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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동화-4) 미리의 통곡 | 삐욜라숲의 고양이들 2007-11-30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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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그 이전에 죽은 고양이들도 있었다.

무슨 유행처럼 삐욜라 숲에 불어닥친 돌멩이병은 전염병처럼 번졌다.

긴급 장로회가 소집되었고 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조사위원회에 전문가 자격으로 불려간 망치는 처음 보는 병이긴 하지만 충분히 고칠 수 있다고 했다.

특히 먹는 걸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환자들의 정신적인 안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아아, 그러나 미리는 곧 죽을 것만 같았다. 산다는 것에 대한 자신이 없어졌다.

어제도 타스가 길거리에서 빳빳하게 죽었다.

 

통곡.

미리는 하염없이 울었다.

벽을 뚫고 바위를 깨뜨릴 것처럼, 눈물은 분노와 함께 해일처럼 몰려왔다.

한번도 믿어본 적이 없는 창조주를 붙들고 늘어졌다. 왜 이런 고통을 주냐고. 누가 이런 슬픔을 허락했냐고.

 

미리는 엉엉 울었다.

고양이가 그렇게 울 수 있으리라곤 미리도 알지 못했다.

어디에 그런 눈물샘이 숨어 있었는지 눈물은 계속해서 흘러 나왔다. 다 모았다면 호수가 될 정도였다. 수아는 옆에서 그저 앞발로 미리의 등을 토닥거려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걱정하지 마. 망치가 돌팔이 의사라는 건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아마 망치는 어디에 돌멩이가 생겼는지도 모를 거야.”

친구 수아가 위로했지만 미리는 알고 있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이 사는 곳에서 먹이를 구한 친구들은 모두 돌멩이병에 걸렸다는 것을. 그것은 모두가 입 밖에 꺼내기 싫어하는 말이었다. 아직까지 사람 사는 곳으로 내려가는 고양이들이 많은 까닭이었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알면서도 쉬쉬 하며 감추기에 급급한 고양이들이 스스로 불러들인 병이었다. 사람들이 먹고 남긴 음식 찌꺼기를 먹으면 안 된다고 망치가 계속해서 말했지만 모두 그를 외면했다.

“그게 돌멩이병과 무슨 상관이 있어! 있다면 증명해 봐! 아니면 그딴 소린 집어치워!”

고양이들의 자기방어적인 외침은 거셌다. 망치는 공공연히 말을 하지 못했다. 그는 설득력이 부족한 돌팔이 의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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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하나님의 실수가 아니다 | 기본 카테고리 2007-11-30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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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내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필립 얀시 저/이영희 역
생명의말씀사 | 2002년 02월

구매하기

이 같은 사실들, 즉 필요한 고통 세포들의 정확한 분포라든지, 압력과 고통의 절대치 그리고 위탁 고통이라는 보충체제들로 인해서 내가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은 고통망은 어떻든지 절대로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커다란 실수나 때늦은 미비책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설계로서 지울 수 없는 인장이 찍힌 것이다. 그것은 우리 몸에 잘 어울린다. 고통은 정상 기능을 발휘하는 생활에 있어서 시력이나 심지어 양호한 혈액 순환만큼 필수적인 것이라고 우리는 논할 수 있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고통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위험 충만한 것이 될 것이며, 우리는 운동이나 취미 활동 등의 기본적인 즐거움을 모르고 지내게 될 것이다. 30~31p

 

그렇다면 고통은 하나님의 실수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선물, 그러나 아무도 원하지 않는 선물이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학대와 끔찍한 파멸 앞에 무방비 상태로 드러날 것이다. 무엇보다도, 고통은 하나의 커뮤니케이션을 수행하는 고통망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33p

 

결코 상처를 느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흉터를 조롱한다. - 윌리엄 세익스피어. 34p

 

