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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를 풍자하다, 『동물농장』 | 기본 카테고리 2021-08-03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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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동물농장

조지 오웰 저/도정일 역
민음사 | 2001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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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이 쓴 『동물농장』은 전체주의 사회를 우화로 풍자한 소설이다. 워낙에 유명한 작품이어서 책을 소개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도 회자된 바가 있고, 각종 필독 도서 목록에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 우화가 지닌 장점인, 복잡한 현실을 단순하고 간명하게 보여주거나 역사적인 현실을 의미 있는 플롯으로 엮어서 되비춰주어, 읽는 이로 하여금 세계를 반성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힘이 작품 안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흔히 알고 있듯이, 오웰이 그리고 있는 '동물농장'은 현실 사회주의의 대표 주자였던 소련의 역사를 알레고리하고 있다. 존스 씨가 운영하는 매너 농장은 러시아 혁명 전의 봉건국가를 가리킨다. 존스로 대표되는 지배자(왕과 귀족)는 동물(인민)들을 착취한다. 압제에 시달리던 동물들은 우연한 계기로 존스를 내쫓고 '동물농장'을 세운다. 동물농장은 말 그대로 동물이 주인된 농장이며, 프롤레타리아가 주인된 국가를 연상시킨다. 러시아 혁명기에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이 국가를 이끌었다. 지도자들은 새로 건설된 사회를 구상했고 제도를 정비했고, 강령을 세웠으며, 방향을 설정했다. 그들은 귀족이 아니었지만 몸으로 일하는 계층과 구별되는 노동당의 수장이었다. 노동당원은 지도자 계층이 되었고 인민과 구별되는 특권을 누렸다. 소설에서는 영리하고 합리적인 '돼지'들이 그 역할을 맡는다. 스노볼과 나폴레옹은 동물농장 운영 방향을 두고 부딪치는데, 이는 그들이 권력의 중심에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들의 갈등은 레닌과 스탈린, 트로츠키 사이의 권력 투쟁을 상기시킨다. 오늘날 우리는 혁명의 러시아가 스탈린 독재로 변질되면서 동력을 상실했음을 안다. 소설에서는 나폴레옹이 실권을 쥐면서 폭력과 강압으로 동물을 착취하는 체제가 다시 수립되고 결국 혁명은 변질되며 왜곡되어 버리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보면 소설 『동물농장』은 소련이 형성되고 타락하는 양상을 우회적으로 풍자하고 있는 작품처럼 보인다. 어쩌면, 실제로 사회주의 국가가 붕괴하면서 이 소설은 더 유명해졌는지도 모른다. 오웰의 공격처럼 현실 사회주의는 결국 타락하고 실패한 체제였다. 조지 오웰은 사회주의의 몰락을 예견한 선각자였다. 그렇게 서구 자유주의 국가의 비평가와 저널리스트들은 나팔을 불었을 것이다. 이 작품이 괜히 유명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소련과 대립하고 있던 자유주의 국가에서는 『동물농장』이 반가웠으리라. 자유주의는 자본주의와 한패이다. 자본주의의 상부구조에 개인의 자유를 이데올로기로 포장하는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 장치들이 보이지 않게 작동한다. 문화적 장치로 오웰의 작품은 호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이것은 더 정치한 검증을 요구하는 가설에 불과하다. 허나, 『동물농장』은 사회주의 국가를 비판하는 소설이라는 편협한 해석이 대중화된 오늘의 상황을 보면 가설이 터무니 없지는 않으리라. 적어도 오웰의 작품을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서라고 단정짓는다면 자본주의 사회의 특정 계층은 쾌재를 부를 것이다. 사회주의가 틀렸다면 자본주의는 옳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옳다면 그들이 누리는 특권도 옳다.

