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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스 선장 구하기 _[ 캡틴 필립스] 실화의 힘 | 영화가 왔네 2013-10-29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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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캡틴 필립스(디지털)

폴 그린그래스
미국 | 2013년 10월

영화     구매하기

 

톰 행크스. 2차 대전에서 라이언 일병을 구하러 갔고 자기를 희생해 구해낸 그가 이젠 스스로 인질이 되는 역을 맡았다. 폴 그린그래스 감독의 신작 <캡틴 필립스>다.

 

실화를 바탕으로 리쳐드 필립스가 쓴 책을 기초로 한 영화 <캡틴 필립스>는 2009년 4월, 소말리아 해역에서 소말리아 해적단에 피랍되었다가 극적으로 구출된 사건을 그리고 있다. 

 

누가 무장세력이나 해적에게 납치되는 것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베테랑 선원 필립스 선장(톰 행크스)는 위험하다는 경고는 알지만, 조심하고 긴장한 상태에서 부하 선원 스무명과 함께, 오만 항구에서 컨테이너를 싣고 케냐 몸바사로 향한다. 그 중간에 꼭 거쳐가야 하는 지역이 소말리아 해상이었다.

 

 

망망대해에서 기관실 계기판에 어선 두 척이 빠른 속도로 접근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예감이 좋지 않아." 필립스 선장은 영국 해양부서에 연락하는데 영국 담당은 99퍼센트가 일반 어선이라고 일축한다. 시험해 보려고 필립스는 배를 좌현 몇 도 틀어보는데, 바로 어선들은 그 쪽으로 방향을 튼다. 불행하게도 '앨라바마 호'가 해적의 먹잇감이 된 것이다. 

 

위기의 상황에서 선장에게 필요한 건 담대력 뿐이 아니라, 기지(재치)였고, 인질로 잡힌 이후에는 연기력도 필요로 함을 이 영화로 처음 알았다. 순발력 갑인 필립스 선장의 재빠른 지시로 부하들은 일사분란하게 은밀한 곳에 숨고, 결국 필립스만 혼자 구명정에 피랍되는, 최악의 상황에서 최고의 시나리오를 성사시킨다.

 

이제는 또 다른 국면이다. 좁은 구명정에 해적은 4명이 있고, 연락 받은 미 군 당국은 아덴만에 있던 최상급 군함을 필립스와 해적이 있는 해역으로 출동시킨다. 하지만 구출은 결코 쉽지 않다. 해적들 또한 다년간의 납치 경험이 있어 노련하고, 그들과 가까이 필립스가 붙어 있다는 게 가장 문제이다.

 

 

2시간 20분의 상영 기간은 한 순간도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중간 중간. 선원들의 재빠른 조처, 똘똘 뭉쳐 위기를 타개하는 모습, 홀로 된 필립스 선장이 외로움, 두려움 속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모습 모두가 너무도 애타고 마음을 조마조마하게 한다.

 

여느 미 해군 영화처럼, 용맹하고, 군사력으로 밀어붙인 군인들의 영웅담이 결코 아니었다. 선원들이 천사처럼 그려지는 것도 아니고, 필립스가 독고다이 영웅도 아니다. 정말 어떤 선원이 실제로 겪었던 일을 충실히 재현하는 영화로 느껴졌다.

 

말로 구구절절 설명하는 건 아니지만, 필립스의 얼굴은 이 사건을 맞아 왜 하필 나에게야 라는 것보다는, 누군가가 겪을 일이라는 것을 감지하고 피해를 최소화시키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적을 무조건 증오하기 보다는, 그들의 내부구조를 철저히 파악하고, 소말리아 해적들의 내면을 이해하여 협상을 타결시키고자 최선을 다한다.

 

 

 

구조되는 과정은 이 작품의 가장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부분이어서 거론하기보단 직접 확인하는 게 지름길이다. 결국 구조되고 나서, 아이처럼 흐느끼는 필립스의 모습에서, 인간적인 연민이 들고 위로해 주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상황이 아슬아슬해서이기도 하지만, 중반부 이후 급속도로 구조 작전이 펼쳐지면서, 수시로 눈물이 맺혀지는 영화였다. 해군들이 철저히 필립스의 생존에 목표를 두고 작업을 펼치는 것, 함장이 "전술적인 인내가 필요합니다"라던 멘트, 침착하게 자기 위치에서 상부 인물의 명령에 따라, 조용히 하지만 빠르게 움직이는 해군들의 모습에 정말 믿음이 다 갈 정도였다.

 

단 한 사람의 생명이다. 그를 구하기 위해 고도로 훈련된 군인들이 자기 희생을 무릅쓰고, 의연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꼭 '미군 군사력 만세'라는 논조로 다가오지 않았다. 물론 그런 면이 전혀 없을 순 없겠으나, 만약 영화에서 군인들과 필립스의 행동들이 전부 사실이었다면, 전적으로 박수쳐 줄 훌륭한 대처였다고 나는 생각했다.

 

90년대 초 소말리아 내전에 개입했다가 참패하고 물러났던 이야기 <블랙 호크 다운>과 반대로, 무척 희망적인 결론을 보여준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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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한 명의 선원이었던 남자를 연기한 톰 행크스의 절제되면서도 자연스런 연기, 최고였다!

 

-Reviewer 은령써니

 

 

p.s.

상공에서 (플라이트 93), 육지에서 (본 시리즈) 테러리스트 대결, 첩보전을 보여줬던 폴 그린그래스 감독이 이젠 해상에서까지 긴박한 이야기를 펼쳐놓은 것에 감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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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위원회 제작 옴니버스 영화, [ 어떤 시선 ] 6탄 | 영화가 왔네 2013-10-29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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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어떤 시선(디지털)

박정범
한국 | 2013년 10월

영화     구매하기

솔직하게 토로하면, 원래 <롤러코스터>를 간절히 보고 싶었으나^^ 도대체 상영시간이 맞지 않아, 차선으로 선택한 영화였다. 그래서 보고 나와서 아쉬움이 남았지만, 의미있는 영화를 극장에서 본방사수 했다는 것에 의미를 뒀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제작비를 투자하여 만들어진 옴니버스 영화가 어느새 6번째에 도달했다. 그 동안 제대로 챙겨보지 못했는데, 이번 작품은 독립영화계에서 내로라 하는 감독들이 참여해 눈길을 끌었다.

 

박정범 감독의 <두한에게>, 신아가 감독의 <봉구는 배달중>, 민용근 감독의 <얼음강> 세 편이고 상영시간은 107분이었다.

 

 

 

주관적이지만 평가를 하자면 <봉구는 배달중>-<두한에게> <얼음강> 순서로 좋았다.

 

(얼음강은 개인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주제와 어색한 표현으로 리뷰에서 제외하였습니다.)

 

박정범 감독의 <무산일기>를 놓친 것을, 몇년 동안 못봐서 아쉬운 영화 베스트로 뽑았던 블로거. ^^

 

그런 그의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한 걸음에 상영관으로 향하였고<두한에게>는 신체가 부자유한 장애인 청소년과 그의 절친 친구의 이야기였다.