한센 병은 잔인하긴 하지만, 다른 질병들과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손, 발, 코, 귀 그리고 눈의 고통 감각 세포들을 마비시키면서 주로 하나의 마취제로서 활동한다. 대개의 질병들은 그 병들이 가져오는 고통 때문에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그러니까 조직의 파멸이 따르게 되는 유일한 원인은 다만 고통의 경고 체제가 사라진 때문인 것이다. 36p

[출처]내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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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역치 | 기본 카테고리 2007-11-30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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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내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필립 얀시 저/이영희 역
생명의말씀사 | 2002년 02월

구매하기

 

피부는 은혜롭게도 그 표면 전체에 펼쳐져 있는 수백만의 고통 감각기를 갖고 있다. 26p

 

과학자들은 눈을 가리운 한 사람이 자기 앞에 다가오는 한 물체를 인식하는 데 정확히 어느 정도의 압력을 필요로 하는지를 측정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그 정도를 촉감의 역치라고 하는데 그램 단위로 측정된다.

내 혀 끝은 단 2그램의 가압도 느낄 수 있다. 손가락도 엄청나게 예민해서 단 3그램의 압력을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감지력이 덜한 피부 부위들은 그 정도의 민감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손등은 12그램의 압력을 처음 알아차리며, 팔뚝의 뒷면은 33그램의 압력에서 비로소 반응한다. 발을 구르고 짓누르고 무게를 지탱하는 등 매일 혹심한 운동을 감당하고 있는 발바닥은 250그램 이상의 압력만을 감지할 수 있다.

고통의 역치를 측정하는 실험도 있다. 이 실험에서 과학자들은 매우 예리한 바늘에 어느 정도의 압력을 가해야 어떤 대상이 비로소 고통을 체험하기 시작하는가를 측정한다. 다음의 수치들이 앞의 압력의 절대치들과 어떻게 대조를 이루는가를 주목하라.

각막 - 0.2그램으로 고통 감각을 유발

팔뚝 - 20그램으로 고통 감각을 유발

손등 - 100그램으로 고통 감각을 유발

발바닥 - 200그램으로 고통 감각을 유발

손가락 끝 - 300그램으로 고통 감각을 유발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손가락 끝에서 놀라운 차이를 볼 수 있다. 손가락 끝은 단지 3그램의 압력 차이도 알아차릴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고통을 느끼기까지는 300그램의 압력이 있어야 한다! 왜 그럴까? 손가락의 활동들을 생각해 보라.

음악회의 바이올린 연주자는 완전한 음향과 음량을 만들어 내기 위해 놀라운 범위의 압력들을 느껴야 한다. 그릇 속에 손을 넣고 밀가루를 반죽하는 사람은 실제로 물의 용량의 조그마한 변화라도 느낄 수 있다. 만일 그가 능숙한 기술자라면 “끈적임” 혹은 농도에 2%의 차이만 생겨도 알아차릴 수 있다. 방직공장의 직물감촉사들은 촉감에 의하여 직물의 질을 비교한다. 그래서 손가락은 가장 미미한 촉감의 차이에도 대단히 민감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치 않다. 손가락 끝은 또한 격렬한 활동을 견딜 수 있도록 강인하기도 해야 한다. 못이 박이고 굳은살이 생긴 목수의 손이나 프로 테니스 선수의 손을 만져 보라. 만일 사람이 테니스 라켓을 꽉 잡든지 혹은 망치를 두드릴 때마다 매번 손가락 끝이 고통의 신호를 두뇌로 보내게 된다면 인생은 비참한 것이 될 것이다. 그래서 신체를 고안할 때 손가락 끝은 압력에는 엄청나게 민감하면서도 고통에는 비교적 둔감하도록 만든 것이다. 우리의 손과 손가락 끝은 신체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부분으로서 우리에게 훌륭히 봉사하고 있다. 26~28p

 

 

[출처]내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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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전화 시대의 의사소통이란? | 기본 카테고리 2007-11-30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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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하이데거, 하버마스 그리고 이동전화

조지 마이어슨 저/김경미 역
EJB(이제이북스) | 2003년 12월

구매하기

 

 

11p

이 새로운 전화는 얼마나 다양한 의미를 지니는가! 이동전화는 한 순간에는 새로운 세계 경제의 상징이었다가 바로 다음 순간에는 새로운 혁명의 표상이 되었다.