 

내가 보기에 『동물농장』의 진정한 주제는 사회주의 풍자가 아니다. 풍자의 대상은 오히려 국가가 아니라 인간이다. 더 정확하게는, 인간의 본성이다. 조금만 더 섬세하게 말하자면, 전체주의를 부르는 인간의 본성을 꼬집는다. 그것은 인간이 문명을 설립한 이래로 끊임없이 반복되어 온 권력의 문제, 지배와 피지배의 모순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까 현실 사회주의 국가만 풍자한 것이 아니라 개체의 자유를 압살하려는 모든 권력을, 타락한 권력을 재생산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공격한 것이다.

 

『동물농장』은 계급이 있던 봉건사회에서 계급을 타파한 혁명이 실은 진정한 혁명이 아니라 지배 계급의 교체에 불과했음을 드러내는 과정으로 플롯이 설계되어 있다. 혁명은 애초에 불평등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동물들이 무력으로 존스 일가를 몰아내고 동물농장의 주인이 되었음을 인식하였을 때, 젖소들이 울부짖는다. 인간을 몰아내자 젖을 짤 인간의 손이 사라진 것이다. 돼지들이 나서서 우유를 짠다. 그런데 짜두었던 우유가 조용히 사라진다. 알고보니 우유는 돼지들이 슬그머니 가로챈 것이었다. 그 사실이 나중에 밝혀지자 스퀼러가 돼지들은 동물농장을 지도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영양소가 필요하므로 돼지들이 그 우유를 차지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로 동물들을 설득한다. 노골적으로 권력을 탐하는 나폴레옹과 달리 스노볼은 동물농장 전체의 발전을 위해서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인간에게 대적해서도 용감하게 싸워서 훈장을 받는 등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긍정적인 지도자로 그려지지만, 그조차도 우유를 소유하는 특권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았다. 사소하지만 불평등은 그렇게 시작된다. 인간이 모이는 사회 집단에서는 크고 작게 지배-피지배 관계, 주인-노예의 관계가 성립하며, 아주 사소하고 작은 차이로 시작된 힘의 불평등이 나중에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소설은 권력의 작용과 불평등의 심화 과정을 미묘하면서도 명쾌하게 보여준다.

 

돼지들은 인간의 글을 읽을 줄 아는 종으로 지식을 독점한다. 염소 뮤리엘과 당나귀 벤저민도 글을 읽을 줄 알지만 돼지들만이 인간이 쓴 책(고급 지식)을 소유하고 지식에 접근하여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안할 권리를 갖는다. 힘센 말 복서는 알파벳을 외우는 것조차 힘들어서 공부를 포기하고 오로지 육체적인 노동에만 헌신한다. 지식의 불평등은 권력의 불평등을 낳는다. 힘을 가진 쪽이 약자를 기만하고 교묘하게 착취하는 상황을 만들어 간다. 나폴레옹은 스노볼을 쫓아낸 후에 스노볼을 점차 배신자, 악마로 만들어간다. 풍차를 만들려는 계획은 스노볼이 구상한 것이지만 나폴레옹은 스퀼러를 이용해 사실은 나폴레옹이 풍차를 계획한 것이고 스노볼은 풍차를 폭파시킨 주범인 것으로 호도한다. 스노볼이 피를 흘려가며 인간과 용감하게 싸웠던 사실도 나폴레옹이 그랬던 것으로 조작된다. 안타깝게도 동물농장의 대다수 동물은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 나폴레옹의 계략에 속아넘어간다. 계명도 바뀐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는 문장은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로 수정된다. 동물들은 그것이 바뀐 것 같다는 느낌만을 갖는다. 나폴레옹의 무력에 유일하게 맞설 수 있는 힘을 가진 복서는 '나폴레옹은 언제나 옳다.'는 잘못된 신념을 죽을 때까지 유지하여 말년에 도살장으로 끌려간다.

