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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베르너 비숍 Werner Bischof

클로드 쿡맨 저/이영준 역
열화당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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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너 비숍의 삶은 우연이 지배했다. 사진하게 된 것도 사진작가에서 기자가 된 것도 모두 우연이었다.

 

유복하고 지적인 분위기에서 자란 베르너 비숍은 어릴 적부터 미술에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재정적으로 안정된 직업을 가지길 원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화가가 아닌 산업디자인을 선택해 1933년 취리히 응용미술학교(the School for Arts and Crafts)에 들어간다. 그러나 응용미술학교에서 상업미술 수업은 이미 자리가 찼기 때문에 사진을 하기로 했다. 카메라라는 새로운 매체의 끝없는 가능성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가 사진을 선택한 1930년대는 모더니즘의 시대였고 파리와 함께 유럽 사진의 중심지인 베를린에선 사진 역시 그 영향을 받은 뉴 비전 운동(참고: http://www.metmuseum.org/toah/hd/nvis/hd_nvis.htm) 이 한창이었다. 뉴 비전이란 말을 만든 모홀리 나기는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뉴 비전)로 사진을 정의했다. “낡은 비전은 1890년대에서 1910년대까지 꽃을 피웠던 픽토리얼리즘이었다. 모더니스트 사진가들은 회화주의자들의 부드러운 초점과 톤의 효과를 거부햇다. 그들은 다른 예술을 흉내내는 대신, 매체 자체의 독특한 능력을 탐색하면서 순수성을 고집했다. 모홀리 나기는 스스로 빛을 그리는 화가라 말했다.”

 

30년대 비숍의 사진은 뉴 비전 운동의 일부였다. “초기 십 년간의 사진에 대해 회상하면서 비숍은 나는(계란, 식물 등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법을 배웠다.’고 썼다.” 졸업 후 그의 작품들은 있는 그대로 보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그 당시 비숍의 작업태도를 완벽주의라 말한다. “한 예로 조개껍질은 비숍이 광고사진 일을 하던 시절 계속 나타나던 소재였다. Argonauta(취리히, 1941)란 사진은 자연에서 발견한 바닷가 풍경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의 장면을 연출하는데 비숍이 얼마나 극도의 완벅주의를 추구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일 뿐이다. 스튜디오에서 직은 이 정물사진은 조개의 뿔들이 배경에 비해 희게 보이고, 앞쪽에서 떨어진 그림자는 모래에 비해 검게 보이도록 세심하게 배치되고 조명된 것이다. 그런 효과를 얻기 위해 비숍은 수도 없이 많은 시간을 조개껍질을 자르고 사포질하고 윤을 내는 데 썼다.” 있는 그대로의 사물은 사진에 그려진 사물이어야 한다. 사진이 실제보다 더 실제같이 보이도록 하가 위해선 사물 자체의 모습이 아니라 매체의 성격에 맞는 것이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된다.

 

사물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이 피사체가 될 때 역시 마찬가지이다. '뒷 모습 누드' (취리히, 1937)는 실제보다 더 실제같은 사진을 찍는 비숍의 능력을 잘 보여준다. "비숍은 모델의 등을 톤에 대한 연구로 바꿀 정도로 빛을 아주 잘 다뤘다. 진한 검은색의 넓은 영역과 좁지만 강한 하이라이트 사이에 잘 조절된 회색의 영역이 있다. 비숍은 또한 일반적인 기대와는 다르게 보이는 공간적 깊이를 만들어내고 있다. 배경으로 보여야 할 왼쪽의 검은 부분은 모델의 앞에 있는 평면처럼 보여서 마치 모델이 오른쪽의 검은 평면 앞쪽에 떠 있는 듯이 보인다."

 

역사적인 사건만 아니었다면 베르너 비숍은 독창적인 빛의 작용과 형식에 대한 순수한 연구를 통해 예술계에 뛰어난 사진작업을 가져다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2차대전은 비숍이 모더니즘의 형식주의를 떠나게 만든다.

