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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24블로그축제] 봉준호의 영화세계 written by 박보혜 | 샤론의 꽃 영화 이야기 2010-06-13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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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상상을 넘나드는 한국적 페이소스와 관습 전복의 미학

 


 

 

한국영화는 <쉬리>를 계기로 완성도와 흥행성 양자에 있어 폭발적인 잠재력을 영화계 안팎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다양한 멜로 영화와 액션, 사극, 코미디 등 전 장르에서 그 전까지 쌓여온 ‘충무로’의 실력꾼들의 종합예술인 우리 영화는 사회와 개인에 대한 다양한 메시지를 전달해 왔다. 노장 임권택이 한국적인 정서를 형상화해 해외에서부터 인정받았고, 이창동이 뚝심있는 비판의식으로 영화인의 양심을 보여주었다면 박찬욱은 독보적인 매니아적 스타일의 비주류적 감성으로써 관객과 소통하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그 가운데 또다른 시선으로 꾸준히 의미있는 작업을 해온 봉준호 감독의 2009년작 <마더>는 그의 10년간의 영화세계를 아우르며 새로운 화두를 던지고 있는데 이제부터 <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 <괴물>, 그리고 <마더>를 읽고자 한다. (해외 합작 프로젝트인 <도쿄>의 에피소드는 옴니버스 영화의 한 부분인 관계로 본 에세이에서는 제외한다.)

 


 

 

개봉 당시 <플란다스의 개>(1999)는 그렇게 큰 화제작은 아니었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재학 시절에 만든 단편영화(<지릴멸렬>)에서 선보인 지식인에 대한 재치있는 묘사와 재기발랄함을 극장판으로 확장한 장편영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다시 곱씹어본다면 알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배두나가 연기한 20대의 아파트 관리사무소직원 박현남과 <마더>에서 장애가 있는 아들을 돌보는 50대 여성 김혜자와의 공통성이다.

<마더>에서 배우 김혜자는 극중 캐릭터 이름도 없이 ‘도준이 엄마’로만 나오고 있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그간 한국영화에서 비중있게 다루어지지 않은 가족구성원인 어머니라는 존재를 노골적으로 전면에 내세워 제작됐다. 아빠가 없고, 아들이 정신지체가 있긴 하지만 다른 집처럼 평범한 모자(母子)지간이었던 등장인물들에게 사건이 터진다.

봉준호의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는 아파트 단지라는 일상적인 공간에서 무료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관리소 아가씨 현남(배두나)과 교수가 되지 못한 고학력 백수 윤주(이성재)의 만남으로 이야기를 연다. 요즘으로 치면 비정규직에 가까운 젊은 여성과 박사 학위를 갖고 있는 유부남이 알고지내는 일은 사실 비현실적이지만, 강아지라는 매개체를 통해 서로 친해지고 계급을 초월한 이 둘의 관계는 독특한 웃음을 만들어낸다. 동네에서 주민이 키우는 개들이 연달아 실종되고 죽은채 발견되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데 그 중 한 건은 현실에 불만을 품고있던 윤주의 짓이었다. 베스트 프렌드와 옥상에서 망원경을 가지고 놀다가 이 범행현장을 포착한 현남은 개를 훔쳐서 살해하는 파렴치한을 쫒아가고 한바탕 추격전을 치르지만 붙잡지 못하자 분해한다. <마더>에서 약초판매 일을 하고 있는 김혜자는 늘 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봐야 하고 도준의 친구인 진태를 양아치 취급하며 사귀지 말라고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그러던 여느 평화로운 하루에 주인공 엄마의 아들이 같은 지역에 사는 여고생을 살인했다는 혐의로 잡히는 청천벽력같은 일이 벌어지고 엄마는 망연자실해하면서도 이를 극구 부인한다. 피해자의 장례식에까지 가서 “내 아들이 안그랬다”며 뻔뻔하고 당당하게 외쳐대서 조문객과 유족에게 머리채를 휘어잡히고야 마는 ‘마더’는 따지고보면 자식에 대해 끝없는 보호욕을 지닌 대한민국 모성애 그 자체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들 중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던 <살인의 추억>(2003)과 <괴물>(2006)에서의 히로인들은 미미했었는데 <플란다스의 개>에서만큼은 현남의 개성이 스크린을 지배했고, 최신작 <마더>는 10년만에 새로운 역할로서 진화한 여성성이자 어머니상을 창조해내고자 한 것이다. 또한 불의한 일이 터지고 그 일을 목도한 작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추리극의 형식도 두 작품의 공통분모이다.

사회의 기득권 세력의 씁쓸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씬이 모두에 있는데 <플란다스의 개>에서 윤주가 1,500만원의 뇌물을 바쳐야했던 대학 학장의 룸싸롱 장면이 그것이다. 이는 곧 <마더>에서 아들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달라고 찾아간 지방의 유력 변호사가 도준을 정신병력으로 적당히 병원에서 몇 년만 살게하자는 편의주의적인 발상만 거들먹거려서 무죄임을 굳게 믿는 김혜자를 분노케하는 노래방 술파티 에피소드와 자연스럽게 겹친다. 현남이 너무 정의로와 직장에서 해고되고 숲속을 산책하는 엔딩의 <플란다스의 개>와 <마더>에서 김혜자가 치명적인 비밀을 간직한채 관광버스춤을 추는 설정의 결말은, 다른듯 비슷한 묘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되짚어 보아도 이 새로운 장편 시트콤 영화는 도저히 108분의 드라마를 이끌고갈 만한 극적인 장치가 많지 않은 작품이다. <플란다스의 개>가 개봉한 해 무렵 한국영화계에는 홍상수의 신선한 영화 화법이 상당히 평단과 관객을 놀래켰던 때이다. 그런 면에서 어쩌면 홍상수처럼 현실 속에 숨어있는 웃지못할 작은 일들을 허구화해 삶을 고찰하게 만드는 신(新) 장르의 봉준호표 블랙 코미디의 시발점이라고 그 시절을 이름 붙여줄수 있다. 유명한 애니메이션이자 노래명인 ‘플란다스의 개’를 비유적으로 사용한 본 텍스트는 세 개의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꼬마아이의 ‘삔돌이’와 할머니의 ‘아가’, 그리고 주인공인 고윤주의 ‘순자’ 이렇게 세 마리의 애완견이 차례로 실종되는 일이 한 아파트에서 일어난다는 가정 하에서다. 겉으로 보기엔 인문대 대학원 박사과정의 하이 클래스인 윤주는 “교수가 되는 일은 하늘이 결정하는” 것이라며 초라한 일상을 영위하다가 아파트의 개소리에 히스테리가 치솟는다. 충동적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할 방법으로 문제의 강아지를 납치해 없애지만 알고보니 짖었던 개가 아님을 알고 다시 견(犬) 소탕 작전을 벌인다. 편하긴 하지만 신날 일도 없는 관리사무실에서 은행강도를 맨손으로 때려잡은 새마을금고직원을 동경하는 박현남은 연이어 강아지를 찾는 전단지문제로 방문한 주민들의 사연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인다.

