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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토커] - 나의 참을 수 없는 충동에게 | 영화일기 2013-02-28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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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스토커

박찬욱
미국, 영국 | 2013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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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커Stoker

나의 참을 수 없는 충동에게

 

 

 

인디아는 남보다 멀리 보고 남보다 많이 듣는 스스로를 유별난 존재로 여긴다. 열여덟 살 소녀가 으레 숨기고 있는 뾰족한 감각이라 하기에는 그녀의 성씨가 또 한번 유별나다. 혹시 브람 스토커의 피를 물려받은 것일까? 모르긴 몰라도 소녀는 인간 종족의 피가 네 종류뿐이라는 게 못마땅할 것이다. 고작 네 종류밖에 감당하지 못하는 이 세계가 지루하고 심심하게 느껴지던 어느 날, 소녀의 시야에 불쑥 한 남자가 들어온다. 갑작스럽게 아빠가 세상을 떠난 뒤에 삼촌이라는 자가 나타난 것이다. 어딘가 탐탁지 않지만 그녀는 집에 몰래 침입해 자신의 다리를 타고 오르는 거미를 대하듯 일단 지켜보기로 한다. 남편에 대한 좋은 기억이 딸이 태어나기 전에 머무르는 것으로 보건대 엄마 이블린은 진즉에 혼자였고 그런 영향으로 삼촌 찰리에게 어깨를 기댄다. 인디아는 찰리의 수상쩍은 행동에 의심의 고개를 기울이면서도 그에게 자석처럼 이끌린다.

 

 

 

 

 

인디아와 찰리는 닮은 데가 많다. 미아 바시코브스카에게 매튜 구드의 외모를 입히기 위해 가발을 씌우고 렌즈를 맞춘 것은 혈연 관계를 드러내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같은 피를 가진 이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또 마주하는 상황은 박찬욱 영화에 흐르는 일관된 기조다. 집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하나둘 종적을 감출 때 인디아는 다가올 운명을 조금씩 예감한다. 맥게릭 부인이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찰리가 엄마를 거침없이 유혹하는 모습을 보고도 그냥 내버려둔다. 이는 사춘기 소녀의 복합적인 감정과 연결된다. 주름진 커튼 사이로 찰리와 이블린의 부정을 목격한 뒤 달의 세계를 향해 더 깊이, 더 멀리 내달리는 장면은 인디아의 내면을 시각적으로 압축한다. '나도 몰랐던 나'를 발견하는 길목에서 폭력의 희열과 자위의 희열이 혼란스럽게 뒤섞이는 소녀는 점점 참을 수 없는 충동에 휩싸인다.

 

인디아와 찰리와 이블린은 가족이라는 이름의 삼각형 위에서 서로 다른 감정으로 대척한다. 이 영화의 교차편집은 그들이 당기는 긴장의 끈을 팽팽하게 유지한다.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개별 쇼트로 인물의 심리를 정확하게 짚는데, 세 개의 점과 세 개의 선분을 비추는 카메라가 전자레인지 회전판처럼 균일하게 돌아간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이블린의 서사는 잘 보이지 않는다. 찰리의 과거를 설명하는 플래시백이 나오기 전후로 그녀의 존재는 희미하다. 남편의 흔적이 남아 있는 물건들을 불태우는 장면만으로는 감정이 온전히 수습되지 않는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인디아의 서사는 다각도로 조명된다. 소녀는 언제고 다른 색을 뒤집어쓸 준비가 되어 있는 '노랑'이다. 그런 그녀가 마지막에 총을 들고 '빨강'을 바라본다. 그것은 아름답기도 하고 끔찍하기도 하다.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다. 드디어 자신을 감싸고 있던 껍질을 깨부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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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 나와 나 이외의 것을 잇거나 가르는 나의 믿음 | 영화일기 2013-02-20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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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라이프 오브 파이 (3D)

이안
미국 | 2013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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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오브 파이

나와 나 이외의 것을 잇거나 가르는 나의 믿음

 

 

 