 

사건이란 2차세계대전과 그 후유증으로 나타난 유럽의 황폐, 식민주의ㅏ의 해체와 냉전이었다. 격동의 세계를 맞아 비숍은 예술 사진가로 남아 있을 수 없엇다. 그는 인간과 그 문제에 대한 열렬한 증언자로 변신했다.” 덩굴, 민들레 씨앗, 누드, 레이스를 대신해 그의 사진에는 갑자기 사람의 얼굴이 나타났다.

 

비숍은 스위스의 노동자들, 맹아학교, 이탈리아의 티치노에 있는 난민수용소, 그리고 스위스의 이탈리아어 사용지역을 찎었다. 평화주의자 로맹 롤랑의 열렬한 독자인 그는 이 사진들과 이후 작업들에서 휴머니즘과 사회주의를 받아들인다.

 

”티치노의 수용소에서 찍은 이 사진은 텅 빈 시선이 깊은 심리적 상처를 암시하는 난민 어린이를 보여준다. 비숍은 전쟁이 그의 '상아탑'을 파괴해버렸다고 썼다. 그리고 '그 후로 나의 관심은 고통받는 인간의 얼굴에 집중되었다. 집에서는 전쟁 전에 찍은 섬세한 사진들을 생각에 잠긴 채 연구했다. 그것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많은 찬사를 받은 사진들이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나는 나날의 공포로 감각이 마비되고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수십만의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전후 6년간 유럽 가로지르며 그가 많은 "사진들이 불에 타 버린 독일 국회의사당 건물에서부터 수많은 도시의 벽돌과 돌무더기들까지 물리적인 폐허를 강조하고 있다. 어떤 사진들은 상징적인데, 구멍나고 짖어진 병사의 철모가 폭격 맞은 독일 국회의사당 앞 물웅덩이에 놓여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국회의사당' 베를린, 1946) 불에 타 버린 차와 트럭의 잔해가 독일 국회의사당을 감싸고 있다. 돔은 부서졌지만 건물의 독특한 외양은 알아 볼 수 있다." 비숍은 폐허의 도시적인 스케일을 배경으로 인간의 스케일을 사진의 전경에 배치한다. 그러나 그 역시 도시의 폐허와 마찬가지로 "파편들이 뚫고 지나간 철모가 물웅덩이에 녹슬어가는, 폐허"로 상징할 뿐이다.

 

"그러나 비숍이 전후에 찍은 대부분의 사진은 첫번째 여행에서 발견한 주제를 나타낸다. 그것은 인간의 불굴의 용기이다. 몬테 카시노에서는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이 새집을 짓기 위해 큰 돌 두개를 머리에 이고 간다. 그리스의 지로스에서는 넝마 같은 바지를 걸친 사람들이 전쟁고아를 위한 시설물의 뼈대를 올린다. 비숍의 어린이 사진도 그것들만큼이나 복합적이다. 그는 천장도 없는 교회에서 줄넘기를 하는 여자 아이, 그리고 폐허 속에서 게임을 하는 아이들의 사진을 통해 그들의 활기를 찬양했다. 그러나 그들의 텅빈 시선과 말 없는 눈물에서 그들이 받았을 상처를 회상하기도 했다."

 

포토저널리즘으로 전향한 비숍은 '초기의 심미주의와는 분명히 단절을 했다. 에든버러의 성당을 찍고는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보기에는 아름답지만 이 죽은 것을 찍으려고 몇 시간 동안 조명과 삼각대와 씨름하는 일은 이제 정말 매력 없다. 차라리 사람들이 오가는 혼잡한 철도역에 서 있는 것이 낫겠다.' 그는 곧 훨씬 더 생생한 곳을 경험하게 된다. 1951년 2월 그는 인도로 갔고 극동에서 거의 이 년을 있었다. 거기서 그의 이후 사진 경력을 채워 줄 자신만의 주제를 개발해낸다. 서구화가 옛날의 식민지였던 나라들을 휩쓸었을 때 비숍은 보통사람들에게 가해지는 압력을 느꼈다. 그는 현대의 경제적인 힘의 공세에 대항해 전통문화를 지키려는 그들의 투쟁을 기록하고 싶어했다. 인도, 일본, 한국, 홍콩, 인도차이나, 멕시코, 페루 등지에서 그는 도시를 벗어나 모더니즘의 침범에 해를 입지 않은 마을들을 찾아 다녔다."

