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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에는 사랑을 선물하자! | My Favorites 2007-12-17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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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맨얼굴의 '사계'로 돌아온 장영주를 만나다 | My Favorites 2007-12-11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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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 > 만나고 싶었어요!
무대 위의 서 있는 장영주는 당당하다. 열정적이면서도 범접하기 힘든 차가움이 전신을 감싸고 있다. 바이올린을 켜는 그녀는 단단하게 뿌리내린 거목처럼 무대 한가운데 솟아 있었다. 무대 밖에서 본 장영주는 딱 그 나이 또래의 여자로 보였다. 의외로 몸매는 가냘프고, 목소리는 귀여웠다.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은 짧은 손톱, 화장한 얼굴과 달리 거칠어 보이기까지 하는 손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사람다웠다.

장영주는 아홉 살 때 첫 앨범 『데뷔』를 낸 후 지금까지 매년 한 장 이상의 앨범을 꾸준해 냈다. 정통 클래식에서 『Phantasia』와 같은 크로스오버 앨범까지.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는 열정과 패기를 가지고 자기만의 색깔을 만들어 가고 있다. 그런 장영주의 열여덟 번째 앨범 『사계』는 처음으로 녹음한 바로크 앨범이었고, 처음으로 지휘자 없이 연주한 앨범이기도 하기에 여러모로 의미 있는 도전이었다.

오늘 오전에 ‘무릎팍 도사’ 녹화를 했다고 들었다. 오락 프로그램 출연은 처음이 아닌가?

옛날에 ‘서세원쇼’ 나간 후로는 처음이다.

어땠나?

깜짝 놀랐다. 나는 여기 살지 않으니까 어떤 프로그램인지 잘 몰랐다. 굉장히 이것저것 물어보더라. 춤도 췄다.(웃음) 내가 나온다고 로고송을 클래식으로 했다. 한국말에 자신이 없어서 출연을 처음엔 고민했다.

한국말 굉장히 잘하는데.

아니다. 한자어는 잘 모른다. 그래서 한국어 인터뷰 힘들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을 때도 있고.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랐으니까 영어가 편하다. 부모님과 한국말을 하니까 의사소통에는 불편이 없는 정도다. 한국 관습 같은 것도 잘 몰라서 ‘이건 왜 그래야 돼?’라고 물을 때도 있다.


『사계』를 레코딩한 오르페우스 체임버 오케스트라는 어땠나?

오르페우스와 같이 연주한 것은 정말 멋진 경험이었다. 지휘자 없이 연주하는 것이 처음이었다. 오르페우스는 굉장히 결속력이 강하고 자부심이 강한 팀이다. 프로페셔널하고. 레코딩하기 전에 투어를 같이해서 단원들하고 친해지고 편해졌다.

전체적인 리드는 장영주 씨가 맡았다고 들었다.

내 첫 리더 작업이다. 리더이긴 하지만 오르페우스 멤버들과 모두 상의해서 곡을 레코딩했다. 나를 비롯한 모든 멤버가 자유롭게 의견을 내고 마음에 안 드는 부분에 대해서도 과감하게 말한다. 다른 오케스트라는 리허설만 몇 번 하는데, 오르페우스는 굉장히 이야기를 많이 한다. 좋은 공부가 되었다.

‘사계’같이 대중적인 곡을 레코딩하는 건 부담스러운 점도 분명히 있을 텐데. 더 이상 새로운 사계가 나올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 같은 건 없었나?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해석으로 연주를 한다. 비발디가 쓴 소네트를 꼼꼼히 읽고 오르페우스 단원들과 의논하면서 곡을 레코딩했다. 비발디가 쓴 스코어 그대로 하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전체적으로 담백한 느낌이다. 특히, 2악장에 신경을 썼다. 사계의 2악장은 무척 아름답다.

많은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했다. 특히 좋아하는 오케스트라는 어딘가?