3월 14일은 대개 화이트 데이로 기억되지만 남달리 그날을 파이(π) 데이로 추억하는 이들은 파이(pie)를 먹으며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한다. 알다시피 파이는 원의 둘레와 지름의 비를 나타내는 부호이고, 그 값은 3.1415926535이다. 소수점 이하 셋째 자리는 반올림하여 대개 3.14로 통용된다. 그런데 어딜 가나 자신의 잉여력을 감추지 못하는 이들이 있으니 우리는 π를 소수점 아래로 수백 수천 자리까지 외우는 이들을 더러 본다. 이 영화의 주인공 피신 몰리토 파텔 또한 그것을 호기롭게 꿰고 있다. 그들이 숫자를 암기하는 데 왜 열의를 드러내는가 하면, 사람들이 일컫는 대로 ‘무한한 존재에의 탐미’쯤 될 것이다. 기계를 이용하지 않고서는 원을 반듯하게 그리기 어렵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계속해서 그 끝이 뻗어나가는 원주율의 신비는 제법 그럴듯한 이유를 갖는 셈이다. 종이에 원형의 지구를 쉽사리 그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누구에게나 이 우주는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법인데, 그로부터 어떤 이들은 파이의 무한성에 깊이 매료되었을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심지어 독특한 이름 탓에 놀림을 당하던 우리의 주인공은 그게 지긋지긋해서 스스로 ‘파이’가 되었다. 삶을 대하는 태도가 범상치 않은 이 소년은 종교를 갖는 것도 친구 사귀듯 해서 벌써 몇 명의 신을 가슴에 올려놓았다. 삶을 스스로 개척하려는 의지가 몽글몽글 끓고 있는 파이에게 아버지는 처음으로 그의 의지를 가로막는 거대한 벽이다. 종교는 믿을 게 못 된다며 오로지 이성의 힘을 강조하는 아버지와 크게 부딪히는 대목에 리처드 파커가 등장한다. 호랑이는 사람을 해친다고 생각하는 아버지와 달리 세상에 별 편견이 없는 파이는 리처드 파커를 무서운 존재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러나 위험하게 먹이를 주던 일이 발각된 직후 그는 아버지의 이성을 잔인하게 확인한다. 우리 바깥에 묶어 놓은 염소 한 마리가 눈 깜짝할 새 호랑이에게 물린 것이다. 이때 어떻게 쇠창살에 아랑곳없이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약간의 의문으로 남는데, 이는 그 일을 겪고서 인간에게 호랑이가 과연 나쁜 존재인지 누차 되물었을 파이가 믿음의 문제를 생각하게 되는 것과 은밀히 통하는 데가 있다.

 

일찍이 영웅적인 면모를 풍기던 파이는 아니나 다를까 시험의 무대에 오른다. 배에 동물을 싣고 캐나다로 떠나는 도중 상상치 못한 폭풍우가 몰아쳐 조난을 당한 것이다. 구명선에 올라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그의 곁에는 얼룩말, 하이에나, 오랑우탄, 그리고 호랑이가 있을 뿐이다. 부모를 잃은 슬픔에 앞서 눈앞의 처지가 곧 자신을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정신을 꽉 붙들어맨다. 시간이 흐르자 굶주림에 신음하던 동물들이 서로를 공격하면서 파이와 리처드 파커만 남는다. 그는 소통하지 못해 답답함을 느끼는 쪽에서 먼저 피하는 게 수라는 걸 알고 리처드 파커의 심기를 최대한 건드리지 않으면서 공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한다. 호랑이를 적대시하던 아버지도 그런 상황에 처했다면 꼼짝없이 리처드 파커에게 한 줌의 희망을 걸었을 것이다. 삶에 부딪히는 모든 난관은 그처럼 믿음이라는 것과 연결된다. “물이 아니라 공포심”을 극복해야 한다는 사실은 그의 운명이 수영장에서 이미 넌지시 귀띔한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파이의 생존은 육체가 아니라 정신에 달렸다.

