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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17 의 전체보기
벽 속의 세상 1~22 | 신다의 시 2020-11-17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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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속의 세상·1

 

너는 언제나 말 속에 숨어

나를 괴롭히는 사람과

말을 한다

끝내 끝내

나는 이렇게

 

 

벽 속의 세상·2

 

용기는 사랑하지만

이제는 너를 알고 싶다

벽 속의 세상·3

 

한참동안을 바라보다가

세상을 원망하는

한 사내아이가 있었다

눈빛을

 

눈빛을……

 

 

벽 속의 세상 3

 

너는 어디

지금 어디

사랑한다

지금 어디

 

 

벽 속의 세상 4

 

바람이 분다

오늘도

분다

 

 

벽 속의 세상 5

 

여전히

너는

고독

 

 

벽 속의 세상 6

 

사랑한다

이 모든

 

 

벽 속의 세상 7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용기가

있어야

 

그러나

 

 

벽 속의 세상 8

여기는

저기는?

 

 

벽 속의 세상 9

 

유리 안에

내재된

그릇

 

 

벽 속의 세상 10

속고 속이는

이 현실

 

 

벽 속의 세상 11

여전히

말이 없다

너는

벽 속에 숨어

 

 

벽 속의 세상 12

 

사랑하는

이 모든 벽

뒤에 숨은

 

벽 속의 세상 13

너는 어디

지금 어디

사랑한다

지금 어디

 

 

벽 속의 세상 14

 

바람이 분다

오늘도

분다

 

 

벽 속의 세상 15

여전히

너는

고독

 

 

벽 속의 세상 16

 

사랑한다

이 모든

 

 

벽 속의 세상 17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용기가

있어야

 

그러나

 

 

벽 속의 세상 18

여기는

저기는?

 

 

벽 속의 세상 19

사랑한다 그만

사랑한다 그만

사랑한다 그만

 

 

벽 속의 세상 20

이제는 끝

내고 싶다

 

 

벽 속의 세상 21

나도 더 이상

이제는

 

 

벽 속의 세상 22

 

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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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에 걸리다 | 신다의 시 2020-11-17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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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에 걸리다

 

 

 

- 이 시에 뭔가 있을 거라 기대를 하고 있다면 생각을 거두어 주시길

목소리 낮춰 소망함. -

 

마지막 남은 알록달록한 껍질이

친구에 의해 벗겨지던 그때

희미하게 보이던 모든 것이

비로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창 밖, 한바탕 벼락이 내리고

소나기에 묻히는 신음소리

조금 거부반응이 있기는 했지만 이내

세상을 감싸는 침묵이 깊숙이 찾아오고

오름가즘을 오르내리는 숨소리만이

깊어가는 여름밤을 채워내고 있었다.

끼익끼익 삐걱이며 살과 살을 파고드는

 

섹스의 한 중간쯤

 

나는 비로소 그들에게서 고개를 떨구었고

그날 새벽

천정이라고는 있지도 않은 다락방에서

혼자서 수음을 했다

삶이란 게 이런 것일까,

하는 상투적인 질문을 하고 있을 때

간밤의 천둥처럼 벨소리가 울리고

먼저 가서 미안하다며

친구는 마지막 인사를 한다

 

투우욱 -

 

끊어지는 저편 너머

나의 이상형이 끼루룩거리고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어떤 희망도 남기지 않은 채

멍한 다락방에서 뚜욱뚝 떨어지는

천둥소리가 울리는 여름이 되면

해마다 찾아오는 그녀의 신음소리에

 

나는 가끔씩 슬픔을 내뱉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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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껍데기 | 신다의 소설 2020-11-17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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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애당초, 출판사와 계약을 한 것이 잘못이었는지 모른다. 내가 소설을 쓰겠다고 하면서 나의 생활은 온통 엉망이 되어 있었다. 일단, 계약을 하고 나니, 나는 어떻게 소설을 시작해야 할 지 몰랐다. 방안에 하루종일 틀어박혀 겨우 몇구절 끄적거린 것은 내 아득한 과거 속에 어떤 남자를 떠올린 것 뿐이다. 나는 이 소설을 회고록 형식으로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회고록이 되어서는 안된다. 처음에 출판사에선 회고록을 써달라고 했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안되겠다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랬더니, 출판사에선 그럼 소설을 쓰되 되도록이면 회고록의 형식을 빌어서 써달라고 했다. 나는 사형장에 끌려가는 참담한 심정으로 소설을 써나가기 시작했다.

 

 

- 그 남자를 만난 것은 내가 대학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때였다. 나는 그 당시, 공부보다는 나이트와 술집, 혹은 당구장을 다니던 이른바 킹카라고 불리우는 잘 나가는 여자였다. 그러나, 절대로 하룻밤을 허락하진 않았다. 언제나 열두시 이전에 귀가를 했으며, 그것만이 나를 유일하게 지탱해주던 경제력의 원천이었기 때문이다. 집에서는 통금시간이 열한시 반이었지만, 열 두시까지만 들어오면 비교적 관대한 편이다. 그것은 학교가 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 동네는 밤중에도 그리 한산한 동네가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비가 몹시 내리던 어느 날이었다. 어떤 것이 나를 그곳으로 몰아넣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날은 비가 몹시 내렸지만, 무척 더웠다는 것 뿐이다. 더운 날씨에 소나기가 오면, 모기들은 실내로 들어가 평소보다 더욱 더 날뛰고, 에어콘이 없는 곳에 들어가면, 땀은 삐질삐질 쏟아난다. 나는 친구들에게 그들이 아는 허름한 술집으로 나를 인도해 주기를 바랐고, 그들은 친절하게 나를 그 허름한 술집에 내려다 놓았다. 그 술집엔 에어콘도 없이, 선풍기 몇대만이 공중에서 돌아가고 있을 뿐이고, 낡은 탁자 주위로는 나무의자가 공원의 벤치처럼 서너사람이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도록 길게 뻗어서, 그런 나무의자에 익숙하지 않은 나에겐 약간의 경악마저 일으키게 해주었다.

 

친구들과의 대화는 지루하기 짝이 없다. 언제나, 요즘 유행하는 패션이나, 연예인들 이야기, 아니면, 화장품 이야기 등등 주로 그런 대화들이다. 그런 이야기들엔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내가 지루해 하는 건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열한시가 아직 못될 무렵, 나는 친구들에게 먼저 가봐야겠다고 하며, 오늘 즐거웠다고 하며, 일어섰다. 그리고, 나는 잊었다는 듯이 술값을 치르고, 더 놀다 가라며 몇만원을 쥐어주었다. 친구들은 친절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하며 나에게 잘가라고 하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나는 그 가게를 나왔다.

 

비는 아직도 많이 오고 있었다. 내가 우산을 펴려고, 가게 문을 서성거릴 때, 어떤 남자가 내게 다가왔다. 앞머리를 길게 늘어뜨려 왼쪽 눈을 가린, 우수에 찬 눈동자를 가진 남자였다. 그 남자가 내게 말했다.

현실을 믿나요?”

나는 이건 분명 이단종교이겠니 하고,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려는데 그 남자는 다시 나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

현실을 믿으세요?”

이제 보니, 그 남자는 우산도 쓰지 않은 채 이렇게 억수같이 내리는 비를 마냥 맞고만 있었다.

아저씨, 무슨 말 하려는지 모르지만, 전 지금 바빠요.”

그러나, 그 남자는 굽히지 않고 나의 눈동자를 응시하는 것이 느껴졌다.

전 아저씨가 아니에요, 전 당신과 같은 학생이죠. 지금은 재적당했지만.”

그 말이 나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어머, 어쩌다가요?”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분명 운동권 학생이거나, 아니면 폭력집단의 조직원일 것이다.

, 당신을 처음 본 순간 느꼈죠. 제 자신이 더없이 비참해지는 것을. 전 아직도 수양을 더 쌓아야 하고, 그리고 나서야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겁니다. 이건 결코 당신의 동정심을 사고 싶어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저 그 말을 믿어달라는 것 뿐입니다. 당신은 더없이 맑고 순수해보여요. 그저, 단 한달만이라도 당신을 알고 지낸다면, 그것으로 저는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겁니다. 부탁입니다. 저에게 허락된 단 한순간의 시간, 이 순간을 저에게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이 사람 무슨 완벽주의자인가, 아니면 신앙에 미친 사람인가. 그러나, 차츰, 그의 말을 들으면서 느끼는 건, 그의 눈빛 속에 내가 빨려가고 있다는 느낌 뿐이었다. 이 남자는 참 순수해 보였다. 그리고, 우울해 보였다. 단지, 그것뿐이었는데도, 나는 그와 만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필연적 운명에 끌려가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우스운, 감상에 젖은 낭만적 환상주의라고 비방할지도 모를 그런 운명의 순간 말이다.-

 

 

다행이다. 여기까지라도 소설을 전개해 나갔으니 말이다. 그러나, 도무지 현실과 소설의 사소하고 미묘한 틈을 찾을 수가 없다. 소설은 사실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허구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 허구는 다시 현실이 된다. 그러나, 도무지 이 현실에서는 소설적인 필연적 구조를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도대체가 현실에서 권선징악의 뚜렷한 성격이 규명되는가 하는 점이다. 실체와 허구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이 무엇인가? 그것은 현실은 철저하게 현실이고, 허구는 철저하게 허구이어야 한다는 명백한 흑백논리가 아니면 무엇이 있는가? 라는 질문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이런 질문은 애당초 하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지금 소설을 쓰고 있고, 이 소설은 나의 회고를 바탕으로 한 소설임이 분명하다. 그것만 분명하다면, 이것은 회고록을 빙자한 소설이 될 것이다. 아니, 소설을 빙자로 한 회고록이 되기도 한다. 그 경계는 분명치 않다. 다만, 나는 지금 소설을 쓰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니까.

