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블로그 | 랜덤블로그 쪽지
외로워도, 그걸 친구 삼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하여, 밤 9시의 커피
http://blog.yes24.com/jslyd012
리스트 | RSS
태그 & 테마링 | 방명록
밤9시의커피
세상엔 살펴보면 외로움을 달래주는 것들이 몇 개 있는데, 나한텐 밤 9시의 커피가 그 중 하난거 같아. 이 어메이징한 커피, 밤 9시의 커피야! 난 이렇게 멋진 커피를 마셔본 적이 없어. 이게 내 대답이야.
파워 문화 블로그

PowerCultureBlog with YES24 Since 2010

1·2·3기 영화

6·7·8기 대중문화

프로필 쪽지 친구추가
9월 스타지수 : 별5,307
댓글알리미 비글 : 사용안함
전체보기
My Own Coffeestory
밤9시의 커피
그녀에 빠지다 그 커피
366 Diary
너 없이 산다
너 때문에 산다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
함께 살자!(공유와 공동체)
시네마가 있는 풍경
바람구두 이야기
내 여친 소개받을텨?
나의 리뷰
북카페
시네마카페
카페 놀멘놀멘
사랑
자본주의
교육
나의 메모
한뼘 이야기
투덜이
태그
갈가요 노래가삶을지탱하고사랑을유지하다 걷는듯천천히 좋은사람이되고싶다는생각을갖게만드는커피를내리는사람이나였으면 KTX승무원들에대한빚 첫번째첫사랑이안겨준선물 낭만불가 쿠바커피연수보내주시오 쿠바협동조합연수도좋아 혁명보다뜨겁고천국보다낯선쿠바
2010 / 07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월별보기
새로운 글
나의 친구
나의 친구들
우연의 만남

2010-07 의 전체보기
곡성, 몽유 | 바람구두 이야기 2010-07-31 22:24
http://blog.yes24.com/document/2452865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곡성.
내가 들고 가는 저것은 무엇이었을까.

몽유(夢遊)라도 한 기분.
안빈낙도()를 꿈꾸었을지도.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즐겨 지킴.

내 가난한 영혼을 들고 가던 것은 아녔을까.
내 영혼의 무게는 어느 정도였을까.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0) 트랙백(0)
이 포스트를 | 추천 2        
지금, 말 못하는 우리는 정은임이 그립습니다 | 구름의 저편 2010-07-30 23:57
http://blog.yes24.com/document/2450451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정은임, 정든님.

지금, 입을 봉쇄당하고, 생각을 통제당하고 있는 우리.
그래서, 당신이 더욱 그립습니다.

6년이 흘렀습니다.
다시 여름이며, 다시 8월4일이 옵니다.

정은임을 기억하는, 정영음을 추억하는,
그의 목소리에 교감하고 그의 마음에 공명했던,
당신의 작고 사소한 참여를 기다립니다.

당신과 나는, 그렇게 우리입니다.
정든님 정은임을 생각하는 우리입니다.
당신의 작은 참여, 기다립니다. ^^
 
은임 누나는,
제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 사람입니다.
그런 누나이기에, 일년에 한 번이지만,
나는 그 하루를 누나를 그리워하면서 보냅니다.
 
 


 

 지금, 말 못하는 우리는 정은임이 그립습니다
8월4일 아름다운가게 동숭동헌책방서 제6회 정은임아나운서 추모바자회 개최
 

한 사람이 있었다. 이 사회와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을 생각하고, 그것을 영화로 풀어내며 음악을 들려주던 목소리를 가진 사람. 그 어느 날 새벽, 100여일을 고공 트레인 위에서 홀로 싸우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이야기를 전하던 그 목소리. 조용히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은 쉽게 그 외로움을 투정하지 않는다며, 외롭다는 말을 아껴야겠다고 말하던 사람. 그리고 이 세상에 겨우 겨우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우리들에게 혼자가 아님을 알려준 사람이다.
 
그 사람, 정은임 아나운서다. 말 못하고 숨죽이며 살아야 하는 지금, 그 사람의 당당하면서도 따듯한 한 마디가 그리워진다. 하지만, 지금 그 사람은 없다. 지난 6년여 전, 불의의 교통사고로 우리 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사람을, 그 목소리를 기억하는 아름다운 하루가 열린다.

정은임 아나운서를 기억하는 팬들이 다음달 4일(화), 아름다운가게 동숭동헌책방에서 제6회 추모바자회를 연다. 8월4일은 정 아나운서의 기일로, 추모바자회는 ‘정은임 아나운서 팬페이지’(www.worldost.com)가 ‘아름다운가게’(www.beautifulstore.org) 등과 함께 열고 있는 행사다. 매년 기일에 맞춰 ‘정은임 아나운서를 기억하는 사람들과 아름다운가게가 함께하는 아름다운 하루’라는 제목으로 열리고 있다.

바자회는 정은임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기부와 참여로 이뤄진다. 행사 당일 아름다운가게에 모여 봉사활동과 수집된 물품을 판매한다. 누구나 자발적으로 참여 가능하다. 수익금은 아름다운가게에 전액 기부하고 있다. 이번 행사에는 공정무역 커피회사 카페 티모르(www.cafetimor.com)도 커피 등을 통해 행사에 참여한다.

지난 1회 바자회 수익금 전액(200만원, 특별후원금 70만원 포함)은 아름다운가게 수해지원금에 포함됐으며 2회 때는 바자회 행사와 추모영상회를 가져 바자회 수익금 전액(182만7천원)은 아름다운가게 수익나눔성금으로 활용됐다. 3회(136만2천원), 4회(155만4450원) 5회(187만2010원) 바자회 수익금 전액은 아름다운가게 수익나눔 성금에 보태졌다.

추모바자회에 물품을 보내고자 하는 사람은 아름다운가게 대표번호(1577-1113)로 전화하면 무료택배(기증량 1~2상자)를 이용할 수 있다. 물품을 보낼 경우, 아름다운가게 동숭동헌책방(서울 종로구 동숭동 1-139 지하1층, 02-765-6004)으로 보내면 된다. 단, 보낼 때 [정은임 아나운서 동숭동헌책방 행사물품]이라고 써야 한다. 기증방법이나 기증받지 못하는 품목 등에 대해서는 관련사이트(http://www.beautifulstore.org/Join/Giving/Process.aspx)를 참조하면 된다.

추모바자회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정대철 씨는 “추모바자회는 정은임 아나운서가 팬들에게 남긴 마지막 선물로 올해도 기일에 맞춰 추모바자회를 열게 됐다”며 “정은임 아나운서를 기억하고 사랑하는 많은 분들의 참여를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다음은 6주기 추모행사 내용이다.

