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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소녀, 푸지에와 나 | 구름의 저편 2008-10-30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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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세상은 늘 희한하게도, 연결돼 있다.
그건 부인할 수 없는, '참'인 명제다.

얼마 전, 사랑을 읊고, 밤을 노래한 김연수의 낭독유혹기.

한 독자의 질문에, 김연수는 다큐멘터리 한편을 입에서 꺼냈다.
뭐랄까. 그는 그 다큐를 떠올리면서, 그때의 감상을 되씹고 있는 듯 했다.
한없이 진지한 그의 표정과 입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김연수는 그랬다.
무방비 상태로 봤다가, 압도적인 감정에 짓눌렸다고.
다큐를 다 본 뒤, 땅을 쳤단다.
왜? 글을 더 잘 써야겠다고 반성했단다.
일본인 탐험가가 자전거를 타고 몽골을 횡단하면서 만난 몽골소녀의 이야기,
다큐멘터리 <푸지에>는 그렇게 내게 존재감을 각인시켰었다.
<푸지에>는 2007년 EBS국제다큐멘터리페스티벌(EIDF)에서 대상을 타고,
올해 EIDF에 '2007 우수작시리즈'의 한편으로 방영되기도 했다.
나는 보지 못했다.


그런데 내가 회원으로 있는, 푸른영상에서 정례 메일이 왔다.
매달 다큐보기 프로그램에 대한 안내 메일.
별 생각 없이 문을 열었다.
아니, 깜짝이야. 정수리가 반짝~
<푸지에>라는 이름. 익숙한 이 이름.
김연수를 통해 처음 접했던 그 이름.

허허,
세상은, 내 발 딛고 있는 세계는 이렇게 연결돼 있구나.
나는 생각했다.
지난 2006년 몽골초원을 찾았을 때, 혹시 그 초원에서 푸지에를 스쳐지나지 않았을까.
소녀의 비보가 있기 전이니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푸지에는 내 주변사람이었던 양 번뜩 생각이 들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이 말.
"모든 것은 모든 것에 잇닿아 있다."

사랑을 읊고, 밤을 노래한 김연수의 낭독유혹기

<푸지에> 상영회 개요.
언제 : 2008년 10월 31일 금요일 저녁 7시 30분
장소 : 푸른영상 사무실 (위치를 모르시는 분은 홈페이지 참조, 혹은 전화주세요.)
http://www.docupurn.org
TEL : 02)823-9124
 
<푸지에 / Puujee>  
· 감독 야마다 카즈야 
· 제작국가 일본, 몽골 
· 제작년도 2006 
· 러닝타임 110min 
· 원작언어 일본어, 몽골어 

-시놉시스
1999년 의사이자 탐험가인 세키노는 남미에서 아프리카까지의 긴 여행 도중 몽골에서 숙련된 솜씨로 말을 타는 소녀 푸지에를 만난다.
당시 푸지에는 여섯 살. “가까이 오지 마세요.” 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그녀와의 만남 이후 5년 동안,
세키노는 몽골을 휩쓰는 슬프고도 강한 변화의 바람을 목격한다. EIDF 2007 대상 수상작.

-작품리뷰
드라마나 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이야기는 ‘우연을 가장한 필연’들이다.
이런 픽션들은 대게 현실에서 있을 법한, 그러나 결코 일어나지 않을 우연들로 시청자들을 유혹한다.
그리고 이런 우연이 어쩌다 일어난 일이 아닌 필연적인 일임을 끊임없이 주입하지만, 그 끝은 결국 현실로 돌아오는 것으로 맺는다.
우연히 일어난 극적인 상황들을 극복하고 다시 우연적인 상황들을 거쳐 현실복귀가 이루어지기 위한 과정에서 우연은 결국 필연으로 변모하는 셈이다.
그리고 모든 문제들에서 벗어나 결국 현실로 돌아오는 결론은, 보는 이들에게 현실의 안온함과 일상의 축복을 느끼게 한다는 것은 과장일까?
몽골소녀 푸지에와의 만남은 우연에 가깝고 우리는 이 만남을 통해 한 소녀의 삶과 변화하는 몽골의 현재를 들여다 보게 된다.
정해진 극본이 없는, 다큐멘터리와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극적인 푸지에의 삶에서 불행을 포함한 우연들은 결국 필연이었을까?
어떤 각본보다도 더 극적인 현실귀환에 앞서 감독은 계속 우리에게 묻고 싶었던 듯하다. (이봉욱)