 

 

- “인간의 모습은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죠. 모두들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한다는데, 그것은 근본을 뿌리치고 하는 말입니다. 인간의 역사를 보고, 인간의 근본을 보세요. 여성해방운동이라고 하는데, 여성해방운동은 언제든지 전개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좀더 근본적인 문제에 부딪치면, 여성들은 그 운동을 포기할 수밖에 없죠. 아기를 낳을 수 있는 건 여자 뿐입니다. 그것은 신이 창조한 역사의 우둔함이죠. 그러나, 신이 과연 있었을까요? 신이 있다면, 이따위 근본적인 편견 따윈 없었을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문제는 현실에 있습니다. 지금 현실이 어떤지 아세요? 모든 우둔한 남자들은 댁과 같이 잘빠지고 예쁜 여자를 원하죠. 그것은 여자들도 마찬가지죠. 여자들이나 남자들이나 마찬가지로 그들의 대부분은 일단 상대방의 겉모습을 보고, 자신의 순결을 바치고 싶어하죠. 순결이란 단어는 남자에게나 여자에게나 동일하게 씌어져야 합니다. 아니, 그렇지 않지 않아요. 예를 들어, 겉이 아주 더러운 사과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과는 껍질 몇군데가 벗겨져서 길바닥에 굴러떨어져 있죠. 이 사과는 금방 떨어뜨린 사과인데도, 사람들은 그걸 알면서 그걸 먹으려 하지 않고, 대부분은 쓰레기통에 쳐박아 버리죠. 그 겉껍질만 벗기면 먹음직스런 싱싱한 사과의 속이 있는데도 말이죠. 그것은 사물에게 통하는 이치가 인간에게도 통한다는 거죠. 하지만, 겉은 아주 깨끗한 사과가 있답니다. 사람들은 아무 의심없이 그걸 베어먹죠. 그러다가, 속이 썩은 걸 알면 그 사과를 버립니다. 그리고 사과에게 속은 기분이 들어 욕을 하며 쓰레기통에 쳐박습니다. 제가 말하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어차피, 모든 열매는 겉과 속이 동일하지 않으면 버려지게 되어 있다는 거죠. 제 말이 틀렸나요?”

 

그의 이야기는 신선했다. 다른 친구들에게선 전혀 듣지 못하던 이야기였다. 하기야, 공부엔 문외한이던 내가 그 남자의 영향을 받으면서 얼마나 공부에 몰두했던가. 나는 그때 아무런 반박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고, 그런 내 자신이 너무나 초라해 보였다. 그 남자는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장본인이었다. -

 

 

나는 여기까지 쓰고,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무엇보다 논문준비로 바빴을 뿐만 아니라, 그가 처음에 내게 한 말이 나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현실을 믿으세요? 거기엔 모방과 역설의 미학이 숨어있었다. 대개의 경우는 운명을 믿으세요? 라고 믿는데 반해 그는 현실을 믿냐고 물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내게 말한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그에 의해 나는 이렇게 내 운명이 바뀌게 되었는데, 그는 처음에 현실을 믿냐고 물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 소설에 어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너무나 갑작스럽게 그에게 매혹되었고, 그를 만나면서 내 운명이 바뀌게 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게 우연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떡하랴? 이것은 내가 처한 나의 현실이다.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고, 현실적인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더 큰 문제는, 내가 그에게 매혹되기는 했지만, 나는 결코 그를 사랑한 적이 한번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내가 애시당초 소설을 쓰겠다고 나선 것이 크게 잘못한 것이다. 나는 단지 내 인생의 회고록을 쓰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남자의 말도 마찬가지다. 기억나는대로 적다 보니, 말의 앞뒤가 맞지 않고, 뭔가가 텅 빈 느낌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소설을 한번도 써보지 않은 내가 여기까지 쓰고 나서 다시 처음부터 쓰라고 한다면…… 나는 도저히 엄두도 못낼 상황이다. 나는 다시 내가 쓴 소설을 차근차근 훑어나가기 시작했다.

 

 

- 무엇보다 그 남자에겐 신비로운 곳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야 안 사실이지만 그 신비란,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허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 남자는 자신의 이름도 연락처도 남기지 않았다. 우리의 약속은 항상 전날에 이루어졌고, 그날 둘 중 하나가 약속장소에 나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영 헤어지게 되는 것이다. 서로의 연락처나 이름 따위는 묻지 않기로 되어 있었다. 서로의 사적인 대화는 절대 묻지 않기로 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왜 재적되었는지 그것만은 알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그 필연성에 대해서 나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단지 당신이 왜 재적되었는지 그것이 궁금해서 만났을 뿐이라고 말했으며,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그때 그렇게 말했다. 내가 그 이야기를 하는 날이 우리의 마지막임을 언급했다.

 

그렇다. 무미건조했다. 그러나, 색다르다. 그와 나의 대화는 언제나 일방적으로 내가 듣는 쪽이었으며, 그는 경제나 정치, 혹은 그날 읽은 책에 대한 이야기나 본 영화 등에 대한 평을 늘어놓았으며, 나는 그의 유창한 말놀이에 진력을 하면서도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매일매일 그런 만남이 계속되었을 뿐, 그는 내게 키스조차 요구하지 않았다. 아니, 내 몸과의 접촉을 오히려 두려워했다는 것이 더 옳은 말일런지도 모른다. -

 

 

그래, 꽤 많은 시간이 흘렀군. 내가 내 소설을 검토하는 일도 진력이 난다. 이 소설을 쓰게 되면서 나는 그 남자와 다시 만나 대화하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소설의 속도도 그 남자를 만나는 날마다 일기를 쓰듯 그런 진전속도가 유지된다. 놀라운 조화다.

 

출판사에선 자주 전화가 걸려온다. 계약상 초고를 갖다주어야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난 아직도 이렇게 낑낑대고 있으니, 아무래도, 난 소설에는 자질이 없나보다. 계약금을 다시 돌려주고 안 쓴다고 할까? 그럼, 손해배상 청구를 하겠지? 글쎄, 그건 잘 모르겠지만, 이미 계약한 건 다시 되돌릴 수가 없는 거다. 난 어쩌자구 이런 계약을 승낙했을까? 차라리, 그냥 회고록이나 쓰겠다고 그럴걸. 왜 내가 소설을 쓰겠다고 빡빡 우겼을까? 그때는 왜 그랬을까? 그저 내 수치스런 과거를 밝히고 싶지 않았을 뿐인가? 그렇다. 인간은 누구나 한번쯤은 수치스러운 기억들을 갖고 있고, 그것들을 지워버리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 수치스러운 과거는 지우려 하면 할수록 더욱더 머리속을 부여잡고 떠나지 않는다. 그것이 심해질수록 사람들의 스트레스는 쌓여가고 간혹, 정신분열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 수치스러운 과거는 누군가가 안아주지 않으면 영영 지울 수 없기 마련이다. 그렇다. 나는 지금 이 수치스러운 과거를 지우려 하고 있다. 지우기 위해 영영 기억될 소설을 쓰고 싶은 것이다. 지우려 하면 할수록 자꾸만 떠오르는 기억들을 아예 소설이란 허구를 통해 완전히 날려버리고 싶은 것이다.

 

 

- 그 남자와의 마지막 날은 그와 만난지 채 한달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날도 비가 많이 오던 날이었다. 그의 얼굴은 처음 만났던 그때처럼 수척해 보였다. 그런 얼굴은 그 이후 처음오 보인 얼굴이었기에, 나는 그의 표정을 보는 순간 그걸 알았다. 그는 그때 아무 말도 안하더니, 나를 여관으로 끌고갔다.

미안해요. 죽기 전에 사랑하는 사람과 한번 해보는 것이 소원이었어요.”

여관방에 들어서며 그는 그렇게 말했다. 이제 죽음이 가까워졌나보다.

그리고 , 나의 몸을 그에게 맡겼다.

비소리가 거세게 들려왔다.

한참 후, 침대 위에 피가 묻어있는 것을 발견한 그는 다소 당황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으나,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미안해요. 난 당신이……

난 그에게 말했다.

괜찮아요. 가끔 남자들은 여자들의 고통을 모르곤 하죠. 그렇게 억지로 하면 이렇게 돼요. 그보다 오늘이 마지막 날 아닌가요?”

