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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움의 풍경 - 영화 [두 개의 문]을 보고 | 영화일기 2012-06-24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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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두 개의 문

김일란
한국 | 2012년 06월

영화     구매하기

 

 

 

<두 개의 문>을 보고 김수영의 시를 떠올렸다.

누군가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운다. 너도, 나도 바라는 것을 위하여.

그러나 나는 때로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영화는 그 풍경을 외면한 풍경을 비춘다. 결국 긍지는 내가 만드는 것.

 

 


 

 

거미 - 김수영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 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 버렸다.

 

 

긍지의 날  - 김수영

 

 

너무나 잘 아는

순환의 원리를 위하여

나는 피로하였고

또 나는

영원히 피로할 것이기에

구태여 옛날을 돌아보지 않아도

설움과 아름다움을 대신하여 있는 나의 긍지

오늘은 필경 긍지의 날인가 보다

 

내가 살기 위하여

몇 개의 번개 같은 환상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꿈은 교훈

청춘 물 구름

피로들이 몇 배의 아름다움을 가(加)하여 있을 때도

나의 원천과 더불어

나의 최종점은 긍지

파도처럼 요동하여

소리가 업고

비처럼 퍼부어

젖지 않는 것

 

그리하여

피로도 내가 만드는 것

긍지도 내가 만드는 것

그러할 때면은 나의 몸은 항상

한치를 더 자라는 꽃이 아니더냐

오늘은 필경 여러 가지를 합한 긍지의 날인가 보다

암만 불러도 싫지 않은 긍지의 날인가 보다

모든 설움이 합쳐지고 모든 것이 설움으로 돌아가는

긍지의 날인가 보다

이것이 나의 날

내가 자라는 날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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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의 뒷맛이 개운한 사랑 이야기 - 영화 [러브픽션]을 중심으로 | 영화일기 2012-06-14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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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러브픽션

전계수
한국 | 2012년 02월

영화     구매하기

 

야속한 시곗바늘이 하루도 게으름을 피울 줄 몰라 어느덧 2012년도 한복판에 다다랐다. 그동안 어떤 영화를 봤는지 슬슬 돌아볼 때가 된 것이다. 당신은 어떤 영화가 좋았나요? 날이 더워 하는 것도 없이 짜증이 솟구치는데다 아직은 무사하지만 지구가 곧 멸망할지도 모른다는데 어렵게 생각해봐야 무슨 소용인가 싶어 예술적 지향에 관심이 없는 그냥 가벼운 영화들만 죽 벌여 놓고 가장 기억하고 싶은 걸 하나 고르기로 마음먹었다.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아서 극장을 나설 때 내 몸무게가 조금이라도 줄어든 것 같은 영화를 떠올렸다. 그래서 올해 보자마자 주저 없이 별 다섯 개를 땅땅 박아 놓은 <자전거 탄 소년>과 <토리노의 말>을 살짝 밀쳐놓은 채 <러브픽션>으로 못다 한 이야기를 펼치고자 한다. 나는 가벼운 영화를 좋아한다. 뜻밖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를’ 대신 ‘도’를 써야 마땅할 텐데 부러 조사를 바꾼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갈수록 뒷맛이 개운한 영화를 보기가 쉽지 않은 탓이다. 가벼운 이야기를 담는 장르가 대개 멜로와 코미디라고 했을 때, 그 두 장르를 보면서 펑펑 울거나 깔깔 웃으며 극장을 나서는 경우가 나로선 드물다. 그런데 <러브픽션>은 “국물이 끝내줘요” 수준은 아니어도 “뒷맛이 개운해요” 정도는 된다. 다른 작품과 견주어 특별히 찬탄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지하고 싶은 데가 있다. 이 영화가 지닌 매력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은 듯하여 일찍이 좋게 말하고도 여운이 가뜬하지만은 않은 세 편의 영화 - <건축학개론>, <은교>, <내 아내의 모든 것>를 함께 거론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다소 거칠게 말해보자. 방금 언급한 세 편의 영화는 모두 여성을 대상화하는 남성의 시각이 이야기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남자 주인공에게 탈을 씌운 동성 연출자가 여성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은연중에 읽을 수 있다. 이때 여성은 얼마간 신화화된다. 모든 관계가 그러하듯 상대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데, 특히 사랑이라는 감정에 반영된 성적 차이는 그 누구도 명쾌하게 답을 내릴 수 없는 것이어서 예나 지금이나 다양한 이야깃거리가 되곤 한다. 그 과정에서 남성이 여성을 바라보는 심리적 기제가 스크린에 곧잘 투영되는데, 이는 주류 영화가 오랫동안 남성적 시선에 길들여진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충무로에서는 여전히 남성의 눈동자로 세상을 바라보는 영화들이 많다. 새 삶을 시작하기에 앞서 과거의 첫사랑을 소환하고(건축학개론), 소녀의 싱그러운 젊음으로부터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열망하고(은교), 권태로운 결혼 생활을 빌미로 아내에게 카사노바를 붙인다(내 아내의 모든 것). 이 과정에서 여성 캐릭터들도 저마다 말을 열심히 늘어놓고는 있지만 이야기에 희생되는 측면이 없지 않다. 이를테면 여자가 남자의 집에 어떤 환상을 품고 있는 데서 그것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서연은 구태여 승민에게 새집을 의뢰하고는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 마음의 안식을 얻고(건축학개론), 은교는 끔찍한 가족의 품을 피하여 이적요와 서지우의 집을 반복적으로 드나들고(은교), 정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저가 지은 집이 가장 튼튼하다는 남편의 말을 철석같이 믿는다(내 아내의 모든 것). 여기서 여성들은 적잖이 의존적이고 수동적인 존재로 비친다. 연출자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여성이라는 타자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셈이다. 어떤 관계를 그릴 때 타자를 배제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지만 그 희생이 지나치게 한쪽으로 무게를 두는 경우가 잦은 것을 단지 이야기에 따른 결과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여기서 그 이유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 참이다.

