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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세적 상상력과 쾌락주의, [소울] | 기본 카테고리 2021-11-15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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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살아가는가? 인생에는 목적이 있는가? 인간은 답을 내리기 위해 질문하지만, 어떤 질문에는 답이 없다. 그런 어려운 질문은 주어진 일상을 바쁘게 살다보면 쉬이 잊힌다. 어느 날, 기진맥진하여 집에 돌아와 지친 몸을 뉘였는데 잠이 오지 않는다. 일상의 리듬이 멈추고 시간이 느려지면서 생에 대한 반성이 시작된다. 그 때 다시금 질문은 봄 날의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나는 누구지? 내 인생의 의미는 뭐지? 불안 속에서, 우리는 답을 내리려고 애쓴다. 그렇게 불면의 밤은 얕은 잠과 더불어 지나고 다시 아침 해가 떠오르면 질문을 뒤로 하고 일상의 쳇바퀴 속으로 몸을 밀어넣는다. 쳇바퀴를 열심히 굴리다보면 질문은 다시 잊힌다. 우리 삶은 물이 너무 차가워서 뜨거운 물 쪽으로 수도꼭지를 틀었다가, 너무 뜨거워서 다시 차가운 물쪽으로 수도꼭지를 틀어대는 사람처럼 일상의 분주함과 실존적 불안 사이를 오고 간다.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였던가.

영화 <소울>은 인생의 의미를 묻는다. 인간의 목적에 대한 성찰을 유도한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다시금 '잘 산다는 건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물론, 영화는 그 질문에 대한 모종의 대답을 내려놓고 있다. 주어진 생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인생의 모든 순간을 즐기는 것. 이렇게 말로 정리하면 명쾌한 듯하지만, 시시하고 노른자와 흰자가 빠진 달걀껍데기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영화는 말로 정리된 저 결론보다 멋지게 관객을 설득하고 있다. 이 글의 목적은 그 설득 장치들을 살펴보면서 이면에 작동하는 의미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데에 있다.

 

삶에 대한 긍정

학교에서 방과후학교 강사를 하고 있던 조 가드너는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정규직 음악교사로 채용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는다. 그의 어머니는 기뻐하지만, 조는 시큰둥하다. 오히려 조는 자신이 동경하던 도로시아 윌리엄스 밴드에서 피아노 주자로 공연할 수 있게 되자 뛸 듯이 기뻐한다. 생애 최고의 순간을 맞이하게 될 조는 안타깝게도 맨홀에 빠져 죽는다. '머나먼 저세상'으로 가야 하는 조는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다가 '태어나기 전 세상'에 도착한다.

조는 일상인보다는 예술인이 되기를 원한다. 돈을 벌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삶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연주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선사하는 삶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일상/예술, 거짓/진실의 대립쌍 속에서 조는 다수가 쫓는 욕망, 그렇지만 노예의 욕망에 가까운 안정된 삶보다는 불안정하더라도 진정성을 추구하는 예술인이 되고자 한다. 그는 일반인과 달리 예술가의 욕망을 추구한다.

태어나기 전 세상에서 영혼들은 자기만의 불꽃을 발견해야만 지구에서 태어날 수 있다. 불꽃을 찾아주는 것이 멘토들의 역할이며 조는 태어나기 전 영혼인 22의 멘토 역할을 맡게 된다. 22는 지구에서 탄생할 수 있는 자격이 되는 배지를 오랫동안 받지 못하는데 불꽃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22는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말썽을 피우고 주어진 경로를 따르지 않는 전형적인 자기방어형 캐릭터다. 그는 카운셀러나 멘토의 지도를 따르기를 거부하면서 내면의 불꽃을 찾는 과업을 지연시킨다. 자신이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확인하기 싫어서, 지구에서 살아갈 수 있을지 확신이 없어서 저항한다.

우여곡절 끝에 조는 육체와 영혼 사이의 공간에서 활동하는 문윈드의 도움을 받아 이승으로 되돌아가지만, 자신은 고양이의 몸을 얻고 22가 엉뚱하게 조의 몸 속에 들어가게 된다. 22는 조와 함께 하루를 보내는 동안 걷고 타인과 소통하고 음악을 듣는 사소한 일상에서 기쁨을 느끼며, 산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그가 하루를 지내면서 얻었던 사탕이나 먹다 남은 피자, 조 엄마의 실타래와 같은 사소한 것들을 22는 소중하게 간직한다. 팔랑거리며 떨어지는 단풍나무 씨앗을 그는 경이에 찬 눈으로 바라보며 받는다.