 

신인 감독의 주목할만한 처녀작이던 <플란다스의 개>는 컬트(cult)이며 놀랍게 지

금 여기 이 시대와 조응(照應)하고 있기도 하다. 허울만 멀쩡한 시간강사의 치열한 교수되기 작전 대소동과 스무살 즈음 단조로운 일 속에서 직장생활의 애환을 온몸으로 겪는 청년의 묘사에서 특히 그러했다. 하지만 엄연히 상업영화를 표방하고 제작, 배급된 대중작(大衆作)에서 경비아저씨와 지하실 노숙자의 생경한 에피소드들은 나열에 그치고 말았다. 보는 이는 이모 저모 이성과 감성의 상상력을 발동해보지만 전체 플롯안에서 저러한 설정들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해석하기가 쉽지만은 않다. 아예 밑바닥 인생을 그린다거나 대놓고 웃자고 만들었다면 그렇게 밀어붙였어야 하는데 치와와 할머니가 죽으면서 현남에게 옥상의 무말랭이를 가져가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대목은 지나친 유머다. 은밀하게 학계에서 관행처럼 행해지는 ‘떡값’제공으로 교수가 된 윤주와 나름대로 소신있는 일을 했지만 낙오자로 남은 현남의 대비로 감독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소시민이자 중산층으로 같은 도시 주거 공간에서 살아갔던 그들은 순식간의 사이에 주어진 상황 선택으로 신분을 상승시키거나 현 위치를 박탈당하는 서로 다른 길에 놓인다. 왠만해서는 윤주와 현남이 앞으로 재회할 일은 없을 것이다.

 

 


 

 

한편, <마더>를 보고나서 가장 많이 떠오르는 작품은 역시 <살인의 추억>일 것이다. 우선 배경이 낙후된 느낌을 주는 시골이고 살인이 발생하며 도준이 유력한 용의자이긴 하지만 그것도 확신할순 없는 강력사건이 중심 소재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리고 할머니와 단둘이 사는 여고생 즉 환경적, 성적으로 취약한 대상이 동기가 불확실하게 희생당하는 줄거리는 <살인의 추억>를 보면서 불편하고 불쾌하기조차 했던 관람 경험을 복기시킨다. <플란다스의 개>가 이웃간의 커뮤니케이션을 다뤘다면 <살인의 추억>은 여기에서 조금더 나아가 무차별적인 폭력과 사회와의 연관성을 고찰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마더>에서 약간은 당황함을 주기도 하는 김혜자의 춤 쇼트가 광활한 들판을 배경으로 하고 있듯 <살인의 추억>의 오프닝도 화성 농촌의 초록색 전답 속에서 섬뜩한 앞으로의 상황을 예견하는 듯 했다. 쉽게 말하면 연쇄살인범을 추적하는 형사 박두만(송강호)은 - 성이 다르지만 - 경찰과 법(法)이 낙인찍어버린 아들이 아닌 진범을 찾아나서는 엄마 김혜자로 오버랩된다. 물론 미세한 차이는 있다. <살인의 추억>은 헐리우드적 수사극의 형식을 띄고 냉소적이긴 해도 곳곳에 코미디적 요소가 있는 반면 <마더>는 그보단 필름 느와르와 공포영화에 가까우며 지방 소도시의 추악한 이면을 깊이있게 작가주의적으로 파고들어갔다는 점이다.

 리얼리즘과 표현주의가 절묘하게 결합된 첫 영화 <플란다스의 개>가 다소 정체성 규정이 어려웠다면 이후 봉 감독이 6년에 걸쳐 발표한 <살인의 추억>과 <괴물>은 뚜렷한 사실주의 작가로서의 그의 면모를 보여준다.

 

요몇년간 과학수사대의 활약을 그린 미국드라마들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었는데 그 전에 발표된 <살인의 추억>은 한국인들의 기억 저 편에서 외상(trauma)을 남기고 숨어있던 미해결 살인사건을 환기시켜 큰 파장을 일으켰었다. 특히 1980년대 중반 경기도의 어느 후미진 도시의 초상을 완벽하게 고증하면서 간접적으로 전두환 정권의 일방적인 통치 지배가 개념없는 살인마의 범행을 지속시키는 한가지 이유였음을 암시하기도 했다. 이 때 형식과 기술부분에서 실력을 발휘한 분장, 미술 파트의 스탭들은 그대로 <마더>로 이동하여, 한 소녀의 죽음때문에 공포스럽게 돌변해가는 마을의 분위기를 집요하게 포착해 내기에 이르렀다.

 

<살인의 추억>에서 서태윤 형사(김상경)가 여러 가지 물증상 범인임이 유력한 박현규(박해일)가 단지 유전자 검사 서류 상 살인자가 아니라는 것에 거의 미쳐버려서 자신의 총으로 그를 쏴버리려고 했는데, 그가 형사라는 신분임에도 어쩌면 현실에선 광기(狂氣)나 우발적인 흥분으로 인해 살인자로 변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것에 주목해보자. 이 가상 결론은 놀랍게도 <마더>에서 아들에 대한 무조건적 믿음으로 의심스런 인물들을 스스로 몰래 탐문 조사 하던 중 고물상 노인이 도준의 범행을 본 일을 밝히자 김혜자가 그 사람을 죽여버리는 영화의 충격적이고 살풍경한 반전과 일맥상통한다.

하나 더 살펴보자. 박두만은 20여년뒤 사업가가 되어 예전의 기억을 더듬고자 찾았던 현장에서 꼬마를 통해 공소시효가 지나 자유로운 살인자가 아직도 살아있음을 알고는 전율하며 정면을 쳐다본다. 마치 관객들에게 지금 이 순간에도 극악무도한 일을 저지르고 죗값을 치르지 못한 악인이 버젓이 동시대를 함께 호흡하는 부조리한 현실을 깨달으라는 듯이 말이다. 이는 김혜자가 어머니의 이름으로 또 나쁜 놈을 찾고자 스스로의 힘으로 일을 해결하려다 진실보다는 모성애에 이끌려 자신마저 다른 죄를 저지르고 이를 기도원 종팔이에게 떠넘기고 묻어버리는 결말의 허망함과 같다.

 

봉준호의 네 작품은 각각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눌수 있는데 초기작 <플란다스의 개>와 이후 3년만에 발표한 <살인의 추억>은 연극적이고, 특수효과가 중요했던 <괴물>과 최신작 <마더>는 모두 앞의 두 작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욱 영화적이라고 볼 수 있다. <플란다스의 개>와 전혀 다른 영화지만 ‘작가’ 봉준호의 무의식적인 관심사는 <살인의 추억>에도 나오는데 바로 지하에 대한 감각이다. 전작이 우리가 평범하게 살아가는 아파트라는 안전 지대에서조차 소외된 영역인 지하 보일러실을 예민한 관점으로 보여줬듯, <살인의 추억>은 편안한 황금 들녘 한가운데의 배수구 아래 감춰진 곳에서 서사가 시작하는 것이다. 실험적 성격이 강했던 첫 작품이 업계에서 인정을 받은 후 본격적으로 규모있는 작업이 가능해진 감독은 자신만의 세계를 이해하는 페르소나로 송강호라는 배우를 만나 완벽에 가깝게 과거 군사독재 시절의 페이소스를 객석으로 전이시키는데 성공했다. 확실히 치밀한 디테일의 미장센은 몇 년이 흐른 지금의 수준에서 봐도 탁월할만큼 세트, 조명, 로케이션, 그리고 프로덕션디자인과 의상이 시대적 상황을 영상으로 재현해냈다. 반면에 지적할 수 있는 점은 각본까지 맡은 봉준호의 이러한 연출 스타일이 치명적인 도덕적 오류도 함께 안고 있다는 것인데, 이는 스릴러의 한가지 특성이다. 영화의 시퀀스 연결방식들은 마치 관객이 화면 속 형사의 심정이 되도록 강렬한 흡입력을 발휘하고 여성 입장으로선 피해를 입을수 있다는 끔찍한 감정이입의 경험을 겪는다. 물론 일회적인 TV다큐물이나 특정한 세력이 주체인 영화가 아니기에 여러 인물의 시점을 담은 것을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범죄의 컨벤션이 진행되고 강화될수록 점점 엽기적 행각들의 조마조마한 발생과 리얼한 현장을 제목처럼 추억하고 즐기게 하는 듯한 점도 부인할 수 없지 않은가? 80년대 후반부에는 전대미문이었던 연쇄 살인 사건의 실제 전개도를 적어도 2003년의 시각에서 그렇게 공포영화 장르화하는 것은 아직 고통스러워 할 희생자 유족들을 생각한다면 잔인하고 어쩌면 시기상조일수 있기 때문이다. 작품을 통틀어서 여성의 역할이 지극히 미미하며 유약하고 무기력하게 그려지는 것만큼은 정말 수긍할 수 없다. 게다가 공소시효 종료 사건으로 일단락되고 중산층에 진입해 안정되게 사는 현재의 박두만의 가족으로서도, 끔찍한 과거에 여중생 대신 아내 곽설영(전미선)이 대신 희생될수 있었기에 더욱 오싹하고 결코 편안한 마음을 남겨주지 못하는 결론의 <살인의 추억>이다.