 

소설이든 영화든 대중이 호응하는 이야기에는 이른바 서정적 사랑이 등장한다. 서정적 사랑은 서정적 자아에서 비롯된다. 첫사랑만 봐도 그렇다. 그것은 그 자체로 서정적인 게 아니고 서정적 자아가 끄집어내는 기억에 의해 서정성을 띤다. 앞선 영화들은 모두 그런 요소들을 갖고 있다. 여자보다 남자가 더 서정적인 존재라는 것은 수많은 남자들이 이토록 사랑을 우아하게 현시하는 데서 심심찮게 재확인된다. 그렇게 사랑에 반영된 풍경과 정념은 서정적 자아의 지휘 아래 정리되고, 그것은 관객과의 소통을 용이하게 만든다. 첫사랑에 대한 환상이라든가 젊음을 탐하는 욕망이라든가 아내를 소유하려 드는 야심은 주인공의 서정성 의해 공감의 대상이 되거나 동경의 표상이 된다. 물론 훌륭한 만듦새가 뒷받침될 경우에라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주인공의 감정이 투영되는 상대방, 즉 여성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주의 깊게 살폈을 때 캐릭터가 부분적으로 함몰되어 있는데도 서정적 자아가 이끄는 주요 감정에만 휘둘리는 경우가 많다. 이는 감독의 의도에 좋게 말하면 따른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속은 것이다. 자신을 야멸차게 버리고 떠난 첫사랑이 서연은 무에 그리 보고 싶었을까? 불행한 가정사를 제 또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이들과의 육체적인 관계로 은교는 정녕 위로를 받았을까? 논리적인 사고와 끈덕진 입심을 자랑했던 정인은 왜 남편의 잘못에도 오히려 죄책감을 느낄까? 영화는 이러한 의문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물론 이야기 군데군데 그런 쪽으로 노력한 흔적은 역력하다. (그런고로 내가 세 편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며, 그것에 관해선 각각의 리뷰에서 자세히 썼다.) 그런데 대중은 왜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은 채 남자 주인공 – 승민, 이적요, 두현에 쉽게 동화될까? 그것은 바로 그들이 누구나 경험하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일반적으로 표출하는 서정적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코미디 영화 재밌게 보고도 최고의 작품을 꼽을 땐 번번이 멜로를 집어 드는 사람이 많은 것도 그런 맥락이다. 서정의 위력은 때로 상상을 초월한다.