 

오웰은 단순히 권력자인 나폴레옹만을 풍자하는 것이 아니다. 지배자에게 지나치게 의존하여 자기 권익을 자신도 모르게 박탈당하는 무지한 대중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동물농장의 동물은 인간의 알레고리로서 서로 같으면서 같지 않다. 동물농장의 오리와 닭과 같은 동물은 선천적으로 학습 능력이 부족하다. 그러나 인간은 그가 인간이라면 선천적인 장애를 가진 소수자를 제외하고 모두가 지적으로 동일한 능력을 지닌다. 누군가 나는 '머리가 나쁘다'라고 단정짓는다면 그는 게으름을 합리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지적으로 탁월해 질 기회와 인연을 얻지 못한 것일 뿐, 혹은 의지를 발휘하지 않았을 뿐, 누구나 탁월해질 수 있는 마음의 싹을 지니고 있다. 오웰이 동물을 내세워서 인간 사회의 모순을 폭로할 때에 독자가 느끼는 묘한 부조리는 이러한 알레고리 효과로부터 온다. 동물과 인간은 같으면서 다르다. 독자는 소설 속 세계와 소설 밖 세계를 오고 가면서 서로를 비춰본다. 독자는 진정으로 모두가 행복을 누리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시민 각자가 모두 깨어 있어야 한다는, 준엄한 경고를 듣는다. 앎은 괴롭고 무지는 편하다. 각자가 편안한 무지에 함몰된다면, 탐락(하이데거)의 상태에 빠진다면 악덕은 재생산되게 마련이다. 대중은 권력을 가진 자들을 견제해야 한다. 오웰이 믿었던 민주주의도 이것이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긴장의 끈을 놓으면 부패한다. 돼지들은 처음에는 평등을 주장하지만 이내 매력적인 선망 기표인 인간 기호를 소유한다. 그것은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암말 몰리가 댕기를 단 자기 모습에 찬탄하는 나르시시즘은 기호의 사이에도 비대칭적인 권력관계가 있음을 시사한다. 댕기는 인간 문명의 표식이며, 인간성을 드러내는 중심 기표이다. 권력을 가진 상류층의 표식이 매력적으로 보이면서 주체를 현혹하는 것이다. 혁명을 지도할 만큼 나름 합리적인 족속이었던 돼지들은 권력을 차지하자 증오의 대상이 되었던 인간의 기호를 소유하려 든다. 존슨이 살던 본채는 폐쇄되었지만 실권을 확보하자 돼지만이 본채에서 생활한다. 인간처럼 침대에 눕거나 술을 마시는 행위는 금지되었지만 돼지들은 예외적으로 허락되어 안락과 향락을 즐긴다. 돼지들의 자녀들이 다닐 학교가 만들어진다. 특권을 대물림하려는 것이다. 그러다가 이내, 돼지들은 인간처럼 두 발로 선다! 돼지들은 어느새 최초의 압제자였던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 대목은 풍자의 절정을 이루고 있다. 권력을 독점한 지배자의 타락은 인간과 돼지를 뒤섞어버린다.

 

열두 개의 화난 목소리들이 서로에게 고함을 치고 있었고, 그 목소리들은 서로 똑같았다. 그래, 맞아, 돼지들의 얼굴에 무슨 변화가 일어났는지 이제 알 수 있었다. 창 밖의 동물들은 돼지에게서 인간으로, 인간에게서 돼지로, 다시 돼지에게서 인간으로 번갈아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누가 돼지고 누가 인간인지,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이미 분간할 수 없었다. (134~135쪽)

 