 


 

<살인의 추억>이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실화에 바탕을 두어 감상하기가 부담스러웠다면, 지극히 인공적인 가상의 피조물을 창조해 헐리웃의 최첨단 기술력을 끌어들여 영화화함으로써 비극적이긴 하지만 몰입하고 느낄수 있는 여지를 더 많이 준 <괴물>. 이제 이 최고의 문제작을 살펴볼 차례다. <플란다스의 개>와 <살인의 추억>이 각각 코미디와 스릴러라는 B급 영화스러운 장르였었는데 2006년 1,300만명 동원 기록으로 블록버스터가 되버린 <괴물>은 괴수영화와 재난영화로써 우리 사회에 한국영화이자 영상매체의 대안으로 자리매김한 텍스트이다. <살인의 추억>에서 박두만은 서태윤 형사(김상경)에게 묻는다. “서울에서는 이런 일 자주 일어나나?” <괴물>은 한국의 수도 서울의 한강을 배경으로 같은 주연 배역에 송강호를 다시 한번 불러내서 봉준호의 의식 속 또 다른 자아를 대중들로 하여금 분석하게 했던 수작(秀作)이다. 또한 여학생이 충격적인 사태의 한가운데 있거나 핵심적인 연민의 대상이 되는 내러티브 코드들이 <살인의 추억>에 이어 <괴물>에서 본격적인 모티브로써 중심 담론으로 떠올랐다. <괴물>의 강두(송강호)는 괴생명체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평범한 가장이었지만 딸을 그 무시무시한 존재에게 납치당하면서 가족의 비정상성이 서서히 드러난다.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은 강두의 퍼스낼리티가 실속없고 아내와는 이혼했으며 동생 남일(박해일), 남주(배두나)와는 줄곧 감정적으로 거리감을 유지하고 지내온 관계였다는 뜻에서의 판단이다.

 

봉준호는 여태까지의 자신의 창작에서 미국에 대한 스스로의 정치적 성향을 거의 드러내지 않고 영화작업을 해왔었다. 다만 <살인의 추억>에서 형사들의 열정만으로는 해결할수 없는 과학수사를 위해 미국에 유전자 지문의뢰서를 보내 마냥 기다려야만 하는 그들의 애환을 후반부에 노정한 것이 다였다. 그보다는 언론의 무책임성을 꼬집고 지식인의 위선을 조롱함으로써 사회에 대한 예술가의 비판적 태도로 관람자들의 양심을 일깨우는 방식이었다. 그가 어렸을 때부터 꿈꾸어온, 괴물이 한강에 등장하는 기이한 공상에서 출발했으나 특수효과가 반 이상을 차지하는 거대작으로 탄생한 <괴물>은 미군부대 용산기지의 영안실 씬으로 화면을 연다. 아무리 훌륭한 거장의 영화라도 A라는 장면이 B를 상징한다고 도식화하는 평가엔 늘 무리가 따르지만 누가봐도 봉준호의 이런 드라마 투르기는 반미(反美)색 짙은 과감한 선택임에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봉준호가 마이클 무어인건 아니기에, 주한 미군 병원에서 포름알데히드를 세면대로 버리라는 천인공노할 명령을 내리지만 엄밀히는 직접 하수구에 쏟은 이는 우리 국민이고, 다른 외국영화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에 살짝 비판을 가하긴 하지만 오히려 방점은 대한민국의 무능함에 두고 있다. 2002년, 잠실대로변에서 기형 생명체를 낚시꾼들이 발견하고 4년후 한강 둔치에서 매점을 하고 있던 강두 가족 앞에 나타난 괴생물이 닥치는 대로 시민을 살육하고는 끝내 현서를 삼긴채 사라지자 정부는 현서도 죽었을 거라며 합동분향소에 장례식장을 마련한다. 이전 영화들에서 엉뚱한 경비원과 구희봉 경찰소장으로 출연해 봉준호 월드의 일부를 이뤘던 배우 변희봉은 <괴물>에서 현서의 할아버지이자 3남매의 아버지 ‘희봉’을 맡아 극(劇)이 지나치게 무겁거나 공포심이 들때쯤 구수한 아우라로 웃음을 선사했다. 박해일과 배두나의 캐릭터를 체화한 연기는 각각 운동권 출신 백수와 슬럼프기의 시청 소속 양궁선수에 시선을 머물게 한다. 경찰마저도 하나뿐인 소중한 조카의 생사여부에 무관심한 현실에 분개해 직접 나서는 삼촌과 고모의 활약에 이병우의 장중한 오케스트라 음악이 덧입혀지면서 가족의 사투는 긴박감이 넘치고, 

보는 이로 하여금 참혹함과 모험심의 양가적인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개봉 때와 2010년 현재 사이에 큰 차이는 없겠지만 <괴물>은 조금 더 깨어있는 시각으로 한번 더 읽혀져야 할 영화다. 유력 해외 언론들이 2006년 세계 영화 베스트 목록의 상위에 <괴물>을 넣었을때 우리는 자랑스럽긴 했어도 큰 의미를 두진 않았다. 다시 보는 <괴물>은 예전에 느꼈던 오락적 쾌감은 전혀 느낄 수 없고 서울 한 가운데에서 모인 옐로우 에이전트 반대 세력이 몇년전 촛불집회의 모습을 빼닮아서 심장을 뛰게 했다.

 

여기까지 한 작품씩 얘기해도 무수한 은유를 발견할 수 있는 봉준호의 필모그래피를 쉬지 않고 숨가쁘게 돌아보았는데 그의 3편의 장편들은 이렇게 명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시네아스트의 자의식이 매니아적 감수성과 통한 코미디 (<플란다스의 개>), 묻혀지고 있던 역사의 한 페이지를 끈질기게 추적한 형사영화(<살인의 추억>), 오랜 시간 봉인했던 꿈의 프로젝트를 실현한 괴수장르의 새 문법을 창조한 <괴물>이라고.

 

 


 

 

대중문화계의 뜨거운 이슈였던 상영 당시에는 치밀한 특수효과와 서울 도심 한강에 대한 독창적이고 스펙터클한 촬영테크닉 등에 가려 <괴물>이 갖는 알레고리에 대한 논의가 미흡했던 것 같다. 그런데 <괴물>이 우리나라와 해외에서 대중과 평단에서 찬사에 가까운 호평을 받았던 점이 예술가 봉준호에겐 기쁨이자 부담으로 작용했던 걸로 보인다. 그래서 결국 3년만에 발표한 <마더>는 <괴물>의 정반대의 지점으로 향했는데, <괴물>이 희봉이 손녀를 위해 희생하고 - 강두의 딸 현서(고아성)가 괴물에게 잡혀 먹히긴 했어도 - 다른 가족 멤버들이 헌신적으로 합심한 끝에 국가도 보호해주지 못한 재앙의 사태를 막은 숨은 영웅의 스토리였는데 반해 <마더>의 환상적이면서 황당한 결말은 전작을 철저히 배반한 것에 다름아니다.