 

 

 

 

원작을 읽은 바 없지만 이런 이야기는 소설이라는 장르에서 더욱 빛을 볼 게 틀림없다. 실제로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는 그 자체로 좋은 평가를 받은 것으로 안다. 그렇다면 이를 영화로 옮기면서 감독은 무엇을 더 얹어 무엇을 더 얻으려 한 것일까? 가장 주목할 만한 연출적 요소는 단연 3D 촬영이다. 이제야 세상에 나왔지만 이 영화도 3D 제작이 한창 불붙기 시작했을 때 출발한 것이라고 하니 움직임이 많지 않은 이야기가 표현의 한계에 부딪힐 염려까지 더해 그 성패는 더욱 불확실했을 터. 여기서 생각이 뻗었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안은 3D라는 '기술' 못지않게 3D라는 '도구'에 주목했다. 제아무리 삼차원을 목전에 펼쳐놓는다고 해도 나를 향해 발길질하는 호랑이가 진짜 내 허벅지를 차는 일은 없다는 걸 아는 관객에게 3D란 어디까지나 사실감을 높이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시각적 자극 또한 믿음에 기초한다. 결과적으로 소설이 영화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3D를 택한 의도는 파이가 믿음의 문제에 봉착하는 이야기의 한복판에 여봐란듯이 내리꽂힌다.

 

물론 기술도 내용을 뒷받침한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는 영상을 대하는 감각이 무뎌서 기술적으로 뛰어난 상영 조건에 여지껏 크게 감동을 받은 적이 없는데, 이 작품은 예외로 기억될 것 같다. 2D로 본 뒤에 (아이맥스) 3D로 다시 봤더니 주제와 형식이 마주치는 대목이 폭죽을 터뜨리듯 특별한 심상을 보탰다. 파이와 호랑이가 한 배에 타고 있는 게 전부인 이 심심한 이야기가 이토록 생생한 기운을 얻은 데는 지금 내가 안경을 끼고 있다는 사실을 잊게 만드는 위력 같은 게 분명 작용한다. 다만 그 양상은 일반적인 3D와 사뭇 다르다. 다들 기술의 진보에 발맞춰 스크린 앞쪽으로 더 극적인 이미지를 끄집어내고 있는 상황에서 이 영화의 3D는 고정된 공간에서 스크린 뒤쪽으로 시야를 확장하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 부분적으로 속도감을 높여서 움직이는 대상에 관객을 몰입시키는 보통의 방식과는 완전히 다르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해서 향상된 3D 촬영으로 주목을 받은 <호빗: 뜻밖의 여정>과 견주어보면 기술을 대하는 차이가 또렷하게 감지된다.

 

이 영화는 우리가 그들 바깥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러 인식시킨다. 가령 카메라가 순간적으로 우주의 천장에 매달려 파이와 리처드 파커를 하나의 점으로 만드는 순간이 있다. 그로부터 인간과 호랑이의 간극이 실은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음을 '눈에 보이게' 슬쩍 일러준다. (이쯤 되면 스크린 위에 무엇을 얹었는지 알게 된다.) 결국 나와 나 이외의 것을 잇거나 가르는 것은 '나의 믿음'이다. 우여곡절 끝에 육지로 올라온 리처드 파커는 뒤도 안 보고 뚜벅뚜벅 걸어간다. 영화는 끝에 가서 이야기를 전복하는 방식으로 여기에 다시금 도장을 찍는다. 선박 회사 직원이 보험 처리 문제로 진실을 요구할 때 파이는 그들의 바람대로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파이의 삶과 그들의 삶이 다르듯 진실은 각자 다른 모양으로 존재한다. 태풍이 몰아치는 바다에서 그것도 호랑이와 사투를 벌이며 끝끝내 생존한 것 자체가 기적 같은 일이거늘 다른 이에게 단 하나의 진실이라는 게 성립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저 파이를 믿을 뿐이다. 망망대해 어딘가, 나와 당신 사이에 놓인 바로 그 믿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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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잊혀진 꿈의 동굴] -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꿈의 광경 | 영화일기 2013-02-15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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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잊혀진 꿈의 동굴

베르너 헤어조크
미국 | 2013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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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꿈의 동굴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꿈의 광경

 

 

 