일상을 하찮게 여기는 조는 자신이 잘 하는 일은 걷기가 아닐까라고 말하는 22이에게 그것은 삶의 목적이 아니라 그냥 사는 거라고 말한다. "내 불꽃은 하늘 보기나 걷기일지도 몰라. 나 잘 걷잖아." "그건 목적이 아냐, 22. 그냥 사는 거지." 조가 자신의 불꽃은 음악이고 피아노 연주이며, 그것이 삶의 목적이라고 말할 때, 태어나기 전 세상의 카운셀러 제리는 불꽃은 삶의 목적이 아니라고 말한다. 멘토들이 종종 불꽃이 삶의 목적이라고 착각한다며 한탄한다. "목적, 삶의 의미…. 단순하긴." 제리의 입을 통해 영화는 삶의 목적을 추구하는 태도 자체가 어리석음을 주장한다.

조는 22와 헤어진 후 환생하여 꿈에 그리던 공연 무대에 올라, 자신이 진정한 삶이라고 생각했던 순간을 성취했지만 공허함을 느낀다. 22와의 만남으로 일상/예술의 대립쌍은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된다. 그는 22가 간직하고 있던 물건을 꺼내 본 후에야 진정한 삶은 일상에 있었음을 깨닫는다. 이 영화의 백미는 조가 피아노를 치면서 추억을 회상하는 씬이다. 그 추억은 특별하고 대단한 활동이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음악을 듣고, 자전거를 타며 바람을 느끼고, 가족과 함께 불꽃놀이를 보고, 음악을 좋아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순간 같은 일상 단편의 몽타주로 그려진다.

자신의 불꽃이라고 생각했던 행동이 무의미하게 '그냥 사는 것'이라는 말을 들은 22는 부정적인 기운에 휩싸인다. "나는 목적이 없어."라는 말을 반복하며 방황하는 영혼이 되는데, 삶에는 목적이 있어야 한다는 담론에 억압당한 것이다. 꿈을 찾으라는 말이 종종 인간에게는 폭력이 되곤 한다. 꿈을 가지라는 말은 목적이 없으면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의미를 은연중에 가정하기 때문이다. 22는 억압적 담론 때문에 증상을 겪고 있는 셈이다. 그의 증상은 조가 단풍나무 씨앗을 보여주자 일순간 해소된다. 단풍나무 씨앗은 사소하지만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매 순간을 상징한다. 동시에 싹을 틔워내고 자라날 무한한 가능성, 생명력을 지닌 존재이다. 그래서 단풍나무 씨앗은 생명이 품은 희망이다. 22는 삶의 목적을 강요하는 담론으로부터 해방되어 '일상의 긍정성'을 깨닫고 지구에서 태어날 결심을 굳히게 된다.

긍정성은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재즈한다'는 말에 함축되어 있다. 재즈함은 재즈 연주처럼 삶의 순간을 즉흥적으로 즐기는 원리를 가리킨다. 영혼의 불꽃은 삶을 충실하게 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며, 인간은 불꽃 너머의 '행복'을 향해야 한다. 인생의 목적이란 없으며, 매순간 주어진 생명을 느끼고 순간을 즐기며 살면 행복해진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환생하여 문을 나서며 쉼호흡하는 조의 모습으로 끝난다. 인간의 행복은 인생의 목적을 강박적으로 추구할 때 가려진다. 목적의 무게로부터 벗어나 가벼워지라는 메시지는 가볍지 않은 진실을 일러준다.

