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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동안 나만의 보물1호 『벼랑에서 살다』 | 에브리 프레이즈 2014-06-03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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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울었으면 등 뒤를 깎아버렸을까

벼랑 속을 들여다보면 현기증이 난다


- 이영주 「현기증을 앓는 고양이」  부분,  『차가운 사탕들』)

 

어떨 때는 시가 참으로 지독해서 도저히 읽을 수가 없고, 어떨 때는 시가 너무도 정확해 소름이 끼친다. 시집 속 시인의 목소리는 무겁고 야멸차서, 한가한 휴일의 오후에 뒹굴 거리며 펼쳐 읽기에는 영 불편하기만 하다. 딱 꼬집어 말하기 뭣한 이상한 잔인성 같은 게 시의 첫인상이라서, 내가 굳이 뭣하러 이런 세계를 마주하고 있어야 하나, 사는 것만도 고단해 죽겠는데 싶어진다. 담배를 끊듯 건강을 위해 시를 끊고 싶어진다.

 

시인으로 살아 가고 있는 나에게 (가족을 비롯해서) 숱한 타인들이 고백해준 이야기다. 예전엔 “거기서 밥이 나오니 떡이 나오니”라고 핀잔을 주로 하셨던 엄마가 요즘은 “쓸 만큼 썼으니 이제는 알콩달콩 이쁘게 살아보는 건 어떠니”라고 말씀하신다. 예전엔 한심한 자식에게 보내는 타박의 눈빛에 가까웠다면 요즘엔 고행을 자처하는 자식에게 보내는 측은한 눈빛에 가까워졌다.

 

가만 생각해 보면 고행이 아닌 삶이 어디 따로 있을 것 같진 않다. 모두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고행을 하면서 살고 있다는 걸 이제는 모두가 알고 있다. 이 고행을 끝내고 어서 안착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오로지 견디는 인생이거나 이 고행은 죽는 날까지 끝나지 않을 것이므로 고행을 감당하고 싶은 인생, 이 정도로 나뉠 수는 있겠다. 안착을 욕망하기보다는 고행을 감당하는 인생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벼랑에서살다

 

 

2001년에 『벼랑에서 살다』(조은 시인의 산문에 김홍희 작가의 사진이 함께 수록된 산문집. 마음산책)라는 제목으로 한 시인의 산문집이 출간됐다. 시인이 사는 동네와 시인이 어울리는 친구들과 시인의 하루 일과가 고스란히 담긴 책이었다. 누군가가 어떤 식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가만가만 엿볼 수 있다는 쾌락도 쾌락이었지만, 자신의 삶을 ‘벼랑에서의 삶’으로 규정짓는 시인의 가난한 삶이 어찌나 생기가 넘치던지 나는 이 책을 한동안 나만의 보물1호처럼 품고 지냈다. 시인은 사직동의 아주 작은 집에서 살았다. ‘또또’라고 불리는 유기견과 함께 살았다. 분명 아슬아슬할 만큼 가난한 삶이지만 자기 삶을 다루고 기록하는 태도는 여유롭기 짝이 없었다. 하루하루에 스며든 녹록치 않는 사건사고들을 구수하고 강건한 필체로 다루었기 때문이었다.

 

‘벼랑에서 살다’라는 제목에서 얼핏 느껴질 법한 비애와 비장함은 물론 묵직하게 배경에서 어룽거렸다. 그 책을 처음 펼쳐 읽었을 때에 나는, 그러니까 10년도 훨씬 더 전의 나는, 이 책의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책의 내용이 그토록 좋았으면서도 말이다. 시인이 스스로의 삶을 ‘벼랑’이라고 말하는 것에 동의하지 못했다. 조금쯤 엄살 같기도 했고, 조금쯤 그저 그런 상징적 표현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듯싶다. 그때는 그랬다. 하지만, 지금 다시 이 책을 꺼내어 들자니, 시인이 표현한 ‘벼랑’은 비유가 아니었다. 벼랑에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을 시인 선배를 불쑥 찾아가 만나보고 싶어진다. 그 집의 그늘 반 햇볕 반인 마루에 쪼그리고 앉아 그의 세간살림을 흘깃거리면서 마음속에 오래 품고 지내온 질문들을 그의 앞에 천천히 꺼내놓고 싶어진다.

