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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를 호흡하는 철학,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 | 기본 카테고리 2021-07-31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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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

발터 벤야민 저/김영옥,윤미애,최성만 공역
길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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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는 문학이 구원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온몸으로 부딪히는 현실은 모순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선량한 자가 핍박받고 악한 자가 득세하는 세계. 그렇지만 문학 속의 이야기는 현실과 닮았으면서도 달랐다. 과거로부터 전래한 신화와 이야기들은 착한 자에게 복을 내려주었다. 선한 자가 몰락하고 약자가 죽음에 이르는 비극적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이야기를 전달하는 형식, 그 비극성 속에 일말의 비판적 전망과 희망이 있었다. 『파우스트』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도 모순은 존재했지만, 작품의 완결된 형식 속에서 질서 있고 아름답게 삶이 직조되어 있었다. 무질서하고 황폐하며 추악한 현실과는 대조적이었다. 나는 그런 아름다움을 사랑했다.

 

철학은 문학에 좀 더 접근할 수 있는 도구였다. 지금도 여전히 철학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정의할 수 없지만, 문학으로 접근하는 통로로서 철학은 일종의 세계관에 가까웠다. 문학이 현실과 이질적이었기 때문에 현실에서 통용되는 코드로는 문학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철학은 문학의 이질성을 다른 언어로 해명해 주었다. 플라톤을 위시하여 아리스토텔레스, 공자와 맹자가 들려주는 말들은 모두 도끼가 되어 고정관념을 깨뜨렸다. 알튀세르와 푸코는 인간이 온전한 주체가 아니라 구조에 의해 호명된 형성물이라고 알려주었다. 사르트르는 타자가 나의 자유를 시선으로 강제하는 지옥이라고 했다. 그 모든 철학의 담론들은 텔레비전 광고, 저널리즘이 즐겨 인용하는 통계와는 다른 결로 다가왔다. 나는 철학이 은폐된 진리를 계시해준다고 믿었다. 그림자를 실재로 믿고 살아온 수인은 철학의 은총으로 드디어 동굴에서 빠져 나온 것이다!

 

지금에 와서는 문학과 철학 역시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구원이란 없다. 신의 이름 하에 신음하던 인간이 해방되는 서사 속에 흑인이나 여성이 억압되는 은폐된 구조가 발견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도 약자에 대한 무의식적 배제와 타자화가 나타난다. 문학사에서 칭송 받는 작품이라 하더라도 특정한 관점을 취할 수밖에 없으며, 일정한 한계를 피할 수 없다. 어쩌면 문학 작품에 나타나는 질서와 아름다움은 특정 타자를 배제한 결과물일 수 있기에 환상이며, 잘못 실현되면 기만이 된다. 철학은 그 자신의 담론이 이데올로기가 됨을 감수하고 주장하는 총체적 세계관이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도,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도 인간과 세계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려는 노력이다. 철학자가 만든 철학의 총체성은 구체적인 인간과 세계를 추상해서 얻은 대가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담론 안에서 명제가 참이 되더라도, 담론 바깥에서 무력해진다. 그래서 모든 담론은 이데올로기이다. 인간은 편견과 고정관념, 좋은 말로 선이해를 떠나서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현전의 형이상학을 비판적으로 보려는 자유인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길은 중단없이 비판 작업을 이어가는 것뿐이다. 사회가 주입한 이데올로기를 철학이라는 대항 담론으로 깨부순 후에는, 철학에 대립하는 반철학 또는 비철학을 세움으로써 철학 이데올로기를 허문다. 진정한 해방에는 결말이 있을 수 없다. 한 존재자가 이 세계에서 숨쉬기를 마치는 순간까지 비판을 지속하려는 의지에 자유가 있다.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는 그러한 자유를 실천하는 책이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인식 체계의 모순을 날카롭게 직시하고 자본주의의 모순이 첨예하게 침식되어 있는 도시를 낯설게 바라봤던 철학자의 사유가 펼쳐져 있다. 백 여 년 전에 탄생한 이 책은 오늘날 읽어도 참신한 시선들로 가득하다. 벤야민은 점증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자유주의, 전체주의 기운과 거리를 두고 있다. 비판적 거리는 당연히 내용 상으로도 드러나는 것이지만 독자가 주목하게 되는 지점은 책과 글의 형식이다. 주유소, 확대사진, 골동품, 벽보와 같은 도시에서 만나는 대상이 표제어인데 그것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다른 연상을 펼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주유소

삶을 구성하는 힘은 현재에는 확신(Uberzeugungen)보다는 사실(Fakten, 事實)에 훨씬 더 가까이 있다. 한 번도, 그 어느 곳에서도 어떤 확신을 뒷받침한 적이 없었던 '사실' 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진정한 문학적 활동을 위해 문학의 테두리 안에만 머물라는 요구를 할 수 없다. 그러한 요구야말로 문학적 활동이 생산적이지 못함을 보여주는 흔한 표현이다. 문학이 중요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은 오직 실천과 글쓰기가 정확히 일치하는 경우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포괄적 지식을 자처하는 까다로운 책보다, 공동체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더 적합한 형식들, 예컨대 전단, 팸플릿, 잡지 기사, 포스터 등과 같은 형식들이 개발되어야 한다. 그와 같은 신속한 언어만이 순간 포착 능력을 보여준다. 사람들의 견해란 사회생활이라는 거대한 기구에서 윤활유와 같다. 우리가 할 일은 엔진에 다가가서 그 위에 윤활유를 쏟아 붓는 것이 아니다. 숨겨져 있는, 그러나 반드시 그 자리를 알아내야 할 대갈못과 이음새에 기름을 약간 뿌리는 것이다.(69~70쪽)

 

표제어는 '주유소'이지만 글의 내용은 주유소 자체를 다루지 않는다. 연관성이 있다면 주유소-기름-윤활유의 연상에 의한 연결뿐이다. 글은 유물론을 말한다. 확신은 관념론 편이다. 헤겔의 변증법은 세계를 파악하는 주체의 힘과 권능을 강조한다. 타자는 상위의 인식으로 도달하기 위한 반테제로서 의미를 지닌다. 변증법적 지양은 새로운 진리를 획득하는 방법론이었다. 그러나 벤야민은 변증법과 다른 방향에서 진리를 마주하고자 한다. 확신보다 사실이 삶을 구성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주체의 관념 바깥에 실재하는 타자의 힘과 권능을 중시한다.

 

문학이 문학적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기존에 확정된 문학의 범주에 안주하지 말아야 한다. 과거에 진리는 책, 거대한 체계로 인간사와 자연사를 정리한 담론 안에 있었지만, 현대에는 전단, 팸플릿, 포스터가 정보를 실어 나른다. 전단, 팸플릿, 포스터는 자본주의 사회의 물적 토대와 무관하지 않다. 그것은 상품을 유통시키는 매개 역할을 담당한다. 이 현대적인 매체들, 자본주의 사회에서 통용되고 소비되는 언어의 형식을 타고 진리가 전파될 수 있다. 왜냐하면 벤야민이 살던 시대에 이미 자본주의와 이를 뒷받침하는 대중사회가 정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시대의 변화를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헤겔이 지향했던 절대 정신으로서의 학문 체계, 거대한 학문적 구조가 아니라 파편적이고 단편적인 정보와 사실들이 구성하는 힘을, 관련 없어 보이는 것들이 한순간 의미있게 성좌가 되는 순간을 더 중시했다.

 

벤야민은 '엔진에 다가가서 그 위에 윤활유를 쏟아 붓는 것'이 19세기의 담론이라면 '대갈못과 이음새에 기름을 약간 뿌리는 것'은 20세기의 담론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의견은 옳았을까? 이 역시 상징보다 알레고리를 선호하는 특정 관점의 이데올로기임에 틀림 없지만, 그의 의견은 어느 정도 옳았다. 타자를 주체에 동화시키기보다는 타자의 균열에 자기 자신을 거는 철학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런 철학만이 반성적 철학이며, 신화가 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거리를 둘 수 있기 때문이다. 끊임 없이 변화하는 세계와 발을 맞추어 진보하는 인간의 사유이기 때문이다. 문학이 문학다움을 고수할 때, 철학이 철학다움을 주장할 때, 그것들은 급격히 보수화되고 망가진다. 느닷없이 침입하는 바이러스 같은 타자를, 그 사실을, 왜곡하지 않고 직시하는 정직성만이 해방이다. 그는 현대를 호흡하는 철학자였다. 당대를 지배하는 공기와 향기를 미세하게 식별할 줄 아는 탁월한 감식안을 지니고 있었다. 철학이 대중에게 충격을 준다면 그것은 '까다로운 책'보다는 가볍고 날렵한 '팜플렛'과 같을 것이다. 오늘날로 번역한다면 방송과 유튜브를 외면하고 대중에게 충격을 주기 어렵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벤야민의 말이 전적으로 옳았다고 보기는 힘들다. 책의 충격 효과는 유튜브보다 훨씬 강력하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다시 엔진에 다가가서 그 위에 윤활유를 쏟아 붓는 것이 필요한 시대가 도래할지도 모르리라.

