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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사냥꾼 - 존 그리샴 | Book-외국 2013-06-27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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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송사냥꾼

존 그리샴 저/안종설 역
문학수첩 | 2012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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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상세한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90년대, 가장 기억에 남는 외국 장르물은

대부분 존 그리샴, 로빈 쿡, 마이클 크라이튼의 작품들입니다.

특히 존 그리샴의 펠리컨 브리프, 의뢰인 등 법정 스릴러와

로빈 쿡의 코마, 열병(Fever), 세뇌(Mindbend) 등 메디컬 스릴러는

대단한 호평을 받으며 베스트셀러 대열에 올랐습니다.

저 역시 그들에게 빠져 스릴러의 세계에서 한참이나 헤매고 다녔었습니다.

 

하지만, 순문학에 올인하면서 그들의 이후 작품은 거의 접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한참이 지나 다시 미스터리와 스릴러로 귀환했지만

좀처럼 쉽게 그들의 책을 집어 들진 못했습니다.

뭐랄까... 훨씬 더 빠르고, 지능적이며, 복잡해진 장르물을 탐독하다보니,

고전에 대한 약간의 무시가 발동했던 것도 사실이고,

그와 비슷한 선상에서,

그들의 스타일이 요즘의 트렌드를 반영할 수 있을까, 라는

일종의 불신같은 것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물론 당대를 휩쓴 스릴러의 거장들이니만큼

결코 허접한 작품을 세상에 낼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아무튼, 2012년에 발간된 존 그리샴의 소송사냥꾼을 읽게 되기까지

조금은 고민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똑똑하고 정의롭지만 힘없고 배경 없는 변호사가 지난한 노력과 멋진 변론을 통해

골리앗 같은 로펌이나 대기업들을 통렬히 망가뜨리는 헐리우드식 법정스릴러와 달리

소송사냥꾼은 정반대의 길을 걷습니다.

똑똑하긴 해도 딱히 대단한 정의감 같은 건 엿볼 수 없는 주인공이

변호사의 탈을 쓴 사기꾼같은 동료가 일확천금을 위해 시작한 집단소송에 휘말렸다가

모두 함께 쫄딱 망하는 게 메인 스토리입니다.

 

물론 존 그리샴은 우리의 주인공이 소송 상대인 거물급 제약사를 상대로

소소한 영웅적 변론을 통해 그들을 살짝 물 먹이는 정도의 통쾌함은 들려줍니다.

또한 힘없는 자들에게 적절한 관심을 가질 뿐 아니라,

변호사로서의 능력을 발휘하여 그들이 정의로운 보상을 받을 수 있게 해주는 이야기도

많은 분량은 아니지만 맛있는 간식처럼 잘 배치되어 있습니다.

막판에는 집단소송으로 인한 물질적 손실을 커버할 만큼의 적당한 규모의 승리도 있습니다.

 

굳이 이런 비꼬는표현으로 줄거리를 정리한 이유는,

우선, 서론이 80%이고 본론과 결론은 20%에 불과한 전체적인 구성 때문입니다.

다음은, 이야기의 핵심인 집단소송에 있어 주인공의 어정쩡한 스탠스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앞부분 80% 내내 무모한 집단소송에 참여하는 지루한 이야기가 이어지다가,

막판에 가서야 적들과 본격적으로 맞붙는 재판 시퀀스가 등장합니다.

, 주인공 데이비드는 탐욕스러운 두 명의 동료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면서,

거대 제약사와의 집단소송에 대해 제대로 된 판단이나 예측 한번 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그들의 사고 뒤치다꺼리만 할 뿐입니다.

 

그러다보니 이야기는 늘어지고, 넘겨도 넘겨도 계속 비슷한 이야기만 진행되는데,

더더욱 짜증이 났던 것은,

아무리 사악해 보이는 거대제약사를 상대로 한 집단소송이라고 해도,

뭔가 구린 냄새가 나는 상황에서 우리의 주인공들이 이겨선 안될 것 같다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상황이었습니다.

법조물인데 주인공이 이기면 안될 것 같고... 그럼, 이건 주인공이 지는 이야기야?”