권력을 가진 주체가 타락하는 현상은 사회주의 국가에 국한된 일이 아니다. 인류사에서 무수하게 반복되었다. 한국사를 조금만 되돌아보면 죽은 사람에게도 세금을 부과해 민중을 수탈했던 잔혹한 시대가 있었다. 오늘날은 어떠한가? 불평등한 사회 구조를 가리기 위해 지금은 유래없이 자유가 보장된 시대라고 선전하는 장치는 없는가? 시민들 모두가 깨어 있기 위해서 지식을 습득하고 기술을 연마하려고 애쓰는가? 그보다는 각자 안락과 쾌락을 추구하며, 자기 부를 불리기에 바쁜 것은 아닌가? 자본주의 국가 역시 자유라는 외피 아래에서 권력은 타락하고 대중은 무지하여 지배와 피지배 계층이 기이한 공생관계 속에서 부조리를 증식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비판은 몰락한 구소련에만 유효한 것이 아니다. 21세기 자본주의 국가가 승리를 구가하고 있는 오늘날 모든 문명 국가에 유효하다. 권력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에 불평등이 존재한다면, 권력을 가진 존재가 피지배자들을 기만하면서 그들을 착취하고 있다면, 허위 의식을 자연적으로 주어진 법칙으로 착각하고 고통스러운 자각보다는 무지 속에서 안락함을 누리려고 하는 인간이 많아진다면, 그곳은 전체주의 국가이다. 자본주의는 전체주의가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동물농장』이 독자에게 작용하는 힘이 강력한 까닭은 소설 플롯의 치밀한 구성에 있다. 메이저의 연설로부터 시작하는 혁명 전야에서 메너 농장을 동물농장으로 바꾸는 혁명, 권력투쟁, 독재, 타락, 매너 농장으로의 회귀에 이르는 사건들이 비약 없이 벽돌 쌓듯 차곡차곡 쌓여 결말에 이른다. 오웰은 정확한 문장을 쓰고자 했다. 정확성은 정치적인 힘이 된다. 독자의 마음을 파고들어가 그를 변화시킨다. 작가가 쓴 작품을 읽고 독자가 현실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면 그는 성공한 것이다. 오웰이 어느 산문에서 주창한 정치적 글쓰기의 한 대목이 인상적이다. 그가 쓴 소설의 힘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짐작하게 된다.

 

좋은 산문은 창유리와 같다. 내 경우 어떤 동기가 가장 강하게 작용했는지 확실히 말할 순 없지만, 그 여러 동기들 가운데 어느 것이 따를 만한 가치가 있는지 나는 안다. 내가 쓴 책들을 돌아보니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었을 때일수록 나는 어김없이 생명력 없는 책들을 썼고 분홍색의 화려한 단락과 의미 없는 문장과 수식하는 형용사들 속으로 속아 넘어갔으며, 그래서 대체로 허튼 소리들을 했다는 사실을 알겠다. (「나는 왜 쓰는가」, 1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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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한 글쓰기, 『나는 왜 쓰는가』 | 기본 카테고리 2021-08-03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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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나는 왜 쓰는가

조지 오웰 저/이한중 역
한겨레출판 | 2010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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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의 산문집을 읽었다. 책 자체가 오웰의 중요한 산문을 모아 놓은 것인데, 나는 그 중 자주 언급되는 유명한 산문을 다시 추렸다. 「교수형」, 「코끼리를 쏘다」는 구체적인 일화를 소설처럼 기술해 놓은 글이다. 책에 수록된 초기 산문이 작가의 경험을 생생하게 전달하려는 경향이 있다면, 「정치와 영어」, 「나는 왜 쓰는가」, 「작가와 리바이어던」과 같은 후기의 글들은 작가와 정치, 글쓰기의 관계를 선언하는 사상이 전면에 드러나고 있었다. 글의 결은 다르지만 오웰이 쓴 산문은 전기이든, 후기이든 상관 없이 하나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정직성'이다.