베를린 필. 최고다. 베를린 필은 젊다. 단원 중에 나보다 어린 사람도 있다. 연주만 잘하면 국적이든 나이든 상관없다는 자유로운 분위기가 좋다. 그에 비해 빈 필은 공연을 보면 알겠지만 머리가 하얀 분들이 많다. 빈 필의 단원 중에는 라스트 네임(last name)이 같은 사람이 많다. 아버지와 아들, 삼촌과 조카, 할아버지와 손자가 같이 연주한다.

그렇지만 역시 필라델피아 필하모닉에 특별한 애정이 있다. 데뷔는 뉴욕에서 했지만 필라델피아는 바로 집 앞에 있는 오케스트라라 연습할 때 걸어서 갔다가 걸어서 온다. 필라델피아에서 계속 살았기 때문에 관객이나 단원들 중에 아는 사람이 많다. 정겹다. 처음 운전을 가르쳐준 오빠가 아직도 단원으로 있다. 언젠가 연주를 마치고 사인을 하는데 ‘사라가 태어날 때 내가 받았다’고 말씀하시는 의사분이 있어 깜짝 놀란 적도 있었다. 엄마가 보시고 옆에서 맞다고 하시더라.(웃음) 필라델피아와 연주하면 재미있는 일이 많다.

공연 스케줄은 어떻게 잡혀 있나?

미국와 유럽이 오십 대 오십으로 보면 된다. 지리상으로 보면 유럽과 아시아는 그리 멀지 않은데 오기가 참 힘들다. 그래서 한국에서 연주할 기회가 있으면 힘들더라도 꼭 오려고 한다. 내게는 참 소중한 무대다. 한국에서의 공연이.

하루를 어떻게 보내나?

공연이 있을 때와 없을 때가 다르다. 별일이 없을 때는 보통 세 시간에서 네 시간 정도 연습한다. 연주 여행을 다닐 때는 시간이 나는 대로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한 시간씩 몇십 분씩 계속 연습한다.

연습을 즐기는 타입인가?

아니. 연주가는 운동선수와 똑같다. 연습은 연주를 위해 꼭 필요한 프로세스다. 굉장히 프라이빗한 부분이기도 하고. 무대에 올라가 연주하는 걸 즐긴다. 대가도 연습을 한다.

그러고 보니 이제 장영주 씨에게 아무도 천재라고 하지 않는다. 천재라는 소리를 안 듣게 되니 기분이 어떤가?

시원하다. 그런데 이런 걸 자꾸 물어보는 걸 보니 아직 완전히 벗어난 건 아닌 것 같다. 천재 출신 장영주인 셈인가?(웃음) 천재라는 수식어가 나쁜 라벨은 아닌데, 어쨌든 라벨은 라벨이지 않나? 어릴 때 데뷔를 하고, 앨범을 내서 아직도 그때의 ‘나’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저 ‘좋은 음악가’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음악 하는 사람들에게는 ‘천재’라는 말을 들어본 적 없다. 음악 하는 사람들은 연주의 퀄리티 말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지휘자나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한 번도 내 나이를 상관하지 않았다. 그때 함께 연주했던 분들과는 지금도 함께 연주하는데, 내가 아홉 살 때나 스무 살 때나 전혀 달라진 게 없다. 그분들에게 나는 그저 ‘사라’다. 그래서 편했다. 좋은 것도 많았다. 어려서부터 나보다 나이가 많은 분들과 어울리다 보니 지나치게 조숙했다. 그리고 지금은 내 나이 또래의 정신연령과 비슷해진 것 같다.

그래도 어릴 땐 성인 연주자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는 게 힘들 때도 있었을 텐데.

그렇지 않았다. 너무 어려서 오히려 스트레스 같은 걸 몰랐다.


새로운 곡에 도전할 때 어떤 식으로 접근하나?

나는 새로운 곡에 도전할 때 다른 사람의 연주는 절대 안 듣는다. 일단 곡 전체 구석구석 읽는다. 그런 후에 인스퍼레이션, 영감이 떠오르는데, 그 영감을 음악으로 만드는 것이 제일 힘들다.

