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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살펴보면 외로움을 달래주는 것들이 몇 개 있는데, 나한텐 밤 9시의 커피가 그 중 하난거 같아. 이 어메이징한 커피, 밤 9시의 커피야! 난 이렇게 멋진 커피를 마셔본 적이 없어. 이게 내 대답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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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허수아비춤

조정래 저
문학의문학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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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춤》이 묘사하듯, 노예적 기생으로 ‘회장님’께 연명하는 언론사의 종살이근성은 더욱 깊어지는 중이다. 최근에 봤던 한 경제신문의 기사도 그랬다. 모 그룹 회장부부의 공항패션을 극찬한 그 기사는, 별로 세련되지도, 우아하지도 않아 보이는 패션 센스를 과도하게 띄우고 있었다. 광고를 주는, 즉 월급으로 나오는 돈의 실질적 제공자인 실질적 회장에 대한 아부였을까.


‘뇌꼴스럽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허수아비춤》에서 언급된 ‘언론사 길들이기’마냥 ‘광고’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대통령, 장관, 국회의원 등을 열심히 ‘조져도’, 일용할 양식을 주는, 광고주인, 특히 거대 광고주에게 칼날을 들이댈 언론은 그닥 없다. ‘어느 신문이고 휘청휘청 난리나 버’리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좀도둑처럼 기생한 기자는 포승을 받고, 큰도둑은 되레 상을 받는 일도 생긴다. ‘신문은 사회의 목탁이고 무관의 제왕’이라는 주입 때문에 기사를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속고 또 속는다.


‘경제민주화’라는 구호를 썼지만, 《허수아비춤》은 기업소설이라기보다 사회고발 르포에 가깝다. 경제민주화의 영역 또한 사회적인 각성과 실천을 동반해야 가능한 것이니까. 소설 속, 재벌의 재산권 불법 상속과 경영권 불법 승계를 둘러싸고 펼치는 복마전은 현실의 뉴스와 다르지 않다. 거의 누구나 알고 있는 공공연한 비밀 같은 것. 그럼으로써 정의가 갉아 먹히는 아이러니.


회장은 차치하더라도, 윤성훈을 필두로, 박재우, 강기준이 가진 욕망과 행동은, 현실의 범속한 우리의 것과 다르지 않다. 윤성훈의 이 물음, “이봐, 자넨 돈 힘이 얼마나 크고 세다고 생각해?”는, 곧 독자인 우리를 향한 것이고, 돈의 힘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박재우와 강기준은 대신 토해낸다.


“돈은 귀신도 부린다. (까짓 사람쯤이야!)” “돈만 있으면 처녀불알도 산다.” “돈이면 지옥문도 여닫는다.” “돈만 있으면 의붓자식도 효도한다.” “돈 있어 못난 놈 없고, 돈 없어 잘난 놈 없다.” 윤성훈은, 이 ‘돈지랄’에 방점을 찍는다. “돈은 살아 있는 신이다.”


꼭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닐 손,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다고 착각하는 건 아니지만, 많은 우리는 행복의 조건으로서, 돈의 힘을 절감하고 살고 있으니까. 《허수아비춤》의 토로는 그러니까, 명백하게 피부에 와 닿는 현실이다. “돈은 단순히 위조하기 어려운 그림이 그려져 있는 종이쪽지가 아니었다. 그건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었고, 그 무엇이든 굴복시키는 괴력을 발휘하는 괴물이었다.”(p.128)


돈이 사실상, 모든 것이 된 시대다. 돈의 있고 없고, 가 사람의 관계는 물론 사람과 사물 등 모든 관계를 배치하고, 계급을 조장하며, 행복까지 좌우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기에 ‘돈의 힘’은 현실적이고, 법보다 가까운 것이 주먹이라면, 주먹보다 가까운 것이 또한 돈이다. 조정래는 《허수아비춤》을 통해, 그것을 거두절미하고 드러낸다. 다른 포장도, 분장도 하지 않는다. 발가벗은 임금님 정도가 아니라, 신하들까지 낱낱이 벗긴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자신의 가치를 증식하는 것 외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자본은, 개별적인 인간의 구체성까지 잠식한다. 일광그룹의 남 회장은 두말할 것도 없으며, 윤성훈, 박재우, 강기준에게서 개별성과 구체성을 엿볼 수 없다. 그들은 그저 자본을 대변하는 매개물일 뿐이다. 모든 것을 화폐로 환원하는 사고방식이 그들의 뇌구조에 또렷하게 각인돼 있을 뿐이다.