 

‘우리는 지금 벼랑에서 살고 있어요’라고 말한다면 굳이 ‘무슨 말이야?’라고 대꾸할 사람이 거의 없을 것 같은 2014년의 유월이다. 시인은 어쩌면 우리가 설마 설마하며 두려워하는 그곳에 미리 한 발 먼저 가 있는 존재이지 않을까. 그곳에서 대장장이처럼, 두려움을 뜨겁게 달궈 꿋꿋함과 강인함으로 연마하는 자가 아닐까. 자기자신만의 삶의 비법을 그리하여 기록해두고 그걸 마음에 새겨둘 누군가를 막연히 기다리며, 강가에 쪼그리고 앉아 유리병 편지를 띄우는 사람이 아닐까.  

 

『벼랑에서 살다』에서 시인은 거의 모든 삶의 가치를 한 가득 누리고 있는 자에 가깝다. 감히 행복한 삶을 누리는 자라고는 표현하지 못하겠다. 버려진 생명을 거두고, 늘상 쪼들리고, 아웅다웅 다투고, 걱정과 한숨이 끊이지는 않지만, 쪼들리며 다투며 걱정하며 한숨짓는 모든 것들에 건강하디 건강한 시인의 뚝심이 배어 나온다. 이 책을 읽은 사람은, 시인이 현실에 도무지 적응력이 떨어진 채로 감수성의 세계에서 허우적대는 과민하고 낭만적인 자에 가깝다고 여기지는 못할 것이다. 현실 적응력이 뛰어나 세계의 변화를 주도하는 큰 목소리와 큰 주장에 우리의 귀는 어쩔 수 없이 펄럭댈 테지만, 그래서 시인이 천연덕스럽게 가장 현실적인 목소리를 낼 때에 흔쾌히 귀를 내어 들어줄 여유가 사람들에게는 없겠지만 말이다.

 

나를 자꾸만 부른다면
이 세상 밖으로 빨리 달리는 다리가 되고 싶은 밤

수화기를 들고 걷는다
네가 버리지 못한 벌레처럼 천천히 기어갈 자세로

 

- 이영주,  「현기증을 앓는 고양이」에서, 시집 『차가운 사탕들

 

시인은 자신의 간절함을 짊어 메고 “이 세상 밖으로” 걷는다. 걷는다기보다는 마치 “기어갈 자세로” 걷는다. 담담하게 이런 말을 독백처럼 흩뿌리는 데에는 “당신들은 어때요?”하는 질문이 이면에 깔려 있다. 이 질문을 알아채는 사람도 이제는 많지 않다. 많지 않아도 상관이 없고, 누군가 귀를 기울여주지 않아도 상관이 없고, 질문조차 수수께끼처럼 이면 속에 감춰놓았다는 의미에서, 시인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내향적이다. 내향성은 굳이 제 목소리가 사회 속에서 어떤 운동성이 갖기를 욕망하지 않는다는 데에 그 가치가 있다. 그 욕망으로부터 체질적으로 자유로우므로, 내향성은 오직 진실과 진리만을 (선동하지 않은 채로) 기록한다. 그 기록에 대단한 가치를 스스로 부여하지도 않는다. 단지, 사는 동안에 숨을 쉬지 않을 수는 없다는 듯이 기록을 해’두는’ 것이다.

 

자본주이신 하나님은
오늘 밤에도 우리에게
저금리 신용 대부를 해 주신다.
실체 없는 꿈의 실체 있는
이자를 받기 위하여.
참 가도가도 끝없는 천국이여,
아버님 나라의 어여쁘심이여.

 

희망은 연한 나뭇잎들처럼 나부끼고
어디서 그 많은 세월의 열매들이
또 무르익었다 떨어지는데
타박타박 얼마나 더 걸어야 하느냐,
무슨 꿈에 다리 절며 그래도 가야 하느냐.

 

자, 내가 가진 슬픔 다 모아
한 사발의 죽을 끓였으니
함께 들자꾸나.

 

죽음을 향해
한 발 더,
기운차게 내딛기 위해.

 

- 최승자 「숙에게」, 시집 『즐거운 일기

 

이 시는 80년대에 쓰여졌다. 이쯤 되면, 시인의 내향적인 이 기록은 예민함이라기보다는 예언적 기능에 가깝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시는 세상을 바꿀 수 없어서 더더욱 왜소해져 간다. 그렇다고 무기력하다 할 수는 없다. 오히려 곧 도래할 세상에 미리 가 있기 때문에 이상한 적극성이 있다. 그래서 지독하게 슬프고 지독하게 읽기가 어려운 것이다. 시인이 가장 끔찍해 하는 것은 시가 왜소해지는 일도 아니고 벼랑에서 사는 일도 아니다. 다만, 진리가 왜소해지는 일, 터무니 없는 환상으로 미래에다 낙관을 덧칠하는 일을 가장 끔찍하게 여긴다.

