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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 꿈이 나를 깨운다 | 영화일기 2013-03-15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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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홍상수
한국 | 2013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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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꿈이 나를 깨운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은 홍상수가 만든 최초의 청춘 영화다. 이제껏 그의 영화 속 누구에게도 제 삶에 대한 확신이나 긍정 따위는 보이지 않았지만 유달리 오늘이 아닌 내일, 여기가 아닌 거기, 삶이 아닌 죽음을 생각하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을 보면서 나는 꿈꾸는 청춘을 떠올렸다. 거칠게 표현하면, 해원은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스토커>의 인디아처럼 거미 같은 존재를 기다리는 중이다. 이 모든 것은 정은채라는 배우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자벨 위페르의 출연으로 <다른나라에서>가 통통 튀었던 것과 묘하게 대비된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정은채의 옷을 입은 해원으로부터 '외롭고 슬프다가 무서워지는' 순간을 여러 번 맞닥뜨린다. 산 날보다 살 날이 많은 해원이라는 청춘은 왜 외롭고 슬프며 무서운 것일까? 나는 지금 해원의 꿈이 꽂아 놓은 깃발을 따라 서촌을 맴도는 그 친구의 마음속 어딘가에 가닿으려 한다.

 

먼저 <다른나라에서>에 앞서 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제작된 <리스트>를 언급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나는 당시에 그 영화의 엔딩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소품처럼 만든 귀여운 단편이라지만 관객이 통과한 모든 시간을 모조리 주인공의 꿈으로 치환하는 것이 꿈을 꿈처럼 다루지 않았던, 그러니까 현실과 몽환의 경계를 늘 지우개로 얼마간 지웠던 그의 근작들과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홍상수라는 이름이 아니었다면 위험한 장난이라고 말했을지 모른다. 거기 나온 딸(정유미)도 열심히 일기를 쓰고 있었다. 힘든 현실에서 도망쳐 남몰래 한적한 곳에 머무는 젊은 여자에게 꿈이 없었다면 그녀가 소망하던 것들은 하나도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다. 꿈으로 들어가는 장면은 없는데 꿈에서 나오는 장면이 강조된 것은 몇 분 전의 상황이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는 걸 못질하는 셈이고, 그런 식의 연출이 처음은 아니지만 특별히 강한 인상을 남겼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해원도 일기를 쓰고 꿈을 꾼다. 일기를 쓰는 모습이 참 예쁘고, 일기를 쓰다가 그 자리에 엎드려 꿈의 나라로 빠지는 게 특기인 것 같아 퍽 귀엽다. 그녀는 며칠에 걸쳐 꿈속을 유영한다. 첫 번째 꿈에서 그녀는 자신과 닮은 어느 외국 배우의 엄마를 만난다. 길을 안내하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해원은 동경하던 배우를 닮았다는 얘기에 영혼이라도 팔겠다며 호들갑을 떨고 프랑스에 오면 연락하는 인사에 몇 번이고 포옹을 한다. 그러나 현실은 따로 살던 엄마가 캐나다로 떠난다고 해서 만나는 중이고, 같이 오후를 보내는 동안 하고 싶은 말 한마디 제대로 내뱉지 못했다. 엄마의 말대로 자유롭게 살고 싶은데, 해원은 자신의 운명이 그 동네에 서 있는 무거운 동상처럼 같은 자리에서 빙빙 돌고 있다는 걸 느낀다. 엄마에게 눈물을 보이면서도 앞으로 매일 생각하리라는 약속과 자리 잡히면 초대하겠다는 치렛말에 짐짓 튼튼한 척을 한다.

 

두 번째 꿈에서 그녀는 가장 친하다고 생각하는 유람에게 친구들이 수군대는 교수와의 관계에 대한 비밀을 모조리 털어놓는다. 그것은 꿈에서 벗어났을 때 가슴을 칠 정도로 황당한 고백이었다. 헌책을 파는 곳에서 주고 싶은 만큼만 주면 된다는 가벼운 제안에도 자신이 너무 드러난다며 응하지 않았던 것과 견주어 해원은 순수했다. 그런데 술자리에서 드러나듯 친구들은 여러모로 저들과 다르다는 이유를 들며 그녀를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세 번째 꿈에서는 마음을 나눈 성준과 전에 갔던 남한산성에서 재회한다. 이때 그들과 비슷한 관계를 맺고 있는 연주와 중식이 몇 걸음 앞서 걷고 있는 상황은 의미심장하다. 변하지 않는 산성이라는 게 그렇듯 그들의 시간도 그냥 이대로 퇴적하는 게 아닐까 하여 해원은 두려움을 느낀다. 그녀는 자신 같은 사람을 곁에 두어야 한다고 말하는 한 중년의 남자를 따라 미국으로 떠나는 상상을 잠깐 해본다.

 

 

 

 

 

세 개의 꿈은 해원이 손을 잡고 있는 가족, 친구, 애인에 관한 것이다. 엄마보다 더 가까워 보이는 사람에게 와락 안기고, 믿음이 가는 대로 친구에게 속 시원히 진실을 말하고, 오래 사귄 사람처럼 많은 것을 아는 남자에게 새 시계를 선물 받고. 그녀가 처한 현실은 여러모로 꿈과 비교된다. 펄럭이는 깃발로 바람의 방향을 살피는 것처럼 해원은 현실과 현실 사이에 놓인 꿈으로 마음의 갈피를 헤아린다. 홍상수는 우리를 그 자리에 데려다 놓는다. 그러니 해원이 예쁘고 가여울밖에. 그러나 꿈은 그녀를 위로하지 못한다. 해원은 꿈에서 "너무 힘들면 아무도 못 참아요, 아무도 못 참아요."라며 더 이상 참지 않으리라 성준 앞에서 언성을 높이지만, 얼마 후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를 목격한다. 사직단을 다녀온 뒤 사직서를 썼으나 용기는 딱 거기까지, 더는 어쩌지 못하는 그 남자가 끝내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또, 또, 또, 해원은 '악마'가 되지 못했다.

 

안 간 데까지 가본 결과가 재차 현실에 발 묶이는 일이라니 보는 이의 마음까지 쓸쓸해진다. 꿈에서 깰 때마다 다른 무언가를 경험하지 못하는 우리도 실은 그렇게 외롭고 슬프다가 무서워지곤 한다. 다만 이것이 아직 젊디젊은 해원에게, 아니 자기가 누군지 알고 싶어서 아파도 계속 부닥쳐보는 해원에게 반복되는 일이어서 마음이 더욱 애잔하다. 그리하여 나는 생각한다. 그가 집어든 책의 제목처럼 매일매일 죽어가는 일의 고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부터 꿈이 '나'를 깨우기 시작한 건 아닐까 하고. 언젠가부터 꿈은 더 이상 신기하지 않다. 이 영화의 마지막처럼 우리는 꿈에서 걸어나올 뿐이다. 꿈의 구름을 타고 현실에 이르는 일을 되풀이하는 해원과 우연히 마주치면 나도 매순간 그러하다는 얘기를, 위로가 되지는 않겠지만 들려주고 싶다. 비 오는 날 우산 없이 그녀와 함께 서촌을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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