1. 행사일 : 2010년 8월4일 수요일
2. 행사장소 : 아름다운가게 동숭동헌책방 (서울 종로구 동숭동 1-139 지하1층)
   약도 :
http://www.beautifulstore.org/AgaOrg/GetInfo.aspx?SerialNo=1000000134
3. 아름다운가게 기증 방법 : http://www.beautifulstore.org/Join/Giving/Process.aspx

관련사이트
http://www.worldost.com  정은임 추모 사업회
http://www.cyworld.com/bastian2004  정은임 미니홈피

 

 

 

그리하여 다시 정은임,

 

다시 정은임, 당신은 우리의 '촛불'입니다...

 

4일 정은임 추모바자회에서 추억을 함께 나누길...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1) 트랙백(1)
이 포스트를 | 추천 1        
갓퐈더, 브란도 형님, 잘 계시오? | 시네마카페 2010-07-29 23:01
http://blog.yes24.com/document/2448055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영화]대부 (디지털)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미국 | 2010년 05월

영화     구매하기

그, 빠바바바 바 바바, 빠바바바 바 바바... 하고 사운드가 기어나올 때,
나는 이미 넉다운이었다. 이런 감격이 있나, 허. 눈물까지, 시큼.

<대부>를 필름으로 첫 대면하는 그 순간.
이제야 필름 스크린으로 알현하게 된 송구스러움도 꾸물거리고,
지금에라도 필름으로 대면할 수 있게 됐다는 뿌듯함도 꿈틀대고,
아, 그 때 그 순간의 느낌을 글로 표현하기엔 내 필력이 딸릴 뿐. 띠바.

<대부>가 고전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렇게 보고 또 봐도, 여전히 새롭고 흥미진진하기 때문이 아닐까.
이 빌어먹을 가족 서사는 지금에서도 충분히 현실을 향한 사유를 가능케한다.
하긴 어느 시대에든, 이 서사가 사유와 흥분을 멈추게 할 리는 없지.


아울러, 말론 브란도가 아닌 돈 콜레오네는 상상 불가능.
나의 상상력이 부족한 탓이라고 탓해도 어쩔 수가 없다. 된장.

그가 떠난지 6년.
그의 마지막이 어땠는지 모르지만,
돈 콜레오네가 쓰러질 때의 모습과 오버랩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러니까, <대부>에선, 시쳇말로, 브란도의 미친 존재감!이 작렬한다.

말론 브란도를 그렸다.
지난 1일이 6주기였다. 아래 기고문은 그래서 나왔다.

p.s. 지난 5월에 개봉한 <대부> '디지털 리마스터링' 버전은,
아직 극장(씨네코드 선재)에 걸려있다. 놓치지 않길 권한다.
특히, 필름으로 아직 <대부>를 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아니면, 오는 30일 팡파레를 울리는,
서울아트시네마의 2010 시네바캉스 서울!

그 바캉스 시즌에 <대부>가 역시 껴 있다는 즐거운 소식.
8월8일(일) 김영진 평론가의 씨네토크와 함께 펼쳐지는 <대부> 박항스~
13:00다. 엔간하면 가야지, 생각하고 있다. 혹시 만나면 가벼운 눈인사라도. ^^


 


 

말론 브란도, 아버지였지만 아버지를 부정한 이름
예술이 지녀야 할 자세에 대하여



지난 5월 <대부>가 재개봉했다. 국내 개봉이 1977년(미국은 1972년)이니, 33년 만이다. ‘디지털 리마스터링’한 이번 버전은, 향수와 함께 바뀐 세대의 스크린 경험을 위한 것이겠다. 그러니,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있나. <대부>는 그렇게 다시 왔다.


스크린을 통해 처음 만난 <대부>는 위엄 있고, 웅장했다. 경건함과 비장미까지 갖춘 고전적 서사의 재등장이었다. <대부>에 대한 개인적인 애정을 감안한다면, 이는 후광효과에 기댄 감상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다. <대부>는 표피만 놓고 보자면, 마피아 협잡극에 불과하니 말이다. 물론, 이것은 <대부>의 진짜 가치를 모르는 오해가 되겠다. 마피아로 포장됐을 뿐, <대부>는 당시 1970년대 시대상황과 연관된 문화적 산물이자 서사였다.

마리아 푸조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대부>는,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영화로 우선 각인돼 있다. 재능 있는 신예 감독에서 이 영화로 거장 대열로 성큼 올라선 코폴라의 연출력이 <대부>를 만신전에 올려놓은 일등 공신이다. 마피아 세계를 그들만의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인류학적으로, 뭣보다 누구도 자유롭기 힘든 가족서사로 <대부>는 여전히 우리의 폐부를 찌른다.


돈 콜레오네였던 사나이


그 핵심에, ‘돈(비토) 콜레오네’가 있다. 가족과 패밀리의 질서를 확립한( 것처럼 오해받는) 가부장, 돈은 <대부>의 핵심이다. 그것은, 또한 말론 브란도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한때 제임스 딘도 선망했던 메소드 연기의 달인이었던 그는, 당시 전성기가 지난 처지로, 제작사는 그의 캐스팅을 극구 반대했다. 코폴라의 고집이 위대한 <대부>를 만들어냈지만, 돈을 스크린에 현현시킨 것은 전적으로 브란도의 공이었다.


여기, <대부> 카메라 테스트에서의 일화. 브란도는 구두약을 머리에 발라, 비토의 헤어스타일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소설 속 인물이 불도그 같이 생겼으니, 화장지를 입안 양쪽 볼에 집어넣었다. 늙은 얼굴과 염색, 어눌한 말투까지 곁들여 우리가 아는 비토, 대부는 창조됐다. 그가 어떻게 연기를 하는지, 메소드 연기의 달인이라는 별칭이 왜 붙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다.

한편으로 브란도가 비토를 맡은 것은 아이러니다. 현실이나 스크린에서 그는 아버지를 거부하고, 아버지의 질서에 저항한 인물이었다. 젊은 시절 그의 연기는 노동자 계급의 것에 가까웠다. 앞선 남자 배우들이 도덕군자와 정의의 사나이에 붙박인 캐릭터를 연기했다면, 그는 달랐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로 주목받은 그는 <비바 자파타> <워터 프론트> <아가씨와 건달들> 등을 통해 소외계층을 대변하는 반영웅으로 각인됐다. 그는 당대 미국의 변화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1950~60년대 젊은 미국에게 어울리는 배우였다.


