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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두만강] -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영화일기 2012-01-29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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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두만강

장률
한국 | 2011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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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두만강 어귀에 사는 창호라는 아이가 죽음으로 향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주인공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이야기에 대한 호불호가 엇갈리는 것 같다. 영화 속에서 그의 죽음은 지속적으로 암시되고 있지만, 그 선택과 판단이 뒤늦게 그것도 별안간 이루어지는 터라 사태를 관망하는 입장에서 어떤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따라서 죽음에 대한 의미가 영화의 세계에서 어느 정도 수긍된다고 하더라도 인물의 세계에서 충분히 납득된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직 어린 아이에게 순교의 책임을 과도하게 요구하는 것이 아닌지 따져 묻는 어느 평자의 사려도 그러한 맥락에서 비롯되었으리라 짐작한다. 그러니까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사람들은 대체로 창호의 죽음에 대해서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인다. 그것을 어떤 확신의 단계 앞에 오는 머뭇거림이라 한다면, 그 머뭇거림은 분명 윤리의 문제에서 시작된다. 나의 윤리와 영화의 윤리가 버성길 때 우리는 잠시 판단을 유보하게 된다. 그래서 창호의 죽음에 대한 윤리적인 확신은 긍정이든 부정이든 그 누구라도 더딜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판단의 시간을 거닐던 나는 인물의 자취를 되밟으면서 이런 질문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말할 수 있고 무엇을 행할 수 있나. 창호는 죽음을 택했다. 죽음이 불가피한 것은 모든 예술이 품고 있는 저 질문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창호의 죽음은 갈데없는 선택이다. 누군가는 여기서 콧방귀를 뀔 수도 있다. 강 건너편에 살고 있는 친구 하나 잃은 아이의 상심이라기엔 언뜻 도가 지나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창호의 충동은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된다. 어른들은 그 마음을 들여다볼 수는 있어도 결코 쓰다듬을 수는 없다. 모든 개별자의 내면에 목숨의 욕망을 앞지르는 죽음의 충동이 꿈틀거린다지만 그것을 억압하는 현실 세계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오로지 창호뿐이다. 요컨대, 충동이 수렴되는 구심점에 창호가 서 있다. 두만강의 슬픈 운명에 내몰린 사람들 ─ 원치 않는 임신으로 실의에 빠진 누나 순희, 돈을 벌러 한국에 가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창호의 엄마, 두만강을 다시 건너는 게 한평생 소원이라는 마을 할머니, 위험을 감수하고 탈북자들을 돕다가 결국 쇠고랑을 차는 동네 아저씨, 내일이 없는 듯 술만 퍼마시는 이웃 어른들 등의 고통이 그의 어깨를 조용히 짓누르고 있는 형국이다.

 

 

창호의 몰락은 슬프다. 투신의 행위가 슬픈 것이 아니라 투신의 결단이 슬프다. 창호는 지붕의 벼랑으로 한 치의 주저 없이 성큼성큼 발을 내딛으면서 얼어붙은 눈동자들이 기어이 아찔한 하향 곡선을 그리게 만든다. 적어도 그 적막의 찰나에는 창호의 몰락에 대한 어떤 맹문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한 것처럼 보인다영화가 사건의 심리적인 동기만 심어 놓은 것도 그 기묘한 감정이 어떤 설득을 이룰 것이라 믿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락은 패배이지만 몰락의 선택은 패배가 아니다.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개시하는 그 모든 행위로부터 영화적인 기운이 탄생한다(고 나는 믿는다). 영화 속에서 그 기운은 마침내 평소에 말을 하지 못했던 순희가 창호의 이름을 힘껏 외치는 것으로 발산된다. 아이와 어른 사이에 놓인 듯한 순희가 마지막에 내지르는 그 억색한 고함은 창호(아이)의 윤리가 영화(어른)의 윤리로 스며드는 모종의 신호일지 모른다. 이는 윤리가 발생하는 순간의 어떤 증후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는 현실의 거울이되 현실 자체를 담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이 현실과의 긴장을 담고 있다.

