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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윤리21] - 가라타니 고진, 칸트의 윤리학으로 21세기를 열어젖히다 | 도서일기 2012-05-29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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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윤리21

가라타니 고진 저/송태욱 역
사회평론 | 2002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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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 문학 비평가로서 그 이름이 제법 귀에 익은 것과는 달리 여지껏 그가 쓴 책을 읽은 적이 없었다. 한국 인문학계에 가라타니 고진이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은 각종 비평집에서 확인되는 사실이다. 그는 서양 근현대 사상의 틀을 비서양인의 시선으로 재해석하여 인류 보편의 철학적 문제를 정교하게 탐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동양인으로는 드물게 문학 비평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그가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어떤 이야기를 펼치는지 궁금하여 그나마 내가 평소에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소재를 다룬 책 한 권을 골랐다. <윤리 21>은 기존의 철학자가 펼친 사상적 근거를 내세워 윤리의 문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조망하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일종의 사회 비평이다. 그 영역이 일본 사회 중심이긴 하지만 전쟁과 혁명은 비단 일본만의 문제가 아닌 터라 일반적으로 읽히고 있으며, 특히 식민 행위를 어떻게 반성하는 것이 옳은가를 논하는 만큼 우리로선 흥미로운 담론이 아닐 수 없다. 지난 20세기를 전쟁과 혁명의 세기라고 한다면 2000년에 출간된 이 책의 의미는 남다른데, 저자는 여기서 20세기의 윤리를 돌아보고 21세기의 그것을 내다보고 있다. 양은 적은 편이지만 단락별로 다양한 논의를 담아 정리하기가 만만찮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책에 대한 평을 쓰려는 게 아니고 저자가 말하고 있는 내용을 내가 이해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 구체적으로 풀어보고자 한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이 책을 독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자 책이 지닌 가치를 설명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일 것이다.

 

범죄자나 깡패가 등장하는 영화를 대하는 관객의 반응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사람에 따라 호오의 정도가 다르긴 하지만 아무리 잔인한 행위가 스크린에 전시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실제 행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연출된 것이므로 누구든 영화를 보면서 적당히 거리를 두게 마련이다. 일상 생활에서는 폭력을 혐오하면서도 영화나 소설에서는 그들을 지지하고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예를 들어, 여러 가지로 억울한 일을 당했던 주인공이 꾀하는 복수가 자극적이면 자극적일수록 관객은 더욱 통쾌한 기분을 맛본다. 이것이 이른바 미적 판단이다. 그 근거를 칸트는 '무관심'에서 찾았다. 말하자면 도덕적이고 지적인 관심을 배제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런 영화나 소설을 즐기는 것은 ㅡ 심지어 때로 현실에서도 그러한 시각이 나타나는 것은 문화적으로 훈련된 탓이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도덕과 이성의 체계를 뒤흔드는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그로부터 관심을 떼는 훈련을 한다. 잔인한 게임에 자주 노출되는 것도 그것을 부추긴다. 입에 담기조차 힘든 끔찍한 범죄가 점점 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그렇게 관심을 배제하는 일은 자연스럽다. 어쨌든 그것은 통상의 관심을 별도로 떼어놓고 보는 것이므로 예술 작품을 대하는 태도로 이어진다. 영화의 호불호를 나누는 결정적 요인이 되기도 한다는 뜻이다. 어떤 영화를 오로지 잔인해서 싫다고 말한다면 관심을 배제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뜻하고, 폭력적 행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그 반대가 되는 셈이다.

