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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속 문장들 | 여러가지 2019-04-30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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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밖에서 보면, 손바닥만한 땅이겠지만, 구멍 바닥에 서서 보면, 눈에 보이는 것은, 그저 끝없는 모래와 하늘뿐이다……. 눈[眼] 속에 갇혀버린 것처럼 단조로운 생활……. 이 안에서 여자는 타인으로부터 위로의 말 한마디 들은 기억도 없이 살아왔으리라……. 어쩌면 내가 덫에 걸려주어, 아가씨처럼 가슴 설레고 있는지도 모른다……. 너무도 비참하다……. (66쪽)


  타인의 태양에 대한 가련할 정도의 질투와 초조감……. (96쪽)


  「미쳤어……. 제정신이 아니야……. 모래 퍼내는 것쯤, 훈련만 받으면 원숭이도 할 수 있는 일이잖아……. 난 좀더, 나은 일을 할 수 있다고……. 인간에게는 자기가 갖고 있는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의무가 있단 말이야……. 」

「글쎄……. 」(147-148쪽)


  과연 노동에는, 목적지 없이도 여전히 도망쳐 가는 시간을 견디게 하는, 인간의 기댈 언덕 같은 것이 있는 모양이다. (153쪽)


  물에 떨어뜨린 먹물처럼, 탁한 피로가 고리가 되어, 해파리가 되어, 술 달린 조화(造花)가 되어, 원자핵의 모형도가 되어 배어든다. 들쥐를 발견한 밤새가 불길한 소리를 내며 동료들을 부르고 있다. 위를 토해 내는 불안한 개. 높은 밤하늘에서 울어대는 서로 속도가 다른 바람의 마찰음. 지상에서는 한 겹 한 겹 모래의 박피를 벗겨내며 흐르는 바람의 나이프. 땀을 닦고, 코를 풀고, 머리에 쌓인 모래를 털어냈다. 발치에 그려져 있는 바람 무늬는, 갑작스럽게 움직임을 멈춘 파도 머리를 닮아 있다. (155쪽)


  반복은 현재를 채색하고, 그 감촉을 확실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 그래서 남자도 질세라 단조로운 수작업에 열을 올렸다. 지붕에 쌓인 모래를 긁어내는 일이며 쌀을 체질하는 일, 빨래 등은 이미 남자의 주된 일과가 되었다. 일단 일을 시작하면 적어도 일을 하는 동안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수면 중에 덮는 소형 비닐 천막을 고안하는 일이며 불에 달군 모래 속에다 생선을 묻어 쪄 먹는 착안도 흘러가는 시간을 제법 보람있게 해주었다. (202쪽)



모래의 여자

아베 코보 저/김난주 역
민음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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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소되지 않는 삶의 갈증에 대하여,『모래의 여자』 | 리뷰모음 2019-04-29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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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모래의 여자

아베 코보 저/김난주 역
민음사 | 2001년 11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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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키 준페이가 어느 날 모래의 땅으로 떠난 이유는 곤충을 채집하기 위해서였다. 새로운 곤충을 발견하면 곤충도감에는 발견한 이의 이름도 같이 실리게 마련이었고 니키 준페이는 그것을 원했다. 그의 여행이랄까, 일상에서의 도피는 동료를 골려주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무료한 생활에서 벗어나 자신만 홀로 색다른 무언가를 맞이하러 떠난 듯한 인상을 주고 싶었던 거다. 그렇게 니키 준페이는 집과 직장인 학교를 떠났고, 이후로 아무도 그의 행방을 몰랐으며, 몇 년이 지나도록 소식조차 알 수 없었다. 7년 뒤에 가정법원에서는 니키 준페이가 실종자 명단에 올랐음을 최종적으로 판결 내렸다.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니키 준페이가 발을 디딘 모래의 땅은 한 마디로 쉽게 정의 내리기가 어려운 곳이다. 그곳에는 희한하게도 부락이 있었고 사람이 살고 있었다. 니키 준페이는 부락민에게 며칠 묵을 숙소를 청했고, 부락민은 단번에 허락했다. 니키 준페이는 부락민의 계략에 빠져 모래 구덩이의 집에서 살게 된다. 이곳의 지형을 묘사하기가 쉽지는 않은데, 부락보다 아래에 있으며 위에서는 쉴 새 없이 모래가 떨어진다. 동굴 같은 모래 구덩이는 여러 개가 있고 그 안에 부서져가는 집들이 지어져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순전히 부락의 안전을 위해서 모래를 적절하게 퍼내는 노동을 감수해야 했는데, 구덩이 속 사람들이 모래를 제대로 퍼내지 않으면 모래 구덩이 속 집들은 물론이요, 부락도 무너져버릴 수 있었다.