-수상내역
2007 EIDF 대상
2006 [키네마 준보] 선정 3위 영화 랭크

-감독소개
Yamada Kazuya 야마다 카즈야
1954년 일본 고치현 출생. 도쿄농경대학을 졸업했다. 템플대학 예술학부에 입학해 방송과 영화를 공부했으나 도중에 그만 두었다.
니혼 TV의 계약 감독으로 일했으며, 현재 프리랜서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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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잊지 않을거야 | 구름의 저편 2008-10-30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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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늘한 바람에서 찬바람이 불어올 이때가 적기여서일까.
이제야 개봉하는군.
☞ 너를 잊지 않을 거야

 


 

연초, 그(고 이수현)의 7주기 즈음에, 그를 떠올리며

영화는 왜 개봉 안 하냐고 궁시렁

거렸더니,

메아리 한번 늦게도 울린다.
그의 기일에 맞추는 것이 그래도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들어도,
그거야 내 소관은 아닌 게지.
유족들과도 얘기를 했겠지.

다만,
누군가에게,
2001년 1월26일은 결코 잊지 못할 날일테고,
그날을 기점으로 'Before'와 'After'의 확연히, 너무나도 다른 세계일 것이다.
어쩌면 버티고 견딜 수 밖에 없을, 그 After.

다시 한번, 이수현의 명복을 빈다.
영화 개봉으로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그가 들어서는 것은 좋은 일이겠으나,
다시 한번 마음의 무덤 속에서,
그를 끄집어내야 할 어떤 사람들이 상기해야 할 아픔도, 나는 떠올린다.

[한뼘] 이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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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남성들의 혼을 뺏은 마음스파이, 마타 하리(Mata Hari) | 바람구두 이야기 2008-10-28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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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남성들의 혼을 뺏은 마음스파이, 마타 하리(Mata Hari)
(1876.8.7~1917.10.15)

 

여기, 세상을 흔든, 특히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을 들끓게 한 여인이,
1917년 10월15일 파리 교외 반센느 둑에서 사형 집행현장에 있습니다.
알몸인 채 눈가리개도 거부한 그는, 12명의 사수 앞에 섰습니다.
프랑스와 독일을 오가며 이중간첩노릇을 해, 프랑스군 5만명을 위험에 빠뜨렸다는 것이 사형집행의 이유.
총성이 울립니다. 피가 튀고, 당당했던 고개가 푹 숙여집니다.
채 마흔 살이 되지 않은 나이, 파란만장했던 '태양'(마타하리는 태양이란 뜻의 말레이어)이 지상에서 빛을 잃는 순간입니다.


그 사람, '마타 하리'.
본명은 마가레타(Margaretha Geertruida Macleod), 결혼 전 성은 젤러(Zelle)입니다.
무희이자 고급 창녀가 직업이었지만, 이면에서 '첩보수집과 유통'을 했던 사람.
훤칠한 몸매와 미모가 뛰어난 데다 매력적이어서 뭇남성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던 사람.
그 뛰어난 외모 덕인지, 많은 애인이 있었고, 대부분 장교였습니다.
아마도 스파이노릇을 위한 방편이면서도, 때론 사랑에 빠졌겠지요.


마타 하리 이름 앞에는 '팜므 파탈' '요부' '(이중)스파이' 등 다양한 수식어가 붙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그에 대해 대중적으로 알려진 모든 것이죠.
실상 그가 했다는 첩보활동의 성격과 범위는 아직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한 자료는 1916년 봄, 독일 영사가 그에게 프랑스 여행을 하는 동안, 어떤 정보라도 얻어오면 돈을 주겠다고 제의했다고 했다고 하고,
1917년 프랑스군에 체포된 뒤 몇몇 낡은 정보를 독일에게 제공했다고 인정하고,
앞서 독일 점령하의 벨기에에서 프랑스 스파이로 활동하는 데 동의한 적이 있었다고 진술하긴 했지만요.