 

앞서 언급한대로 주인공 데이비드는 나름 마지막 반대심문을 통해

거대제약사를 곤경에 빠뜨리는 역할을 함으로써,

주인공이라는 역할을 어느 정도는 수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주인공이라면 (독자들이 기대하는 존 그리샴의 주인공이라면)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거대제약사와의 한판 전쟁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이 존 그리샴다운 엔터테인먼트 법조물의 진면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의 존 그리샴을 비교의 대상으로 삼는 것 자체가 넌센스일 수도 있지만,

읽는 내내 한순간도 긴장감을 놓을 수 없었던 펠리컨 브리프의뢰인을 생각하면,

소송사냥꾼은 여러 가지로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품이었습니다.

기존의 슈퍼히어로 변호사라는 진부한 틀을 깬 기획은 신선했지만,

그것이 서론 정도의 역할만 했다면 모를까,

무모한 도전과 상처뿐인 영광만 남은 이야기로 끝까지 밀어붙인 것은

요즘의 독자들에게는 크게 어필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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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 히가시노 게이고 | Book-일본 2013-06-24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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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봄날 에디션)

히가시노 게이고 저/양윤옥 역
현대문학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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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연타석으로 히가시노 게이고에게 실망을 느꼈던 터라,

작년 연말, 그의 신작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저 시큰둥한 느낌이었습니다.

곧 이곳저곳에 실릴 서평을 통해 대략적인 사전 정보를 얻어 보고

책을 읽을지 말지를 결정해야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사실, 연초에 접한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 대한 평은 예상 외(?)였습니다.

스포일러를 접할까봐 구체적인 내용들은 읽지 않았지만,

모처럼 히가시노의 진가를 만날 수 있었다는 평이 대세였습니다.

그런 정보를 접하고도 얼른 책을 집어 들진 못했습니다.

그만큼 최근 히가시노에게 얻은 실망감이 컸다는 뜻이었겠죠.

그리고,

거의 반년이 지나서야 나미야 잡화점에서 일어난 기적 같은 이야기를 읽게 됐습니다.

 

타임트립을 소재로 한, 그야말로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던 책들을 지켜보며,

더 이상 타임트립에 관한 새로운 이야기란 없겠군, 이라고 자신 있게 떠벌린 적이 있습니다.

나미야는 그런 종언에 대해 가차 없이 뒤통수를 후려친, 참으로 대단한 작품입니다.

 

● ● ●

 

빈집털이 3인조가 숨어든 폐가에 가까운 나미야 잡화점’.

그곳에서 발견한 40년 전의 주간지를 통해,

3인조는 잡화점의 주인 나미야 할아버지가 고민 상담으로 유명했다는 사실을 알게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룻밤을 지낼 목적으로 숨어든 폐가에서,

1980년 전후를 살아가는 것이 분명한 사람들이 쓴 고민 상담 편지를 받아보게 됩니다.

우편함으로 편지는 툭툭 들어오는데, 나가보면 보낸 사람은 흔적도 없습니다.

 

잠시의 실랑이 끝에 3인조는 답장을 보내기로 합니다.

과거의 나미야 할아버지처럼 따뜻하고 재치가 담긴 답장이 아니라,

대체로 지독하리만치 신랄한 독설을 담은 답장들이 대부분입니다.

문제는, 답장을 보내자마자 그에 대한 답장이 또다시 우편함으로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나미야 잡화점의 안과 밖은 전혀 다른 시간의 흐름 속에 놓여있었고,

안의 1분은 바깥의 1일과 맞먹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3인조의 답장을 받은 고민 상담자들의 사연이 담긴 5편의 에피소드가 진행됩니다.

5편의 에피소드에는 편지를 보낸 사람들, 답장을 해줬던 나미야 할아버지,

그리고 그들 주변의 인물들이 꽤 많이 등장합니다.

동시에, 복잡하기 그지없는 인연과 악연의 끈들이 그들 사이에 촘촘하게 얽혀있습니다.

그 끈들은 거의 30년이 흐르는 동안 때로는 애틋하게, 때로는 충격적으로 이어져옵니다.

그리고, 마치 장거리 마라톤을 완주하듯 달려온 이야기는

어느 새 출발선으로 다시 돌아와 마지막 반전과 함께 가슴 따뜻해지는 결말을 맞이합니다.