 

 


 

 

<마더>를 파헤쳐 보는 평자가 한가지 힌트 키워드를 얻을 수 있는 감독의 인터뷰가 <괴물> 종영 직후 있었다. “다음 작품은 미학적인 면에만 집중할 수 있는 영화가 되지 않을까 한다”는 발언으로, <마더>는 이제껏 10년간의 관객이 보아왔고 평단이 해석해 내놓았던 이른바 ‘봉테일’로 불리는 미학 세계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다. 제목이 나쁘게 말하자면 촌스럽고 긍정적으로는 심플한 <마더>는 감독 최초의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이면서도 사실 <플란다스의 개>를 만들던 초심으로 돌아간 영화이다. <플란다스의 개>가 그 전까지 어디서도 볼수 없었던 형식의 상황 심리극이라면 <마더>는 우스꽝스러움과 반전 트릭을 냉소주의에 담은 희비극적 공포 영화인 것이다.

 


 

흥행감독의 목록에 있었던 봉준호의 비상업적 영화로 기록되는 <마더>는 반드시 2번 감상해야 할 영화다. 처음 보고난 후 두 번째로 시청했을 때 가장 먼저 뒷통수를 치는 묘한 감정은 친구의 엄마, 아들의 친구 관계로만 여겼던 진태(진구)와 혜자(김혜자)가 성적인 친밀함이 있는 연인사이였었다는 추측을 하게 하는 요소들로부터 기인하는 정서다. 이는 영화의 도입부부터 암시되고 있는데, 엄마가 약재상 가게를 하느라 아들을 24시간 돌볼수 없는 처지에서 도준의 곁에 실질적으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성격의 진태가 늘 따라다니며 여러가지 사고 뒷수습을 하는 모습이 일반적인 우정과는 무척 달랐다. 그러한 혁신적인 <마더>의 주제와 편집양식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스토리텔링 구조와 모호한 분위기는 타이틀 롤을 맡은 김혜자의 완숙한 연기를 통해 성취되고 있다. 가까운 현재까지 국민 탤런트로서 만인의 어머니 대접을 받으며 오랫동안 브라운관에서 활동해온 그녀의 스테레오타입을 <마더>가 깨트렸고, 계속해서 관습을 전복해 온 봉준호가 선택한 2009년작의 캐스팅 결과는 그 파격성으로 논란의 중심에 놓였다.

 


 

 

본작이 여태까지의 영화들과 가장 다른 점은 회상장면에서만 이해하기 쉽게 쓰였던 ‘플래쉬 백’ 기법이 자유분방하게 적재적소에 현란하게 삽입되어 살인사건의 전모를 예상 범인에 맞춰 재구성하고 있는 그 촬영 양식이다. 어찌 보면 이번 영화는 기대했던 것보다 봉준호의 날인이 강하게 엿보이는 작품은 아닐수도 있는데 재치있는 대사와 스타배우의 색다른 기용 방식을 빼고는 과거 세 편의 공통적인 트레이드마크나 개성넘치는 요소들을 절제했기 때문이다. 대중들을 아리송하게 했던 나머지 하나의 의문점은 원빈이 매끄럽게 소화한 윤도준의 실체에 관한 것이었다. 실제로 정신장애인을 만나 보면 사람들이 바보라고 규정해버리는 편견과 달리 상당수가 정상인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고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다 얘기해버리는 화법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문제는 살인사건이 터졌을때 공권력 즉 경찰이 증거물이 나왔다는 것만으로 제대로 된 수사를 하지 않고 서둘러 편파적인 종결을 짓는 것, 누명을 벗겨달라고 혜자가 고용한 변호사마저 자신의 실적을 위해 도준의 병력을 끌어들여 타협을 찾으려는 무사안일함같은 거라고 <마더>는 똑똑히 말한다.

 

 


 

 

결국 현남, 두만, 강두처럼 억울한 ‘마더’는 제도권을 이탈해서 자기 자신의 두 주먹과 맨 발로 고독한 탐정처럼 자식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봉준호는 경악스런 결말을 마련해 놓았다. 고의든 우발적이든 여고생을 죽게 한 건 도준이었고 혜자는 유일한 목격자를 덜덜 떨면서 처치해버린 후 도준보다 열악한 환경의 더 아픈, ‘엄마가 없는’ 종팔을 희생양으로 삼고 마는데 영화적으로 그것은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

 

 


 

 

<괴물>과 <마더>사이에는 정권교체라는 무시할수 없는 정치적 변화가 있었고 그동안에 관객들에게 소구했던 스릴러 작품은 <추격자>같은 비관적인 영화들이었다. 영화 커뮤니티를 흥분시켰던 몇 편이 있었지만 크게 의미를 주는 영화들이 부족했고 그동안 <친구> <공동경비구역 JSA>처럼 폭력의 세계와 국가적 비극에 어찌해볼수 없는 무력한 개인에 대한 아이러니를 형상화해 온 영화들의 계보를 <마더>가 잇고 있다고도 할수 있다.

 

 

희망적인 기적이 드문 지금 한국의 상황과 생활 안에서 봉준호의 새 영화로부터 긍정적인 카타르시스를 발견하고 싶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일 터이다.

 

항상 봉준호에게선 통렬한 비판의식을 기대해온 관객들이긴 하지만 막상 가해자만 존재하고 일체의 낭만이 사라진 <마더>에 이르러선 터널의 끝이 보이지 않는 답답한 마음들을 겪었을 것이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좋은 일만 한 현남이 해고됐을 때, <살인의 추억>에서 살인범이 내 옆에서 영화를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오싹해 했을때, <괴물>에서 할아버지와 손녀가 숭고하게 죽어가서 서글펐던 그 때들도 왠지 모르게 피어올랐던 한줄기 소망의 빛이 전무(全無)한 <마더>를 외면하고만 싶어진다.

 

하지만 약자의 비루한 현실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목소리만큼은 여전히 영화계에도, 우리의 지금 속에서도, 유효한 하나의 예언적 전언으로 맴돌고 있다.

 

from yes24블로거 박보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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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24블로그축제] 엄지원을 재발견케한 518 이야기 스카우트 (김현석감독) | 샤론의 꽃 영화 이야기 2010-06-13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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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회 YES24 블로그 축제 참여

김현석 감독은 전작 <광식이 동생 광태>에서 흥미롭지만 모호한 여자주인공을 제시했었는데, <스카우트>의 이세영은 이와 같은 듯 다르게 변주된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직전의 상황을 소재로 했지만 영화는 그것과는 큰 관련이 없이 이호창(임창정)의 대 학생활과 현재가 교차되며 이어진다.

 

선동열이라는 고교 최고 투수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광주로 내려간 호창은 라이벌 학교와 치열한 경쟁을 하는 와중에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친구와 조우한다. 그녀 곁을 얼쩡거리는 깡패남자를 통해 질투를 하다가 세영이 몇 년전 자기를 아무 이유 없이 떠났던 일에 미련을 갖게 되고 드라마는 그가 서울로 떠나기전의 열흘을 펼쳐놓기 시작한다. 멜로로써 영화의 가장 중요한 지점은 세영이 호창을 버린 이유에 관한 것인데, 이는 스카우터로서 출장온 남자의 사정과 혼란 속 광주 이 둘이 만나며 종래의 야구영화나 광주영화와 또 다른 시각을 낳는다. <화려한 휴가>의 이요원이 시위의 피튀기는 현장에서 현실을 깨닫고 뛰어들었다면 엄지원의 역할은 차분하면서도 가열찬 시민운동가의 초상을 그린다.