 

... (지난 2000년에 유가 폭등사태가 일어났을 때) 영국의 화물 운송업자들과 농민들은 이동전화를 이용해 제2차 세계대전에 비유될 정도로 대대적인 “주유소 폐쇄” 사태를 일으킬 수 있었다.

 

 

 

15p

전화는 물건인 동시에 기술이다.

...

전화는 가족, 친밀함, 비상사태, 일과라는 개념의 일부가 되어 있다.

 

 

16p

당신과 함께 있는 사람이 당신이 이야기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람입니다.

 

 

18p

인간은 이야기하는 존재자로서 자신을 드러낸다

 

 

20p

자신의 생각과 신념에 확신이 있다면 의사소통은 당신의 의무이다.

 

30p

의사소통은 오직 다른 한 사람과 행할 때 가장 잘 이루어진다.

 

35p

사람들은 오히려 다른 욕구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의사소통을 한다. 이동전화는 당신의 욕구를 대체로 만족시키는 열쇠이다.

 

고도로 발전된 의사소통 기기는 아마 당신 귀에 걸려 있는 장식품만큼 조그맣게 될 것이다. 결국, 당신은 언제 어디서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36p

당신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하기” 위해 의사소통을 한다. 의사소통은 당신이 말하려고 하는 내용이 아니라 소유해야 하는 대상을 의미한다.

 

39p

여기 “누가 의사소통하는가?”에 대한 하나의 답변이 있다. 바로 기기들이다.

 

40p

“목소리”는 “데이터”에 포함되며, 이 둘은 “전송”을 통해 체계의 흐름 속으로 사라진다. 요컨대, 이러한 표현에서는 의사소통에 인간 행위자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50p

우리는 의사소통 “기기”에 등록되어 오가는 메시지의 흐름 한가운데서 살게 될 것이다.

 

진정한 모임이란 전혀 없다. 대신, 고립된 개인만이 있고 각각은 자신의 세계에 갇혀 있으며 접촉은 산발적으로, 그리고 순전히 기능적 목적을 위해서만 일어난다. 다른 한편에는 메시지의 체계가 있다. 여기에는 인간 행위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51p

의사소통은 곧 교환이며, 교환은 데이터 처리의 한 측면인 정보와 관련된다.

 

56p

바람직한 의사소통이란 곧 상대방에게 반응을 일으키고 그에 대해 자신이 다시 반응하는 것을 의미한다.

 

80p

하나의 물건이 당신의 의사소통 기기이자 전자수첩인 동시에 자금 공급원일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81p

즉 의사소통한다는 것은 돈을 교환한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닐 것이다. 다시 말해, 두 활동은 하나로 융합될 것이다.

 

하이데거와 하버마스의 사상은 이 새로운 m-의사소통에 의해 물러나고, 새로운 의사소통은 그들의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

 

하이데거, 하버마스, 그리고 이동전화

 

조지 마이어슨(George Myerson) 지음 / 김경미 옮김 / 이제이북스(2003년 1쇄)

 

 

[출처]하이데거 하버마스 그리고 이동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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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 일과 슬픈 일 | 생각 쪼가리 2007-11-29 12:12
http://blog.yes24.com/document/793892 복사 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먼저 기쁜 일입니다.

상담소 수족관에 입양되어 온 구피가 새끼 여섯 마리를 순산하였습니다.

좀더 많이 낳을 줄 알았는데

하루종일 여섯 마리밖에 안 낳았네요.

그래도 생명의 신비는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두 번째로 슬픈 일입니다.

저희 집 수족관에서 기쁨을 주던 커다란 애플 스네일(달팽이)가

마침내 운명을 달리하였습니다.