그러고 보니, 조금만 시계를 돌려도, 그 모습은 익숙한 일상이 아니었다. 불과 몇 십 년 전이다. 당시, 돈은 그저 먹고 살 정도만 있어도 충분하거나, 섹스보다 더 은밀한 욕망에 지나지 않았다. 돈이 많으면, 그것을 감추고 싶은 심정이 인지상정이었다. 최소한 그것이 자랑은 아니었다. 돈 지랄이랄 것도 없었다. 그러나 돈이 영혼마저 잠식하면서 판세는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 적나라한 초상이 바로 《허수아비춤》의 일광그룹의 핵심 인물들이다.


나는 돌아보았다. 과연, 그들은 지금의 나, 그리고 우리와 얼마나 다른가. 노예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지금 우리는 철저히 자본에 종속된 존재다. 회장의 일거수일투족에만, 그의 방침에만 모든 신경을 곤두세운 ‘충견들’의 모습에서 나는 소름이 끼쳤다. 많은 이들이 그것을 노예의 것이라고 인식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욱 무섭다. 그것은 또한 언제든 배신이 가능하다. 배를 갈아타는 핵심은, ‘회장’이 아니다. 회장 역시 자본의 대리인일 뿐이다. 경제라는, 기업이라는 이름으로 저지르는 악행의 대리인.


충견들이 돈을 쓰는 것에선, 어떤 상상력이나 사유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오로지, ‘명품’이라는 딱지만 붙어 있으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얼마짜리인가. 남들은 어떤 시계를 차고, 어떤 명품을 쓰고 있나. 거기에서 중심은, ‘남’이다. 남들이 보기에, 남들보다, 남들에 꿀리지 않고, 타인을 자신의 삶에 준거점으로 책정해 놓을 뿐이다. 돈을 많이 벌고 받으면 되지, 돈을 쓰는 용법은 당최 알지 못한다. 돈을 쓰는 방면의 상상력은 고갈된 상태다. 자신을 위해 어떻게 돈을 쓰고, 그 용법이 어떠해야 하는지, 사유하지 못한 결과다.


사실, 누구를 탓할 일은 아니다. 얼마 전 만난 동창들에게서, 나는 돈이 삼킨 영혼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가를 목도했다. 15년 전만 해도, 그들은 세상을 고민했고, 꿈을 이야기했으며, 정의와 불의를 구분하는 양식을 지녔다, 고 나는 기억한다. 하지만, 오랜 만에 친구 아버님의 장례식에서 만난 일부 동창들에게 남은 것은, 현실의 비루함이었다. 건설 회사를 다니는 누군가는 ‘비자금’은 당연한 것이며, 그것을 제대로 써야 회사를 키울 수 있음을 핏대 올려가며 이야기했다. 또한 누군가는 회사의 내부정보를 이야기하며, 주식을 사라고 부추겼다. 로열패밀리야 어쨌든, 삼신할머니의 랜덤으로 미리 정해진 것이라도 골든패밀리라도 돼야하지 않겠냐는 퀭한 눈빛만 번들거렸다.