 

 

두한이는 몸이 많이 불편하여 말을 할 때 구부러진 팔을 총동원해야 한다. 그러나 반에서 단짝 친구인 철웅이로 인해 외롭지 않다.

그러나 넉넉지 않은 가정형편에서 사는 철옹이는 형을 위해서 순간의 실수로 두한이의 고가 아이패드를 훔치게 된다.

 

그러면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일들이, 과장되지 않으면서도 사실적으로 펼쳐졌다.

 

이창동의 <오아시스> 이후 많이 생각했던, 장애우와의 소통 문제를 청소년의 시선에서 봐서 좋은 작품이었다.

 

 

70대 노인 김봉구씨는 형편이 넉넉치 않지만 배달 일을 하면서 일상을 버티고 있다. 독거 노인 봉구씨에게는 예쁘고 똑똑한 딸이 있지만 미국에 시집가서 감감 무소식이다.

 

그러던 어느날, 환승이 생명인 배달 일 중에 굼띤 몸으로 인해 버스를 놓친 하루. 그의 눈 앞에, 어린이집 차를 놓치고 덩그러니 길에 서 있는 아이 '행운'이가 눈에 띈다. 그는 딸의 손자 '지미' 나이 또래의 그 아이가 남같지 않았고, 그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 다 주고자 한다. 이를 테면 아이를 배달하려 한 것이다.

 

그런데 사건이 일파만파되어 그는 일약 어린이 유괴범으로 둔갑한다. 행운이는 사실 예전 어린이집 여자친구가 보고 싶어 그저 땡땡이를 친 거였는데...

 

 

30~40분 가량 씩의 각각의 작품은, 주제 의식에 맞게 적당한 분량이었고, 저예산 영화여서 보기 불편한 테크닉적인 면도 있었지만, 의미있는 인권, 복지 주제를 대중영화, 극 영화의 화법으로 잘 형상화한 작품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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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한에게>의 주인공 두한이의 그림인데, 이해하긴 어렵지만, 정겨운 느낌이 들었던 그림.

영화에서 롱 테이크로 마지막 자막 크레딧을 차지해서, 독특한 느낌을 주었다.

 

-은령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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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권의 철학 책으로의 여행, [ 철학의 고전] 로베르트 짐머 作 | Basic 2013-10-26 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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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회 예스24 문화 축제 - 두 번 본 책, 세 번 본 영화, 자꾸 들은 음악 참여

[도서]철학의 고전

로베르트 짐머 저/이동희 역
문예출판사 | 2013년 09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정말 뜻깊은, 깊이 있으면서도, 새로운 것들을 깨달았던 독서- (2006년 원저 이후의 2013년 개정판 리뷰)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16권의 철학 책으로의 여행, <철학의 고전> 로베르트 짐머

 

생각해보니 ‘철학’이라는 우리 말의 어원이 무엇인지 문득 궁금해진다. 잘 알려졌듯이 서양의 철학, 즉 필로소피는 ‘지혜를 사랑하다’라는 의미에서 비롯되었다. 그렇다면 고전이란 현재의 우리에게 어떤 뜻일까? 홍기삼의 정의에 따르면 고전(古典)이란 ‘인류가 발견하고 발전시켜 온 수없이 많은 지혜와 지식 중에서도, 세월의 마모를 견뎌냄으로써 그 유효성을 입증받은 소수의 것들이다.” 어떻게보면 현대의 수많은 사상의 흐름과 분류는 ’어떤 것들을 고전으로 삼고 있는가‘에 따라 나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문예출판사가 펴 낸 철학의 대표적 고전 16 작품을 다룬 <철학의 고전>은 로베르트 짐머가 서양 철학의 고전으로 선별한 철학가들의 저작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목차부터 일별하니 고전이라 칭해져온 철학가들의 주옥같은 작품들이 나열되어 있는데, 그 시작은 고대 그리스의 이론가 플라톤과 그의 대표작 『국가론』이다.

당대의 뼈대있는 귀족 가문 출신이었던 플라톤이 서술, 집필한 『국가론』은 ‘유럽 철학사에서 최초의 거대하고도 체계적인 (철학적) 기획’이었다.

 

존경했던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혼란스런 정치 속에서 처형되는 일을 겪으면서 현실에 실망한 플라톤은 정의란 무엇인가란 문제를 깊이 탐구하기 시작했다. 소크라테스에게서 배운 대화 형식으로 이루어진 『국가론』을 통해 정의, 참된 지혜, 교육에 대한 자신의 치열한 사유의 결과를 펼쳐 놓았다.

 

정의란 영혼(psyche)의 건강한 질서를 의미하며, 한 국가를 지배하고 통치할 조건과 능력을 갖춘 계층이 정의, 지혜, 용기, 사려깊음(신중함)을 갖춰야만 그 나라는 이상적인 국가가 될 수 있다는 게 플라톤의 주장이다.

 

노예제도를 옹호했던 플라톤이기에 그의 주장들은 귀족주의의 틀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고, 그가 상정한 국가란 당시 인구 30만의 아테네와 같은 폴리스(polis)를 의미했기에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건 물론이다. 그러나 기원전(bc)의 인물로서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능력과 자격을 지닌 존재로 보았다는 건, 충분히 대단하고 획기적인 철학이었다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엘리트주의를 지향하였으나, 최고의 통치자일수록 앞에서 말한 네 가지 덕목을 철저하게 수련하고 금욕적이어야 한다는 플라톤의 정치철학은 관념이 아닌 실천적인 주장이었다. 그렇기에 플라톤의 ‘폴리테이아’가 현재의 ‘politic’이란 말이 되었고, 아테네에 세웠던 철학자 교육기관 아카데미아가 현재의 대학(academy)의 모체가 될 수 있었다.

이 후, 르네상스 문화부흥 시대에 『국가론』이 다시 주목을 받고 조명됐고, 심지어 20세기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플라톤의 사상의 일부를 활용했다는 것은 이번 책을 통해 전해 들을 수 있었다.

 

플라톤의 국가론에 이어서 16세기에 이르러 독특한 정치철학을 제시한 철학자가 등장하는데 바로 이탈리아 피렌체의 니콜로 마키아벨리였다. 로베르트 짐머에 따르면 21세기인 지금까지도 혐오스런 악당이란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는 사람이 바로 마키아벨리라고 한다. 정치가이자 외교관 생활을 오래 하며 『군주론』을 집필한 마키아벨리는 당시에 논란의 중심에 있던 작가였다고도 전해진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위엄있고, 무력에 의존하는 지도자 상을 제시하는 뒷면에 조국에 대한 자신만의 뜨거운 애정이 자리잡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당시에 이탈리아는 지금처럼 한 국가가 아니었고, 피렌체, 로마, 나폴리, 베네치아, 밀라노로 분리된 상태였고 피렌체 공화국이 마키아벨리의 조국이었다. 이렇듯 국토가 여러개로 분리되면 각 나라는 주변 강대국의 먹잇감이기 쉬웠고, 당시 프랑스, 스페인은 기회만 되면 각 공화국들을 점령하고자 도사리고 있었다. 실제로 피렌체는 1512년 스페인 군대의 지배를 받기도 한다.