『Phantasia(오페라의 유령 환상곡)』 같은 크로스오버 앨범도 있지만 지금까지 정통 클래식을 줄곧 고집해왔다.

크로스오버 앨범은 그전부터 제안을 많이 받았지만 기획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다 거절했다. 『Phantasia』는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을 워낙 좋아했고, 기획도 마음에 들어 듣는 순간 ‘OK, 저 할게요.’라고 했던 경우다. 그렇지만 역시 나는 정통 클래식이 좋다. 정통 클래식은 음악적으로 솔직한 것 같다. 꾸밈없이. 내가 배운 것도 정통 클래식 연주였다. 베토벤, 브람스, 멘델스존… 내가 제일 편하고 연주하면서 즐기는 레퍼토리다.

세계 곳곳으로 연주 여행을 다니니 참 좋겠다.

그렇지 않다. 세계 곳곳으로 다니지만 그곳을 즐길 만한 시간은 없다. 연주 장소에 도착해 2~3회 리허설 하고, 저녁에 연주하고, 다음 날 아침에 떠나는 일정이 많다. 한국에서도 그런 적이 많아서 친구와 친척들을 연주회가 끝나고 밤늦게 볼 때가 많다. 마일리지만 엄청 쌓인다.(웃음) 마일리지 재벌이다.

오페라 가수들은 한곳에 한 달 이상씩 머무르면서 공연을 하니까 부엌 딸린 아파트를 빌려서 요리도 하고 사람들 만나서 술도 마시고 도시도 여행하는 게 가능하다. 솔리스트는 그런 게 불가능하다. 그래서 오페라 가수들이 부러울 때가 있다.

공연 일정이 정말 살인적이다.

쉬지 못하는 타입이다. 이미 2~3년의 공연 일정이 다 잡혀 있고, 레코딩은 그것보다 더 나중의 것까지 잡혀 있다. 연주가들 중에는 공연 전 2~3일 정도 적응기간을 요구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차라리 그 시간(적응기간)에 다른 연주 일정을 잡는 걸 더 선호한다. 연주가들은 보통 여름에 쉬는데, 나는 아스펜(아스펜 국제음악제)에 가느라 여름에도 안 쉰다. 아스펜에는 매년 빠지지 않고 간다. 올해 크리스마스는 쉴 예정이다. 동생(첼리스트 장영진)도 여름에 보고 못 봤다. 1년에 8개월에서 10개월은 항상 외국에 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나는 지금껏 슬럼프라는 게 없다. 정확히 말하면 슬럼프가 생길 틈이 없다. 하루하루의 기복, 그러니까 오늘 연주한 것 중에 이건 싫었다, 저건 그랬다 정도는 있지만.

매년 쉬는 것도 포기하고 아스펜에 가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실내악을 할 수 있다. 내 공연 일정을 보면 알겠지만 실내악보다는 독주, 협주를 할 때가 더 많다. 그런데 아스펜에 가면 협주를 하는 조건으로 실내악을 할 수 있다. 나는 실내악에 애정과 관심이 많다. 한국에서 실내악 공연을 많이 할 수 없어 아쉽다.

연주 여행 중에 힘든 일은 없나?

독주회의 경우 피아니스트랑 단둘이서 한 달에 20일 이상 연주할 때가 있다. 나도 인간이고 피아니스트도 인간이다. 서로 부딪치지 않을 수 없다. 처음에는 좋게 지내다가 어느 순간 감정이 악화되어 싸우고 연주가 끝날 때쯤 마음이 풀릴 때가 있다. 피아니스트와 감정이 안 좋으면 연주도 잘 안 나온다. 신기하게 연주에 다 나온다. 그럴 때 힘이 든다.

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추는 협주는 어떤가? 지휘자와 곡 해석 차이로 싸울 때도 있나?

당연히 있다. 나는 자기 의견이 강한 편이다.

음악 해석으로 싸운다니 듣기에는 퍽 로맨틱하다.

실제로는 절대 절대 안 그렇다. 얼마나 불편할 수 있는데…. 예전에 사이먼 래틀과 시벨리우스를 연주했는데 나와 전혀 다른 방식을 원했다. 그래서 두 번째 리허설부터 그의 방식을 그대로 따랐던 적이 있었다.