 

야구를 둘러싼 이야기와 대학생 후일담이라는 두 뼈대는 그다지 공통점이 없어보였는데, 세영과 호창이 사랑을 하고, 헤어지고, 또 다시 만나며 뜻밖에 밝혀지는 사연은 이데올로기적으로 드러난다. 운동권에 속해 있던 세영을 호창은 ‘그거 사실 다 겉멋아니냐’고 조롱하고 야구에 매진하며 정치에는 무관심한 호창을 세영은 무시했었다. 세영이 몸담은 조직의 데모장소에서 ‘무개념’의 호창은 이를 진압했었고 사소한 그 사건은 둘 사이에 건널수 없는 강을 흐르게 해버렸다. 그런데 518이 일어나기 전 짧은 기간을 함께 하며 겉으론 드러내지 않지만 세영은 동렬 모(母)를 소개해주고 호창은 어렴풋이 세영의 사상과 활동을 인정하며 둘은 서로의 입장을 받아들여간다. 하지만 스토리가 거기서 머물렀다면 아직 아물지않은 상처인 광주에 대해 우리가 아직 웃을수없는 것 또한 엄연하기에 뭔가 부족했을 것이다.

 

최루탄 속에서 심상치 않은 광주 시내를 보면서 거리감을 유지하던 호창은 마침내 선수 스카우트에 성공해 계약하려는 순간, 세영에 대한 자신의 잘못을 그제서야 알아챈다. 그리고 다른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한 투쟁의 한가운데로 들어가고 서곤태과의 세영구출작전은 결국 성공하며 세월이 흐른 지금 그녀는 TV로 선동렬을 보며 웃고 있다.

 

후반부 취조실에서 경찰들이 호창을 잡아와 대질시켰을 때 ‘이쁜 아가씨가 데모 하지 마세요’ ‘아저씨나 잘하세요’라며 서로를 외면하는 장면은 상투적인 미장센임에도 80년대를 마음으로 느끼게 해주었다.

 

임창정의 코미디언적 기질이 진지한 주제에 부적합하다는 의견도 있지만, 호창이 후배와의 사랑을 되살리는 과정에서 용서를 구하는 씬만큼은 두드러진다. 목숨을 걸고 자신을 구한 그 앞에서 세영은 ‘하던대로 하고 살지 왜 그래요, 위험하잖아’라고하는데 여기에서 서로 다른 아비투스 속의 남녀는 화해를 하게 된다.

 

한 인터뷰에서 감독은 호창이 감옥에 있었으므로 몸을 부지했을 거라 했으나, 정석적으로 간 엔딩은 여지를 남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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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24블로그축제] 한국과 아일랜드의 아름다운 사랑영화들 - 깃, 원스(once) | 샤론의 꽃 영화 이야기 2010-06-13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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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회 예스24 문화버킷리스트 축제 참여


새벽에 일찍 잠이 깨었다. 오랜만에 TV로 영화를 한번 봐볼까 해서 케이블채널을 돌렸더니 뜻밖에 <깃>이 하는 거였다. 그래서 새벽 5시에 다시 한번 이 작품을 보게 되었다. 현성은 서른셋의 영화감독으로 ‘고마워’라는 데뷔작이 있었으나 그의 말에 따르면 ‘별로 본 사람이 없는’ 영화였다. 그는 10년 전 그러니까 스물셋의 어떤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제주도의 외딴 섬으로 여행을 간다. <깃>은 그의 시점으로 펼쳐지는 아름답고도 쓸쓸한 이야기이다.

 

21살 여자주인공과 33살 남자주인공의 만남과 헤어짐을 통해서 영화는 꿈에 대하여 말하고 있었다. 젊음의 특권은 꿈꾸기라고 하지 않았었나? 남자는 얼핏 멀쩡해 보이지만 첫 번째 영화가 실패했던 만큼 이번에 새로 준비하는 작품은 반드시 성공해야겠다는 오기가 마음 한 구석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애꿎게도 오래전의 연인을 잊지 못하고 기억 속에 간직하고 있다가 10년 후 만남을 기약했던 곳으로 가지만 과연 그녀가 올까? 현성에 비해 소연은 상대적으로 무척 밝다. 아, 구김살도 없다. 하지만 그녀도 나름대로 말을 잃은 삼촌을 보살피느라 지쳐있었고 무엇보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춤 이라는)을 위한 열망을 간직하고 있는 아가씨다.

 

<깃>은 매우 소박하게 그들 남녀의 각각의 고민과 삶을 나누는 과정에서의 작은 희열들을 스케치처럼 보여주고 있었다. 우도라는 공간은 지리적 환경으로 인해 어떤 적극적인 일을 도모하거나 하고 있는 일에 유기적인 변화를 주기가 쉽지 않은 곳인데, 어쩌면 이 영화는 하나의 우화와도 같지 않을까. 현성과 소연은 나이차이도 많이 나고 걸어온 길도 달랐지만 남자는 영화-또 잊혀진 첫사랑!-, 여자는 춤이라는 어떤 도달해야 할 절대적인 (그들 기준에선) 목표가 있었기에 짧은 기간이지만 소통(疏通)이 가능했다고도 볼 수 있으리라. 그리고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왠지 여행을 떠나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힐지도 모르겠다. 필자도 해외로 떠나고 싶은 생각이 요즘 부쩍 들었던 터이다. 하지만 모든 여행이 삶에 위안을 주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느낌도 있다. 적어도 <깃>의 커플처럼 정말 서로에게 따뜻한 위로와 희망을 주는 그런 만남이려면 내 자신부터 정비되고 무언가 충전이 되어 있어야만 할 것 같다.

 

많은 이들이 <깃>의 마지막 장면에 대하여 이야기함을 발견했다. 해피엔딩을 좋아하지 않는 이들은 억지스럽다고 하고, 유쾌한 결말을 위해선 괜찮은 설정이라는 이도 있더라.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현성이 춤을 주제로 한 영화를 만들고 소연은 그 안무가가 되어 있다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았다! 체게바라의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 불가능한 꿈을 갖자’는 말이 떠오른다. 바라건대 열심히 사랑을 하거나 꿈을 위해 달려갔으면 좋겠다.

 

 


영화는 음악이 주가 되는 영화이고 (그래서 어딘가에선 ‘뮤지컬영화’라고도) 사랑 이야기이고 젊은날의 초상이 담긴 아일랜드 작품이다. 그런데 <원스>는 자세히 보면 그렇게 특별할 것 없는 스토리에 극적 반전도 없는데 어떻게 유럽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도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을까.

 

<원스>가 어필할수 있었던 점, 첫째 음악 당연한 말인지 모르지만 <원스>는 주인공들이 부르고 연주하는 음악의 힘이 가장 컸다고 생각된다. 영화 시작에서 ‘남자’가 부르는 ‘Say it to me now'는 짙은 호소력이 있고, 남녀의 사랑의 시작을 알리는 ’Falling Slowly'는 가장 히트(!)하였다. “함께 노래를 부르고 연주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해 아트필름 뮤지컬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감독 존 카니의 발언인데 이는 정확히 들어맞은 걸로 보인다. 감독, 배우들 모두가 밴드에서, 또 뮤지션으로 크고 작게 활동했다는 영화 뒷이야기를 듣고 나면 역시 <원스>에서 보인 뛰어난 음악성이 이유가 있구나, 알게 된다. 비단 남녀주인공뿐 아니라 영화의 조연들이랄 수 있는 사람들도 음악의 감상자로서 충실했던 것 같다. 처음에 여자(마케타 잉글로바)가 연습하는 악기가게의 주인은 남녀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를때 흐믓하게 바라본다. 또 마침내 스튜디오를 임대해 데모테입을 녹음할 때 담당 기사도 처음엔 이 오합지졸 ‘악단’을 무시하지만 실력을 보고는 최선을 다해 제작한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장면이지만 대출을 하러간 은행 직원도 왕년에 자기도 음악을 했다는듯 글렌한사드-남자 역-앞에서 기타를 치고 말이다.