 

16세기 이전까지 그리스 철학은 여전히 유럽 지도층에 다방면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마키아벨리가 센세이셔널했던 것은, 종교, 전통, 도덕으로부터 분리되어 정치가 철저하게 자신만의 고유한 영역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에 있다. 키케로, 에라스무스 등 많은 현인들이 통치자들의 덕은 관대함, 백성들과의 친밀한 유대라고 강조해왔는데,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는 정반대로 그것을 뒤집는 급진적인 주장을 펼쳤다. 불행하게도 그 때 메디치 가문의 로렌초는 군주론을 완전히 외면했고, 은퇴 후 마키아벨리는 역사에 대한 글을 쓰며 생을 마쳤다.

 

몇 년 후에야 책의 가치가 인정받아 출판됐으나 또 한동안은 교황에 의해 금서 목록에 오르는 등, 마키아벨리는 사후에도 논란의 중심의 인물이었다. 로마 교회가 군주론을 배격했던 것은 단지, 책의 저자가 정치를 종교를 비롯한 어떤 것으로부터도 분리된 고유의 영역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인간은 뱀을 알기 위해서 여우가 되어야만 하고, 늑대에 겁을 주기 위해 사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통치론을 펼쳤던 『군주론』은 그러나 이후 수많은 유럽 통치자들에게 직접적이거나, 은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내 생각에는 얼마전 타계한 마가렛 대처 영국 전 수상 또한, 어쩌면 그의 서재에 군주론을 두고 읽지 않았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출현한 문필가들 중 우리나라에서 조명을 크게 받지 못한 미셸 드 몽테뉴에 관한 챕터는 처음엔 재미로 읽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가 쓴 주저 <에세>가 현재의 ‘에세이’라는 고유어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에서 몽테뉴라는 인물과 철학에 더욱 눈길이 가게 된다. 한 분야의 창시자는 수백년이 흐른 후세에도 인정을 받는 한편, 그 당시에는 전통을 깨는 파격으로 외면을 받기도 했다는 것을 <철학의 고전>을 통해 생생하게 되돌아볼수 있다.

 

몽테뉴의 혁신적인 점은 그 전까지 사상과 철학이란 것이 논문의 형식을 띄거나 근엄한 주제, 일관된 생각의 흐름 식으로 전개하는 게 당연시됐던 것에서 탈피했다는 점이었다.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에세>는 신문의 칼럼, 논설의 모음집이라고 볼 수 있었다.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고 배움에 치열했던 몽테뉴가 자유로운 형식 내에서 독특한 자신만의 방식으로 전혀 타협하지 않은 이론과 의견을 펼친 책이 <에세>였다.

 

경쾌한 필치로 모든 주제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몽테뉴가 <에세>를 10여년에 걸쳐 외로운 상황에서 집필했다는 것에 왠지 가슴 한 구석이 짠해져왔다. 그의 글은 당시 세태의 문제들을 날카롭게 비판했기에 사회적인 출세와는 거리가 멀었고, 지음인 가까운 친구가 요절한 이후에는 더욱 책 쓰기에 몰두했다는 일화에 인간적인 연민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말년에 현실의 일을 줄이고 실제로 성의 탑에 들어가 도서관을 구비해놓고 오로지 책 읽기와 그에 기반한 집필에 몰두했다고 한다.

 

프랑스에서 종교전쟁이 발발했고 몽테뉴는 구교도였으나 신교도와도 교류를 갖고 있었으며 이러한 관용은 그 당시에는 드물었고 이후의 계몽주의 시대보다 앞선 태도였다. <에세>가 결코 전기, 고백록은 아니지만 항상 자기 자신의 관점을 고수했다는 점이 특별했고, 1500년대로서는 드물게 개인의 경험에 가치를 두는 특성을 갖고 있었다. 전형적인 르네상스인으로서 인간을 중시하는 생각을 그도 견지했던 것이다. 한편 몽테뉴는 유럽중심주의, 즉 유럽 문화의 우월성이란 명제를 의문시했던 최초의 철학자로도 불리운다고 한다. 현대의 프랑스에 도도히 흐르는 관용의 정신이 몽테뉴의 저작들에서 발생하고 기인하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몽테뉴가 시작한 자아에 대한 진지한 탐구는 르네 데카르트로 이어졌고, 연약하고 불안한 인간에 대한 사유는 파스칼에 영향을 주었다. <에세>는 구체성, 가벼움을 철학에 부여했고, 결과적으로 보다 삶에 밀착되어 대중들에게 철학을 가깝게 느끼게 하는 거의 최초의 작품이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한 마디로도 여전히 회자되는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는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 할 만 하다. 몽테뉴와 마찬가지로 내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둘 다 모두 귀족 출신에 나름 기득권일 수 있었으나, 중요한 걸 다 포기하고 오로지 철학의 연구와 책 쓰기에 몰두했다는 점이었다.

 

수학자이기도 한 데카르트는 연역법을 개발해 내기도 했고 모든 학문의 근본을 수학이란 관점에서 증명하고자 했다. 당대에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적인 과학 이론을 접하면서 철학에 눈을 뜬 데카르트는 고국을 떠나서 자유를 보장하는 네덜란드에 정착했고,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최대 걸작 <방법서설>이 네덜란드에서 쓰여졌다. 중세의 신학에 조금이라도 충격을 주는 연구가 그만큼 위험시되는 시대였는데, 데카르트의 철학이 신학과 철학, 과학적 측면에서 모두 새로운 발견을 제시할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이다.

 

<방법서설>의 완전한 제목은 <이성을 잘 인도하고, 학문에 있어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방법서설, 그리고 이 방법에 관한 에세이들인 굴절광학, 기상학 및 기하학>이다.

이 책에서 유명한 그의 방법론적 회의(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도출되었다.

 

중세와 결별한 근세에는 무역을 중심으로 특히 이탈리아, 서유럽, 독일 지역에서 정신생활을 지배하는 힘이 최초로 성직자의 손에서 평민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모두가 사유하고 지식을 추구할 수 있게 된 이 상황에서 데카르트는 학문을 탐구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보편적인 지혜, 즉 철학을 평생의 사명처럼 수행하고자 했고 이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철학을 이루어내었다.

 

당시에만 해도 인정받는 철학책은 대부분 라틴어로 쓰여지던 시대에 과감히 모국어인 프랑스어로 <방법서설>을 써냈다는 것도 대단한 측면이며 성취였다.

선배 몽테뉴처럼 그도 <방법서설>이 논문으로 읽혀지기를 원치 않았고 소설작품처럼 쓰고자 했고, 그러므로 교과서가 아니라 오히려 에세이와 철학적 자서선의 혼합물로 탄생했다.

 

데카르트는 자명하게 참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의심했다. 감각은 우리를 기만할 수 있지만 ‘의심’은 확고하고 새로운 확실성을 생겨나게 한다. ‘나는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으나 의심하는 행위 자체, 즉 사유 자체는 의심할 수 없다’.