 

그렇게 관심을 배제하는 행위, 그러니까 관심을 괄호 안에 넣는 행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괄호를 다시 푸는 행위다. 쉽게 말해서 영화가 끝나고 나면 그 문제를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만약 영화에 등장한 폭력적 행위가 단순한 오락에 그칠 뿐 충분한 설득력을 갖추지 못했다면 과연 그 영화를 좋은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져야 한다는 뜻이다. 근데 이것은 갈수록 무시되고 있다. 영화가 끝나면, 소설을 읽고 나면 사유를 멈추기 일쑤다. 그런데 영화나 소설을 통해 자꾸만 그런 식으로 폭력에 길들여지면 인간의 윤리 체계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사람이 뭔가를 저질렀다면 그것이 아무리 불가피한 것이라 하더라도 윤리적으로 책임이 있다. 그것은 '자유로워지라'는 당위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인간에게 자유가 없었다 할지라도 자유로웠던 것으로 봐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가 먼저 위협하는 상황에서 정당한 방어 행위로써 내가 상대를 해쳤을 때조차 내게 책임이 있고, 운전을 하는 도중에 갑자기 누가 도로로 뛰어들어 사고가 났더라도 보행자가 사망을 했다면 운전자에게 일말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칸트의 이야기다. 칸트는 도덕성을 자유라는 관점에서 봤다. 그에 따르면 도덕은 선악이 아니라 자유의 문제다. '자유'는 상황에 따라 주체에게 주어지지 않기도 하지만, '자유로워지라'는 명령만큼은 언제나 인간의 행위와 함께 작동한다.

 

윤리를 선악의 문제로 바라볼 경우엔 모든 문제가 결정론적 인과성을 띤다. 악하면 죄를 짓는다는 식의 논리가 성립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신분석학의 기본 개념과도 맥락이 같은데, 어떤 결과를 야기한 원인이 반드시 있다고 가정하는 식이다. 사회적 범죄가 발생하면 바로 그 원인을 진단하려고 애쓰는 태도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윤리를 자유의 문제로 생각한다면, 의무가 그것을 좌우한다. 이때 의무 또는 지상명령은 국가나 공동체가 강요하는 규범이 아니고 '타자를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는 명령이다. 그런 의미에서 형이상학적인 개념이다. 이 경우엔 어떤 원인이 반드시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A이면 B이다'에서 A는 B를 규정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어떤 증상이 있을 때 A라는 원인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결코 A라면 B가 된다는 식의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이것을 구조론적 인과성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원인이 발견되어도 책임은 물을 수 없다. 윤리가 선악의 문제라면 결국 A이면 모두 B가 되어야만 하는데, 알다시피 실제로 그렇지 않다. 가령, 아버지가 폭력적이라고 해서 그 아들도 반드시 폭력적인 것은 아니듯. 따라서 저자는 칸트의 말처럼 윤리는 자유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한국 범죄 영화에서 인물이 저지른 행위마다 그 원인을 딱 규정하는 식의 연출은 문제가 있다. 원인을 구태여 제시할 이유가 없는 상황에서도 짧은 플래시백으로 과거를 파헤치면서 결정론적 인과성에 목을 매는 건 되려 영화를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된다.

 

이토록 윤리가 자유의 문제라는 게 명쾌하다면, 왜 우리는 21세기에 들어서도 그것을 새롭게 인식하지 못하는 걸까? 저자는 그것을 가로막는 요소로 종교, 자본주의, 정치를 꼽았다. 인간은 악한 존재이므로 '종교'로 구원을 받아야 하고, 이익을 취하는 건 곧 행복을 도모하는 일이므로 사람 위에 '자본'이 있고, 전쟁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것과 같은 '정치'가 멈추지 않는다. 죽은 자가 산 자의 방편으로 이용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저 세 가지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 도덕적 영역은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에서 나오는데, 그 명령은 죽은 자에서 비롯된다. 개인과 국가의 자유가 지상의 것으로만 이해될 때 윤리적인 문제는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칸트가 말한 대로 우리의 자유는 현전하는 타자만이 아니라 부재하는 타자에 대한 책임을 함의해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버마스의 공공적 합의 혹은 간주관성은 칸트의 윤리학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성을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항상 목적으로 사용하라는 도덕 법칙이 역사적으로 실현되는 것은 중요하다. 이와 같이 가라타니 고진은 칸트의 윤리학을 전면에 내세워 일본 사회를 비롯한 전 세계가 어떻게 21세기를 윤리적으로 살아 나갈 수 있을지 깊이 고찰한다. 그가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은 칸트론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외려 그 반대에 가깝다. 칸트의 '윤리'가 오해되는 대목을 찾아 참된 의미를 밝히면서 현대 사회에서 그것이 지닌 가치가 얼마나 큰지 역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저자의 담론은 식민주의에 대한 책임을 묻는 일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재 매우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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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 아내의 모든 것] - 아내는 왜 유독 지진을 두려워하는가? | 영화일기 2012-05-23 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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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내 아내의 모든 것

