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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9월은 잔인한 달] - 경영 분야에 관심을 두고 있는 취업 준비생들에게 | 도서일기 2012-10-02 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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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9월은 잔인한 달

이동진 등저
지식공감 | 2012년 08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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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들에게 취업 자체가 꿈이 되어버린 현실은 씁쓸하지만 이제 꽤 오래된 일이다. 피 터지게 공부하고도 점점 더 먹고 살기가 힘든 세상이니 젊은이들은 자나 깨나 내일 할 일을 걱정한다. 그러다 보면 내 앞길은 그저 막막하기만 한데 어인 영문인지 제 꿈을 찾아 잘만 사는 이들이 많은 것 같아 근심이 늘어진다. 그렇다면 그 시기를 똑같이 통과한 선배들은 과연 어떻게 꿈을 펼칠 수 있었는지 궁금한 것이 당연지사. 그래서 이 책은 인터뷰 형식을 빌려 21명의 선배를 만난다. 인터뷰어는 현재의 대학생, 인터뷰이는 과거의 대학생. 후배들이 인터뷰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그리고 이 책이 독자에게 전하려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보인다. 하나(첫 번째 목표)는 '당신은 어떻게 꿈을 찾았는가?'이고, 다른 하나(두 번째 목표)는 '그 꿈을 펼치려면 대학 시절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취업을 위한 구체적인 안내가 아니라 진로에 대한 경험적 조언을 목표로 삼고 있다.

 

아마도 그러한 방향 탓에 엮은이는 취업의 문을 뚫고 당당히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고 있는 인터뷰이들이 주로 어떤 분야에 근무하고 있는지 초반에 명백히 밝히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한 것 같다. 그래서 언뜻 봤을 때는 이 인터뷰집이 누구에게 적합한지 알기가 다소 어려운데, 면밀히 들여다봐야 21명의 사회인이 대부분 경영 분야에 근무하고 있거나 그것을 위한 학업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프롤로그에서 '인문계 졸업생들이 고려할 수 있는 카테고리를 상위 수준에서 선정'했다는 간략한 설명으로 인터뷰이의 직종 유형을 온전히 설명했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따라서 이 책은 무엇보다 경영 분야에 관심을 두고 있는 이들이 읽기에 알맞다. 자신보다 먼저 사회에 발을 내딛은 이들로부터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더구나 이야기가 오가는 상황 속에서 전문 용어가 등장하는 일이 잦은데, 그걸 제대로 흡수하여 진로에 적용하도록 돕는 것이 이 책의 가장 진취적인 목적이라면 자연히 그 분야에 촉수를 뻗고 있는 이들이 접하는 편이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이제 앞서 언급한 두 가지 목표는 얼마나 달성되었는지 물을 때가 됐다. 그것의 성패는 인터뷰의 질적인 측면과 다분히 연결된다. 요컨대 인터뷰가 얼마나 잘 이루어졌느냐 하는 것이 핵심적인 문제가 된다는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첫 번째 목표는 그다지 완수되지 않았고 두 번째 목표는 제법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꿈을 찾게 되었는지는 그다지 드러나지 않는 데 반해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대학 시절에 무엇을 하는 것이 좋은지는 비교적 잘 끄집어냈다. 사실상 성취하기가 몹시 어려운 첫 번째 목표는 이런 종류의 책들이 다 그러하다는 점에서 특별히 이 책만의 단점은 아니다. 왜냐하면 직업을 선택하는 경위는 대개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는 만큼 사회적으로 아주 성공한 사람도 그것을 스스로 분석하거나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 그 일이 좋았다고 설명하는 데 그치는데, 관심을 표하게 된 근원 자체를 밝히는 건 정말이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걸 감안하다면 두 번째 목표를 성취한 것만으로 더 높은 점수를 줄 수도 있을 것이다.