 

'어머니와 아이' (비하르 주 인도, 1951)는 그의 전후 유럽을 다룬 사진들과 연속선 상에 있다. 인도를 덮친 대기근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사진이라 할 만한 이 장면에서 비숍은 낮은 앵글을 써 도움을 청하는 이 바싹 마른 여인을 기념비처럼 보여준다. 아이도 어머니의 제스처를 흉내내고 있는데 마치 가난과 배고픔이 미래의 세대에게도 되풀이될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비숍이 찍은 인도의 대기근 사진들은 미국의회가 인도원조안을 통과하는데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그의 제3세계 사진들 역시 그의 전후 유럽 사진들처럼 복합적이다. 한국전쟁, 베트남전을 다룬 사진들처럼 전쟁의 파괴를 다루기도 했지만 그런 폐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의지와 삶의 진정성을 보여준다.

 

그가 본 제3세계는 그가 겪은 뉴욕의 대립항이었다. "그는 뉴욕의 멈출 줄 모른 에너지를 '요부같이 흥분되고 매력적'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뉴욕의 '일상의 공허함과 메마른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강한 느낌을 받앗다. 맨해튼의 거리를 메운 얼굴들의 홍수 속에서 그는 '성공한 사람들, 환멸을 느낀 사람들, 살려고 버둥거리는 사람들, 생기를 잃은 사람들, 포기햇지만 아직 불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떠나고 싶지만 떠날 수 없는 사람들, 크고 멋지지만 차갑고 무자비한 달러의 세계에서 서서히 쇠퇴해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의 사진에서 뉴욕이란 도시는 억압적이고 비개성적으로 느껴진다. 사람들은 익명적이고 눅눅한 길거리를 서둘러 걷고 있거나 가게 진열장 속에 희미하게 모습을 보이며 걸설용 철근 더미 속에 갇혀있기도 하다."

어쩌면 오리엔탈리즘이라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는 제3세계에 자신의 환상을 그리는 대신 제3세계를 있는 그대로 사진에 담으려 노력했다. 가령 '바닷가에서 (트리반드룸, 인도, 1951)'에서 '소년들이 바다와 모래의 경계에서 발가벗고 뛰놀고 있다. 인도에서 많은 서구 사진가들이 그랬듯이 대상을 이국적으로 보이게 하기보다 오히려 비숍은 자유와 즐거움이라는 보편적인 순간을 포착했다."

그가 제3세계에서 보려 했던 것은 그의 대표작이며 이책의 표지로 쓰인 '쿠스코로 가는 길' (페루, 1954)에 잘 나타난다. "피리를 불며 홀로 걸어가는 이 소년은 또 다른 인간적 보편성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바로 음악을 만들려는 충동이다. 자기가 만든 구조물에 갇혀버린 뉴욕의 노동자와는 달리 이 이미지는 사람들이 그들의 자연환경에 맞추어 편안하게 살아가는 곳에서 볼 수 잇느,ㄴ 전통문화의 인간적 진정성을 찬양하고 있다."

그 사진을 찍고 얼마 후 비숍은 페루의 어느 계곡에 차가 추락해 죽는다. "아흐레 후 비숍의 동료인 로버트 카파는 인도차이나의 프랑스 군인들을 찍다 지회를 밟아 죽게된다."

베르너 비숍의 유산은 그 아름다움과 인간적 상황에 공감하는 묘사로 돋보이는 사진 수백 점을 포함한다. 인간의 슬픔을 담은 얼굴에서 활력있는 인간의 정신까지, 전쟁과 기아의 상흔에서 전통문호의 단순한 진정성까지 비숍은 그의 시대를 용기와 사랑으로 찍었다. 비숍은 자신의 예술적 감수성과 참여하는 증언자로서의 유럽적 저널리즘의 전통을 결합하여 사진의 명확한 기준을 표현했는데 그것은 자신의 이미지에서 이루고 잇는 것이었다. '깊이있게, 전적으로 자신을 헌신하고, 온 마음으로 싸워 얻어낸 작업만이 어떤 가치를 가질 수 있다.'"