민규동
한국 | 2012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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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에게 카사노바를 선물한다? 그것 참 흥미롭다. 이런 설정은 자연스레 다음과 같은 궁금증을 일으킨다. 도대체 어떤 아내길래 남편이 그토록 위험한 짓을 벌이는가? 그래서 남자와 여자는 결국 어떻게 되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영화는 앞선 호기심에 제법 흥미롭게 반응하다가 뒤따르는 의문에 일쑤 따분한 절차로 마무리된다. 두현과 정인은 결혼한 지 7년 된 부부인데 남편은 아내에게 슬슬 싫증을 내기 시작한다. 아내 인물이 천하일색이어도 권태는 피할 수 없는 모양. 누구 앞이든 제 논리를 펼칠 때마다 한 치의 주저가 없는 끈덕진 입심과 사사로운 일에서도 인간의 위선적인 면모를 기어이 끄집어내는 굳센 사고, 그 두 가지는 정인이라는 여자를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이다. 물론 그녀가 내뱉는 말이 모두 합당한 것은 아니다. 자기 말만 해대는 꼴을 보노라면 상대방에게 귀를 기울일 줄 모르는 것 같아 불편할 때도 더러 있다. 그러나 영화가 스스로 말하듯 정인이 세상을 대하는 똑 부러진 태도는 사람들을 기쁘고 즐겁게 할 만한 것이고, 거기서 파생되는 재미는 영화가 지닌 핵심적 매력이다. 그런고로 성기보다 정인에게 눈길이 가고 류승룡보다 임수정이 돋보이는 건 자연스런 귀결이다. 이 영화에서 정인이 말을 주도하고 임수정이 말을 쏟아내는 설정은 대단히 흥미로웠다. 그것은 <러브픽션>에서 입으로 일기를 썼던 주월(하정우)과 어느 정도 비견할 만하다. 다 주워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말다운 말을 늘어놓는 캐릭터, 그것도 여성을 스크린에서 만나는 게 얼마 만인지 반가운 마음이 컸다.

 

그간 집에서 어떻게 조용히 남편 내조만 하고 있었을까 싶게 정인은 호기롭고 대차다. 장난처럼 시작된 라디오 방송이 승승장구한 것도 그녀의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곁에서 지켜본 남편이 아예 그걸 인정하고 있다. 집에서 연신 담배만 물고 있던 아내가 밖에서 일을 하니까 외려 관계가 좋아졌다고. 그러면서 서서히 남편은 아내를 다시 바라보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 후회할 줄은 알았지만 같은 남자가 봐도 좀 얄밉다. '임수정'을 아내로 두고 카사노바를 붙인다는 게 말이냐고. 근데 어째 배가 아파서 애틋한 감정이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 이혼하기 위해서 카사노바까지 붙여 가며 이런저런 일을 벌였는데 그로 인해 아내가 뜻밖의 인기를 얻자 모든 상황이 새퉁맞은 거지. 아니, 그러고 보니까 정인은 일본에서 유학까지 마쳤고 요리 실력도 출중한데 아이가 딸린 것도 아니고 뭣하러 집에 처박혀서 신문 배달하는 남자랑 실랑이나 하고 있는 거야? 진즉 제 배움배움을 살려 일이라도 했더라면 그 지경에 이르지 않았겠구먼. 그런 그녀가 아이를 갖는 데 어려움을 겪(어야만 하는 여자라)는 얄궂은 설정은 제아무리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하는 카사노바가 유혹한다 해도 결국 거기에 넘어가지 않을 것임을 담보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그게 마음에 걸렸다. 보다시피 그 사실은 부부가 심각하게 다툴 때조차 별달리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지 않다가 뒤늦게 남편이 제 잘못을 뉘우치며 아내에게 용서를 구하는 단계에 이르자 은근히 여자를 옥죄는 무거운 짐으로 작용하고 있질 않은가.