 

이탈리아 소설가 안토니오 타부키도 이렇게 적어두고 있다. “철학은 오직 진리에 관계된 것 같아 보이지만 환상만을 말하는 듯하고, 문학은 오직 환상에 관계된 것 같아 보이지만 진리를 말하는 듯하다.”

 

 




벼랑에서 살다 조은 저/김홍희 사진 | 마음산책
시인 조은의 전작 산문『벼랑에서 살다』는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사람들을 소재로 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이야기를 진솔하게 그려낸다. 이 책에서 작가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과 사물들을 자신의 삶과 결부시켜 그 속에서 필연적으로 드러나는 고통과 죽음의 이미지를 삶의 이미지와 은연중에 겹쳐버림으로써 삶의 정화로서의 생명력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사진작가 김홍희의 사진을 통해 작가의 글이 머문 흔적을 따라가면서 작가가 사는 방과 집의 여러 곳과 주변 동네를 투시하듯이 사실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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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반스_Levels of Life [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 Basic 2014-06-01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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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저/최세희 역
다산책방 | 2014년 05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내용 별점은 3과 1/2인데 여기는 반이 없어서 저렇게 선정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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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소설가인 영국 줄리언 반스의 2013년작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는 읽기 전 관련 소개글에서 픽션과 에세이를 결합한 독창적인 작품이란 사전 지식을 알고 독서를 시작했다. 그런데 다 읽고 나니 1부와 2부가 완전한 허구라기 보다는 줄리언 반스의 시각에서 다큐멘터리처럼 구성된 장르임을 알 수 있었다. 재연 다큐멘터리처럼 주인공들 즉 프레드 버나비, 사라 베르나르, 펠릭스 투르나숑의 삶과 사랑을 그리고 있었다. 펠릭스 투르나숑은 필명인 ‘나다르’로도 불리운다.

 

프랑스 배우이면서 뭍 남성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사라 베르나르, 그에게 구애를 펼쳤던 모험가 프레드 버나비의 이야기가 1, 2부에 펼쳐진다. 모두 실존했던 인물들이다. 여기에 투르나숑, 즉 나다르는 열기구가 발명된 이후 기구에 빠져 살다가 기구에 탑승해서 최초로 항공 사진을 찍은 사진가로 등장한다. 셋의 공통점은 당대에 열렬하게 기구를 애호했던 모험가들에 속하였다는 것이다.

 

군인이던 프레드 버나비는 파리에서 사교계의 최고의 꽃이었던 사라 베르나르를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그렇지만 사라는 완곡하면서도 확고하게 그를 거절한다. 거절 사유는 버나비의 개인적인 매력과 조건의 문제가 아닌 자신의 연애관(결혼관) 때문이었다. 버나비는 진심으로 그녀에게 (만나고 데이트한지 3주만에) 청혼했는데 한 칼에 거절당하자 좌절한다. 그리고 한참후 서른 일곱에 영국에서 결혼했고 1885년 영국-수단 전투에서 전사한다.

 

이런 이야기들을 1부와 2부에서 펼치는 줄리언 반스의 이야기를 나는 묵묵히 따라갔다. 처음 들어보는 인물들이었으므로 충분히 흥미있었고, 반스 작가의 능수능란한 내러티브에 빠져들 수 있었다. 동시에 ‘이 이야기들이 마지막 3부와 반드시 연결되겠지’하면서 내심 설레이기도 했다.

그런데 다 읽고 났을 때 약간은 허탈했다. 프레드 버나비와 사라 베르나르의 드라마틱한 연애 사건, 기구를 타고 최초로 사진을 찍었던 나다르의 이야기가 줄리언 반스가 아내를 사별한 것과 어떤 연관을 갖고 있는지 잘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 번 읽고, 3부 <깊이의 상실>은 두 번 천천히 읽으며 재 음미했다. 역사속 인물들의 사건, 관계는 응당 줄리언 반스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은유, 혹은 비유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다소 아쉬었다.

