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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세션: 이 남자가 사랑하는 법] - 그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 영화일기 2013-01-26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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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세션: 이 남자가 사랑하는 법

벤 르윈
미국 | 2013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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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션: 이 남자가 사랑하는 법

그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먼저 이 영화에서 삐걱거리는 지점을 말해야겠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몸을 조금도 가누기 어려운 마크는 자신의 성적인 욕구를 충족할 요량으로 섹스 테라피스트 셰릴과 몇 차례에 걸쳐 관계를 가졌다. 새로운 세상에 뒤늦게 눈뜬 그야 상대에게 마음을 빼앗길 법한데, 직업적으로 제법 전문가다운 냄새를 풍기는 셰릴은 왜 흔들리는 걸까? 두 사람의 관계가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다는 것은 이 영화를 떠받치는 가장 중요한 근간이다. 그래서 셰릴이 마크에게 품는 감정은 상세히 설명될 필요가 있었다. 그 소요에 비하면 그녀의 사연은 많이 생략된 편이다. 마크의 시점에서 1인칭으로 서술되는 기존의 에세이를 풀어냈기 때문에 여자의 입장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았겠지만, 그것은 충분한 변명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렇게 다시 물을 수 있다. 약간의 무리를 더하면서까지 셰릴에게 손에 잡히지 않는 감정을 불어넣은 까닭이 무엇이냐고.

 

 

 

 

아마 이 영화에 들어선 관객의 대다수는 마크의 입장도 아니고 셰릴의 입장도 아닐 것이다. 감동적인 실화 속 장애인을 통해 평범한 사랑을 이야기한다고는 하지만, 이 특수한 상황에서 한 인물에 마음을 내려놓기란 쉽지 않다. 더구나 소수자의 인권에 무관심한 한국에서 이 같은 이야기는 일종의 충격으로 다가갈 수도 있다. 이를테면 섹스 테라피스트라는 직업이 생경한 것은 그쪽이나 이쪽이나 크게 차이가 없을 텐데, 그것을 대하는 관객의 속마음은 사뭇 다른 것 같다. 마크와 셰릴의 만남을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이는 영화 속에도 존재한다. 호텔에서 일하는 동양인 남자 얘기다. 그런데 관객은 그들의 관계를 께름하게 생각하는 그와는 상황이 다르다. 우리는 지금 마크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있다. 마크가 셰릴을 만나는 동안 모든 사실을 신부한테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은 데서 겉으로 보이지 않는 고민까지도 찬찬히 읽을 수 있는 터다.

 

세션을 수행하는 내내 마크는 셰릴 앞에서 계속 긴장을 놓지 못한다. 섹스에 관한 경험이 부족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여지껏 누구를 만나더라도 내심 접근이 허락되지 않는 모종의 선 바깥에 머물러야 했던 그가 경위야 어떠하건 난생처음 제 몸을 다른 이에게 온전히 드러내는 희열은 섹스의 소중함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이가 감히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감정을 교류하는 데 따른 정신적 피로를 돈으로 대신하고 육체의 즐거움을 손쉽게 거래하는 지금, 이렇게 정직한 행위가 외려 불편한 시선으로 갇히고 이들의 사랑이 자주 노출되지 않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것을 고려한답시고 구차하게 마크의 감정을 늘어놓지 않는다. 카메라가 왜 그토록 마크의 몸을 집중적으로 따라가고 있는지 표가 나게 설명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그 대신 몇 개의 이미지로써 두 사람의 섹스가 그들 자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뭉근하게 깔아둔다.

 

이런 것을 생각해보자. 누나의 죽음에 죄책감을 갖고 있는 마크가 침대에서 과거를 회상할 때 그의 눈앞에 펼쳐진 장면은 어릴 적 바닷가에서 신나게 뛰놀던 모습이다. 허리띠를 강하게 매면 가슴께가 조여오듯 몸의 구속은 마음의 구속을 낳는 법. '누나'는 마크의 유년, 곧 팔다리가 자유로웠던 자신과 연결된다. 운신이 편치 않은 사람에게 두 팔로 바람을 가르며 힘차게 달리는 일이란 성적인 쾌락 그 이상이다. 그는 섹스 덕분에 이중적으로 오르가슴을 느낀다. 셰릴도 마찬가지다. 가정을 둔 그녀는 마크의 애절한 마음 덕분에 그 일을 직업으로 삼은 고충 따위를 씻어 내린다. 그리하여 섹스 테라피스트로서 누군가를 위해 옷을 벗는 행위와 세례를 앞두고 경건한 마음으로 맨몸이 되는 행위가 손을 잡는다. 이렇게 두 사람의 감정이 움직이는 걸 보면서 우리는 은연중 몸을 부리는 자유로움 같은 걸 느낀다. 제 몸을 진정으로 사랑할 줄 아는 자의 눈부신 삶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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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레미제라블] - 사랑은 곧 혁명이다 | 영화일기 2013-01-19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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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레미제라블