 

 

서정적 자아가 그리는 서정적 사랑은 상대방을 속이는 것과 동시에 스스로 속는 메커니즘이기도 하다. 이중의 기만인 셈이다. 그것은 타인에게서 타자성을 거세할 뿐만 아니라 자아의 허구성을 살찌운다. 그것은 늘 어떤 방어적 선택이며 회피의 몸짓이기 쉽다. 그것은 나의 근원적인 욕망과 충동을 순화하는 세련된 방식이자 타인의 치명적인 욕망과 충동을 외면하는 편안한 방식일 수 있다.1 세 편의 영화에서 여성이라는 타자는 서정적 주인공의 의해 상당 부분 회피되거나 외면된다. 관객은 그것을 보면서 새 삶의 기로에 서 있던 서연에게 승민과의 만남은 위안이 되었을 것이라 믿고, 이적요와 서지우를 모두 안타깝게 생각했던 은교에게 일련의 사건은 의미 있는 시간이었을 것이라 믿고, 집에만 갇혀 있던 정인에게 카사노바의 존재는 사랑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 믿는다. 나는 지금 그러한 믿음이 잘못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고 그것이 영화 안에서 납득할 만한 수준으로 그려지지 않았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얼핏 예쁘기만 한 이름에서도 휘발된 타자성이 여실히 드러난다. 서연(棲緣)은 인연을 저장하고 기억하는 인물로, 은교(隱交)는 은밀한 관계를 맺는 데 스스럼이 없는 인물로, 정인(正人)은 올바르다고 간주되는 마음씨를 지닌 인물로 태어났다. 그들은 그렇게 작동하고 있다. 애인을 관찰의 대상으로 삼아 소설을 쓰는 <러브픽션>도 여성을 대상화하는 건 마찬가지다. 오히려 노골적인 수준이다. 액자식으로 구성된 영화는 주인공 주월이 쓰는 소설 속 내용으로 문을 여는데, 글이 풀리지 않아 애를 먹고 있는 소설가의 불만 가득한 하소연이 심상찮다. 여기서 감독은 영화가 나아갈 방향을 은근히 짐작케 하는 선언 아닌 선언을 한다. 마치 그 목표를 직접 설명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고객: 사랑 한 번 못 해본 작가들이 꼭 그렇게 어렵게 꼬아 놓더라.

탐정: 혼자 자위하는 거라면 누가 뭐래 그래. 소설로 문단에서 인정받으려고 하니까 그게 문제지.

고객: 딱하네.

탐정: 병신이야.

 

그렇게 무언가를 다짐하고 나서 주월은 거침없이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인물의 감정을 토로하는 평범한 내레이션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가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은 쉽사리 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말을 듣는 이로 하여금 솔직하다는 인상을 풍긴다. “개성도 좆도 없는 이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내 웅크린 영혼에 주목해줄 그녀가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난 포기할 수 없다.“고 속으로 외치던 그에게 드디어 희진이라는 여자가 나타난다. 어렵사리 데이트에 성공한 그는 이러쿵저러쿵 계속 말을 붙이고도 그녀에 대한 정보를 좀처럼 얻어내지 못한다. 그러다가 그녀가 이혼녀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충격을 먹는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상대에 대한 환상이 하나씩 사라지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지만 주월은 유달리 사랑의 몰락에 민감하다. 그것은 소설가의 특징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얼핏 재미로 마구 늘어놓은 것 같아도 희진에게 품었던 환상을 좀먹는 요소들 – 고기, 겨드랑이 털, 스쿨버스, 사진 작업을 유심히 살피면 제법 바탕이 있다. 채식주의자에게 고기를 좋아하는 식성은 무시할 수 없는 취향의 차이가 되고, 보수적인 시선에서 여자의 겨드랑이 털은 단숨에 수용하기 어려운 뜨악한 일이며, 과거에 수많은 남자들이 그녀와 사귀었다는 풍문은 어지간한 아량으로는 잠재울 수 없는 것이고, 관점에 따라 달리 보이는 그녀의 사진 작업은 뚜렷한 가치관의 간극을 드러낸다. 영화는 그렇게 취향, 외모, 과거, 가치관 등 다각도로 주월의 환상을 야금야금 부순다. 그리고 그것을 뒤집거나 부정하지 않는다. 그 대표적인 것이 겨드랑이 털이다. 어떤 이들은 겨드랑이 털에 관련된 에피소드를 지나치게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불쾌하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희진의 고유한 특성을 강조하기 위한 전략적 도구다. 그녀를 여자들도 제모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알라스카에서 자란 것으로 설정한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그것은 희진의 입장에서 뿌리 깊은 것이고 다른 이가 왈가왈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 사랑이라는 낭만적 행위에 품었던 환상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을 돌이켜보면 그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잖아. 그래서 주월이 알라스카로 향하는 결말은 낭만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되려 관객에게 확실히 일러둔다. 주월에게 희진은 뜻대로 요리하거나 직조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며, 그것을 인정할 때라야 비로소 참된 사랑을 실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사랑의 세레나데라고 하기엔 다소 비속한 뮤직비디오를 통해 끝까지 거듭 ‘알라스카’와 ‘겨드랑이 털’을 입에 올리는 데서 나는 (재미도 재미거니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냥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내버려 두는 연출자의 진솔한 자세를 엿보았다.