그렇죠. 그 이야기를 해 드리죠.”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울려왔다. -

 

 

그리고 나는 또 소설쓰기를 한동안 멈췄다. 이번엔 꽤나 오랜시간이 걸렸다. 이 부분을 어떻게 극적으로 요리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출판사에서는 원고독촉이 심해졌다. 나는 정신이 사나워졌다. 내 인생의 가장 수치스러운 부분, 이 부분을 어떻게 극적으로 말할 것인가. 그때, 그 남자는 사람을 죽였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다행히도 과실치사로 판명되어 몇년만에 퇴소하기는 했지만, 사실상 그것은 과실치사는 아니었다고 한다. 누구를 죽였느냐는 질문에 그는 아주 태연하고 뻔뻔스럽게 말했다. 처음으로 사랑했던 사람이라고. 난 잠시 머리가 멍해짐을 느꼈다. 그리고 왜 죽였냐고 물었다. 두번째 물음 역시 그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여관으로 들어가려 하자, 그녀가 거부하길래 몇대 패줬다고 한다. 우습지만, 진짜같다. 그 남자가 거짓말하는 것 같진 않다. 그리고, 멍해져 있는 나를, 그 우수에 찬 눈빛으로 잠시 바라보더니 여관방을 슬그머니 나가버린 것이다. 그 후로 그는 다시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소설을 이렇게 우습게 끝낼 순 없었다. 좀더 극적인 장면과 그럴싸한 연극이 필요한 것이다. 그에게 있어 난 결국 무슨 존재였을까? 우습다. 소설을 이렇게 허망하게 끝맺을 순 없었다. 나는 더이상 나아지지도 않을 소설을 붙잡고 골머리를 앓고 있다. 집어치고 싶다. 그러나, 빨리 끝내야 한다. 나를 압박하는 순간순간들이 섬찟하게 내 앞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그 남자의 환영이 떠오른다. 그가 나를 본다.

 

- 사실은 당신도 죽이려고 했었지. 하지만, 당신은 죽일 수가 없었어. 왜냐구?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일만한 가치가 없는 거야. 당신은 오로지 동정심으로만 날 대했지? 내가 그걸 모를 줄 알았나? 사람을 진정 사랑하는 여자라면 그렇게 쉽게 자신의 몸을 내주지 않지. 그래, 넌 죽일만한 가치조차 없는 년이었어……

 

아아, 그렇다. 난 그를 사랑한 적이 없다. 단 한번도. 아니, 그뿐만이 아니고, 난 아직까지 누구도 사랑해 본적은 없다. 우연히 그를 만나 순결을 잃은 것 뿐이었고, 그것 역시 사랑과는 무관하다. 모든 것이 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쓰는 이 소설을 나는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뚜렷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소설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내 삶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는다……

 

오랜만에 꿈에서 깨었다. 소설을 쓰던 꿈에서 깨어났다. 그러자 또 한편의 소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소설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또 다른 꿈이었다. 그 꿈은 그가 꾼 꿈이었고, 거기에 애당초 의 존재는 속해 있지 않았다. 거기엔 한 여자만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나를 못 견디게 했다. 끔찍한 소설이다.

 

- 그 여자를 만난 것은 비가 몹시도 많이 내리던 어느날 허름한 술집 앞에서였다. 나는 여느때처럼 그 여자에게 말을 건다. 특별한 감정이 실린 것은 아니다. 무미건조한 말이었지만, 한번 시도라도 해보고 싶었다. 수십번 같은 말을 반복하다 보면, 그 중 한 여자는 나의 이 어설픈 작전에 먹혀 들어간다. 그리고 이 여자도 그 중 하나 걸린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매일 만났다. 그녀는 다른 여자들과는 달랐다. 아니, 그보다는 내가 만난 다른 여자하고는 달랐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 여자는 내가 하는 말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어느 쪽으로 기울지 않았다. 나는 이 여자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궂이 알지 않아도 좋다. 어쨌든, 나는 이 여자의 몸을 갖고 싶다. 그 외에 다른 생각을 할 필요는 없다. 한달 째 되는 날, 나는 마음먹고 그 여자를 따먹으리라 생각했고, 그 여자는 의외로 쉽게 응해주었다. 그리고, 운좋게도 숫처녀다. 그리고 나는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이 여자는 아무 감정도 없이 나를 만났고, 아무 감정도 없이 일을 치루어 낸 것이다. 그 여자는 내게 처음으로 두려움을 준 존재다. 여자는 내게 매달리지도 않았고, 나를 차버린 것도 아니다. 그 여자는 감정 그 자체가 없는 사람이다. 나는 그녀를 한번 쳐다보고, 재빨리 그 여관방을 빠져나왔다. 비가 너무 많이 내렸다. 그것이 내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그녀에게로 향하게 했다. 그러나, 나는 돌아갈 수 없었다. 이미 내 감정을 되돌리기엔 그녀에게 너무 많은 거짓말을 해 버렸고, 그녀는 너무 메말라 있었다. 그것은 동정심도 아니었다. 차라리, 동정심이라도 있는 여자라면 낳았을지 모른다. 그녀는 그저 호기심으로 나를 대했을 뿐이다. 그러고보니, 오히려 내가 당한 기분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이란 말인가? -

 

대체 누구의 소설에 이따위 말이 전개되는가? 이건 내 소설이다. 내 소설에서 나오는 그의 독백이다. 가능할까? 나는 그에 대한 내 상상력을 동원해, 그의 일기장을 들춰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렇게 메말라 있는 여자였을까? 둘 중에 누가 누구를 속였고, 누가 당한 것인가? 나인가, 그 남자인가? 나는 다시 머리 속이 혼란해짐을 느꼈다. 일단, 둘 다 속였고, 둘 다 속은 것은 틀림없다. 나는 그 남자의 말이 모두 거짓말임을 알았었고, 단 한가지 여자를 죽인 것만이 진실임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 남자는 아직도 죽지 않고, 어딘가에서 다른 여자에게 또다른 사기행각을 벌이고 있겠지? 문득, 나의 껍데기가 궁금해진다. 인간의 복제기술은 이미 옛날에 발표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아기의 복제까지도 가능하다. 복제가 아닌 것은 없다. 나란 인간도 복제인간이다. 다만, 나는 복제할 때 유전인자의 결핍으로 탄생한 기형아인 것이 조금 다를 뿐이다. 그 남자가 죽인 것이 또다른 나였다는 것을 그는 알까? 만약, 이것이 소설이라면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현실은 그렇다. 그와 내가 만난 필연적이고 유기적인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내가 그를 그렇게 만났다는 사실조차 말도 안되거니와, 그로 인해 내가 이토록 성공할 기반이 다져졌다는 것은 더욱 더 어설프고 억지스런 구성이리라. 그래서, 나는 회고록을 쓰지 않기로 한 것이다. 의심이 많은 사람들은 분명, 그것이 사실이냐며,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느냐고 따져 물을 것이고, 나는 그것이 정말이며, 일체의 허구도 허용되지 않았다며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느라 바쁠 것이다. 그렇게 시달릴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한 것이다. 그러나, 소설의 형식을 빌면, 궂이 그런 사실을 떠벌리지 않아도 좋을 터였다. 꼭 사실을 그대로 쓸 필요는 없다. 필연적 구조로 따져서 적당히 조합하면 아무도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 형식엔 사실도 있지만, 유기적인 구조를 필요로 하는 필연적인 사건을 집어넣어야 한다. 그것이 소설의 장점이다.

 

소설을 쓰다보니, 나는 이 소설은 시작할 때부터 잘못된 것이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와 나의 만남에서부터 그와 내가 이별하기까지의 구조가 지나치게 단순하고 우연적일 뿐만 아니라, 그 남자와의 재회, 또 소설의 뒷끝을 매끄럽게 할 수 없는 단점, 그 밖에도 여러 문제점이 노출되고 있는 것이다.

 

역시, 소설을 쓴다는 것은 힘든 일일까? 그냥, 회고록으로 쓸까? 나는 또다시 난관에 부딪힌다. 출판사에서는 여전히 재촉전화가 끊이지 않았고, 나는 계속해서 소설출판을 미루어 왔다. 어쩌면, 나는 이 소설을 영영 출판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남자와 나의 만남은 영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된다. 그때 또다른 부분이 눈에 띄었다. 그것은 나의 어릴 적, 회고가 시작되는 부분이었다.

 

- 집안 사정 때문에, 어머니는 직장에 나가시게 되었다. 학교를 끝나고 들어오면, 언제나 어머니는 반갑게 맞아주셨는데, 이제는 집에 와도 별로 재미가 없다. 오빠는 내가 집에 오고 난 후 조금 후에 들어왔다. 문제는 오빠였다. 그러던 어느날, 오빠는 내게 말했다.

, 여자가 뭔지 알고 싶다.”

나는 처음에 그게 무슨 소린지 몰라, 오빠에게 물었다.

오빠, 무슨 소리야?”

오빠는 아무 말도 안하고, 내 방에서 나의 몸을 훑어보고 있었다.