  당연히 주인공은 그곳의 생활을 거부한다. 같이 살게 된 여자도 그저 부락에 사는 인간들과 한패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사람을 이상한 곳에 가두고 노동을 강요한 그들은 벌을 받아야 마땅했다. 니키 준페이는 바깥으로 나가기만 하면 그들을 고소하리라 마음 먹고, 벼랑 위에 인간들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에게 숙소를 제공한 노인에게. 그런데, 그는 그곳에서 도무지 빠져나올 수 없었다. 쉴 새 없이 부서져내리는 모래를 타고 벼랑 위로 올라갈 수도 없었고, 부락민들도 밧줄을 내어주지 않았다. 그는 모래를 퍼나르는 노예로 고용된 거나 다름 없었다. 모래 구덩이 속 삶은 끔찍했다. 집안에는 온통 모래투성이였고 온몸에 모래가 달라붙고 쌓였다. 잠을 잘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위에서 모래가 떨어졌다. 


  그는 점점 인생의 목적을 상실한다. 의미는 사라지고 자신의 몸도 기계마냥 움직이는 나날이 이어진다. 기계의 부속품마냥. 담배와 밥과 목을 축일 물을 얻으려면 부지런히 몸을 놀리는 수밖에 없었다. 헌데, 그마저도 점차 적응이 된다. 노동은 시간을 견디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니키 준페이에게 구덩이 속 생활을 유지할 마음이 있는 건 아니었다. 깨진 독에 물 붓기처럼 언제 끝날 지 알 수 없고, 벗어나고만 싶은 생활의 연속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는 간신히 구덩이에서 위로 올라가 부락을 빠져나갈 절호의 기회를 얻기도 한다. 그러나…. 소금밭이라 불리는 모래의 늪에서 죽을 위기에 놓였다가 부락민들에게 구조된 그는 다시 구덩이 속 집과 모래의 여자에게 보내졌다. 


  그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이곳보다 더 나은 곳으로 반드시 떠나리란 희망. 이 세상에 정말 그런 곳이 존재하기는 할까. 만약 그가 지금 이곳보다 더 나은 저곳으로 떠날 수 있다면, 그는 그곳에서 더 나은 곳을 다시금 꿈꾸며 모든 것의 반복을 지겨워하는 반복을 재생할지도 모른다. 니키 준페이도 사소한 것의 행복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단조로운 작업에 열정을 불태우고 작은 일에 즐거워하며 보람을 느낄 줄도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희망까지 버릴 이유는 없지 않은가. 그의 말마따나 인간이라면 원숭이도 할 수 있는 일보다 인간의 능력치에 맞는 일을 하면서 보람을 느껴야 하리라. 


  모래 구덩이에서 불평 한 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바보처럼 일만 하며 산 여자는 라디오를 간절히 원했다. 라디오가 그녀 삶의 희망이요, 목표였던 셈이다. 누군가에게는 사소해보일지라도 그녀에겐 남다른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 아니면 그런 바람을 가져서라도 삶의 의미를 찾으려 했던 걸까. 비로소 라디오를 얻게 된 그녀는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니키 준페이는 구덩이에서 탈출해 다른 곳으로 떠났을까, 아니면 여자와 계속 살아갈까. 알 수 없다. 다만, 그는 끊임없이 고민했을 것 같다. 어떤 게 인간다운 삶일까, 하고. 그러다 포기하고 구덩이 속에서 덤덤하게 살아갈지도 모를 일이고.