 

매그넘 갤러리:

http://www.magnumphotos.com/C.aspx?VP=XSpecific_MAG.PhotographerDetail_VPage&l1=0&pid=2K7O3R14WSNQ&nm=Werner%20Bisch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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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세계의 미래 | 경제경영 2011-07-03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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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중국 없는 세계

조나단 와츠 저/윤태경 역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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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이 정착하기 시작햇을 때 아이슬란드는 1/4이 숲이엇다. 정착자들은 나무를 베고 초지를 만들었고 나무들을 땔감과 목재와 숯으로 사용했다. 정착하고 수십년 만에 삼림의 80%가 사라졌고 연재는 96%가 사라졌다. 나무가 사라지고 양들이 풀을 뜯었다. 그리고 정착 초기에 돼지들이 뿌리까지 캐먹었다. 카펫처럼 얄팍하게 흙을 덮은 풀이 사라지자 바람이 싣고 온 화산재에 불과하던 흙들이 고스란히 노출되어 바람에 날리기 시작햇다. 결국 바이킹들이 정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슬란드의 토양이 고지대에서 저지대, 심지어 바다까지 밀려내려갔다. 그러자 고원지대에서 풀은 물론이고 흙조차 볼 수 없었다. 전에는 푸른 초원이었던 곳이 인간, 혹은 양 때문에 사막으로 변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

아이슬란드의 사막화처럼 매년 중국의 황토고원에서 불어오는 황사는 人災이다. 사람이 황토고원은 울창한 숲이엇다. 그러나 사람이 정착하고 나무를 베어내면서 황토가 비바람에 노출되었다. 황토는 수백만년동안 바람이 쌓아올린 먼지이다. 그 먼지를 가려주던 나무가 없어지면서 황토를 쌓았던 바람은 다시 황토를 실어나르게 되었다. 황사는 자연현상이라기 보다는 사람 때문에 일어난 인재이다. 황사가 그런 것처럼 중국의 역사는 자연파괴의 역사라고 저자는 말한다.

서구인들은 중국이나 인도를 생각하면 자연과 더불어 사는 생태주의를 떠올리고는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물론 서구인들의 환상이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고대 중국의 예술과 문학에는 자연을 찬미한 작품이 많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숲과 강, 늪을 보존할 수 없는 자는 왕이 될 수 없다’는 격언이 있었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가치관은 점차 자연을 개발하는 쪽으로 기울어졋다. 유교에는 자연과 인간이 하나라는 ‘천지합일’ 사상이 잇다. 그러나 유학자들은 자연보다 사회에 중점을 두엇다.” 숲으로 뒤덮였던 유럽의 역사가 그러했던 것처럼 인도도 중국도 결국 문명, 농업문명이었고 농업은 숲과 공존할 수없다.

“환경사학자 마크 엘빈은 중국인의 자연관을 이렇게 정리했다. ‘전통적으로 중국인들은 숲을 좋아하는 동시에 적대했다.’ 그는 ‘코끼리의 후퇴’란 책에서 지난 3000년간 중국인들이 숲과 야생동물, 소수민족을 평야에서 산악지대로 내몬 과정을 추적했다. 3000년 전 중국에는 숲과 야생동물이 풍부해 베이징에서도 코끼리를 볼 수 있었지만 한족 왕조가 들어서면서 남쪽과 서쪽으로 국가 팽창함에 따라 무자비한 삼림파괴가 자행되었다.”

저자가 보기에 서구인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중국인 역시 자연을 정복하고 이용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을 뿐이다. 그런 중국인의 자연관은 마오쩌둥과 함께 새로운 단계에 올랐다고 저자는 말한다.

“지난 60년간 중국 공산당은 마오쩌둥의 뜻을 이었다. 정치인들은 중국을 강한 국가로 만들고 인민을 전통 관습과 외세의 위협에서 해방하고자 마오가 계획한대로 자연을 개조했다. 이런 중국 공산당의 사고방식은 (장자의) ‘쓸모없는 나무’ 밑에서 졸고 있는 철학자의 생각과는 매우 다르다. 인간의 의지로 산을 옮기겠다는 (우공이산) 생각은 곧 사회의 주류가 되었다. 중국은 지구에서 가장 개척하기 어려운 티벳 고원까지도 개척했다.”