 


국내 영화팬들 사이에 작은 돌풍을 일으킨 <원스>의 음악과 연출스타일은 결코 대중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새로운 것에 목말랐던 계층이 많았음을 현재의 결과가 입증하고 있다. 필자 생각에 이런 모습들은 예전에 영국 인디영화 ‘풀 몬티’와 발레를 소재로 한 ‘빌리 엘리어트’에도 비교되는 듯 하다. 어필 요소 두 번째, 그들의 사랑! 투명하다, 정직하다, 위로를 준다, 치유한다, 충만한 느낌이다. 이 작품에 대한 지난 몇 달간 네티즌 20자평에서 골라본 표현들이다. 그만큼 <원스>에서 묘사되는 남녀의 사랑이 따뜻한 느낌을 선사하고 있구나, 싶다. 독립영화, 게다가 영화쪽에선 변방인 아일랜드산이라 그런지 간혹 지루한 면도 있었지만 보면서 작은 것들에 미소짓고 보고 나면 무언가 감성의 충전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사랑에 국경도 나이차도 없다지만 ‘the guy'와 ’the girl'(영화에 그렇게 나옴)의 차이는 사실 컸다. 남자는 음악씬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싱어송라이터로 오매불망 데뷔만을 꿈꾸며 길거리에서 외롭게 노래하고 있었고, 여자는 이른바 싱글맘으로 아기와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헤어진 것도 기다리는 것도 아닌’ 상태로 남편과 보내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 그들이 ‘만난다’. 어쩌면 서로의 쓸쓸함을 서로가 알아본다 해도 요즘같은 세상엔 먼저 손을 내밀기가 어려운건 아닐까. 이미 세파에 너무도 찌들었기에, 또 순수하고 열정적인 사랑을 할 자신이 없다는 변명으로... 하지만 어쩌면 기적과도 같달까, 남과 여에겐 음악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었고, 구차한 각자의 삶을 뒤로하고 만남을 이어가게 된다.

 


 

우리나라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에서 ‘사랑이 풍덩 빠지는 줄만 알았지, 이렇게 서서히 물들수도 있는거구나’라는 대사가 있는데, <원스>의 ‘폴링 슬로울리’도 같은 맥락이 아닌가 싶다. 노래 가사에 따르면 ‘천천히 빠져들어요, 자신만의 멜로디를 부르며.’ -그런데 falling은 아시다시피 중의적이다. 내려오다와 빠지다.- 사실 이 영화를 대하는 자세는 극명하게 두갈래로 나뉘는데, 말이 필요없기 때문에 구구절절 논하는 것은 ‘배신행위’라는(ㅎㅎ)것이 하나고, 그럼에도 불구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분석해보는 이 두가지이다. 밝히자면 이 칼럼은 그 둘 사이에서 다소간은 어정쩡한 채이다. 이 영화를 처음 보고 개인 블로그에 글을 올렸을때 이상하게(?) 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더라. 그만큼 이 작은 영화는 자신의 인생역정을 돌아보게 하고, 글을 쓰는 걸 좋아하는 이든 아니든 표현하게 하는 실로 위대한(!) 힘을 지닌것 같다. 그리고 음악이나 사랑 외에 본인이 눈여겨본 부분이 있었는데, 바로 런던으로 떠나려는 주인공에게 보였던 아버지의 반응이었다. 무덤덤한듯 아들의 떠남을 받아들이고 약간이나마 모아놨던 돈을 가져가라며 흐믓한 얼굴로 ‘노래 다시 틀어달라’던 그 노인의 모습.

 

어차피 모든 것이 선택이라면, 뮤지션은 음악적 성공을 위해 해외로 가고, 여자는 행복한 가정을 위해 그 자리에 남는 결말이 꽤나 긴 잔상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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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24블로그축제] 9.11의 현장속으로, 플라이트 93 (United 93) 폴 그린그래스 | 샤론의 꽃 영화 이야기 2010-06-11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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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회 YES24 블로그 축제 참여

이 영화와 같은 소재(랄까)로서 올리버 스톤 감독의 <월드 트레이드 센터>는, 비디오로 빌려본적이 있습니다. 붕괴된 빌딩 현장에서, 두 명의 소방관이 그야말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실화에 바탕한 영화였는데 돌이켜보면.. 그렇게 살아남는 실화와 영화에 감격했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현실은 더 무거운 것이 많다보니... 씁쓸함으로 남았던 작품 같아요.

 

911 당시 두대의 비행기는 월드 트레이드 센터에 충돌해, 엄청난 사망자를 낳았고 비행기의 탑승자들은 전원 사망하였습니다...
그리고 펜타곤에도 1대가 충돌했고...
 
잔인하지만 아무래도 관객입장으로서, 그 비행기들 안에 탑승했던 희생자들과 동일시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 같아요. 저는 또 당시 미국에 연고둔 친척이나 친구도 없었다 보니 더더욱...--;
 
하지만 이 영화 자체에는 굉장한 공감, 그리고 박수를 보내고 싶어요.
어쩌면 이 영화는 저같은 사람, 그러니까 영화와, 또 당시 현실과 전혀 무관한, 그저 일상을 살아가고 있던 사람들을 위한 영화는 아닐까, 라는 생각도...
 
참 이렇게 만감이 교차하던 작품도 전 최근에 드물었습니다...
 
영화 감상 초기 증세..^^
어이쿠.. 타지 마시지...ㅠ
그리고 비행기 2대가 '공중 납치'되었다는 정보가 관련자들에게 돌때.. "얼른 유나이티드 93호로 연락을!!" 하며...ㅠ
 
영화의 탑승자들은 참으로 용감하였습니다. 그 누구도... 물론 굉장한 공포심에 혹자는 체념도 했겠지만..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
그리고 일단의 무리들이 용감하게 조종실로 진격하는 장면들... 결과를 알면서도 손에 땀을 쥐고 응원을 하게 되더군요..
 
어쨌든 절체절명... 죽을 확률, 살 확률 반반의 상황 속에서... 많은 승객들은 주기도문을 외웁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에 임하옵시며..
(중략)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부지불식간에 줄줄 따라하던 bohemian75...-_-;
 
 

영화의 한 탑승객 중 한명.. 모자쓴 남자..
실은 저는 저 사람에 집중하며 봤습니다..
 
무슨 일인지 나중에 엔딩 크레딧에도 제일 처음 나오더군요
실제 이름, 토드 비머 (Todd Boamer).
실은 전 몇년전 저분의 전기를 읽은 적이 있답니다.
'나에겐 소망이 있습니다'라는, 미국에서 기독교부문과 일반 어떤 부문에서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는 문구에 펼쳐들었는데.. 밤새 읽고 눈물짓고 엄청난 느낌을 받았던 논픽션이었어요..
 
