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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을 말해줘_ 공포는 그렇게 조작된다 | 나의 서재 2019-11-29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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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원을 말해줘

이경 저
다산책방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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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가 어떻게 조작되고 이용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강렬한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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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이 허물에 덮이는 피부병을 앓는 도시 속 사람들!

공포가 어떻게 조작되고 이용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강렬한 소설!

 

 

 

   D구역. 이 도시의 풍토병으로, 뱀의 허물 같은 각질이 온몸을 뒤덮는 피부병을 앓고 있는 이들이 격리된 채 살아가고 있는 곳이다. 전문가들은 각질세포 형성에 관여하는 구조단백질이 돌연변이를 유발하는 티셀 바이러스에 감염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지역 사람들이 유독 티셀 바이러스에 쉽게 감염되고 증세가 심한 이유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때문에 다른 구역 사람들에게 D구역 사람들의 피부는 깨끗하다 해도 깨끗한 것이 아니다. 언제라도 바이러스를 옮길 수 있는 숙주와 다르지 않다. 이 모든 것이 자연스레 초래하는 귀결은 D구역은 다른 구역과 격리돼야 한다는 것이다. 도시가 허물로 뒤덮이자 정부는 이 지역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하고 다국적 제약 회사의 기업도시로 지정한다. 세계적인 피부과 질환 권위자이자 신단백질 전문가인 공 박사가 책임자로 와 방역 센터와 방역대를 만들어 T-프로틴을 공급하고 방역 지침을 발표한다.

 

 

 

   주인공인 ‘그녀’가 무릎을 힘주어 문지르자 갈라진 허물 사이로 진물이 진득하게 묻어나온다. 몸 안의 불순물이 배출되지 못해 곪은 냄새가 나고 씻어내야 잠시나마 가라앉힐 수 있지만, 물을 끼얹다가도 손톱에 허물이 걸리고 피고름이 주르륵 흐른다. 이제 통증은 대수롭지도 않다. 그녀는 허물을 벗기 위해 방역 센터에 입소한다. 방역 센터는 허물을 벗겨내는 도시 내의 유일한 기관이다. 방역 센터로 간 뒤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기에, 어쩌면 돌아오지 못할 줄 알면서도 사람들은 방역버스에 올라탄다. 방역 센터에서 허물을 벗고 퇴소하면 다시 허물을 입게 되는 악순환이 계속되지만 이들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다.

 

 

 

   치료 병동에서 머무는 기간은 평균 8주에 이르고, 감염률에 따라 다섯 그룹으로 나뉘는데 그녀는 위험 단계로 분류되어 그곳에서 김과 후리, 뾰족 수염, 임상시험으로 끌려가던 척을 만나게 된다. 파충류 사육사인 그녀, 센터 내의 정보를 누구보다도 많이 알고 있고 어딘지 묘한 구석이 있는 아이 후리, 재생타이어 가게를 운영하고 늘 센터 내의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불안해 보이는 김, 끊임없이 불평을 쏟아내고 욕을 하는 뾰족 수염은 서로 정보를 공유하다 D구역에서 모습을 드러냈다던 전설 속의 거대한 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난 엄마 얼굴도 기억 안 나는데 공 박사는 우리 엄마에게 대해 나보다 더 잘 알 거 아냐. 엄마뿐이야? 이 세상에서 방역 센터보다 나에 대해 더 많이 아는 존재는 없을 걸. 모니터에 작대기들과 사진들이 떠 있었다고.”

“작대기?”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그게 로마숫자더라고. 자기 표식 같은 건지도 모르지. 공 방사는 내 뼛속까지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데 난 죽었다 깨도 그게 뭔지 모르겠더라고. 그 숫자들이 얽히고설켜서 내 몸이 이뤄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지. 숫자의 주인은 공 박사니까, 어떤 의미에선 공 박사가 내 몸의 주인이란 말이 영 틀린 것도 아니야. 안 그래? 흐흐.” / 50p

 

 

롱롱을 찾으면 정말 허물을 벗을 수 있을까. 영원히 허물을 벗으면 한 번도 허물 입지 않은 사람처럼 살 수 있을까. 한 번도 버림받지 않은 사람처럼 살 수 있을까. / 72p

 

 

 

 

 

 

   전설 속 거대 뱀 ‘롱롱’이 허물을 벗으면 세상의 허물이 죄다 벗겨진다는 속설. 한때 B구역 산기슭에 있는 사설 동물원에서 일하다 산사태가 발생해 사라진 비단뱀 하나가 있었는데, D구역에 나타났다는 뱀이 이 비단뱀인지 정말로 롱롱인지 알 길이 없는 그녀는 방역센터를 퇴소하면 이들과 함께 롱롱을 찾아 나서자고 약속한다. 마침내 퇴소를 하고 모여든 이들은 100여 년 전에 불타 쇠락한 궁에서 수십 개의 땅굴을 파고 서식 중인 뱀과 마주한다. 구렁이도 아니고, 비단뱀도 아니며 아나콘다는 더더욱 아니었지만 그녀는 이렇게 크고 단단한 용골돌기는 이제껏 본 적이 없다. 이 뱀이 정말 롱롱일까?

 

 

 

방역 센터는 ‘T-프로틴’을 하루에 두 번 이상 복용할 것을 권장했다. 처음 방역 센터에서 프로틴을 공급했을 때만 해도 80% 할인된 가격에 구입할 수 있었다. 도시 기능을 신속하게 정상화시킨다는 명목으로 정부 지원금이 투입됐기 때문이다. 보조금 혜택이 사라진 지금, 캔 한 개의 가격은 한 끼 밥값에 육박했다. / 73p

 

 

“신화와 전설이란 그런 겁니다. 인간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 상상력을 발휘합니다.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최소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막연한 희망이 허물을 벗겨줄 거라고 정말 믿는 겁니까?” / 102p

 

 

그녀는 뱀을 위한 신당을 차리고 싶지는 않았다. 뱀의 탈피를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 적당한 온도와 습도, 어둡고 좁은 공간, 적절한 먹이 외에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기도 따윈 필요치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저들의 기도는 처절한 몸부림처럼 보였다. 응답받지 못한 기도는 어디에 버려질 것인가, 두렵기까지 했다. / 124p

 

 

 

  이들 일행이 사로잡은 뱀으로 인해 전설의 뱀 롱롱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도시 전체가 흥분에 휩싸이게 한다. 뱀을 사로잡으려는 방역대장과 대치하고, 신에게 바칠 제물이라며 자신들이 마셔야 할 프로틴을 대신 뱀에게 바치면서 그렇게 공포와 탄성이 어수선하게 교차된 채로 사람들은 뱀이 허물을 벗는 광경을 지켜보기 위해 몰려든다. 이런 가운데 오로지 척 만이 “공포는 방역 센터가 시민을 통제하는 도구입니다. 허물을 퇴치하기 위해 세금을 걷고 수십 종의 프로틴을 출시해 점점 가격을 올리고 방역대를 도심에 주둔시키고 있습니다. 시민들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습니다. 허물을 입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허물에 대한 공포는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일상을 지배합니다. 전설 따위에 기대 당신은 이런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겁니다.”라고 냉정하게 판단한다. 하지만 현실을 외면하는 것은 척이며, 지금 뱀에게 가장 현실적인 위협은 공 박사라고 내뱉는 그녀를 통해, 우리는 근거 없는 모순과 판타지에 기대서라도 공포와 불안을 해소하고자 하는 군중의 심리를 여실히 느낄 수 있다.