 

시인 김수영은 「공자의 생활난」에서 '바로 봄'을 선언했다.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사물과 사물의 생리와

사물의 수량과 한도와

사물의 우매와 사물의 명석성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 김수영, 「공자의 생활난」 일부

 

시인은 어째서 바로 보겠다고 하는 것일까. 바로 보겠다는 선언과 의지가 없이는 사물을 바로 보지 못한다는 절박한 의식 때문이다. 생활에 침윤되면 사물을 정확하게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생활인은 공기처럼 당대 이데올로기를 호흡한다. 사회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지배적 담론에 의해 의식을 형성하며 국가 주체로 호명된다. 소위 편견과 고정관념이라고 일컫는 프로그램화된 사고 방식이 주입된다. 그러므로 객관적으로 자명한 대상은 실은 이데올로기의 필터를 거쳐 왜곡된 상으로 인식된다. 들뢰즈가 '다양체'라는 개념으로 물자체의 영역에 있는 대상을 상상한 것도 이러한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시인은 대상을 바로 보겠다고 선언한다. 사물 그 자체를, 사물의 생리를, 수량과 한도를, 우매함까지도. 명석하게 보겠다고 한다. 명석판명한 앎은 데카르트를 상기시키지만, 데카르트를 초과한다. 사물을 바로 보게 될 때, 그는 코기토의 확장이 아니라 죽음으로 도약한다. 당대 이데올로기를 진공상태로 만들면 어떻게 되는가. 그는 소통 불가능한 존재가 되어 버린다. 이데올로기는 일종의 약호인데, 그 약호를 지우는 순간 시인의 언어는 생활인에게 알 수 없는 기호가 되어 버릴 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이 '시'라고 알고 있다. 오웰은 '죽음'까지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시'가 아니라 '산문'을 쓴 사람이기 때문이다.

 

오웰은 대상을 탁월하게 묘사할 줄 안다. 한 인도인의 교수형을 참관했던 경험을 담은 「교수형」에서 형장을 향하는 수인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교수대까지는 40야드 정도가 남았다. 나는 바로 앞에 걸어가는 죄수의 갈색 등을 지켜보았다. 그는 팔이 묶여 있어 어색하긴 했으나 저벅저벅 잘 걸었다. 절대 무릎을 펴지 않고 까닥까닥 걷는 인도인 특유의 걸음이었다. 걸을 때마다 근육이 매끈하게 제자리로 미끄러졌고, 두피에 바싹 붙어 있는 짧은 머리털이 아래위로 춤을 추었고, 젖은 자갈땅엔 맨발 자국이 절로 생겨나듯 찍혔다. 그리고 한 번, 어깨를 한쪽씩 붙든 사람들이 있는데도, 그는 도중에 있는 물웅덩이를 피하느라 살짝 옆으로 비켜갔다. (「교수형」, 25~26쪽)

 

독자는 죄수의 뒤를 따르는 글쓴이의 시선으로 죄수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에서 이미 대상을 언어로 묘사하려고 일찍부터 노력해 왔음을 털어 놓은 바 있다. 그런데 묘사력은 단순히 말을 멋지게 부리는 것으로 힘을 얻지 못한다. 대상을 정확히 보려는 주의력과 관찰력이 요구된다. 오웰은 김수영 식으로 말하면 사물을 바로 보려했다. 그가 버마에서 식민지 경찰 생활에 일찍이 환멸을 느꼈던 것도 그에게 제국의 이데올로기를 초과해 버리는 감각적 촉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제국주의 관념에 빠져들지 않았다. 사물을 정확하고, 정직하게 볼 줄 알았다. 그래서 위 인용에 이은 서술은 편견의 고리에서 빠져나와 대상과 정직하게 조우하는 시선을 증언한다.

 

이상한 일이지만, 바로 그 순간까지 나는 건강하고 의식 있는 사람의 목숨을 끊어버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죄수가 웅덩이를 피하느라 몸을 비키는 것을 보는 순간, 한창 물이오른 생명의 숨줄을 뚝 끊어버리는 일의 불가사의함을, 말할 수 없는 부당함을 알아본 것이었다. 그는 죽어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가 살아있듯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모든 신체기관은 미련스러우면서도 장엄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내장은 음식물을 소화하고, 피부는 재생하고, 손톱은 자라고, 조직은 계속 생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교수대 발판에 설 때에도, 10분의 1초 만에 허공을 가르며 아래로 쑥 떨어질 때에도, 그의 손톱은 자라나고 있을 터였다. 그의 눈은 누런 자갈과 잿빛 담장을 보았고, 그의 뇌는 여전히 기억과 예측과 추론을 했다 - 그는 웅덩이에 대해서도 추론을 했던 것이다. 그와 우리는 같은 세상을 함께 걷고, 보고, 듣고, 느끼고, 이해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2분 뒤면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우리 중 하나가 죽어 없어질 터였다. 그리하여 사람 하나가 사라질 것이고, 세상은 그만큼 누추해질 것이었다. (26쪽)