데카르트에게 감각은 교량의 지위만을 획득했다. 감각은 사물의 본질과 실존을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사물과 관계를 맺어준다,

 

학문은 모든 사람에게 유용하고 진보에 봉사한다. 이러한 학문에 신뢰할 만한 기초를 제공해야 하는 것이 바로 철학이고, 데카르트는 필사의 정신작업으로 철학을 완성하고 증명하고자 했다.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데 있어 판단은 기준과 방법을 필요로 한다. 데카르트는 학문을 나무로 비유하였다. 뿌리는 형이상학, 줄기는 수학, 그것에서 뻗어나가는 가지는 물리, 의학, 기계학 등이라고 하였다.

 

정리하면, 이성 자체에만 의심할 수 없는 진리가 있다는 <방법서설>, 이 한 권을 기초로 이후의 서구 근대 합리주의가 펼쳐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 계승, 형성된 합리주의는 서구인들의 지나친 이성에의 맹신이 빚은 폐해에 책임을 갖는 본의아닌 시초가 되기도 한다.

 

 

<철학의 고전>에서 나열한 순서는 따로 있지만, 비슷한 관점을 이어간 맥락에서 리뷰를 엮어보고 싶어서, 다른 시대의 파스칼과 키르케고르, 존 로크와 마르크스의 철학을 살펴보기로 한다.

 

AD 400년에 기록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이 서양 철학의 기독교적 저작의 출발이었다면, 1670년의 블레즈 파스칼은 그 뒤를 잇는 텍스트 <팡세>를 썼다. 몇 년전 민음사의 <팡세>를 약간 읽은 적이 있는데 독해가 쉽진 않았으나 격언집으로 느껴져 마음에 와 닿는 문장들만 읽어도 좋았다. 데카르트처럼 실력있는 수학자였고, 계산기를 발명하기도 한 파스칼은 합리성을 지지하는 것과 그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는 것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했고, 격언과 메모, 논문의 혼합체 형식의 <팡세>는 분열적인 그의 내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1654년 11월 23일에서 24일로 넘어가는 밤에 종교적 회심, 각성의 체험을 한 이래로 그는 그간의 방탕과 방황을 종결짓고 자신만의 개인적인 신을 발견했다. <팡세>에서 펼치는 그의 철학은 과학, 이성적 사유를 통렬히 비판함으로써 신앙인으로서의 지성인으로 완전히 돌아섰다. 그의 글들은 지금의 시점에서 봐도 날카롭고 단호해서 놀라움을 준다. 합리적이고 수학적인 사유란 우리 인간의 본성의 가장 깊은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며, 가장 본질적인 물음에 답을 줄 수 없다는 인식을 그는 끝까지 고수했다.

 

인간의 본질적인 정체성은 불안이고 파스칼에게 있어 불안이란 오로지 신과 분리될 수 있다는 실존적 절망의 표현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당신에게 안식을 찾기 전까지 나의 마음은 불안합니다”라는 고백을 한 것과 마찬가지 명제였고 이후 쇠렌 키르케고르의 불안의 개념으로 파스칼의 사상이 이어지게 된다.

 

파스칼은 아리스토텔레스, 에픽테토스 등 고대부터 내려온 합리주의 전통, 즉 최상의 진리들은 오로지 이성을 통해서 접근 가능하다는 것에 반대했다. ‘이성의 논리’보다 ‘마음의 논리’에 우선 순위를 부여함으로써 이성의 한계성과 무능력을 보여주고자 했다. (p.109)

 

“인간은 한 개의 갈대에 지나지 않으며 자연 가운데서 가장 약한 자이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인간은 우주 속에서 아무 것도 아니지만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로서 자신의 존엄을 가지고 있다는 파스칼의 인간학의 총체가 <팡세>이다.

 

키르케고르의 사상은 여전히 완전히 해독되지 않고 있는 듯 한데 확실한 건 그의 저작들은 시적인 동시에 심오하고, 섬세하며, 다면적이라고 로베르트 짐머는 말한다. 실존이란 개별 인간의 가장 내면적이고 파악하기 어려운 인격적 핵심이며 자아이다. 실존주의를 말할때 프랑스의 소설가를 떠올리지만 1800년대 덴마크의 철학자·신학자 키르케고르가 시작이었다.

 

진정한 철학은 인간의 인식 전체를 아우르고 인간에게 절실한 물음을 제기한다. 이전의 성실한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키르케고르도 신분의 이익을 뒤로 하고, 인생을 걸고, 목숨을 마치는 순간까지 철학을 했던 사람으로 느껴졌다.

 

<이것이냐 저것이냐>(1813)의 원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삶의 단상. 빅토르 에레미타가 편집함>이다. 몽테뉴, 파스칼처럼 일기, 메모, 편지, 에세이, 격언으로 구성된 본서는 1,000페이지에 이르는 야심작이었다.

 

삶의 자세, 자기 실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하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인간이 삶 속에서 실천적으로 자기의 것으로 만든 진리만이 자신을 위해 중요한 것임을 강조한다. 키르케고르 이전까지 정신적 세계를 지배한 독일 관념론의 대부 헤겔과 그는 대립하게 됐다. 헤겔에 의하면 현실은 이성이 역사 속에서 자기를 드러내는 과정이다. 반대로 키르케고르는 개별자가 현실적으로 자신의 삶을 통해 실현할 수 있는 것에 관심을 집중했다.

 

학위 졸업 논문 <소크라테스와의 지속적 관계를 통해본 아이러니의 개념>을 시작으로 그의 뛰어난 문장력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것이냐 저것이냐>는 1841년 12월부터 이듬해 11월까지 11개월에 걸쳐 생겨났다. 잘 알려졌듯, 레기네 올센과 갑작스런 파혼을 한 후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쓴 그는 A와 B라는 화자를 등장시킨 책에서, 자신의 모습을 투영시켜 일부러 인격에 문제가 있는 남성처럼 가장했다고 한다. 그는 평생 독신이었고 올센을 잊지 못했지만, 그녀가 자신을 잊게 하기 위해 평판을 조작하기도 했다는 대목에서 안타깝기도 하고 잘 이해가 안됐다.

 

<이것이냐 저것이냐>로 돌아오자. A는 심미적 인간상을 드러내고 이 부분이 책의 2/3이고 나머지는 B란 화자를 통해 윤리에 대해 고찰한다. 향락에 가치를 두는 심미적 인간에게 모든 것은 ‘흥미가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삶의 감정을 고양시키는가’로 모아진다. 이와 같은 삶의 형식은 우리가 예술과 관계할 때의 방식과 많은 유사성을 갖는다. 예술은 우리에게 유희적이면서 감각적이고, 동시에 정신적인 자극을 주는 대상이다. 심미주의자는 현재를 위해 살고, 미래를 위한 계획이나 과거에 대한 집착은 무의미하다.

 

현재의 만족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미래를 목표로 하고 있는 B의 윤리적 삶의 형식은, 인간이 타인과 의무적 관계를 맺는 것을 통해 확연히 드러난다. B가 추구하는 삶에서 저자는 결혼을 윤리적 삶의 형식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했다. 결론적으로 사람들은 심미적 삶의 방식과 윤리적 삶 사이에서 선택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독실한 개신교인이며 덴마크 국교를 신랄히 비판해서 거의 이단자로 몰렸던 키르케고르는 한 때 사교계에서 제대로 활동했던 전직(!)이 있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 그는 자신이 직접 겪었던 생활과 그 후 성찰한 사색을 바탕으로 했기에 사회적으로 큰 파급력을 가질 수 있었다.