 

현세적 상상력과 쾌락주의를 넘어서

영화는 브라운관 바깥에 있는 관객에게 주문한다. 삶의 목적에 짓눌리지 말고 생의 모든 순간에 만족하면서 그 순간을 충실히 감각적으로 느끼고 살아라. 이제 모든 문제는 해결된 것인가?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다. 영화의 모든 과정은 주제의식을 선명하고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요령있게 전달하고 있지만, 인생에는 목적이 따로 없다는 관점, 삶을 즐기라는 주문은 인간의 실존을 억누르는 목적론만큼 일면적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2021년, 지금의 현세적 생활양식을 재현하고 있다. 이를 테면 '태어나기 전 세상'의 카운셀러와 태어나지 않은 영혼의 관계는 우리에게 익숙하다. 태어나기 전 영혼들은 순수하고 철 없는 어린이, 유아처럼 행동한다. 조가 '지옥'이라는 듣기에 나쁜 말을 하자 그들은 흥미를 느끼며 '지옥!', '지옥!'을 외치는데 영락없는 말괄량이 유치원생이다. 카운셀러는 친절하고 부드러운 말투를 구사하는 유치원 교사를 연상케 한다. 태어나기 전 영혼은 학생처럼 카운셀러와 멘토의 돌봄 속에서 배지를 얻게 된다. 태어나기 전 세계가 쉽게 이해되는 까닭은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유치원, 근대적 교육체제를 모방했기 때문이다.

또한, 22가 조의 몸을 얻어서 겪는 일상, 아름다운 추억을 제공하는 곳은 현대인의 생활공간인 도시이다. 22가 처음 먹어보고 반해버린 피자, 이발소에서 머리깎기, 양복점에서 입는 수트, 지하철역에서 듣는 가수의 노래는 도시적 공간에서 누리는 것들이다. 지하 통풍구를 통해 불어오는 바람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22의 모습은 다소 비현실적인데, 사소한 도시 체험까지 긍정성으로 채색하려는 제작자의 의도를 읽어낼 수 있다.

공연장에서 꿈을 이룬 조가 허탈한 마음으로 되돌아와 22가 남긴 물건들을 보고 피아노를 치면서 과거의 편린을 회상하는 아름다운 장면 역시 도시적 공간에 위치한 소시민의 유년과 일상을 재현하고 있다. 식당에서 호두파이를 먹으면서 만족스러워하는 조의 모습은 대단히 비싸지는 않아도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며 행복해하는 우리들의 모습 그대로이다. 영화의 플롯을 다르게 보자면, 소시민적 일상을 폄하하던 의식이 의미 있는 깨달음 이후에 일상성의 소중함을 인식하는, 돌아온 탕아의 구조를 띠고 있다. 네가 우습게 봤던 일상은 사실 소중한 것이다. 너는 보석을 보고도 돌인 줄 알았던 것. 혹은 흔하게 굴러다니는 돌들이 실은 모두 보석이었던 것. 그러니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고 주어진 생을 즐기라! 이 메시지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현세적 삶의 구조를 긍정해야만 한다. 현대적 삶의 일상성은 본래 행복하다. 인생의 목적을 설정해서 삶을 곡해한 것은 당신이었고, 당신의 잘못된 인식을 고친다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인생의 목적은 없는 것일까? 영화에서는 목적을 추구하는 담론이 자아를 억압하는 부정적 역할을 떠맡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목적론을 내세운다. 인간의 좋음은 추구할 만한 어떤 것(목적)이며, 최고의 좋음은 다른 것에 의존하거나 수단이 되지 않고 그것 자체로 추구할 만한 어떤 것(목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하는 최고의 좋음은 다름 아닌 행복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궁극적 목적은 행복이다. 영화 <소울>에서는 목적과 행복이 대립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양자를 하나로 본다. 이런 차이가 생기는 까닭은 행복의 개념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소울>은 행복을 즐거움의 추구로 보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에 따르는 삶으로 보았다.

여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가 옮음을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행복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있음을 언급하고 싶은 것이다. 매순간의 즐거움을 충만하게 누리는 태도만으로는 행복해질 수 없다. "나는 인생을 즐기겠어."라고 말하는 순간, 결심 다음의 시간들이 우리에게 들이닥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회적 존재로서 고립되어 살 수 없으며, 어느 시점에는 타자와 조우하고 어떤 과업을 떠안게 될 것이다. 그 과업은 나를 가만 두지 않는다.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능력을 갖추기를, 그리하여 더 나은 존재로 만들어가도록 요구할 것이다. 그러면 다시금 현재 상태를 부정하는 고통의 상태를 수락해야 한다. 즐기겠다는 다짐은 공허하다. 타자가 도처에서 출현하기 때문이다.