침체기였다고는 하나, 그런 반영웅이 선택한 <대부>는 의외였다. 말하자면, 돈 콜레오네는 가부장의 화신이다. “내 말이 곧 법”인 마피아의 절대군주로, 모든 질서를 관장하는 절대자 아버지. 세월에 굴복한 것일까, 그도 늙은 것일까. 아버지가 만든 기성의 규율에 반항하고, 투쟁했던 그가 전성기 이후에 택한 배역이 아버지라니.


버르장머리 없는 거친 짐승 같은 그가 한 순간에 바뀔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대부>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자가 됐지만, ‘할리우드의 인디언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이유로, 그 항의의 표시로 수상을 거부했다. 그의 반항 기질과 퇴폐적인 매력은 불혹의 나이에도 어딜 가지 않았다. 그 안에 내재된 짐승을 어찌하겠는가.


파리에서의 한 가지 표정, 브란도


<대부>의 선택이 아버지의 규율에 편입하기 위한 수순은 아니었다. 브란도의 다음 선택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였다. 그의 표정은 180도 달라졌다. 도시의 무감과 삶의 비루함을 담은 얼굴. 부성의 체화가 불러온 반발이었을까. 신랄하고 퇴폐적인 폴로 변신한 브란도의 무기력한 정사가 이어졌다.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는’ 잔느(마리아 슈나이더)와 정사를 나누면서 그는 외친다. “네 이름을 알고 싶지 않아! 너도 이름이 없고 나도 이름이 없어. 우리는 모든 것을 잊는 거야.” 세상에 지치고 모든 것을 잊고 싶은 아노미 상태에 빠진 폴에게 이름과 과거는 거부하고 싶은 무엇이었나 보다.

한 편으로 그것은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허무가 감싼 폴의 얼굴. 그것은 또한 브란도의 것이었다. 메소드 연기의 진수를 보여준 그의 증명이었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는 개봉 즉시 논란이 됐다. 파격적인 내용과 정사신 등으로 사람들의 입에 회자됐다. 그것은 많은 것을 담고 있었던 폴의 표정 때문이기도 했다. 한 마디로 표현하기 힘든 그 표정. 그 표정은, 1970년대의 어떤 풍경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것도 프랑스 파리.


혁명의 시대가 지났거나, 실패로 끝난 혁명 때문이었을까. 그의 얼굴에 남은 흔적은, 곧 당대 사람들이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던 표정이었는지도 모른다. 홀연히 끝난 혁명의 공허함과 목표를 잃은 도시의 욕망이 교차했던 그 표정. 이름도 성도 모르는 여성과의 섹스도 탈출구가 되지 못함을 사람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랬다. 녹슨 해방구만 남았고, 파멸을 친구 삼아야했던 처연한 고독과 적나라한 쓸쓸함만이 나부꼈다고.

내가 가장 강렬하게 파리에 가고 싶다고 느꼈던 때는, 이 영화를 보고 난 직후였다. 파리지앵의 우아한 라이프 스타일이나 자취 때문이 아니었다. 68혁명의 도시를 가고 싶다는 욕구도 아니었다. 숱한 사상과 혁명을 잉태했던 커피하우스에서 향미를 맡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나는 폴의 표정을 잉태한 파리가 궁금했다. 말하자면, 말론 브란도가 나를 유혹했다. 어떻게 그런 표정이 나올 수 있지. 파리에 가면 저런 표정이 나올 수 있을까. 물론 안다. 그건 브란도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더 이상 배역과 한 몸이 되고 표정으로 말하는 ‘말론 브란도’를 볼 순 없다. 6년 전, 2004년 7월1일, 향년 80세, 그는 영욕의 세월을 접었다. 무명 시절, 돈을 벌려고 로데오경기에 참여했다가 코가 부러지면서 매부리코를 얻었던 그는, 깔끔하고 정갈한 꽃미남이라기보다 반항을 일삼는 터프가이였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아버지의 시대를 열어젖혔을 때도, 그는 쉽게 투항하진 않았다.


그것은 예술의 자세였다. 연기에 대해 늘 회의했고, 영화배우라는 직업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며 불평했지만, 그는 연기했고, 천생 배우였다. 오직 하나였던 배우. 그 ‘하나’가 지닌 모든 것은, 세상의 모든 아버지처럼 죽었다. 아버지라는 권위에 도전하고 투쟁하는 일. 그럼으로써 자신만의 이름을 가지는 일. 그것이 버르장머리 없는 반항아의 파괴적인 일탈일지라도 시도해보자. 예술 안에서 당신안의 짐승을 깨워보자.

[문화예술 크리틱 저널 - 뷰즈 7·8월호 기고]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0) 트랙백(0)
이 리뷰를 | 추천 1        
여름아, 난 니가 좋아~ | 바람구두 이야기 2010-07-27 18:15
http://blog.yes24.com/document/2443667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여름이.
물론, 기대하듯(으응? 누가?) 녀자 이름, 아니다. ㅠ.ㅠ

말 그대로 이 후끈후끈 계절, 여름.
나, 녀름이 확실히 오면 심장이 둑흔둑흔.
 
왜냐고. 하악하악.
내가 뭐라카면, 보나마나 뵨태 취급할테니,
김훈 작가가 여름을 찬미한 글에 살짝 기대리라.
(뭐, 그래도 내게 돌아올 화살은 똑같이 뵨태겠다만!)

역시, 녀름은 노출하고 볼 일. (나의 노출은 민폐임을 알지만!)
아, 알흠다워라. 녀름. 난, 녀름 없는 곳에선 못 살아!
내 눈이 호강하고, 마음이 므흣하고, 심장이 하악하악.
(침은 질질 안 흘리니까, 꺽정 마!)

말하자면, 내가 여름을 좋아하는 이유(중의 하나)!
초큼 오버한다 싶은 것(나라의 미래, 나라의 힘, 겨레의 기쁨 등)도 있지만,
그 정도는 뭐, 애교로! ㅎㅎ

출처 : 씨네21

"노출이 대담한 여름 여자를 볼 때마다 나는 내가 그 여자의 옷을 보고 있는지 몸을 보고 있는지 혼란에 빠진다. 그리고 그 혼란은 온갖 정의로운 담론들이 아우성치는 이 황폐한 도시에서 밥벌이를 해야 하는 나의, 그나마 즐거움이다...(중략)  

...진보적 자유나 보수적 진실을 절규하는 신문 칼럼을 읽을 때가 아니라, 노출이 대담한 젊은 여자가 그의 젊은 애인의 허리를 부둥켜안고 활보하는 모습을 볼 때, 나는 이 나라의 미래에 안도감을 느낀다. 여름 여자들의 그 손바닥만한 탱크톱과 핫팬티, 그리고 그 밖으로 드러난 팔다리 사이에서 나는 흔히 아득함을 느낀다...