 

A는 아마 근세에서 최초로 시니컬한 인물의 시초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관능적, 본능적인 삶을 향유하는 자이나 그는 절망을 느끼고 있다고 키르게고르는 문학적 필치를 동원해 표현한다. 우울과 권태가 항상 동반되는 삶 가운데 처해 있는 게 A다. 대표적인 표본적 인물이 등장하는데 돈 주앙과 요한네스가 그들로, 돈 주앙은 <직접적인 관능적 사랑의 단계 또는 음악적·관능적인 것>이란 에세이를 썼다. 돈 주앙이 타고난 관능적 사랑의 대가라면, 요한네스란 남자는 <유혹자의 일기>의 저자로 나타났고, 그는 세련된 준비와 전략으로 그렇게 됐다고 표현한다.

 

결국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 키르케고르가 이상적인, 최선의 인생으로 논증하고자 한 것은 B를 통해 제시된다. 빌헬름이란 이름의 법률가인 B는 A가 가진 장점, 즉 직관적이고 감각 지향의 삶이 윤리적 삶으로 수용, 통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결혼이란 형태를 통해 두 사람이 서로를 받아들이고 결합하는 선택을 하는 것이 향락에 내맡겨진 삶과 결별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선택’이란 주제가 키르케고르가 말하고 싶은 키워드였던 것 같고, 우울이 아닌 절망을 겪음으로써 양심을 깨닫고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 있다는 이론을 펼쳤다. 그가 사용한 단어인 ‘윤리’와 ‘자유’, ‘선택’의 의미가 무엇인지 깊이있게 느끼려면 역시 원서를 먼저 읽어야만 하겠다. (그런데 국내에는 키르케고르의 원저 번역이 거의 전무한 것 같다. 있어도 아주 오래전 출판된 것들만 ㅠ)

 

키르케고르는 후속작들 속에서 심미적이고 윤리적인 삶의 형식에 대해 최상의 어려운 삶의 형식으로서 종교적인 삶의 형식을 추가했다. 자국의 기독교계를 타겟으로 한 몇 작품은 본명으로 썼지만, 그 외 대부분의 저서들은 전부 다른 가명이나 익명으로 출판했다. 1844년. <불안의 개념>-비르길리우스 하우프니엔시스. <두려움과 떨림> - 요하네스 데 실렌테오. 1845년 <인생길의 여러 단계>-힐라리우스 부크빈더

1846년. <철학적 단상들에 대한 비학문적 후서>-요하네스 클리마쿠스

1849년 <죽음에 이르는 병>, 1850년 <기독교의 훈련> - 모두 익명

 

대부분의 저서들은 덴마크에서 격렬한 논쟁을 일으키면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고, 사후에 걸쳐 20세기 초 全 유럽에서도 큰 관심을 받으며 읽히게 되었다고 한다. 고독, 부조리, 인간 존재의 기본 사실로써의 불안의 개념이 키르케고르에서 유발되고 심화되었다고 한다. 실존주의 문학, 해체주의 철학에 이르기까지 영향력을 찾아 볼 수도 있을 듯 하다.

“모든 모험은 불안을 낳는다. 하지만 모험하지 않는 것은 자기 자신을 아예 잃는 것이다.”(쇠렌 키르케고르)

 

책의 중반부에 놓여있던 존 로크의 철학은 그전까지 관념적인 사상을 쭉 읽다가, 실제로 공동체를 바꾼 사건들과 연결되는 일이 구체적으로 나와서 가장 이해하기 쉽고 몰입하며 읽었다. 영국에서 의회 정치의 근간을 만든 이론가였던 로크의 <통치에 관한 두 논문>(1689)은 명예혁명의 토대를 이룬 청사진이다. 오래전 사람들의 생각을 뒤흔들고 현실을 바꾸었던 철학들이 지금은 역사 과목 암기와 상식속에서 박제된 듯 존재하지만, 당시엔 수년에 걸친 사유의 결과이자, 신변의 위협을 감수하는 도전이었음을 <철학의 고전>으로 절실히 알 수 있었다. 존 로크도 마찬가지로 네덜란드 망명 생활을 하고 혁명의 파도 한 가운데 있던 인물이다. <통치에 관한 논문>은 통치론으로도 불리우며 이하 통치론으로 지칭한다.

 

로크가 스무살과 청년 시기의 학문을 배웠던 때 영국은 왕권과 청교도 사이 투쟁의 격동속에 있었는데, 그가 웨스트민스터학교에 재학할 때 창문으로 찰스 1세가 사형되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의학을 공부해 의사로 활동하다 샤프츠버리 백작이란 사람의 주치의가 되면서 인생의 전환기를 맞았다. 샤프츠버리가 휘그당의 열혈 멤버였던 것이다. 보수주의편에 있었고, 홉스의 사회 계약 이론을 추종하며 절대 권력을 왕에게 부여하는 걸 옹호했던 로크의 변신은, 이를테면 새누리당원에서 진보정의당으로 전향한 것에 다름없었다.^^ 정신사에 영향을 끼친 사람들을 보면 이렇게 누군가와의 운명적인 만남, 직접 겪은 몇가지 사건이 터닝포인트가 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통치에 관한 두 논문 Two Treatises of Government>에서 로크는 지배자가 어째서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권력을 행사해서는 안 되는가에 대한 이유로 권력은 백성이 부여한 것이고, 또한 그것은 일정한 규칙에 의해서 행사되기 때문에 필요한 경우에는 백성에게 되돌려주어만 한다고 했다. 그의 주장은 봉건주의, 절대군주제의 체제에 반기를 걸었고 이후 근대의 민주적인 헌법 국가의 건국 이념에도 널리 영향을 주었다.

 

자연 상태의 인간은 세 가지 기본적인 권리를 가지는데 생명권, 자유권, 소유권이 그것이다. 개인들의 사적 소유는 정당하고 이와 더불어 새로운 시민 사회가 성립될 수 있다. 그래서 중세 봉건적 소유 제한과 무역 제한은 사라져야 한다. 서유럽 가운데 영국은 자유로운 상품 교환,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 새로운 원료 시장의 개척을 통해 마르크스가 150년 후 ‘자본주의’라 불렀던 것이 이제 막 싹트고 있었다.

 

자유, 생명, 소유에 대한 기본권을 보증하는 사회 계약은 타당하며 기본권을 관철하기 위한 권력을 국가 제도에 위임하는 계약에 동의할 수 있다고 로크는 보았다. 시민은 모든 권력이 시작되는 주권자의 지위를 얻었고, 존 로크는 독창적인 ‘시민 주권’ 개념을 만든 창시자가 된다. 개개인의 생명과 자유를 지키는 자발적 결사체로써의 국가관이 이렇게 탄생했다. 18세기의 프랑스 혁명, 토마스 제퍼슨의 이념과 미국의 헌법이 로크에게서 시작되었다 볼 수 있다 한다. 극단적인 신념을 가졌던 칼 마르크스 또한 로크가 철학에서 본격적인 정치경제학의 물음을 던진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기도 했다.