마오쩌둥의 사상은 아편전쟁 이후 중국인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부국강병. 서구의 충격 이후 중국 엘리트들의 머리 속에는 그 네글자 이외에는 다른 것이 없었다. 그 목적을 위해 무슨 수단이든 정당화되었다. 산업화 과정에서 서구인들이 그랫듯이 마오에게 자연이란 자원과 동의어일 뿐이었다. 그러나 마오는 어설펐다. 과학적 사회주의를 말햇지만 과학은 없고 이념만 떠든 어설픔이 대약진운동 같은 재앙을 낳았고 문화혁명 같은 역사의 코미디를 낳았다. 문화혁명 이후 마오는 화석일 뿐이다. 사진틀에 걸려 모셔놓으면 되는 무의미한 뒷방 귀신이 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마오의 자연관은 그대로 이어졌다. 중국 엘리트의 목표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국강병을 위해선 자원일 뿐인 자연을 이용해야 했다.

그 결과는 인상적이다. “내가 중국에 이사온지 1년 만에 중국의 GDP는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따라잡았다. 그리고 다시 1년이 자니자 영국을 따라잡았다. 대약진 운동 시기에 마오쩌둥이 목표했던 일을 50년 만에 해낸 것이다.”

그러나 그 대가 역시 막대했다. “베이징은 도시의 공기가 너무 나쁜 날이면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쉬는 시간에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막을 정도였다 나는 두 딸이 걱정되었고 내 폐도 걱정되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계속 조깅을 해왔지만 베이징에서 몇 년 살다보니 짧은 거리를 뛰어도 숨을 헐ㄸ거이곤 했다. 집집마다 석탄 난방을 하는 겨울이 되면 목이 아플 정도로 기핌을 햇고 이사 온 뒤로 두번이나 폐렴에 걸려 생전 처음으로 흡입약을 처방 받은 적도 있었다. 베이징은 숨이 막히는 도시였고 나도 숨이 막혓다. 7년간 베이징에 머물면서 나는 영국이 200년간 겪은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을 빠르게 돌려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중국이 세계 환경문제의 핵심지역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경제성장이 환경에 준 피해를 GDP에 반영한 그린 GDP로 계산하면 지난 한 세대동안 중국의 경제성장률은 잘해야 0이거나 마이너스이다. 물론 중국 엘리트들도 할 말은 많다. 우선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 환경은 그 다음.

“지금까지 경제성장은 대가를 치러야 햇다. 현대화는 여러 부작용을 낳았다. 영국에서 시작되어 유럽, 북미, 일본으로 이어진 경제발전모델은 우선 경제를 개발하고 나중에 부작용을 해결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그 방식이라는 것이 문제를 남에게 떠넘기는 것이니 문제다. 어느 정도 살만하다 싶으면 이제 공해를 만들고 환경을 파괴하는 산업을 다른 못사는 나라에 떠 넘기고 자신의 땅만 깨끗하게 만드는 방식이었다. 일본이, 한국이 경제성장을 한 이유가 유럽과 미국이 더 이상 하려 하지 않는 더럽고 돈 안되는 산업을 하기 시작하면서였고 중국이 경제성장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현상은 어떤 면에서는 성장통이라 할 수잇다. 낙관론자들은 중국이 순조럽게 경제성장 단계를 밟아나가 결국에는 공해산업에서 벗어날 것이라 전망한다. 일본과 한국이 극복한 환경문제를 중국이라고 극복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저자는 회의적이다. “중국은 산업화에 늦게 뛰어든 탓에 다른 나라로 폐기물을 버리기도 힘들다. 그래서 중국은 공해 산업을 외국으로 이전하는 대신 간쑤 성, 닝샤후이족 자치구, 네이멍구 자치구 같은 서부지역으로 이전할 수 밖에 없다.” ‘세계경제의 하수처리장’이 된 중국으로 흘러든 하수는 중국 밖으로 흘러갈 곳이 더 이상 없다. 중국의 문제는 중국 안에서 처리되어야 한다. 그러나 과연 방법이 잇는가?