마타 하리는 주체적인 여성이었습니다.
남성들에게 포획되지 않고 자신의 무기를 활용해 남성들을 움직였습니다.
부유한 모자상인의 영애로 네덜란드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1895년 네덜란드 장교와 결혼해 인도네시아로 건너가 아이 둘을 낳았지만,
1901년 이혼을 겪었습니다.
빈털터리로 유럽에 돌아온 그가 가진 것은, 아름다운 육체와 뛰어난 춤 솜씨였습니다.
물랭루주에서 무희로서 인도네시아의 발리댄스를 자극적인 몸놀림으로 선보이자,
(그는 대중 앞에서도 나체 출연을 하는 등 파격적인 '쇼'를 펼치기도 했다지요)
남성들은 이국적 매력 앞에 열광했습니다.
그의 춤은 파리의 유행이 됐고, 유럽의 대도시에서도 그는 이름을 떨쳤습니다.
상류사회에 드나들었고, 고위권력층들을 상대했다죠.
그가 의도했건 그렇지 않건,
이런 환경은 그가 스파이 혐의활동을 할 수 있었던 배경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여담이지만,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군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핀업걸이 바로 마타하리였다고 전해질 정도입니다. 유럽(남성들)은 그의 매력에 푹 빠져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전쟁이 마타 하리의 발목을 잡은 셈이 됐습니다.
아름다운 무희에게 찬사를 보내고 황홀경에 빠졌던 남성들은,
전쟁이라는 현실 앞에선 책임을 전가할 누군가가 필요했고,
마타 하리는 적절한 타깃이 됐습니다.
모름지기 적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내부스캔들은 치명적입니다. 
남성들은 자신들의 치부를 감추고, 자리 보전을 위해 희생양이 필요했겠죠.
그의 혐의를 조사하면서 거물급 인사들이 줄줄이 연계될 조짐을 보이자,
재판을 통해 일사천리로 사형을 결정짓고 집행했습니다. 전시상황을 핑계로.
마타 하리가 중요한 군사정보를 독일에 넘겼다는 증거도 없었음에도 말입니다.
어쩌면 남성들은 그가 다른 남성들의 마음까지도 훔쳤다는 점에서,
그를 스파이로 규정한 것, 아닐까요.
자신이 소유할 수 없기에, 자신에게만 마음을 주지 않았기에,
지질하게도, 차라리 그를 죽음으로 내몬.

한편 지난 1931년 전설적인 배우, 그레타 가르보가 마타 하리로 분한 <마타 하리>가, 1985년에는 실비아 크리스텔 주연의 <마타 하리>가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참고자료 : 두산대백과사전, 주간한국 '역사속 여성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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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며 살았고 후회 없이 노래하다,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 | 구름의 저편 2008-10-28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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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며 살았고 후회 없이 노래하다,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
(1915.12.19 ~ 1963.10.11)


국민가수. 아무에게나 붙일 수 있는 타이틀,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경우, 조용필 정도의 가수에게 붙일 수 있는 최고의 찬사 중 하나입니다.
어디 프랑스라고, 국민가수 없겠습니까. 여기, 이 사람이 그 주인공입니다.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

그런 피아프의 생애를 그린 지난해 개봉했던 영화,
<라비앙 로즈>도 혹시 보셨는지 모르겠네요.
배우 마리옹 코티아르가 피아프를 열연,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타기도 했죠.