 

 

때마침 한반도에도 집이 무너질 정도로 무시무시한 지진이 발생하고, 땅이 흔들리는 데 유독 두려움을 느끼는 정인은 다시 아내의 자리로 돌아갈 것을 요구받는다. 두현과 정인이 처음 만나던 날에도 지진이 일어났다는 걸 상기한다면, 이 영화에 등장하는 지진은 결코 우연이 아니며 땅이 흔들리고 집이 무너지는 건 외부적 위협이 아니다. 그것은 아내는 안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다고 여기는 남자의 비겁한 관념이자 여자의 미련한 궁리다. 자기가 지은 집이 가장 튼튼하다는 말로 술수를 부리는 남자나 거기에 혹해서 제 능력으로 집을 지을 생각은 숫제 안 하는 여자나 한심하긴 마찬가지다. 미모도 출중하고 학식도 남부럽지 않은 정인이 스스로 집에 들어앉는 게 제일이라 판단하는 건 몹시 촌스럽지만, 그 불편한 진실을 보고도 못 본 체하거나 아예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영화에서든 현실에서든 이상한 여성성을 강요하는 일은 끊이지 않고 당연시될 것이다. 기왕 웃자고 만든 코미디 영화라면 정인이 카사노바와 바람이 난다거나 공중파 방송이 빵 터져 커리어 우먼으로 거듭나는 식의 결말도 나쁘지 않으련만, 무슨 법칙이라도 되는 양 아내는 어김없이 가정으로 돌아간다. 그래서야 원 남편이 제가 한 짓을 두고두고 후회하겠는가. 정인은 집에서 탈출할 가능성을 잠깐 품었다가 이내 '집을 지키는' 파수꾼이 된다. 여봐요, 그런다고 어디 지진을 피할 수 있겠어요? 나도 모르게 정인을 향해 이 말이 절로 튀어나온다. 영화의 야심 찬 제목 '내 아내의 모든 것'은 '내 집의 모든 것'으로 바꿔 읽으면 딱 알맞다.

 

감독의 말처럼 우리에겐 때로 '카사노바'가 필요하다. 내 매력을 온전히 알아차리는 이가 없다고 생각하며 누구에게도 좀처럼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거나 곁에 있는 사람들이 처음에는 가슴으로 이해하던 것을 점차 머리로 호응하는 것과 같은 권태를 보여 회의에 빠진 경우 그러한 존재는 관계를 재정립하는 데 보탬이 된다. 법정에서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기까지 일정한 조정 기간을 거쳐야만 하는 것이 타당한 일이라면 성기의 존재 또한 비현실적인 면이 없지 않으나 합당한 명분을 갖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 속 부부는 카사노바와 얽혔던 시간들이 그들의 사랑을 재확인하는 데 적절히 값했다고 믿으며 종국에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다 여기)고 있다. 권태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부부가 서로 손을 놓지 않으려 애쓰는 건 응당 상찬할 일이다. 그러나 두현이 정인을 새로이 바라보는 일, 그러니까 예전처럼 다시 사랑을 꽃피우는 일은 불미스러운 존재를 끌어들였던 사태가 결국 아내 쪽에서 그냥 이해하고 넘어가는 식으로 어영부영 수습되는 만큼 그리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다. 지진으로 무너진 집을 다시 짓는 일이 어디 그리 쉬운가. 익숙한 관계에서도 얼마든지 지난날의 감정을 되찾을 수 있으리란 가벼운 생각으로 수시로 되풀이되는 권태를 극복하는 일과 '내 아내의 모든 것'을 포용하는 일이 같다고 착각하지는 말지어다. 이는 영화가 끝에 이르러 섣불리 행복을 가장하는 데서 어떤 균열을 느낀 나만의 지엽적 교훈이다. 복에 겨운 두현 씨, 아내가 돌아온 건 순전히 지진 덕분이라는 거 명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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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은교] - 정지우와 '은교'의 만남에 관하여 | 영화일기 2012-05-14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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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은교