조 가드너는 전형적인 소시민이지만, 그러한 소시민성은 은폐되어 있다. 왜냐하면 영화는 한 사람의 삶과 죽음의 문제, 개인의 욕망과 의미 문제에만 몰두하기 때문이다. 기술문명 사회 속에서 인간은 존재 망각에 빠져 있다고 지적한 하이데거에 따르면, 현대인은 일상인으로서 사회가 할당한 배역을 연기하는 일에 만족하고 있다. 상황이 이러하다면 오히려 만족은 자기 존재를 망각한 불행하고 부자유한 상황을 반증한다. 긍정성은 오히려 자기 실존을 자각하고 본래적 삶을 회복하는 과업에는 독이 된다.

자신의 실존을 회복하려는 인간은 우선 자신의 불안을 직시해야 한다. 지금 자명해 보이는 사태는 우리가 옳다고 가정하는 이데올로기의 허상 위에 구축되어 있음을 외면하지 않을 때, 불안은 우리를 위태롭게 하고, 이대로는 안 된다는 의식 속에서 우리는 자기를 새로운 상황 속에 던지게 된다. 소시민이 소시민성에 안착할 때, 자기를 실현하려는 본래적 실존과 욕망은 잊힌다. 인간은 자기 욕망을 영도로 만들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욕망의 대상이다.

물론 영화는 예술인이 되려고 한 조 가드너의 욕망이 잘못되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다만 예술이 삶의 목적이 아니고, 삶의 목적은 없음을 말할 뿐이다. 그러나 예술가의 자유는 남들 앞에서 공연하고 박수를 받는 삶에 그치지 않는다. 박수 받는 삶은 세속의 한 부분일 뿐이지 자유와 무관하다. 오히려, 영화에서 삶의 진실을 잘 건드리고 있는 설정은 '육체와 영혼 사이의 공간'이다. 그곳에서는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날 수 있는데, 한 가지에 몰입하거나 영감에 빠져 있는 인간의 상태가 물아일체 혹은 주일무적의 영역에 진입하여 자기를 잊어버리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 마치 죽음의 체험과 같다는 데에 착안한 흥미로운 아이디어이다. 죽음은 의식의 종말이며, 몰입은 의식을 영도에 이르게 하므로 죽음과 가깝다. 예술적 경지에서 인간은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어째서 예술을, 자유를 추구하는가에 대한 우회적인 해답이다. 다만, 나중에 조는 피아노 연주에 몰입하면서 문윈드처럼 이세상과 저세상을 자유롭게 오고갈 수 있게 되는데, 이는 진실과 관련이 없다. 진실은 자아를 잊은 타자와의 조우에 있는 것이다. 그것이 본래적 삶이 되든, 예술가의 자유가 되든, 달인과 성인의 경지에 이른 실존이 되든 간에 말이다.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인간의 행복은 무엇인가? 단 하나뿐인 삶을 진실하게 사는 방법은 무엇인가? 매순간 우리가 느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현세적인 삶은 정녕 괜찮은가? 목적을 추구하는 것은 억압적이기만 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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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면서 모른 체하기, 『집중과 영혼』 | 기본 카테고리 2021-11-15 0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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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집중과 영혼

김영민 저
글항아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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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아를 기억한다. 지금은 텔레비전 광고에 주로 얼굴을 비추지만, 그녀가 선수 시절에 빙상 위에서 펼친 연기를 잊지 못한다. 그녀의 완벽한 동작, 섬세한 표정과 제스처, 한 치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정확성은 피겨 스케이팅에 문외한인 사람에게도 감동을 준다. 트리플 악셀이라는 피겨 스케이팅 용어가 귀에 익게 된 것도 김연아 덕분이었다. 나는 광고 모델 김연아가 아닌 빙상 위의 김연아를 더 기억하고 싶다. 광고에서는 그녀가 상품으로 전시될 뿐이지만 피겨 스케이팅을 할 때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극점에서 실현한 달인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언가에 통달하여 비범성을 획득한 사람에게 경탄한다. 그들의 솜씨를 일컬어 신의 경지라고 칭송한다. 보통 사람의 기량과 비교하여 동뜨게 탁월한 성취를 보이는, 그리고 그 성취가 일회성의 운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계속적으로 나타나는, 기적처럼 보이는 성과가 계속해서 실현되는 사람들. 보통 달인들은 자신의 몸으로, 수행으로 탁월성을 증명해 보인다.