  어쩌면 인간은 모래가 주는 고통에 순응만 할 수도 없고, 저항만 할 수도 없기 때문에 희망을 가지며 사는 건지도 모른다. 언젠가 보상이 찾아온다면 지금의 시간을 기꺼이 인내할 수 있을테니까. 한편으로 주인공은 그런 생각도 가지지 않았을까. 무료하고 반복적인 일상이었어도 모래 구덩이에 지어진 집에서 생활하는 거에 비하면 그쪽이 훨씬 나았다고 말이다. 인간의 욕망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항아리다. 무엇이 나를 만족시켜줄 수 있을까. 인간을 위한 천국이 존재한다면 그곳에선 욕망이 사라질까. 그리고 그런 상태의 인간은 행복할까. 더이상 모자란 것도, 바랄 것도 없는 최상의 상태는 천국에서나 가능하겠지, 지상에서는…. 나는 이번에 참으로 기이한 소설 책 한 권을 읽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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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결말 하지만 따뜻했던,『계단 위의 여자』 | 리뷰모음 2019-04-21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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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계단 위의 여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저/배수아 역
시공사 | 2016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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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날 우리는 과거를 한눈에 살펴볼 수가 있다. 비록 매번 달라질지언정, 과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지금 내 자리에서 과거를 되돌아보면, 무엇이 짐이었고 무엇이 축복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과연 성공이 그만한 값어치가 있었는지, 여자들을 만나서 무엇이 충족되었는지, 무엇이 충족되지 않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본문 78쪽)



  독자마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이 소설을 읽고 느끼는 바는 제각각이겠으나 나는 『계단 위의 여자』를 읽고 '한 남자가 과거에 사랑했던 한 여자와 40년만에 다시 재회하면서 과거를 곱씹고 반성하게 되는 이야기'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물론 그렇게 짧은 문장 하나로 긴 이야기를 일축해버리는 건 그다지 의미가 없는 일일테지만 말이다. 소설의 화자인 '나'는 독일에서 변호사를 하는 인물이었는데, 어느 날 '카를'이라는 화가가 자신이 그린 그림을 되찾고 싶다며 법률회사에 찾아온다. 그가 그린 그림의 제목은 '계단 위의 여자'로 페터 군트라흐라는 자의 아내가 모델이었다. 아내의 이름은 이레네 군트라흐로 페터와 헤어지고 카를과 살고 있는 모양이었다. 주인공이 밝히는 바에 따르면 그가 만약 변호사 일을 한 지 오래되었다면 그런 사건 따위는 떠맡지 않았을 거라고 한다. 헌데, 흥미롭게도 주인공은 카를의 그림 속 여자를 보고 첫눈에 반하게 되며 그의 사랑은 그림의 모델인 이레네에게도 변함없는 것이었다. 


  화가인 카를은 자신의 그림을 돌려받기 위하여, 페터는 자신의 아내를 돌려받기 위하여 다시 유치해보이기까지 한 싸움을 벌였는데 주인공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레네가 그 둘을 모두 배신하고 자신에게 오기를 바랐으며, 바람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이레네에게 사랑을 고백한 그는 이레네와 함께 특별한 계획까지 짰지만 결국 이레네는 자신에게 오지 않았고 그렇게 긴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에 주인공은 결혼도 하고 아이들도 가졌으며 성공한 변호사가 되었다. 그리고, 40년만에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계단 위의 여자'를 다시 보게 된다. 그는 절대 잊지 않았던 거다. 그림과 이레네 모두를. 그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이레네가 사는 곳을 찾아내고 그녀와 다시 재회한다. 그는 이레네에게 묻고 싶었다. 40년 전에 도대체 어째서 나에게 오지 않고 멀리 달아나 버린 거냐고. 