나는 처음에는 왜 저러나 했지만, 조금 있다가, 나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냥 벗었다. 아무 느낌도 없었다. 그리고, 오빠와 나는 한몸이 되었다. -

나는 순결을 두번이나 빼앗겼다. 오빠에게서, 또 그남자에게서.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세상에는 모든 것이 다 가능하다. 특히, 그것이 소설에서라면, 더욱더 실현가능한 현실이 될 것이다. 문제는 소설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은 현실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현실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은 소설에서 가능하다. 하지만,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은 소설에서도 없어야 한다. 그 한계란 결코 깨뜨려지지 않을 것만 같다.

 

순결도 되찾을 수 있다. 유전의 발달은 이제 구시대의 발상 그 자체를 명확하게 규정지었다. 순결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희박해져가는 시대에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 애를 쓰겠다는 다짐은, 어쩌면 불필요한 인자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여성의 인권존중을 위해서는 정말 잘한 일이라 생각된다.

 

그렇다. 나는 순결을 빼앗긴 건 아니다.

 

설명하자면, 그 남자를 만날 때, 나는 이미 순결하지 않았었고, 그 남자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 남자를 만날 때, 나는 이미 마음의 수술을 했을 뿐이고, 그 남자는 이미 파괴된 나의 순결을 한번 더 파괴한 것일 뿐이다.

따지고 보면, 내 소설에 문제점은 전혀 없다.

나는 그냥 어쩌다가 한 남자를 만났고, 순결을 두 번씩이나 잃은 복제인간일 뿐이고, 우연연히 또 다른 내가 그 남자에 의해 죽었다는 것 뿐이다.

 

- 박사님, 아직 원고 멀었습니까? 이거 이러시면 안됩니다. 마감날짜가 벌써 지났는데, 저희 입장도 좀 생각해 주셔야지요? 위에서는 빨리 받아오라고 난리치고, 박사님은 조금만 조금만 하시면, 계약위반으로 손해배상 청구를 할 처지에 몰렸습니다. ? , 내일까지 꼭 좀 부탁합니다. 내일은 정말 갖고 나오셔야 합니다. , 내일 어디요? , 직접 오시려구요? , 그럼 오후 2시 안에 꼭 가져오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나는 이미 죽어있는 상태다. 오늘은 밤을 새워서라도 원고를 완성시켜야 한다. 할 수 없다. 소설이 형편없더라도, 일단은 내고 보자. 지금으로선 별 방법이 없다. 나는 어릴 적 회고부분에 살을 붙이고, 마무리를 짓기로 했다.

 

- 오빠는 그후로도 계속 내게 관계를 요구해왔다. 나는 별 느낌 없이 오빠의 요구에 응해주었다. 그러나, 그 관계는 오래 가지는 못했다.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직장에서 일찍 들어온 날, 어머니는 오빠와 한방에서 벌거벗고 뒹구는 우리를 보셨고, 당황한 오빠는 넋을 잃고 어머닐 바라보았다. 물론, 더욱 더 당황한 건 어머니 쪽이었다. 처음엔, 당황한 기색만 보이더니, 나중엔 벌거벗은 오빠를 회초리로 내리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상태로 오빠는 쫓겨났다. 달랑, 옷 몇가지를 던져주며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다시는 이 집안에 발 들여놓을 생각일랑 하지말아. 나는 오빠가 돌아올거라 믿었다. 그러나, 오빠는 그길로 사라져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지금은 인간의 복제가 가능한 시대라며, 언젠가는 나를 복제하는 것도 가능할 거라며, 가능하면 오빠가 했던 그 일들을 참아보라고 했다. 그 말은 정말 우습게 들렸지만, 나는 어머니 앞에서는 굉장히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갓은 단지, 집안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한 연극에 불과한 것이었다. -

 

소설을 쓰다보니,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소설인지 이제는 구분이 가지 않는다. 내가 소설 속에서 그렇게 생각했다 하면, 현실에서도 정말 그렇게 된 거였군, 하고 생각하게 되는 버릇이 생겼다. 그것이 버릇이라고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버릇이 가장 적당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 어머니는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쯤, 돌아가셨다. 어머니의 죽음은 예고된 것이었다. 임무가 완수된 것이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을 진학하게 되자, 어머니는 사형대에서 돌아가셨다. 22년 동안 미루어왔던 사형을 집행하게 된 것이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죽였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것이다. 아버지를 죽인 이유는 단지, 다른 여자와 바람을 펴, 아기를 갖게 했다는 것이고, 그 아기의 복제인간이 나다. 내가 복제되었을 때에는 그 아기는 이미 성장해가고 있었으니, 아버지가 바람을 핀 것이 언제인지는 잘 모른다. 어머니는 몇 년이나 그 사실을 몰랐었고,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아버지를 죽인 것이다. 그때 마침, 복제기술이 개발되었을 때다. 어머니는 이어, 그 여자를 죽였다. 그러나, 그 아이만은 죽이지 않았다. 그 아이를 죽이기 전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경찰은 의외로 타협을 원했다. 그것이 나를 탄생시킨 원인이다. 나는 그 사실을 어머니가 사형대에 끌려가기 전에야 알았다. 내가 복제인간이었다는 사실조차도 말이다. -

 

나는 드디어 소설을 마쳤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이 소설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았다. 소설의 필연성이 결여되어 있거나, 현실성이 결여되었다면 결여된 대로, 그것은 내가 실제 겪었던 일이라고 하면 된다. 만약, 현실적으로 그것이 정말 가능한 일이라고 묻는다면, 나는 그건 소설이지 않느냐? 라고 반문하면 되는 것이다.

 

날이 밝았다. 이제는 출판사에 원고만 갔다 주면 된다. 나는 아주 가벼운 발걸음으로 출판사로 갔다. 날은 밝은데, 몹시 피곤하다. 그러나, 그 피곤함은 별거 아니다. 적어도 그 뒤에 내가 겪은 피곤함에 비하면 말이다.

 

 

2

 

박사님, 의문이 가는 부분이요, 대학 3학년 때에 말이죠, 어머니 수입이 그리 많은 편도 아니었을 텐데, 그렇게 여유가 많았던가요? 그것이 주수입원이란 말씀은 사창가를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박사님, 복제인간이란 것을 아셨을 때 기분이 어떠셨습니까?”

박사님, 어머님께서 사형이 늦어지신 건 박사님 때문이라고 하셨는데, 과연 그 계약이 옳은 것이었을까요? 거기에 대해서, 박사님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예를 들어 말이죠, 이미 22년이나 지난 후에야 사형을 집행한 것은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시는지, 아니면, 어머님께서 당신에게 고마워하셔야 한다고 생각은 안하시는지요?”

박사님, 아기를 낳으실 수 있다고 하는데, 비리에 연구되고 있었던 사실이라던데요? 박사님이 아기를 낳을 수 있는 게 사실인가요? 그리고 그걸 어떻게 아셨죠? 박사님 주변에 그렇게 훌륭한 분이 계셨었나요?”

오빠의 소식은 들으셨나요? 궁금하시지 않으세요?”

박사님의 인생은 대학 3학년 때 만난 낯선 남자에서 바뀌게 되는데, 정말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쓴 겁니까? 아니면, 직접 체험하신 걸 그대로 옮긴 건지요? 정말 그 남자가 그렇게 박사님을 대하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최근에 화제가 되고 있는 그리운 껍데기는 작품의 제목 그대로 껍데기를 그리워하는 한 성공한 여자박사의 개인적인 체험을 소재로 한 형편없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언뜻 보면, 그럴 듯하게 비춰지는 구석이 많아 많은 독자들의 공감을 일으킬 수 있는 곳이 부분적으로 눈에 띄기도 한다. 하지만, 작품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이 소설의 흠은 눈에 띄게 찾아볼 수 있다. 작가는 그 부분을 일부러 드러낸 듯 보이나, 그러나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작가의 무성의함이 부각되는 부분들이다. 예를 들어, 주인공과 운명의 남자가 만나는 순간부터 인위적이고 필연성을 갖추지 못하고 있으며, 시종일관 이 소설은 회고록을 빙자로한 우연성을 남발하고 있다.

 

이 소설은 비록, 우연성을 강하게 내비치고 있긴 하지만, 인간의 내면을 성실하게 포착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살 만하다. 이 소설의 묘미는 오히려, 그 우연성에 있다. 우연이 우연을 낳으면, 그것은 자동적으로 필연이 된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그 우연성을 주인공의 심리로 내비치는 데 성공했다는 데에 높은 평가를 살 만하다.

 

-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그리운 껍데기의 작가 모모 박사는 일체의 질문을 모두 거부하며, 가해자의 최대권리인 묵비권을 행사하겠다고 그 스스로 죄인인 것처럼 발표했습니다. 이에, 기존 문인들의 변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종전까지, 찬반 양론에만 치우치던 기존 문인들은 모모 박사의 최근 태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각자 저마다의 의견을 내놓고 있습니다. 문제는 모모 박사가 발언한 가해자의 최대권리인 묵비권이란 말에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M 뉴스 특별기획 코너에서는 모모박사의 발언이 그리 중대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에 결론이 이르러, 이만 줄이겠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가해자의 최대권리인 묵비권?”