정지우
한국 | 2012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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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은교>는 알다시피 박범신이 쓴 동명의 소설을 토대로 만들었다. 내용이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자세히 살피면 어딘가 다른 이야기를 하는 측면이 있다. 여러 등장인물이 1인칭 시점으로 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원작은 독자로 하여금 다각도로 읽을 수 요소가 풍부하다. 다양한 감상을 한 편의 영화에 모두 그러모을 수는 없는 노릇이요, 그건 정지우가 원하는 바도 아니었으리라. 따라서 영화를 소설과 단순하게 비교하는 것은 이 작품의 경우 특히 더 부당하다. 원작과 견주어 모자란 대목이 소설을 읽을 때 인상적으로 느꼈던 요소가 결여된 것과 관련이 있다면, 그것은 단점으로 지적할 수 있는 근거가 아니라는 뜻이다. 소설은 주인공 이적요를 중심으로 크게 두 가지 줄기를 내뻗고 있는데, 마음 한 켠에서 늘 젊음을 탐하는 노년의 욕망과 예술가로서 평생 아름다움을 노래했던 시인의 자기 부정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 소녀 은교와 제자 서지우가 있다. 그들은 주인공이 늙고 병든 육신을 불현듯 들여다보게 만드는 거울인 동시에 지나온 시간이 쌓은 존재의 가치를 멸시하도록 부추기는 불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적요는 결코 은교만 사랑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서지우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을 아꼈던 이적요에게 존경심 이상의 감정을 품고 있다. 그리하여 서지우도 스승의 눈길을 빼앗은 은교와 자연스레 애증의 관계에 놓인다. 그렇게 세 인물이 펼치는 힘겨루기는 보통의 삼각 관계가 그리는 감정의 결보다 훨씬 다층적인데, 나는 책을 읽으면서 그게 소설이 갖고 있는 가장 큰 미덕이라 여겼다.

 

영화는 각색하는 과정에서 그 매력을 충실히 옮기는 대신 은교의 비중을 늘려 관계의 진폭을 의도적으로 줄였다. 그에 따라 앞서 언급했던 두 가지 줄기 가운데 시인이 자신의 성과를 부정하는 대목은 얼마간 증발됐다. 원작을 읽지 않았다면 그쪽으로 생각을 뻗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해피 엔드>와 <사랑니>를 고려했을 때 그것은 익히 짐작했던 것이기도 하다. 소설에서 은교는 두 인물에 비해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위치에 선 관계로 일련의 사건이 폭풍처럼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다음에라야 비로소 '말'을 한다. 그때도 은교는 이적요의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구는 데가 있다. 그들의 관계가 사랑이라면 이적요가 은교를 짝사랑한 격이다. 영화에서 은교는 비교적 능동적이다. 늙은 시인과 함께 보냈던 짧지만 긴 시간이 제게도 제법 영향을 끼쳤다고 느낀다. 영화는 소설보다 은교의 입장이 강조되어 있다. 이는 은교가 이적요에게 어떤 깨달음을 털어놓는 마지막 순간에 확실히 드러난다. 등을 돌리고 있는 시인 머리맡에 안개꽃을 놓고 떠나는 은교의 뒷모습은 잔인한 여름을 보내고 생의 기운을 모두 쏟아낸 이적요의 눈물만큼 아름답다. 따라서 영화를 보고 호오가 같을지라도 누구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따라갔느냐는 다를 수 있다. 은교에 이입한 자라면 이 대사가 마음을 울렸을지도 모르겠다. "여고생이 왜 남자랑 자는지 알아요?" 이와 같은 대사는 정지우가 은교라는 인물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은 대목이자 영화의 각색이 나름대로 가치를 얻는 요인이다.