 

게속 수족관을 빠져 나와 바닥으로 떨어지곤 했습니다.

그래서 등껍질이 금이 많이 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수족관 위를 책으로 막아놓았었는데

그날 밤은 어떻게 빠져 나왔는지

세상에 거실을 가로 질러 딸아이들 방으로까지 진출해 있었습니다.

 

막내 딸이 들고 옮기다가 미끄러지면서 다시 바닥에 떨어졌는데

등껍질이 깨지고 살점이 밖으로 삐져 나왔습니다.

그러다 하루를 못 넘기고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지난 번에는 자연치유를 했었는데

이번에는 상처 부위가 컸었나 봅니다.

 

또 하나 슬픈 소식은

수족관에서 생활하는 붉은 가재가 토옹 밥을 안 먹는다는 것입니다.

고민하다 지난 번에 맛있게 먹었던 천하장사 소시지를

아이들도 안 먹이고 떼어 줬는데

그것도 안 먹고 밀어놓고 있네요.

 

우찌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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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두 사상가가 만나는 이동전화 의사소통 | 인문-사회-철학 2007-11-28 17:54
http://blog.yes24.com/document/793279 복사 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도서]하이데거, 하버마스 그리고 이동전화

조지 마이어슨 저/김경미 역
EJB(이제이북스) | 2003년 12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최근 들어 관심이 가는 두 사상가가 있다면 바로 하이데거와 하버마스이다.

미래사회의 의사소통에 관한 책을 찾다가 발견한 이 작은 책자는 작은 햇살 한 줌처럼 내게 보석으로 다가왔다. 반짝거리는 작은 돌멩이처럼 작지만 큰 사상을 가슴에 안겨준다.

 

이동전화화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뜻할까?

의사소통이라는 대 명제는 이동전화 앞에서 어떻게 바뀔까?

이러한 전제는 의사소통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휴대폰이 고유한 전화 기능을 넘어서서 노래방과 게임방 그리고 인터넷 접속수단을 가지게 되면서 휴대폰은 이제 단기능의 의사소통 수단이라고 단정짓기에는 그 덩치가 너무 커져 버렸다.게다가 이제는 은행 업무까지 담당하고 있지 않은가?

 

더 나아가 유비쿼터스의 시대를 맞이하면서 휴대폰의 기능은 더욱 복잡해지고 다기능화될 것이다. 그런 시대를 눈 앞에 두면서 과연 의사소통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 책은 작은 내용이면서도 위대한 사상가들의 이론들이 절묘하게 씨줄과 날줄로 엮여져 있다. 지금까지 단순하게 생각했던 의사소통이 데이터화되고 인간 행위자가 중심에 있지 않은 새로운 형태의 방식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 때 우리는 어떻게 이야기한다고 할 수 있을까?

 

이 책의 저자는 이제 m-의사소통에 의해 두 사상가의 이론이 아무 쓸 데 없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하이데거와 하버마스의 사상은 이 새로운 m-의사소통에 의해 물러나고, 새로운 의사소통은 그들의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81쪽)

 

과연 그럴까?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이동전화화되는 의사소통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한 번 읽어보라.

2000년의 여러 정보들을 가지고 책을 썼지만 그 내용은 아직까지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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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가장 미안해 하는 말은? | 밑줄 긋기 2007-11-27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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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데이 아빠에 대한 설문조사

 

여성가족부가 육아데이(Day) 2주년을 맞아 설문조사를 실시하였다.(육아데이에 참여한 기업의 아버지 직장인 200명을 대상으로 하였음)

1. 이상적인 아버지상은 무엇인가?

- 69%(138명) ;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고 잘 놀아주는 아빠

- 14%(28명) ; 경제적으로 든든한 지원을 해주는 아빠

- 12%(24명) ; 사회적으로 성공한 아빠

 

2. 평일 자녀와 함께 하는 시간은? 101명(50%) 1시간 미만

3. 평일 정시에 퇴근하는 횟수는? 102명(51%) 거의 없다. 54명(27%) 주1회

4. 아이가 가장 미안하게 생각하는 말은? 41.5%(83명) 아빠 언제 와?