 

 

 

 “방역 센터 안에서 임상시험은 사실상 강제적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임상시험 동의서에 사인하는 사람은 당장 돈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허물 쓴 사람들 중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임상시험 동의서엔 연구 내용에 관해 피상적인 내용만 기술돼 있습니다. 부작용에 대한 보상도 허술합니다. 일반적으로, 임상시험에 모두 통과해 시판이 허가되는 신약은 10%밖에 안 됩니다. 그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시험 중인 신약의 90%는 인체에 해롭다는 겁니다.” / 150p

 

 

“프로틴은 허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이 도시에서 거의 유일한 대안입니다. 그리고 롱롱의 전설을 모르는 사람은 없죠. 타이어 가게에 있는 뱀은 그 전설의 실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롱롱프로틴은 반드시 성공할 겁니다. 뱀은 다시 숭배의 대상이 될 겁니다.” / 157p

 

 

 

 

 

  이제 그녀는 갖가지 방역 업체가 성업을 이루고 피부과와 피부 관리실, 피부보호제와 약, 향초, 피부 보호 기능을 첨가한 갖가지 생활용품에 이르기까지, 허물에서 파생되는 경제 부양의 효과가 없었다면 시의 발전은 불가능했을 거라는 아이러니와 마주한다. 즉, 시가 허물과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구호는 부인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진실이 되는 광경을 목도하게 되는 것이다. 더욱 공포스러운 것은 롱롱에게 병에서 낫게 해달라고, 끈질기게 달라붙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소원을 비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해 롱롱을 마케팅의 대상으로 이용한 프로틴이 불티나게 팔리는 현상하며, 이제는 제 손으로 롱롱에게 프로틴을 바치며 소원을 비는 사람들이다. 이 기이한 현상과 허물에 대한 불안을 수치로 증명하고, 만일에 대비해 보험에 가입해야 한다고 고객을 설득한 어느 보험왕의 고백 같은 것들이 합쳐져 더 이상 실체는 보이지 않고 부풀린 환상만 남아 조작된 진실이 진짜 진실이라 믿게 되는 현실은 너무나 낯익어서 더 끔찍하다.

 

 

 

 

 

 

   소설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미 유명 프로그램이 순위를 조작해 대중을 기만하고, 다양한 곳에서 진실을 은폐하고 진영의 논리에 따라 의식을 조장하는 현상들을 경험하고 있다. 그야말로 조작된 도시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조장된 공포가 어떤 식으로 사람들을 기만하고, 대중이 우스꽝스럽게 놀아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소설을 읽다보면 자주 간담이 서늘해진다. 누군가는 진실에 눈을 떠 허물을 벗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강제로 덧씌워진 허물을 자신도 모르게 덧입고 사는 불온한 현실을 은유적이면서 한국적 색채의 판타지로 승화한 독특한 작품으로 오래 기억에 남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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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할 땐, 책_ 길 위에서 책갈피를 끼우다 | 나의 서재 2019-11-28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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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여행할 땐, 책

김남희 저
수오서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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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보니 떠나고 싶고, 떠나고 싶어 읽었던 여행 작가 김남희의 책으로 기억되는 여행 혹은 여행으로 기억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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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보니 떠나고 싶고, 떠나고 싶어 읽었던 여행 작가 김남희의

책으로 기억되는 여행 혹은 여행으로 기억되는 책!

 

  돌이켜보면 나는 떠나는 일에는 한없이 게으른 사람이었다. 사람에서든, 집에서든. 가보지 못한 곳들에 대한 동경과 해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미련이 없는 것도 아닌데, 떠돌고 헤매고 낯선 세계에 발을 내딛는 일에 자주 주저하곤 했다. 익숙한 것들에 너무나 익숙해져서, 이곳이 아닌 저곳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나는 떠나는 일에도 반드시 이유가 필요했다. 떠나야 할 이유를 명확하게 알지 못하는 게 이유라면, 책에라도 핑계를 대어볼 걸. 난생 처음으로 영화 <밀양>을 보고, 이청준의 소설 「벌레이야기」를 읽고 느닷없이 밀양행 기차를 탔던 그날처럼. 지금이야 휴대폰으로 ‘밀양 가볼 만한 곳’, ‘밀양 맛집’을 검색해가며 그때그때 갈 만한 곳을 찾아볼 수라도 있겠지만, 당시에는 정말 어떤 정보도 없이 그저 영화의 흔적을, 소설의 느낌만을 좇아 그렇게 기찻길에 올랐었는데.

 

 

 

   딱히 지켜야 할 것이 없었던 보다 더 젊은 시절에 혼자서 여행이라도 많이 다녀볼 걸, 하는 후회가 많이 드는 요즘이다. 그래서 줄곧 소설만 읽을 정도로 독서 편식이 심했던 내가 언제부턴가 여행에세이를 찾아 읽기 시작했다. 이런 세계가 있었구나, 이런 여행도 가능한 거였구나, 이 정도 이유만으로도 떠날 수 있는 이유는 충분하구나. ‘소설 한 구절에 마음이 빼앗겨 충동적으로 여행 가방을 꾸리는 나는 그 누구보다 사치스러운 사람이 된다’던 김남희 여행 작가의 <여행할 땐, 책>을 읽으며 더더욱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어떤 소설의 중요한 공간이었던 거리를 내 발로 걸어보기 위해, 소설의 주인공이 팔던 음료를 마시겠다고 쇠락한 도시의 오래된 카페를 찾아가며, 매혹적인 남자 주인공이 32년간 갇혀 있던 호텔에 하룻밤을 머물며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던 그 고백이 내게는 그 어떤 여행보다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당신의 여행 가방에는 어떤 책이 들어있나요?

