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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케빈에 대하여] - 사회적 문제에 녹아든 엄마라는 이름의 감옥 | 영화일기 2012-07-31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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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케빈에 대하여

린 램지
영국, 미국 | 2012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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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은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데 문제를 보이는 정신적 장애를 앓고 있다. 케빈의 엄마는 그를 낳은 이후로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다. 병원에서도 딱히 증상을 진단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대관절 엄마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이 아들 녀석의 특출난 행동은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엄마를 향해 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러하듯 엄마와 보내는 시간이 가장 많긴 하지만, 아이에게 문제가 있다는 데 남편이 무신경할 만큼 케빈의 불온한 언행은 엄마에게 도드라진다. 비록 축복의 잉태가 아니었을지언정 그녀는 케빈을 원만하게 낳았고 남 부러울 것 없이 키우고 있다. 특별히 가정 내의 불화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케빈만 좋아진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정도다. 그런데 케빈의 상태는 엄마가 예상하지 못할 만큼 점점 심각해진다. 행동의 이유를 풀 만한 힌트가 없어 답답한 노릇이다. 엄마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욕망이 비뚤어진 것이라고 여기기엔 케빈이 벌이는 일련의 행동이 수상쩍다. 그렇다면 이 영화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

 

영화는 케빈이 아니라 케빈의 엄마 에바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우리는 오로지 에바의 기억에 의해 흩뿌려진 시간의 조각을 훔쳐볼 수 있을 따름이다. 그것은 관객의 마음을 철저히 엄마의 입장에 놓기 위한 목적으로 보인다. 우리 주변에서 그러한 일을 더러 볼 수는 있어도 직접 겪는 경우는 드문 탓에 보통의 관객에게 엄마가 케빈을 바라보는 심정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전달하는 데 영화는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뜨거운 욕망을 나타내는 붉은 이미지의 강렬한 색감, 시각적 대비에 의한 심연의 어둠을 자아내는 화려한 조명, 별 것 아닌 일상적 상황에서 귀를 긁는 공포스러운 소리 등을 통해 엄마의 심리 상태를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거기에 틸다 스윈튼은 추체험이 쉽지 않은 낯선 캐릭터에 특유의 세밀한 떨림을 더해 숨결을 불어넣는다. 사태의 심각성을 조롱하는 듯한 경쾌한 음악만이 가볍게 춤을 추는 형국이다. 이 모든 요소가 한데 잘 어우러져 줄거리를 꿰뚫고 본다 해도 긴장하지 아니할 재간이 없을 정도다. 린 램지의 연출이 빛난다.

 

 

에바는 케빈의 상태가 갈수록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케빈이 앓고 있는 병은 신체적인 증후가 가시적이지도 않을 뿐더러 그 대상을 매순간 소통이 불가능한 상황으로 빠뜨리는 것 또한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케빈이 어릴 적에 엄마와 공놀이를 하는 장면을 보라. 엄마의 요구에 따라 한 번은 공을 받아 그대로 다시 던졌다가도 다음 번에는 언제 그랬나 싶게 무반응으로 일관한다. 반응을 보일 수 없는 건 아닌데 관계를 형성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식이다. 이는 아이의 욕망이 어떤 질서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와 비슷한 행동이 영화 속에서 여러 차례 나열되는 것으로 말미암아 케빈의 신체 기관에 욕망의 씨앗이 제대로 투사되지 않았다고 봐도 거짓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케빈의 신체가 잔인한 폭력을 행사할 때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는 욕망의 본질에 대해 고민한다. 시인이자 극작가인 아트로의 표현을 빌리면, 이 영화를 잔혹연극이라 말할 수 있다. 관객을 공포와 광란으로 몰아넣으면서 이성적 판단을 허물고 새로운 체계의 진실을 전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영화는 인간이 겪는 모든 문제의 근원이 어떤 결여나 상실과 맞닿아 있는 것은 아님을 말한다. 케빈은 욕망을 분출하고 해소할 때 응당 체득하게 되는 사회적 질서와 규율을 제대로 습득하지 못할 따름이다. 모든 의미를 흡수했다가 다시 방사하고 마는 케빈을 보면서 엄마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것을 지켜보는 에바의 창백한 얼굴이 너무나 안쓰럽다. 그 까닭에 대한 궁금증이 온 정신을 뒤덮어 그녀는 점점 지옥의 비탈길로 들어선다. 영화는 그 고통을 시종일관 에바의 얼굴에 새겨 놓고 심리적으로 그녀를 따르는 관객까지 더불어 괴롭힌다. 도무지 원인을 찾지 못한 엄마는 결국 나직한 목소리로 케빈에게 묻는다.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이냐고. 자신을 그토록 피폐하게 만든 이유에 대한 답 없음에 그녀의 몸은 내내 떨리고 있다. 스크린에 불이 꺼져도 그녀는 계속 그 자리에 남아 있을 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본질적으로 어머니에 대한 욕망이다. 그 욕망이 해소되지 않은 채 그대로 방치되면 문제가 생긴다. 그러나 유아적 본능은 아버지로 상징되는 내면화된 문명과 충돌하여 모종의 질서를 갖는다. 우리가 잘 아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그런 식으로 극복된다. 이와 같은 정신분석학의 견해는 사회적 문제를 맞닥뜨린 상황에서 지배적이다. 다양한 예술 장르에서 오이디푸스 신화가 아직도 끊임없이 변주되고 있다는 게 그 증거다. 그러니까 엄마는 케빈에게 유년 시절에 자신이 눈치채지 못한 어떤 결핍의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숙고한다. 이는 관객 역시 마찬가지다. 의식적 행동의 기저에 무의식적인 갈망이 숨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케빈의 경우에는 무의식적 욕망이 결여나 상실과 연결된 것 같지 않다. 그런데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엄마에게 일말의 책임을 묻는다. 그녀 역시 스스로를 피해자이자 가해자로 인식하면서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다. 세상의 모든 엄마는 그렇게 엄마라는 이름의 감옥에 갇혀 있는 셈이다.

