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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질한 위인전을 읽다_함현식 저 | 기본 카테고리 2020-06-24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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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찌질한 위인전

함현식 저
위즈덤하우스 | 2015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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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인전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은 위인은 위인의 모습이 아닐지도 모른다. 진솔한 한 인간의 일생을 따라가는데에도 접근하는 관점에 따라서 너무나도 다른 위인전이 나온다는 것에 그저 놀랄 따름이다.

 

자신의 찌질함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것을 인정함으로써 그다음을 바라보게 된 이도 있다. 현실을 직시하고 돌파해나가는 문제는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다. 끊임없이 자신의 찌질함과 맞서 싸우면서 생을 살아간 이도 있다. 그들이 위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어쩌면 우리에게 남긴 어떤 업적이나 작품과 같은 '결과'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 닿기까지의 과정 때문일지 모른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내가 어떻게 비칠까, 보잘것없는 사람, 괴벽스러운 사람, 비위에 맞지 않는 사람, 사회적 지위도 없고 앞으로도 어떤 사회적 지위를 갖지 못한, 한마디로 최하 중의 최하급 사람그래, 좋다. 설령 그 말이 옳다 해도 언젠가는 내 작품을 통해 그런 기이한 사람, 그런 보잘것없는 사람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보여주겠다.' - 빈센트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제주도에 와서 이중섭과 그의 아내 남덕은 주인집에서 보리밥을 한 웅큼 얻어 끼니를 해결했고, 양파 밭에서 날품을 팔고, 밭에 버려진 야채나 보리 이삭을 주워 생계를 이어 나갔다. 그마저도 없으면 중섭은 아들을 업고 바닷가로 나가 게를 잡았다. 아내의 위장 질환이 가볍지 않았으나 변변한 약을 쓸 돈도 없어 조개껍데기를 빻은 가루를 먹는 방편으로 궁색하게 치료의 구실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어린아이처럼 천진무구한 이중섭은 분노와 증오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제주도 피난민 시절, 함께 술을 마시던 이가 취해 "이 피난민 새끼"라고 욕을 퍼부어도 그저 소주잔을 따뜻하게 응시하다가 "헤에" 하고 웃고 마는 사람이 이중섭이었다. 그래서 이중섭의 천진함은 오히려 상대를 부끄럽게 만들기도 했다. 중섭이 서울에 기거할 때 하루는 위상학이 자신의 저택에 이중섭을 데리고 와 밤새 술을 마셨는데, 중섭의 빈천한 삶이 아무래도 그를 자극했던 것 같다. 큰 돈을 모으긴 했으나 예술가로서의 죄의식을 늘상 가지고 있었던 위상학은 이중섭과의 술자리가 있은 지 한참이 지난 후이긴 하나 결국 자살하고 만다. 중섭의 간염은 그 병세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깊어져 그해 여름 서대분 적십자병원에 다시 입원한다. 그리고 96, 이중섭은 병실에서 홀로 숨을 거둔다. 그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그가 눈을 감고도 3일이 지난 후, 친구 김이석이 이중섭을 찾아왔다가 알게 되면서였다. 병실에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난 이중섭이 남긴 것은 밀린 병원비 18만 원, 병원비를 반으로 깍아 장례식장에서 모금한 9만 원으로 해결했다고 한다.

 

파인만이 물리학자로서 나름의 뚜렷한 족적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가 기존 지식이 가진 권위에 매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존 지식이 가진 권이에 매몰된다는 것은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거나 이해하지도 못한 채 학습하는 것을 말한다. 파인만은 그러한 태도를 스스로도 용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신에게 물리학을 배우는 학생들에게도 허락하지 않았다. 때문에 파인만은 어린 시절부터 책에 나온 각종 공식들을 그저 문제를 풀어내려고 무작정 외운 적이 없었다고 한다. 특정 현상에 대한 원리를 설명하고 법칙화한 내용을 보더라도 그 자신이 직접 현상을 보면서 이해하거나 스스로 입증해야지만 그것을 받아들였다. 파인만이 다른 사람들보다 늘 한 발 앞서 기존 사고와 원리의 틀을 깨는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제 파닝만은 기존 이론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적복적 사고로 물리학은 물로 다른 과학 분야에도 많은 기여를 한 바 있다.

