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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위증 미스터리박스 시즌2 스크랩 이벤트 당첨자 발표 | 문학동네이벤트 2013-07-19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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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해』, 쥘리앵 그린 _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70 | 세계문학 미리보기 2013-07-18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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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해 Epaves

쥘리앵 그린 장편소설 | 김종우 옮김 | 문학동네

 

 

20세기 프랑스 가톨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쥘리앵 그린의 문학적 전환점이 된 작품

 

 

“내 삶은 다른 곳에 있다.”

세상의 언저리를 맴돌며 부유하는 인간 잔해,

고독한 운명 속에서 진정한 나를 찾아 떠나는 여정

 

 

우리는 카뮈의 소설 근원에

 『잔해』의 직접적인 영향이 없었는지 자문하게 된다.

_ 브라이언 피치(작가)


(표지 사진을 누르면 미리보기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팝업 허용 필수)



_ 예전 같으면 그는 내일을 생각하면서 오늘의 권태를 달래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미래가 인간의 즐거움을 무한정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는 날이 기어이 오고야 말았다. 30대가 되고 보니 강하고도 육중한 창살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 문턱을 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낭패인 일이었다. 그들은 항상 창살 너머를 바라보지만 창살은 더 이상 열리지 않는다. - 27쪽

 

_ 자기 자신에게도 이방인으로 남아 있는 판국에 도대체 어떻게 혼자가 아니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존재 이유를 알 수 없는 이 세상에서 각자는 자신이 영원히 알지 못할 비밀스러운 운명을 맹목적으로 따라간다. - 57~58쪽



잔해

쥘리앵 그린 저/김종우 역
문학동네 | 2011년 02월

 


◆ 책소개

_ 모리아크, 베르나노스와 함께 20세기 프랑스 가톨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쥘리앵 그린이 1932년에 발표한 소설로, 국내에 처음 번역 소개되는 작품이다.

쥘리앵 그린은 수많은 저서에서 인간 운명의 나약함과 신을 통한 인간의 구원이라는 종교적 주제를 형상화했는데, 『잔해』는 이러한 경향에서 벗어나 실존주의적 문제를 다룸으로써 그의 문학적 여정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된 작품이다.

“내 삶은 다른 곳에 있다”고 느끼며 가정과 사회 어느 곳에도 발을 붙이지 못하고 현실의 언저리를 맴도는 어느 무기력한 남자, 파리라는 도시에서 부유하는 ‘인간 잔해’의 정신적 방황을 통해 존재의 고독과 끊임없이 반복되는 인간 운명의 무상함을 그려냈다. 이 작품은 사르트르나 카뮈의 작품에 앞서 실존주의 경향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 한국작가가 읽어주는 세계문학전집

: 과연 그는 무엇을 찾고 있는가. 아무것도 찾고 있지 않다. - 구효서

_ 어째서 제목이 『잔해』인지 알겠어요. 그것은 부르주아의 황혼이고 개념적 이성의 와해며, 무기력하고 권태롭고 나른한 실존으로 내몰린 근대주의의 참담한 파국이군요. 이런 소설의 주제나 의도는 작품 안에서 찾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이야기가 모호하고 지루할 수 있지요. 종일 단무지만 써는 사람의 얘길 쓰면 지루하기 짝이 없잖겠어요? 그러나 그런 얘기를 그런 식으로 써야만 했던 작가의 시대적 고충과 의중을 이해한다면 똑같은 이야기가 갑자기 무섭고 끔찍해지죠. 뱀장어 얘기처럼. 그래서 다시 읽게 되는 거예요.




◆ 테마로 같이 읽기 : 세상과 화합하지 못하는 '난파자'들 


이날을 위한 우산

빌헬름 게나치노 저/박교진 역
문학동네 | 2010년 12월

 

이 책이 당신의 인생을 구할 것이다

이수현 역/A. M. 홈스 저
문학동네 | 2009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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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메이킹 스토리 2. 내가 써야 한다. | 김영하 style essay 2013-07-17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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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써야 한다

 

 

 