 

● ● ●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그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친구, 진짜 천재네...”

 

대표적인 미스터리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타율 면에서 볼 때,

그의 미스터리 작품은 미스터리 작품에 비해 좋은 결과를 나타냈습니다.

특히 미래에서 온 아들을 만난 아버지의 성장기 도키오,

교통사고로 죽은 아내의 영혼이 깃든 딸과 남편의 이야기 비밀

어지간한 안구건조증 환자라도 몇 번씩 울컥하게 만드는 작품들이었습니다.

 

나미야의 경우 대놓고 감정에 호소하는 작품은 아니지만,

단순히 고민 상담자와 나미야 할아버지 간의 편지를 통한 소통을 넘어,

고민 상담자들 간의 보이지 않는 끈 같은 인연,

나미야 할아버지로부터 증손자에 이르는 동안의 무뚝뚝해 보이지만 따뜻한 연대기,

그리고, 덜 떨어져 보이는 빈집털이 3인조가 자신들의 삶을 돌아보게 되는 계기 등

히가시노 게이고 또는 일본문학 특유의 무심함 속의 애틋함이 잘 녹아 있습니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할 뿐, 쓰는 데는 전혀 재주가 없는 사람이지만,

이런 작품을 써내는 히가시노 게이고를 보면,

글 잘 쓰는 사람이 한없이 부러워질 따름입니다.

최근 몇몇 작품에서 보여준 실망감이 아직 다 상쇄됐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군이라는, 명불허전 증명은 충분했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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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 - 에드 맥베인 | Book-외국 2013-06-23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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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아이스

에드 맥베인 저/이동윤 역
검은숲 | 2013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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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라는 제목을 봤을 때, 문득 마이클 코넬리의 블랙 아이스가 생각났습니다.

제 기억엔 해리 보슈가 추적하던 신종 마약의 이름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에드 맥베인의 아이스혹시 같은 종류의 마약을 지칭하는 건가, 궁금했습니다.

결론은... 읽어보셔야 알 수 있습니다.^^

 

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 가운데 처음 접하는 책입니다.

경찰 소설의 텍스트라고 불릴 만큼 널리 알려져 있지만,

하드보일드의 후예라는 평을 언뜻 본 적이 있어서 쉽게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나 대실 해밋의 샘 스페이드

하드보일드의 명탐정들로부터 그리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기에 그랬던 것인데,

다행히도 에드 맥베인의 형사들은 단독 영웅의 틀을 벗어나

캐릭터는 사실감 있게 그려지고, 성과나 실수는 적당히 나눠가진 것으로 묘사되어

실제 한 경찰서의 강력반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 ● ●

 

뮤지컬 여자 무용수, 히스패닉 조무래기 마약판매자, 상류층 보석상 등

전혀 교집합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이 같은 총에 의해 같은 방식으로 살해됩니다.

발렌타인 데이를 전후로 폭설이 쏟아지는 가운데,

87분서의 열혈 형사들은 피살자들의 연관성을 찾는데 주력하지만

좀처럼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맙니다.

그 와중에, 가짜 신부 앤터니와 면도날 팻 레이디에마는

죽은 히스패닉 마약상의 고객과 공급책을 확보하여 자신들이 사업을 차릴 궁리를 합니다.

오랜 추적 끝에 피살자들의 교집합을 알게 된 형사들은

죽은 여자 무용수가 남긴 단서들을 통해 범인을 특정하고 그의 집으로 달려가지만,

그곳에는 형사들보다 먼저 도착한 또다른 인물이 범인과 대치하고 있습니다.

 

● ● ●

 

아무리 분업이 잘 이뤄져있다고 해도 주인공은 있기 마련이고,

그 역할은 스티브 카렐라 형사가 맡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캡틴의 인상을 주지만,

수사방식은 돌직구 보다는 합리적인 판단과 이성적인 추리에 따라 진행하는 스타일이고,

청각장애인 아내 테디에게 있어 자상한 남편으로 설정된 캐릭터 덕분에

피도 눈물도 없는 하드보일드 영웅들과는 전혀 다른 인상을 주는 인물입니다.