 

「코끼리를 쏘다」 역시 그의 지적 정직성을 잘 드러낸다. 발정난 코끼리가 마을에 난입하여 사람을 죽이고 집을 부순다. 오웰은 연락을 받고 사건 현장에 가서 총을 구한다. 그런데 일이 커져 오웰의 주변으로 버마인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그들은 오웰이 총으로 코끼리를 쏘아 죽이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천 명이 모여들었다. 이천 명의 눈 앞에서 그는 합리적이고, 강인하며, 과감한 지배자로서 행동해야 했다. 코끼리를 쏘지 않는 것은 압제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이천 명의 시선에 떠밀려, 죽이고 싶지 않았던 코끼리를 총으로 명중시킨다. 어떻게 보면 그는 일종의 영웅이 된 셈이었다. 허나 그는 자신의 실존적 상황에 부조리와 모순을 느낀다. 저 순간 오웰은 제국-식민지의 역학이 작용하는 생활 공간 속에서 '지배자'의 탈을 쓰고 무대에 오른 연기자였다. 지배자이면서 오히려 피지배자에게 조종당하는 꼭두각시가 되는 기묘한 아이러니를 체험한 것이다. 이를 아이러니로 느끼는 자체가 이미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실존을 증명한다. 그의 산문이 투명하고 산뜻하다면, 그것은 관념의 막을 걷어낸 그의 시선 덕택이리라.

 

후기 산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글은 「정치와 영어」였다. 생활이 타락하면 언어가 타락하는 것 못지않게, 언어가 타락해도 생활이 타락한다는 명제는 울림이 크다. 이 글은 저널리즘과 지식인 담론에서 횡행하는 군더더기 표현이나 라틴어로부터 유래하는 젠체하는 언어, 상투적인 표현 등이 사태를 정확하게 묘사하거나 전달하기보다는 애매하게 처리하여 독자의 정확한 이해를 방해하는 현상을 비판한다. 이러한 상투어는 이해하기는 어렵고 사용하기는 편하다는 특징이 있다. 상투어는 고유한 인식을 포기하고 언어를 편하게 부리려는 정신의 마취 상태를 반영한다. 전도서를 소위 타락한 언어로 번역한 다음 대목은 충격적이다.

 

내가 돌아가 해 아래를 보니 경주는 빠른 자의 것이 아니고, 전투는 강한 자의 것이 아니며, 빵은 현명한 자의 것이 아니고, 부는 사려 깊은 자의 것이 아니며, 총애는 기량이 뛰어난 자의 것이 아니니, 이는 시간과 기회가 그들 모두에게 임하는 까닭이더라.

(I returned, and saw under the sun, that the race is not to the swift, nor the battle to the strong, neither yet bread to the wise, nor yet riches to men of understanding, nor yet favour to men of skill; but time and chance happeneth to them all.)

 

다음은 현대식 영어로 고쳐본 것이다.

 

당대 현상에 대한 객관적 고찰에 따르면, 경쟁적인 활동에서의 성공이나 실패가 선천적인 능력에 비례하는 경향성을 표출하지 않으며, 상당한 예측불능의 요소가 변함없이 고려돼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밖에 없다.