토드 비머는 미국의 잘나가는 회사인 '오라클사'의 직원이었습니다. 당시 나이 30대 초반.. 부인과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아 이것은 영화에는 물론 안나옴)
모든 면에서 미국의 젊은 남성의 대표와도 같은 환경이었더라구요. 대학은 유명한 선교사들을 배출했던(그 중엔 '마틴 루터 킹 목사'도) 휘튼 대학을 다녔고 부인도 거기서 만나 결혼했다고...
 
곱씹어 볼수록 '유나이티드 93호'는 특별한 점이(희생자들에겐 이런 표현은 좀..그렇지만 ㅠ) 많은 것 같습니다..
영화 나중 자막에도 나오듯 당시 납치된 비행기중 유일하게 썰렁한 공터로 추락했다,는 점도 그렇지만...
 
일단 영화에서 나온 그 기내 사정이 어떻게 이렇게 다 알려졌느냐.
하긴 당시 다른 납치 비행기에서도 납치범들이.. 승객들의 전화 사용을 별로 막지 않았다는 점은 알려진 사실이긴 한데..
93 비행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조종사가 희생된걸 승객들이 알게되고... 이제 남은 시간이 50여분이라는 걸 대충 모두가 알게 된 상황... 그 급박한 시간속에서... 그 승객들은. 가족에게 전화도 해야 하고, 삶도 정리해야만 했습니다.. 그 점은 너무도 가련하다고 여겨져요...
 
앗, 그리고 지금 쓰며 생각해보니 정말 신기하게도 어린아이는 한명도 없었네요...ㅠ
하여튼 젊은이든, 나이든 친구들이든, 노부부, 대학생, 모두가 삶을 정리하고, 단 한번의 테러범 공격에 모든 결과를 결정해야만 했던 상황....
 
책 <나는 소망이~>에서 보면 토드 비머씨가, 어떤 공항관제탑 말단 직원과 계속 통신이 되었다고 나옵니다.. 그게 쉽지 않은 일이라던데..(전 비행기 쪽은 잘 몰라서) 그래서 비머씨는.. 모든 상황 상황마다...그 관제탑 직원에게 '보고'를 했다고 합니다... 지금 누가 칼에 찔렸다..
지금 테러범 한명을 우리가 잡았다... 우리가 조종석을 장악하려고 한다...등등...
그리고 그 직원은 그 모든 전말을 이후에 ... 미망인에게 전했던 거고요.
 
하여튼 한명에 대한 말이 길었는데...
그분은 지금 '토드 비머 재단'을 설립, 911로 희생된 유가족의 복지를 위한 일을 활발히 하는 중이라고...
 
 

또 911에 대해 제가 미처 생각치 못했던 부분에 있어.. 이 영화는 완전 항공영화라고 할수도 있겠더군요.
어떻게든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여보려고이 미증유의 사건속에서도.. 침착하게 자기 할일을 하던, 그리고 때로는 미연방정부의 무기력함 속에 발만 동동 구르던 사람들..
군인들.. 항공 통제소 직원들..관제탑 사람들...
 
그들은 사건 직후에도 얼마나 가슴아팠을까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테러범을 연기했던 배우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봅니다..
결코 편치만은 않은 연기였을 거고... 어쩌면 각자의 나라들에서 욕 들을 수도 있는 역인데.. 그저 돈때문에 연기했을 거라고는 생각치 않습니다..
그리고 뻔한 이야기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들 중에는 이슬람의 본래의 취지에 맞는 평화적인 이슬람교도도 있었겠지요....
 
장면 장면... 특히 매순간 알라의 경전인 듯한 것을 외우는 주인공 납치범들을 보며 참 뭐라 말할수 없는 느낌이 들었는데.. 아 저건 저들의 신념이구나... 하는 느낌만은 분명했어서 조금은 섬뜩하기도 했습니다..
아득, 하기도 했고요..
 
이 영화는 당시 사건을 기초로 했으나 여러 가지 면에서 '드라마타이즈화' 한 '픽션'이라는군요 엔딩 자막에.
 
'폴 그린그래스' 감독, 워킹 타이틀 제작.
 
워킹 타이틀이 이런 영화를 만들었다는 점은 조금 의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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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24블로그축제] 감히 일본 최고의 영화중 하나라 말하고 싶은 '러브 레터' (이와이 순지 감독) | 샤론의 꽃 영화 이야기 2010-06-11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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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회 YES24 블로그 축제 참여

[러브 레터]의 죽음, 사랑의 이미지

이와이 순지의 영화 읽기


뮤직비디오와 CF, TV 드라마를 거쳐 이와이 슈운지가 만든 최초의 장편영화인 <러브 레터>는 1995년 일본에서 폭발적인 흥행을 기록한 작품이다. 또한 '키네마준보'가 집계한 독자선정 '95 베스트10'에서 1위를 차지해 지적인 관객들의 사랑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영화는 이후 우리나라에서 몇 년간 불법비디오로 돌면서 약 10만명 정도가 보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몇 년 후 극장개봉시 서울관객 70만명을 동원했다. 모 음료수 CF에 '자전거 돌리며 불빛을 내는 장면'이 패러디되고 '오겡끼데스까'를 소재로 한 개그가 유행하는 등 우리나라 문화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만큼 <러브 레터>는 개인적 취향을 넘어서 일본의 미학과 세계관을 잘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이와이 슈운지가 연출, 각본 뿐 아니라 편집까지 맡아 했기 때문에 작가주의적 분석이 유효하며, 분석은 결국 슈운지 자체가 가진 의식적, 무의식적인 일본성을 파헤치는 것이 될 것이다. 대학에서는 미술을 전공했고 문학에도 조예가 깊은 그는 분명 천재적인 측면이 있다.

 


 

1. 죽음, 자연, 미의식


옛부터 일본인에게 자연은 혜택을 주는 것, 친밀한 것이었다. 이는 일본이 온대지방에 위치해 있어서 자연환경이 온화했고 농경사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과 자신을 일체화하고 살아가는 감정이 일본인의 모든 정신활동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자연과의 일체감은 자연을 즐기고, 현세를 구가하는 현실긍정의 사고를 만들어냈다. 한편 춘하추동과 사계절의 변화로 인해 자연의 변화에 대한 세밀한 관찰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자연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키워냈고 이를 바탕으로 여러 예술과 생활습관이 생겨났다. 일본인의 자연관은 불교의 무상관으로 증폭되었는데 특히 선종사상과 결부되어 유겐, 와비, 사비 세계를 만들어냈고 다도, 정원, 꽂꽂이 등에서 있는 그대로의 꾸미지 않은 자연을 재현하게 된다. 일본인은 죽음에 대한 거부반응이 없이 자연과 일치시키며 오히려 미화하기까지 해왔다. 불교 선종의 일파인 조동종을 일본에서 시작한 도겐(道元)은 '생사문제에 구애받지 말고 죽을 때는 생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죽음에 철저하고, 살 때는 삶에 철저하여 순간순간을 전력을 다해 살아갈 것'을 주장, 이것이 무사도의 기초가 된다. 에도 시대에 정착이 되는 무사도는 죽음에 철저한 것이 완전한 삶과 이어진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할복', '동반자살' 문화가 여기서 기인하고 현재 세계적으로 자살률이 높은 나라에 일본이 포함되어 있다. 일본의 영화들 중 '살인, 자살'이 많이 등장하고 공중파 TV 드라마에서도 엽기적인 죽음이 일반적인 소재인 것을 보면 일본에서 죽음이란 친근하기까지 한 문제일 듯싶다. 이러다보니 일본은 죽음과 자연을 결부시키고 자연스럽게 여기며 아름답게까지 생각하거나 표현하는 미학이 생겨났다. 36세에 자살한 시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1892~1927)는 죽음보다 더 나은 예술은 없다, 죽는다는 것은 사는 것이라는 말을 공공연하게 했었는데 다음은 유서의 일부이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얼음처럼 맑고 투명한 병적인 신경의 세계이다. (중략) 내가 언제 과감하게 자살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단지 자연은 이런 나에게는 언제나 보아도 한층 아름답다." 또한 한 번에 피었다가 압도적인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확 져버리는 사쿠라는 죽음의 미학을 상징한다. 이것은 가미가제의 젊은이들이 '당당하게' 죽을 수 있는, 그리고 죽게 하는 확고한 명분을 제공하기도 했다고 한다.


