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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호두까기 인형(3D)] - 크리스마스를 손꼽아 기다리던 그 시절 당신에게 | 영화일기 2012-12-22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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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호두까기 인형

발레리 게르기예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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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두까기 인형(3D)

크리스마스를 손꼽아 기다리던 그 시절 당신에게

 

 

크리스마스만 되면 귓가에 울리는 몇 편의 영화와 공연이 있다. 모르긴 몰라도, ‘호두까기 인형’ 또한 둘째가라면 서럽다. 현재 스크린에서 볼 수 있는 것만 해도 두 편이나 되는데, 기술의 발전을 빌미로 이야기는 특별히 손보지 않은 채 새로운 버전을 만드는 일은 이제 유행이 아니라 차라리 관행이다. 지금 개봉한 두 작품도 띄어쓰기의 차이를 제외하면 제목까지 같아서 혼란스러운데, 이 영화는 엘르 패닝의 출연으로 화제가 되고 있는 3D 영화가 아니라 2011년 러시아 마리스키 발레단 공연 실황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얼마 전부터 상영되고 있는 마린스키 극장 공연 시리즈로 엮인다는 점에서 다소 궤를 달리한다.

 

 

 

 

내용은 이렇다. 크리스마스 이브 파티에서 호두까기 인형을 선물 받은 클라라는 그날 밤 꿈의 나라로 빠진다. 생쥐 부대에 둘러싸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 호두까기 인형이 장난감 병정들과 함께 나타나는데 상황은 그리 만만치 않다. 결국 자신이 신고 있던 슬리퍼를 던진 클라라에 의해 그들은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호두까기 인형은 클라라를 과자의 나라로 초대하고 그곳에서 왕자로 변신한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주인공는 꼭 이렇게 잘 풀린다니까. 하기는 아이들이 상상하는 세계에서 이 정도는 기본이다. 아름다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던 클라라는 결국 달콤한 꿈에서 깨어난다.

 

클라라가 과자의 나라로 들어간 이유는 연회를 구성하는 음악과 춤에 있다. 발레극으로 출발한 작품답게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웅장한 무대를 만드는 데 신경을 많이 쏟는 편인데, 마린스키 발레단 공연 역시 마찬가지다. 차이코프스키의 3대 발레 가운데 마지막에 해당하는 '호두까기 인형'은 '백조의 호수'나 '잠자는 숲속의 공주'와 달리 분위기가 밝고 가벼운 터라 여기서도 궁극적으로 차이코프스키의 다채로운 선율과 그에 어울리는 아기자기한 동작을 강조한다. 행진곡, 러시아의 춤 트레팍, 꽃의 왈츠 등 유명한 곡을 군무와 함께 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영화의 만듦새 면에서도 3D 콘서트와 대등한 촬영 시스템을 도입해 6개월간 편집했다는 사실에 걸맞게 지난달에 선보였던 <지젤(3D)>과 견주어 훨씬 매끄러운 영상을 자랑한다. 등장인물이 많은 만큼 근접 촬영의 효과도 두드러진다. 극장을 나오면서 문득, 크리스마스를 손꼽아 기다리던 때가 그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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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신의 소녀들] - 빌어먹을, 신분(身分)이 없는 벌거벗은 생명들 | 영화일기 2012-12-14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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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신의 소녀들

크리스티안 문쥬
루마니아, 프랑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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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신의 소녀들]

빌어먹을, 신분(身分)이 없는 벌거벗은 생명들

 

 

 

한 소녀가 한 소녀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쏟는다. 고아원에서 함께 자라 각별히 친한 알리나와 보이치타는 한동안 떨어져 지내다 오랜만에 재회했다. 친구를 만나기 위해 기차로 먼 거리를 달려온 알리나, 도대체 그녀는 무엇이 그토록 서러운 것일까? 관객은 알리나를 등에 업고 그들의 험난한 발자국을 따라간다. 그녀가 처한 현실은 영화 전반에 걸쳐 산산조각 난 유리처럼 여기저기 널려 있는데, 대강 그러모으면 이러하다. 아버지는 그녀가 6살 때 목숨을 끊었고, 어머니와의 대면은 틀어진 지 오래다. 오빠가 하나 있으나 그나마 정신이 온전치 못해 제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지경이다. 보이치타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고아원에서의 생활도 그리 녹록치 않았던 것 같다. 더구나 그곳에서 온갖 사진을 찍었다는 보이치타의 은밀한 고백은 그들의 과거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조용히 일러바친다. 미상불 알리나는 성적인 접촉에 예민해서 걸핏하면 의심의 눈초리를 하고 부르르 떨기 일쑤다. 그녀를 입양해서 한때 같이 살았던 또 다른 가족과의 관계 역시 자세한 내막을 알 수는 없지만 원만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가족은 누구나 집에 기여해야 한다는 양부모의 말이 가슴에 사무쳤던 그다.