(Objective consideration of contemporary phenomena compels the conclusion that success or failure in competitive activities exhibits no tendency to be commensurate with innate capacity, but that a considerable element of the unpredictable must invariably be taken into account.) (「정치와 영어」, 265쪽)

 

오웰이 지적하듯 두 글의 가장 큰 차이점은 첫째 글이 구체적인 일상어와 이미지로 되어 있는 반면, 둘째 글은 추상적인 단어와 군더더기 표현으로 뒤덮여 있다는 것에 있다. 오웰은 "우리 시대에 정치적인 말과 글은 주로 변호할 수 없는 것을 변호하는 데 쓰인다."(「정치와 영어」, 270쪽)며 타락한 글쓰기를 야유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나를 향한 것이 아닌가! 나 역시 구체적이고 생생한 이미지를 찾기보다는 추상적인 어휘를 선호하는 편이 아니었던가. 글 쓰는 사람은 항상 경계해야 할 것이다. 다음과 같이 글 쓰는 사람은 그 정도가 다를지언정 부조리한 체제를 정당화하거나 견고하게 하는 데에 동조할 것이 틀림 없다. "정치적인 언어는 주로 완곡어법과 논점 회피, 그리고 순전히 아리송한 표현법으로 이루어진다. 이를테면 무방비한 마을이 폭격을 당하고, 주민들이 시골로 내몰리고, 가축들이 기관총 난사를 당하고, 오두막들이 소이탄에 타버리는 것을 '평정平定' 이라 부른다. 수백만의 농민이 농지를 강탈당한 뒤 지고 갈 수 있는 것들만을 가지고 걸어서 길을 떠나도록 내몰리는 것을 '인구 이동' 이나 '전선 조정' 이라 부른다. 사람들이 재판도 못 받고 몇 년 동안 투옥되거나, 뒷덜미에 총을 맞거나, 북극의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괴혈병으로 죽는 것을 '의심 분자 제거'라 부른다. 이런 식의 어법은 무언가를 마음속으로 그려보는 법 없이 명명하고자 할 때 필요하다."(「정치와 영어」, 270쪽)

 

'평정'이니 '인구 이동'이니 '의심 분자 제거' 등의 언어는 기호로 장막을 쳐서 사태를 올바르게 바라보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한국 정치인이나 지식인이 남용하는 '자유민주주의의 수호', '국가와 민족의 발전' 등의 언어가 실은 텅 빈 깡통 같이 느껴지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저런 상투어를 쏟아내는 인간은 경계해야 한다. 사회의 모순을 은폐하는 데에 기여하는 세력임이 틀림 없을 터.

 

오웰이 죽을 때까지 투쟁했던 것은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당파성을 앞세워서 사태를 왜곡하는 기만 혹은 거짓이었다. 그는 작가의 생활은 당파적이더라도 글쓰기는 생활과 분리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치적인 글쓰기를 옹호했던 그가 어째서 정치생활과 글쓰기를 구분하라고 한 것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작가의 글쓰기는 절대적으로 자유로워야 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특정 세력의 눈치를 보거나 외압을 느낄 때 글은 변질된다. 정직하지 못한 글쓰기는 독자를 기만한다. 그러므로 창작의 최전선에 있는 작가에게 글쓰기 만큼은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작가가 글을 쓰면서 터럭만큼이라도 자기 표현을 검열하게 될 때, 창조력은 압살되고 마는 것이다. 자유가 온전히 주어진 글쓰기가 오히려 정치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자유가 사물을 바로 보는 정직성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정직한 글쓰기만이 감옥같이 생활인을 둘러싸고 있는 허위의식을 고발하고 탄핵할 수 있다. 햇빛이 안개를 몰아내듯, 정직한 글쓰기는 나쁜 이데올로기를 흩어버린다. 좋은 글을 읽을 때 독자의 눈이 환해질 것이다. 그것이 오웰이 염원했던 세상이다. 그가 죽고 반 세기가 지난 지금, 그가 바라던 세상은 도래한 것일까? 우리는 정직한가? 그리고 제정신으로 사물을 바로 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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