 

21명의 선배에게 질문을 던지는 이가 한 사람이 아닌 까닭에 인터뷰 내용에 대한 편차는 있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여럿이 모여 의견을 수렴하며 서로 조언을 주고받았겠지만, 균열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편차의 원인은 인터뷰이를 만나기 전에 미리 준비한 질문의 내용을 상황에 맞게 적절히 변용했는가에 좌우되는 듯하다. 가벼운 질문을 하나 던졌을 뿐인데도 때로는 인터뷰어가 유용한 정보를 술술 일러주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때, 예를 들면 엉뚱한 방향으로 대답을 하거나 은연중에 질문 자체를 회피하거나 자신의 과거를 다소간 포장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보충 질문이 필요한데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너무 전형적인 질문으로만 구성된 대담이 존재한다. 그런 쪽으로 질문을 잘 소화한 인터뷰어로는 이지*, 강모* 등이 눈에 띈다. 이런 점들을 어느 정도 숙지한다면 이 인터뷰집을 어떻게 활용하는 것이 좋을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고로 이 책은 경영을 공부하는 취업 준비생들이 그들보다 먼저 직업 전선에 뛰어든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차원에서 활용하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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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피에타] - 치유되지 않는 불면의 밤 | 영화일기 2012-10-01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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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피에타

김기덕
한국 | 2012년 09월

영화     구매하기

 

 

 

피에타

 

치유되지 않는 불면의 밤

 

<피에타>는 제목과 포스터가 번연히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구원의 문제를 다룬다.

그렇다면 영화를 보고 나서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과연 구원은 이루어졌는가? 

 

 

영화는 자본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강도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강도는 사채업자 밑에서 빚을 진 이들에게 무력을 행사하여 돈을 받아내고 있다. 그는 좀처럼 숙면에 들지 못하는데, 신체포기각서를 무기 삼아 불법적인 일을 자행하는 데 따른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 같지는 않다. 사실 강도는 그럴 계제가 못 된다. 그러나 인간의 무의식은 은연중에 저 자신을 옥죄는 법이다. 강도는 뭔가에 시달리듯 몽정을 한다. 그것은 아마도 욕정의 결핍이 아니라 욕망의 뒤틀림이다. 그런 그에게 느닷없이 엄마라고 주장하는 한 여자가 찾아온다. 영화는 그렇게 시작된다. 그러니까 가짜 엄마 미선은 강도가 의도적으로 소환한 하나의 환상과 부합한다. 영화가 미선이 강도의 엄마인지 아닌지 나중에야 밝히는 구조를 취하는 것은, 물론 그와 같은 내용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는 있지만, 관객을 강도가 걷고 있는 구원의 세계로 살포시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니까 미선이 억울하게 죽은 자신의 아들을 위해 복수를 감행하는 상황은 피해자의 원한보다 가해자의 죄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강도는 제 삶에서 내리 풀리지 않는 의문을 드디어 엄마라는 이름의 여자를 동원하여 이불 바깥으로 꺼내놓은 셈이다.

 

그러면서 강도는 짧으나마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밤마다 삶의 비극을 잊지 못한 채 침대에서 몸서리치던 나날들이 지나고, 급기야 미선의 손이 그의 몽정을 도울 때 강도는 다분히 자신이 의도한 대로 얄팍한 구원을 맛본다.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강도에게 자신을 엄마로 인식하게 만드는 미선의 어려움은 미선을 엄마의 자리로 초대하는 강도의 어려움에 비하면 차라리 덜 처절하다. 그녀의 방문은 불면의 시간과 절박한 기다림에 대한 응답이다. 요컨대 강도가 겉으로는 외면하는 척하면서 거듭 미선의 따귀를 때리고 제 몸의 일부를 먹게 하는 것은 엄마라는 존재를 받아들이기 이전의 주저가 아니라 확인이다. 온 세상이 나를 외면해도 가족만큼은 끝까지 지켜줄 거라고 믿는, 이 땅의 고독한 피투성이들의 근원적인 믿음을 그도 한 번쯤 가져보고 싶었던 것이다. 강도는 미선이 필요했다. 영화 초반에 강도가 한 채무자의 다리를 부러뜨려 보험금을 타내려고 할 때 그를 가만히 따라다니기만 하던 미선은 갑자기 강도를 욕하는 채무자를 향해 달려들더니 하이힐로 한 번 더 짓밟는다. 이는 자신이 엄마임을 거짓으로 입증하는 미선의 획책으로 보이지만, 꿈의 경계 안에 엄마를 불러들인 까닭을 전제하는 강도의 바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행위 자체를 지나치게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슬픔의 폭력’을 운운하는 어느 평자의 해석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렇게 김기덕 영화에서 여자들은 남자들을 고통스러운 정신적 긴장에서 벗어나게 하는 임무를 띤다. 자발적이든 강제적이든,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구원의 가능성을 품는다. 그러나 그것은 늘 실패로 끝이 난다.