톰 후퍼
영국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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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제라블

사랑은 곧 혁명이다

 

 

시대의 혁명을 다루는 영화나 소설을 보면 꼭 주인공이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가 얽혀 있다. 조금 더 본질적인 내용만 담을 수는 없는 건가? 하기는 무겁기만 한 이야기를 누가 좋아하겠어? 소재를 고려하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야. 어리석게도 나는 한때 이렇게 생각했다. 실제 역사 속에서도 사랑 덕분에 혁명을 부르짖고 사랑 때문에 혁명을 그르치는 일이 많았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가 거기에 각별히 주목하는 데서 생겨난 어떤 전형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나도 어느 순간 사랑이라는 것이 그리 간단한 양념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는 나이를 먹었다는 숱한 증거 가운데 하나다. 수많은 고전이 사랑 속에서 혁명을 불태우고 혁명 속에서 사랑을 꽃피우는 이유가,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위로를 얻는 까닭이 어렴풋이 손안에 들어왔다. 어쩌면 사랑과 혁명이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을 일러주는 신호가 조금씩 내게 감지된 셈이다.

 

 

 

 

혁명이란 무엇인가? 자기 자신을 둘러싼 껍질을 깨부수는 행위, 외부의 관계망 속으로 과감히 뛰어드는 태도, 다른 세계로의 접촉과 횡단을 거쳐 울타리를 바깥으로 확장하는 일. 17세기의 스피노자는 본질적으로 인간은 이런 욕망을 갖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수많은 ‘되기’를 통해 이른바 변용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되기'란 신체가 공동체에 접속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모름지기 사랑으로써 경험된다. (여기서 사랑은 좁은 의미의 사랑이 아니다.) 여행을 하고 나면 세상이 달라 보이듯 사랑을 하고 나면 우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다. 언젠가 파스칼 키냐르는 이런 말을 했다. “사랑에 빠질 때마다 우리의 과거는 바뀐다.” 이렇듯 사랑은 끊임없이 우리를 낮은 곳으로 흐르게 만든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이 사랑의 위대함을 알지 못한다. 그보다 다른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먹고 살기 바빠서 사랑을 찾을 시간도, 혁명을 외칠 여유도 없다고? 여기서 머리가 아니라 신체를 언급하는 대목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와 달리 사유를 하나의 실체로 보지 않는다. 그는 사유가 이 세계를 지배하거나 장악한다고 보는 데 거부감을 드러내며, 공동체와의 무한한 결합이 만드는 신체 변용과 이와 평행하게 획득되는 사유의 공통 관념에 입각해서 그 복잡한 속성 중 일부에 겨우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주 거칠게 표현하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니라 '나는 유한하다. 고로 접근한다.'이다. 머리로 생각해서 나와 세계를 분리하는 대신 신체를 변용해서 나를 세계에 이르게 하는 식이다. 우리가 실제로 사랑을 대하는 순간을 떠올려보라. 백날 머리 굴려 봐야 사랑은 다가오지 않는다. 사랑은 머리로 하는 게 아니다. 위에서 언급했듯 접촉과 횡단이 답이다. 사랑과 혁명? 왠지 거창하게 느껴지지만 실은 우리가 매일매일 부딪히는 일이다. 실체를 짐작할 수 없고 깊이를 잴 수 없는 커다란 슬픔 앞에서 우리는 종종 좌절한다. 그러나 미지의 세상에 줄곧 접속하는 사랑은 슬픔을 기쁨으로 바꿀 것이다. '사랑'은 곧 '혁명'이니까.

 

p.s.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우연히 어떤 책을 집어들었다가 생각의 꼬리를 물고 여기까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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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루나의 예언] - Beyond the Hills | 도서일기 2013-01-14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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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루나의 예언 1

프레데릭 르누아르 저/강만원 역
창해(새우와 고래) | 2012년 12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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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나의 예언

Beyond the Hills

 

 