피아프의 삶은 여러모로 극적이었습니다.
천재예술가가 짊어진 굴레가 그런 것처럼, 그 역시 굴곡진 삶을 살았는데요.
태어날 때부터 예사롭지 않아요. 
산기가 있어 자선병원으로 가던 어머니가 파리의 노동자 거리인 '벨베이르' 길 한복판에서 그를 낳았습니다. 경관이 그를 받았고, 빈민촌의 주민들이 구경하는 대낮이었습니다.
그때는 '에디트 조반나 가시옹'이라는 이름이었습니다.
시련은 그러나 곧 시작됩니다. 거리의 가수였던 어머니가 그를 버렸습니다.
외할머니, 할머니 손을 거쳐, 서커스 단의 곡예사었던 아버지와의 떠돌이 생활.
그러나 결국은 매춘부 소굴에 버려져야 했던 아픔.
다만 유일한 위안과 재능은 타고난 목소리였습니다.
오직 그 목소리와 14세에 만난 친구 모르몬이 외로운 그를 구원했지요.
노래를 부르면서 모르몬과 서로 의지하며 살던 그는 16세에 배달사환이었던 루이 듀퐁과 사랑에 빠져 이듬해 딸 마르셀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 2살 무렵 수막염으로 죽고 마는 비극.
다음 남자친구는 하필 또 포주였어요.
몸을 팔지 않기 위해 노래를 불러 번 돈을 그에게 상납해야 했던 소녀의 마음,
어때요, 헤아려지나요?

피아프에겐 역시 노래 밖에 없는 듯 보였지요.
에뜨또 광장 옆 트르와이용 거리에서 노래하던 18세의 그를 눈여겨 본 '쟈니스 카바레'의 지배인 루이 르플레 덕에 처음 무대에 올랐어요.
그것이 바로 프랑스의 국민가수, 피아프의 본격적인 시작이었지요.
그때 루이가 그에게 준 새로운 이름이 '라 모메 피아프'(La Mome Piaf).
147cm에 불과한 그의 키를 고려해 파리 방언으로 '작은 참새' 혹은 '아기 참새'를 의미하는 이름을 붙여준 거죠. 루이는 피아프에게 기본 무대 매너를 가르치고 이후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검은 드레스를 입도록 조언하는 등 피아프의 음악적 아버지 역할을 했어요.
그러나 루이가 폭력조직에 살해당했고, 시인이자 소설가, 작사가, 가수인 레이몽 아소가 피아프의 재기를 도우면서 새롭게 이름이 내세운 것이 '에디트 피아프'였습니다.

여하튼 쟈니스에서의 성공적인 데뷔 이후 피아프는 파리 전체에 화제인물로 떠올랐습니다. 
솟아오른 인기와 부에, 당연히 따르는 것은 애정사.
그의 숱한 애정사 가운데 이브 몽탕과의 연애도 한페이지를 장식합니다.
연하인 이브 몽탕을 발굴해 키워주고 직접 데뷔까지 시키는 헌신적인 애정을 쏟았지만,
(몽탕과의 사랑이 빚어낸 곡이 그 유명한 '라비앙 로즈'(La Vie En Rose, 장밋빛 인생)'입니다) 몽탕은 그에게 등을 돌리고 다른 연인을 찾아 갔지요.

피아프에게 사랑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어요.
무엇보다 권투선수이자 미들급 세계챔피언이었던 막셀 세르당과의 사랑은 애절하기로 유명합니다. 다른 여자와 결혼한 상태의 세르당이었지만, 끌림과 매혹을 저지할 순 없었죠.
미국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세르당이 프랑스로 돌아가면서 잠시 떨어져 있게 되는데,
그 기간 주고받은 편지는 책으로 나왔을 정도였어요.
하지만, 그 사랑에도 비극이 닥칩니다.
1949년 미국에서 시합이 잡힌 세르당을 빨리 자신의 곁에 오라고 재촉한 피아프의 부탁이 화근이었습니다. 비행기 추락 사고로 세르당은 세상을, 피아프 곁을 떠나고야 맙니다. 
그렇게 떠난 연인 세르당을 위해 피아프가 가사를 쓰고 부른 것이 '사랑의 찬가'이고요,
이 사랑을 다룬 것이 클로드 를르슈 감독의 <에디프 피아프의 사랑>(Edith Et Marcel, 1983)이었지요. 세르당 역을 그의 친아들이자 복서인 막셀 세르당 주니어가 맡기도 했고요.