 

그렇지만, 반스가 얼마나 아내를 사랑했는지 십분 느낄수 있었다. 더불어 상실감의 깊이, 모든 영역에 퍼져있는 고통,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치열하게 고민하는 것, 장례를 치른 전후로 ‘주변 지인’들에게 언어와 행동으로 상처입은 일들만큼은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

 

감히 제언하자면 프레드 버나비, 사라 베르나르, 나다르의 이야기와 작가 개인의 아픔을 매개하려 했다면 분량의 배려가 더 있었어야 했다. 앞의 이야기를 더 길게 하던지, 뒤의 아내를 잃은 이후 겪은 변화와 혼란 파트를 늘렸어야 한다. 헌데 책은 정확히 3부가 거의 동일한 페이지인데, 반스 문학에 과문한 블로거 탓인지 구성적인 면에서 굉장히 미진하고 무언가 빠진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188페이지에서 한면에 걸쳐 반스는 배우자를 잃은 사람이 빠지기 쉬운 함정, 허영일 수 있는 감정을 자세하게 서술한다.

그렇지만 그 외에는 3부 전반적으로 반스는 자기의 아픔만이 특별하고,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상실감임을 드러내고 있다. 줄리언 반스의 그녀가 only one이었다는 걸 알겠고 그 유일한 사랑을 잃은 아픔이 얼마나 각별한지는 알겠다.

 

하지만 이 세상에 온리 원을 잃은 사람은 –당연하게도- 줄리언 반스 작가 한 명만이 아니다. 작가의 통렬한 표현들은 자칫하면 자신의 상실 경험만을 유일하고 특수한 경험으로 ‘형상화’하려는 우를 범할 수 있어 보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앞에 얘기했듯 뭔가 얘기를 하다 멈춘 듯이 길지 않게 끝나버려서, 편협함으로 오해받을 여지에서 벗어나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아픔을 누가 더 아프고, 깊은지 견줄 수는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내를 잃은 사람’과 ‘자식을 잃은 사람’의 아픔, 이것을 비교할 수 있겠는가? 아니 그런 시도를 하려는 가정부터 잘못된 것이지 않는가.  내가 알았던 남자분은 결혼 후 2년도 안되어 아내를 잃었는데 그러면 그 사람의 아픔은 반스가 아내와 함께 한 30년보다 덜 한 것인가.

 

그럼에도,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 그 누구의 도움보다는 자신의 철학과 주체적인 경험속에서 사유(思惟)하였던 4년여를, 미화하지도 않고 숨기는 것도 없이 올곧이, 때로 담담하게 풀어낸 반스의 화법에 수긍하며 독서를 마쳤다. 그의 말대로 반스가 자신의 (앞으로의) 스토리 텔링과 작품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또 응원하겠다.

 

키에슬롭스키의 영화 <블루>에서 교통사고로 가족을 잃은 여인(줄리엣 비노쉬)의 마음의 결을 따라가는 듯 했던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세상의 전부였고, 우주가 선사한 가장 큰 선물이었던 아내를 사별한 반스에게, 외국의 평범한 독자가 위로를 줄 순 없겠지만, 앞으로 그의 창작활동을 지켜보겠다는 한 마디는 꼭 전하고 싶다.

 

<책 속에서>

독일어에 ‘Sehnsucht’라는 말이 있다. 같은 뜻의 영어는 없는데, 의미상 ‘무언가를 갈망하는 마음’을 뜻한다. 여기엔 낭만주의적이고 신비한 의미들이 내포되어 있다. 작가 C.S루이스는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속에 ‘위로받을 길 없이 남아 있는 열망’이라고 정의했다. (p.186)

 

누군가가 죽었다는 사실은 그들이 살아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할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p.169)

마지막 이것, 마지막 저것. 그녀가 마지막으로 읽고 마지막으로 웃은 내 글. 그녀가 마지막으로 쓴 글. 그녀가 마지막으로 말한 온전한 문장. 그녀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 (p.163)
비탄과 대비되는 애도의 문제가 있다. 비탄은 하나의 상태인 반면, 애도는 하나의 과정이라는 점에서 둘을 차별화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둘 사이엔 불가피하게 겹치는 면이 있다. (P.144)
비탄은 어쩌면 모든 패턴을 파괴하는 것을 넘어 훨씬 더 많은 것, 즉 패턴이 존재한다는 믿음마저도 파괴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믿음 없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 패턴을 찾거나 재정립하는 척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작가들은 그들의 언어가 만들어내는 패턴들을 믿으며, 그것이 쌓여 생각으로, 이야기로, 진실로 이어지길 바라고 또 그것에 의지한다. 사별의 고통과 무관한 사람인든, 아니면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이든 상관없이 그들을 구원해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p.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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