아주 먼 옛날에는 어두컴컴한 밤이 되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인간의 눈동자 위로 하늘에서 빛을 내는 별들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사람들은 별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했고 많은 것을 알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다. 점성술은 그리하여 탄생됐다. 세계 곳곳에서 싹을 틔웠지만 특히 고대 바빌로니아의 점성술은 후세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7개의 행성, 즉 해·달·수성·금성·화성·목성·토성으로부터 세계의 운명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은 자연히 개인의 운명과 결부되어 다양한 형태로 발달했다. 점을 보는 행위는 이토록 유서가 깊은 일이다. 그로부터 과거를 추정하고 미래를 예언하는 점성가가 많이 등장했는데, 그들이 주장한 내용 가운데 상당수는 당시의 세상을 지배하는 관념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불행한 삶을 살기 일쑤였다. 그게 종교와 관련된 것이라면 말할 것도 없이 위험한 일이었다. 가령, 이 땅에 여러 종교가 뿌리를 내린 이후로는 점성가들에게 소위 이단으로 죄를 물어 엄벌에 처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 책의 후기에 언급된 것처럼 현대천문학의 창시자로 손꼽히는 요하네스 케플러 또한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점성술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가 태어난 날짜가 공식적인 기록보다 6년가량 앞선다고 주장했다. 그로 인해 박해를 받았지만, 현대에 이르러 이 가정은 어느 정도 사실로 인정되었다. 그리스도의 탄생이 정확히 언제인지 아는 것이 무에 그리 중요할까마는, 수많은 사람이 제 목숨까지 바쳐가며 굳건히 지켰던 신념의 근원이 실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자각하는 일이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 소설은 오늘날까지도 좀처럼 질문을 허락지 않는 바로 그 종교의 영역에 다분히 인간적인 물음을 던진다. 프랑스에서 최고의 지성으로 불리는 저자 프레데릭 르누아르는 철학자이자 종교사학자로서 특별히 문학을 통해 철학과 종교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 책은 감히 그런 종류의 문학이 지닌 매력의 최고봉이라 할 만하다. 무려 15년간 두 발로 역사의 장소를 오가며 공들여 집필한 작품답게 현재 그는 '프레데릭 르누아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과 배경은 줄거리와 마찬가지로 문학적 상상력의 산물이지만 방대한 분량의 이야기를 타고 흐르는 거의 모든 사건은 역사적 사실로부터 재구성되었다. 이것이 가장 먼저 놀라움을 안긴다. '다빈치 코드'처럼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소설과 달리 역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그 속에 숨어 있는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는 것은 현실의 긴장 위에 선다는 점에서 더욱 가치가 있다. 이를테면 여기서 검은 복면을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일부 종교의 폭력과 위선은 예나 지금이나 심각한 문제다. 오히려 세상이 점점 더 거짓과 타락에 물들면서 신앙의 본질을 망각한 채 믿음 그 자체에 몰두하는 일이 늘고 있는 추세다. 사이비 종교가 횡행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고로 이 작품의 배경에 해당하는 중세의 지중해 연안은 특정한 시공간에 머물지 않는다. 한 편의 소설이 유일신을 믿는 종교들, 예컨대 유대교·카톨릭·개신교·이슬람을 가로질러 당대의 철학적 사조를 두루 통과한다. 그 모든 것에 무지몽매한 나 같은 독자도 충분히 따라갈 만한 테두리 내에서.

 

 

△ 영화 '신의 소녀들(Beyond the Hills)'

 

 

주인공 조반니는 신앙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는 평범한 인물이었으나 우연히 점성술을 배우게 되면서 비극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마녀로 불리는 루나가 보름달에 비친 토끼의 내장을 보고 조반니의 인생을 예언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 과정에서 소설은 그에게 일어나게 될 중요한 사건들을 일찍이 압축적으로 제시한다. 이 책의 소제목들 또한 두 권에 걸쳐 7개의 행성으로 정해져 있고, 그것의 순서는 조반니의 운명과 연관되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저자는 이성과 과학에 힘입은 점성술이 세상의 운명까지도 내다볼 수 있다고 믿는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신과 인간이 결코 대립적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삶에 대한 믿음은 언제나 불행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를테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그래, 우리는 삶에 열심이지. 그러나 그것에 매달릴 뿐 진정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어. 존재에 집착하는 것은 삶을 사는 것이 아니야. 요컨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산다는 것은 예술이지." 그는 우리가 예술 같은 삶을 갈망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술 같은 삶을 사는 것은, 세계의 거친 물결에 휘둘리지 않고 제 삶을 스스로 조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단순한 생존에서 진정한 인생으로 넘어가는 것이야말로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어려운 숙제일지도 모른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얼마 전에 본 크리스티안 문쥬 감독의 영화 '신의 소녀들(Beyond the Hills)'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세상에 내동댕이처진 한 소녀가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오갈 데 없는 세상을 향해 절규하는 모습이 아직도 선연하다. 그것은 비단 특정한 상황에 놓인 자의 비극이 아니다. '존재하는' 자라면 누구나 마주하게 되는 인생 그 자체다. 혹자는 그 영화가 예사로운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을 들어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은 데 고개를 기우뚱했지만, 나는 이러한 비극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아니라 신에 매달리는 태도, 삶이 아니라 죽음에 기도하는 자세는 벌거벗은 생명들을 더욱 힘들게 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운명을 움켜쥔 별들을 바라보면서도 지상의 언덕을 넘어서는 일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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