 

카렐라의 파트너인 마이어는 참모 기질이 엿보이는 민완형사이고

아서 브라운은 덩치 큰 흑인 형사의 비애(?)를 잘 대변하는 묵직한 캐릭터입니다.

버트 클링은 여자와 관련된 트라우마 때문에 대인기피증까지 의심되는 냉랭한 젊은 형사이며,

홍일점 아일린 버크는 성범죄자 체포를 위한 미끼 역할을 하는 독특한 캐릭터입니다.

 

그 외에도, 늘 깐족대는 밉상 형사들 마치 FBI를 연상시키는 조연들도 등장하고,

썰렁한 농담을 던지는 검시부장, 버럭질이 특기인 다혈질 반장,

맛없는 커피만 내놓는 서무과 직원, 융통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무조건 체포주의형사 등

다양한 캐릭터들이 쉴 새 없이 등장하여 재미와 리얼리티를 배가시키고 있습니다.

왜 에드 맥베이의 87분서 시리즈를 경찰 소설의 텍스트라고 부르는지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에드 맥베인의 소설이 처음이라, 그의 문체에 덜 익숙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사족이라고 부를만한 묘사 글이 너무 자주, 장황하게 보이는 바람에,

읽는 중간중간 피곤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새 인물이 등장하면 그의 인구사회학적특징은 물론

소소한 그의 과거까지, 심할 때는 3-4페이지에 걸쳐 소개를 합니다.

 

등장인물 뿐 아니라 날씨와 동네에 관한 상세한 설명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그들이 보고 있는 TV 프로그램과 그 진행자에 대한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말하자면 주어+동사+목적어만 있으면 한 페이지에 끝날 에피소드가,

어마어마한 수식어가 붙으면서 몇 배의 분량으로 늘어나곤 합니다.

적당한 수식어는 당연히 필요하지만, 주객이 전도됐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 역시 작품의 일부분이라는 점을 모르진 않지만,

결국 중반부 이후부터는 수식어는 건너뛰고 메인 스토리만 따라간 경우도 꽤 됩니다.

535페이지면 요즘의 어지간히 두껍다는 책에 비해 100페이지 이상 얇은 편이지만,

못해도 50~80페이지 정도는 축소하거나 생략할만한 내용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끈질긴 탐문과 1차적 단서에 의존하는 추리 등

약간은 수사반장식 추리의 냄새가 나긴 하지만,

이 책이 1983년에 발간된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양해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어쨌든 재미있게 읽었고, 캐릭터들도 매력적인데다

아이스50여편이 넘는 87분서 시리즈 중 36번째로 중간쯤에 해당한다고 하니,

국내에 소개된 또다른 시리즈 살의의 쐐기를 곧 찾아볼 계획입니다.

출판됐다가 절판된 시리즈가 더 있는지 모르겠지만, 중고서점도 뒤져볼 생각입니다.

다만, ‘수식어에 지쳐 피곤한 책읽기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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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의 아이 - 장용민 | Book-한국 2013-06-22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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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궁극의 아이

장용민 저
엘릭시르 | 2013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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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물만 놓고 보면 ‘7년의 밤이후 처음 읽는 한국 소설입니다.

김훈의 역사물, 윤대녕이나 이순원의 순문학이라면

출간 소식이 들리는 대로 찾아 읽곤 하면서도,

고백하자면, 한국 장르물에 관한 한 아직까지 편견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결국 장안의 화제가 되어 제 귀에까지 그 소식이 들려올 정도가 돼야

.. 한번 읽어볼까, 하는 거만한 고민을 하게 되는 편입니다.

 

독자들이 늘어나고, 그래서 작가나 출판사도 힘을 얻고,

자연스레 좀더 수준 높은 장르물이 출간되고...

이런 좋은 순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근거 없는 편견을 걷어내지 못하고 있던 와중에,

저의 편견을 부끄럽게 만드는 좋은 작품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어디까지가 스포일러라고 해야 할지 잘 판단이 안 돼서,

출판사의 책 소개 범위 내에서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 ● ●

 

우선, 배경은 뉴욕이고,

등장인물 중 한국인은 신가야라는 남자뿐입니다.