 

아버지가 정말 시간이 없는가? 그러나 아빠들이 TV, 인터넷, 신문 보는 시간을 계산해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아빠들은 시간을 내지 않는 것이다.

 

5. 아이들은 언제 아빠가 친구같다고 느끼는가?

- 장난치며 놀아줄 때

- 엄마에게 혼나거나 우울할 때 자신을 달래주는 순간

- 자기 전 침대에서 같이 대화하며 기도해줄 때

 

 

이의수, 나는 프랜디(Freind + Daddy),

월간 새가정, 2007년 11월호 제54권 594호, 51~5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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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감에 충실한 가족 | 밑줄 긋기 2007-11-27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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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감에 충실한 가족

 

신혼의 뜨거운 열정이 사라진 부부가 서로에게 의무감으로 가득찬 헌신만을 요구하듯, 사랑이 사라진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는 법적이고 의무적인 사항들에 대해서만 충실해질 수 있다.

 

부모는 최선을 다해 자녀들의 학업을 지원하고 생활비를 제공하지만, 거기에 친밀감이 결여될 때 자녀들은 이에 대해 감사하지 않게 된다. 부모들은 자신들의 노력에 대한 의미를 발견할 수 없어 허탈해진다.

 

 

이의수, 나는 프랜디(Freind + Daddy),

간 새가정, 2007년 11월호 제54권 594호, 51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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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력의 사회 | 밑줄 긋기 2007-11-27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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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력의 사회

 

종교사회학자 피터 버거(Peter Burger)는 현대사회는 ‘설득력의 구조’가 다양하게 변하였다고 말한다. 국가종교가 폐지되고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종교적 신념에 따라 ‘설득력의 구조’가 달라졌다.

 

서로 다른 ‘설득력의 구조’를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자신의 논리를 보편적인 언어로 표현하여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치에 맞는 것’이 되도록 해야 한다.

 

정재영, 합리로운 기독교를 위하여

월간 새가정, 2007년 11월호 제54권 594호, 25p

 

 

 

종교는 믿음에서 출발하고 과학은 의심에서 출발한다.(여기서 의심은 사람의 의심이 아니라 뉴튼 과학자가 발견한 사과에서처럼 당연시되는 사실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막스 베버는 인간의 행위에는 ‘목적 합리적’인 행위뿐만 아니라, ‘가치 합리적’인 행위도 있음을 설파하였다. ‘가치 합리적’인 행위란 외부자가 볼 때는 합리적이지 않아 보이는 행위일지라도 특정의 가치 체계 안에서 보면 그 나름의 합리성을 기진 행위를 말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종교행위’를 들 수 있다.

 

정재영, 합리로운 기독교를 위하여

월간 새가정, 2007년 11월호 제54권 594호, 22~2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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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이 아니라 삶을 나누어라 | 밑줄 긋기 2007-11-27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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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이 아니라 삶을 나누어라.

 

예수님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과연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기만 하면 되는가? 또 다시 자기 공로화되어 공허로 돌아갈 우려는 없는가? 사람은 이웃사랑의 이데올로기까지를 소유함으로써 소유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더 철저하게 자신을 정당화하는 존재이다.

 

나눔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비움의 형식으로서만 온전해진다. 누구를 만나고 사귀느냐가 삶의 질을 결정한다. 영원한 생명은 ‘Who'의 문제이며 'How'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예수님의 요청은 ’선한 일‘이 아닌 ’선한 분‘ 곧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에게 내 인격주체를 내어 맡기는 것이다.

 

재물을 나누는 게 아니라 삶을 나누어라.

 

 

천병석, ‘한 청년에 대한 연민‘에서 정리

(월간 새가정, 2007년 11월호, 제54권 594호,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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