나는 우리나라 여자들이 다들 예쁘고 다들 주눅 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젊은 여자들의 성적 매력은 나라의 힘이고 겨레의 기쁨이다. 올 여름 여자들의 노출이 너무 심하다고 텔레비전은 개탄하고 있지만, 너무 그러지들 말아라. 곧 가을이 오면 여자들은 다시 옷을 입을 것이다. 좋은 것을 좀 내버려두라는 말이다..."

 (전문을 보고 싶다면, 여기 클릭질)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노출

여담인데,
SBS(라고 쓰고, 시방새라고 읽는다)는, 꼴통쉐이답게,
성폭행 관련 기사를 보도하면서, 미니스커트 영상을 배치함으로써, 
지네들 수준이나 성범죄에 대한 인식이 어떤지 명백히 보여줬는데, 
저리 근엄하시고 엄숙하셔서들, 이 녀름 참느라 얼매나 허벅지가 아플까나.
시방새, 지들의 도덕적 불감증에 대해선 귀 없는 척 하면서, 고매한 척 하긴. 

김훈 작가의 말을 다시 빌자면, 이 말을.
"올 여름 여자들의 노출이 너무 심하다고 텔레비전은 개탄하고 있지만, 너무 그러지들 말아라. 곧 가을이 오면 여자들은 다시 옷을 입을 것이다. 좋은 것을 좀 내려버두라는 말이다."

내 말이. 쫌! 내비두라. 상관도 없는 것, 엉뚱하게 배치시키지 말고.
우리는, 좋은 것만 보고, 아름다운 것만 보는 <하하하>. (으응? 뭥미?)

아참, 여름엔, 나는 이 노래가 쵝오. 여름이야기(무한궤도).
물론 옛 동네를 걸어도, 만날 첫 사랑이 없는 게 아숩긴 해도.
아, 옛날에 이 노랠 불러주면 참 좋아하던 그 사람, 떠오른다.
여름아, 잘 있는 거지? ^.^

더위도 괜찮아! 녀름아, 살앙해~ㅎ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0) 트랙백(0)
이 포스트를 | 추천 1        
다윈, 제대로 아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 | 바람구두 이야기 2010-07-27 15:46
http://blog.yes24.com/document/2443395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다윈, 하면 자동조합 되는 것들.
즉, 창조론을 누른 진화론이 생각나고,
'적자생존'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That's It.

더 이상 알 것도, 더 캐물어야 할 것도 없고, 
더 알고 싶단 지적호기심도 이끌지 못했다. 
제도권교육내, 가장 보통의 학생이었던 내게,
다윈은, 『종의 기원』은 그랬다. 
그냥, 그게 다라고 배웠고, 그렇게 알고 있었더랬다.

다윈, 종의 기원,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진짜로 알고 있을까.
그러니, 뒷통수를 강하게 후려친 강연이었다.
내가 알고 있던 것이 진짜 앎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곤, 얼굴 빨개진. 
따지자면, 선생들도 몰랐고 내 책임도 아니지만, 나는 왜 알고 있다고 생각했을까, 하는 부끄러움. 

진화론은, 단순히 인류가 원숭이와 같은 조상에서 형성됐음을 알려주는 이론이 아니며,  
적자생존(The Survival of the Fittest)은, 다윈의 것이 아니었다.
영국의 경제학자 허버트 스펜서가 한 말을 다윈의 말로 와전했을 뿐. 
그래서 약자의 도태 혹은 소멸을 당연한 것으로 보기 위한 근거로 악용됐을 뿐.

'다윈주의'를 적자생존의 법칙쯤으로 오도했다면,
다윈 할아버지에게 미안하다고 꾸벅할 일이다. 나도 미안해요, 다윈 할아버지. ^^;

박성관.
다윈에 미쳤다는, 그래서 다윈 할아버지와 연애질을 계속 하겠다는 학자.
지난 다윈에 대한 앎을 완전히 해체할 수 있었던, 지난 5월 그의 강연이었다.

크게 봤을 때, 다윈의 '사상'은 인간을 만물의 영장에 놓지 않는다고 한다.
인간은 결코 특별하게 유일한 존재가 아니며,
인간은 세계의 중심이자 모든 가치의 척도가 아니다!
그놈의 인간중심주의, 휴지통에 처박아라.
그래서 다윈은 현재진행형의 '혁명'.

빙고. 인간중심적 사고.
좀 불편한 감도 있었는데,
다윈이, 나와 생일이 같은, 다윈 할아버지가, 일찌감치 그리 주장해주셨다니. 꾸벅.

이제 남은 건, 9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잘 소화하는 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안다고 생각했던 사고를 몰아냈으니,
가장 보통의 존재가 할 수 있는 일은, 책을 읽고 세계를 좀더 넓게 바라보고 움직이는 일.

다윈, 
제대로 아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는,
어쩌면 당신의 일상과 세계, 사고와 행동에 사소하지만 중요한 임팩트를 가할지도.

물론, 이 책이 다윈의 모든 것이라고 섣불리 말할 생각은 없으니, 
또 다른 다윈이 있으면 알려주시라.  

==========================

“다윈과 『종의 기원』을 제대로 알면 근사한 세계가 펼쳐진다”
『종의 기원 : 생명의 다양성과 인간 소멸의 자연학』 박성관과의 만남


어쩌다 생일이 같았을 뿐이었다. 어떤 연관성이나 필연 따윈 없다. 그럼에도 가장 보통의 인간에겐, 단지 위인들과 생일이 같다는 것도 사소한 위안이 된다.

별 볼 일 없는 가장 보통의 남자인 내게도 그렇다. 다윈, 링컨, 예니(마르크스, 카를 마르크스의 아내)와 나는 생일이 같다. 더구나 그들은 의도야 어쨌든, 세상을 바꾸고 역사를 진화시킨 해방의 파수꾼들 아닌가. 나도 뭔가를 해방시키고 싶었다. 그래봤자, 내 몸과 마음을 세상의 흉포한 율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밖에 더하겠느냐마는, 가장 보통의 인간에겐 그것만으로도 벅차고 뿌듯한 일이고.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을 해방시켰느냐.

내가 알고 있던 얄팍한 지식을 들이대자면,
다윈은 창조론에 포박된 기독교적 세계관과 관념에서 인류를 해방시켰으며, 
링컨은 아프리카계 아메리칸을 노예에서 해방시켰고,
예니는 남편인 카를을 도와 계급적 사유에 익숙하지 못한 인류의 사고를 해방시켰다.
직간접적으로 나는 그 해방의 수혜자이기도 하다.