 

『집중과 영혼』은 이처럼 인간적인 존재를 넘어선 인간을 철학적으로 규명하고 있다. 김연아와 이순신과 세종대왕이 도달한 그 경지는 어떻게 가능한가? 저자 김영민은 그 알짬이 인간의 '집중'하는 능력에 있음을 역설한다.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이런저런 일에 마음을 쏟는 가운데 한 곳에 의식을 모으는 경우가 있다. 학교에서 집중은 흔히 들리는 말이다. 선생이 학생에게 '집중하라'고 말할 때, 그것은 집단을 통제하기 위한 발언이기는 하지만, 동물의 수준 너머에 있는 인간적인 태도를 주문한다. 왜냐하면 지구상의 동물 중에서 오로지 인간만이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집중은 인류가 장구한 진화의 역사를 거쳐오는 과정에서 갖게 된 특이한 능력임에 틀림없다. 특이한 까닭은 그것인 생존과는 무관한 의식이자 노력이기 때문이다.

 

집중의 반대편에 '애착'이 있다. 욕망은 바지에 엉겨붙는 껌처럼 대상을 모르고도 그것에 달라붙는다. "인간의 갖은 욕망이 부리는 리비도적 애착은 마치 점성 좋은 껌같이 오직 그 장소, 그 시간, 그 관심만을 고집하며 비켜나지 않는다. 껌은 바지를 모르지만, 필경 파괴적으로 바지를 고집하는 것이다." (12쪽) 리비도는 자기를 분출할 대상을 성급하게 찾는다. 애착의 특성은 참지 못함, 즉흥성에 있다. 인간에게 숙명처럼 주어진 동물적 특성은 과거 동서양의 철학자에게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다.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손에 들고서 죽음을 육체와 영혼의 분리로, 그리하여 신체로 인해 더럽혀진 영혼의 정화라고 주장했다. 달뜬 욕망은 인간의 균형감각을 해치고 동물적 상태로 타락시키기 때문에 야생마를 조련하듯 제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니체가 인간은 약속하는 동물이라고 했듯, 약속을 이행하기 위한 인내와 절제는 인간적인 행동이다. 먹이 앞에서 야단법석을 떠는 고양이에게 "다음에 줄게!"라는 말은 허망하다. 오직 인간에게만 "다음에 줄게!"가 효용을 가지며, 인간은 그 말에 담긴 약속을 믿고 이행할 줄 안다. "내 마음은 “근본적으로 예상하는 존재, 기대를 생산하는 존재”인 것이다."(30~31쪽) 자기를 조절할 줄 아는 '의식'의 발달은 인간 존재의 혁신을 가져온 진화사의 한 결절점이 된다.

 

그런데 집중은 인간이 지닌 의식의 영역을 넘어서는 의식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한 곳에 집중할 때에 유용성에 대한 관심이 표백되고 자기를 잊어버린 채 대상에 몰두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흔히 주일무적, 성성적적의 경지라고 일컫는, 자기를 잊어버리는 망아의 영역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집중의 요체는 의식의 힘을 통해서 의식의 토대가 되는 '나'를 잊음에 있다. "비록 좁은 길이고 짧은 체험이긴 해도 최고의 기량 속에서 잠시나마 번득이는 빛은 대체로 에고를 극복했거나 망아(忘我)에 이른 것처럼 보이며, 그 과정은 집중과 구성적으로 관련된다." (249쪽) 이덕무는 팔뚝이 종이를 잊고, 종이는 먹을 잊는 글쓰기 체험을 증언한다.

 

내 마음은 한 가지 경계에 깃들어 형상과 접촉하여 만약 하는 바가 있게 되면, 갑자기 눈동자가 돌아가고 팔뚝이 움직이며 손가락이 덩달아 붓을 잡는다. (…) 마음은 눈을 잊고, 눈은 팔뚝을 잊고, 팔뚝은 종이를 잊고, 종이는 먹을 잊고, 먹은 벼루를 잊고, 벼루는 붓을 잊고, 붓은 종이를 잊게 되니, 이러한 때에는 팔뚝과 손가락을 마음과 눈이라고 불러도 괜찮고 먹과 벼루를 붓과 종이라고 불러도 괜찮을 것이다. 고요히 마음을 거두고 맑게 눈을 안정시켜 (…) 잠깐 사이에 붓과 종이, 먹과 벼루, 마음과 눈, 팔뚝과 손가락은 서로를 도모하지 않고, 또 앞서 하던 일을 까맣게 잊게 된다(195~196쪽, 정민 2000 재인용)

