 빠진 상속자 포피엘스키, 독일군과 러시아군에게 강간을 당하고 부유한 우클레야와 사랑 없는 결혼을 하지만 늘 태고 너머의 세상을 동경하는 크워스카의 딸 루타 등 한 가정의 삼대에 걸친 장엄한 서사를 여러 인물들과 매우 유기적으로 이끌어간다. 이처럼 <태고의 시간들>은 바로 이 현실 같기도 허구 같기도 한 태고라는 마을 속에 20세기 폴란드 역사의 처절한 현실을 담아냄과 동시에 이곳에서 살아가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마치 ‘어디에도 없지만,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 듯한 기묘한 판타지를 펼쳐나간다.

 

 

 

예슈코틀레는 색채를 잃은 것처럼 보였다. 모든 게 흑백이거나 회색빛이었다. 광장엔 한 무리의 남자들이 서 있었다. 사내들은 전쟁 얘기에 열을 올렸다. 도시는 파괴되었고 시민의 소유물들이 거리 곳곳에 널려 있다, 사람들은 총탄 앞에서 도망치고 있다, 형제가 형제를 찾아 헤맨다, 러시아인과 독일인 중에 누가 더 나쁜 놈들인지 알 수가 없다, 독일인들이 살포하는 독가스로 인해 사람들의 눈이 터져나가고 있다, 기근이 수확기보다 먼저 찾아올 것이다 등등. 전쟁을 첫 번째로 발견된 병균과도 같아서 뒤를 이어 또 다른 병균들이 들끓게 마련이다. / 11p

 

 

상속자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더러움처럼 여기저기 퍼져 있는 고난과 죽음, 부패를 목격했다. 예슈코틀레 곳곳을 걸었다. 유대식 도살장과 고리에 걸린 신선하지 못한 고기, 셴베르트의 가게 아래 웅크리고 앉아 있는 얼어붙은 걸인, 아이의 관을 운반하는 작은 장례 행렬, 광장 옆 나지막한 집들 위를 낮게 유영하는 구름과 사방으로 내려앉아 모든 걸 지배하는 어스름을 보았다. 이 광경은 서서히, 그리고 부단히 거듭되는 분신을 떠올리게 했다. 그 속에는 시간의 불길에 희생양으로 던져진 인류의 운명, 모든 생이 깃들어 있다. / 43p

 

 

 

 

 

   흥미로운 것은 ‘게노베파의 시간’, ‘미시아의 시간’, ‘파베우 보스키의 시간’, ‘상속자 포피엘스키의 시간’처럼 등장하는 인물들이 겪는 짤막한 단편 또는 에피소드들을 전혀 이질감 없이 유기적으로 엮어나간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집의 시간’, ‘버섯균의 시간’, ‘과수원의 시간’과 같이 동식물, 신과 천사, 마을의 근간을 이루는 여러 주체들을 의인화하여 태고의 모든 것들이 지닌 존재의 의미에 가치를 부여하는 점 역시 독특하다. 한 마을의 역사 혹은 전체 인류의 역사란 이 모든 개개인의 시간과 공간이 중첩되어 쌓아올려지는 것임을 보여주려는 것처럼.

 

 

 

“‘왕풍뎅이 언덕에 가면 그녀를 만날 수 있을 거야. 한 달에 한 번, 내가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는 밤이 되면, 그녀가 거기에서 내게 저주를 퍼붓곤 하거든.’ 그래서 달에게 물었어요. ‘무엇 때문에 그녀가 용서해주기를 바라는 거죠? 인간의 용서가 당신에게 무슨 소용이 있나요?’ 그러자 달이 대답했죠. ‘인간들의 고통이 내 얼굴에 검은 주름을 새기거든. 이러다 언젠가는 인간의 아픔 때문에 사그라들고 말 거야.’ 달이 이렇게 말했어요. 그래서 내가 여기에 온 거랍니다.” / 137p

 

 

버섯균은 식물도, 동물도 아니다. 천성적으로 햇볕에 친화적이지 않기에 태양으로부터 아무런 힘도 흡수하지 못한다. 따뜻한 것이나 살아 있는 것들은 버섯균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천성적으로 따뜻하지도 않고, 생기도 없기 때문이다. 버섯균이 존재하는 건 땅속에 배어들어 있는 즙 또는 썩거나 죽은 것들의 찌꺼기에 남아 있는 즙을 빨아 마시기 때문이다. 버섯균은 죽음의 생이고, 부패의 생이며, 모든 죽은 것들의 생이다. / 225p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 있다면 바로 소설의 마지막 장면일 것이다. 독단적이고 고집스러운 데가 있는 아버지를 떠나 주체적인 삶을 꾸려나가고자 했던 딸 아델카가 시간이 흘러 아버지의 집으로 잠시 돌아왔다가 몰래 들고 나온 어머니의 커피 그라인더를 꺼내어 버스 안에서 천천히 돌리는 모습이다. 비록 아버지의 집은 예전의 온기를 잃고 여전히 완고한 뜻에 가로막혀 있지만 외할머니인 게노베파가 그러했듯, 어머니인 미시아가 그러했듯 아델카 역시 어머니의 삶이 연속될 것이라는 것과 그러한 모성이 삶과 우주를 지탱하며 순환될 것임을 전하고자하는 작가의 의도가 고스란히 전달되는 장면이라 할 수 있겠다.

 

 

 

   <태고의 시간들>은 근래에 드물 정도로 정교하고 매혹적인 서사를 갖춘 작품이다. 20세기 폴란드에서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 위에 환상적인 소재가 가미되어 한편의 우화 혹은 신화 같은 현실을 펼치는 이와 같은 전개는 가히 독창적이면서도 완성도가 높아서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각종 수식들이 아깝지 않을 정도다. 다만 은유적인 표현 및 현실인지 허구인지 모를 초현실적인 어법들이 소설을 담백하게 읽기엔 어려움이 있지만 그만큼 깊이 있고 독자적인 힘을 갖춘 작품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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