 

10년 전, 스무살의 엘리스 앞에 느닷없이 또래의 한국인 신가야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닷새 동안의 불같은 사랑을 나누곤

뉴욕의 뒷골목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들에게 둘러싸인 채 자살을 합니다.

닷새 동안의 사랑은 엘리스에게 미셸이라는 딸과 폭식증이라는 상처만 남겨놓았습니다.

 

어느 날, FBI 요원 사이먼은 주요 인사들의 연이은 피살을 예언하는 익명의 편지를 받습니다.

실제로 곡물왕, 광물왕 등 전 세계의 부와 권력을 거머쥔 주요 인사들이 연이어 피살됩니다.

내용도 의심스러웠고, 편지에 찍힌 소인이 10년 전의 것이라 신경을 쓰지 않았던 사이먼은

예언이 차례차례 맞아 들어가자, 편지 속 지시대로 엘리스라는 여자를 찾아가게 됩니다.

 

사이먼은 망각기능이 사라져 7살 이후의 과거를 모두 기억하고 있는 엘리스를 만나,

10년 전에 죽은 한국인 신가야에 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엘리스 자신도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사이먼은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눈 닷새 동안의 행적들 속에

현재의 사건을 풀어갈 수 있는 모든 단서들이 들어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신가야는 미래를 기억하는 궁극의 아이였고,

엘리스를 비롯한 몇몇 사람에게 10년 후에 벌어질 일들을 예언해주곤 사라졌던 것입니다.

사이먼은 또한 연이어 피살되고 있는 인사들이

그동안 궁극의 아이를 통해 미래의 정보를 캐냄으로써

부와 권력을 창출하고 유지해왔다는 사실까지 알게 됩니다.

말하자면, 10년 전에 죽은 신가야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살인 사건의 용의자이며,

동시에 그들로부터 미래의 기억을 착취당한 희생자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국가안보국까지 나설 정도로 일이 확대되고, 사이먼은 오히려 쫓기는 신세가 되지만,

신가야가 남겨놓은 메시지를 추적해가면서 추악한 세력들의 비밀과 진실을 파헤칩니다.

 

● ● ●

 

책 속의 이야기는 엄청난 규모의 스케일을 담고 있습니다.

프리메이슨을 능가하는 비밀조직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전 세계적 긴장과 전쟁을 사소한 장난처럼 다루는 에피소드도 담겨있고,

그 일환으로 한국에서의 전쟁을 기획하는 내용도 나옵니다.

또한 궁극의 아이라는 능력이 느닷없이 신가야에게만 내려진 것이 아니라,

기원전 이집트에서부터 길게는 천년, 짧게는 10년을 주기로 나타났다는 사실을

상세하고 리얼한 묘사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격은 좀 다르지만,

사건의 스케일, 발상의 기발함, 내공 가득한 필력 등 모든 면에서

다카노 가즈아키의 제노사이드가 연상될 정도로 흡입력이 강한 책이었습니다.

제노사이드에 등장했던 신인류 아카리, 에마와 마찬가지로

궁극의 아이의 신가야도 분명 판타지 캐릭터지만,

꼼꼼하고 치밀하게 직조된 스토리 덕분에

비현실적이라거나 허구적이라는 느낌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특히 신가야-엘리스-미셸, 사이먼-모니카 두 가족(부부)의 이야기가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맞먹는 스케일 속에 잘 녹아든 점,

그리고 9.11 사건을 중요한 모티브로 사용한 점 등은

극적인 리얼리티를 배가시키고, 감정몰입을 가능하게 만든 가장 큰 동력이었습니다.

 

이야기의 내용이나 규모로 볼 때,

대한민국 스토리 대전 최우수상을 받았음에도, 국내 영상물로 제작되긴 쉽지 않아 보이지만,

혹시나 헐리우드의 관심을 얻게 되어 제작이 된다면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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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顔) - 요코야마 히데오 | Book-일본 2013-06-21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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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얼굴

요코야마 히데오 저/민경욱 역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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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신검시관’, ‘64’ 이후 세 번째 만나는 요코야마 히데오의 작품입니다.