 

허균은 중국을 오갈 때 도자기나 장신구 같은 사치품을 사지 않고 가진 돈 전부를 책을 사는 데에 썼다. 보다 넓은 세상과 학문에 대한 지적 호기심으로 가득 찬 허균은 명에서 돌아올 때 수레에 4천여 권의 장서를 싣고 와서 독서에 탐닉했다. 뛰어난 문장력과 말재주, 방대한 독서량과 암기력을 갖춘 허균은 분명 당대 조선의 천재였다.

 

간디는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가치를 위하여 행동할 때에는 그 누구보다 앞장섰으면서도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남기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았다. 간디는 부의 축적이라는 개념 자체를 스스로에게 허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생전에 그의 가족들에게도 그서을 허용하지 않았다. 간디가 추구한 대표적인 가치관으로 알려져 있으며 비폭력 저항이라는 의미로 통용되는 '사티아그라하'는 산스크리트어에서 나온 말이다. 산스크리트어로 '사티아'는 진리를 뜻하며 '아그라하'는 노력, 열정을 뜻한다. 따라서 사티아그라하를 뜻 그대로 해석하면 '진리를 찾기 위한 노력'이 된다.

 

위인으로 살고자 해서 위인으로 남은 것은 아니다. 자신이 살고자하는 가치 체계를 갖추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피나는 노력과 열정이 위인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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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평]찌질한 위인전 | 한줄평 2020-06-24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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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위인전에 나오는 위인이 아닌 일상에 나오는 위인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접근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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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 자서전 | 기본 카테고리 2020-06-24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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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간디 자서전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저
파주북 | 2017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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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오늘날도 그때나 마찬가지로 3등 객실은 불결하고 변소 시설도 나쁘다. 3등 객실의 승객들은 양떼처럼 대접을 받고, 그들의 편리는 양의 편리 같은 것이다. 유럽에서도 나는 3등칸으로 여행을 했고 다반 한 번, 어떤 것인가 보려고 1등칸을 탔었는데, 1등칸과 3등칸 사이에 그리 큰 차이가 없었다. 남아프리카에서는 3등칸 승객은 주로 흑인들인데, 그래도 3등칸의 시설이 여기보다는

 

나는 이미 기타를 믿고 있었고, 거기 매혹되어 있었다. 매일 한두 구절을 따로 외우기로 결심을 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아침 목욕시간을 이용하기로 했다. 거기 35분이 드는데 칫솔질에 15분을 쓰고 목욕에 20분을 쓴다. 첫번째 것은 서양식으로 곧추서서 한다. 그래서 맞은편 벽에다 기타의 구절을 쓴 종이를 붙여놓고 그것을 이따금 보면서 외웠다. 이 시간이면 그날 것을 외우고 이미 외운 것을 반복하는 데 충분했다. 그렇게 해서 열세 장을 외웠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기타외우기는 그 외의 다른 일과 사티아그라하는 지금도 그렇지만 내 모든 사색 시간을 다 차지해버렸다. 나에게 기타는 완전한 행동의 지침이 되었다. 이것은 내가 날마다 찾아보는 사전이 되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영어가 있을 때면 영어사전을 찾듯이, 내 모든 난 문제와 시련에 대해 미리 준비되어 있는 해답을 얻기 위해 나는 이 행동의 사전을 찾았다. 아파리그라하(무소유)나 사마바바(한결같음,평등관) 같은 낱말들이 나을 괴롭혔다. 평등한 마음을 어떻게 길러가며 지켜가느냐가 문제였다. 어떻게 하면 모든 소유를 내버릴 수 있을까? 내 몸부터가 훌륭한 소유가 아닌가? 내가 가지고 있는 책장도 다 부숴버려야 하는 것일까? 나는 내가 지닌 모든 것을 내버리고 '그이'를 따라야 하나?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지 않는 한 나는 '그이'를 따를 수 없다. 무소유나 평등관은 심정의 변화, 태도의 변화가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청천백일같이 내 마음에 명확해졌다.