그게 무슨 말이지?”

그럼, 모모 박사가 가해자란 말인가?”

여태 모르셨어요?”

뭘 말인가?”

뉴스에서 쉬쉬하는 이유는 뻔하잖아요.?”

뭔데 그러나? 말 해보게.”

조만간, 모모 박사도 처형될 거래요.”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인가?”

모모박사의 뉴스가 안 나오는 건, 국민적 반감을 우려해서구요,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이미 그정도는 짐작이 가는 거지요. 저도 자세히는 모르겠구요. 반란죄인가가 적용된다던데요?”

반란죄? 정말 엉뚱한 말이군. 소설 하나 썼다구, 반란죄로 사형을? 좀 심한데. 뭔가가 있긴 있는 것 같은데, 궁금해 죽겠군.”

 

그러나. 아무도 모를 것이다.

 

때로는 모르는 것이 낳을 때도 있고, 알아서는 안되는 것도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감추면 감출수록, 알려고 하는게 사람의 마음이다. 껍데기를 벗어버리면 이제는 그 사람을 알았다고 하고 더 이상 알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오만이다. 알면 알수록 어려워지는 게 사람의 마음이고, 그래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오히려 나 자신이 이렇게까지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이 두렵다. 이것 또한 오만으로 비춰질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정확하게 말하면, 반란죄의 누명을 쓴 것이다. 나의 운명을 바꾸어놓았던 그 남자가 나의 운명을 또다시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는 거대한 정부를 상대로 반란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수놓았던 그 수많은 여자들이 모두 반란죄의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 중 대부분은 풀려났지만, 몇 명은 정식으로 자백을 했다. 그러나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소설은 소설에 불과하다. 그것을 현실과 연관지을 순 없다. 현실은 그렇게 냉혹한 것이다. 경찰은 나를 핵심간부로 지목한다. 어쩌면, 그것이 진실인지도 모른다. 아니, 진실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정말,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기도 하다. 아니, 정부를 바꾸자는 게 아니다. 정부란 권력 자체를 없애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내게 질문을 해댄다. 그것 또한 권력의 남용이다. 비평가라는 권위 아래서 내게 질문을 하고, 기자라는 이름 하에 질문을 한다. 경찰은 경찰이라는 권리 때문에 질문을 한다. 또 나는, 내 소설에 대해서 질문을 한다.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하고, 질문하고 답하고……

 

그러면서, 나는 껍데기가 그립다는 생각을 한다. 차라리, 내가 알멩이를 보여주지 않았던들, 그 수많은 질문들이 내게 부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편의 글이라는 것이, 이렇게 내 자신을 뒤흔들어 놓을 줄은 몰랐다. 나는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낙엽이 떨어지고, 내 자신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

사형날만을 기다리면서 난, 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장식한다.

 

- 대학교 3학년 때 나는 사창가에서 일하지 않았다. 나는 권위있는 사람과 권력을 찾아 돌아다녔다. 그것이 나의 수입원이었다. 그 중에는 권력이 높으신 양반도, 돈이 많은 양반도 있었다. 나는 그들의 휴식처가 되었다. 그들은 나를 좋아했다. , 담배, 당구, , 대화, 안마, 섹스. 이 일곱가지 모두에 능한 나에게 누구든 녹아들었다. 어느 날은 두 세번씩 상대를 바꾸어야 할 때 도 있었다. 그러나, 체력은 자신 있었기에 덕분에 나는 많은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다. 그 모든 돈이 권력과 재산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나는 전혀 부끄러움 없이 그런 돈을 벌 수 있었다. 물론, 내가 아기를 낳을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 가능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아이를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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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의 울림] 해보지 않고는 | 한 줄의 울림 2020-11-17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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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보지 않고는,

당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 프랭클린 아담 -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몰랐다. 예전에는

무엇을 해야 할까 한참을 고민했던 나.

그 나가 지금의 나가 되어 그 나가 미래의 내가 되어.


나는 그렇게 꿈을 꾼다.

오늘도 미래에 대한 꿈을.

언젠가 정말 행복한 세상에서 살아갈 꿈을.


해봐야 안다는 그 말.

나에겐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해봐야 알고, 해봐야 한다.


해보기 전에는 정말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나는 오늘도 해 본다. 무언가를. 계속 해 본다.

그 끝이  어딘지 모르지만, 나는 가고 있다. 그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나는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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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사람동 | 신다의 소설 2020-11-17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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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릿내가 코를 찌른다. 비는 굵어지는 듯 하더니, 이내 다시 얇아지기를 반복한다. 나는 우산을 펼쳐든다. 좀 낡긴 했지만, 주황색의 우산은 우중충한 나를 오히려 환해 보이게 한다. 우산을 쓴다고 해서, 나의 188센치에 달하는 키의 몸에 젖어오는 비를 다 막아주진 못한다. 숯이 많은 머리를 가려준다 해서, 나의 흐릿한 머릿속이 맑아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비가 내 얼굴로 들이닥쳐 내 안경을 덮치는 것이 싫기 때문에 우산을 쓸 뿐이다. 안경을 덮친 비 때문에, 내가 보지 못하는 낯선 세계로 떨어지는 일이 없기를 바라고 바랄 뿐.

 

비는 그러나 내 온몸을 적신다. 우두커니 비를 바라보다 문득 내가 신호등 앞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들이 무더기로 지나간다. 여기가 어디쯤일까? 급하게 발을 재촉하려다 보니, 파란색 신호등이 윙크를 반복하면서 나의 걸음을 말렸다. 저 신호등은 언제쯤 나를 똑바로 마주보려나? 걸음을 뒤로 돌렸다. 사람들의 분주한 걸음걸이. 모두들 어딘가로 향하고 있는 듯 하다. 고개를 든다.

 

저 너머 5층 쯤 되어 보이는 건물이 눈에 띈다. 저게 뭐였지? 낯익은 건물이다. 나는 본능적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처벅처벅처벅. 떨어진 빗물이 바닥에 가득해, 발자국 소리까지 희한하게 들린다. 앞에서 오던 두 여인네가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꺄르르 웃으며 빗물이 가득 고인 길바닥을 조심스럽게 고른다. 나는 여인네 둘을 힐끔 쳐다보고 약간 인상을 찡그리면서 다시 조심스럽게 발을 디뎠다. 나의 변화된 걸음걸이를 눈치챘는지 여인네들의 웃음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비는 굵어졌다 얇아졌다를 아직도 반복한다. 나는 5층짜리 건물의 앞에 서 있다.

 

<미친 도서관>

 

도서관? 기억난다. 나는 이 도서관을 매일 다닌 적이 있다. 공무원이 되겠다고 참 열심히도 다녔었지. 하지만 늘 그곳에는 친구들이 있었다. 근이란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항상 주위에 친구들이 많았다. 나의 유일한 죽마고우였던 근은 그 당시만 해도 어디를 가든 나를 데리고 다녔다. 당구를 쳐도, 노래방을 가도, 볼링을 치러 갈 때도. 심지어는, 나는 알지도 못하는 자기의 친구 생일파티까지도. 나는 공부보다는 그렇게 어울려 다니는 것이 재미있어, 도서관을 매일 갔다.

 

비가 갑자기 거세어졌다. 나는 재빨리 도서관 안으로 들어선다. 다시 지난 날의 추억이 생각이 났지만, 그것은 추억일 뿐이다. 근은 이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근을 생각하자 어서 빨리 이곳을 나가고 싶어졌다. 근은 내게 너무나 소중한 존재였기 때문에, 그를 떠올리는 건 내겐 너무도 잔혹한 고문이었다. 그러나, 좀처럼 비의 굵기는 줄어들지 않는다.

커피 한잔을 뽑는다. 자판기의 위-- 하는 소리가 텅 빈 휴게실에 울린다. 이 넓은 휴게실에 나 혼자라는 생각을 하니 자꾸만 내가 불쌍해진다.

 

* * *

 

자기연민에 빠져서 이 넓은 한 세상을 보낼 거냐?’

근이 내게 물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 ?’

말했잖아. 난 언제 어디서나 너와 함께 있을 거라구.’

그가 다시 사라졌다. 나는 허상을 보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래, 허상이었어. 근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근은 원래부터 없었어. 내가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야. 그런데, 근의 친구들은 다들 어디 있는 거지? 비가 서서히 얇아지고 있다. 나는 빨리 그곳을 벗어나고 싶어, 밖을 향한다. 안의 세계는 언제나 답답하다.

 

나는 지금 시내버스정류장에 서 있다. 버스를 탈까 말까 한참을 망설인다. 어디를 가야 하지? 버스를 타면 내가 누군지 알 수 있을까? 그냥 다른 곳으로 갈까? 그냥 한번 걸어볼까? 나는 한 시간을 그렇게 정류장 앞에서 망설이고 있다.

 

* * *

 

아저씨 사람동 가요?”

나의 목소리가 작았는지 아저씨는 다시 묻는다.

어디요?”

사람동.”