 

영화는 바로 그 모성(母性)에 과감히 화살을 쏜다. 어쩌면 우리가 악의 근원을 더 넓은 범주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건 아닐까? 이를테면 안티 오이디푸스는 인간이 욕망하는 것을 더 이상 결핍의 문제로 보지 않는다. 욕망의 메커니즘을 가족 구조 안에 가두는 데서 과감히 탈피한다. 영화는 문제를 일으키는 케빈의 엄마를 중심인물로 내세워 일련의 사건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녀의 고통스러운 시간 속으로 관객을 끌어들인다. 그 사유의 가지가 어디로 향하든 적어도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누구나 케빈에 대해 열심히 생각할 것이다. 갈수록 이유도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극악무도한 범죄가 늘고 있는 것은 그 원인을 정확히 밝히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들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케빈이 자신의 욕망을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생산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리고 케빈의 엄마를 구하기 위해서 우리는 '케빈'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꺼내야 한다. 좋은 제목은 내용적 가치를 드높인다. We Need to Talk About Kev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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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도둑들] - 사랑에 죽고 사랑에 사는 캐릭터들의 일장일단 | 영화일기 2012-07-15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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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도둑들

최동훈
한국 | 2012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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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들>은 이른바 케이퍼 무비로 불린다. 그것은 범죄를 모의하고 실행하는 과정을 상세하게 그리는 영화를 일컫는 말이란다. 다른 예를 찾을 것 없이 딱 최동훈 감독의 전작들을 떠올리면 된다. 구태여 그 표현을 빌리고 싶지는 않지만 이 영화가 표방하고 있는 것이 무엇보다 장르적 재미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것은 만듦새를 논하는 데 기본적으로 전제되는 요소라서 자연스레 언급하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영화는 관객이 기대하는 바를 적절히 충족하는 편인데, 개성 넘치는 출연 배우들 면면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처럼 주로 캐릭터에 생기를 불어넣는 방식으로 재미를 끌어내고 있다. 전지현이 제 입으로 “이렇게 태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데!”라고 외치거나 이정재가 극 중에서 “연기도 더럽게 못하네!”라는 소리를 들을 때와 같이 영화는 배우와 인물이 제각각 들고 나는 지점을 영리하게 이용한다. 또한 작은 캐릭터조차 그냥 허비되지 않고 다 제 구실을 갖는다. 그리하여 포스터에서 보이는 장면처럼 여러 인물의 존재감이 대체로 대동소이하다. 이는 여러 캐릭터가 지속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방식이라기보다는 한 인물이 치고 빠지면 다음 인물이 그것을 이어받는 방식이다. 그것이 조금 특이한 점인데, 이유야 어쨌건 서로 다른 인물이 소소한 재미를 주고 있는 터라 다들 지루하다고 느끼지는 않을 성싶다. 물론 그 과정이 매끄럽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가령 한 인물이 내내 동분서주하다가 갑자기 자리를 오래 비워 재등장이 어색할 때가 있다. 등장인물이 워낙 많은 관계로 전개가 다소 산만해진 대목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이러한 장르가 갖는 특유의 속도감으로 그것은 어느 정도 타파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범죄물을 볼 때 기대하는 또 하나의 묘미는 쫓고 쫓기는 장면에서 오는 긴장감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다이아몬드를 훔치고자 다양한 작전을 쉴 새 없이 구사하고 여러 번 바다를 건너 이곳저곳 옮겨 다니는데도 좀처럼 손에 땀을 쥘 만한 긴장을 쌓지는 못하는 편이다. 꼭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의외로 인물들이 협력하는 순간이 그리 많지 않은 탓이기도 하고, 인물과 인물 사이를 흐르는 긴장 자체가 감정적인 방향으로 흐르는 까닭이기도 하다. 여기에 나오는 도둑들은 모두 사랑이라는 감정에 포박되어 있다. 그로 인해 개개의 사건이 사랑의 작대기에 자주 걸린다. 오나가나 그 놈의 사랑이 문제다. 어마어마한 도둑질을 감행하는 이들에게 부여한 인간미가 좀 과한 측면이 있다. 뽀빠이와 예니콜(도 자유롭다고 할 순 없지만 그나마 끝까지 냉철한 그 둘)을 제외한다면, 다들 사랑에 죽고 사랑에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사건의 긴박감이 약간 떨어진다. 후반부에 마카오박이 적에게 쫓기는 장면이 기술적으로는 훌륭하지만 별다른 긴장을 자아내지 못하는 것은 그러한 맥락이다. 이미 범죄와 연애를 매끄럽게 뒤섞은 바 있는 감독이 이러한 사실을 몰랐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 점에서 다른 쪽으로 승부를 걸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관객들에게 그것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모르겠지만, 흥행의 성패가 여러모로 거기에 달려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좌우간 이 도둑들은 물건을 훔치는 데는 능할지 몰라도 마음을 훔치는 데는 미숙해서 늘 잡히거나 쫓기는 신세에 놓인다. 하기는 세상에서 가장 훔치기 어려운 것이 아마도 사람의 마음이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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