보이치타를 데리러 수도원까지 온 알리나는 상황이 여의치 않자 이상 증세를 보인다. 신부와 수녀가 거의 부모처럼 군림하면서 무조건적인 복종을 강요하는 집단에 몸서리를 친다. 누군가에게 한 번도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했던 그녀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기적의 성상으로 헛된 믿음을 주입하는 것이 그저 답답하기만 한데, 한술 더 떠 그녀를 향한 눈빛들은 자꾸만 있는 죄 없는 죄 모두 고백하라고 부추긴다. 종교적 규율에 대한 거부와 저항은 알리나가 언덕을 넘어설 때부터 예견되었다. 마당에 있는 개가 줄을 끊어 달아나려 하고 예배당에서는 한쪽 벽에 구멍이 생기기 시작한 터다. 그들이 알리나를 통제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판단한 뒤로는 신이 거부한 것으로 여겨 다른 곳으로 내쫓을 궁리를 하는데, 소녀는 마지막까지 보이치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제 발로 수도원에 간다. 난로에서 연기가 새고 장작개비에 검은 십자가가 발견되고 암탉이 달걀을 낳지 않는 등 수도원을 뒤흔드는 일련의 신호로 우리는 그녀의 운명을 직감한다. 결국 그들은 기도문으로 악령을 내쫓는다며 십자 모양의 틀에다 수족을 묶고 말도 안 되는 의식을 치른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알리나가 너무 가련해서 마음이 쓰렸다. 물론 크리스티안 문쥬는 주인공에게 감정을 쏟아붓는 편이 아니고 인물보다는 풍경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현실의 공기를 붙잡는다. 고로 영화는 다분히 서양의 종교적 전통과 루마니아의 역사적 상황 아래 다양한 함의를 내포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알레고리를 차치하더라도 이 이야기는 현실의 긴장 위에 선다. 현대 헌법은 모든 국민이 자기 신체에 대한 독립적인 권한을 가진다고 규정한다. 그런데 알리나는 어디서도 보호 받지 못한다. 그녀를 옥죄는 수도원은 감시와 처벌을 일삼는 수용소처럼 보이고, 이따금 등장하는 경찰과 병원 또한 저들이 책임질까 두려워 나몰라라식이다. 알리나의 생명은 알게 모르게 정치적으로 조직되어 있다. 인간의 생사여탈을 휘두르는 게 20세기에는 이념, 21세기에는 주권이라 했던가. 이를테면 이제는 전쟁이 아니라 신분에 의해서 인간이 '쓰레기'로 전락하는 상황이다. 종교적 공간이 주 무대로 설정된 이야기 치고는 다소간 어울리지 않게 신분증이라는 단어가 영화에 자주 언급된다. 각종 국가 시스템이 그것을 요구하는 까닭이다. 집을 떠난 알리나의 옷을 쓰레기봉투에 넣어두었다는 대사가 송곳처럼 박힌다.

 

신분이 불분명한 알리나는 오갈 데 없는 세상을 향해 끝끝내 절규한다. 눈 내리는 겨울은 그마저 하얗게 덮어버리겠지만. 그래도 알리나에게는 보이치타가 있다. 품에서 멀어진 듯했던 그녀는 알리나의 죽음을 슬퍼하는 유일한 존재다. 그녀는 알리나가 세상으로부터 버려지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처지도 그와 다를 바 없다는 걸 깨닫는다. 마지막에 이르러 경찰이 신문할 때 혼자 진실을 말하려 애쓰는 보이치타는 처음으로 검은 옷을 벗고 형언하기 어려운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한다. 카메라의 시선이 알리나에서 보이치타로 옮아가듯 관객의 눈이 보이치타의 눈에 걸린다. 실은 우리도 빌어먹을, 벌거벗은 생명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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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 기억되는 한 과거는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 영화일기 2012-12-12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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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알랭 레네
프랑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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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기억되는 한 과거는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잠깐 우회하자. 얼마 전 나는 학교를 같이 다녔던 한 동창과 몇 년 만에 연락이 닿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회포도 풀 겸 어차피 시간을 내는 김에 친구들을 되는대로 불러 모아 함께 밤을 보내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리하여 나는 갑작스레 짧은 여행길에 오르게 됐다. 한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안부조차 제대로 주고받은 적이 없어 혹여 서먹하지는 않을까 염려했던 것과 달리 만나자마자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 게 자연스러워졌다. 친구들이 모이면 으레 그렇듯이 서서히 분위기가 무르익은 이후로는 그 시절 우리가 공유했던 순간들이 가장 맛있는 안주가 된다. 이상하리만치 오늘이나 내일이 아니라 어제를 말할 때 이야기보따리가 줄줄 나온다. 그렇게 지나간 시간을 회상하노라면 이내 우리의 기억은 저마다 다른 모양으로 존재한다는 걸 느낀다. 같은 시간 속에서, 같은 공간 안에서 벌어진 일조차 서로 다른 걸 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제가끔 기억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 경험에 위시한 여담이지만, 이 영화를 관통하는 시간과 공간의 작동 방식은 이와 매우 닮은 데가 있다. 그로부터 본다는 것의 의미 또한 여러 층위에서 파장을 일으킨다. 그것도 매우 예술적인 형태로.