 

여기서도 강도는 피해자의 엄마가 서 있는 용서의 언덕에서 자신의 죄를 씻을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인생의 다른 차원을 향한 도약을 꿈꾸지만, 그것은 그저 삶의 갑작스러운 이탈에 그치고 만다. 왜냐하면 그가 느끼는 절망이란 개인이 겪은 문제가 어찌어찌 해결되더라도 결코 줄어들지 않는, 존재의 구조 자체로부터 발생하는 불안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소외된 사람에게는 모순이 자기 안에서뿐만 아니라 자신과 세상 사이에서도 발생하므로 비극의 강도가 지극히 고통스러운 수준에까지 이른다. 1 따라서 강도는 그 이상으로 미선을 이용할 수 없다. 이때 미선은 강도에게 나무 한 그루를 심으라고 말한다. 나무를 심는 행위가 갖는 보편적 상징을 떠올릴 때 이는 분명 구원의 문제를 다루는 데 중요한 분수령이 될 것이다. 그것은 누구의 뜻인가? 강도의 극악무도한 짓으로 인해 삶의 날개가 꺾여버린 이들의 불꽃이 아닐까? 영화에서 미선은 단지 피해자 한 사람의 엄마가 아니다. 그녀는 강도에게 피해를 입은 이들을 대변한다. 한마디로 처음부터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미선은 강도가 불쌍하다고 말하면서도 결국 무참히 뛰어내린다. 아들한테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으며 강도의 진짜 엄마가 되어 줄까 잠시 고민하는 미선에게 무섭도록 달려드는 것이 또 다른 피해자의 엄마라는 것을 우리는 똑똑히 보았다. 끓어오르는 화산을 막을 수 없듯 누적된 고통의 독성은 그토록 강하다. 결과적으로 강도의 꿈과 미선의 복수는 제대로 호응하지 못한다. 강도가 발을 딛고 있는 세상에서, 나아가 김기덕이 꿈꾸는 세계에서 구원의 길은 그토록 요원하다.

 

