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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을 줄 모른다 - 영화 [멜랑콜리아]와 영화 [토리노의 말]을 보고 | 영화일기 2012-08-27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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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토리노의 말

벨라 타르
헝가리, 프랑스, 독일, 스위스, 미국 | 2012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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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에서 아이들이 찰흙으로 제각각 뭔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다.

그중 한 녀석이 자기가 만든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꽤 오랜 시간 공들인 것을 그만 뭉개버린다.

심술이 나서는 다른 아이들 것까지 망가뜨리기 시작한다. 급기야 소리를 지르며 난동을 피운다.


오늘날 지구의 종말을 논하는 자들은 대개 저 아이와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은 자신의 죽음과 세계의 죽음을 일치시키고자 애를 쓴다. 죽음으로 모든 것을 성취하려고 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로 세상을 선동한다. 한마디로 멸망의 판타지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안다. 지금 이 시대를 떠받치고 있는 자본과 종교가 늘 그런 식으로 죽음의 설교자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회적 불안이 고조될 때마다 이런저런 종말론이 고개를 드는 데서 그것은 여실히 드러난다. 한편으로 우리는 알면서도 속는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늘 불안하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거나 말거나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는 의연한 자세는 이제 우스갯소리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배트맨 따위에 열광하는 이유도 어쩌면 거기에 있을 것이다. 인간은 구세주를 기다린다.


그러나 여기 죽음 앞에서 좀체 흔들리지 않는 이들이 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지구 멸망의 해에 함께 날아든 두 편의 영화 ㅡ <멜랑콜리아>와 <토리노의 말>에서 그들을 만났다.

 


 

 

저스틴과 클레어

 

<멜랑콜리아>는 저스틴과 클레어의 이야기다. 저스틴은 결혼을 앞두고 무시무시한 신경쇠약에 시달린다. 마치 오줌이 마려운 아이처럼 안절부절 못한다. 어머니와 아버지라는 작자는 제 부모가 맞나 싶을 정도로 상식 밖의 말과 행동을 하고, 직장 상사는 결혼을 축하하기는커녕 업무와 관련한 스트레스를 안긴다. 무슨 놈의 결혼식이 그리도 불길한지 결국 성대한 잔치는 엉망이 되고 만다. 그러고 나서 저스틴은 급작스럽게 생의 의욕을 잃고 심각한 회의에 젖는다.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뒤에는 우울한 기운이 감돈다. 마침내 멜랑콜리아라는 행성이 지구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한다. 클레어는 극도로 불안한 반면 저스틴은 당황하지 않는다. 이리 뛰고 저리 뛰던 클레어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저스틴과 함께 주어진 운명을 정면으로 맞는다.

 

1부에서 클레어는 결혼식을 앞두고 도가 지나치게 불안한 저스틴을 지켜보고, 2부에서 클레어는 지구가 다른 행성과 충돌하는 상황에서 이상하리만치 침착한 저스틴을 바라본다. 이때 중요한 것은 클레어가 저스틴을 본다는 사실이다. 이런 비유가 가능하다면, 저스틴은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고 클레어는 그 비밀을 모르는 사람이다. 여기서 그들이 자매라는 것은 의외로 중요하다. 피를 나눈 사이가 아니라면 아마 클레어가 저스틴 곁에 끝까지 있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고 클레어가 저스틴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이해할 수 없다. 이는 인간이 우울할 때 느끼는 얄궂은 고독과도 맞닿는다. 따라서 저스틴이 벌이는 일련의 행동을 특별히 질병의 징후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 그러하다면 가족이든 약혼자든 그걸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러므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클레어는 저스틴을 딱히 이해할 수 없는 상태이며,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은 자연히 클레어의 인식 지평 위에 선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왜 저스틴이 지구의 멸망 앞에서 그토록 초연할 수 있었는지 응당 물어야만 한다.

 

 

마부와 마부의 딸

 

<토리노의 말>에서는 마부와 마부의 딸이 등장한다. 마부는 길을 지나다 노쇠한 말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다. 부녀는 칼바람이 몰아치는 외딴 곳에 서로 의지하며 살고 있다. 딸은 몸이 불편한 아버지의 수발을 든다. 물을 길러오고 식사를 준비한다. 그들은 집으로 찾아온 한 이웃을 냉소적인 태도로 대하고, 마차를 타고 돌아다니며 괴이한 말을 지껄이는 무리를 대차게 쫓아낸다. 그러는 동안 날이 갈수록 우물물은 말라가고 촛불은 꺼진다. 창세기를 엎어 놓은 것 같은 기기묘묘한 시간 속에서 무슨 영문인지 그들은 세계의 끝으로 나아간다. 카메라가 집을 드나드는 것 외에는 별달리 바깥 세계를 보여주려는 의향이 없는 것으로 볼 때, 그들이 살고 있는 집은 하나의 소우주처럼 느껴진다. 그러니까 그 두 사람이 눈을 감으면 세계는 완전히 사라진다.