 

 

 

 

이제 영화 속으로 들어가보자. 극작가 앙투완은 생을 달리하면 자신의 작품이 세상에 어떻게 기억될지 궁금하다. 그래서 약간 짓궂은 장난 혹은 상상을 하기에 이른다. 그가 만든 ‘에우리디스’라는 연극을 다른 이가 다시 상연하는 것을 놓고 그 작품에 출연했던 배우들에게 본인의 죽음을 알린 뒤 저 대신 가치를 판단해 달라는 것이다. 이 영화에 대한 내 허술한 가정은 이렇게 출발한다. 그로부터 집사의 연락을 받은 13명의 배우는 인적이라고는 없는 어느 스산한 별장에 하나둘 모인다. 집사의 말에 따르면 앙투완이 연하의 애인과 헤어진 이후로 그곳에 머물렀다는데, 그 집이 내뿜는 기운이 심상찮다. 젊은 연출가가 허름한 공장에서 만든 듯한 연극의 막이 오르고, 배우들은 소파에 앉아 그것을 본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각자 자신이 연기했던 캐릭터에 맞춰 과거를 떠올리기 시작한다. 이때 관객이 마주하게 되는 그들의 과거란 시침을 거꾸로 돌린 과거가 아니다. 그들은 연극이 돌아가는 스크린 앞에서 저마다 현실의 경계를 지운다. 흡사 유령처럼 보인다. 아닌 게 아니라 동일한 인물을 연기하는 세 쌍의 남녀가 대사를 반복하거나 연결하는 동안 몇 가지 독특한 장치로써 의도된 환영의 자국을 드러낸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게 과거인지 현재인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시간의 벽을 대차게 허무는 영화를 보고 있자니 내용과 형식이 완전히 하나의 덩어리처럼 느껴진다. 다시 말해서 내용에 알맞은 형식을 생각한 것인지 형식에 토대한 내용을 전개한 것인지 추측하기 어렵다. 그의 영화에 친숙하지 않은 나로선 앙투완이라는 작가 뒤에 자리한 알랭 레네라는 작가의 본바탕에 이를 길이 없다. 단 이것 한 가지는 확실하다. 영화가 시간의 문을 여는 방식이 대단히 자유롭다는 것이다. 배우들이 연극을 보면서 각자가 기억하는 방식으로 또 다른 연극을 펼칠 때 그 자유로움은 끝없이 발산된다. 그리하여 과거가 과거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현재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는데, 이는 영화의 심장을 관통하는 중요한 요소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그것이 앙투완의 죽음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연극에 나오는 신화를 떠올렸을 때 에우리디스를 사랑한 오르페우스는 여기서 꽤 의미심장하다. 그는 사랑하는 여자의 죽음을 되돌리는 대신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기로 맹세하는데, 알다시피 약속을 어기고 만다. 기억을 가슴에 묻지 못해서 지하 세계로 간 그에게는 실로 엄청난 저주였다.


앙투완은 ‘에우리디스’가 보는 이들마다 다른 형태로 숨 쉬는 것을 체감하면서 자신의 인생과 예술에 품었던 어떤 은밀한 호기심을 슬며시 내려놓는다.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말의 의미를 예술가의 입장에서 받아들인 셈이다. 보는 것의 가치는 단지 보는 것으로 제한되는 게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생각의 개입을 매개한다. 본다는 행위가 지닌 적극적 수용자로서의 의미를 고려한다면, 예술은 내 손을 떠난 뒤에라야 완성되는 것이고 그리하여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게 된다. 앙투완은 연극이 끝난 뒤 활짝 웃으면서 배우들 앞으로 걸어 나온다. 이런 표현이 허락된다면, 무엇보다 그는 이제 깨끗하게 죽을 수 있다. 그 죽음을 사실적인 행위로 보든 연극적인 행위로 보든 중요한 건 그것이 깨달음의 확신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앙투완이 세상을 떠나자 연극에 등장했던 여배우가 그를 찾아온다. 그 누구보다 작가의 죽음을 애도하는 그녀는 내용상 그와 실제로 만난 적조차 없다. 물론 대저택에 함께 살았던 애인의 발걸음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얼굴을 작가와 가장 거리가 먼 배우의 그림자에 씌운 것은 단지 그의 과거에서 온 손짓이 아닐 것이라 확신케 한다. 기억되는 한 과거는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따라서 세상의 모든 앙투완은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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