 

어쨌든 주유소, 차량에 연료를 주입하는 장소는 벤야민에게 새로운 통찰을 가져다준다. 주유소의 일반적인 쓸모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어 있는 자연스러운 인식이라면, 벤야민은 교환가치로 환원되어 버린 특정 공간을 다시 사용가치로 환원시킨다. 그런데 사용가치는 주유소의 기름이 본래 지니고 있던 '연료'로서의 기능이 아니라 '유물론 선언'으로 재배치된다. 주유소는 새로운 신화, 꿈이 된다. 그곳에서 부르주아의 신화를 대체할 새로운 신화가 탄생한다. 그 신화를 벤야민은 자신의 꿈 이야기로, 기계 장치 메커니즘의 세부 묘사로, 책읽기가 비행기를 타고 공중에서 보는 길이라면, 베끼기는 두 발로 걸어가는 길이라는 주관적 은유로, 말리는 충고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삶의 지혜가 담긴 경구로, "천재는 근면함이다."(74쪽)라는 통찰이 담긴 문장으로 내어 보인다.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에 나열되어 있는 글들은 독립적이면서 각자가 새로운 신화를 구성하는 별들로 반짝인다. 글들에서 의미를 찾고 직조하는 몫은 독자에게 달려 있다.

 

벤야민의 탁월함은 사유를 이미지화하는 능력에 있다. 사유는 개념이고, 이미지는 직관이다. 사유는 언어와 논리의 영역이지만 이미지는 세계와 감각의 편이다. 벤야민은 이미지로 사유를 전개하는 독특한 글쓰기를 창안해 내었다. 그것은 상투적인 소통과 진부한 코드를 벗어나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 관점과 연결되어 있으며, 무엇보다도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사물을 열린 자세로 수용하는 개방성을 미덕으로 갖는다. "우리가 이미지의 세계에 끌리는 것은 지식에 대한 알 수 없는 어떤 은밀한 반항심 때문이 아닐까?"(223쪽) 아, 철저하게 관념론자인 나로서는 벤야민의 글쓰기가 부러울 따름이다. 나도 세계에 손을 내밀어 본다. 더 감지하고 느끼고 싶다. 더욱 풍요롭게.

 

운율에 맞게 구상되었으면서 나중에 어느 한 구절에서 리듬이 빗나간 글이야말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산문이다. 그것은 마치 장벽의 갈라진 틈새를 통해 연금술사의 방 안으로 흘러든 빛살이 여러 결정체, 구, 삼각형들이 빛나도록 하는 것과 같다.(97~98쪽)

 

사람을 대할 때 일상적 예절을 중시하면서 거짓말을 비난하는 사람은 유행에 맞게 옷을 입으면서 정작 내의는 입고 있지 않은 사람과 같다.(109쪽)

 

상상력이란 무한히 작은 것 속으로 파고들어갈 줄 아는 능력이고, 모든 집약된 것 속으로도 새로운, 압축된 내용을 풍부하게 부여할 줄 아는 능력이다. 요컨대 상상력은 어떤 이미지든 접어놓은 부채로 여길 줄 아는 능력, 그 부채가 펼쳐져야 비로소 숨을 쉬게 되고 또 새로이 펼쳐진 그 폭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특성들을 내부에서 연출해 보이는 그러한 능력이다. (126쪽)

 

내부공사 관계로 임시 휴업!

꿈에서 나는 총으로 목숨을 끊었다. 총을 쏘았을 때 나는 깨어나지 않았다. 잠시 시체로 누워 있는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런 다음 잠에서 깨어났다.(141쪽)

 

내 글에 등장하는 인용문들은 무장을 하고 나타나 한가롭게 지나가는 행인에게서 확신(Uberzeugung)을 강탈하는 도적떼와 같다.

범죄자를 죽이는 것은 윤리적일 수 있다. 그러나 범죄자를 죽이는 것의 합법화는 결코 윤리적일 수 없다.

신은 모든 인간에게 영양을 공급한다. 그리고 국가는 모든 인간을 영양실조에 걸리게 한다. (149쪽)

 

정신의 깨어 있는 상태(정신집약, Geistesgegenwart)야말로 미래의 진액이기 때문이다. 순간에 일어나는 일을 정확하게 인지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저 멀리 놓여 있는 것을 미리 아는 것보다 더 결정적이다. 징표, 예감, 그리고 신호는 낮이고 밤이고 물결처럼 우리의 신체기관을 통과하고 있다. 그것들을 해석할 것이냐 아니면 이용할 것이냐, 이것이 문제다. (153~154쪽)

 

사람이 자신의 강점을 알게 되는 곳

그곳은 그의 실패에서이다. 우리가 우리의 약점 때문에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업신여기고 그 약점을 부끄러워한다. 하지만 우리가 강한 곳에서 우리는 우리의 패배를 업신여기고 우리의 불운을 부끄러워한다.(172~173쪽)

 

충고를 부탁받은 사람이 제대로 충고하기 위해서는 먼저 충고를 부탁하는 사람 자신의 의견을 물어보고 그다음 그 의견을 승인해주는 것이 좋다.(185쪽)

 

첫 번째 꿈

율라(Jula)와 함께 나는 어디를 가고 있었다. 우리의 일정은 산행도 산보도 아닌 어정쩡한 것이었다. 우리는 산 정상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희한하게도 나는 돌출한 암벽을 뚫고 나와 암벽과는 엇갈린 방향으로 하늘을 향해 비스듬히 치솟은 말뚝을 산 정상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그 위에 올라갔을 때 그것은 산 정상이 아니라 오히려 편편한 고원이었고, 그 위에는 양편으로 상당히 높은 고풍스러운 집들이 서 있는 넓은 길이 있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걷지 않고 그 길을 따라 달리는 차에 타서 나란히 뒷좌석에 앉았다. 그런데 우리가 타고가는 동안 그 차가 방향을 틀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내 몸은 율라 쪽으로 기울어졌고 나는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 그녀는 내게 입이 아니라 뺨을 갖다 댔다. 그녀에게 키스를 하고 있는 동안 나는 그녀의 뺨이 상아로 되어 있고 그 뺨을 따라 정교하게 까만 줄이 길게 칠해져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아름다움에 압도당했다.(187쪽)

 

성공은 세상사의 변덕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공은 그 성공을 추구하는 의지와는 하등 상관이 없다. 성공의 진정한 본질은 성공을 초래한 원인들이 아니라 성공이 예정된 사람들의 모습에서 드러난다. 성공의 정체는 바로 성공의 총아들에서 밝혀진다. 그 총아들이란 곧 성공의 응석받이들, 성공의 의붓자식들이다. 세상사의 변덕과 짝을 이루는 것은 개별 존재 속의 괴팍함이다. 이 점을 보여주는 것은 예로부터 희극의 특권이었다. 희극에서 관철되는 정의는 하늘의 작품이 아니라무수한 실수들이 모여 이루어낸 작품, 마지막 작은 실수 하나로 마침내 정확한 결과를 산출하게 되는 그런 실수들의 작품이다. (188쪽)

 

재기발랄하게 훈련받은 신체가 펼치는 연기를 자신의 스타일에 맞게 사유에 부여하는 것이 바로 훌륭한 작가의 재능이다. 훌륭한 작가는 결코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을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쓰는 글은 그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만 도움을 준다.(2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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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철학의 철학, 『비철학자들을 위한 철학 입문』 | 기본 카테고리 2021-07-28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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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비철학자들을 위한 철학 입문

루이 알튀세르 저/안준범 역/진태원 해제
현실문화연구(현문서가) | 2020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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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는 오인의 형태 아래 있는 인지이고, 미망의 형태 아래에서 어떤 현실을 암시하는 것.(245쪽)

 

철학자. 그들을 생각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고뇌하는 표정이다. 그들은 골방에서 인간과 세계에 골몰한다. 세상의 온갖 근심과 고통이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는 듯, 그들은 사유한다. 세상사와 멀찍이 거리를 두고 논리와 추상의 세계로 나아간다. 렘브란트가 그린 <명상 중인 철학자>는 철학자에 관한 우리의 관념을 명징하게 표상한다. 창밖으로 빛이 들어오는 지하실에서 책상 앞에 앉은 노인이 생각에 잠겨 있다. 나선형으로 회돌아 올라가는 계단은 그가 거처하는 장소의 깊이를 가늠케 한다. 창밖에서 쏟아지는 햇살의 반대편에는 침묵과 같은 어둠이 있다. 그는 빛과 어둠을, 실재계와 현상계를, 선과 악을, 주체와 객체를 성찰한다.

렘브란트, 명상 중인 철학자, 1632, 패널에 유채, 28 x 34 cm, 네이버 미술백과 참조.