 

'누가 감히 저 태어난 바탕의 물결을 향해 이만큼만 하고(그 이상도 말고) 말할 수 있을까? 누가 감히 자기가 태어날 때의 인산을 지워버릴 수 있을까? 제 자식들이나 돌봐조는 것들에 대해 자기가 밟아온 진화의 방향을 반드시 따라올 것을 기대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희생과 간소한 생활의 이상이 점점 더 구체화되어가고, 일상생활 속에서 종교적 의식이 점점 더 생기를 띠어감에 따라 채식주의를 하나의 사명으로 알자는 열망이 더욱더 높아지게 되었다. 아무리 개혁을 열심히 하자고 하더라도, 제 역량에 넘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그리고 또 그렇게 말은 돈을 빌려주는 데서 나는 기타의 교훈, 즉 평등관을 가지는 사람의 의무는 결과를 바라는 마음 없이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어긴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의 생활이 점점 더 간소해짐에 따라 의약을 싫어하는 생각이 더욱 심해졌다. 그 발기인들의 주장대로라면 영국 사람은 너무 자주 너무 많이 먹는다. 밤중이 될 때까지도 먹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의사에게 주는 돈이 많다. 이러한 꼴을 면하려면 적어도 아침은 안 먹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나는 내가 이때까지 필요 이상으로 먹고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책 속에서 신선한 과일과 견과를 인간의 자연적인 식물로 권하고 있었다. 나는 일생에 두 번 아주 중병을 앓아본 일이 있기는 하지만, 사람이 약을 먹을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1천에 999는 음식 조절, , 물 치료, 또는 그와 비슷한 가정요법으로 나올 수 있다. 조금만 아프면 곧 양의요 한의요 하며 의사에게 달려가고 식물성, 동물성의 가지가지 약을 삼키는 사람은 스스로 제 목숨을 단축시킬 뿐 아니라, 몸의 주인 노릇을 못하고 종 노릇을 하는 동안에 자제하는 힘을 잃어서 사람 노릇을 못하게 되고 만다.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 쓴 것이라고 해서 이런 생각들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내가 왜 앓았느니 그 이유는 내가 안다. 그 병들의 책임이 오직 내게만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알기 때문에 능히 참아갈 수가 있다. 10년 동안, 그러니까 1914년까지 내가 감옥에서 억지로 쉬게 된 것을 제외하고는 내 논설을 싣지 않고 발행된 인디언 어피니언은 한 호도 없었다. 글자 한 자라도 생각 없이 썼다거나, 단순히 재미나게 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과장해서 썼다는 기억은 없다. 실로 그 신문은 나에게는 자제의 수련장이 되었고, 친구들에게는 내 사상과 끊임없는 접촉을 해나가는 매개체가 되었다. 비평가는 반박할 만한 것을 거의 찾아내지 못했다.

 

이것은 전쟁이 아니라 사람 사냥이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런 종류의 봉사를 할 수 있는 기회는 앞으로 점점 더 많아질 것이고, 내가 만일 가정생활의 쾌락과 자녀의 출생과 양육에 빠져 있었더라면 나는 그 일을 감당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한마디로 나는 육과 영을 다 따를 수는 없다. 가령 예를 들어서, 현재 내 아내가 임신중이라면, 나는 이 전란 속에 뛰어들 수 없었을 것이다. 브라마차리아를 지키지 않고는 가정 봉사와 사회 봉사는 양립이 될 수 없다. 브라마차리아를 지키면 둘은 완전히 양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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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대화 철학에서 삶을 배우다 | 기본 카테고리 2020-06-22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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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크라테스 씨, 나는 잘 살고 있는 걸까요?

허유선 저
믹스커피 | 2020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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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씨, 나는 잘 살고 있는 걸까요? 삶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내 인생 괜찮냐교? , 내 인생은 말이지.' 아직 고민도 시작하지 않고 오십 줄에 들어선 나이를 바라보고 있으면 나의 마음은 번뇌로 가득 찬다. 어리석음과 우매함으로 지나온 시간들 속에서 번민이 뇌리를 때린다.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으로 살아가는 것인가? 삶의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 무엇이더란 말인가? 아무런 것도 없이 철학적 사유없이 살다가는 것이 진정한 삶인가? 살아가는 것의 진리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간다. 그렇게 번민은 지속적으로 이어져 간다. 아침에 일어나나자 마자 한 편의 글을 써야만 살아갈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삶의 의미을 찾을 수 없다. 알면 실천을 하면 된다. 그저 그것으로 만족스러운 것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을 잡고 가서는 안 된다. 하나의 사실에 집중하면서 끊임없이 소크라테스와 대화하는 철학적 사유 방식을 견주하고 있어야 한다.