중국 정부도 바보가 아니니 문제를 잘 알고 방법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중국 자체의 규모가 문제다. 환경문제란 결국 경제성장을 지속할 자원이 바닥난다는 뜻이다. 지금의 경제성장방식은 국내의 자원이 바닥나거나 더 이상 뽑아내기 힘들어지면 밖에서 들여오는 방식이었다. 예를 들어 일본과 한국은 유럽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 자국의 숲을 열성적으로 보호한다. 그러면서 필요한 목재는 다른 곳에서 수입한다. 중국의 문제는 중국 자체의 덩치 때문에 그렇게 자신의 문제를 전가할 곳이 없다는 것이다.

“상하이의 화려한 외관은 자원을 제공해주고 쓰레기를 대신 처리해주는 다른 지역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부유한 대도시들이 그렇듯, 상하이의 고단백, 고칼로리 식생활은 다른 지역의 환경을 파괴한다.” 그러나 중국인의 생활방식이 상하이를 닮아가면 갈수록 중국 내에서 희생이 되어줄 지역은 사라지고 중국 밖에서 그런 지역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지구는 중국의 규모로 커진 서구식 라이프스타일을 감당할 수 없다.

“1949년: 사회주의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었다
1979년: 자본주의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었다.
1989년: 중국만이 사회주의를 구할 수 잇었다.
2009년: 중국만이 자본주의를 구할 수 있었다.”

저자가 인용한 베이징에서 유행한 농담이다. 미래에도 중국이 세계를 구할 것인가? 저자는 그래야만 한다고 본다. 영국에서 시작된 경제성장모델이 중국에서 그 한계에 이르럿고 중국이 그 한계를 넘지 못한다면 중국과 함께 세계는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정부는 “세계 역사상 어느 국가도 이루지 못한 일을” 해야 하고 하려고 한다. 2세기 넘게 바뀌지 않은 경제모델을 중국은 바꾸어야 하고 바꾸려고 한다. 저자는 이책을 쓰기 위해 중국 전역을 돌아보면서 환경파괴의 참상을 너무도 많이 보았다. 그러나 희망도 보았다. 그러나 과연 중국이 할 수 있을지 저자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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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심리학의 진화 | 수신/심리 2011-07-03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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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행복의 완성

조지 베일런트 저/김한영 역
흐름출판 | 2011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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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초, 네브라스카 대학에서 심리학을 가르치던 나의 할아버지 도널드 클리프턴 박사는 연구 도중 매우 김각한 문제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거의 모든 심리학 분야들이 사람들의 ‘부정적인 면’만을 다룬다는 사실이엇다.

사람들의 ‘긍정적인 면’을 연구하는 것이 그보다 중요하다고 믿던 할아버지는 지난 50년간 인간이 가진 긍정적인 면에 중점을 두고 동료들과 함께 수백만 번의 인터뷰를 실행해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다.

할아버지가 40여년 째 연구를 진행오던 1990년대에 새롭게 떠오른 심리학 분야가 바로 인간의 긍정적인 면을 연구하는 긍정심리학이다.” (도널드 클리프턴, 톰 래스)

긍정심리학의 시조로 불리는 도널드 클리프턴의 이론은 ‘물통과 국자 이론’으로 요약된다: “우리는 모두 보이지 않는 물통을 가지고 있다. 그 물통은 주변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에 따라 지속적으로 채워지거나 비워진다. 물통이 가득 차 있을 대 우리는 행복을 느끼고 비어 있을 때 우리는 고통을 느낀다. 우리는 또한 보이지 않는 국자를 가지고 있다. 그 국자로 타인의 물통을 채워줄 때 즉 긍정적인 감정을 이끈 ㄴ말이나 행동을 할 때 우리의 물통도 채워진다. 그러나 국자로 타인의 물통에서 물을 퍼낸다면 즉 긍정적인 감정을 줄어들게 만드는 말이나 행동을 한다면 우리의 물통에서도 물이 빠져나가게 된다.” (도널드 클리프턴, 톰 래스)

긍정심리학의 논리는 반세기가 훨씬 넘었지만 그리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물통에 담긴 물의 정체는 세월과 함께 바뀌어갔다. 초창기 긍정심리학의 내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이다. 위에서 인용한 물통과 국자 이론을 소개한 책에서도 첫번째 사례로 드는 것이 칭찬의 효과를 보여주는 피그말리온 효과였다.