그리고 이어진 연애사와 두 번의 결혼이 있었는데요,
그 와중에도 음악 뿐 아니라 술, 마약, 자살미수, 교통사고 등이 함께 했고,
영양실조, 모르핀 중독, 결핵, 간염, 관절염, 암 등 수십 가지 질병도 피아프를 따랐습니다.
1962년 21살 연하의 데오 사라포와 결혼했지만,
소화기 계통의 출혈이 심해 요양소 생활을 했고 이듬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지막까지 그를 지켜주던 사람은 사라포였다는군요.

타고난 목소리에 피할 수 없는 삶의 비극이 삼투하면서 애끓는 노래를 잉태했던 국민가수,
피아프는 사실 당최 종잡기 힘든 이였습니다.
자신이 낳은 아이보다 새로운 연인이 더 좋다며, 자신이 어릴 적 그렇게 당했으면서도, 자신의 아이를 버렸고,
미래의 사랑을 위해 오래 살아야 한다며 전쟁의 참상을 외면했으며,
노래로도 어쩔 수 없었던 비극을 잊으려고 끝맺지 못할 뜨개질을 하던.
무대에서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관객을 압도했으나,
무대 뒤에서는 외로움과 비극으로 점철된 발걸음으로 완벽한 사랑을 찾아 헤맸던 사람.
오죽하면, 그는 "나는 나 자신을 망치고자 하는 불가항력적인 욕망을 지녔다"고 말하기도 했을까.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의 지은이, 실뱅 레네는 피아프에 대해 이렇게 묘사합니다.
"초라한 검은 옷을 입은 자그마한 여자, 가녀린 어깨 위에 무거운 듯한 머리,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품고 있는 듯한 깊은 눈길, 누군가를 껴안으려는 듯 벌린 두 팔."

 

 

그렇다고 피아프를 동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그는 늘 사랑하면서 살았고, 후회없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샹송의 여왕, 신이 내린 목소리, 불멸의 프랑스 목소리라는 타이틀이 그의 음악적 성취를 대변한다면,
그를 파산에서 건져낸 1961년 올림피아 콘서트에서 처음 공개했고,
<파니 핑크>의 메인 테마이자, <몽상가들>에서 엔딩을 장식한 이 노래,
'후회하지 않아(Non Je Ne Regrette Rien)'는 그의 삶을 요약하는 것 같습니다.
"…아니에요, 그 아무 것도 아니에요.
난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나의 삶, 나의 기쁨이 오늘 그대와 함께 시작되거든요…"
 
검은 옷을 입고 노래하다 죽는 것이 소원이었던 여인, 에디트 피아프도 10월에 눈 감았습니다. 갑자기 어디에서 이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인지 궁금한 그 계절에 말이에요.

(※ 참고자료 :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 (실뱅 레네 지음 / 신이현 역 / 이마고 펴냄), 위키백과, 씨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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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웃고 운 과학의 제왕, 마리 퀴리(Marie Curie) | 구름의 저편 2008-10-28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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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웃고 운 과학의 제왕, 마리 퀴리(Marie Curie)
(1867.11.7 ~ 1934.7.4)


매우 유명한 양반이죠.
그 이름을 듣거나 보면 떠오르는 건, 역시나 폴로늄과 라듐, 혹은 노벨물리학상(1903)과 노벨화학상(1911). 1번도 어렵다는 노벨상을 두 번이나 탔던 과학자.
 
분할 지배하의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던 그의 본명은 'Maria Skłodowska'입니다.
제정 러시아의 지배하에 있던 어린 시절, 10세 어머니를 잃은 그는 17세 무렵 가정교사 등을 하면서 독학하는 과정도 겪었습니다. 마냥 쉽지많은 않은 유년이었죠.
대학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하면서 그의 과학적 재능은 본격 꽃을 피웠습니다.
물론 그의 과학적 업적은, 1895년 결혼한 남편, 피에르 퀴리와의 공동 연구에서 비롯됐지요.