망치를 들고 있는 노동자에게, 바코드를 찍는 마트 직원에게 철학에 관심이 있는지 물어보자. 그들은 아마 손사래를 칠 것이다. "철학이요? 그런 걸 왜 해요, 골치 아프게." 실제로 그들에게 주어진 삶의 문제는 철학적 사유와 무관한 실천, 노동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다니는 회사에 대해서, 봉급에 대해서, 여가에 대해서 물어본다면 그들은 나름대로 눈빛을 반짝이며 대답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무엇인지를 일관성 있게 설명하는 논리가 발견될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는 철학의 전문가들, 철학을 가르치는 교사가 아니지만, 삶 속에서 철학적 사유를 전개한다. 세계관 혹은 가치관이라고 할 만한 것들을 인간은 각자가 마음에 품으며, 매 순간의 선택 속에서 실천한다.

 

모든 사람에게 자연스러운, 이 철학은 어떤 것일 수 있는가? 그대가 주변에 아는 사람들 그러니까 평범한 사람들에게 질문해본다면, 아마도 그들은 겸손해서 답을 피하다가 결국엔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래, 내겐 내 나름의 철학이 있어”라고. 무엇일까? “사태를 보는 하나의 방식." 그대가 질문을 진전시켜본다면, 그들은 말할 것이다. "삶에는 내가 직접 경험해서 잘 아는 사태들이 있어. 예컨대 내가 하는 노동, 내가 교류하는 사람들, 내가 다녀본 고장들, 내가 학교나 책에서 배운 것. 이런 것을 인식이라 부르자. (중략) 나는 나의 인식들을 상회하는 관념들을 가져. 예컨대, 세계의 기원에 관해, 죽음에 관해, 고통에 관해, 정치에 관해, 예술에 관해, 종교에 관해.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이 있지. 이 관념들은 내게, 좌와 우에서, 분산되어, 무질서하게 왔고, 서로 분리되어 있으며, 총체를 이루지 못했어. 하지만 점차, 그 이유는 모르겠으나, 이 관념들은 통합되었고, 그리하여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어. 내가 나의 인식들을 전부, 혹은 거의 전부, 이와 같은 일반적 관념들 아래, 그것들의 통일성 아래 집결시킨 거야. 그렇게 해서 나는 일종의 철학을, 내가 알지 못하는 사태이든 아는 사태이든 이것들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견해를 만들었어, 나의 철학, 그건 나의 관념들 아래 통합된 나의 인식들이야.” 도대체 이런 철학은 무엇에 쓰는 거냐고 그대가 묻는다면, 그는 “단순해, 내 삶을 이끌어주는 거지, 내게 북쪽을 지시해주는 나침반 같은 거야. 하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각자는 저마다의 철학을 만들지.”라고 답할 것이다. (51~52쪽)

 

인간은 사태를 나름대로의 인식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관념으로 조직한다. 철학은 관념들을 통일성 있게 집결시킨 총체적 관점이다. 이런 점에서 소위 '개똥 철학'이라는 일반인의 철학하기가 가능하다. 세계 안에서 사회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인간은 그것이 의식되지 않더라도 특정 관점과 전제에 따라서 세상을 인식하고 파악하고 분석하며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존경과 외경의 눈빛으로 숭앙하는 철학사의 영웅들, 소크라테스를 위시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토마스 아퀴나스, 홉스, 루소, 후설, 하이데거, 푸코, 데리다, 공자, 맹자, 순자, 주희, 왕양명의 사유는 무엇인가? 그들의 사유는 일반인의 사유와 무엇이 다른가? 다를 리가 있겠는가? 사실 그들의 철학하기와 일반인의 철학하기는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보통 사람들은 '철학'이라고 하면 손사래를 친다. 철학이 거창하고 사변적이며 형이상학적인 고담준론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이다. 그런 고정관념을 형성하는 자들을 알튀세르는 '철학 교사'라 칭하고 있다. 그들은 유명한 철학자들의 개념을 소유하고 그들이 쓴 책을 읽고 또 읽으면서 소가 되새김질하듯 의미를 반추한다. 그들에게 위대한 철학자들이 쓴 텍스트는 심원하여 무한히 샘솟는 우물과 같다. 과학자들은 특정 현상에 대한 탐구가 끝나면 그 의미를 재차 파헤칠 필요가 없지만, 철학 교사들은 철학자의 텍스트에서 계속 새로운 의미를 발굴한다. 철학은 그 자체로 완결되어 있고, 충만하며 무한하다. 알튀세르는 철학 담론에서 역사성을 제거하고 총체적 의미를 재발굴하는 철학 교사들을 관념론의 편으로 세워둔다. 알튀세르는 관념론이 지금까지 (서양) 철학을 지배해 왔다고 주장한다. 관념론은 필연의 철학이다. 이를 테면, 관념론 철학은 세계의 다양한 계기들과 관념을 체계적으로, 통일성 있게 만들어주는 '부동의 원동자' 혹은 '신'이라는 이념을 설정한다. 신은 인간 인식에서 진리를 보증한다. 중세처럼 신을 확고하게 믿는 시대가 아니라 하더라도 데카르트나 칸트 역시 인간의 인식과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신을 요청했다. 거기에서 억지가 생겨난다. 알튀세르는 '철학'이라는 이름을 독점한 관념론에 '비철학'인 유물론을 세워놓는다.

 

기원에는 신도 없고 무도 없으며, 아니 차라리 기원이 아니라 시작이고, 시작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먼저 실존하는 질료인데, 질료의 요소들의 마주침(우발적이고 임의적인)에 의해 질료는 세계가 된다. 그리고 이 마주침은, 모든 것을 좌우하는 이 마주침은 우발성과 우연성의 형상이지만 세계의 필연성을 생산한다. 우연성은 신의 개입 없이 오로지 단독으로 필연성을 생산한다는 것. 말하자면 세계는 저 홀로 생산된다는 것, 기원에 대한 관념론적 질문을 시작(또는 사건, 도래)에 대한 유물론적 질문으로 교체함으로써, 의미를 갖지 않는 질문들이, 세계의 기원에 대한 질문만이 아니라 거기에 결부된 모든 것,신에 대한 신의 전능함에 대한 신의 불가해성에 대한 시간과 영원에 대한 질문 등등이 청산된다는 것.(62~63쪽)

 

틀림없이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죽음이 세계 안에 실존하며 세계에 군림한다는 관념을, 유물론자들이 옹호하는 이 관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삶은 유한하며 시간 속에서 제한된다는 것을 말하는 일만은 아니다. 이는 세계에는 어떤 의미도 갖지 않으며 아무것에도 봉사하지 않는 숱한 사태가 실존함을 긍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특히, 세상 어느 곳에서도 상보물이나 보상 없이 고통과 아픔이 실존할 수 있음을 긍정하는 일이다. 이는 절대적 상실들(결코 채워질 수 없을), 되돌릴 수 없는 실패들, 어떤 의미도 후과도 없는 사건들, 사막의 모래 속으로 사라지는 거대한 강들이 그러하듯 어떤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역사의 무로 사라져 유산되고 마는 기획들과 심지어는 문명들이 실존함을 인정하는 일이다. 이러한 사유가 의지하는 유물론적 테제에 따르면, 세계 자체엔 어떤 의미(사전에 고정된)도 없으며, 세계는 차가운 천체의 무 안으로 사라진 무수히 많은 다른 세계 사이에서 돌출하는 기적적 우연으로만 실존한다. (71쪽)

 

유물론은 철학의 역사에서 한 번도 주류가 된 적이 없었고 늘상 관념론에 의해 억압당했지만 그 명맥을 유지해 왔다.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스피노자, 마키아벨리, 마르크스에 이르는 계보는 우발성을 필연으로 믿는다. 관념론은 그들의 진리를 보증하기 위해 역사를 지우지만, 유물론은 역사를 중요한 계기로 삼는다. 알튀세르는 후기에 마주침의 유물론으로 우발성을 사유한 바 있다. 빗금으로 평행하게 내리는 원자의 세계에서 편위가 발생할 때, 나타는 변화. 그 변화마저도 신의 섭리로 포섭하는 게 관념론이라면, 우발성에서 새로운 계기를 찾는 것이 유물론이다. 알튀세르는 비주류였던 유물론이 실현할 수 있는 정당한 철학적 실천과 가능성을 검토하기 위해 '거대한 우회'를 감행한다. 이를 위하여 기술적(기본적) 인식, 과학적 인식, 예술, 정치, 종교, 이데올로기, 철학적 층위의 추상과 실천 두 축을 차례로 검토한다.