 

몰락의 마지막 얼굴은 순희의 그림이 할머니의 소원에 포개어지는 것으로 종적을 감춘다. 우리는 영화가 문을 닫기 직전에 다리를 건너는 할머니를 보면서도 상상적 공간으로 이끈 창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파란 하늘을 담은 강물에 파란 잠바를 입은 창호가 들이젖는다. 아마 봄이 오면 유빙처럼 그의 영혼도 어디론가 떠내려가겠지. 그렇다면 장률 감독은 그 땅의 미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어떤 경계에 선 인물을 줄기차게 응시했던 그가 자신의 고향을 이야기하는 것은 짐작하건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인물을 대하는 감독의 태도도 어쩐지 신중하다. 그러나 두만강의 미래를 말할 수 없다는 생각이 결국 그 땅에 살고 있는 창호의 현재를 다르게 말할 수 있었던 건 아닐까 싶다. 예술은 있었던 경험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경험을 창조하는 것이라 했던가. 그렇다면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불가능성 앞에 있는 가능성을 염원하고 가능성 뒤에 있는 불가능성을 체감하는 창호의 혼란스러운 세계에 드리운 몰락에 취해 얼마간 나는 헤어나지 못했다. 아무려나 두만강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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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부러진 화살] - 뒤틀린 정의를 바로잡으려는 의지의 화살 | 영화일기 2012-01-22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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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부러진 화살

정지영
한국 | 2012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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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상식도 논리도 없는 부조리한 세상에 홀로 맞서는 한 남자가 갖은 고난과 역경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을 비춘다. 그게 우리현실적인 이해 범주 안에서 설득력을 잃지 않는 것은 그의 직업(적 세계관)과 관련이 깊다. (실화의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터라 캐릭터의 개성에 특별히 새로운 숨을 불어넣은 것도 아닐진대) 주인공이 수학 교수라는 사실은 그 유난스러운 언행을 이해하는 데 자못 중요하다. 평생 원리와 원칙을 중요시할 수밖에 없는 수학 교수로서 학교에서든 사회에서든 뒤틀린 정의를 바로잡으려는 각고한 의지는 불의를 참지 못하는 보통의 영웅적 인물보다 현실적인 데가 있다. 이는 부당한 일들에 짓밟히다 급기야 석궁을 들고 판사의 집으로 찾아간 주인공의 은밀한 범죄 행각에 대한 근원적 이해를 영화가 짧은 플래시백으로 대체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김 교수분노가 누적된 바 없는데도 다수의 관객은 그간의 억울한 사정을 받아들이고 약자라 판단되는 그의 편에서 사태의 진정을 살피게 된다. 그만큼 실존 인물의 특질과 환경이 내뿜는 에너지 자체가 강렬하다.

 

안성기가 연기해서 더 단단해진 주인공의 내적 기운은 피고인이 변호사보다 날카로운 입심을 자랑하는 것 외에 별달리 쾌감을 자아낼 만한 요소가 없는 이야기 속에서 빛이 난다. 수학적인 원칙에 어긋나는 수능 문제의 오류를 눈감을 수 없었던 의기가 사회적인 법칙에 위배되는 재판 과정의 허위를 감인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거듭나는 것을 보라. 영화는 'P→Q(P이면 Q이다)'라는 기본적 명제가 성립하려면 저 화살이 제대로 작동해야만 한다는 것을 새삼 일깨운다. 영화 속에서 화살의 존재가 재판의 경로임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김 교수의 말처럼, 법(P)은 아름답다. 그런데 화살(→)이 부러졌다. 그럴지니 결과(Q)가 공명정대하기를 기대할 수가 있겠는가. 그 부러진 화살의 실체는 김 교수의 범행에 대한 잘잘못을 가리는 과정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이미 알고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감독은 인물이 처한 상황을 분노의 발화점으로 삼지 않는다. 다시 말해, 비슷한 소재를 다루면서 공분을 겨냥했던 영화들과는 다른 길을 걷는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의 화살은 그 촉이 다소 뭉툭하다고 할 수 있지만, 외려 그것이 암흑의 실체를 향해 더 꼿꼿하게 날아가고 있다는 인상을 풍긴다.