남편과 함께 방사능 연구에 나선 그는 방사능이 원자 자체의 성질이라는 것을 알아내면서,
1898년 7월 조국 폴란드의 이름을 딴 폴로늄을, 같은 해 12월 라듐을 발견했습니다.
이는 방사성원소로서 발견된 최초의 것으로,
라듐은 우라늄보다 훨씬 강한 방사능을 가진다는 점에서 중요한 발견이었죠. 
또 방사성물질에 대한 학계의 관심을 불러일으켜, 새 방사성원소를 탐구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아울러 1903년 노벨물리학상을 받게 한 업적이었죠.
 
하지만 마리에게도 사랑의 위기가 닥칩니다.
이들 부부는 남부러울 것 없는 행복함을 누리는 듯 했지요. 연구나 명예, 부, 가정생활 어느 하나 부족함이 없는 듯 했죠.
그러나 1906년 5월 7일, 피에르가 짐마차의 바퀴에 머리가 깔려 즉사했습니다.
서른아홉의 마리에게 닥쳤던 시련 앞에 비통에 빠진 마리가 몰두한 것은, 역시나 연구.
피에르의 후임으로 소르본 대학의 교수(여성으로는 최초였다죠)가 됐고, 방사성물질을 계속 연구했습니다.

이젠 위인전에는 잘 나오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11년을 함께 했던 피에르의 빈자리가 커서였을까요.
물론 꼭 그것만은 아니었겠지만,
마리는 두 번째 노벨(화학)상을 받기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스캔들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노벨상에 대한 칭송은커녕 많은 비난을 받아야만 했던.

마리는 피에르의 제자였던 폴 랑주뱅과 사랑에 빠졌는데요,
문제는 폴이 유부남이었다는 거죠.
마리는 폴에게 적극적이었고, 결국 폴의 부인이 이 사실을 알게 됐지만,
마리는 "끝까지 기다릴게요...내게로 돌아와 줘요"라는 편지까지 보내며 애정을 보였습니다.
어쩌다 이 편지가 폴의 부인을 통해 일간지 '뢰브르'에 공개, 문제는 일파만파가 됐죠.

마리는 사랑을 위해서라면 수상이 유력한 노벨상도 포기할 수 있다고 했다지만,

폴은 비난을 이기지 못하고 부인에게 돌아갔다죠. 그들의 사랑은 여기서 끝나고 말았고.
그는 결국 두 번째 노벨상을 탔지만, 어쩌면 상처뿐인 영광이었죠.
왕립과학아카데미에서도 노벨상 수상 여부를 다시 숙고할 정도였는데,
그 업적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세상의 영예와 비난을 모두 맞본 마리였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의 연구와 과학적 성과를 지속한 건, 피에르나 폴과의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그랬기에 그는 노벨상을 포기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랑에 솔직 당당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세상의 율법보다 자신의 마음의 소리에 더욱 충실했던.

어쨌든 마리는 퀴리실험소의 소장으로서 프랑스의 과학 연구에 공헌했고, 백혈병으로 사망한 지 61년 만인 1995년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역대 위인들이 안장된 파리 팡테옹 신전으로 이장되는 사후 영광도 누렸습니다.
저는 세상의 율법을 거부한 사랑의 만신전에 그를 올려놓고 싶은데, 당신은 어떠세요?


P.S... 마리가 1921년 열렬한 환대 속에 미국을 다녀온 뒤 언니에게 한 이 말, 왠지 짠합니다.
 "난 살아오면서 너무 많은 고생을 해서 더 이상 남은 고생이 없어. 이젠 진짜 재난이 닥쳐야 느낌이 올 거야. 나는 체념이 뭔지 알게 되었고, 일상의 회색 속에서 작은 기쁨 몇 개를 발견하려 노력해…"

어쩌면 우리는 '마리 퀴리'라는 이름에, 노벨상이라는 엄청난 명예에 가려,
그를 제대로 알지도 보지도 못한 건, 아닐런지...

(※ 참고 : 『퀴리가문』(데니스 브라이언 지음ㆍ전대호 옮김/지식의 숲 펴냄), 두산백과사전, LJ비뇨기과 칼럼 '남편의 제자와 밀애를 나눈 퀴리 부인')

 

위민넷 - 키위, 여성을 말하다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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