 

 

   「여행할 땐, 책」은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 「외로움이 외로움에게」, 「라틴아메리카 춤추듯 걷다」 등 길 위에서의 순간을 기록한 다수의 여행에세이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김남희 작가의 신작이다. 전작인 「길 위에서 읽는 시」가 여행길에서 읽은 스물여덟 편의 시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이번 신작의 주제는 바로 ‘책’이다. 그녀는 ‘내 여행은 배낭에 넣어갈 책을 고르는 일로 시작된다’고 말한다. 느릿느릿 흘러가는 치앙마이에서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천천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어볼까. 고요한 언덕의 리스본에서는 리스본을 사랑한 작가의 소설로 골라볼까. 불과 얼음의 땅, 통제할 수 없는 강력한 자연이 살아 있는 레이캬비크에서는 범죄 소설이 어떨까, 고민해보며 평소에는 잘 읽지 않을 장르의 책에도 과감히 손을 뻗어보는 것이다. 마음의 그물이 느슨해지는 여행지에서는 독서의 취향조차 넉넉해지기 때문이다.

 

 

 

   저물 무렵 집으로 돌아가는 이들의 모습에 문득 혼자임이 새삼스러워질 때,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가기에는 애매한 오후의 시간에, 빗소리에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밤에, 간이역에서 열차를 기다릴 때 습관처럼 펼쳐든 시간이 이 책 속에도 추억처럼 새겨져있다. 한낮의 시에스타처럼 느른한 그리스의 이드라 섬에서부터 그녀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고양이 섬’이라 할 만큼 골목마다 각양각색의 고양이들이 넘쳐나는 곳,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금지된 섬이니 골목 한복판에서 기나긴 낮잠을 청하고, 포구의 카페마다 제일 좋은 자리를 지정석으로 삼는 그들. 끼니때마다 사료를 챙겨주고 물을 갈아주는 집사들이 골목마다 상주하니 이만하면 사람보다 나은 인생이지 않은가.

 

 

 

   게다가 2시부터 4시 사이에는 시에스타가 있어서 매일 두 시간씩 낮잠을 자는 삶이 가능한 섬이라 그 시간이 되면 고양이도 사람도 최선을 다해 잔단다. ‘난 낮잠 자는 것도 아까워’를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나에겐 이런 의무적인 낮잠이 새삼 부럽다. 그렇게 작가는 매일 고양이와 함께하는 날들을 두 달 가까이 보내며 후지와라 신야의 에세이집 「인생의 낮잠」 속의 한 글귀를 떠올린다. ‘고양이는 본디 넘쳐나는 인간의 생활 냄새에 기생해서 살아가는 동네 바보 같은 동물이며, 고양이가 많다는 것은 동네 바보를 거둘 만큼 마을에 활기가 넘쳐난다는 얘기이자 주민들의 마음에 여유가 있다는 뜻’이라고. 넉넉한 인심과 묘심이 어우러진 풍경을 즐기기 위해 아침마다 포구로 나가 날마다 찬연하게 쏟아지는 빛을 맞으며, 그늘에서는 고양이가 꾸벅꾸벅 졸고 있는 섬에서 보낸 한철은 마치 ‘인생의 낮잠’ 같았다는 그녀의 말이 나를 저절로 그리스 이드라 섬으로 이끈다.

 

 

신분도 국적도 직업도 다른 이들이 제각각의 사연으로 이곳을 찾아오지만 이곳에서는 단 하나의 이름으로 불릴 뿐이었다.

순례자.

그 평등과 관용의 정신이 어느새 전통이 되었고, 그 전통이 다시 세계의 순례자를 끌어들이며 더 강화되어 오지 않았을까. 산티아고의 신성은 결국 변화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다른 나를 찾고 싶다는 갈망, 더 많이 감사하고, 좀 더 겸손하고, 더 자주 웃는 나를 보고 싶다는 바람으로 우리는 이 길을 찾아오는 게 아닐까. / 33p

 

 

우리는 겨울 오후에 비껴드는 햇살의 따사로움, 시내에서 일을 보고 걸어 돌아오는 초여름 밤에 밀려오는 라일락 향기, 동네의 계곡에서 겨울을 이기고 산란한 도롱뇽 알을 본 봄날의 작은 작은 흥분 같은 것들. 이런 기쁨을 놓치지 않으며 살고 싶다. 생활의 작은 풍요를 날마다 누리며 살고 싶다. 모든 것이 소멸해가는 세월 속에서 삶의 의미가 되어주는 건 이토록 구체적이면서도 사소한 것들이다. / 43p

 

 

인간이 장소에 기대어 삶을 이어가는 한 세상 어디에도 슬픔이 베이지 않은 도시는 없을 것이다. 삶이 있는 한 어떤 공간에서나 고통스러운 일들은 생겨난다. 다만 시간이라는 열차의 바퀴 자국이 그 상처를 희미하게 만들 뿐. 냉정한 시간이 이제는 치유자가 되는 아이러니가 우리의 삶이다. 길고 고통스러운 치유의 과정이 고스란히 쌓여온 공간에서 우리는 다시 살아간다. 지나가버린 시간을 그리워하면서도 공간을 바꾸어 삶 또한 변화시키고 싶다는 모순되는 욕망을 안은 채로. 리스본은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길 원했던 도시였던 동시에 과거를 향한 진한 향수병을 앓는 도시였다. 소설 속 남자 아마데우 안에 길을 떠나길 원하는 여행자와 과거를 향한 그리움을 앓는 두 사람이 있었듯이. / 70p

 

 

 

 

 

 

   “Be not inhospitable to strangers, lest they be angels in disguise(낯선 사람들을 냉대하지 말라, 그들은 변장한 천사일지 모르니.”

파리에 가면 오갈 데 없는 창작자들의 몸 뉠 곳을 마련해주는 예술가들의 안식처가 있다고 한다. 바로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서점이다. 창작자들에게 무한한 영감을 주는 도시답게 나는 줄곧 혼자서 여행을 한다면 파리에서도 꼭 이곳에 가보고 싶었다. 예술가들의 발길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쉴 수 있는 자리까지 마련해주는 곳이라니 어쩐지 낭만적이다. 「여행할 땐, 책」 속에도 이 서점이 등장한다. 지난 백 년 동안 책 도둑과 흥망성쇠를 같이 했다고 과언이 아닐 만큼 번번이 사라지는 책들, ‘고객’이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은 뜨내기 관광객들의 예의 없는 행동들이 어쩌면 이 오래된 서점의 낭만을 깎아먹는 듯하지만, 넓은 지구에서 내가 누군가와 이어져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이 아름다운 통로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기록된 이 작지만 커다란 세계가 내내 그 자리에 머물러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모두 같지 않을까.