 

이 짧은 글에서 알튀세르가 선보이는 거대한 우회를 모두 소개하기란 분량과 능력 양 면에서 불가능하다. 여기에서는 독서를 통해 새로이 알게 된 사실들을 짚는 것으로 만족할까 한다. 우선 철학이 사태를 보는 하나의 방식이라는 앞선 인용문의 문장으로부터 시작해보자. 인간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칸트가 밝혔듯 인간의 인식은 선험적으로 주어진 감성적 인식틀(시간, 공간)과 오성적 인식틀(12범주)에 의해서 이해된다. 있는 대상은 인간의 인식틀을 거쳐서 표상과 개념을 형성한다. 표상화 작업 자체가 대상의 특정 부분을 가지치듯 쳐낸 산물이다. 알튀세르는 이러한 인식을 '기술적 인식'이라고 했으며, 그러한 인식을 보편성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과학적 인식'이라고 지칭한다. 기술적 인식이나 과학적 인식은 인간이 본디 추상 능력을 지닌 존재임을 드러내준다. 추상은 세계 이해의 전제 조건이다.

 

인간이 추상에 의해 세계를 인식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명백한 근거는 언어이다. 인간은 언어라는 필터를 통해서 세계를 이해하고 타인과 소통한다. 칸트는 각자 주관적인 인간이 대상에 대해서 동일하게 인식할 수 있는 까닭은 선험적인 인식틀이 내장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인간의 사회적 속성을 간과한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밝혔듯, 인간은 태어나면서 이미 공적 형식에 참여한다. 아이는 언어를 배울 때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생활 속에서, 구체적인 맥락과 환경 속에서 언어의 쓰임새를 배운다. 언어 사용을 게임에 빗댄 것은 언어를 배우는 과정이 게임의 규칙을 익히는 과정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대하는 사물들, 그리고 그 사물에 묻어 있는 우리의 관념들, 정서들은 온전히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다. 사회적인 것은 어느 정도 추상화를 감내한 결과이다. 마르크스의 『자본론』 첫 분석이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구별이다. 상이한 사용가치를 가진 상품들은 추상화된 사회적 노동시간을 척도로 가치를 지니게 되며, 교환된다.

 

지루하지만 언어를 통해 더 재고해보자. 소쉬르는 언어의 사용 양상을 랑그와 파롤로 구별했다. 랑그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공유하고 있는 추상적 구조이며, 파롤은 개개인의 구체적 발화를 가리킨다. 불라는 단어를 듣고 한국인은 뜻을 구별해주는 최소 단위로서의 'ㅂ', 'ㅜ', 'ㄹ'을 인식한다. 'ㅂ'을 'ㅍ'으로 바꾸어 소리낸다면 한국인 화자는 '풀'이라는, 의미가 전혀 다른 단어로 인식할 것이다. 그러나 외국인은 '불'과 '풀'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한국인에게는 유의미한 'ㅂ'과 'ㅍ'의 차이가 외국인에게는 무의미한 것이다. 한편, 같은 'ㅂ'을 발음해도 길동이의 'ㅂ' 소리와 춘향이의 'ㅂ'소리는 미세하게 다르다. 한국인 화자라면 그것을 같은 소리로 인식한다. 이 때 한국인 화자의 의식 속에 있는 'ㅂ'은 추상화된 랑그이며, 길동이의 발음과 춘향이의 발음에서 실현되는 'ㅂ'은 파롤이다. 인간이 언어로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이 추상화 능력을 공유하고 있어야 한다. 추상의 양상은 사회마다, 나라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그래서 언어는 사회적인 것이며, 추상 자체의 능력은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내재해 있더라도 그 실현 양상은 다르다.

 

인간의 인식이 추상의 산물임에도 우리는 그것을 추상화했음을 잘 인지하지 못한다. 우리가 살기 위해 공기를 호흡하는 것이 자연스럽듯, 언어를 배우고 사용하는 것도 자연스럽고, 대상에 대한 인식 역시 자연스럽다. 우리는 특수한 사회적 조건과 특수한 추상의 영향 하에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랑그는 인공적 구조이지만 자연스럽게 체득된다. 인간의 이러저러한 인식은 관념을 형성하고 세계에 대한 모종의 관점을 만들어 낸다. 모든 인식의 토대로서 그것을 진리로 인식할 수 있도록 떠받쳐주는 토대는 신념이다. 이를 다른 말로 이데올로기라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모든 인식은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다. 알튀세르 식으로 말하면 이데올로기는 주체를 '호명'한다.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구성하는 관념들이 인간들의 자유로운 “의식들"에 폭력적으로 스스로를 강제한다. 인간들이 이런 관념들을 진실하다고 자유롭게 재인지할 수밖에 없는 형태들 안에서, 인간들이 진리가 거주하는 곳,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의 관념들 안에서 진리를 재인지할 능력이 있는 자유로운 주체들이라고 스스로를 구성할 수밖에 없는 형태들 안에서, 인간들을 호명함에 의해.

이와 같은 것이, 본질적으로, 이데올로기적 실천에서 작동하는 메커니즘이다. 개인들을 주체들로 변형하는 이데올로기적 호명 메커니즘. 그런데 개인들은 언제나 - 이미 주체들이기에, 다시 말해 "개인들"은 언제나 - 이미 어떤 이데올로기에 예속되어 있기에(인간은 본성상 이데올로기적 동물이다) 일관성을 가지려면, 이데올로기는 주체들을 주체들로 호명함으로써, 말하자면 (이미 주체들인) 구체적 개인들을 어떤 지배이데올로기에서 어떤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옮김으로써 "의식들의 내용" (관념들)을 변형한다고 말해야만 하는데, 저 새로운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을 통해 낡은 이데올로기를 지배하고자 투쟁한다.(215~216쪽)

 

인간은 특정 시대, 특정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의 영향 하에서 세계를 받아들인다. 인식의 과정은 필연적으로 이데올로기의 필터를 거치게 된다. 이데올로기가 특정 계급의 이해관계를 반영하고 있으며, 다른 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자신의 것인양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될 때, 그것은 허위 의식이 된다. 이를 테면,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세계와 인간을 바라보게 되면, 그들은 인식의 차원에서 자신이나 부르주아를 왜곡해서 이해한다. 자기를 부정하고 부르주아의 세계를 선망하는 프롤레타리아의 의식이 그것이다.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암말 몰리가 인간이 선물한 리본을 달고 자기 모습에 감탄하는 장면을 떠올리면 적당할 것이다. 부르주아는 억압적 장치가 아니라 이와 같은 이데올로기 국가 장치를 통해서 프롤레타리아를 지배해 왔다. 억압적 장치는 반발을 사지만, 이데올로기 장치는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한다. 이데올로기는 오류가 아니라 미망이다. 오류는 그것을 인식한 사람에게 교정해야 한다는 의식을 불러일으키지만 미망은 오류를 품고 있으면서도 잘못인 줄 모르게 한다.

 

철학적 추상이 모든 인식 중에서 가장 총체적이다. 과학적 추상은 인식하려는 구체적인 대상을 갖지만 철학적 추상은 구체적 대상이 없다. 추상의 결과를 다시 추상하는 것이 철학이다. 박이문은 철학의 담론을 2차 담론이라고 했다. 과학이 대상을 포착한 인식을 다시 인식하는 것이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그러한 특성에 주목하여 철학의 대상은 언어라고 단언했다. 철학은 명제를 세우는 수학과 달리 테제를 세운다. 테제는 "입장 정립"이다. 철학은 자신의 관점을 관철하기 위해 반대자들의 논리를 자신의 체계 속에 포섭한다. 예를 들면, 플라톤은 자신의 이데아론을 전개하기 위해서 그들과 대척점에 있었던 상대주의자들, 소피스트들을 대화편에 등장시킨다. 자신이 전개하는 철학의 완전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반대자들의 테제들을 빌리는 것이다. "요컨대 모든 테제는 본성상 안티테제인 것."(305쪽)

 

철학에 목적이란 인식들의 생산이 아니라 적이 지닌 이론적 힘에 맞서는 전략적이고 전술적인 전쟁이며, 이 전쟁에는 모든 전쟁이 그렇듯 판돈이 걸려 있는 것이다. 실제로 철학은 다시 말해 상이한 철학들의 앙상블은, 시대마다 이론적 전장이라고 표상되어야 한다. 칸트는, 그 전장에서 (자기 철학이 승리해 다른 철학들을 전부 무장해제 시키면서) 비판 철학의 “영구 평화"가 군림하게 하고팠던 그는 선행 철학인 “형이상학" (칸트의 표현)을 정확히 “전장"이라 불렀다. 추가해야 하리라. 옛날 전투들의 참호들로 인해 구멍이 뚫린 파란만장한 전장이라고, 포기했다가 점령하고 다시 점령당한 요새들이 늘어선 전장이라고, 유난히 치열했던 전투들의 이름이 붙은 전장이라고, 과거로부터 튀어나오는 새로운 전투부대들의 부활에 좌우되는 전장이라고, 선도적 새로운 세력을 규합하는 전장이라고, 추가해야 하리라, 전장에는 주어진 시대마다 주요 전선이 부차적 전선들과 나란히 나타날 수 있다고. 모든 적대 세력이, 모든 부차적 전선과 마찬가지로, 이 주요 전선 주위에서 결집되고 양극화된다고. 추가해야 하리라, 최초의 역사 철학 이래로 전투들이 지속된 전장이라고. 동일한 전투가, 새로운 임시 이름들 아래 관념론과 유물론의 전투를 이어가는 동일한 전투가 항상 있는 전장이라고.(306쪽)