 

 

관객은 어느 쪽을 취하건 할아버지와 소녀의 관계에 집중하게 된다. 그러니까 원작의 삼각 구도는 다소 어그러진 셈이다. 두 사람은 대사도 줄곧 대구를 이루듯 주고받는다. 은교가 "할아버지, 은교 왔어요." 하면, 이적요가 "은교가 왔구나." 하는 식이다. 그럴지니 서지우가 끼어들 틈이 없다. 그래서 영화에서는 서지우와 은교의 관계가 불분명한데, 왜 그들이 육체의 사랑을 탐닉하는지 충분히 납득되지 않는다. 그에 반해 다행히 이적요의 감정은 잘 표현된다. 이적요가 은교를 대하는 마음이 통속적인 사랑과는 사뭇 다르다는 건 명료하다. 그것은 되풀이되는 이 대사에서 단연 두드러진다.

 

잘 가라, 은교야.

 

이때 '은교'는 은교 이상의 것이다. 이적요에게 은교는 저와 달리 실존의 고통을 모르는 새파란 젊음이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속도를 늦추는 어여쁜 생명이고, 책상 위의 진실이 직관의 감옥에 불과하다는 것을 일깨우는 가녀린 스승이다. 그가 마침내 눈물을 흘리며 은교에게 잘 가라는 말을 읊조릴 때 내 가슴은 무너졌다. 우리는 시인 이적요가 세상을 향해 마지막으로 선포한 유언에 가까운 말을 흘려들어서는 안 된다.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이적요는 늙었다는 이유로 외로움을 달랠 수 없는 처지다.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능욕하는 이로부터 배신의 순간을 맞닥뜨리고서 죽음의 회오리를 일으킨 그에게 그 누가 볼통한 태도를 보일쏘냐.

 

정지우와 '은교'의 만남은 그 자체로 설레는 일이었다. 그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흔한 방식으로 다루지 않는 작가다. 그래서 <은교>에 대한 세간의 기대는 꽤나 높았다. 그것을 오롯이 충족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는 여전히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인간의 내면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데 탁월하다. 다만 원작보다 세차게 이야기를 몰아붙여 긴장감을 자아내던 전반부와 달리 뒤로 갈수록 소설이 취한 다중 시점을 모두 고려한 탓인지 늘어지는 감이 없지 않은데, 감정의 흐름이 다소 끊기는 후반부가 못내 아쉽다. 은교가 부각된 만큼 서지우가 축소된 까닭에 이야기 조각이 매끄럽게 수습되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몇몇 장면은 대단히 인상적인데, 주로 은교가 등장할 때였다. 은교로 분한 김고은은 작품에 출연한 여배우를 번번히 그해 최고의 배우로 올려놓는 정지우의 덕을 톡톡히 봤다. 외모며 말투며 다분히 은교다웠다.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건 박해일의 연기일 것이다. 노년의 욕망이 청춘의 그것 못지않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드러내고자 젊은 배우에게 노역을 맡긴 건 영화 속에서 그런대로 설명이 된다. 그래도 이적요의 목소리는 적잖이 거슬린다. 이는 연기를 못했다는 뜻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배우가 나이 든 사람처럼 목소리를 꾸미는 데 부족했던 것은 아니다. 차라리 박해일의 목소리가 워낙 낭랑한 탓이라고 말하는 게 정확하다. 그는 다른 배우보다 발성의 인장이 강한 편이다.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넘기기엔 이적요의 '적요'가 내뿜는 기운과 자주 충돌한다는 점이 애석하다.

 

* '밤에' 쓴 소설이라 '밤에' 읽기를 바란 박범신의 말을 따라 '밤에' 책을 읽었고 '밤에' 영화를 보았고 '밤에'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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