 

정리하면 <통치론>은 인간이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포기할 수 없는 자유로운 시민의 권리를 보여준 작품이다.

 

1867년에서 1894년에 쓰인 <자본론>의 주된 이야기 소재는 노동자의 참상과 소외계급의 빈곤이었다. 이는 경제학에서 완전히 새로운 철학을 하기 위해 영국 런던에서 생활했던 칼 마르크스가 경험하고, 대영박물관에서 독서에 파묻히며 사유한 연구의 결과물이었다. <철학의 고전>을 통해 자세히 접한 <자본론>은 간접적인 경로로 얻어들은 내용과 일치하기도 했지만, 교양 인문학과 대중 매체로 막연히 알고 있던 이미지와 사뭇 다른 내용도 있어 흥미로웠다.

 

이전의 철학들이 스타일과 추구하는 바는 달라도 데카르트와 칸트, 몽테뉴와 파스칼, 쇼펜하우어까지 형이상학적이고 개인의 각성을 요구하는 이론들이란 점에선 공통적이었다. 그에 반해 <자본론>은 개념을 바탕으로 이론을 실천적 도구로, 정치적 투쟁으로 사용하라는 맹렬한 촉구를 하는 저서이다. 단순히 개인의 깨달음을 넘어 만국의 노동자의 단결을 선동하는 작품이다.

 

산업 자본주의 사회가 도래한 이후, 인간은 노동에서 소외되었고 이는 자본가의 착취로 발전했으며, 노동이 상품 가치로 전락했다고 마르크스는 주장했다. 마르크스에게 역사의 추동력은 물질적인 과정, 다시 말해 한 사회의 경제적 과정에 있다. 그리하여 ‘의식’이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

 

인간이 자기 실현을 하기 위해 자유로우면서 창조적인 노동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현재는 노동력을 파는 것에 기초한 임금 노동이 인간을 소외시키는 기본 뿌리가 되었다.

 

이전 저작인 <공산당 선언>에서 마르크스는 엥겔스와 함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부르짖었고, 역사란 각 시대마다 지배하는 계급과 지배받는 계급 사이의 투쟁의 결과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자본론>은 단순한 책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미건조하지도 않다. 타고난 논쟁가이면서 저널리즘에 정통했던 마르크스는 생생하게 현대를 비판하고 문학적인 필치로 압도적인 설득력을 보여주었다.

 

노동계급은 노동력 외에는 가진 것이 없는 반면, 자본가는 공장, 기계, 원료, 노동력의 모든 생산 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현실은 잘못이 있다. 그래서 사회적 부가 공정히 분배되기 위해 생산 수단에 대한 사적인 소유는 폐지되어야 한다는 게 마르크스의 생각이었다. 단적으로 <자본론>의 결론은 자본주의는 항상 위기를 생산해내는 필요악의 체제이기에 반드시 무너진다는 종말론을 예언하며 끝난다.

 

물론 우리 모두는 현재 마르크스와 레닌 등의 이념을 따라 건설된 국가들이 대부분 사라진 것을 직접 보았다. 노동계급의 혁명을 최상의 목표로 삼은 마르크스의 사상은 아쉽게도 공산주의 국가에서 독재가 만연하는 부작용은 예견하지 못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현재의 자본주의가 마르크시즘의 패착을 완벽하게 극복한 체제인 것은 또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단지 그나마 최선의 나은 제도인 것일 뿐.

 

<정의란 무엇인가>를 통해 국내에도 익숙하게 소개된 존 롤스의 <정의론>(1971)은 <철학의 고전>이 마지막으로 주목하는 철학책이다. <정의론>은 계몽주의 시대에 생겨난 정의에 대한 이해 즉 자유, 평등, 박애로 표명되었던 것을 새롭게 연구하였다. 롤스는 인종, 출신, 종교, 그 이외의 것들에 근거를 둔 소위 ‘출생’에 근거한 불평등을 해소해야한다는 인식에서 시작한다. 그것이 정의(正義)에 대한 중심 테제이고 사회적 기득권의 분배에 질문을 던지는 작업을 계속했다. 최종적으로 정의로운 사회의 제도 문제는 정치와 사회 철학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최대 다수의 최대 이익’의 벤담 공리주의에서 롤스가 발견한 맹점은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소수가 매우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다수가 거의 소유한 것이 없는 경우, 노예 노동을 통해 전체의 행복을 증가시킬 수 있을 경우가 용인되는 일이 벌어진다. 롤스에게 정의는 모든 시민들의 존엄성이 (이른바) 전체의 행복에 의해서 침해될 수 없어야만 성립한다고 봤다. 사회적 약자의 처지를 항상 고려하는 ‘분배의 정의’, 그리고 모든 시민에게 교육과 사회 참여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기회의 정의’가 주된 내용이다.

 

롤스는 이런 가정을 해본다. 만약 내가 2개의 사회 가운데 하나를 결정해야 한다고 치자. 첫째로 내가 매우 부자가 될 수는 있지만, 빈곤으로 추락할 수도 있는 사회와, 다른 한편으로 재산의 양이 제한되어 있지만, 가난한 자를 위해 사회적 안전 장치가 훌륭하게 마련된 사회 중에서 하나를 결정한다면? 나는 후자의 사회를 결정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최상의 사회적인 안전 장치가 보장되는 사회가 선택될 수 있다는 것.

 

자유, 사회적 정의, 경제적 효율성에 있어 우선 순위를 정해야 한다면 롤스는 1. 자유, 2. 사회적 정의, 마지막으로 경제적 성장이라고 주장했다. 자유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자 전제는 믿음, 양심, 언론, 집회의 자유가 헌법은 물론 현실에서 보장되는 것이다. 또한 피부, 출신, 사회적 위치같은 이유로 차별되는 일은 완전히 철폐되어야 한다.

만일 정의의 원칙들이 한 사회 안에서 지속적으로 침해된다면 시민은 시민 불복종의 권리를 가질 수 있다고 밝혔다. 존 롤스에게 궁극적으로 시민의 자유권은 국가의 요구에 맞서 우선권을 가진다.

 

정의감은 인간의 기본 덕목이고, 타인들을 마찬가지로 동등한 권리를 가진 주체로 다루게 하며, 사람들의 개인권을 침해할 수 없는 것으로 보게 할 수 있다. 2013년에 볼 때는 북유럽과 서구 민주주의 국가에서 실천되고 있는 이론이라 자연스러워 보이는데, 롤스가 60년대에 정의론을 구상하고 1971년에 발표했음을 주지하면 앞서가는 정치철학이었다.

이는 넓게는 사회복지로도 지평을 넓혔고, 그래서 <정의론>의 발표 후 유럽에서는 보편적인 사상으로 빠르고 광범위하게 수용되었다. 반면에 미국에서는 꽤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는데 특히 롤스의 사회복지적인 관점이 미합중국의 국가관과 대립하는 지점들이 논란의 민감한 부분이었다고 한다.