 

그리하여 철학적 실천들, 철학자가 실현하는 노동은 일종의 진지쟁탈전이 된다. 반대자들이 구축해 놓은 진지를 탈환하면서 새로운 진지를 쌓고, 그것을 다시 반대자들이 탈환하여 재배치하는 과정이 철학의 역사이다. 철학자들은 어째서 쟁탈전에 그토록 진지했는가? 왜 그와 같은 노동을 기꺼이 하려고 하는가? 관념론자들은 주장할 것이다. "우리는 진리를 위해 복무한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그렇지 않다고 폭로한다. "재미삼아 하는 이 전투에는 현실적 판돈들이 [걸려] 있는데, 이 전투에 걸린 진지해 보이는 판돈들이 정작 전장에서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는 이유는 ["판돈들"이] 이 전장 외부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310쪽)

 

철학자는 이데올로기를 대상으로 노동한다. 철학은 이데올로기를 변화시키려고 사유한다. 관념론자들은 대체로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에 복무해 왔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독배를 들게 한 공화주의자들을 증오했다. 그는 대토지를 소유한 귀족들의 지배를 옹호했고, 그의 철인왕 구상부터 이데아에 이르기까지 귀족적 이데올로기를 옹호하는 거대한 체계를 구상했다. 부르주아 계급이 지배층으로 부상하기 시작하는 근대에 철학자들은 '주체'라는 범주를 사유해 왔다. 주체는 사유재산을 처분하고 양도할 수 있는 법적 자유를 지닌다. 주체는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하는 지배 이데올로기에서 필수적인 범주로 성립한다. 데카르트를 위시하여 홉스, 칸트 등이 주체의 문제에 천착할 때 그들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복무하고 있었다. 철학마저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진리의 이름으로 진지하게 사유했다. " 까닭인즉 그들 모두가 "저 자신이 가능한 참된 역사적 임무"를 부여받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사태는 이처럼 흥미롭게 진행된다. 말하자면 아무도 그들에게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데, 그들은 마치 “저 자신이" 위임을 받은 듯이 행동한다는 것이요, 그들은 저 자신이 지배계급 또는 피지배계급들의 대표자들이라고 느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말하자면 철학적 생산물의 시장에 나와서, 자신들의 이론적 상품을 구매하고자 하는 이에게 그것을 제공하는 것이다."(319쪽)

 

오늘날에도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범접할 수 없는 신화로 자리잡고 있다. 이를 테면, 인기를 누리던 연예인이 사업가와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는 기사, 게다가 그 연예인이 임신했거나 출산을 했어도 여전히 아름다운 몸매를 유지하고 있다는 기사는 현대인이 가져야 하는 행복의 관념을 증언한다. 아름다운 연예인은 사업가가 소유하고 과시할 만한 좋은 상품인데, 대중은 그러한 상품을 소유한 자를 선망하거나 자신도 자발적으로 그러한 상품이 되기를 무의식 중에 소망한다. 출산 이후의 아름다운 몸매는 부유한 계층이 아니라면 실현하기 어렵다. 그녀들은 육아로부터 자유롭거나 자신의 식단을 관리해주는 매니저가 있고, 신체를 관리할 수 있는 물질적 시간적 여력이 충분하다. 저널리즘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담론을 유포하는데, 비판적 거리를 두지 않는다면 필자와 독자는 여지없이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배당하고 만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철학적 실천을 다시 감행해야 한다. 지배 이데올로기에 복무하고 있는 철학이 '철학'이라는 이름을 가져가버린 시대에, 지배 이데올로기에 충격을 주는 철학이 '철학'으로 불릴 수 있도록 진지를 탈환해야 한다. 관념론 철학은 역사를 제거해 버린다. 역사가 제거되면 우발성과 변화는 배제된다. 그들에게는 지금이 이미 조화롭고 완벽한 세계이다. 알튀세르는 유물론 철학에 의한 실천을 주문한다. 철학적 실천이 이데올로기를 변형하는 것이라면, 지배적 철학이 지금까지 지배 계급을 위해서 복무해 왔다면, 이에 저항하는, 억압받고 무시당한 피지배계급을 위한 철학이 있다. 그들을 대변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담을 이론이. 그것은 철학의 역사에서 떳떳하게 철학이라는 이름을 가지지 못했으므로 '비철학'이라고 부르자. 다시 말해 비철학의 철학이 필요하며, 철학을 대변하던 '철학자', '철학 교사'의 철학이 아니라 '비철학자'가 사유하는 그것을 요구해야 한다. 비철학자가 철학이라는 이름을 탈취해 올 때, '철학'이라고 하면 손사래를 치는 일이 사라지고, 더 인간적인 세계, 억압하고 지배하기보다는 공존하고 배려하는 세계, 갈등이 상존하더라도 합리적으로 개선해 나가는 세계를 만들어가기 위하여 토론하고, 창조적인 사유를 즐기는 철학이 일상화될 것이다. 철학은 그 때 "혁명을 위한 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렘브란트가 그린 <명상 중인 철학자>는 철학자의 단편일 뿐이다. 생을 이어가는 모든 현장 안에서 철학은 싹틀 수 있다. 실천 안에서, 이론적으로, 부단히 사유하면서.

 

부르주아가 자신들의 영구적 철학체계들을 생산하기를 단념한 시대에, 부르주아가 관념들에 대한 보장과 전망을 단념하고 자신들의 운명을 컴퓨터와 기술관료의 자동화에 맡기려는 시대에, 부르주아는 사유될 수 있는 가능한 미래를 세상에 제시할 수 없는 시대에, 프롤레타리아가 일어나 도전할 수 있다. 요컨대 철학에 삶을 되돌려줄 수 있으며, 계급 지배로부터 사람들을 해방하기 위해 철학을 “혁명을 위한 무기"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367~3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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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시대적 생활양식, 『비판이란 무엇인가/자기 수양』 | 기본 카테고리 2021-07-28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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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비판이란 무엇인가? 자기수양

미셸 푸코 저/오트르망,심세광,전혜리 공역
동녘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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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는 '자기 수양' 강연록에서 '자기 배려', '자기 돌봄'에 대해 말합니다. 역시 푸코 특유의 계보학적 방법론으로 고대 그리스, 스토아 학파, 기독교가 헤게모니를 잡은 중세로 시기를 나누어 '자기 배려'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변형되어 왔는지를 논증합니다. 푸코에 따르면 '자기 배려(돌봄)'는 주체가 자기와 관계맺는 방식이자 테크닉을 뜻합니다. 그것은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 속 '자기 계발' 논리를 연상시키지만 그가 토론의 질의응답에서 분명하게 말하듯, 자기 배려와 자기 계발은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자기 배려'는 주체가 자기 자신과 관계를 맺으면서 자기를 형성하고 구축해나가는 과정을 가리킵니다. 권력과 장치, 에피스테메와 담론을 말했던 푸코가 이처럼 주체의 형성에 주목하고 있는 것은 놀랍습니다. 그 이전 논의에서는 인간의 주체성을 거의 배제했던 그가 이 강연록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주체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전 논의와의 연속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푸코는 주체를 형성하는 기술 역시 역사적으로 결정되어 있으므로 인간의 근원적인 실존이나 본질 따위는 없다는 아이디어를 여전히 이어가고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자기 돌봄은 주체의 영혼을 돌보는 행위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푸코는 플라톤이 남긴 대화편 『알키비아데스』에서 소크라테스가 알키비아데스에게 하는 충고를 인용합니다. “네가 쉰 살이라면 상황이 심각하겠지. 그때는 너무 늦을지도 몰라. 하지만 너는 아주 젊다. 그러니 바로 지금이 네가 너 자신을 돌볼 때다.”(110쪽) 알키비아데스가 통치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 자기를 돌보아야 합니다. 이 때 돌보아야 할 대상은 자기의 영혼입니다. 영혼의 본질, 신비함을 직시해야 합니다. 스승-제자 사이의 철학적 유대, 사랑으로 결속되어 있는 관계망 속에서 자기 배려가 출현합니다.