사이먼 래틀은 어떤 지휘자인가?

굉장히 열려있다. 아이디어가 많고, 에너지가 많고, 자기 의견이 강하고.

둘이 많이 닮은 것 같다.

닮은 점이 많다. 둘 다 자기 의견이 강하다는 점이 특히 닮았다.

그런 타입들은 만나면 잘 싸울 것 같은데….

사이먼 래틀과는 싸운 적은 없다. 사이먼 래틀과 녹음한 앨범은 개인적으로도 마음에 드는 앨범이다. 의견이 강한 사람과 일을 하면 아주 좋은 결과가 나오거나 서로 설득시키기 위해 굉장히 긴 싸움을 해야 할 때가 있긴 하다.

사이먼 래틀 뿐만 아니라 얀손스, 도밍고 등 유명한 지휘자들과 함께 연주를 했는데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없나?

다들 무척 재미있고 천재적인 분들이다. 사실 이분들이 진짜 천재다. 이분들은 나를 항상 나를 대등한 음악적 파트너로 대해주셨다. 기억나는 에피소드는 도밍고와 『Fire & Ice: 카르멘 환상곡』을 녹음할 때. 도밍고는 녹음을 하다가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마음에 안 들면 코멘트를 하는 대신 노래를 불렀다.(웃음)

마스터클래스도 몇 번 했는데, 가르치는 일은 어떤가?

정말 힘들었다. 가르치는 일은 또 다른 아트다. 나는 좋은 선생님이 될 소질이 없어 보인다.

가끔 본인의 옛날 레코딩을 듣는가?

절대 안 듣는다. 누가 틀어 놓으면 도망간다.

옛날에 녹음했던 곡을 다시 레코딩하고 싶은 욕심은 없나? 예를 들어, 두 번째 앨범에 수록된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같은 것.

욕심은 있다. 언젠가 다시 내고 싶다. 그렇지만 아직 녹음 안 한 곡이 더 많다.


이번 앨범(『비발디: 사계』)은 첫 바로크 음악을 레코딩한 것 같은데… 앞으로 계속 거슬러 올라갈 예정인가? 아직 바흐나 베토벤 레코딩은 없는 걸로 아는데.

베토벤은 공연에서는 가끔 연주한다. 바흐는 언젠가는 하겠지. 아주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 나이가 많이 먹은 후에 도전해 볼 생각이다. 지금 내고 싶은 앨범은 브루흐다. 아직 브루흐를 안 냈다는 걸 의외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더라.

독립했나?

부모님과 함께 필라델피아에서 살고 있다. 1년에 8개월 이상을 밖에 있어서 독립을 해도 별 의미가 없다.(웃음) 일 년 중 백 일을 비행기에서 잔다. 연주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도착하면 엄마가 하는 한국 음식 냄새가 난다. 그때 ‘아, 집에 왔구나.’ 하는 기분이 든다. 이럴 때 내가 제일 한국 사람 같다. 한국 음식 냄새를 맡고 그리움이 느껴질 때. 그런데 김장김치는 잘 못 먹는다. 떡볶이나 냉면, 오이소박이를 잘 먹는다.

일 년의 대부분을 외국에 있어야 하는데 음식 때문에 고생한 적은 없나?

뭐든 잘 먹는다. 연주자들 중에서는 불쌍할 정도로 까다로운 사람도 있다. 그에 비해 나는 지금까지 음식 때문에 고생한 적은 없다.

스케줄 관리를 혼자서 한 지 오래됐다고 하던데.