 

 

누구나 '부러진 화살'에 대해 나름대로 사고의 날개를 펼칠 것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오프닝 장면으로부터 그 의미를 논하고 싶다. 수능 문제의 오류를 지적하는 김 교수의 설명을 흘리지 않았다면 우리는 수학적 증명에 관한 내용이 고스란히 주인공의 인생 철학에 반영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명명백백한 사실이 하나둘 고개를 드는 것과는 관계없이 애초의 뜻대로 판정을 내리고 마는 법원을 카메라가 얼마간 비출 때의 허탈감이, 두 방향벡터가 수직으로 만나기 때문에 절대로 평행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며 그가 분필을 탁 내려놓는 순간의 정적과 기기묘묘하게 맞물린다. 왜냐하면 자신의 뜻에 확고부동한 주인공과 법원의 서로 다른 집념이 특정한 방향성을 거스르지 않는 벡터의 성향과 닮았기 때문이다. 변호사의 조언에도 귀 기울이지 않고 오직 원리와 원칙을 내세우는 데 여념 없는 주인공과 재판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말의 행위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엄벌하려는 사법부가 그렇게 수직으로 엇갈린다. 내용이 옳든 옳지 않든 자신의 논리를 굽힐 줄 모르는 인간의 화살은 부러지기 쉽지만, 주인공의 결기로 짐작하건대 그 의지는 두 세계가 평행을 이룰 때까지 부서지지 않을 성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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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사진적 행위] - 지표로서의 사진에 대하여 | 도서일기 2012-01-19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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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사진적 행위

필립 뒤봐 저/이경률 역
사진마실 | 2005년 06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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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뒤바는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사진의 역사를 자신의 손으로 정리하면서 사진의 현재를 말하려는 속내를 감추지 않는다. '사진'에서 '사진적 행위'가 되는 과정을 비교적 짧은 분량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물론 '사진적 행위'라는 말은 롤랑 바르트, 찰스 샌더스 퍼스, 앙드레 바젱 등이 연구한 개념을 토대로 자신이 새롭게 붙인 표현이다.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 사진에 대한 관점을 먼저 순서대로 되짚고 있다. 실재의 거울로서 사진(모방의 담론), 실재의 변형으로서 사진(코드와 해체의 담론), 실재의 자국으로서 사진(인덱스와 지시의 담론)이 그것이다. 그것을 훑고 난 다음에는 사진에 대한 관점의 차이와 변화를 한 단어로 압축한 '사진적 행위'에 대해서 구체적인 예를 들어 풀어내고 있다. 저자가 참고하고 있는 이론에 낯설다고 하더라도 부록, 참고 문헌, 인명 해설, 용어 해설이 적절히 실려 있어 난해한 개념을 따라가는 것이 그리 부담스럽지 않다.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과 함께 읽으면 좋지 않을까 싶다. 

 


 

p.41

사진은 자동생성에 의하여 그 지시대상의 존재를 환원불가능한 증거로 보여준다. 그렇지만 이 사실은 사진이 그 지시대상과 닮았다는 것을 우선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진을 특징짓는 실재에 대한 강한 믿음은 사진이 모방이 아닌 하나의 자국이라는 사실에서 나온다.

p.50

알랭 베르갈라는 이런 이미지들의 모든 연출적인 부분과 언제나 은폐된 진술 장치에 함축되어 있는 모든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을 폭로한다: 사진가가 행위(제스처) 속에 개입하는 방식, 이미지의 순간 포착 효과, 광각 렌즈의 역할 등을 강조하고 있다.

 

p.54

다이안 아버스는 몰래 찍힌 이미지 대신 이미지를 기획하거나 구성하고, 자연스러운 이미지 대신 이미지를 연출하고, 우연적인 이미지 대신 의도적으로 이미지를 구상하고 선택한다. 이러한 조형적 이미지를 통해서 모델들은 자신을 나타내고 싶어하며, 작가는 이를 조장한다. 이러한 이미지를 통해 아버스적인 인물의 독창성, 즉 진실이 폭로된다. 이것이 바로 이전인데, 이는 곧 코드 자체의 선험성에 의한 사실주의의 내재화라 할 수 있다.

 

p.103

사진에 방칠의 힘을 부여하는 효과는 물리적 연결 논리에 의한 효과만큼이나 중요하다. 지시적 유일성은 접촉에 의해, 환유적 매개물의 의해, 물질적 인접 관계의 작용에 의해 글자 그대로 전파되는데, (중략) 그것은 사진의 동력이 되는 환유적인 충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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