이 영화는 종교가 본디 갖고 있는 정서적 호소력을 십분 이용하면서도 김기덕의 전작들과는 사뭇 다른 몇몇 요소로부터 현실의 그림자가 더욱 짙어졌다. 이를테면 연출자의 목소리가 거칠게 투사된 대화가 곳곳에서 발견된다. 김기덕의 남자들은 대개 말수가 적고, 심지어 입을 아예 닫고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사운드가 아니라 이미지에 방점을 찍는 방식으로 주제를 표현했던 그가 이번 작품에 이르러 의미가 직접적으로 전달되는 대사를 제법 집어넣은 것은 대중의 암묵적 요구에 적당히 부응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대사를 처리할 때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지 않는다. 모든 행위나 사건이 강도의 무의식 속에서 이야기의 징검다리처럼 연결되는 것이라면 말이 투박한 것도 별스럽지 않다. 살아 있는 동물을 우악스럽게 잡아먹으며 다른 사람들과 거의 소통하지 못하는 자에게 언어 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도리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것을 감안한다면 이정진의 연기는 강도라는 인물의 한계에 부딪히는 면이 없지 않다.) 다만 원래 그의 작품을 받아들이는 데 별 어려움을 겪지 않았던 이들에겐 몇 번의 관념적 대사가 적잖이 거슬리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소통을 하지 못했던 다수의 관객에게 그는 한발 다가서는 선택을 한다. 청계천이라는 장소를 구체적으로 호명하는 것도 그렇다. 원래 그는 주로 '섬', '빈 집'과 같은 상징적 공간을 내세웠는데 이번에는 누가 봐도 강도가 살고 있는 곳이 서울, 대한민국, 자본주의 사회라는 걸 쉽게 알아차린다. 이는 그의 세계가 아직 낯선 이들조차 이번 작품이 난해하다고 말하는 경우가 별로 없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김기덕의 영화는 비유하자면 대체로 소설보다 시에 가깝다. 기실 눈에 보이지 않는 구원의 문제를, 그것도 아주 급진적으로 행동하는 인물을 통해 이야기를 펼친다는 것 자체가 덩어리와 덩어리 사이에 점프가 많은 시와 유사한 데가 많다. 그의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은 현실적이지도 구체적이지도 않은 사건들의 기묘한 중첩이 자아내는 하나의 결정적 이미지에 마음이 동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와 관련하여 그는 대사를 휘발시키는 방식으로 이미지를 얻곤 한다. 그런 예를 이 영화에서 언급하자면 이런 것이다. 강도와 미선이 마지막으로 마주할 때 강도가 엄마를 잃을까 봐 땅바닥에 엎드려 절규하는데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다소 양식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미선도 예외가 아니다. 강도가 불쌍하다고 말할 때 조민수의 연기가 그 정도로 절절하지 않았더라면 그 상황을 유치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와 같이 인물의 내면을 설명하는 상황이 번번이 압축되어 있다. 그러나 그 결과 강도가 급격히 도약하는 순간의 파장은 더욱 강렬해진다. 그는 한 마리 나비처럼 유유히 제 할 일을 수행한다. 마치 그렇게 할 것을 미리 알았던 사람처럼 죽음이라는 영원한 수면 상태로 자신을 소진하려고 애쓴다. 그러한 도약에 편승했다면 마지막 장면에서 마음을 빼앗겼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의 붓이 투박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육신의 좌절을 가장 심하게 착취하는 것은 정신이다. 정신은 육체의 고통을 즐거워하고 육체를 약탈한다. 육체를 희생시키면서 풍부해진다. 정신은 강도질로 살고 있는 것이다. 문명의 유산이란 그 강도가 세운 공적 덕분에 생긴 것이다. 2 영화에서 자본이라는 무형의 가면을 뒤집어 쓴 '강도'는 저 자신과 그 주변에 놓인 육신들을 착취하고 약탈한다. 그는 개인적인 비극을 멈추려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강도'에 의해 끊임없이 반복될 것이다. 인간이란 세상에 내던져져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삶의 방식을 스스로 찾도록 선고받은 불행한 동물이라 했던가. 강도의 삶은 무작정 길가로 뛰어드는 토끼보다 하등 나을 게 없다. 오히려 동물은 동물 이외의 것이 될 수 없는 반면 인간은 비인간, 다시 말해 인간 이외의 것이 될 수 있다. 3 그러니까 영화에 나오는 동물들은 죽음으로써 모든 상황을 종료하는 데 반해 강도는 끝내 영원이라는 구원조차 얻지 못한다. 그것이 바로 자본의 늪이다. 강도에게 삶의 모순은 끝내 정화되지 않는다. 자본이 이끄는 수레에 의해 그의 육신이 벌겋게 문드러지는 그 지옥 같은 땅에 사는 이들은 점점 더 불면의 밤을 보낼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애타게 ‘피에타(Pietà)’를 외친다.

 

 

 

  1. 에밀 시오랑. 절망의 끝에서(1997). p.69.
  2. 에밀 시오랑. 독설의 팡세(2004). p.21.
  3. 1과 동일.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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