지난해 2009년. 다윈과 링컨은 탄생 200주년이라고 떠들썩했다. 1809년 2월12일, 한날 태어난 두 사람. 우리나라에선 그들의 위상이 영미 같지 않아서인지, 상대적으로 크게 부각되진 않았지만, 그들에 대한 이야기가 언론 등을 통해 상당히 나왔다. 특히, 다윈은 『종의 기원』 출간 150주년과 맞물려 책이 지닌 의미와 위상 등도 많이 언급됐다.

하지만, 많은 우리는 『종의 기원』을 들출 생각까진 않는다. 숱한 경로를 통해 『종의 기원』이 진화론 주창서라고 알고 있고, 진화론이 대세인 마당에 굳이 책까지 들춰볼 엄두, 낼 턱이 없다. 우리가 흔히 저지를 수 있는 어떤 오류. 보지도 않았으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실제로 읽어보면 문장은 평이하기 이를 데 없고, 게다가 난해한 구절도 없으며, 심지어 무슨 전문 용어들로 범벅인 책도 아니다. 문장이 좀 길다는 점을 빼고는 고전 중에서도 가장 쉬운 책 중의 하나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종의 기원』을 (거의) 읽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진화론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현대 과학이 다 증명해 놓은 이론을 구태여 150년 전의 책까지 먼지 털어 가며 읽을 필요가 어디 있는가?”(p.11)

그러니, 이 말이 솔깃할 수 있겠다. “다윈의 현재성과 불온성을 되살린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다윈과 『종의 기원』의 다윈이 어떻게 다른가? 창조론과 자신이 살던 시대의 진화론 모두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다윈의 참모습을 통해 새로운 자연학의 가능성을 생각해보자. 다윈과 사랑에 빠진 인문학 연구자 박성관과 함께 읽는 다윈의 『종의 기원』.”

호기심 작렬이다. 나와 생일이 같은 다윈, 제대로 알면 더 좋지 않겠는가. 그래서 다녀왔다. 지난 5월27일 서울 동교동 그린비출판사를 찾았다. 『종의 기원 : 생명의 다양성과 인간 소멸의 자연학』(박성관 지음|그린비 펴냄) 출간기념 저자 특강이 있던 자리. 박성관이라는 창을 통해 바라보는 다윈. 다윈 그리고 『종의 기원』, 널 다시 보게 됐어. 물론 제대로 알게 됐다고 말하기엔 한참 미약하지만, 기존의 관념을 깨부쉈던 박성관의 특강. 이 또한 흥미진진하지 않았겠는가. 다윈, 누구냐, 넌. 『종의 기원』, 어떤 책이냐, 넌. 


다윈 가라사대. “바보들을 빼면 인간의 지능은 별 차이가 없다고 늘 생각해왔다.” 나나 당신이나 바보가 아니라면, 다윈과 우리, 지능 차이 별로 없는 인간일 테니, 어려워 마시라. 박성관 가라사대. “다윈은 150년 전, 온 몸으로 하는 생각을 해보자고 제안한 거다.” 새로운 생각을 가능하게 하는 질문이렷다. 당신도 할 수 있고 생일이 같은 나도 언젠가는 할 수 있을지 모르니까 이날의 특강을 들어보는 것도 좋겠다. 

『종의 기원』, 리라이팅의 이유

우선, 『종의 기원』. 1859년 11월 첫 출간된 원서는 499쪽(요즘 판형으로는 800~900페이지)에 이른단다. 1250부를 찍었는데, 2백 몇 부를 다윈이 샀단다. 땅 투기도 하던 부자 다윈이었다. “다윈은 가장 위대한 과학자 중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사람으로도 꼽힐 거다. 정말로 친절하고 온화하다.”

『종의 기원』은 다윈 생전 6판까지 찍었다. 고치는 정도가 아니라, 몇 년에 한 번씩 개정판을 냈다. 유럽을 점령한 다윈이론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쏟아져 나온 탓이란다. 당대 생판 ‘듣보잡’이었던 자연선택설에 대한 연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잘 된 이유였다. 그러다보니, 1판에서 6판까지 차이가 무려, 76%. 박성관 왈, “이게 차이냐. 다른 책이지. (웃음)”

다윈,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거나 잘못 알려진 것이 엄청 많다. 그 가운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평생 건강이 나빠 하루 2~3시간밖에 활동할 짬이 없었다는 것. 그런 책 20권을 냈다는 것. 놀랍다. 더 놀라운 것 알려줄까? 그냥 책도 아니요, 모두 연구서란다. 그걸 2판, 3판... 6판까지 냈다니. 미친 것 아냐?

“그런 책들을 쓴 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생각을 바꾸기 위해서였다. 교양으로서 다윈을 아는 것은 삶에 큰 변화를 주지 못한다. 무의미하다. 우리의 생각 전체를 바꾸려 한 건데, 실제로 많이 바꿨다. 그런데 그것을 근대인들이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것으로 바꿨다. 작년이 탄생 200주년이었는데, 여러분 삶에 변화가 있었나? 딱 하나, 언젠가는 읽어야 하는데... (웃음) 이런 건, 살아있는 고전이 아니다. 표창처럼 가슴에 와서 물음표나 느낌표가 박혀야 한다. 그래야 살아있는 건데, 작년에 아무 것도 없었잖나. 살아있지 않으니까. 그래서 내가 다윈을 살리려고 이 책을 썼다.”

『종의 기원 : 생명의 다양성과 인간 소멸의 자연학』은 그런 책이란다. 기존의 것을 반대로 뒤집는. 그는 자신한다. “지금의 자연과학 기준으로 하면, 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다. 그래서 지금의 자연과학, 세계를 바꾸려고 이 책을 썼다. 진짜다. 수사가 아니고. 나를 바꾸고 여러분을 바꾸고, 이 세계를 바꾸기 위해. 나는 다윈을 통해 한 세상을 봤다.”

박성관의 리라이팅이 의도한 바는 ‘공생’이다. 『피터 래빗 이야기』의 저자 비아트릭스 포터에 대한 이야기가 『공생, 그 아름다운 공존』에 나온다. 화가이지 생물학자인 포터의 그림은 얼핏 보면, 지저분하단다. 뿌연 이끼 등이 있어서.

그러나 핵심은 뿌옇게 한 것인데, 편집자가 그것을 깨끗이 지우는 ‘오류’를 범해서 나온 것이 『피터 래빗 이야기』. “포터의 핵심은 뿌옇게 칠한 그것이었다. 그 생물들. 우리가 생물이라고 일컫지도 않는!”