종신검시관의 경우, 어딘가 의뭉스러워 보이는 중년 탐정이 그려진 표지 때문에

혹시 코지 미스터리가 아닐까?’ 하는 선입견이 생겨 늦게 읽게 됐었고,

얼굴의 경우, ‘경찰소설에 참신한 여주인공 탄생이라는 출판사의 홍보 글 때문에

나이브하고 달달한 이야기가 아닐까?’라는 성 차별에 가까운 편견 때문에 미뤄왔습니다.

그러다가 ‘64’를 통해 이 작가의 내공을 겪어보곤 작품들을 찾아 읽기로 결심했는데,

어찌어찌 하다 보니 얼굴이 제일 먼저 손에 잡히게 됐습니다.

 

히라노 미즈호는 D현경 본부에 속한 순사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여경이지요.

책의 내용은, 미즈호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경찰 조직 내의 성 차별과 무시를 견뎌내고

한 사람의 훌륭한 경찰로 성장해나가는 이야기입니다.

5편의 이야기가 들어있는데, 별개의 사건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마치 연작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에 장편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합니다.

 

애당초 감식반에서 범인의 몽타주를 그리던, 얼굴 그림 여경이던 미즈호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다가 홍보실로 좌천된 상태입니다.

여자는 안돼!” 소리를 신물나게 들으면서 겨우겨우 버티고 있긴 하지만,

존재감도 의욕도 찾아볼 수 없는 홍보실의 단순 업무에 거의 항복 직전입니다.

그러다가 범죄피해자 상담센터에서 전화 응대 업무를 맡게 되기도 하고,

고참 여경의 출산 휴가로 공석이 된 형사부에 얼떨결에 배치받기도 합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그림능력을 발휘해서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도 하고,

뛰어난 탐문 실력으로 범인을 잡아내기도 하고,

숨 막히는 추격전 끝에 범인의 총에 맞아 부상을 입기도 합니다.

, 동료에게 상처받기도 하지만, 상처받은 동료를 끌어안기도 합니다.

 

매번 마땅한 공적을 인정받지도 못하고,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못해도,

미즈호는 묵묵히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할 뿐입니다.

동시에, 미즈호가 진실을 밝혀내는 과정들은 단순히 범인 찾기에 그치지 않고

사건에 얽힌 사람들을 엄하게 응징하기도 하고, 반대로 위로하거나 설득하기도 하면서

모두가 바라는 진정한 경찰의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점은 지금까지 읽은 요코야마 히데오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데,

규모도 크고, 복잡하게 얽혀있는 잔혹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겐

간이 덜 된 음식처럼 좀 심심하거나 덜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따뜻함이든 애틋함이든 일련의 문학적 정서들이

장르물 속에 제대로 녹아든 채 독자들에게 전달되려면,

그만큼 사건이나 캐릭터 묘사가 현실적이고, 치밀하고,

뒤통수를 칠 만한 something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사건의 외양에만 매몰된 작품들을 보면,

캐릭터는 힘을 잃고, 이야기는 제 갈 길을 잃고,

결국엔 책을 덮는 것과 동시에 기억에서 잊혀지는 작품으로 전락합니다.

반대로, 너무 정서를 앞세우다 보면, 사건은 단순해질 수밖에 없고, 긴장감은 떨어집니다.

장르물로서의 덕목은 바람과 함께 사라져버릴 뿐이죠.

 

요코야마 히데오는 사건정서를 자신이 내세운 캐릭터와 믹스하는 과정에서

어색하지도, 작위적이지도 않게, 그야말로 대단한 내공을 보여줍니다.

종신검시관의 구라이시, ‘64’의 미카미, ‘얼굴의 미즈호는

성격도 다르고, 맡고 있는 일도 다르고, 성이나 연령대도 제 각각입니다.

하지만, 경찰로서 그들이 지향하고 있는 바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권위도 아니고, 전공도 아니고, 직위도 아닙니다.

그저 평범한 시민들이 기대하는 믿을만한 경찰’, 그 자체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점 때문에 그의 캐릭터들은 오랫동안 독자들의 기억 속에 남게 될 것입니다.

 

저 역시 취향은 복잡하고, 잔혹하고, 사이즈 큰 이야기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요코야마 히데오 같은 작가를 통해 가끔씩 순화교육을 받는 것도

그에 못지않은 만족감을 느낄 수 있어, 이제는 제2의 취향처럼 여기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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