 

"나는 잘 살고 있는 걸까? 어떻게 살면 잘 사는 것일까?" 난 지금의 내 상태를 점수 매겨 평가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저 간절하게 살고 싶었다. 간절함이 없는 삶은 삶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그렇게 살지 못한다는 것은 살아간다는 것을 모른다는 거다. 그 간절함이 닿아야 할 곳을 알 수가 없었던 것뿐이다. 그러면 인생을 살아가는 의미는 어떤 것인가? 누군가 답을 주기는 그 답에서 내 마음이 만족할 수는 없었다. 소크라테스는 언제나 내 대답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항상 내 답변의 꼬리를 물어 다시 물음을 던진다. 그건 뭐죠? , 그럼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정말로 그렇다고 생각하나요? 제가 보기에는 이런 예외가 있는 것 같은데, 그럼 당신이 대답한 것은 그 예외를 뺀 나머지인가요? 그런데 궁금한 것은 예외 없이 확실한 답이 아니던가요? 이처럼 끊임없는 대화가 철학이다. 무지를 인정하고 앎에 대한 갈구를 찾는 것이 철학이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는 대화를 통해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만드는 도발적인 면모를 지녔다. 소크라테스는 일부러 나서서 기존의 체제를 파괴하지는 않았지만, 기존의 체제를 떠받치는 주요 가치에 따라서 살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는 젊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생각과 잠재성을 돌아보고 알아차리게 하는 충실한 조력자였고, 사회적으로 이미 받아들여지는 가치나 목적을 비판적으로 살펴보는 일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삶의 근본적 가치를 스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철학적 대화를 위한 파트너였다. 소크라테스가 반체제적인 인물로 유죄 판결을 받아 죽음에 이른 사실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아테네의 수많은 청년들과 길거리에서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고, 청년들의 정신을 타락하게 만들어 사회의 근간을 흔들리게 했다는 이유로 아테네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겠는가.

 

소크라테스는 결국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는 신탁을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그의 받아들임은 스스로 다른 사람보다 가장 뛰어나고, 가장 현명하다는 자기 확신에서 기인하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어떤 분야에서는 똑똑하지만 삶의 중요한 문제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을 잊고 사는 사람이 되기보다, 그 스스로 모른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꾸준히 앎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남기로 했다. 소크라테스는 모르기 때문에 앎을 향해 나아가는 삶을 선택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스스로의 무지를 인정하고 배움을 열망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델포이 신전의 신탁을 받아들인다. 우리는 신이 아니기에 실제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아는 지혜를 자신하거나 이를 목표로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바로 그 모름의 자리에서 묻고 배우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에게는 돈벌이와 무관한 거리의 대화가 인생에서 가장 우선시되는 소명이었다. 우리는 대화를 통해 자신의 무지함을 알게 되고, 그 무지를 인정한 이후에야 다른 곳으로 나아갈 수 있다. 무지를 인정하는 것은 용기이다. 배움에 도달하는 첫발걸음이 된다.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죽을 때까지 공부하다 가는 것이다. 삶은 어떤 이름으로도 변명으로 일관될 수는 없다. 현실에 대한 간절함과 치열함만이 그 삶에 대한 해답이 된다. 아직은 아니라고 하지 말라. 지금 오늘 이 순간에 간절함만이 살아갈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될 것이다.

 

자신만의 특수함을 보편적인 것으로 오해해 모두가 자신처럼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이 보는 세상은 얼마나 속 터지고 화가 날 것인가? 반대로 그동안 보편적이고 정상적인 삶 속에 자신을 끼워 넣으려 노력했지만 그것이 거짓 보편이었다면 어떨까? 또한 내가 '누구라도 이럴 거야.'라는 이유로 슬그머니 생각하기를 놓아버린 문제들이 정말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것이었을까? 일상에서 익숙한 일은 대개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익숙한 것은 오랫동안 접해왔던 것뿐이지. 그것이 꼭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 더욱이 그 익숙함이 보편적으로 '옳은 것'으로 간주된다면 거짓 보편은 많은 사람들을 억압하는 굴레가 될 수도 있다. 실제로는 얼마든지 변경할 수 있는 규칙인데, 절대 바꿀 수 없고 꼭 그래야 하는 법칙이라고 생각되면 다양한 삶의 방식과 다양한 가능성을 차단해버리게 된다. 보편적으로 생각하려는 철학적 태도는 함부로 보편을 장담하는 것이 아니라, 착각이나 오해로 인해 생긴 인생의 무거운 짐, 딱딱한 마음에서 벗어나는 길로 통한다.