이후 긍정심리학의 논리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 미국식 성공학의 학술 버전에 불과하게 되었다.원하면 못 이룰 것이 없다는 ‘시크릿’류의 자기계발서와 다를 것이 없게 되었다. 긍정심리학에서 ‘긍정’의 기초가 잘못되었다는 말이다. 피그말리온 효과는 실험적으로 증명된 가설이다. 그러나 칭찬을 아무리 해도 백치가 전교 수석이 되고 하버드에 들어갈 수 없고 아무리 나는 할 수 있다는 정신으로 무장해봐야 청소부가 대기업 CEO의 역할을 해낼 수는 없다.

이책은 긍정의 개념화가 잘못되었다는 반성에서 시작한다. 저자는 긍정의 기초를 새로 놓기 위해지난 10년동안 진화심리학과 생리심리학(보통 뇌과학이라 알려진)의 성과를 원용한다.

두 분야의 가장 두드러진 성과라면 그동안 심리학에서 무시되어온 감정의 메커니즘을 튼튼한 생물학적 토대 위에 올려놓았다는 점이다.

분노, 두려움, 짜증과 같은 스트레스성의 부정적 감정이 왜 진화했으며 어떤 메커니즘에 기초하고 있는가를 밝혔듯이 사랑, 기쁨, 관용과 같은 긍정적 감정이 어떻게 진화했고 어떤 메커니즘인지를 진화심리학과 생리심리학은 분명한 논리로 설명한다.

이책의 저자는 긍정심리학의 ‘긍정’을 두 분야에서 설명해낸 긍정적 감정으로 재해석한다. 저자가 열거하는 그 감정들은 이렇다: 사랑, 희망, 기쁨, 용서, 연민, 믿음(또는 신뢰). 저자가 이 6가지 감정을 다루는 이유는 그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행복’에 결정적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면서 고통은 불가피하다. 저자는 같은 고통을 겪더라도 그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행복이 결정된다고 이전 저서인 ‘행복의 조건’에서 말한다. 같은 고통이라도 누가 더 성숙한가에 따라 행복한가 불행한가 차이를 만들며 그 성숙함이란 6가지 감정을 느끼는 능력이라고 저자는 이책에서 말한다.

저자가 6가지 감정을 선택을 한 이유는 간단하다. 그 감정들이 사회적인 다시 말해 도덕적인 감정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행복의 조건’에서 보여준 것은 도덕적인 능력 또는 사회적인 능력이 높을수록 더 행복한 삶을 산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책에서 저자는 그 능력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말하려 한다. 원론적인 수준에서 감정들로 재정의하고 그 감정들이 어떻게 진화론적으로 형성되었는지 즉 우리의 생존에 어떻게 그 감정들이 유용했는지 다시 말해 그 감정들이 사회적 능력으로서 왜 선택되었는지 그 감정들이 개인의 삶에서 어떤 유용성이 있고 의미가 있는지를 설명한다.

이책은 ‘행복의 조건’의 연장선에서 보아야 그 의의가 제대로 이해된다. 그 책을 읽은 사람에겐 의미 있는 독서가 될 것이다. 그러나 ‘행복의 조건’과 같은 수준의 책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것이다. 이책은 이전 저서와 같이 탄탄한 실제 연구에 기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책은 어디까지나 시론에 불과하다. 저자가 의지하는 진화심리학과 생리심리학이 저자의 전공이 아니란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이책이 하려는 시도가 현재로선 지나치게 대담한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가 말하듯이 긍정적 감정에 대한 논의는 드물었다. 그리고 저자가 의지하는 두 분야의 성과가 쏟아져 나온지도 10년이 조금 넘는다. 아직 기초가 튼튼하지 않은 영역에 대해 이책은 기초를 놓으려는 대담한 시도를 한다.

이책의 논의는 무난하다. 아직 튼튼하지 않은 기초에서 많은 것을 말할 수 없고 저자가 모험을 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만큼 이책의 논의는 무미건조해진다. 현재 학계의 수준에서 긍정적 감정에 대한 종합이 어떤 수준으로 가능한지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이책의 의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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