고개를 끄덕이는 아저씨의 얼굴에선 불쾌한 빛이 역력하다. 뭐가 저렇게 불쾌한 것일까? 평일 낮이라 그런지, 비가 와서 그런지, 버스 안에 사람은 거의 없다. 버스 뒷좌석으로 걸음을 옮긴다. 떠벅떠벅떠벅. 맨 뒷좌석에선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소녀 둘이 열심히 대화 중이다. 뭐가 그렇게 재미 있는지 함박웃음까지 곁들인다. 소녀들이 앉은 반대 방향의 뒷좌석 자리를 잡아 앉는다. 자리에 앉고 보니, 앞에서는 어머니와 딸인 듯한 여인 ? 보이는 사실은, 아줌마와 어린이 한 명씩이다 - 둘이서 즐거운 담화를 나누고 있다.

버스는 질주한다. 그리 먼 거리도 아닌데, 시속 100킬로는 되는 듯한 속도로 질주했다가 급정거하는 순간을 계속 반복한다.

미친도서관에서 사람동까지의 거리는 생각보다 꽤 멀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듯 한데, 아직도 반이나 남았다. 그때 버스가 갑자기 급정거를 한다. 옆에 있던 소녀 둘 중 가운데 쪽에 앉아있던 소녀 하나가 버스 안에서 뒹군다. 소녀는 정신을 약간 잃은 듯 하더니, 이내 정신을 차리고 옷을 툭툭 털고는 자리에 앉는다. 또 다른 쪽에서 약간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난다. 뭐지? 하고 앞쪽으로 돌아보는데, 40대쯤 보이는 아줌마와 운전기사아저씨가 다투는 중이었다.

아저씨가 잘못했으니까, 책임을 지셔아죠!”

아줌마, 아줌마가 똑바로 잡고 있었어야죠! 탄 지 한참이나 지났는데, 아직 자리에도 앉지 않고. 상습범 아니야?”

뭐예요? 내가 그럼 일부러 그랬다구? 나참, 기가 막혀서.”

버스가 급정거하는 바람에 아줌마가 허리를 약간 다쳤나 보다. 10분 가량 실랑이를 벌이다가, 버스에서 굴렀던 소녀의 말 한마디로 일단 버스는 다시 출발한다.

, 바빠요! 아저씨, 그냥 빨리 가요.”

가면서도 아저씨와 아줌마는 실랑이를 주고 받다가 아저씨의 말 한마디로 일단은 아줌마도 물러선다.

, 아줌마. 그럼 차번호 적어가서 신고하세요.”

그러자, 아줌마는

내가 참아야지!”

하면서 물러선다. 아줌마가 내리고 나자, 주위가 다시 조용해진다. 그리고 지금까지 달려왔던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버스는 사람동을 향해 질주한다.

 

* * *

 

서점이다. 내가 언제 버스에서 내렸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람동에 가는 버스를 타는 도중, 대형서점이 보여 아저씨, 아저씨를 외치며 급하게 내렸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서점에서 열심히 책을 뒤지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왜 내가 여기 있는 거지? 하는 생각과 함께 내가 읽고 있는 책의 제목에 주목한다.

나쁜 아이로 키워라』『그렇다고 생각하면 진짜로 그렇게 된다내가 이 책들을 왜 읽고 있지? 저기 프리미어가 있네? , 저기 영화잡지들 수두룩하네. 저기에서 책 좀 보다 가야겠다. 한참을 읽다가 나는 또 주저한다. 이 책을 살까? 저 책을 살까? 아까운 생각이 들면 어떡하지? 살까 말까? 그렇게 한참을 망설인다. 좀 더 생각해보고 결정하자.

나는 다시 읽던 잡지를 한번 더 훑어보기 시작한다. 직원인 듯한 아가씨가 내 곁에 다가와서, 눈치를 준다. 나는 아가씨한테 윙크를 한번 해본다. 아가씨가 황당하다는 듯이,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이번에는 남자 직원이 내 옆에 선다. 나는 그 남자에게도 윙크를 해본다. 이번에도 황당하다는 듯이 남자점원은 다시 돌아간다.

저 멀리서 소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낄낄대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그들이 왜 웃는지 몰랐다. 뭐가 웃기다는 거지? 나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무표정하게 살 책을 고른다. 그러나 여전히 뭘 사야 될지는 판단이 서지 않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결국 아무것도 사지 않고, 서점을 나온다. 대체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야? 바깥에는 어둠이 아주아주 짙게 깔려 있다. 도무지, 여기가 어딘지 가늠할 수가 없다. 이제는 돌아가야만 할 시간인 듯 하다.

 

* * *

 

버스정류장. 갑자기, 내 앞에 택시가 급정거를 한다. 앞에 있던 아줌마가 택시를 타려 한다. 그런데 다른 아줌마가 그 아줌마의 앞길을 가로막더니 말한다.

내가 먼저 잡았어요

하더니, 재빠르게 택시를 타고 출발한다. 택시를 놓친 아줌마는 어이없다는 듯, 씁쓸한 웃음을 짓더니, 바로 뒤에 쫓아온 택시를 타고 떠나버린다. 겨우 10초쯤의 차이?

한동안 걷혀있던 비가 조금씩 다시 오기 시작한다. 옆에 있던 또 다른 아줌마가 우산을 펼친다. 우산의 한쪽 귀퉁이가 뜯어져 나가, 금방이라도 그 뾰족한 철사가 내 눈을 찌를 기세다. 나는 이내 몸을 피해 아줌마와의 간격을 유지한다. 마을버스가 도착한다. 사람동.

마침 잘 됐군.’

나는 버스에 오른다. 마을버스라 앉을 자리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빈 자리는 많이 있었다. 그러나, 맨 뒷좌석은 꽉 차 있다. 맨 뒤의 바로 앞쪽에 자리를 잡고 기회를 엿본다. 옆의 아가씨인지 아줌마인지가 자꾸 뒤쪽의 눈치를 살핀다. 뒤에 있던 한 패의 학생들이 다음 정거장에서 우르르 내린다. 그러자 옆에 있던 아가씨인지 아줌마인지가 일어나 뒷좌석을 먼저 차지한다. 나는 그녀가 앉은 반대쪽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마을버스는 오후에 탔던 시내버스와 달리 저속 운행을 한다. 편안함이 밀려든다. 조금씩 졸음이 몰려온다.

 

* * *

 

어느 사이엔가 방에 있는 나를 발견한다. 집이다. , 포근한 잠자리다.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것이다. 내일은 뭔가 다른 일이 있을 것이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잠에 빠져든다.

 

2.

아직도 비가 내린다. 몸은 여전히 찌푸둥하다. 왜 잠을 자도자도 피로가 가시지 않는 것일까. 그렇다고 계속 누워 있을 수만은 없다. 몸을 일으킨다. 오늘 할 일이 뭔지 곰곰이 짚어 본다.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무엇인가 분명히 해야만 하는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뭐였지? 우선은, 외출을 하자. 거리를 쏘다니다 보면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이 날 것이다. 입고 갈 옷이 있나? 청바지에 노란색 셔츠를 걸쳐본다.

마음에 드는군

어제는 내가 어떤 색깔의 옷을 입었던 것일까? 문득, 배가 고프단 생각을 한다. 내가 어제 뭘 먹었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가려는데 핸드폰이 울린다.

, 나야. 오늘도 좀 그렇지?”

범이다. , 오늘 그에게 운전연수를 시켜주기로 했었지. 아니, 원래는 어제 해주기로 했었던 것 같다. 비 때문에 오늘로 연기했었는데, 오늘도 역시 비가 내린다.

그래, 내일 보자.”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집에 둔 채, 집을 나선다. 비오는 날 핸드폰은 짐이 될 뿐이다.

 

* * *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이상하다. 뛰어다니는 사람을 볼 수가 없고, 간혹 흰색의 치마와 옷을 갖춰 입은 사람이 눈에 띈다. 가는 곳곳에 이런 사람이 있다. 대체, 여기가 어디지? 어떤 사람은 짐을 싣고 다니는 바구니에다 바퀴를 달아 끌고 다니기도 한다. 주위를 보니, 온갖 학용품들이 가득하다. , 여기가 내가 바라던 그곳이던가? 그러나 거기에는 가격표가 붙어 있다. 주머니를 뒤져본다. 겨우 백 원짜리 몇 개만 달랑 손에 잡힌다. 지갑을 꺼내본다. 전화카드 한 장만 손에 잡힐 뿐, 천원 짜리 한 장 찾아볼 수 없다. 갑자기 웃음이 나온다. 하하하, 까르르. 사람들이 나를 힐끗힐끗 쳐다본다. 우하하하, 데굴데굴. 나는 있는 대로 오버하면서 바닥을 구른다. 사람들이 여전히 나를 힐끗 쳐다볼 뿐, 관심이 없는 듯 하다. 어느 순간인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 번쩍 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정신을 잃는다. 또 어둠이다.

 

* * *

 

여기는 너무 어둡다. 어둠 속에서, 박혜경의 <빨간운동화>라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이 노래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 갑자기 라디오에서 우당탕 소리가 난다. 누군가가 라디오를 집어던져 라디오를 맞힌 것이다. 라디오에서 지지직 소리가 났다. 그렇게 라디오의 운명은 끝이 난다.