 

그런데 기원후 1~2세기가 되면 자기 배려의 방식이 달라집니다. 푸코는 항상 역사적 흐름의 단절을 강조하는데, 그러한 단절이 어째서 나타나는가는 좀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는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면서 자기 배려가 스승-제자의 사랑이나 유대가 아니라 자기를 구축하는 테크닉으로 변형되었음을 증명합니다. "첫째로 이 새로운 자기 수양은 단지 도시 국가의 훌륭한 통치자가 되기 위해서만이 아닌 자기 자신과의 항상적 관계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그것은 불완전한 교육을 보충할 뿐만 아니라 자기와의 비판적 관계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그것은 스승과의 (연애 관계가 아닌) 권위적 관계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넷째로 그것은 영혼에 대한 순수한 명상과는 극명하게 다른 일련의 금욕적 실천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111~112쪽) 자기 수양은 영혼을 직관하는 것 이상으로 지속적인 자기 점검과 구축을 수련하는 과정이 됩니다. 예를 들어, 자기 수양의 방편으로 스토아 철학자들은 메모를 중시하였습니다. 메모는 자기를 되돌아보고 수양할 수 있는 금언들로 채워져 있어, 금언을 수시로 읽고 암기하면서 체화하는 방식으로 자기를 수양했던 것입니다. 이는 일종의 기술, 테크닉입니다.

 

소크라테스의 태도에서 여전히 지배적인 기억의 수양에서 글쓰기의 실천, 그리스 로마의 수양에서의 메모 쪽으로 이동이 행해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기의 자기 수양은 당시에 사람들이hupomnemata라 부르던 사적인 일지(수첩) 활용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적인 일지(수첩)에 그들은 그들이 독서한 바, 대화를 나눈 바, 미래의 명상 주제들을 메모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그들이 꾼 꿈과 매일매일의 일과를 기록해야 했습니다. 편지 쓰기 또한 이러한 자기 수양의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편지에서 그들은 그를 자신과 관계를 맺음과 동시에, 타자와도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타자는 지도자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으며 조언을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모두에게 유효한 조언들을 당신이 해줄 수 있는 누군가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편지 쓰기의 실천이 확산됨과 동시에 자기에 대한 경험은 바로 이 사실로 인해 강화되고 확대됩니다. 자기는 관찰의 장이 됩니다. 세네카와 플리누스 간의 서신, 또 아우렐리우스와 프론토 간의 서신은 자기 자신에게 기울여야 하는 주의와 관련된 이러한 용의주도함과 세심함을 잘 보여줍니다. 자기 자신에 기울이는 이러한 주의는 일상생활의 세세한 내용, 건강과 기분의 미세한 변화, 사람들이 체험하는 신체의 불편함, 정신의 활동, 수행한 독서, 기억나는 인용구, 이러저러한 사건들에 대한 성찰 등에 관계됩니다. 자기와 관계를 맺는 일정한 방식과 일련의 경험의 장이 가시화됩니다. 하지만 이전의 사료들에는 이런 것들이 부재합니다.(119~120쪽)

 

이들은 타인이 강제하거나 세상 살이에 쓸모가 있어서 자기를 돌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 그들은 자기 수양의 의무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기수양은 그들에게 중요한 어떤 것으로서, 큰 가치를 지닌 어떤 것으로서, 그리고 그들에게 좀 더 나은 삶, 더 아름다운 삶, 새로운 실존의 유형 등등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할 수 있는 것으로 제안되었던 것입니다."(168쪽) 자신의 삶을 예술 작품으로 완성하겠다는 의지가 자기 수양의 밑절미입니다. 예술 작품은 시간을 초월하여 세계에 남고 영원한 형상으로 남듯, 자기를 수양하는 주체는 자기와의 관계를 구축하여 자신의 삶을 예술적으로 형성하려고 합니다.

 

고대의 개인이 이런 작업을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삶을 예술 작품으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고대의 개인은 실존의 미학이라는 동기로 인해 이런 종류의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 대단히 중요한 다음과 같은 관념, 요컨대 우리가 배려해야 할(돌보아야 할) 가장 중요한 예술 작품, 미학적 가치와 테크닉을 적용해야 할 가장 중요한 영역은 바로 자기 자신, 자신의 삶, 자신의 실존이라는 관념이 존재해왔고, 이 관념은 우리 사회 내에서도 오래전부터 그러나 다소 약화된 형태로 존재해왔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념은 르네상스 시대에도 발견되고 19세기의 댄디즘 내에서도 발견되지만 단순한 일화들에 지나지 않고 무엇인가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185쪽)

 

저는 이 대목에서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자기 수양을 하는 인간은 '실존의 미학'을 추구합니다. 그들은 다소 금욕주의적인 자세로 자기를 가다듬었습니다. 푸코가 소개하는 자기 수양은 동양 사상과 만납니다. 조선의 선비들이 추구했던 이상은 '성인(聖人)'이었습니다. 그는 내면으로 완성되고 밖으로 잘 다스리는 이상적인 인간입니다. 선비들은 그러한 인간이 되기 위하여 학문을 매개로 자기 자신을 절차탁마하였습니다. 성인은 선비의 지향점이자 동시에 이념형입니다. 현실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선비들은 불가능한 이상에 도달하기 위해서 자신을 끊임 없이 수양하였습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앞머리에 자기 수양이 놓인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분명 조선의 선비들이 실천한 행동 양식은 푸코가 말하는 자기 돌봄과 명확하게 일치하고 있습니다. 『격몽요결』은 율곡 이이가 쓴 공부법입니다. 그 책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것은 공부를 잘하는 법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다스리는 법이었습니다. 몸을 다스려야 학문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와 관계맺는 테크닉인 것입니다.

 

잠깐 다른 곳으로 논의가 샜습니다만, 푸코는 스토아 학파 이후 자기 배려는 자율성을 상실했다고 분석합니다. 기독교의 사목 권력이 자기 배려를 제도 차원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점검하고 확인하는 절차는 고해성사 속에 용해되었습니다. 중세에 이르러 인간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의례 속에서 자기를 발견합니다. 푸코는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자기 배려의 변천을 서술하려고 하지만, 스토아 학파 시대의 자기 배려에 큰 호감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자기 배려'가 실현되던 시대였던 것이지요. 중세 이후의 자기 배려는 변질되고 훼손되어 그 흔적만 남은 것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자기 수양은 근대 이후 정착된 공교육 제도 속에도 용해되어 있습니다. 학교 안에서 아이들은 다양한 교과목을 이수하고, 학교 규칙에 적응하면서 자기를 점검하고 구축하는 다양한 장치와 만나게 됩니다. 당연히 그 안에 자율성이 있을 리 없습니다. 물론, 운이 좋다면 공교육의 제도와 잘 조화를 이루어서 자기를 원만하게, 자발적으로 구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율성이 배제된 교육 제도는 학생을 억압하는 권력 장치가 되기 십상입니다. 파편화된 교과 시간표, 학생의 신상기록이 단편적으로 적힌 생활기록부, 권위에 순종할 것을 강요하는 인간 관계, 교환가치(입시에서의 성공)로 매개되는 지식 등이 모두 권력 장치로서 학생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이러한 장치에 예속되는 동시에 자기를 점검하고 구축해 나갑니다. 이를 다른 측면에서는 '사회화'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자기 수양은 사회화입니다.

 

그런데 영 꺼림칙합니다. 이러한 자기 수양에는 자발성이 제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학생들 개개인이 자기 삶을 예술 작품으로 간주하기를 바랍니다. 자기 존재의 유일성을 믿고, 그 자신이 세계에서 시간의 흐름에도 허물어지지 않고 남아 있을 불멸의 존재를 꿈꾸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불멸은 너무 거창하고 그저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그 길은 금욕주의를 실천하고 자기를 끊임없이 점검하며 갈고 닦는 기술들을 습득해야 하는 가시밭입니다. 그러나 주어진 삶에 만족하고, 탐락의 상태에 빠져서 자기 실존을 자각하지 못한 채, 시간을 죽이며 삶을 이어가는 학생들도 많습니다. 고통 없음이 행복인 줄 알지만 그것은 도피,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은 죽는 날까지 타자와 마주치면서 이질성을 느끼고 더 큰 자기를 만들어가는 도정에 있습니다. 철학자-황제 아우렐리우스가 추구했던 삶도 그런 것이었습니다. 기원후 1~2세기의 삶을 이 시대에 다시 부활시키려는 시도는 무리인 것인가요?