베르너 헤어조크는 끊임없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 행성을 찾고 있었다. 그것은 단지 유토피아가 아니다. 뭐라고 말하는 게 좋을까? 지금껏 손이 닿지 않은 공간? 누구도 침범하지 못한 세계? 보는 이들마다 미쳤다며 고개를 흔들 만큼 무모한 도전을 감행하던 그는 인간의 인식을 갱신하는 위해서는 반드시 위대한 이미지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 것 같다. 그래서 줄기차게 지금 여기에 없는 ‘꿈의 광경’을 우리 눈앞으로 불러오려고 애썼다. 그런 그에게 동굴, 그것도 3만 2천 년 전이라는 아득한 과거로부터 꽁꽁 봉인되어 있었던 쇼베동굴(Grotte de Chauvet)은 더할 나위 없이 탐험욕을 자극하는 대상이었으리라. 이는 동굴이라는 장소가 내뿜는 기운을 생각하면 익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소수의 전문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을 특별히 촬영할 수 있는 권한이 떡하니 그에게 주어졌다는 사실 또한 그 경위를 막론하고 그저 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헤어조크가 카메라를 들고 어두컴컴한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이리하여 영화는 자연스레 가치가 드높은 유적을 다루는 통상적인 다큐멘터리와 거리가 멀어진다. 기록을 중시하는 것도 아니고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도 아니다. 학습을 기대하면서 아이들 손잡고 박물관 대신 영화관으로 향하는 거라면 소득은 크지 않다. 차라리 동굴에 들어간다고 여기는 편이 더 보람될 것이다. 기실 그의 영화에서 객관적인 리얼리티나 명료한 내러티브는 없다. “나에게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의 경계는 항상 애매했다. 난 그런 경계를 만들지 않는다.”고 말했던 그다. 여북해야 “유일하게 객관적인 카메라는 슈퍼마켓 감시용 카메라”라는 농담을 던졌겠는가. 심지어 언젠가 <피츠카랄도>를 자신이 만든 최고의 다큐멘터리로 꼽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의 영화를 보기 전에 필요한 준비운동이 있다면 그것은 이전에 전혀 본 적 없는 광경을 맞닥뜨릴 자세를 취하는 것뿐이다.

 

순서상 이 작품 뒤에 나온 전작, 사형수의 영혼을 살피는 <심연 속으로>를 한 영화제에서 먼저 본 나는 모호한 결말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기 어려워 긴 시간 영화의 꼬리를 그냥 가슴 한 편에 밀어두었더랬다. 그런데 최근 이 영화를 통과한 뒤로 그가 거기서 왜 사유의 종착지를 분명히 하지 않았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게 됐다. 외눈 하나 까딱 안 하고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인간의 심연을 헤아리는 일이나 언어라는 다리 없이 오직 벽화만으로 동굴이 퇴적한 시간을 가늠하는 일이나 그가 주시하는 대상들은 결국 온전히 손에 쥘 수 없는 진실이다. 헤어조크의 세계에서는 중요하게 언급되는 벽화를 두고 그것의 의미를 열심히 습득하는 것보다 동굴의 영험한 기운을 조금이라도 느껴보는 게 이로운 셈이다. 고로 영화가 동굴에 들어선 이후 전문가의 입을 빌려 다각도로 정보를 전달하다 말고 서서히 외부의 소리를 줄여가는 것은 그런 맥락이다.

 

세월을 거스르게 만드는 놀라운 광경에 어딘가 격앙된 안내자를 따라 우리도 동굴의 '심장박동'에 귀를 기울이게 될 때쯤 이 영화가 취한 3D 촬영의 의미가 도드라진다. 그것은 기술적인 효과를 떠나서 그 자체로 환상을 심어주는 하나의 안경으로 작동한다. 그렇지 않다고 들었지만 설령 2D와 3D가 구현하는 동굴의 모습이 별 차이가 없다고 할지라도 안경을 쓰는 행위는 관객과 동굴 사이의 심리적 거리를 좁히는 데 보탬이 된다. 시간적 압박과 공간적 제약을 무릅쓰고 3D로 힘들게 촬영한 데는 도구의 차이로 깊이감을 달리할 목적에 앞서 이런 의도가 살짝 깔렸을 것이다. 그건 신비한 목소리를 타고 흐르는 내레이션과 동굴 안팎으로 이따금 틈입하는 비장한 음악에서도 묻어난다. 벽화를 길게 훑는 대목이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로 장식되고 있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헤어조크가 바라보는 '꿈의 광경'은 그렇게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신비 속에 가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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