다윈도 마찬가지라는 것이 박성관의 설명. 생물학 교과서에 나온 상리공생, 편리공생. 그것은 공생을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본 무엇. “이 책 쓴 이유 중 하나는 이점을 꼬집기 위함이다. 경쟁이고 협동이고, 모두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다. 부르주아도 협동은 바란다. 이익이 된다면. 진짜 공생은 그런 게 아니다. 지금 우리는 공생을 사유할 수 없게 돼 있다. 더 큰 나를 구성하는 것을 협동이라고, 공생이라고 생각한다. 이익을 주고받는 거. 그 외에는 상상을 못한다. 이익 빼고는 상상조차 못한다. 부르주아는 그래서 이를, 생존경쟁이라고 바꿨다.”

고로, 다윈이 말한 것은 생존경쟁이 아니다. 생존을 위한 분투! 자연은 선택으로 충만했기에 다윈은 이를 ‘자연선택’이라고 썼다. 그러나 해석한 이들이 이를 ‘자연도태’로 바꿨다. 적자생존? 그것은 전혀 다른 말. “그것이 다윈의 얘기와 정반대되는 것이라고 썼다. 원전을 갖고 대조하면서 그걸 보여줬다. 읽고 나면 부르주아 근대인들이 왜 다윈을 은폐할 수밖에 없었는지, 새로운 눈을 갖게 하는 것이 책을 쓴 목적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기존의 창조론적 과학자들과 진화론자들 모두에 대한 공격이었다.… 다윈이 넘어서야 했던 논적이 창조론뿐만 아리라 진화론, 즉 당대의 모든 박물학자들이었다는 것을 깊이 유념한다면, 다윈이 왜 그렇게 발표를 지연했는지, 또한 『종의 기원』을 출간하는 시점에 가서도 왜 자신의 책이 불완전하기 그지없는 ‘초본’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pp.33~34)

자연선택, 제대로 알고 있는가

다윈의, 『종의 기원』의 핵심은 자연선택이다. 우월한 것이 남고, 열등한 것이 도태되는 건 자연도태일 뿐, 자연선택이 아니다. 다윈은 그런 측면도 있지만, 자연선택은 두 가지 뜻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자연계라는 야생에도 선택이라는 작용이 있다. 또 하나는 자연스러운 선택. “다윈 당대에 주변에서는 자연선택을 적자생존으로 바꾸라고 말했는데, 그는 안 바꿨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미 그것을 적자생존으로 해석했다. 사람들은 싫어했다. 자연선택이 신비주의라면서.”

박성관이 말하고자 하는 것, ‘자연이란 무엇인가’. 자연의 반대 개념으로 문화를 들먹이지만, 그것 또한 우리의 편견이란다. “있는 그대로가 자연이고, 목적을 갖고 변경을 가하면 문화라고 한다. 식물에게 문화가 있나? 지렁이에겐 문화가 있나? 없다고 그러잖나. 그런 태도가 잘못됐다. 내가 바꾸려고 하는 것이다. 문화라는 것도 자연스러운 활동 중의 하나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자연스러운 거다. 어떤 잔인하고 위대한 일도 그만한 이유와 까닭이 있어서 일어나는 것이고, 문화도 그렇다.”

말인즉슨, 이분법 타파하기. 가령, 생물-무생물 나누기. 이걸 어떻게 나눌 수 있냐는 거다. 책 부제에 생명의 다양성, 운운했지만, 진짜 말하고 싶은 것은 생명이 아닌 세계의 다양성이란다.

“예전에는 무생물을 생물과 이 정도까지 대립시키지 않았다. 의자에도 영혼이 있다고 했다. 근본적 차이가 없고, 정도의 차이라는 거지. 식물도 영혼이 있다고 믿었다. 다만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그 모든 것이 백인남성에서 출발했다. 과장이 아니라 과학자들이 그랬다. 고릴라 지능을 4세의 지능이라고 하잖나. 놀라운 건, 인간만을 척도로 하는 그 척도가 없는 한 과학연구가 불가능하다는데 있다.”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야 한다고 박성관은 주장한다. 인간이라는 척도 없이 과학은 불가능하다. 동물실험도 그렇고. 생물과 무생물을 구별하는 지금 과학자들의 카드패는 버려야 한단다. 다윈은 이걸 넘어섰다. 생물-무생물 구분이 아닌, 공통 조상의 후손이라는 것. 주체(개체)와 환경을 깨는 것.

그러나 인간중심주의에 사로잡힌 부르주아들은 이것을 자기식대로 해석했다. ‘아, 그럼 인간이 가장 진화했다는 얘기지?’ “침팬지와 사람은 유전자를 보면, 1~2% 차이밖에 안 난다. 그러면 상식적인 사람, 합리적인 안이라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인간이 우월하지 않구나. 몇 년 전 생물의 본질을 드러낼 수 있다며, 인간게놈프로젝트를 했는데, 별로 차이가 없었다. 그러면, 결론이 뭔가. 하나, DNA가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구나. 둘, 인간과 침팬지는 큰 차이가 없구나, 이렇게 생각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인간이 끝까지 우월하고 싶었던 앙탈(?)이었다고 할까. “다윈은 인간과 지우개, 민들레, 거북이가 공통조상의 후손이라고 말했는데, 과학자들 인정하지 않는다. 도그마다. 그 구조 자체가 도그마로 돼 있다. 지금의 과학은 인간중심주의가 없으면 작동을 못하게 돼 있다. 그래서 인간게놈프로젝트도 DNA가 중요하다고 해 놓고선, 결론이 그렇지 않으니까, 이 중에 뭐가 발현되는지가 중요하구나, 이게 생물학자들의 결론이었다. 어떤 결론이 나와도 안 바뀐다. 양파가 인간보다 유전자가 훨씬 많은데, 그래서 역시 DNA가 중요하지 않았어, 라고 말한다.”

인간을 척도로 한 다양한 이분법 구상은 결국, 백인남성의 우월함을 계속 과시하기 위한 것이다. 전형적인 미국인 내러티브. 그 이분법은 또한 이런 것이다. 동식물의 차이에 대한 통념을 보자면, 동물은 이동을 하고, 식물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다윈은 『식물의 운동력』을 통해 식물이 동물보다 더 많이 움직인다는 것을 보여줬다. 도구를 이용한다고 해서 호모 파베르(도구의 인간)라고 일컫지만 제인 구달은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인간만이 아님을 알려줬다.

“우리 인간의 핵심 중 하나가 선택인데, 선택을 확실히 하는 존재가 신이다. 그래서 선택이라는 말이 핵심이다. 다윈이 자연선택을 버리지 않은 이유가 신학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선택이라고 하면 주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주체가 없이도 주체 중의 최고라는 하는 신보다 더 훌륭하고 풍부한 선택효과가 발생한다고 했을 때, 다윈은 전율했다. 그래서 자연선택이라는 말을 썼다.