 

 

 

《행복의 지도》에서도 지적한다. “민주주의가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곳이 민주적으로 변할 가능성이 높다”고. 시스템이나 체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선한 의지를 잃지 않은 채 자신의 주변 풍경을 사소한 것에서부터 바꿔가는 개인일지도 모른다. / 58p

 

 

아마데우가 “우리 인생의 진정한 감독은 우연이다”라고 했듯이, 시공간을 축으로 진행되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시간은 죽음이라는 일방통행로를 따라 모두에게 같은 속도로 흘러간다. 시간이 우리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데 비해 공간은 유동적이며 탄력적이다. 선택의 가능성이 있기에, 우연적으로 일어난 일, 찰나의 스치는 만남, 이런 것들이 어떤 공간에서는 필연적이고 운명적인 결과로 변할 수도 있다. 삶에서 예외성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상상을 열어주는 공간’이다. 어떤 장소는 우리의 상상을 현실화시키고, 더 나아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새 삶을 열어주기도 한다. 공간을 바꾼다는 것은 결국 삶의 예외성과 우연성 속으로 뛰어들어 삶 자체를 바꾸어내려는 의지가 아닐까. / 68p

 

 

  조르바를 동경해 조르바처럼 살고 싶었던 20대의 나와, 이제는 빛의 세례를 누리며 살아가되 광기에 휩싸이지 않고 열정을 잃지 않되 정도를 벗어나지 않는 삶을 꿈꾸는 지금의 나를 마주하게 한 그리스, 만화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흔적을 좇아 찾아간 가마쿠라에서 건져낸 일상의 힘, 경이로운 아마존의 신비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것 같았을 때 ‘숲에서 우주를 보’게 해준 조지 해스컬의「나무의 노래」, 네팔의 희말라야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야생으로 들어간 청년의 「인투 더 와일드」까지. 이 무수한 길 위의 시간 속에서 그녀는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치열하게 마주함으로써 단독자로 서고 싶다는 열망에 휩싸이기도, 유목민의 삶과 정주민의 삶에서 어디에 속하기를 원하는지 고민하며 자신을 읽는 법을 배우기도 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여행이 내게 순간을 열어주는 한, 나는 마지막까지 떠돌며 살아갈 것이고, 다시 힘을 내어 이 세계의 온갖 미혹 속으로 기꺼이 뛰어들어 잠들지 못하는 ‘몽유병 여인’이 될 것이라 다짐해보기도 한다. 이렇듯 여행 그리고 책은 끊임없이 내 안의 나와 또 다른 나를 바라보게 하는 것, 그 속에서 늘어나는 깨달음이 그녀를 계속해서 길 위로 이끄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라를 막론하고 가난한 이들일수록 그들에게는 강력한 배후가 있었다.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일수록 지상이 아닌 천상에서의 보상을 믿고 있었다. 현실의 벽이 견고할수록 지금 여기의 삶이 아닌 다른 세계의 더 나은 삶을 기대하는 것일까. 내세, 천국, 윤회, 구원, 업보. 이런 단어들이 내게는 현실에 눈을 감게 만드는 거짓과 기만으로 다가왔다. 고결하고 신성한 세계로 귀의하고자 하는 갈망이 비루한 일상의 견디는 힘이 되어주는 현실이 우스웠다. 지금 이곳의 삶을 개선하지 않는 종교라면 도대체 무슨 소용일까. / 178p

 

 

결국 품위 있는 삶은 공간을 대하는 태도가 아닐까. 자신이 거주하는 공간과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 것들에 대한 다정하고 성실한 태도. 아무것도 보상받지 못한다 해도,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다 해도 자신의 세계를 아끼며 가꾸는 마음을 유지할 수 있다면? 삶의 품격이란 결국 그런 마음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 214p

 

 

 

 

 

  그녀는 ‘인간은 희미한 타인의 마음으로도 꽤 멀리 나아가고, 놀랄 만큼 오래 꿈꿀 수 있는 존재’라는 말을 되새긴다. 그녀가 지치지도 않고 여행을 떠나는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것도 세상 어딘가에서 내 손을 잡아줄 낯선 얼굴을 상상하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보이지 않는 손의 온기를 믿기에 늘 떠날 수 있다는 믿음,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그 믿음까지 동경하게 되었다. 그 믿음의 부재가 나의 발목을 계속 붙잡고 있었기에. 덕분에 나는 이제 그녀처럼 오롯이 나를 위해서 책과 함께 할 여행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때는 무슨 책을 읽고, 또 무슨 책을 들고 가 볼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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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업(하)_ 난세를 평정한 자, 용이 되다 | 나의 서재 2019-11-27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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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제왕업 (하)

메이위저 저/정주은 역
쌤앤파커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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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와 배신, 권력의 비정함과 무상함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진 철의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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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를 제패하기 위한 처절한 사투, 그 속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사랑!

음모와 배신, 권력의 비정함과 무상함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진 철의 여인!

 

 

 

   선황이 갑작스레 붕어하고 황후는 중풍으로 쓰러진 가운데, 지난 2년 동안 경사의 정국이 불안하여 제왕의 난 이후로 남방 왕족은 경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오랜 세월 경사의 황실과 대등한 세력을 갖추기 시작했다. 왕공귀인들은 각자 군대를 두고 힘을 키웠으며 권문세가의 세력이 서로 얽히고설키는 것도 모자라, 근래에 들어서는 관리들이 갈수록 부패하여 민생이 도탄에 빠졌다. 그야말로 난세 중에 난세다. 이에 난세를 평정하고, 3황자였던 자담으로 하여금 황제에 오르게 하고 스스로 실권자가 되어 경사의 정세를 안정시킨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소기다.

 

 

 

   한편 ‘남자의 천직이 개척과 정벌이라면, 여자의 천직은 보호하고 돕는 것이다.’는 말을 고모인 황후로부터 오랫동안 들어왔던 왕현 역시 음모와 배신, 역모를 꿈꾸는 잔당들로 얼기설기 얽힌 구중궁궐의 음험한 비밀 앞에서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간다. 한때는 정인으로 권력의 꼭두각시 노릇과는 거리가 멀었던 자담을 황제의 자리에 내세운 것도 모자라, 훗날 소기를 제왕의 자리에 올리기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멈추지 않는다. 이렇게 앞서 『제왕업』 상권이 왕현과 소기의 운명적인 만남과 더불어 음모와 배신이 도사리고 있는 구중궁궐의 중심에 들어서기 시작한 과정이 그려졌다면, 하권에서는 허울뿐인 황제를 대신해 왕현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권력을 지키고자 피비린내를 무릅쓰고 온갖 위기 속에서 철의 여인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본격적으로 드러낸다.