푸코가 명시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았으나, 스토아적 자기 수양은 오늘날 반시대적 행동양식으로 재조명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호명하는 주체, 자발적으로 매력적인 상품이 되려고 하는 자기 계발 담론에 길들여진 주체. 그런 주체로 함몰되지 않으려는 불복종의 생활양식입니다. 물론 현대 사회에서 스토아적 자기 수양을 온전하게 복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자기 배려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도처에, 소수이지만, 존재합니다. 그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자기 수양은 앞서 언급한 '비판' 정신과 공명합니다. 이런 식으로 통치 받지 않으려는 기술. 길들여지지 않으려는 기술. 그 근기 있고 꾸준한 절차탁마. 어쩌면 교육이 꿈꾸어야 할 진정한 해방의 방향성이 여기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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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과 무지의 아이러니, 『오이디푸스 왕』 | 기본 카테고리 2021-07-28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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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오이디푸스 왕

소포클레스 저/강대진 역
민음사 | 2009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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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여, 이제 내가 너를 보는 게 마지막이 되기를! 태어나서는 안 될 사람들에게서 태어나서, 어울려서는 안 될 사람들과 어울렸고, 죽여서는 안 될 사람들을 죽인 자라는 게 드러났으니!(96쪽)

 

지금은 고인이 되신 황현산 선생님은 어느 팟캐스트에서 문학작품을 딱 하나 읽어야 한다면 무엇을 읽는 것이 좋겠냐는 질문에 「오이디푸스 왕」을 추천했다. 질문도, 팟캐스트도 다 흐릿한데, 평론가의 대답만 명료하게 남았다. 그래, 저거 읽어봐야겠구나. 책만 사두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제야 집어들었다. 생각보다 분량이 짧은 희곡이었다. 그리고 구조적으로 완벽한 작품이었다. 작품은 예술가로부터 철학자에게까지 두루 영향을 끼쳤다.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주장했다. 르네 지라르는 오이디푸스가 공동체에 만연한 폭력을 해소하는 희생 제의의 제물이라고 했다. 박찬욱 감독은 그의 영화 모티프를 눈을 뜨고도 진실을 알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에서 차용했다.

 

「오이디푸스 왕」은 테바이에 저주가 내려 주민들이 오이디푸스에게 탄원하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테바이는 작물이 자라지 않고 여인도 새로운 생명을 잉태할 수 없는 불모지로 변한다. 아폴론의 신탁을 받은 크레온은 테바이에 큰 죄를 지은 자가 있어 저주가 내린 것이니 이를 바로 잡아야 저주가 끝난다는 전언을 가져온다. 오이디푸스는 공식적으로 그 죄인을 찾아 추방하겠다고 공언하고 적극적으로 그를 찾으려고 탐문한다.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하나의 결말 - 죄인을 찾으려는 그 자가 바로 죄인이다 - 를 향해간다. 마치 가지런한 벽돌을 정교하게 쌓아올린 건축물처럼 모든 사건, 모든 문장이 차곡차곡 쌓여서 구조를 완성한다. 테이레시아스의 불길한 예언, 오이디푸스와 크레온 사이의 갈등, 이를 중재하러 온 이오카스테에게서 알게 된 진실, 때마침 코린토스의 플뤼보스가 죽었음을 알리는 사자의 등장, 뒤이어 알게 되는 출생의 비밀, 살해 현장을 목격한 목동에 의해 죄인이 바로 오이디푸스 자신이었음이 밝혀지는 결말까지 인과관계가 치밀하게 얽혀 있다.

 

작품 구조는 선명한 대조와 대립 구도를 띤다. 오이디푸스는 테바이를 위협하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서 나라를 구원한 영웅이다. 그는 자신의 지혜로 왕이 되었다. 하지만, 작품이 전개되는 내내 그는 의혹과 어리석음으로 흔들린다. 테이레시아스가 죄인은 오이디푸스라고 지목하는 순간부터 그가 크레온과 결탁하여 자신을 음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명확한 근거도 없이 크레온을 반역자로 지목하면서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그를 의심한다. 그는 지혜로운 동시에 어리석은 자다. 지혜로움의 측면에서 그는 테이레시아스와도 대조된다. 테이레시아스는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지만 진실을 알고 있는 반면, 오이디푸스는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졌지만 진실에 맹목이다. 작품은 이러한 대립구도를 입체적으로 만들면서 갈등을 심화시키고, 최종 지점에서 한순간에 해소한다.

 

테이레시아스 내 선언하건대, 그대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가장 수치스럽게 어울리면서 그 사실을 모르고 있고, 어떤 악에 처해 있는지도 보지 못하고 있소.

오이디푸스 그대는 그런 말을 계속 지껄이고도 정말 대가가 없으리라 생각하는 게요?

테이레시아스 진리에 힘이 있는 한 그렇소.

오이디푸스 진리에 힘이 있긴 하지. 그러나 당신을 위해서는 아니오. 당신에겐 힘이 없소. 당신은 귀도, 정신도, 눈도 멀었기 때문이오..

테이레시아스 그대는 불쌍하게도, 곧 이 모든 사람들이 그대를 꾸짖을 그런 말로 날 꾸짖고 있구려.

오이디푸스 그대는 영원히 이어지는 밤 속을 헤매고 있구려. 그러니 나든 다른 사람이든 빛을 보는 사람은 결코 해칠 수 없으리다.

테이레시아스 그대가 나에 의해 쓰러질 운명은 아니기 때문이오. 이 일을 이뤄 내는 데 관심을 가진 아폴론으로 충분하니까.

오이디푸스 이것들은 크레온이 생각해 낸 것이오, 아니면 당신이 그런 거요?

테이레시아스 크레온은 당신에게 아무 재앙도 아니오, 당신 스스로 자신에게 재앙이지. (43쪽)

 

가장 선명한 대조는 신과 인간의 모습에서 발견된다. 아폴론은 테바이의 왕이었던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에게 신탁을 내린다.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오이디푸스와 부모는 모두 이 예언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친다. 이오카스테는 오이디푸스가 아기였을 때 목동에게 아기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다(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진짜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르는, 또는 양부모를 친부모로 잘못 아는 계기가 된다). 오이디푸스는 장성하여 퓌토에서 아폴론에게 똑같은 예언을 듣고 예언을 실현시키지 않기 위해 양부 플뤼보스가 다스리는 코린토스를 떠나는 길에 마차가 다니는 삼거리에서 자신의 친아버지를 살해하고 말았으며,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줄 모르고 어머니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게 된다. 비극 속 인간들은 자신의 숙명에 저항하지만, 저항의 과정마저 숙명을 실현한다. 신의 예언을 거부하는 것이 곧 예언을 성취하는 길이 되어버린다. 오이디푸스를 저주받은 운명으로 결정한 아폴론은 인간의 입을 통해 지속적으로 언급되지만, 그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지배-저항, 숙명-의지, 비가시성-가시성의 대립이 신과 인간의 모습을 대위법적으로 그려보인다.

 

신의 섭리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는 인간 운명을 그려보이는 것이 작품의 주된 테마이겠지만,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눈을 찌르는 행위는 예언에 없는 행동이다. 그러니까 오이디푸스는 잠재적으로만 내재했던 '무지'와 '맹목'을 가시적인 징표로 표시하면서 테바이에 내린 저주를 종식시킨다. 저주는 표면과 이면의 불일치, 거짓으로 인해 진실이 가려져 있는 불의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무지한 자가 현명한 왕으로 알려져 있는 불의한 상황을 오이디푸스는 눈을 찌름으로써 올바르게 회복한다. 전령이 오이디푸스가 눈을 찌른 순간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 눈들은 그가 당한 것이든 행한 것이든, 끔찍한 것을 보지 말라고, 그리고 앞으로는, 그가 보지 말았어야 하는 사람들을, 그가 알고자 원했으나 알아보지 못한 이들을 어둠 속에서 보라고 말입니다."(102쪽) 표면과 이면의 불일치를 되돌려놓은 것이다. 그는 진실에 맹목이었지만 진실을 알고자 했다. 무서운 진실을 모른 체하지 않고 직시했다. 그러므로 인간에 대한 신의 우위라는 테마는 운명에 저항하는 인간의 의지를 내포하고 있다.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비극은 세계의 실상을 총체적으로 포괄한다.

 

작품은 현실 속에서는 희석되어 공존하는 모순들을 선명하게 그려보인다. 일치하지 않는 표면과 이면의 경계가 뚜렷하게 드러나면서 세계의 아이러니를 형상화한다. 가장 충격적인 아이러니는 오이디푸스의 정체성 속에서 확인된다. 그는 아들이자 남편이고, 형제이자 아버지이다. 이오카스테의 저항도 인상적이다. 그녀는 오이디푸스가 진실에 다가가는 것을 이미 두려워한다. 그녀는 신탁의 무의미함을 강하게 피력한다.

 

사람이 왜 두려움을 가져야 하나요, 운수가 그를 지배하고, 그 어떤 일에 대한 예견도 확실치 않은데요? 누구든 되도록 신경 쓰지 않고 사는 게 최선입니다. 그리고 그대는 어머니와의 결혼에 대해 두려워하지 마세요. 필멸의 인간들 중 여럿이 이미 꿈에서도 어머니와 함께 잤으니까요. 이런 것을 아무 일도 아닌 듯 여기는 사람이 삶을 가장 쉽게 견디는 법입니다.(82쪽)

 

이 순간 이오카스테는 오이디푸스보다 강하다.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삶을 마감하지만 달리 해석한다면 신이 지배하는 세계에 대한 강력한 항변이자 부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오카스테의 행위로 신과 인간의 대립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인간의 심리가 지닌 연약성에 대한 통찰도 돋보인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진실에 접근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죽인 사람을 차마 라이오스라고 일컫지 못하고 라이오스의 친척이라고 언급한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모두 죽였소. 한데 만일 그 이방인이 라이오스와 친족 관계에 있다면, 이제 누가 나보다 더 불행할 수 있겠소?"(72쪽) 그는 이오카스테가 자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차의 일행을 살해한 존재가 '도적'이 아니라 '도적들'이라고 한 말에 희망을 건다. 극히 미세하고 사소한 말의 차이 속에서 오이디푸스의 두려움과 자기를 속이고 싶은 유혹을 발견하게 된다. 기원전 5세기에 살던 인간을 과거에 살던 존재라고 무시할 근거가 있을 것인가? 그들도 무의식을 알고 있었음이 틀림 없다. 다만 무의식이라고 지칭하지 않았을 뿐.