거의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 것 같은 말은 존재 자체로 중요하다. 추측건대 말을 집으로 데리고 오기 전후로 그들의 삶은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말을 데리고 온 첫째 날 마부가 분명히 제 손으로 어느 정도 옷을 벗을 수 있는데도 딸에게 부러 몸을 내맡기는 것을 발견한다. 혹자는 그때 그가 딸을 바라보는 눈빛이 이상한 데다 딸을 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부녀 관계 자체를 의심하기도 하는데, 앞에서 니체의 일화를 장황하게 설명한 걸 그냥 넘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전연 중요한 게 아니다. 눈을 껌뻑껌뻑하는 마부는 꼭 말을 흉내 내는 것 같다. 모르긴 몰라도 마부의 딸은 그날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영화는 그들의 지루한 일상을 비추면서도 수시로 물음표를 찍는다. 그래서 관객은 마부의 딸과 마찬가지로 마부의 심연을 응시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역시나 마부가 왜 세계의 절망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는지 으레 물어야만 한다.

 

 

말(馬)을 대하는 저스틴과 마부


두 영화 모두 말이 등장한다. 저스틴은 본인의 결혼식에 한참 늦고도 과거에 애지중지했던 말을 반드시 먼저 봐야겠다며 마구간으로 향한다.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은 아브라함을 어루만지며 오랜만에 인사를 건넨다. 더없이 좋은 관리를 받고 있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하고도 제한된 공간에 묶여 있는 아브라함을 그녀는 애석하게 생각한다. 그에게서 어딘가 내키지 않는 미래로 이끌려 가는 자신의 불행을 보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영화 속에서 아브라함은 정말 뭔가를 알고 있는 것만 같다. 딴 곳으로 떠나봤자 운명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예감하기라도 한 듯 저스틴이 일정한 구역 바깥으로 벗어나려고 할 때 그는 요지부동의 자세로 버틴다. 무섭지 않다고 소리치던 클레어의 남편도 결국 아브라함 옆에서 약을 먹고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한편, 마부가 말을 데려온 것은 니체의 일화에서 연결된다. 알다시피 니체는 말년에 토리노의 한 길가에서 주인의 채찍질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말을 보고 발작을 일으켜 정신착란에 빠졌다. 극중 인물이 밝히고 있는 것처럼 눈물을 흘리는 말을 통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이 결코 피할 수 없는 근원적 절망을 목도한 것이다. 그가 데려온 말의 과거는 보지 않아도 뻔하다. 날 때부터 부단히 일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주인의 요구에 따라 움직이는 말이 스스로 삶을 거부했다. 이것을 보고 니체는, 그리고 마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마부는 계속해서 생존에 위협을 받자 삶의 터전을 옮기려고 시도해보지만 이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절망의 마침표를 찍는다. 말은 일찌감치 식음을 전폐한 터였다. 저스틴과 마부는 그렇게 각각 말을 뒤따른다.

 

 

멜랑콜리아라는 행성과 토리노의 바람

 

종말에 맞서는 저스틴과 마부는 여러모로 닮았다. 저스틴은 직장 상사가 사적인 공간에서도 괴롭히자 그간 쌓였던 분노를 제대로 터뜨린다. 우리는 그녀가 약혼자를 곁에 두고 낯선 남자와 야외에서 정사를 벌인다거나 야밤에 옷을 다 벗고 나가 몰래 목욕을 하는 데서 자신을 속박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마음을 읽을 수가 있다. 그런가 하면 마부는 이웃 남자가 비밀의 열쇠를 쥐고 있다는 듯 비장한 말투로 열심히 뭔가를 설명하는데 모두 헛소리로 치부한다. 또한 부녀를 조롱했던 집시들이 남기고 떠난 책자를 불태운다. 그게 성경인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다.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인간을 선동한다는 게 핵심이다. 물론 그들은 속지 않는다. 앞서 말한 것처럼 저스틴과 마부는 죽음의 설교자 역할을 수행하는 자본이나 종교 따위를 배격한다.

 

그런 의미에서 멜랑콜리아라는 행성과 토리노의 바람은 인간 바깥에 존재하는 외부적 위협이 아니다. 저스틴과 마부에게 나쁜 것은 신이 아니라 신에 의지하는 자세, 자본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를 맹신하는 태도다. 그들은 죽음을 앞세우는 행위를 거부한다. 인간은 죽음을 완성할 수 없는 까닭이다. 인간에게 죽음 이후의 세계란 없다. 종말이 두려운 것은 이 세계가 무너지고 다른 세계가 올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죽음을 전후로 무언가 바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죽음은 언제나 미확정인 채로 끝이 난다.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나는 확인할 길이 없다. '나는 죽을 줄 모른다.' 제아무리 죽음에 가까이 다가선들 그것을 경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지 않다면 예술이 이다지도 죽음을 반복적으로 모사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두 영화가 그리는 이 세계의 종말은 하나도 무섭지 않다. 왜냐하면 저스틴과 마부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에 매달리지도 않고 죽음을 넘어서려 하지도 않는다. 이는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하는 손쉬운 선언과는 전혀 다르다. 그들은 자연적 인간이라는 삶의 근본적 바탕 위에 선다. 생의 의지는 고통스러운 나날 속에서 늘 허우적대지만 그것을 포기하는 순간 곧 세계도 소멸한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인간은 누구나 온전한 무(無)를 직시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은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두 영화는 모든 것이 파괴되고 소멸되는 시간 속으로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어떤 방법으로도 경험할 수 없는 '죽음'을 체험케 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아직도 스크린을 통해 나와 다른 세상을 만나는 일이 특별하다는 것을 방증하는 일례고, 두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세계의 종말 앞에서 당당하고 초연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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