(다윈이) 20여 년을 연구하면서 가장 집중한 것이 언어문제였다. 생물을 얘기할 때, 거주자, 출생지, 이런 단어를 일부러 썼다. 인간이라는 단어는 500페이지 동안 딱 두 번 잠깐의 예로, 썼을 뿐, 전혀 쓰지 않았다. 그걸 쓰면 과학자들이 반대하니까. 다윈의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공격은 아직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사상의 불온함, 혁명성은 꺼지지 않았다. 그래서 부르주아들이 『종의 기원』을 못 읽게 만들고 재미없게 만들었다. (웃음)” 

“인간은 결코 유일하게 특별한 존재가 아니며, 이 세상의 비밀은 거룩한 기원에 있지 않다는 다윈의 메시지는 유폐되었다. 지난 150년간 부르주아들(혹은 근대인들)은 다윈의 생각을 근대적 메스로 끊임없이 수술하고 성형하였다. 우선 다윈의 과학 비판은 종교 비판으로 협소화시켰다. 자연선택은 자연도태와 적자생존으로 변형시켰고 생존투쟁과 상호의존은 생존경쟁으로 바꿔쳐 버렸다. 그리하여 다윈은 종교비판가이자 부르주아적 가치의 대변자로 타락했다. 우리가 아는 다윈이 탄생한 것이다.”(pp.17~18)

과학개혁이 필요한 이유

박성관이 직접적으로 겨냥하는 것은 과학이다. 정확하게는 대중과 유리된 과학. 과거 『종의 기원』은 누구나 읽을 수 있었다. 과학자라고 읽거나 과학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고. 굳이 철학, 문학, 과학... 이런 식으로 나눠서 습득하지 않았다. 이렇게 나뉜 것은 100년도 되지 않는단다.

“과학개혁이 필요하다. 소설이 재미없으면 소설가를 욕하면서 과학책이 재미없으면 왜 스스로를 욕하나. (웃음) 지금 과학이 왜 중요해졌냐면 종말론 때문이다. 르네톰이 한 말이다. 20~21세기의 종말론은 다 과학에서 나왔다. 주류과학과 서구적 내러티브에 지배되고 있는 거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상식의 회복이고, 과학을 신주단지 모시듯 해서 이해시켜달라고 하면, 그건 과학이 아니다. 과학은 외우지 말고 토론해야 한다.

문학이나 철학은,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며 이견도 제시하는데, 과학은 왜 그러느냐고 묻지 않고,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는다. 자연과학을 전공하지 않아도 불쾌감을 느낄 수 있고, 이야기가 정말 사실이냐고 물어야 한다. 철학이나 문학은 묻는데, 과학은 묻지 않고 이해시켜달라고 한다. 그게 도그마다. 예수가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데, 진짜냐고 묻지 않고, 기독교인은 믿으려고 한다. 그게 도그마다.”


고로, 박성관 가라사대. “과학을 친구로 생각해야 한다.” 그러니까, 좀 똑똑한 친구. 설명해 달라고 해야 하고, 이해되게끔 책을 잘 쓰라고 말하고. 소설에 개연성이 없다고 말하듯, 과학에게도 그래야 한단다. “대중이 바뀌어야 과학이 바뀐다. 과학이 대중과 멀어지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채 안 됐다.”

『종의 기원』은 기독교에 대한 비판보다 과학자를 비판했다. 즉, 과학 비판서. 19세기만 해도 과학자들은 창조론자였다. 생물-무생물을 나누지 않았다. 그러니 생물학 따윈 없었다. 돌부터 모든 것이 연속성으로 이어질 뿐, 무생물이 없었다. “푸코의 『말과 삶』이 그래서 위대한 책이다. 나누지 않아야 앎을 구성할 수 있었다. 다윈은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1871)의 마지막 문장에서 이랬다. "인간은 자신의 몸에 흐르는 하등동물의 피를 흔적을 지울 수 없다."”

다윈의 혁명은 아직 오지 않았다

“150년 전에 당대의 세계와 모든 앎의 체계를 의문시했던 다윈은 사라져 버렸다. 나도 다윈처럼 내가 사는 세계와 앎의 체계에 의문을 품어 왔다. 그러던 차에 『종의 기원』을 만났고 거기서 다윈의 의문들과 불온성과 매력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새로운 과학을 가리키는 풍요로운 빛살이었다.”(p.18)

다윈은 물리적 조건으로 설명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래서 혁명이었다. 하지만 다윈은 우리에게 온전히 오지 못했다.

“혁명의 소식이 우리에게 도달하지 않았다. 150년 간 목이 졸려 있다. 다윈은 창조론을 비판한 사람이라는 아이콘으로 만들어졌다. 다윈이 말한 것이 성선택이다. 다윈은 매력을 사고했다. 내가 그걸 무척 좋아하고 나의 주제이기도 한데, 진화는 매혹이다. 오해 마라. 자연과학자 얘기를 인문학적으로 매력으로 해석한 것이 아니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날씬한 여자를 선호한 것은 현대적인 현상이라는데, 아니다. 그래서 고전을 읽어야 한다. 고전을 보면 허리가 지금보다 더 심하게 가늘다.”

“그러나 다윈은 알았을까? 자신의 이론이 미처 꽃을 피워 보기도 전에 핵심을 거세당하고 진화론이라는 결론만 덩그러니 남아 버릴 운명이었다는 것을. 그런데 운명이란 또 얼마나 기묘한 것인지, 그 흉한 모습이 완전 대박이었다. 기존의 과학에 대한 다윈의 비판은 잊혀지고 창조론과 맞짱 뜬 거인으로만 우뚝 서자 사람들은 더더욱 열광했다.”(p.17)

다윈의 매혹이론에 따르면, 사슴뿔이 커진 것은 암컷이 뻑 갔기 때문이고, 곤충이 뻑 가서 아름다운 꽃이 생겨났다. 우리가 사슴뿔을 보고 뻑 가고, 꽃을 보고 뻑 가는 것은 우리도 동물이기 때문.

“성선택이 뭐냐면 인간만이 특별하다는 근거가 없다는 거다. 언어, 도덕․사회, 예술 등이 인간과 동물을 차이라고 하고, (인간이 아닌) 동물에겐 사회가 없고, 우리만 법이 있다고 그러는데, 법이나 룰 없이 동물사회가 운영될 것 같나. 아니다. 걔네도 룰이 있다. 우리가 룰을 가진 이유는 걔네들과 동일한 이유다. 우리는 있는데, 얘들도 있을까, 가 아니다.”