꽤 오래됐다. 처음 할 때는 ‘왜 이렇게 바보 같은 스케줄을 잡았지?’라고 싶을 정도로 무리하게 일정을 짜서 고생한 적도 많았다. 부모님은 어려서부터 다 내가 알아서 하길 바라셨다. 그래서 얼마 전에는 파이낸싱에 대한 부분을 가르쳐주셨다. 내가 한 해 얼마를 벌고, 어떻게 투자하고, 돈 관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그래도 아직 잘 모른다. 복잡하기도 해서 대충만 알고 있다. 쓰는 건 잘한다.(웃음)

처음 데뷔했을 때는 연주하면 돈을 받는다는 것도 몰랐다. 지금도 얼마를 버는지 잘 모른다. 돈에 대해서는 무심하다. 돈 때문에 연주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돈에 구애되기 시작하면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고, 음악적으로도 제약을 받는다.

지금 음악 하는 사람으로 제일 고민하는 건 뭔가?

밸런스 잡는 것. 지금은 주로 솔로로 활동하는데 나는 실내악처럼 팀으로 연주하는 걸 좋아하는데 시간이 없다. 챔버 뮤직 너무 하고 싶다. 지금의 정통 클래식 레퍼토리 말고도 현대곡(현대 작곡가들이 작곡한 협주곡)도 연주하고 싶다. 이런저런 하고 싶은 것들의 밸런스를 잡는 것을 제일 고민한다.

모델로 삼는 음악가가 있는가?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그분의 레코딩을 정말 좋아한다. 생긴 건 씨름선수 같은데 그분이 내는 소리는 정말 아름답다. 그분의 브람스, 그분의 쇼스타코비치. 무척이나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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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벤트]내시는 거세한 남자다? | My Favorites 2007-12-11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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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 >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 연재 기념 이벤트 - 본문을 스크랩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

매주 두 분을 선정하여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를 드립니다.
당첨자는 매주 금요일 채널예스 공지사항 게시판에 발표합니다.


내시가 거세한 성 불구자라는 것은 조선시대의 내시에 관한 한 옳은 얘기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내시는 전혀 달랐다.

조선시대의 내시는 맡은 업무의 성격상 궁중에 상주하면서 왕비, 후궁, 궁녀들과 가까이 있어야 했는데, 궁중의 여인들은 왕비부터 최하층 궁녀인 무수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왕의 여인, 즉 왕의 예비 신부들이기 때문에 왕 아닌 다른 남자를 가까이하는 것이 일절 금지되었다. 거세한 성 불구자로 내시를 삼은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내시는 과거 급제나 음서로 벼슬에 오른 문벌 집안의 아들들, 또는 전쟁에 나가 군공을 세웠거나 학식이 뛰어난 젊은이들 가운데 장래가 촉망되는 자를 선발하여 왕의 측근에 둔, 최고 엘리트 집단이었다. 내시로 뽑히는 것은 탄탄한 미래와 부귀영화를 보장받는 지름길이었다. 당연히 이들은 거세한 성 불구자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고려시대의 내시는 왕 측근의 최고 엘리트로서 성 불구자가 아니었다. 여진 정벌로 이름을 떨친 윤관의 아들이요, 문장가 윤언이의 동생인 윤언민도 내시였다. 사진은 윤언민의 묘지명.

고려시대 내시는 엘리트 집단

고려시대 내시의 면면을 보면 그 실체를 실감할 수 있다. 고려에 성리학을 들여온 유학자 안향安珦, 『삼국사기』 편찬자이자 첫손 꼽히는 문벌 집안인 경주 김씨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金敦中, 구재학당이라는 사학을 열어 문헌공도를 배출한 해주 최씨 최충의 손자이자 권신 이자겸의 장인 최사추崔思諏, 최영 장군의 5대조로서 평장사 벼슬을 지낸 최유청崔惟淸, 의종의 태자 시절 스승인 정습명鄭襲明, 여진 정벌로 이름을 떨친 문하시중 윤관의 아들이자 문장가 윤언이의 친동생인 윤언민尹彦旼, 무신정권의 실력자 최충헌의 사위 임효명任孝明, 이들이 모두 내시였다. 내시 출신으로 재상에 오른 자만 해도 수십 명에 이른다.