 

오이디푸스가 저지른 근친 상간과 친부 살해는 인류의 대표적인 금기이다. 후속작인 「안티고네」는 '죽음'에 대한 금기를 다루고 있다. 금기를 위반하는 플롯은 항상 인간을 긴장시킨다. 근친 상관, 친부 살해, 시체 유기를 죄악으로 규정한 자는 소포클레스의 비극에 의하면 신이다. 신이 사라진 시대에도 금기에 대한 위반은 신성의 거부로 간주된다. 왜 신은 금기를 만들었고, 어째서 인간은 금기를 지키다가도, 어느 순간 금기의 경계선에서 위태로움을 느끼는가? 왜 인간은 이토록 불완전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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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쓸모,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 기본 카테고리 2021-07-28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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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야마구치 슈 저/김윤경 역
다산초당 | 2019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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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야마구치 슈는 기업을 컨설팅하는 직업에 종사한다.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적 사유를 경영론, 조직론 등에 접목시켰다. 그는 서문에 약간의 자기 자랑을 섞어서 자신이 철학 개념을 알게 되어 문제와 세계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통찰력이 생겼음을 언급한다. 타인과 다른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안목, 세밀하게 문제를 통찰할 수 있는 촉은 철학적 사유에 힘 입은 바가 크다는 것이다. 철학 개념은 세계를 추상한 결과이므로 대상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니체의 르상티망, 쿤의 패러다임, 사르트르의 앙가주망은 인간 심리나 행동의 특정 부분에 경계를 만들고 빛을 비춰주어 해명한다. 철학 공부는 분명 삶에 쓸모가 있을 것이다. 지식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면, 그 어떤 학문적 지식에 쓸모가 없겠는가?

 

그런데 쓸모란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여기에도 두 가지 상이한 관점이 존재한다. 하나는 실제적인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이론적인 측면이다. 야마구치 슈의 접근은 실제적이다. 니체가 말한 르상티망은 약자의 전도된 도덕을 추동하는 인간의 저열한 심리 기제이다. 약자가 강자에게 갖는 원한이 르상티망인데, 니체에 따르면 강자를 악으로, 약자를 선으로 전도시킴으로써 자기 존재를 정당화하려는 약자들의 책략 때문에 도덕이 탄생했고 강자를 억압하는 비겁한 문화가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저자는 인간에게 원한과 같은 심리가 보편적으로 작동하고 있으니, 마케팅이나 조직 운영에서 이를 감안하거나 이해하면서 방책을 마련하라고 주문한다. 인간은 원한을 갖기 쉬운 동물임을 알고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모르는 것보다는 낫다. 그런 측면에서 책은 철학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에게 쓸모 있고 유용하다며 독자를 설득한다.

 

반면, 이론적 측면의 쓸모는 세속에서 볼 때 쓸모가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인간의 인식적 자유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니체가 쓴 『도덕의 계보학』을 읽고 실존의 한쪽이 무너지는 경험과 같은 것. 르상티망 개념에 비추어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송두리째 바뀌는 경험.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세계관이 지각변동을 일으키면서 한순간에 붕괴되는 듯한 경험.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아득함 속에 여태까지 세상을, 자신을 잘못 알고 있었음을 통렬하게 깨닫는 경험. 아니, 도덕이라는 불변의 진리가 사실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우연의 산물임을, 적어도 권력의 작용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시적 규범임을 알게 되었을 때 느끼는 정신적 위기감. 그것은 테레사 수녀가 신의 목소리를 듣고 심장에 화살을 맞은 것 같은 법열과도 다르지 않은 고통이다. 인간은 그러한 체험으로 한차례 깨지고 새롭게 세계관을 구축하며 이전보다 자유로운 실존을 얻는다. 철학적 사유의 근본적인 쓸모는 바로 '자유'에 있다.

 

야마구치 슈의 책은 유쾌하고 재미있다. 개념 중심으로 챕터가 구성되어 있고 챕터의 길이는 짧다.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길이이다. 그러나 부담 없이 읽은 만큼 독자를 변화시키는 강도는 크지 않다. 다시 말해, 이 책을 읽었을 때, 천지가 진동하는 세계관의 충격을 경험하기는 어렵다.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개념을 언론에서 떠드는 유행의 변화 정도로 오해할 소지가 있는 것이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사건은 지금 우리가 진리라고 믿고 있는 근본적인 토대 자체를 뒤흔드는 일이다. 전환기에 새로운 패러다임은 금기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를 테면, 오늘날 조선일보에 '김정은 만세!'를 싣는 용기와 같다. 아니, 지동설은 이보다 훨씬 더 신성모독적이었을 것이다. 토마스 쿤의 책을 읽어야만 패러디임 전환이 얼마나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인지, 정상과학이라고 지칭되는 패러다임에서 오류를 읽어내고 그 틈새를 벌려서 새로운 이론을 만들고 정착시키기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필요한지를 알게 된다. 3쪽 정도로 간단히 요약할 성질이 아니다. 한 권을 3쪽으로 요령 있게 정리해주면 편하고, 그렇게 정리된 지식을 앵무새처럼 떠들면서 과시용으로 써먹기에는 좋다. 그러나 자신의 세계관을 갈아 뒤엎고 인식의 자유를 얻기에는 한계가 있는 책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 언급하는 철학 개념보다 심리학 개념에 더 눈이 간다. 책에는 다양한 심리학 실험이 소개되고 있다. 이미 『설득의 심리학』에서 소개되어 유명한 밀그램 실험이 눈에 띈다. 버튼을 눌러서 누군가에게 전기 충격을 가하는 실험에 참가한 피험자는 상대방이 고통을 호소하고 기절에 이르기까지도 권위 있는 의사의 말에 따르면서 전기충격 버튼을 누른다. 경악을 금치 못할 이 실험에서 권위에 맹신하는 인간의 허점을 읽을 수 있다. 책임 소재가 애매해질 때, 인간은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지 않는다. 완전해 보이는 시각에 맹점이 존재하듯, 인간의 마음에도 맹점이 있다. 예상된 보상이 오히려 행동이나 성취를 저해할 수 있음을 밝힌 실험도 흥미롭다. 프린스턴 대학교의 샘 글럭스버는 둔커가 고안한 촛불 실험을 재활용하여 해답을 창의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를 제시하고 대가를 지급하기로 약속했을 때와 약속하지 않았을 때를 비교했더니 대가를 지급하기로 약속했을 때 평균 3~4분 정도가 더 걸린다는 결과를 얻었다. 심리학 실험은 인간 심리에 대한 일반적 믿음을 공격한다. '인간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존재이다.' 또는 '외적 보상이 강할수록 성취 수준도 높아질 것이다.'와 같은 믿음을 심리학은 과학적 실험을 통해 무너뜨린다. 회사를 경영하는 리더들은 심리학에 눈이 갈 수밖에 없다. 심리학에서 제시하는 결론을 염두에 두면서 조직을 개편하거나 이끌면 일반적으로 위험에 빠질 확률이 줄어들 테니까. 심리학이 밝혀낸 인간 일반의 특성은 조직론이나 일상적 의사소통에서 매우 유용하게 활용되기 쉬운 도구들이다.

 

허나, 이러한 심리학도 맹점이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밀그램의 실험에서 모든 사람이 인간을 고문하는 실험을 수락하지는 않았다. 전기충격이 비인도적이라며 거부한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심리학에서 도출하는 결론은 양적 연구나 통계와 같이 일반성이지 보편성은 아니다. 진정한 리더라면, 심리학처럼 인간을 대상화하거나 일반화해서 바라보지 않을 것이다. 그는 모든 인간은 그 자체로 유일하면서도 평등함을 잊지 않으며, 각자에게 주어진 몫을 맡기고 주는 공정함을 실현시키려 할 것이다. 그러나 평등성과 단일성의 모순을 온전하게 결합시키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둘의 모순 관계를 추상의 힘으로 직시하고, 근기 있게 실천하려는 의지를 철학이 준다. 철학이 삶의 무기라면 아마 이런 측면에서 작용할 것이다. 저자는 철학이라는 무기가 나를 지켜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철학의 진정한 쓸모는 무기의 칼끝을 상대가 아닌 자신에게 향하게 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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