박성관은 좀 더 예를 든다. 도덕관념? 약자에 대한 돌봄? 저축? 예술? 천만에. 그것은 인간이라는 동물만 가진 것, 아니다. 다른 동물에서도 이런 예는 얼마든지 발견된다. 예를 들어, 보노보(피그미침팬지)는 약자를 돌보고 프렌치키스를 나눈다.

“미래를 생각해서 저축하라는데, 그건 부르주아에게만 좋은 거다. 우리가 저축한 돈은 자본가들이 쓴다. 그래서 저축하라는 거다. 있지도 않은 개미와 베짱이 얘기까지 하면서. 다윈은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에서 예술(이 인간에게만 있다는 것)을 깨려고 한다.”  

다윈은 자연계 암컷과 수컷의 모양새에 대해서도 꼼꼼하게 기록했다. 일일이 수컷이 아름다운지, 암컷이 아름다운지, 적어보니 9대1 수준으로 수컷이 아름다운 것이 많았단다. 왜 이런 것까지 했냐고? 이 세계에 생물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야 한다는 것. 그러니 책이 지루할 만도 했지만, 박성관은 이를 악물고 두 번을 읽었단다.

당대의 학자들은 매력과 실용을 나눌 수 없다며 다윈을 비판했다. 그렇다면 다윈은 매력에 빠지는 매혹의 순간을 어떻게 얘기했을까. 얼이 빠지거나 혼이 빠지는 것. 그것을 매혹의 순간으로 규정했다. 알고 있던 것과 달리 그 순간에 내가 바뀌는 그런 어떤 순간.

“선택이라는 말이 신학 용어라서 쓰기도 했지만, 암컷이 수컷을 보고 ‘아~’ 하는 순간, 즉 매혹의 순간이 있다. 기존의 심미안이 해체되면서 새로이 구성되는 순간이다. 강력하게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면 선택이 반복되겠지. 다윈은 이런 말을 했다. ‘미적인 표준이 수 백 수 천 세대에 동일하게 적용돼서 2차 성징이 결정된다.’

미적인 표준으로 일관되게 활동하는 것을 예술이라고 하는데, 그런 면에서 우리는 예술을 인간만 한다고 말할 수 없다. 다윈은 인간이 공작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그릴 수 있냐고 되묻는다. 다른 과학자들은 매력이 과학적인 설명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윈을 비판했다. 생존에 도움이 되고 물리적 조건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 거다.”

다윈과 『종의 기원』이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유

다시 말하지만, 다윈은 물리적 조건에 의존한 과학을 깨고자 했다. 또한 관계를 사유했다. 생물과 생물의 관계를 처음으로 사유한 사람이다. 모든 생물은 여러 마리이며, 다 다르다는 것. 털끝만한 차이가 생사를 가르며, 인간만 예술 한다는 것에 대한 비판.

다윈은 그렇게 함의가 풍부한 이야기를 끌어냈다. 『종의 기원』은 여전히 현대 생물학(자)와 대립하고 있다. 박성관이 『종의 기원』을 리라이팅한 것은, 『종의 기원』이 여전히 투쟁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많은 과학자들이 ‘과학적인 근거를 들어’ 다윈의 진화론에 반대했다. 그래서 다윈은 13년 뒤인 1872년에 『종의 기원』 6판을 내면서 아예 한 장(章)을 새로 끼워 넣어 과학자들의 비판에 일일이 답해야 했다. 바로 이 상황, 당대의 창조론자와 과학자들의 이론을 다윈이 모두 비판해야만 했던 이 상황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다윈 혁명’을 이해할 수 없다.”(p.14)

우리는 ‘자연선택’을 제대로 알고 있었을까. 우리가 알고 있던 다윈과 『종의 기원』은 제대로일까. 박성관은, 부르주아들과 과학자들이 덧씌운 포장으로 우리는 왜곡된 다윈을 만났다. 창조론을 깬 아이콘으로만 박제될 다윈이 아니었다. 우리는 아직, 다윈이 본 세계의 근사함, 돈 엄청 들인 여행으로도 알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세계를 맛보지 못했다.


다윈 탄생 200주년, 『종의 기원』 출간 150주년이 지났으면 어떠랴. 제대로 알았던 적도, 읽은 적도 없다면,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다윈과 만나는 것은 근사하고 멋진 신세계를 펼치는 것일 수도 있겠다. 혹시 아나. 그것이 당신의 세계를 전복시키거나 뒤흔들 혁명적인 모멘텀이 될지. 다윈과 연애를 계속 할 것이라는 박성관의 이야기가 기대되는 이유다. 

『코스모스』의 저자이자 천문학자인 칼 세이건 가라사대. “인류는 우주 한 구석에 박힌 미물이었으나 이제 스스로를 인식할 줄 아는 존재로 이만큼 성장했다.” 그 말은, 인류는 이제야 똥오줌 가릴 줄 알게 됐다는 뜻일 텐데, 150년 전의 혁명적 사고를 제대로 독해하지 못하거나 부러 오독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아직 ‘미물’ 딱지를 떼기는 글렀다.

만물의 영장? 개뿔. 만물의 영장이 설쳐서 이 모양 이 꼴이라니. 어허, 통재라. 뭐, 그렇다고 좌절은 말고. 만물의 영장이 아닌 미물임을 인정한다면, 이 정도까지 온 게 어딘데. 다윈이 나왔듯, 당신도 다윈이 될 수 있고, 『종의 기원』이 있었듯, 『미물의 기원』도 어쩌면 기대해봄직. 그렇게 된다면, 가장 보통의 누군가는 당신과 생일이 같음에 괜한 우쭐함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나니.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5) 트랙백(1)
이 포스트를 | 추천 1        
1 2 3 4
진행중인 이벤트
나의 북마크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이성적 결합을 원하는 곳
"잘 쓰는 방법이 아니라 전보다 낫게 쓰는 방법에 관해 말하고자 합니다."
야간비행 저 너머 세상을 향하여
대중문화 감수성으로 해석하는 한국 사회
최근 댓글
진짜 그렇게 번성했던.. 
저도 일본 작품을 보.. 
가을이 되면. 떠오르.. 
그죠, 송호창 의원에.. 
잘 들었으며 잘 읽었.. 
트랙백이 달린 글
우리안에 있는 ‘공유경제..
[함께 보아요] 마을감수성..
나카야마 미호, 애잔한 사..
[밤9시의 커피] '하쿠나 ..
[밤9시의 커피] 6월25일의..
많이 본 글
오늘 25 | 전체 1511260
2006-07-30 개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