  주인공이 이레네에게 찾아갔을 당시 그의 곁에는 아내가 없었다. 아내와 사별한 상태였고 그녀가 알콜의존증이었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 소설의 저자는 주인공의 결혼 생활에 대해서 자세히 묘사하지 않았다. 그건 주인공의 삶에서 아내와의 결혼 생활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소설가는 대하소설도 아니고 300백 쪽이 약간 넘는 소설을 쓰면서 독자에게 소설을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할 필요성을 충분히 인식했을 테고, 그 점이 소설에 적절하게 반영되었다. 웃기다고 해야할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고 해야할지 이레네가 사는 곳(오스트레일리아의 어느 한적하고 외진 곳)에는 주인공말고도 카를과 페터까지 찾아온다. 카를은 여전히 자신의 그림을 되찾고 싶어했고 페터는 값이 말도 못하게 치솟은 그림을 두고 그것이 예전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여전히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한다. 


  '나'는 카를과 페터, 그리고 자신이 과거의 쓰디쓴 패배를 청산하려고 이레네를 다시 찾은 거라고 말하는데 어쨌든 카를과 페터는 그림의 소유권을 주장하려고 찾아온 것도 맞지 않을까. 한 자리에 모인 이들(나, 이레네, 카를, 페터)은 식사를 하면서 그들의 과거를 들쑤시고 펼쳐놓고 평가한다. 마치 '과거를 기리는 파티'라도 벌이듯이. 이때 이레네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조금 복잡했다. 다른 인물들과 달리 그녀의 삶이 복잡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서구와 동구로 나뉜 이 세계(독일)에서 둘 중 어느 쪽도 아닌 더 나은 쪽(대안)을 찾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었노라고 고백한다. 마치 카를과 페터, 주인공을 두고 멀리 달아나버린 것처럼. 그녀는 카를의 뮤즈로써 사는 삶도, 페터의 트로피로써 사는 삶도 만족하지 못했고 그래서 동독으로 가 새로운 남자와 살림을 차렸는데 그마저도 그녀에게 맞는 삶이 아니었다. 


  독일사를 제대로 공부했더라면 이야기를 더욱 재밌게 읽을 수 있었을까. 나는 코카콜라와 이데올로기, 둘 중 어느 것에서도 안정을 찾지 못하고 오스트레일리아의 어느 외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는 그녀의 삶을 좀 더 깊이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런데 그건 나뿐만이 아니라 이레네를 사이에 둔 다른 남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나 보다. 다만 그들은 나와는 달리 독일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 뿐. 하지만 그녀에 대해서 잘 모르기는 그들도 마찬가지였을 테다. 여기서 소설가는 내가 아닌 누군가의 삶을 제대로 인식하고 이해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보게 만든다. 주인공은 카를과 페터와는 달리 40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이레네를 사랑했고 그래서 그녀의 곁에 끝까지 남았다. 그야말로 기나긴 외사랑이다. 주인공은 병으로 죽어가는 이레네의 곁에서 그녀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지어내고 그녀의 과거를 궁금해하며 더불어 자신의 과거도 떠올린다. 


  그리고…, 그는 점점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다가 자신을 연민하게 되고 신경써서 잘해주지 못했던 아내와 아이들에 대한 자책감까지 겹쳐 눈물을 흘리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과거를 청산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알 수 있었던 건 앞으로도 삶은 계속될 테고 계속 슬프리라는 점.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서 알게 되는 건 별로 없고, 자신과 주변에 대한 연민이 늘어갈 뿐이라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는 전혀 진부하지 않다. 내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거만해지기만 한다면 그런 자신이 무척 싫어질 것 같다. 지금도 그렇다. 나는 나의 이야기가 중요하지,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중요하다는 인식을 잘 하지 못한다. 나는 바란다. 나같은 사람보다 이 세상에 더 따뜻한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나는 주변을 제대로 돌보지 못할 거면 그나마 거만해지는 일이라도 자제해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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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두머루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 하고, 글을 쓰는 과정의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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