 

육체를 벗어나는 노력이 의식이라면, 의식을 넘어서려는 노력에 집중이 있다. 자기가 지닌 애초의 그릇의 한계를 넓히려는 노력이 공부일진대, 공부의 중심에는 집중이 있게 마련이다. 김영민은 다양한 각도에서 자기(1)를 잊는 영도의 체험(0) 또는 나(1)와 너(2)가 맞부딪히고 어긋나고 분망해지는 세속을 벗어난 (귀)신의 경지(3)를 언급한다.

 

대개 달인의 반열에 오른 사람들은 완고한 에고를 잊어버리는 체험을 증언한다. 일본의 마사지사들은 손님의 몸을 마사지하는 상황에서 손님의 몸을 치료하는 때에는 자신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대신 마사지를 해준다고 느낀다. "진짜 달인은 자신이 손님을 고치는 게 아니라 자기와 손님을 둘러싸고 있는 큰 존재의 힘을 빌려, 그걸 손님 몸에 흘려넣어요. 우리 마사지사는 그 힘을 나타내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아요." (304쪽, 이소마에 2016 재인용) 인간의 합리적인 이성으로 포착하기 어려운 낌새나 기별과 같은, 오늘날 '미신'으로 간주되는 앎의 영역은 나의 깜냥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그러나 내 몸을 통해서 감지되는 타자를 예감케 한다. 오이겐 헤리겔이라는 신칸트학파의 교수는 일본에서 활쏘기를 배울 때, 길을 잃고 헤매는 심정으로 활을 쏘다가 어느 날 스승인 아와 겐조가 보는 앞에서 무심히 활시위를 당겼다가 놓았더니, 스승이 엎드려 절 하면서 "그가 쏘았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내가 나와 싸우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 나를 잊었고, 그렇게 찾아온 '그'는 무심한 몸에 자연스레 들어선 것이다(310~311쪽 참조).

 

차분한 집중의 형식은 에고를 넘어서기 위해 에고를 억압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의식을 임계점까지 밀어붙여야만 의식 아닌 의식의 지점에 도달하고 '그'를 불러들일 수 있다. 불교 식으로 말하자면, 상념이 사라진 상태가 공(空)이지만, 공에 이르기 위해서는 상념을 통하지 않을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출세간의 목적이 출출세간에 있듯, 불립문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언어를 통해 언어를 잊어야 한다. 그러니 집중이 성공하기 위한 조건은 반복적인 행동과 그에 가미된 정성이다. 반복되는 행동을, 정성을 다해서, 마음을 다해서 행하게 될 때, 나를 잊으며 내 몸에 없던 새로운 길이 만들어진다. "과연 남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차분하고 견결하게 이루어지는 집중과 정성이야말로 달(達)과 성(聖)으로 가는 좁은 길이다."(360쪽)

 

집중에 의해 터득된 앎은 알고도 모르는 역설적 지경에서 성취된다. 자아를 망각하는 경지는 얼핏 광기나 치매와 겹쳐 보인다. 광기와 치매 둘 다 자아를 잊은 상태라는 점에서는 집중 행위와 동일하다. 천재라고 일컫는 사람들의 기이한 행적과 그에 동반하는 창조성은 집중과 광기의 형식적인 동형성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집중은 형식이되, 내용을 잃은 형식이 된다. 내용은 영도에 이르고 형식만 남은 상태, 그곳에 온고지신, 법고창신의 새로운 창조성이 발생한다.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다.

 

바로 이 인(仁)하다는 말 속에 집중의 역설성 혹은 집중의 탈세계성이 새겨져 있다. '인하다'는 것은 생이불유(生而不有)하듯 부드럽게 옮겨가는 처신이며 이윽고 '오른손이 한 선행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인데, 이는 응당 불가능한 행위다. 그것은 의식의 바다에서 올라온 집중이 바로 그 의식을 초월하는 지경의 불가능성을 잠시의 무지개처럼 내보이는 형식이다. (439쪽)

 

김영민이 일러주는 달인 또는 성인의 변증법은 결코 자기계발 담론이 아니다. 자기계발이 완고한 에고를 확증하고 사회적 존재로서 자기를 실현시키는 세속적 삶의 적응에 목적을 두고 있다면, 김영민이 강조하는 달인이나 성인이 되기 위한 절차탁마의 과정은 오히려 에고와 세속을 떠난 자리에서 지속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만들어 가려는 방향성이며, '선비로 시작하여 성인으로 끝마친다'(순자)에서 확인되듯 삶을 조형해가는 의지이다.