 

현대에 와서 철학자도 쇼맨쉽과 마케팅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이 학계를 주도하는 현상이 벌어졌는데, 존 롤스는 철학이 아닌 주변적인 요란한 지식 산업과 거리를 두고 조용히 연구에 몰두하는 타입이었다. 70년대와 80년대에 주로 수용되었을 그의 정의론이 2000년대에 미국에서 다시 부상하고, 우리나라에서도 새롭게 조명을 받았다는 것에는 분명 유행을 넘어선 어떤 절실한 필요가 있었음을 이 책을 통해 다시 한번 느끼게 됐다.

 

이밖에 아우구스티누스, 칸트와 니체, 비트겐슈타인, 하이데거, 칼 포퍼에 대해 독자들이 객관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책은 구성되어 있었다.

겉핡기식이 아닌, 작가가 중요하게 여기는 주제의식들을 중심으로, 철학자와 그들의 대표작을 전문가의 친절하고 정확한 해설로 탐험할 수 있었던 <철학의 고전>이었다.

 

로베르트 짐머가 고른 16명만이 철학에 입문할 때 알아야 할 철학자인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리고 혹은 어떤 철학자의 작품들에는 동의할 수 없는 요소들이 내게도 있었다. 그렇지만, 철학의 세계에 흠뻑 빠져드는 여행에서 믿을 수 있는 지도로써 훌륭한 고전 안내서였다고 감히 평가하고 싶다.

 

▷리뷰어 은령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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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환 감독의 회심의 새 영화, [ 화이 : 괴물을 삼킨 아이 ] | 영화가 왔네 2013-10-09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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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화이 : 괴물을 삼킨 아이(디지털)

장준환
한국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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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없음

 

 

보기 전에 그렇게 막 설레이고 훈훈한 예감이 드는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장준환 감독이란 사람을, 영화인들이나 저널에게서 오랫동안 누누히 들어와서, 도대체 어떤 연출을 보여주는 감독일지 궁금증에 느즈막한 오후, 영화를 예매하고 보러갔습니다.

 

사실 <소원>이라는 영화의 여운에 여전히 굉장히 빠져있고, 다시 보고 싶기도 한 요즘이었어서 청소년관람불가인 <화이:괴물을 삼킨 아이>를 선뜻 보러 갈만큼 모처럼의 공휴일 한글날을 ‘무겁게’ 보내고 싶지 않았는데요. 의외로 완전 매진사례인 극장안의 풍경에 기대감을 조금은 더 얹고 장준환의 2번째 영화와의 만남을 가지게 되었네요.

 

 

저는 몇 달전부터 <화이:괴물을 삼킨 아이>(이하 ‘화이’로 줄이겠습니다)의 크랭크 업 소식을 들었고 몇 장면의 스틸들, 여전히 형형한 아우라 뿜는 김윤석 배우, 대세라는 여진구의 역할에 궁금증을 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외에는 그다지 뭘 알아보려고 검색하거나 하진 않았어서, 백지 상태로 감상을 시작했지요. 혹시 저와 같은 무방비의, 열린 마음으로 보실 분들을 위해 자세한 스토리를 거론하는 것은 현 시점에서는 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아직 영화 전단지를 보지 못했지만, 개봉 첫 주차 느낌으로 말씀드리면^^ ‘화이’는 친아버지 밑에서 자라지 못한 환경으로 시작부터 나옵니다. 그리고 여러 아저씨들과 7곱살때부터 키워져서, 김윤석을 비롯한 남자들을 모두 ‘아빠’라 부르고 있습니다.

 

진성(장현성)과 석태(김윤석)가 리더 역할을 하고 남자들은 강도, 탈취, 유괴와 협박, 심지어 살인까지 불사하며 살아온 일종의 불량배 조직입니다. 그들을 규정하고 정의내리기가 쉽지는 않지만, 작은 조직폭력배 집단이라 보면 될 텐데, 독특한 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파주에서 교외에서 분재 사업을 하면서, ‘음지 세계’네트워크를 갖고 있는 상태에서, 의뢰받는 형식으로 ‘일’을 맡아서 온갖 험한 일을 하며 적지 않은 현금을 벌며, 은둔해 살고 있죠.

 

 

진성과 석태는 화이를 둘러싸고 자잘하지만 사뭇 다른 양육관을 갖고 있었고, 험한 일의 강도가 점점 커감에 따라, 그들의 의견 대립은 심화됩니다. 모든 ‘아빠’들이 각자 나름대로 화이를 아끼는데, 고등학생이 된 화이를 진성은 더 이상은 ‘이 세계’와 관련되어선 안되겠다 싶어 유학 보낼 준비를 하고, 석태는 그런 진성이 못 마땅할 뿐입니다.


엄청난 대기업 회장의, 재개발 철거 사업에서 청부살인 일을 맡게된 이들은 화이를 현장에 데려가고, 뜻하지 않은 살해 현장을 화이에게 목격하게 하는 석태. 아빠들의 애정을 듬뿍 받으며, 일견은 평범하고 안전하게 살아온 화이는, 가끔 정신착란으로 보게되던 괴물을 다시 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비극과 피 칠갑의 현장을 관객에게 보여줍니다.

 

영화는 무척 잔인합니다. 온갖 살해 장면의 강도가 세고, 여러 사람이 많이 죽어나가고, 이야기의 주제 의식도 결코 가볍지 않아요. 박훈정의 <신세계>도 꽤나 잔혹했지만, <화이>는 그보다 더욱 심하더군요. <신세계>의 인물들이 친구 관계에서 배신과 음모를 펼쳤다면, <화이>는 유사 가족이지만 서로 오랫동안 정을 주고 받으며 지내온 부자 관계를 보여줍니다.

 

 

믿고 의지했던 아버지를 의심하기 시작하고, 친부에 대한 숨겨진 진실을 알게 되고, 거대 기업의 악랄한 음모가 겹치면서 복합적인 서스펜스가 작동됩니다.


흔히 니체의 경구가 여러 영화에서 인용되어 왔죠.“괴물과 마주하면 자신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정확한진 모르겠는데 이러한 문장입니다. 주인공 화이(여진구)는 실제로 괴물의 환상을 보는데, 석태(김윤석)이 나중에 무서우면서도 진지한 논조로 이렇게 충고하는 씬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괴물이던 귀신이던 피하지 말고 똑바로 대면해야 돼. 그래야 없어지는 거야”

 

 

여진구의 탁월하며 안정적인 연기력이 놀라움을 선사한 <화이>였지만, 제게는 우선적으로 김윤석의 무심하고 악에 받친 연기가 너무도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타짜>로 스타덤에 오르고, <도둑들>과 <완득이>로 확실한 흥행 배우로 자리매김했을 때도, 좋긴 했지만 이런 무시무시한 연기를 할 거라고는 미처 몰랐어요. 김윤석의 연기 변신이라면 변신의 모습, 그 깊은 눈빛 연기, 정말 놀랍습니다.


장준환의 연출, 그가 보여주고자 했고, 결국 성공하고야 만 <화이>에 저는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김지운의 <악마를 보았다>를 보고 실망감이 느껴졌었는데, <화이:괴물을 삼킨 아이>는 충격적인 비쥬얼, 쇼킹한 소재에 가려질 수 없는, 감독이 전하고자 한 메시지가 분명 있었습니다.