머릿속에 인물이 떠오르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인물의 입으로 말을 시켜보는 것이다. 스토리 라인이나 플롯, 주제는 다음 문제다. 반드시 그 인물이 입을 열어 말을 해야 한다. 그것은 작가와 인물이 치르는 일종의 면접 같은 것이다. 소설을 언제 구상하게 되었는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없지만 집필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특정할 수 있다. 바로 등장인물이 입을 열어 말을 하는 순간, 그것을 작가가 받아적는 순간이다.
나는 모니터의 텅 빈 공간을 바라본다. 초고를 쓸 때의 나는 ‘writeroom’이라는 프로그램을 쓴다. 이 프로그램은 모니터 화면 전체를 새카맣게 덮어버린다. 마치 칼 세이건이 『코스모스』의 서문에서 묘사한 막막한 우주공간을 보는 기분이다. 이번 소설은 일인칭시점 화자인 만큼 더더군다나 주인공의 말로 시작되어야한다. 한참을 이 텅 빈 우주와 씨름한 끝에 마침내 첫 문장이 나온다. 오랫동안 내 무의식 속에 잠겨 있던 인물이 마침내 입을 여는 순간이다. 이런 순간들은 언제나 경이롭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벌써 25년 전, 아니 26년 전인가, 하여튼 그쯤의 일이다. 그때까지 나를 추동한 힘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살인의 충동, 변태성욕 따위가 아니었다. 아쉬움이었다. 더 완벽한 쾌감이 가능하리라는 희망. 희생자를 묻을 때마다 나는 되뇌곤 했다.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살인을 멈춘 것은 바로 그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인물이 마음에 들었다. 그를 신뢰할 수 있다고, 내 소설의 주인공으로 삼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2013년 2월 초의 일이다. 나는 본격적으로 집필에 들어갔다. 속도는 매우 느렸다. 하루에 한 문장, 혹은 두 문장밖에 쓰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답답해하다가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기억을 잃어가는 늙은 연쇄살인범의 속도에 내가 맞춰야 한다는 것을. 그러자 마음이 좀 편해졌다. 조금씩 쓰고 오래 쉬었다. 쉴 때는 니체를 읽었다. 최승자 시인이 오래전에 번역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소설을 써나갈 때마다 나는 내 인물들에 대해 상세한 정보들을 ‘수집’하는데, 그중의 하나가  ‘그 인물이 읽었을 법한 책의 목록’들이다. 『빛의 제국』의 주인공 기영은 바쇼의 하이쿠를 읽고,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제이는 사람들이 재활용품 수거함에 던져놓은 책들을 마구잡이로 읽는다. 그런데 이번 소설의 주인공은 니체와 그리스 비극을 읽을 것만 같았다. 먼지 쌓인 책들을 꺼내 책상 한쪽에 두고 시간 날 때마다 들춰본다. 소설에는 인용하지 않았지만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런 말들을 하고 있다.

 

“보라! 나는 나의 지혜에 지쳤으니, 흡사 지나치게 많은 꿀을 모은 한 마리 벌과도 같다. 이제 내겐, 달라고 내미는 손들이 필요하다.”
“피와 경구로 쓰는 사람은 읽혀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외워지기를 원한다.”
“실로, 우리가 삶을 사랑함은, 우리가 사는 일에 익숙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는 일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분명히 내가 만든 인물이지만 그가 읽었음직한 책, 예컨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어나가면서 그에 대해 훨씬 더 분명하게 알아간다는 느낌이 든다. 묘한 기분이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머릿속에 들어 있는 뭔가를 종이에 옮기는 게 아니다. 훨씬 미묘하고 복잡한 과정이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이미 쓴 것과 아직 쓰지 않은 것 사이의 끝없는 되먹임 과정이다. 이미 쓰여진 것들이 앞으로 쓰여질 것들에 영향을 미친다. 작가라 하더라도 이미 쓴 것들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게 소설은, 소설 속의 인물은 손님처럼 찾아와 서서히 작가를 지배한다. 소설을 시작할 때 100의 자율성을 갖고 있던 작가는 마지막 문장을 쓸 때는 0의 자율성을 갖는다. 작가는 이미 쓴 문장에 위배되는 그 어떤 문장도 쓸 수 없는 존재다. 소설이 막바지로 치달을수록 작가는 더욱더 수동적인 존재가 되는데, 어떤 작가는 이 상태를 좋아하고 어떤 작가는 싫어한다.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를 연재하던 막판에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 이렇게 하소연했다고 한다. 톨스토이는 후자였던 것 같다. “안나라는 이 여자, 정말 끔찍하다. 이 여자에게서 벗어나고 싶다.” 나는 전자다. 나는 인물과 이미 설정된 전제들에 복종하고 그것의 노예가 되는 것을 좋아한다.

신인작가 시절에는 내가 한 세계를 창조하는 창조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마르코 폴로처럼 낯선 땅을 찾아가는 여행자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성문을 열어주지 않는 한,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겨우 허락을 받고 들어간 그 도시에서 나는 인물들을 알아가고 그곳의 풍습을 익힌다. 그런데 언젠가는 그곳을 떠나야 할 운명이다. 그러니 도시에서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아쉬워하지 않을 수 있는가. 이제는 친숙해진 인물들로 가득한 그 도시를.

 

소설이 마무리될 무렵에 10년이 넘도록 내 소설을 편집해온 편집자와 저녁을 먹었다. 편집자가 물었다.
“새 장편은 언제 시작해요? 이제 슬슬 시작할 때 안 됐어요?”
“실은 짧은 장편 하나를 마무리하는 중이에요.”
내색은 하지 않았어도 편집자가 내심 깜짝 놀라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원고 언제 볼 수 있어요?”
“곧이요.”

 

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었을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점점 더 나는 새로운 소설을 시작했다는 것, 쓰고 있다는 것에 대해 함구하는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다. 비밀로 하고 싶었다. 나만 알고 싶었다. 왜냐하면 내가 그것을 밝히는 순간이 바로 내가 그 도시를 떠나야 할 순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또한 알고 있다. 내가 영원히 그 도시에 머물 수는 없다는 것도.

 

 


 

[예약판매]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저
문학동네 | 2013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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