 

 

 

 

 

 

“나는 당신이 패업을 이루고 천하를

통치하는 것을 지켜볼 거예요!” / 196p

 

 

 

   때마침 유산을 한 몸에다 여린 몸으로 여러 위기와 고초를 겪어 몸이 약해진 왕현의 뱃속에 아이가 들어선다. 두 사람에게는 경사요, 나라에도 경사이며 드디어 소기와 왕현의 사이에 자식이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까지 딛고 일어설 수 있게 되었지만, 당경이 모반을 일으키고 돌궐이 국경을 침범하여 나라에 큰 변고가 일어난다. 이에 소기는 부대를 이끌고 친히 정벌에 나선다. 이제 이렇게 떠나면 출산은 물론, 꼬물꼬물 아이가 기어 다닐 때까지 얼굴을 보지 못할 수도 있기에 왕현으로서는 원망과 외로움, 두려움과 불안함으로 마음이 괴롭지만 그녀는 소기의 아내이자 예장왕의 왕비였고, 수많은 사람이 전쟁 중에 가족과 목숨을 잃고 피붙이와 헤어지는 고통을 겪을 것을 생각하며 이를 담담하고 의연하게 받아들이기로 한다. 과연 소기는 나라의 위기를 평정하고 난관을 뛰어넘어 왕현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소기가 궁에서 사라진 지금, 왕현에게는 또 어떤 위기가 닥칠 것인가.

 

 

 

내 뱃속에는 나와 소기의 아이가 있다. 그리고 내 곁에 있는, 전쟁통에 부모와 모든 것을 잃은 이 아이도 이제 내가 사랑하는 보물이 될 것이다. 나는 이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지켜줄 것이며, 아이에게 사랑과 온기를 보상해줄 것이다.

이 아이뿐만 아니라 그 많은 의지가지없는 아이들 모두 전쟁의 희생양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심아의 손을 잡고 회랑을 지나면서 내 마음속은 점점 더 밝아지고 분명해졌다. ‘사내들의 세상인 전쟁에서, 여인은 그저 집에서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그 밖에도 매우 많았다. / 289p

 

 

난세에는 강자가 살아남고 약자는 죽는 법, 왕씨 가문과 사씨 가문처럼 대단한 명문세족이라도 언제 어느 때고 무너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권력의 정점에 있는 자와, 그 정점에서 겨우 한 걸음 떨어져 있는 자의 차이다. / 355p

 

 

 

한때 나와 소기는 각자의 간교한 심보 탓에 수많은 오해와 의심을 품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지난 세월 동안 끊임없는 풍파를 겪으면서 마침내 마음속의 응어리를 내려놓고 서로를 온전히 믿게 되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위태로는 순간을 모두 버텨냈다. 만약 심중의 부담을 내려놓지 않았다면 어찌 마지막 난관을 뛰어넘을 수 있겠는가! / 404p

 

 

 

 

 

 

   소설은 왕현과 소기가 음모와 배신, 권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난관을 헤쳐 가는 과정을 긴장감 넘치는 전개로 마지막까지 휘몰아친다. 소기가 출정을 떠나고 예상치 못했던 반전으로 위험에 처하는 왕현과 여인의 몸으로 이에 단호하게 맞서는 장면은 가히 압권이다. 이렇게 장대한 스케일과 서사, 긴장감 넘치는 액션을 겸비하면서도 섬세하고사실적인 묘사, 아름다운 로맨스까지 두루 갖춘 소설은 근래에 참 오랜만인 듯하다. 복잡한 중국의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그것에 함몰되지 않고 이토록 거대한 상상력을 유려하게 조직해낸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이 작품이 작가의 데뷔작이라니 믿겨지지 않을 정도다. 이렇듯 원작에 대한 인상이 좋았던 데다 소설 속 후기의 여운이 아직도 가시질 않는 만큼 드라마도 어떻게 만들어졌을지 무척 기대가 된다. 장쯔이 주연의 2020년 중국 최대의 기대작이라 하니 꼭 찾아서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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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업(상)_ 제왕의 업을 이룰 자, 누구인가 | 나의 서재 2019-11-26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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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제왕업 (상)

메이위저 저/정주은 역
쌤앤파커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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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을 아우르는 장엄한 스케일과 궁중의 치열한 암투를 섬세하게 그린 대작의 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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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제왕의 업을 이룰 것인가!

대륙을 아우르는 장엄한 스케일과 궁중의 치열한 암투를 섬세하게 그린 대작의 서막!

 

 

 

   한때 <측천무후>, <황제의 딸>과 같이 중국 황실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들을 비롯해 『삼국지』와 같은 중국의 고전 문학을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 특유의 호방하고 장엄한 스케일에 궁중 내의 치열한 암투까지 섬세하게 다룬 『제왕업』을 접하는 순간 단 몇 페이지만에 마음을 사로잡히고 말았다. 권력의 비정함과 안팎으로 끊임없이 생사의 위협에 시달리는 왕현과 패업의 꿈을 이루기 위한 소기의 위험천만한 사랑이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해서 나는 내내 초조한 마음으로 마지막까지 달음질치느라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읽었다. 상권과 하권으로 나눈 두꺼운 장편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드라마 한 편을 정주행하는 마음으로 시간가는 줄도 모르게 읽었던지라 2020년에 개봉될 드라마가 벌써부터 기다려지는 것 또한 나뿐만이 아닐 듯하다.