 

"혼란과 좌절" 자신의 기술이 부족함을 절실하게 깨달았을 때 우리는 더 나은 수준의 기술을 얻는 일에 몰두한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정은 우리를 앎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러므로 혼란스러움과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는 일은 어쩌면 자연스럽고, 앎으로 나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단계다. 혼란스럽고 부정적인 감정을 느낀다고 해서 그 상태가 꼭 나쁜 것은 아니다. 혼란하고 부끄러운 와중에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일은 용기가 필요하다. 무지를 인정할 때, 과거와 똑같은 것을 고수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용기가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나아갈 수 있다. 모르는 것에도 아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정말로 우리가 할 일은 '받아들인다.' '인정한다.' 등 그저 납득하는 것뿐이다.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데 다른 행동은 필요 없다. 성취의 문제가 아니라 행동의 문제다. 이유를 가져다 붙여 변명하고 해명할 생각은 접고 다음 발걸음을 내딛으면 그만인 것이다.

 

철학책은 눈으로만 보기보다 손으로 함께 읽으면 좋다. 대화를 할 때 말이 잘 통하지 않으면 신체 표현을 통해 의미 전달을 돕는 것과 마찬가지다. 책을 펴놓고 주요 용어, 근거, 결론을 체크하고, 이들 관계를 화살표 등을 사용해 그림으로 나타내보자. 그렇게 찾아낸 내용에 대해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말풍선, 따옴표 등을 통해 적어 넣어도 좋다. 정말 대화를 하듯이 말이다. 그리고 가장 마음에 걸려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이 어디인지도 생각해보자.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데카르타 씨와 대화하고 그의 생각을 이해하려고 접근하는 한편, 나 자신의 문젯거리도 찾을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저항과 같은 저항이자 시민불복종인 셈이다. 시민불복종은 국가 권력의 명령이 부당하나는 이유로 그 명령을 거부하고, 그러한 행동을 통해 문제를 공론화해 변화를 촉구하는 행동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시종일관 철학함을 실천하는 삶을 완성했다. 그는 참되고 가장 가치 있는 삶, 영혼에 유익한 삶, 그러므로 모두에게 정의로운 삶을 추구하며 어떤 불의와 위협 앞에서도 그렇게 살기를 그만두거나 타협하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수천 년의 시간을 뛰어 넘어 오늘날의 우리에게 묻고 있다. 죽음이 두려워 진실되게 살지 않는 쪽을 택할 것인가?

 

사람에게는 철학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있고, 덕분에 지금의 생각은 바뀔 수 있으며,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삶이 바뀐다. 무엇보다 내가 나에 대해 느끼고 평가하고 기대하는 것도 달라진다. 우리의 생각, 행동, 삶은 늘 진행 중이다. 그리하여 끝을 단언할 수 없는 우리의 활동은 자주 어렵게 느껴질 것이고 때로는 좌절할 수도 있다. 철학적 활동에서 만나게 되는 어려움, 숫한 함정과 탈선의 유혹 앞에서 소크라테스와의 대화와 소크라테스의 물음이 나 자신의 철학적 활동과 철학적 삶에 불을 밝혀줄 것이다. 다음에 세 가지 물음을 항상 기억하도록 하자.

 

1. 나는 영혼에 유익한 삶을 살고 있는가?

2. 나느 독백하듯 살고 있는가, 대화하듯 살고 있는가? 다시 말래 내가 하는 말이 전부이고 내가 하는 말로 이야기가 마무리되어야 한다는 태도로 자신의 믿음 안에만 갇혀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3. 나는 어떤 삶을 향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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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평]내 방의 작은 식물은 언제나 나보다 큽니다 | 한줄평 2020-06-20 0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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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에게서 배우고 인생을 느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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