 

나는 최근에 글씨쓰기 연습을 하고 있다. 평소 글씨체가 악필이어서 공공기관에서 서류를 작성할 때에도 서류를 읽는 상대방이 글자를 제대로 식별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글씨체를 바꿔보려고 '생각'은 했지만 생각은 아직 공부가 아니다. 생각이 그치면 글자는 이내 예전 모양으로 회귀하였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하여 글씨체를 바꿔주는 책, 『나도 손글씨 잘 쓰면 소원이 없겠네』를 샀다. 책에서 제시하는 글씨체를 '본'으로 삼아서 그 본이 보여주는 '틀'에 따라 그대로 따라쓰기 위해서 노력했다. 나는 최근 3주 동안 하루를 제외하고 매일 글씨를 썼다. 글씨체를 눈여겨 보고, 글자에 따른 자음과 모음의 배치를 신경쓰면서. 첫 일 주일 동안은 천천히 쓰면 다른 글씨체가 나왔지만 빠르게 쓰자마자 바로 예전 글씨체로 되돌아왔다. 기존의 버릇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2주가 지나자 신경 쓰지 않는 순간에도 '본'으로 삼은 글씨체의 모습이 나오기 시작했다. 빨리 쓰더라도 약간의 변화가 감지되었다. 가로획을 쓸 때 왼쪽으로 조금 더 뻗은 모양이 되고, 자음 이응이 더 원에 가까워졌다. 그것은 내가 한 것이지만 동시에 내가 한 것이 아니다. 내 의식의 타자인 몸이 움직인 덕이다. 식별이 불가했던 악필은 천천히 쓰면 꽤 균형잡힌 글씨로 보일 만큼 변모했다. 여전히 삐뚤빼뚤한 부분이 있어서 그리 아름답지는 않지만, 계속한다면 더 좋은 버릇이 몸에 깃들 것이다. 늘 그 '꼴'이었던 내 글씨체는 '본'을 만나서 하나의 '틀'을 얻었다. 그 틀에 복종하겠다는 생각이 없었다면 나는 예전 그 꼴 그대로였을 것이다. 자기 변화의 요체는 자기를 성장시키는 틀에 대한 복종에 있으며, 그 과정에 담기는 인간의 집중과 정성에 달려 있다.

 

내가 이 짧은 글에서 언급한 집중의 양상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그는 훨씬 방대한 영역에서 집중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일본의 문화에서 나타나는 차분함을 서술하는 데에 한 장을 할애하기도 하였고, 공동체적 삶 속에서의 집중과 공부에 관한 담론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출출세간을 연상하게 하는 그의 공동체론은 타인의 비평에 노출된 가운데 좋은 몸을 얻고, 적절하게 응하며, 현명한 복종과 지배를 실천하는 생활양식을 벼려나가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부처가 세속을 떠나서 중생을 구제할 수는 없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성인의 길에 들어서기로 결의한 자는 탈속이 아닌 세속에서, 그렇지만 그 세속과 창조적으로 불화하면서 새로운 생활 양식을 창조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일전에 이이가 성인이 되기로 한 이상 터럭만큼도 물러서서는 아니될 것이라고 단호히 말했듯. 그러나 말이 쉽지 그 일은 얼마나 지난할 것인가! 제대로 이행한다면 메시아에 방불케 할 실존이리라. 김영민의 책을 읽고 나서 『중용』의 다음과 같은 문장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나는 성실함[誠]은 진실[誠]이라는 믿음으로 살아가고자 한다.

 

진실(誠)이란 하늘의 길이고, 진실로 나아가는 것은 사람의 길입니다. 진실이란 힘쓰지 않아도 중에 들어맞고 숙고하지 않아도 원칙과 부합되므로 차분하고 침착하게 도에 맞으니 성인에게 가능합니다. 진실로 나아가는 것은 선을 골라서 굳건하게 잡는 것입니다. (『중용』, 2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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