대체 내가 왜 저런 장면을 보아야 하지?’

 

* * *

 

어둡지만, 어두운 거리다. 살 것 같다. 나는 가게로 들어간다.

이봐요! 멀쩡한 라디오를 집어 던지면 어떡해요? 아깝잖아요!”

당신이 뭔데 참견이야?”

? 라디오한테 머리 얻어맞은 놈!”

기억은 길을 잃고 방황한다.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현실을 살고 있는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나는 라디오한테 머리를 얻어맞는 놈일까? 도대체, 나는 지금 뭘 보고 있지?

 

* * *

 

엉덩이 대!”

학교다. 왜 내가 중학교 시절로 돌아와 있는 것일까? 저 선생님은?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선생님이 때릴 때 왼쪽 엉덩이 갖다 대고, 오른쪽 엉덩이 갖다 대고 이랬다.”

다른 친구가 그 말에 물었다.

그랬더니, 뭐래?”

그냥, 웃더라.”

대체, 뭐가 웃기다는 거지? 대체, 저 친구는 왜 저럴까? 저렇게 하면 덜 아플까?

 

* * *

 

이봐요? 정신 차려요. 이봐요?”

누군가가 나를 흔든다.

?”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당신 정말 라디오한테 머리 얻어맞은 적 있어요?”

? , 글쎄요. 모르겠는데요.”

방금 엊어 맞았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 제가 그랬어요? 그런데 제가 여기 왜 있지요? 안녕히 계세요.”

뒤에서 혀를 끌끌 차는 소리가 들린다. 혀는 왜 차는 것일까? 혀를 차면 말이 잘 되기라도 하는 것일까?

 

* * *

 

어떻게 잘라드릴까요?”

?”

여기는 또 어디인가? 비오는 거리를 마구 걷다가 기분전환이나 한번 해볼까 하고 들어온 곳인데, 많이 보던 아가씨가 보인다. 그리고 내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한다. 왜 이러지? 그녀의 얼굴을 다시 보면서 묻는다.

뭐라구요?”

어떻게 잘라 드리냐구요?”

. 미용실이구나.

짧게 잘라주세요.”

안경은 벗어주세요.”

이 미용실을 대체 언제 왔었지? 안경을 벗자, 그녀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녀를 보고 싶은데. 라식수술을 할까? 아니면, 안경을 끼고 잘라달라고 해? 이발하는 내내 그 생각에 매달린다.

, 맘에 드는지 한번 보세요.”

좀 더 짧게 잘라주세요. 길면, 답답해서요. 지난번처럼요

죄송해요. 지난 번에 언제인지 모르겠어요. 최대한 잘라 드릴께요.”

여기 온 지도 꽤 오래되기는 했나 보다. 그녀가 갑자기 귀여워 보인다. 시간이 지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 * *

 

무릎이 앞으로 구부러진다. 왜 갑자기 발이 구부러졌지? 하면서 발을 펴는데, 발 뒤로 무엇인가 묵직한 것이 와 닿는다. 저게 그랜저라는 건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가던 길을 계속 간다. 옆에서 아가씨의 호객용 목소리가 들린다.

아저씨, 괜찮으세요?”

뭐가 어쨌다는 거지? 지금 나한테 하는 소리인가? 나는 가던 길을 멈추지 않는다. 왼쪽 다리가 약간 저려왔지만, 별 이상은 없는 듯 하다. 나는 멈추지 않는다. 눈은 앞만 보고 걷는다.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저 여자가 아무리 나를 유혹하더라도 나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앞만 보고 걷는다.

 

* * *

 

하루가 너무 빨리 지나간다. 내일이 무슨 요일이지? , 내일은 영화를 보러 가는 날이다. 빨리 내일이 왔으면 좋겠다. 집이다. , 포근한 잠자리다. 내일은 기쁜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뿌듯한 마음으로 잠에 빠져든다.

 

3.

영화는 조조를 봐야 한다. 그래야, 넉넉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서 마음 편하게 볼 수 있다. 나는 늘 금요일이면 극장을 간다. 오늘도 역시 아침 일찍 일어나 극장으로 출발한다. 그런데 누군가가 갑자기 그 극장을 번쩍 들어 내동댕이친다.

좋은 영화도 많잖아!”

기억 속의 극장이 난도질 당한다. 그리고, 영화를 보던 나의 표정이 굳는다. 그 극장이 통째로 쓰레기통을 향해 날아간다.

번쩍, 갑자기 천둥이 친다. 마른 하늘에 웬 날벼락? 꿈이다. 아니, 꿈이 아니라 상상이다. 나는 다시 영화 속으로 몰입된다.

이까짓 거 안 봐도 되잖아?”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아무도 없다. 다시 영화 속이다. 톰 크루즈가 드디어 잡혀가는 장면이다. 왜 잡혀가는 것일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는 잡힌다.

 

* * *

 

, 이 새끼 잘못했다고 안 빌래?”

가슴이 조마조마해진다. 저 목소리는 어디서 나는 거지? 영화 속에서 나는 소리는 아니다. 주위를 둘러보지만,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몇 좌석 앞에 앉아있는 수많은 관객의 뒷모습은 모두 여자의 머리카락이다. 대체, 자꾸만 나를 괴롭히는 저 목소리는 뭐지?

라디오 그만 들어, 이 새끼야!”

나는 귀를 잡고 오열을 한다. 톰 크루즈는 분명히 미래의 인간 감옥에 갇혀 꼼짝할 수 없을 텐데, 왜 다시 멀쩡하게 활개를 치고 다니는 것일까? 사람들은 영화에 푹 빠져 있다. 나의 귀에 들리는 이 소리들. 나는 쓰러진다.

 

* * *

 

 

핸드폰이 울린다. 범이다.

오늘, 날씨 좋지? 별일 없으면 간다?”

햇살이 따갑다. 오랜만에 보는 햇빛이 반가웠다.

차 가지러 가야지.’

그런데 내가 언제부터 운전을 했던 것일까? 나는 한번도 운전을 배운 적이 없는데. 범이가 내게 운전연수까지 받는 것을 보면, 나는 꽤 오랫동안 운전을 한 듯 하다. 범이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는 어떻게 생긴 친구일까?

 

* * *

 

내가 그의 옆자리에 있다. 그에게 말을 하고 있다.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만, 햇빛이 워낙 눈부셔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다. 내가 말하는 것을 보아선, 나는 꽤 오랫동안 운전을 한 듯 하다. 그가 내게 한마디 한다.

내가 다른 것은 막 배웠어도, 운전 하나만은 참 체계적으로 배우는 것 같아.”

그의 웃는 모습이 참 매력적이었다는 것은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의 눈이 참 귀엽게 보였다는 것도. 그러나 범이는 어느 순간 또 내 기억 속에서 사라져 있다. 대체, 범이는 누구지? 얼굴은 여전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 * *

 

집이다. , 포근한 잠자리다. 내일은 기쁜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뿌듯한 마음으로 잠에 빠져 드려는데, 누군가가 내 방문을 두드린다.

누구세요?”

누구세요라니? 하루종일 밥도 안 먹고, 방안에 틀어박혀서 뭐하니?”

방문을 여니, 어디선가 본 듯한 중년의 여인이 보인다.

아줌마, 누구세요?”

아줌마? 얘좀 봐? 너 미쳤니? 엄마보고 아줌마가 뭐야?”

내게 엄마가 있었던가? 도저히 기억할 수가 없다.

엄마? 그럼, 아빠도 있나요?”

진짜 얘, 정신 나갔나 보네? 아빠, 아빠!”

저 너머에 50대는 훨씬 넘어 보이는 중년의 아저씨가 시야에 들어온다. 저 아저씨는?

아저씨, 혹시 버스 운전하세요?”

아저씨라니? 네 아버지가 버스 운전하시는 것도 잊어버렸니?”

혹시, 두 분이서 싸우신 적 있어요? 허리 때문에?”

그래 있지. 그런데, 그건 어떻게 알았니? 며칠 동안 방에서 나오지도 않던 놈이.”

나는 다시,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낀다. 대체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환상인 것일까. 라디오는 어디 있을까? 나는 미친 듯이 방안을 둘러본다. 미니콤포넌트 하나, 또 낡은 TV위에 좀 오래된 듯한 비디오데스크가 하나 놓여 있다. 방 주위의 벽에는 색이 바랜 신문기사들이 기하학적인 모양으로 붙어 있었고, 책상 위에 담배가 한 갑 놓여있고 그 옆에 300원짜리 빨간색 라이터가 놓여져 있었다. 나는 담뱃값 속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모양의 꽁초를 하나 골라 불을 붙인다. 담배의 희뿌연 연기가 꿈처럼 아득하게 창문 밖으로 사라지고 있다.

 

4.