 

이 영화는 몇 가지 요소로 대표되는 타자/여성의 특징이 주체/남성의 방편에 의해 함부로 재단되거나 등한시되지 않는다. 희진은 주월이 이해하는 범위 내에서 움직인다.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그 이상으로 주월에게 도움을 주지 않는다. 보통의 로맨틱 코미디가 생각하는 행복한 결말을 따른다면, 희진에 대한 풍문은 풍문일 뿐 진실이 아니라고 밝혀지면서 갈등이 수습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주월을 위해 희진을 주무르지 않는다. 이를테면 남자가 추접스럽게 과거를 들먹일 때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네가 서른한 번째야.“ 그렇다. 동물원을 다녀와서 고기를 열심히 뜯는 걸 보면서 주월이 이래저래 볼통한 얼굴을 하고 ”너 오늘 되게 까칠하다, 생리해?“라고 말했을 때, ”여자들이 정당한 이유로 화를 낼 때 무책임한 남자들의 가장 폭력적인 말이 그 말이야. 여자들은 자궁에 뇌가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남자들! 정말 실망이야!“라고 확실히 되받아치던 희진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하다. 아무렴, 그게 어울린다. 게다가 그녀는 이별이라는 강수로 제 본성을 끝까지 유지한다. 그리하여 잠자리에서 겨드랑이를 보고 애무를 중단한 이유랍시고 ”남자와 여자는 다르지.“를 외치던 주월의 입에서 종국엔 ”저는 겨드랑이 털을 사랑해요.“를 끌어낸다. 알라스카로 보낸 편지에 진심으로 그것을 받아들인 주월의 변화가 들어 있는데 그게 참 귀엽다. 어쩌면 그것은 그가 소설을 쓰는 방식과도 비슷하다. 성급한 판단은 자제한 채 캐릭터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올 때까지 결론을 내지 않고 움직이는 대로 따라가는 것. 주월이 연애를 대하는 태도는 흡사 알랭 드 보통 못지않은데, 코미디라는 장르에 녹아들어 그보다는 훨씬 인간적이다. 액자식 구성이 그다지 유기적이지 못하고 소설 속 내용 또한 지루하고 긴장감이 떨어져 이야기가 산만한 대목은 못내 아쉽지만, 영화 안팎으로 부러 서정적이길 거부하는 주월이 솔직하게 말을 늘어놓는 것은 높이 평가해도 좋을 것이다. 해석하는 자아 또는 감응하는 자아에 의해 사랑의 의미를 단정하는 영화들이 속고 속이는 것들로부터 이 영화는 자유롭다. 웃음의 뒷맛이 개운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알라스카로 향하는 주월의 마지막은 사랑스럽다. 그는 끊임없이 여자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그 미지의 세계로. 그리고 언제나 딱 아는 만큼만 안다고 말한다. 당장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고 해도 그는 아마 방울방울하기를 꿈꿀 것이다. 그런 그를 만난다면 나는 기꺼이 팔을 들어 인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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