 

 

 

 

 

 

가문의 영예와 책임, 그 풍랑 속의 중심에 선 여인

 

 

   어머니가 황제의 누이요, 고모가 황후이며, 아버지가 조정 최고의 권력자이자 낭야왕씨 가문의 수장인 진국공의 딸로 자라 그야말로 금지옥엽, 구중궁궐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자라난 왕현이 열다섯 번째 생일을 맞았다. 최고 권력층이 드나드는 궁에서 살다시피 하며 권력의 비정함과 무심함을 어렴풋이 겪긴 했으나 이제까지는 그저 밝고 귀하게만 자라온 그녀였다. 오랫동안 황제가 총애하는 사씨 가문 출신의 사 귀비 소생이자 3황자인 자담을 연모하여 당연히 그와 정인이 되리라 믿었고, 자담 또한 그녀를 그 누구보다도 아끼고 귀하게 여겼으나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남방 변경의 오랑캐와 반군의 결탁을 몰아내고 나라의 위대한 공을 세운 예장왕의 혼처로 왕현이 정해지고 만다. 더욱 믿을 수 없는 것은 황후인 고모와 아버지인 진국공이 이 혼사에 누구보다 적극적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도 무척 사랑한 사람이 있었단다. 한때 그는 내 삶의 가장 큰 기쁨이자 또 슬픔이었지. 그 기쁨과 슬픔은 나 혼자만의 것으로, 그것을 얻든 잃든 오롯이 나 혼자 감당해야 했단다. 그러나 또 다른 얻음과 잃음은 나 혼자만의 기쁨과 슬픔보다 훨씬 깊고 중하며, 살아 있는 한 거기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었지. 그것은 바로 가문의 영예와 책임이었어.”

가문의 영예와 책임. / 57p

 

 

 

 

 

 

 

   가문의 영예와 책임을 등에 업고 예장왕과 혼례를 치른 첫날, 뜻밖의 변고가 일어나 첫날밤은 산산조각이 나버린다. 북방 변경의 상황이 매우 급박하여 새신랑이 첫날밤을 치르기는커녕 신부의 얼굴조차 보지 않고 떠난 것이다. 왕현은 대국과 가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대가가 이런 치욕이었다니 울분을 참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게 3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아직도 얼굴을 내비추지 않는 남편에게 마음에도 없는 감정을 애써 꾸며낼 필요 없이 이렇게 저렇게 한평생을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체념하려는 찰나에 느닷없이 괴한들이 들이닥쳐 납치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렇게 예장왕 소기의 부대에 의해 일족이 몰살당한 것을 복수하려는 하란잠에 의해 납치를 당했건만, 열흘이 지나도록 자신을 구하러 와줄 이렇다 할 움직임이 보이지 않자 왕현은 이내 실망한다. 심지어 탈출 시도도 번번이 가로막힌다. 나는 이 같은 수모를 당하고 있는데, 지금 그는 어디 있단 말인가? 그에 대한 원망이 더더욱 강하게 피어오르는 가운데, 한 회색 옷을 입은 사내로부터 소기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눈치챈다. 하지만 진즉에 자신을 구해낼 수 있었음에도 잠자코 기다린 데다 자신의 안위는 전혀 개의치 않고 적의 수중에서 이토록 곤경을 겪도록 내버려두고 있는 그에게 더욱 몸서리쳐질 뿐이었다.

 

 

 

어디 하란잠뿐이겠는가……. 전쟁으로 고통을 받은 백성들 가운데 부모 형제 없는 이가 어디 있을까! 처량하게 홀로 남아 분노를 터뜨리던 그 소년에게 어머니와 여동생은 아마 유일한 행복이자 근심이었을 것이다.

상처투성이인 그가 가엾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원한을 품은 대상은 내 낭군, 내 나라였다.

그리고 나는 이미 그의 복수를 위한 장기짝이 되어 있었다. / 153p

 

 

 

   이윽고 운명의 날이 닥치고, 소기를 노리는 하란잠과 그런 하란잠을 노리는 소기의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지며 왕현의 목숨이 위태로운 가운데, 극적으로 소기가 왕현을 구출해낸다. 그렇게 생사의 위험을 건너 3년이라는 시간이 흘러서야 드디어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게 되고, 그간에 서로의 마음속에 응어리져 있었던 상처와 오해들을 마침내 풀 수 있게 된다. 비록 시작은 어긋났지만, 갖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결코 하나로 이어질 수 없을 것 같았던 그들의 마음도 서로에게 가 닿기 시작한다.

 

 

 

“당신과 나 사이에 다른 사람은 없소.”

 

 

 

   하지만 여전히 이들의 사랑 역시 바람 앞의 등불인 가운데, 왕현은 소기와 자신의 혼인 뒤에 숨겨진 충격적인 비밀과 마주하게 되고, 또 자신이 이들의 운명을 쥐고 흔들 거대한 피바람의 중심에 서게 되었음을 직감한다. 특히 자신의 두 손으로 소기에게 보내기 전까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든 것을 주었던 아버지와 고모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들이 가문과 스스로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왕현을 이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지난날의 보호막이 사라진 뒤에야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고 얼마나 더 강해져야 하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덕분에 그녀는 소기의 여인이자, 이 나라를 이끌 제왕의 여인으로 점차 변모하기 시작한다.

 

 

 

그 아름다운 모든 것은 이미 풍진세상에 떨어져 내려 잿더미로 화해버렸다. 그때 나는 기꺼이,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아버지가 가리키는 길로 발걸음을 내딛으면서…… 원망도, 후회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 순간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버려졌다는 절망감이 마음속에 뿌리내렸을 뿐이다.

숱한 고난을 겪고 생가의 기로에 서보기도 하면서 마침내 인생이 얼마나 고달픈 것인지 깨달았다. 누구의 곁에 서야 비바람을 피하고 맑은 하늘을 가질 수 있을까? 지난날의 보호막이 사라진 지금, 어디에 몸을 의탁해야 할까?

아버지, 내가 충성을 바치는 것은 단 한 번뿐입니다.

3년 전 아버지의 뜻에 따라 충성을 바쳤으니, 이번에는 내 낭군의 곁에 서렵니다. / 390p

 

 

시든 꽃은 미인처럼 박명했다.

팔자를 잘못 타고났고, 길을 잘못 택했고, 사람을 잘못 만났다.

팔자를 잘못 타고나도 운명에 순응하고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며 일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다. 가장 가엾은 것은 두 가지 경우다. 하나는 품은 뜻은 높지만 타고난 팔자가 더없이 기구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걸음마다 가시밭길이 펼쳐져 뚫고 나가지 못하면 그 자리에 갇혀 죽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 238p

 

 

 

 

 

 

   난세 속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권력 다툼과 궁중 암투, 누가 누구를 믿어야 할지 가족조차 믿을 수 없고 자칫 잘못 내딛으면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순간이 계속되는 가운데, 과연 왕현과 소기는 자신들의 사랑을 지켜내며 제왕의 위업까지 달성할 수 있을까. 한겨울 서릿발처럼 매서운 칼바람 속에서 덩달아 이리저리 나부끼는 내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채로 하권으로 달려가기 위해 여기서 일단락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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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인생(초라한 진실)_ 결코 그리 좋지도, 그리 나쁘지도 않은 게 인생이라면 | 나의 서재 2019-11-24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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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어느 인생

기 드 모파상 저/백선희 역
새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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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하고도 고독한 인생의 가장 보편적인 그늘을 섬세하게 표현해낸 아름다운 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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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의 삶에서 우리 모두의 인생을 마주하다!