 

어쨌든 웰메이드이기 때문에, 꾸준한 관객들이 극장을 찾을 것이라 여겨지지만, 어쩌면 당혹감을 표할 분도 있을 것 같고, 불평섞인 비난도 감수할 것 같은 영화이기도 합니다.

 

이 10월의 멋진 날들에 쉽사리 사람들에게 <화이>를 부담없이 추천하지는, 저도 못할 듯 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깊숙한 내면에서 충격을 받고, 느낀 점들은 김윤석 캐릭터에 대한 것이어서, 그 캐릭터를 같이 느껴보시라고 권하질 못하겠기 때문입니다. 밝은 얘기가 절대 아니고, 어둠과 경악스런 인간성의 일면을 마주해야 하는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한창 봄인 5월에 보았던 송해성의 <고령화 가족>이, 콩가루 가족 이야기지만 알 수 없는 따뜻함과 힘을 전달 받았었는데요. 그와는 정반대의 스타일이로, 가족에 대해 밑바닥까지 가서, 온 몸으로 흔들리면서, 가족의 의미를 고민해 보게 하는 영화 <화이 : 괴물을 삼킨 아이>였습니다.


반전 요소들이 특히 중반부를 넘어서 많이 있고, 결말은 더더욱 예측 불가능하기 때문에, 혹시 영화 보실 분들은 신경쓰시고 보러 가신다면 더욱 짜임새있고 밀도있는 감상이 되실 것 같습니다.

 

파워문화블로거

10/6~10.12 주간mission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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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여진구 군은, 이 역할의 후폭풍 후유증이 있지 않을까, 염려가 살짝 될 만큼,

정말 한국영화에서 완전히 새로 보는, 어렵고 충격적인 캐릭터였습니다. ㅜ

 

(은령써니 리뷰어)

 

 

쿠엔틴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처럼, 얽히고 설키는 폭력이 난무하던 후반부 장면.

 

 

신하균씨와 박희순씨의 저 흐믓해 하는 표정..저의 감상 느낌도 약간은 그러한 점이 있었습니다.  

잔인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아니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굳은 생각이 들던..

깊은 고민을 하게 하는 영화였네요. +_+ (이런 영화는 정말이지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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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원 ] 성숙한 시선, 절제된 감정 그리고 깊은 마음의 영화 | 영화가 왔네 2013-10-04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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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소원

이준익
한국 | 2013년 10월

영화     구매하기

한 달 전 감상하고 리뷰도 올린 <블라인드 사이드>를 볼 때가 떠올랐다. 그저 주인공들의 표정, 태도, 몇가지 대사들과 상황만으로도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던 경험. 입양된 흑인 가족과 그 백인 가정이 진정으로 마음의 문을 여는 과정을 점진적으로 보여줬던 그 작품을 만난 것이 좋았었다.

 

그런데 <소원>은 실제 가족의 이야기이다. 어린아이가 나와서 자극을 받아 감동받은 것이 아니다. 소원이의 연기가, 그 표정과 마음의 표현들이, 순진한 것도 아니고 과장된 것이 아닌 모습을 보여준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비가 내리던 학교 가던 길 아침에 소원이는 낯선 아저씨한테 끌려가 끔찍한 폭행을 당한다. 그 일로 생사를 오 갈 정도로 다친 소원이는 장기를 들어내고 인공 항문을 평생 사용해야 하는 치명적인 아픔을 당했다. 청천벽력과 같은 사건을 겪은 단란한 부부였던 동훈(설경구)과 미희(엄지원)는, 생업을 포기하고 아이를 병 간호하며, 몸은 물론 마음에 그리고 정신에 커다란 상처를 입은 딸 소원이를 예전처럼 평범한 아이로 만들기 위해 전력을 다하기 시작한다.

 

 

정말, 눈물 종합 셋트였던 것 같다. 같이 본 사람도 가끔씩 눈물을 훔치는 걸 느낄 수 있었고, 앞 뒤 좌우 주변에서 훌쩍임과 한숨 소리들이 영화 상영하는 내내 들려 왔다.

 

주인공 아빠, 엄마처럼 분노하고 억울해서 눈이 충혈되고, 아저씨가 우산을 씌워달라고 해서 선뜻 씌워준 선의가 무참한 결과로 돌아와 슬프고, 피도 눈물도 없는 언론사들의 신상 털기적인 취재 행태가 싫고, 주인공 친구 부부로 나오는 배우들의 진정성있는 연기가 설득력과 공감대를 자아 냈다.

 

얼마전 본 미국 인디 영화에서, 종말이 다가와도 일상을 웃음으로 영위하던 가정부 에피소드에 잔잔한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다. 그런데 이준익의 <소원>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은 소소한 장면이 있었다. 소원이가 절대절명의 위험한 순간을 거치고 나서, 심신의 치료를 이어갈 때 '코코몽' 캐릭터 인형으로 실어증에 걸린 소원이를 즐겁게 해주는 씬이 있다. 거기서 코코몽 인형 탈을 대여하는 것이 수십만원에서 백만원대 비용이 들었는데, 어떻게든 대여하려고 흥정하던 동현(설경구)에게 사장이 자기가 안쓰는 낡은 인형이라며 다 쓰고 돌려주시라고 하는 장면.

그런게 장사하는 사람 처지에서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데, 필자는 그런 평범한 듯한 에피소드가, 다른 대단한 이야기보다도 마음 깊이 와 닿았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단연 이준익 감독의 절묘한 연출력에 있는 것 같다. <라디오 스타>에서 연예인-매니저를 뛰어 넘어 인간적인 관계를 뭉클하게 묘사했던 그의 장기는, 신파라고 할 수도 있는 진한 휴머니즘적인 면을 원숙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지난 몇 년동안, 자식이 어떤 피해를 당해 들끓는 아버지, 어머니의 이야기가 꽤 나왔는데, 그처럼 분노심과 사법 체계의 맹점으로 인한 제2, 제3의 고통을 받는 피해자 가족의 스토리도 빠짐없이 리얼하게 나온다.

 

아마 대부분의 관객이 관찰자 시점일 것이기에, 주인공의 주변 친구, 지인들의 역할이 어쩌면 오히려 더 가장 시사점을 던져 주는 게 이러한 장르, 소재 영화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라미란과 김상호의 태도와 대사들은 그동안 같은 내용의 영화들 중에서 제일 와 닿는 연기여서 더욱 영화에 빠져들 수 있었다.

 

 

소원(이레 아역배우)이가 나중에 엄마에게 귀여운 동생이 태어나고, 그 아이의 옆에서 "너, 태어나길 잘했다"고 말하는 장면이 마음을 안심시켜 주는 엔딩이었다.

 

집 안으로 햇살이 가득 번져 들어오는 가운데, 아빠는 롯데 야구 경기를 보는데 빠져있고, 엄마는 아기를 돌보는 속에서 소원이가 일상적인 새 하루를 보내는 모습이 무척 희망적이었다.

평소에 희망이란 말만큼이나 좋아하던 단어, '소망'. 그것을 제시하는 결론이 마음에 들었고, 개인적으로 소중하게 아끼는 장면으로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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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9~ 10월 5일 주간mission 리뷰

 

 

이준익 감독의 반가운 복귀작

<소원>

리뷰

 

 

by은령써니 리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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