뿐만 아니라 『고려사』 열전이나 죽은 이를 위해 쓴 묘지명을 보면 주인공의 관력을 설파하면서 “내시에 발탁되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는 것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내시를 하다 쫓겨난 뒤 잃어버린 내시 자리를 되찾기 위해 고위층에게 아부한 이도 있었다. 고려 때 내시 자리가 얼마나 선망의 대상이었는지 알 만하다.

고려의 내시는 왕의 최측근으로서 왕을 수행하고 국정 전반에 걸쳐 주요 업무를 맡아 하는 특수 집단이었다. 이자겸의 반란이나 무신정변 때 피살된 이들 중 상당수가 내시였다는 사실은 이들이 왕의 최측근이었음을 웅변한다.

내시는 지방이나 전쟁터에 왕명을 받든 봉명사신으로 파견되기도 하고, 외국으로 가는 사행에 참여하기도 했다. 특히 왕의 돈줄을 맡아 관리함으로써 왕의 수족 노릇을 했다. 왕실 재정을 관리한다든지, 국가 재정의 중추인 경창京倉 관리를 맡아 전곡錢穀의 출납을 관장한 것이다. 한 예로, 의종 때 내시 박회준朴懷俊은 왕실의 원찰인 흥왕사 관리를 맡아 했다. 왕의 돈줄을 관리하다보니 부정부패도 뒤따랐다. 의종 때 경창을 관리하던 내시 조강실趙剛實은 매일같이 뇌물을 챙기다가, 앞집 사는 관리 이공승李公升에게 들켜 혼쭐이 났다.

내시는 무신정변이 일어나기 전, 즉 고려 전기에는 오로지 문신만이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신정변 후에는 자기네도 내시가 되게 해달라는 무신들의 요구에 따라, 명종 16년부터 무신도 내시가 될 수 있게 되었다.

내시가 소속된 관청은 내시성內侍省이 개칭된 내시원內侍院이었다. 천정天庭, 천원天院이라고도 불렸다. 일단 내시가 되면 내시 명부에 이름이 오르는데, 그만두거나 쫓겨나면 명부에서 삭제되었다. 내시적內侍籍 또는 금적禁籍이라 불린 이 명부는 내시들의 인사 기록부였던 셈이다.

내시의 숫자는 얼마나 되었을까? 지금까지 확인된 바에 따르면, 문종 때는 20여 명이었다가 인종 때는 41명, 의종 때는 57명으로 차츰 늘었다고 한다. 고려 건국 초부터 무신정변이 일어난 의종 때까지 약 230여 년을 통틀어 내시의 총수는 114명이었다는 최근 연구도 있다.

1919년 3·1운동 직후에 한국을 여행한 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가 그린 조선의 내시. 그는 구한말 왕을 섬기던 내시였는데 키스는 “이 사람이 자꾸 안절부절 못해서 재빨리 스케치를 끝내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내시와 환관, 그 차이

그럼 우리가 알고 있는 ‘거세한 남자’ 내시는 고려 때는 없었을까? 물론 있었다. 그러나 이름이 달라서, 환관宦官 혹은 환자宦者라 불리었다. 환관은 액정국掖庭局(전 이름 액정원)이라는 관청에 소속되어 궁중의 잡역을 담당했다.

내시가 최고 엘리트인 데 비해, 환관은 노비 출신이거나 무녀나 관비 소생, 혹은 특수 행정구역인 부곡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벼슬도 문무 양반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남반南班에 속했다. 남반은 제아무리 높아봤자 7품 이상으로는 오를 수 없는 한품직限品職이다.

이렇게 내시와 환관이 전혀 다름에도 불구하고, 내시 하면 으레 거세한 남자를 떠올리게 된 것은 고려 말 원나라의 영향권에 들면서 내시와 환관이 혼동되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을 보자.