< 러브 레터>에는 두 명(두 건)의 죽음이 있는데 남자 후지이 이츠키의 현재의 죽음과, 여자 후지이 이츠키의 아버지의 죽음이 그것이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간직한 와타나베 히로코와 女 후지이 이츠키는 모두 그 죽음의 기억(아픔)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의미심장한 것은 영화의 첫 신이 순백의 눈 위에 누워있는 히로코, 그리고 장례식 장면이라는 점이다. 죽음과 자연의 일체를 드러내는 장면이다. 이렇게 누워있을 정도인 히로코는 사실 정상은 아니다. 갑작스런 연인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하고 약간은 사이코적인 면을 보여준다. 연인 후지이는 눈 덮인 산에서 죽었다(<나라야마 부시코>에도 나오듯 산 -특히 영험한 산-과 죽음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나 보다. 일본 특유의 종교로 산에 오르는 수행을 근본으로 하는 산악 종교가 있는데 산은 인간이 사는 세계와 다른 타계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에도 중기에 이르러 후지산을 이르는 '후지코'가 서민들에게도 일반화되었다). 女 후지이는 아버지가 죽은 당시 장례식장에서 문득 눈 속에서 냉동돼 모양이 그대로인 잠자리를 발견한다. 그리고 나서 곧바로 하는 혼잣말이 뜬금없이 ‘아버지가 돌아가셨구나’이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 일본에서 잠자리는 나비와 같은 의미로, 혼,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고 재생, 부활을 상징한다. 결국 일련의 죽음을 둘러싼 얘기들이 감각적이고 아름다운 영상과 환상적인 음악에 힘입어 감상자에게 너무도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런데 죽음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은 무반응이라는 것이 놀랍다. 영화의 처음에서 보여지는 장례식에서 죽은 자의 가족이나 친구들의 분위기는 아주 활기차고 아무렇지도 않다(우리나라 병원 영안실이나 장례식장의 분위기는 굉장히 침울하거나 애통함으로 가득하지 않은가). 그리고 여 후지이 이츠키의 집에서도 초반부에는 아버지(남편, 아들)의 죽음에 대해 다들 무덤덤하게 얘기하고, 농담을 하고 웃기까지 한다. 소위 일본의 감정에 대해 얘기할 때 긍정적으로 쓰는 ‘절제’일 수도 있고, ‘다테마에’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연히 필연적으로 다테마에의 폭발 내지는 분출이 어느 한순간 이루어질 때 굉장히 영화가 파워풀하고 극적으로 받아들여진다. 방에서 죽은 후지이에 대해 와타나베와 후지이의 모(母)가 대화할 때 후지이의 엄마가 갑작스레 울음을 터트리는 장면, 여(女) 후지이가 고열로 쓰러지자 비로소 죽은 남편/아들에 관해 대립하는 두 부녀의 신이 바로 그러했다. 그리고 해 돋는 산에서 미친 듯이 절규하는 와타나베의 모습에 110%쯤 감정이입하면서 가슴이 절절한, 최초의 기이한 체험을 가능케 했다. 우리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도 ‘절제된 죽음’이 나오지만 여기엔 곧 죽을 당사자가 나와서 스스로 삶과 사랑을 정리한다는 면에서, 남(男) 후지이의 모습이 전혀 안 나오는 <러브 레터>와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전자는 죽음을 일상에 결부시키고 후자는 자연과 밀착시키는 차이 때문일까.

 

 


 

2. 다테마에와 혼네


와타나베 히로코와 女 후지이 이츠키의 편지 교류 사이에서 다테마에와 혼네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일단 처음에는 그 둘의 편지 교환은 서로가 각자 다른 의미로 출발을 한다. 그리고 와타나베는 끝끝내 애인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바로 집 앞에서조차 女 후지이를 찾을 것을 포기하고 결국은 무슨 심정인지 편지들을 그녀에게 돌려보낸다. 이것은 여 후지이를 향한 배려, 즉 혼네라고 볼 수 있다(‘이것들은 당신의 추억입니다’라며 돌려보낸다). 그리고 女 후지이는 우연히 선생님을 통해 男 후지이의 죽음을 듣고, 상대방을 배려해서 자신이 그 사실을 알았다는 것을 또한 밝히지 않는다. 대신 편지의 첫 시작을 ‘예전에 우리 아버지도 돌아가셨죠’라고 우회적으로 시작한다. 이런 모습들, 그리고 서로를 통해 자신의 아픔을 치유하거나 가슴시린 추억을 재발견해낸다는 사실이 참 경이롭고 아름답다.


3. 사랑 중의 사랑은 ‘시노부코이’(忍戀)


요시다 겐코의 ‘부족(결핍)주의’에 관한 글의 첫 머리는 ‘과연 꽃은 활짝 핀 상태에서 보아야 하고, 달은 보름달일 때 보아야 하는가’로 시작한다. 이에 따라 남녀의 정, 연애 역시 만나는 게 다가 아니라 만나지 못해 근심과 그리움이 쌓이고, 지켜지지 않은 약속을 원망하고, 멀리 떨어진 님을 생각하며 기나긴 밤을 홀로 새우고, 옛날을 그리워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는 의식이 있다. 미나미 히로시는 이것을 일본의 부족주의, 혹은 일본식 마조히즘이라고 표현한다. 부족주의의 미학은 이후 유겐(幽玄), 와비, 사비에도 전승되는 것이다. 유겐이란, 표박(飄泊)하여 뭐라 말할 수 없는 데가 있는 것, 혹은 마음과 뜻은 있지만 확실히 말해버릴 수 없는 상태이며 그것은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하고 뭔가 남겨놓은 모습이긴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궁극적으로 상태가 좋아지는 것이다. 즉 감정은 그것을 억제하면 억제할수록 순수해지고 강해진다는 게 일본적 감정설이다. ‘노’(가면악극)처럼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을 가능한 억제하여 감정의 내부적인 고조를 표현하는 것이 일본 전통 예술의 심리적 요소의 하나이다. <러브 레터>의 등장인물들 – 후지이 이츠키(남녀), 와타나베 히로코-의 관계 속에서 이것은 수시로 발견된다. 그리고 이러한 일본적인 것을 넘어서서 10대의 사랑의 수줍음이라는 것 자체가 이런 면과 연관이 된다고 볼 수 있다!


마치며 


흔하게 우리나라 멜로 영화와 드라마에서 유난히 연인의 비극적인 죽음코드가 등장하고 있지만 <러브 레터>처럼 몇 번을 봐도 어떤 절절한 느낌을 주는 영화는 드물다. 또한 <러브 레터>가 일본 평단 일부에서는 지나치게 감각적이고 탈 정치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고 하지만 오히려 비 일본인인 본인이 보기에는 분명 근원적으로 무척 일본적인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이 영화 속 에서처럼 사랑, 죽음을 연관시킨 강렬한 눈[雪]의 황홀하면서도 아련한 이미지는 아직 어떤 영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기에 겨울이면 반드시 다시 꺼내보게 되는 일본의 대표작인 것이다.

 

 


 

http://blog.yes24.com/bohemian75 j.s. 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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