아침이다. 비가 내린다. 굵은 장대비다. 좀처럼 그칠 기색이 아니다. 잘 정돈된 방이 눈에 들어온다. 그 방 한가운데에 잡지가 하나 놓여 있다. 언제 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그 잡지를 집어 든다. 영화에 대한 소식이 가득히 묻어있는 잡지다. 신이 나서 마구 읽어댄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다 보니, 어느 새 비가 그친다. 햇빛이 쏟아질 줄 알았는데, 햇빛은 쏟아지지 않고 어두운 구름만이 내 마음속을 싱숭생숭하게 들락거린다. 책상 위를 들춰보니, 재떨이에 담배꽁초가 수북하다. 밤새 담배를 다 피워버린 모양이다. 가장 길게 남은 장초를 하나 뽑아 들고, 다시 불 붙이기를 시도한다. 라이터는 아침 내내 들이닥친 비 때문인지 좀처럼 점화가 되지 않는다. 선풍기로 라이터 말리기를 시작한다. 1, 2, 3. 선풍기의 속도가 올라갈수록 나의 머리카락이 더욱더 세게 뒷머리 쪽으로 뻗는다. 다시, 점화를 시작한다. 드디어 불이 붙었다. 담배연기가 벽을 타고 기어오른다. 벽에 붙어있던 신문기사가 하나 눈에 띈다.

생체시계 맞추면 성공한다 - 때에 따라 공부-일 효과 달라져요

아침엔 자신감이 풍부하다고? 그래서 설득이나 사과는 식사 직전에 하면 좋다구? 내가 사과를 해야 할 사람이 있는데, 그게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다시 정신이 든다. 조용히 문을 연다.

잘 잤어?”

미용실 아가씨가 왜 여기 있는 것일까?

, , 누구세요?”

희한한 일이다.

이제는 자기 동생도 몰라보네? 아무래도 안되겠다. 오빠, 나랑 병원 좀 가자. 이리 와.”

그녀의 손에 이끌려, 나는 병원에 간다. 의사가 나를 불러 세운다. 그녀는 내 옆에 앉아 나의 증세에 대해서 차근차근 말한다. 의사가 묻는다.

어디가 안 좋으십니까?”

나는 그녀가 말하도록 내버려 둔다.

며칠 전부터 오빠가 이상해요.”

의사가 묻는다.

말씀이 없으시군요. 보호자만 남아주시고, 잠깐만 나가주시겠어요.”

나는 여전히 아무 말하지 않고, 의사의 지시대로 한다. 그녀가 나를 부축한다. 의사가 이상한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 * *

 

방을 두드리는 소리에 정신이 든다. 다시, 아무 말 없이 문을 열어젖힌다. 어제의 그 여인이다. 자칭, 엄마라고 하는.

밥 먹어라.”

밥이라뇨? 당신이 제 엄마인지 아닌지 어떻게 증명하죠? 밥에 독을 탔는지 안 탔는지 어떻게 알죠?”

그녀의 이마에 주름이 생긴다. 동시에, 그녀의 동공도 순식간에 배로 커진다. 저 표정은 놀랐을 때 짓는 표정이 분명하다. 나는 문을 쾅 하고 닫는다. 그녀가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섬뜩함이 내 몸 안에서 일어난다. 나는 문을 안에서 잠근다.

 

* * *

 

바보야, 내가 원한 것은 그게 아니란 말야!’

이상하다. 근이 또 나타났다. 그는 분명히 죽었다. 나는 분명히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기억이 있다. 그는 자살했다고 했다. 왜 자살했는지는 아직까지 아무도 모른다. 궁금해진다. 그는 왜 죽었을까.

넌 죽었잖아! 왜 자꾸 나타나는 거야?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정말 아직도 모르겠니?’

 

번개가 번쩍 하고 내리치더니, 천둥소리가 우리를 갈라놓았다.

 

* * *

 

갑자기 누군가가 고함을 치는 소리가 들린다.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아까 그 아줌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목이 메인 목소리다. 고함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나는 귀를 막았다. 그래도 그 소리는 손바닥을 뚫고 더 선명하게 들려온다. 나는 방문을 열고 그 고함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한다. ‘아빠라 불리는 그 사람이 엄마라고 불리는 그 사람에게 계속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당신 때문에 애가 저 모양이잖아! 애 나이가 벌써 서른이야, 서른! 여태 저러고 있으니, 한심하지! 당신이 잘못 가르쳤잖아!”

지겨워, 지겨워.”

문득, 라디오에 머리를 얻어맞은 기억이 난다. 저 사람이 내 머리에 라디오를 집어 던진 사람이다. 죽여야 할 사람이다. 저 사람이 내가 영화를 본다는 이유로 보던 비디오를 집어 던지고, 라디오를 내 머리에 던진 사람이다. 죽여야 한다. 어릴 때부터 별러 오던 일이다. 나는 부엌에 가서 식칼을 들고 나온다. 그들의 얼굴이 놀람과 두려움으로 일그러진다. 나는 그에게 칼을 들이댄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얼굴이 근으로 바뀌어 있다. 근이 말한다.

 

* * *

 

나를 너의 아버지로 생각해. 네가 그렇게 원한다면, 내가 대신 죽어줄게. 날 죽여. 그리고 기억해. 넌 살인자가 아니야. 그리고 또다시 그런 순간이 오면 넌 스스로 죽어야 해. 자기 가족을 죽인 패륜아로 평생을 감옥에서 썩을 생각하지 마. 그건 너와 나의 우정을 저버리는 일이야. 절대, 잊어버리지 마. 그리고 그 순간이 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란 것을 잊지 마

 

* * *

 

그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 나는 칼을 들이댔던 손의 방향을 내 심장으로 돌렸다.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이 될 거라고 했던가. 내가 나를 죽이는 순간이? 눈물 한 방울이 눈 속에서 톡 튀어나왔다. 그 눈물이 내 가슴에서 뿜어 나오는 핏줄기 속에 파묻혔다. 그리고 나는 웃을 수 있었다. 영원히 기억하고픈, 정말 행복한 순간이 나를 향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5.

증상이 언제부터 시작되었습니까?”

글쎄요. 그것을 정확히 모르겠단 말씀입니다. 저 아이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진찰을 해봐야 알겠습니다만, 조현병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아버님 되시죠? 정수범씨와 아버님과의 관계는 평소에 어떠했습니까?”

무슨 질문이 그래요? 지금 저 아이가 나 때문에 저렇게 됐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요? 이보시오. 말도 안되는 소리! 저 아이는 미쳤어. 그냥 미쳤을 뿐이야.”

조현병의 원인이 분명하게 밝혀지진 않았기 때문에 꼭 아버님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치료를 위해서는 아버님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버님도 같이 치료를 받으셔야 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이보시오! 지금 나까지 환자 취급을 하는 것이오? 당신까지 미쳤어? 저 아이는 내 아이오! 내 아이는 내가 더 잘 안단 말이오! 저 애는 어렸을 때부터 내가 길러왔어! 당신이 뭐야? 저 애가 미쳤으면 치료를 할 생각부터 해야지, 왜 나까지 걸고 넘어지는 거야?”

 

6.

가만히 웃고 있던 30세의 아이가 그를 붙잡고 있던 보호사들을 힘차게 밀쳐내더니, 히죽 웃으며 아버지 곁으로 다가간다. 그가 아버지 앞에 굳은 얼굴을 하고 말을 한다.

내가 왜 당신 애야? 난 나야! 당신의 권력 따위에 굽히지 않아. 당신이 버스에 나를 가두고 아무리 나를 몰고 다녀도 난 언제든 내려달라고 할 권리가 있어. 당신이 열어주지 않으면, 난 뛰어내려야만 해. 왜냐구? 난 나의 목적지가 있거든. 당신이 원하는 목적지가 내가 내려야 할 곳은 아니야. 그런데 당신은 내가 내려달라고 아무리 애원해도 버스를 세워주지 않았어. 당신이 가는 곳으로 무조건 같이 가자고만 했어. 그래서 나는 할 수 없이 택한 거야. 버스에서 뛰어내리기로. 난 당신의 소유물이 아니야. 난 나라구!”

이 새끼가! 지금 나한테 대드는 거냐? 이거 완전 미친 새끼 아냐? 저 아이, 내 아이 맞아? 내 아이라면 저렇게 안 대들 거야! 저 아인 내 아이가 아냐! 저리 꺼져!”

지진이 일어난 듯한 진동이 병실을 가득 채웠다. 그곳에는 아이와 아버지의 싸움을 멀뚱히 바라볼 뿐, 아무도 그들을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고요는 그들의 파도를 더욱 더 거세게만 몰아갔다. 하지만 30세의 아이는 아버지의 <저리 꺼져!>란 말이 나오자마자, 다시 히죽 웃더니 경찰들을 향해 돌아섰다. 그러나 그의 눈은 경찰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마치, 누군가가 그를 부축해 주는 듯한 모습으로. 그는 경찰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녀가 돌아왔어요! 내가 사랑하는 미용실의 그녀가 돌아왔어요! 범이랑 근이도 곧 저희 집에 놀러온대요. 하하하하! 자기야, 다시는 날 떠나면 안돼! ? 절대로 떠나면 안돼! 사랑해, 자기야! , 지금 너무 행복해.”

모두들 안쓰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가운데, 단 하나의 눈동자만이 경멸에 가득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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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9 개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