쓸쓸하고도 고독한 인생의 가장 보편적인 그늘을 섬세하게 표현해낸 아름다운 고전!

 

 

 

   프랑스 고전 작가들의 판매 부수를 집계한 《르 피가로 리테리르》지에 따르면 8년이라는 자료 조사 기간 동안 장르에 상관없이 가장 많이 팔린 작가로 모파상을 꼽았다고 한다. 몰리에르, 에밀 졸라, 알베르 카뮈, 빅토르 위고 등을 제치고 말이다. 모파상이라는 이름의 유명세에 비하면 아직 그의 작품을 접해보지 못한 것이 다소 부끄러워지는 결과다.

 

 

 

   특히 모파상은 10년이라는 짧은 문단 생활에서 단편소설을 무려 300여 편이나 쓰며 열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했는데, 이 가운데 세계인들로부터 가장 사랑 받은 작품이 ‘Une vie’, 즉 ‘어느 인생’ 혹은 ‘일생’을 의미하는 바로 이 작품이라고 한다. 역자의 말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수많은 번역본이『여자의 일생』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는데, 처음 출간된 판본의 번역이 영어 번역본 제목 ‘A woman's life’를 그대로 옮긴 일본어판을 번역한 데에서 기인한 것으로 추측된다고 하니, 이 작품을 단순히 여성의 일대기로 단정 짓지 않으려는 역자의 시도가 남달리 다가온다. 사실 단편적으로만 생각한다면 이 작품은 충분히 ‘한 여성의 불운과 불행으로 점철된 기구한 삶’으로 읽힐 수 있을 법하지만, 그것을 한 개인에게 닥친 어떤 특정된 서사로만 바라볼 수도 없는 것은 일종의 연대 의식과 세대적 공감에 따라 보다 입체적으로 작품을 읽을 수 있는 까닭이다. 덕분에 우리는 ‘그녀’가 아니라, ‘여성’을, ‘그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보시다시피 인생은 우리가 믿는 것처럼

결코 그리 좋지도 그리 나쁘지도 않답니다.” / 380p     

 

 

 

   『어느 인생』은 주인공인 잔느의 시점에서 시기에 따라 크게 세 가지 전개로 나눌 수 있다. 수녀원 생활을 마치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잔느가 푀플에 있는 자신의 성에서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몽상하며 사랑에 대한 달콤한 꿈을 꾸는 시기가 바로 첫 번째다. 딸을 행복하고, 착하고, 바르고 다정한 여자로 만들고 싶었던 남작은 딸을 사크레쾨르 수녀원으로 보냈고, 엄격히 유폐되어 세상과 담을 쌓고 지내던 잔느는 열일곱 살이 되자 마침내 오로지 자신을 위해 마련된 아름다운 성에서 자유와 무한한 희망에 흠뻑 도취된다. 그녀는 긴긴 밤 동안 자신의 마음이 속삭임으로 가득 차 넓어지고, 욕망이 별안간 마음에 우글거리는 것을 느낀다. 밤의 말랑한 흰 빛 가운데 초인적인 전율이 질주하고, 붙들 수 없는 희망이, 행복의 숨결 같은 무엇이 펄떡이기까지 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감정이었다. 그녀는 손을 맞잡고, 몸을 기댄 채, 서로의 심장이 펄떡이는 소리를 듣고, 어깨의 체온을 느끼며, 달콤한 여름밤의 소박함에 둘의 사랑을 섞으며 걸을 테고, 그렇게 오직 사랑의 힘으로 서로의 비밀스러운 생각까지 쉽게 꿰뚫어 볼 정도로 하나가 될 수 있는 사랑을 상상하고, 꿈꾼다. 누구나 꿈꾸는 운명 같은 사랑을.

 

 

 

 

 

 

   그러던 어느 날, 사제를 통해 작년에 죽은 장 드 라마르 자작의 자제가 에투방 마을에서 작은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는 아버지의 빚을 청산하고 소박한 거처에서 성실히 돈을 모은 데다 사교계에서도 좋은 평판을 쌓아 꽤 괜찮은 조건의 남편감이었다. 마침 미사를 갔던 남작 부인과 잔느는 그곳에서 쥘리앵을 만나고, 그들이 멀게는 친분이 있는 사이임을 알게 되면서 자주 교류를 하기 시작한다. 자작은 잔느에게 말을 걸지는 않았지만 이따금 그의 검은 벨벳 같은 눈이 잔느의 파란 눈과 마주치곤 했는데, 그와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감정이 무엇인지 채 분별하기도 전에, 사랑에 빠지고 싶었던 잔느의 소망과 점차 적극적으로 변하는 쥘리앵의 구애, 사랑하는 딸을 곁에 두면서 데릴사위까지 들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남작 부부의 뜻이 모두 더해져 만난 지 3개월 만에 결혼식을 치르게 된다. 이렇게 소설은 열일곱 살 무렵의 잔느를 통해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고 결혼으로 하여금 사랑을 완성하려는 여성의 통속적인 애정관과 사랑관을 섬세한 배경묘사와 심리묘사로 표현함과 동시에 귀족들의 관습과 세태를 사실적으로 그려냄으로써 앞으로 일어날 사건의 암시를 예고하기도 한다.

 

 

 

그들은 검소하게 생활했기에 그 정도 수입이면 충분했을 것이다. 집안에 항상 뚫려 있는 밑 빠진 독인 선량함만 없었다면 말이다. 그 선량함은 태양이 늪의 물을 말리듯이 그들 수중의 돈을 말렸다. 돈은 흐르고, 새고, 사라졌다. 어떻게? 누구도 알지 못했다. / 23p

 

 

가끔은 잔느가 로잘리를 대신해 어머니를 산책시켰는데, 그럴 때면 어머니는 딸에게 어린 시절의 추억을 얘기했다. 잔느는 그 오래전의 이야기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두 사람의 생각과 욕구가 유사함에 놀라곤 했다. 사람은 누구나 수많은 감동을 느끼며 자신이 다른 누구보다 먼저 전율했다고 상상하는데, 사실 똑같은 감동이 이미 최초 피조물들의 심장을 고동치게 했으며, 최후의 남녀들의 심장을 뛰게 할 것이다. / 47p

 