무신정권기와 원 간섭기에 왕의 신임을 얻은 환관이 내시로 임명되는 예가 생겨났으며, 환관의 정치적 영향력이 매우 큰 원나라를 본떠 고려에서도 환관이 득세하게 되었다. 환관으로서 내시가 된 최초의 인물은 정함鄭?이다. 의종은 자신을 젖 먹여 키워준 유모의 남편이요, 의종이 친동생에게 밀려 하마터면 왕위를 놓칠 뻔했을 때 보호자로 활약해준 환관 정함을 내시에 임명했다. 그러자 신하들은 전례 없는 일이라며 강력히 반대했고, 심지어 최숙청崔淑淸 같은 이는 정함이 “세를 믿고 권력을 남용”한다면서 몰래 죽이려다가 발각되어 외딴 섬으로 귀양을 갔다. 신하들의 반대에도 의종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마침내 정함은 환관이 내시가 되는 데 물꼬를 텄다.

공민왕 5년(1356) 환관의 관청이 새로 설치되었는데 그 이름이 공교롭게도 내시부內侍府였다. 그 뒤, 내시부 소속인 환관과 본래의 내시는 혼동되어 불리기 시작했다. 어느덧 최고 엘리트 집단을 지칭했던 내시는 환관의 별칭이 되고, 본래의 내시는 이름은 물론이요 고유의 역할과 지위까지 잃어버렸으며, 조선 세조 12년(1466) 내시원 폐지로 영영 사라졌다. 그 후 내시는 환관의 동의어가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내시라는 이름으로 환관을 기억하는 까닭이다.

조선시대 내시는 양자를 들여 대를 이었으므로 족보가 없을 거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그렇지 않다. 이들도 족보를 만들었다. 왼쪽은 최석두 『가승家乘』, 오른쪽은 『이사문공파 가승』.

내시라 불리게 된 환관, 그들은 조선 왕조 500년 내내 존재했다. 조선시대에 환관이 오를 수 있는 최고 자리는 종2품 상선尙膳이었으며, 『경국대전』이 정한 환관의 수는 모두 140명, 18세기 실학자 성호 이익이 『성호사설』에서 말한 환관의 숫자는 335명이다. 환관이 법률상 완전히 폐지된 것은 19세기 말인 1894년 갑오개혁 때였다.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
박은봉 저| 책과함께 | 2007년 11월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는 『세계사 100장면』『한국사 100장면』등으로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박은봉 저자가 일반인들이 왜 한국사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사실’로 알고 있는지 그 원인을 추적하고 이유를 밝혀냄으로써 제대로 된 한국사 상식과 한국사관을 제공하고 있는 책이다.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 연재 기념 이벤트 - 본문을 스크랩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

매주 두 분을 선정하여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를 드립니다.
당첨자는 매주 금요일 채널예스 공지사항 게시판에 발표합니다.


※ 운영자가 알립니다.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는 ‘책과함께’와 제휴하여, 매주 금요일 2개월간 총 8편 연재할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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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변화 | My Favorites 2007-12-03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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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사랑은 유치하게도 복사꽃처럼 눈부시거나,
라일락처럼 향기로운 감성으로 그대의 영혼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오해의 쐐기풀이 그대 가슴에
무성하게 자라 오르고, 번민의 가시 덤불이 그대 영혼에
수시로 상처를 낸다. 그대는 비로소 알게 된다.
사랑은 달콤한 솜사탕도 아니고 포근한 솜이불도
아니라는 사실을. 사랑은 그대가 단지 한 사람을,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하고 있다는 죄목 하나로,
아침이면 그대를 문책하고 저녁이면 그대를 고문한다.
그러나 회피하지 말라.
세상에는 슬픔 없이 피는 꽃이 없고
아픔 없이 여무는 열매가 없다.

- 이외수 <여자도 여자를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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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길목에서 | My Story 2007-12-03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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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은 인간이 자기자신이 되는 길이다.
우리가 무엇이 되기 위해서는
땅속에서 삭는 씨앗의 침묵을 배워야 한다.
지금 우리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는
우리들 자신이 그렇게 만들어 온 것이다.
겨울은 밖으로 헛눈 팔지 않고 안으로
귀 기울이면서 여무는 계절이 되어야 한다.
머지 않아 우리들에게 육신의 나이가 하나씩
더 보태질 때 정신의 나이도 하나씩 보태질 수 있도록

- 법정스님 <겨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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