 

어느 날 저녁, 스무 살이었던 리즈가 물에 뛰어들었는데,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삶에서, 그녀의 태도에서 그 무엇도 그런 광기를 예감하게 하는 건 없었다. 그녀는 반쯤 죽은 상태로 건져졌다. 그녀의 부모는 그 행동의 불가사의한 원인을 찾는 게 아니라 성이 나서 두 팔을 치켜들고 얼마 전에 말 ‘코코’가 구덩이에 빠지면서 발이 부러져 도살할 수밖에 없었던 사건에 대해 말하듯이 그저 “경솔한 짓”이라고만 말했다. / 80p

 

 

 

 

 

 

   잔느와 쥘리앵, 그들은 이제 서로에게 어떤 존재가 될까? 그들이 함께 시작한 삶은 어떠할까? 결혼이라는, 파기할 수 없는 이 긴 대면에서 서로에게 어떤 기쁨, 어떤 행복, 혹은 어떤 환멸을 마련해 두고 있을까? 이러한 의문에 서로 진지한 물음과 답변이 없이 돌입한 그들의 결혼은 첫날부터 삐걱거리고 만다. 잔느로서는 자신의 욕망을 앞세우고 마치 그녀를 소유하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듯 난폭하게 구는 쥘리앵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고, 아내라면 마땅히 남편에게 기꺼이 자신의 몸을 맡겨야 한다고 믿는 쥘리앵으로서는 그녀를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신혼여행지인 코르시카에서는 낯선 이국의 매력이 혐오감과 모욕감을 잠시 덜어주었지만, 돌아와서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해버린 그로인해 그녀는 깊은 우울감에 빠지고 만다. 심지어 쥘리앵이 잔느와 자매나 다름없는 하녀 로잘리와 간통을 했다는 사실이 들통이 나고, 그의 사생아까지 낳은 사건은 그녀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린다. 뿐만 아니라, 평소 마음을 나누며 가까이 지냈던 백작 부인과 쥘리앵이 내연의 관계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녀는 마음의 문을 완전히 걸어 닫게 되고, 그러면 그럴수록 오로지 자신의 아들인 폴을 향한 집착만 커져갈 뿐이었다. 이렇게 불안한 결혼 생활의 서막과 함께 불행으로 점철된 결혼 생활의 연속으로 고통을 겪는 시기가 바로 두 번째에 해당한다.

 

 

 

 “인생의 감미로운 비밀에 씌워진 베일을 걷는 건 그 남자의 몫이란다. 그런데 여자아이들이 어떤 의문도 품어 본 적이 없다면 꿈 뒤에 감춰진, 조금은 난폭한 현실 앞에서 종종 반항하곤 한단다. 영혼에 상처 입고, 몸까지 상처 입고서 법이, 인간의 법과 자연의 법이 절대적 권리로 허용하는 일을 남편에게 거부하곤 하지. 더 이상은 말해 줄 수가 없구나. 하지만 이것만은 잊지 말거라. 너는 온전히 네 남편의 소유라는 점 말이다.” / 94p

 

 

그녀는 다른 세상에 들어선 것만 같았다. 자신이 알던 모든 것, 자신이 사랑한 모든 것과 헤어져, 다른 땅으로 떠나온 것만 같았다. 자신의 삶과 생각 속 모든 것이 전복된 것 같았다. 심지어 이런 이상한 생각마저 들었다. ‘내가 남편을 사랑하는 걸까?’ 문득 남편이 낯선 이방인처럼 느껴졌다. 석 달 전만 해도 그녀는 그가 존재하는지조차 알지 못했는데, 이제는 그의 아내가 되었다. 어떻게 된 걸까? 어째서 발밑에 팬 구멍 속에 떨어지듯 결혼 속으로 이렇게 빨리 떨어졌을까? / 96p

 

 

하녀가 바로 같은 침대 발치에서 다리 사이로 아이를, 이토록 잔인하게 자신의 내장을 찢고 있는 어린 존재의 형제가 되는 아이를 떨어뜨렸던 날을 떠올리자 다른 통증이, 영혼의 고통이 그녀를 짓눌렀다. 그녀는 쓰러진 하녀 앞에서 남편이 보인 행동을, 던진 눈길을, 했던 말을 그림자 한 점 없이 생생하게 떠올렸다. 이제 그녀는 마치 그의 생각이 그의 몸짓에 기록되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행동에서 하녀에게 보였던 것과 똑같은 권태를, 똑같은 무심함을 읽었다. 아버지가 된다는 사실이 성가신 이기적인 남자의 똑같은 무심함이었다. / 200p

 

 

 

 

 

 

   끝으로 소설은 매우 가파르게 잔느의 삶이 내리막으로 치닫는 과정을 그려나간다. 자신의 불행한 결혼 생활을 아들을 향한 맹목적인 사랑으로 치유했던 잔느가 번번이 폴의 사업 실패와 늘어난 빚을 갚아주느라 급격하게 가계가 기울고 마침내 그녀의 성까지 팔아 작은 오두막집으로 가게 되는 장면은 서글프다 못해 애처롭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낭만적인 연애와 결혼을 꿈꾸었던 그녀의 결말이 이토록 초라한 삶이 될 줄을 누가 알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폴이 자신에게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그렇게 자신을 모든 것을 잃어가면서도 갓난아이를 부탁한다는 폴의 편지에 또 한 번 기꺼이 손을 내미는 그녀의 맹목적이고 무모한 사랑은 읽는 사람의 억장까지 무너지게 만든다. 하지만 여린 생명체의 온기가 전하는 그 무한한 감동에 기뻐하는 로잘리와 잔느를 보며 “보시다시피 인생은 우리가 믿는 것처럼 결코 그리 좋지도 그리 나쁘지도 않답니다.” 라는 마지막 대사는 그 어떤 말보다 우리의 가슴을 명징하게 꿰뚫는다.

 

 

 

   『어느 인생』을 읽으며 모파상이 여자였던가, 하는 생각을 자주 했던 것 같다. 그만큼 섬세한 감정 묘사와 유려한 문체가 유독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주인공을 넘어 당대 여성의 삶을 사실적으로 표현해내고자 한 작가의 통찰력이야말로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다양한 관습과 결혼, 종교, 가치관의 문제들까지 생각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이 책의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삶은 그렇고, 그런 것. 별 거 없는 듯하지만 또 어찌 보면 별 거 있는 듯한 이 복잡한 인생살이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지키고 또 무엇을 꿈꾸어야 하는지, 다른 분들도 이 책을 통해 해답을 찾아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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