부패의 고리는, 저 높은 자리에 계신 분들만의 것이 아닌듯했다. 정의와 도덕이, 새삼 회자되고, <부당거래> 등의 영화를 통해 권력-화폐-기업의 삼각편대가 만든 사회적 부조리를 새삼 목도하고, 《허수아비춤》으로 공공연한 비밀을 새삼 확인한다손, 저 견고한 고리를 끊을 수가 있을까, 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니까, 남 회장의 출감 사유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무도 믿지 않을 법한 이야기, 국가 경제발전에 기여한 공이 컸고, 국민경제에 더 이상 부담을 주어선 안 된다는 그 녹음테이프처럼 반복되는 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려니, 구렁이 담 넘듯, 믿고 따라준다. 믿어서 그런 것인지, 알면서도 포기해서 그런 것인지, 그 지겨운 반복에도 태클을 걸지 않는다.


그래, 월급쟁이의 비애란 그런 것이다. 나라고 경험하지 않은 바가 아니었다. 월급은 속된 말로, 마약이다. 그 마약 덕분에 배는 불러온다. 움직임은 둔해지고, 월급의 중독은 생각보다 힘이 세다. 과감한 포기가 진짜 더 큰 행운을 준다고 믿으면서도, 노예의 편안은 그것마저도 주저앉힌다.

 

사실 그렇게 젖어서 살다보면, 다른 철학이 있을 수가 없다. 꿈은 저 어디 하수구에 처박히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없다. 현실이 모든 것의 핑계이자 면죄부가 된다. 이젠 나이가…, 처자식이 있는 몸이라…, 《허수아비춤》의 언급마냥, 그것은 “그 어떤 난처한 입장, 그 어떤 궁지에서도 단숨에 탈출할 수 있는 만사형통의 묘수요, 만병통치 특효약”이다.

 

따라서 《허수아비춤》의 미덕은 그것이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린 시절, 국어 교과서 어느 언저리에서 접했던 그 말. ‘어떻게’에 방점이 찍히는 그 말을, 다시 꺼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혼자서 잘 살면 무슨 재민교, 라며 말했던 선조들의, 그렇다고 지금으로부터 그리 오래되지도 않은 그 정서는, 돈이 모든 것을 장악한 지금에 이르러 실종되고 말았다. 여럿이 함께, 모든 것을 공유하거나, 누군가 어려움에 처하면 십시일반 할 줄도 알았던 우리였다. 하지만, “온갖 사치의 욕망과 무한한 안락의 추구를 완전무결하게 해결해주는 전지전능한 해결사”라는 ‘회장님’이라는 이름의 탈을 쓴, 자본에 그만 정신을 놓고 말았나보다.


조정래는 이 소설을 통해 우리에게 ‘어떻게’를 회복하고, 고민해볼 것을 권한다. 말 그대로 고민이요, 실천적 방안에 대한 사유다. 지금의 노예는, 주어진 것이 아닌 자발적인 것이기에 해방선언이 더욱 어렵다. 제도를 바꾸기 위해 함께 봉기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는 거다. 전인욱과 허민을 통해 또 하나의 방법을 제시한 것도 그런 까닭이 아닐까. 당장 해방선언을 하는 것이 어렵다면, 천민자본주의를 견제할 수 있는, 신뢰할 수 있고 개념 있는 시민단체를 찾아라.


그것은 물론 혼자만 할 고민이 아니다. 혼자도 해야 하고, 여럿이 함께 고민해 볼 문제다. 밥은 모름지기 함께 먹어야 밥맛이 더 돋는 법. 이사한 사람이 떡을 돌리고, 결혼하는 사람은 잔치국수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대접한 것이 우리 선조들의 지혜였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사건 속에서는 그렇게 밥이든, 고민이든, 함께하면 더 좋은 법이다.


인도 독립과 가난한 사람들의 지위향상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던 비노바 바베가 문득 생각난다.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툴시 나무에 물을 주고, 인도 빵나무의 열매를 돌려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았다. 어머니는 그것을 통해 비노바 바베에게, 주는 것이 먼저라는 걸 깨우쳐줬다. 먼저 베풀고 나중에 먹기. 그 가르침은, 그에게 평생의 지침이자 모든 행동의 준거점이 됐고, 그것은 그를 평생을 주인으로 살게 했다.


노예로 살 것인가, 주인으로 살 것인가. 답은 누구에게나 명백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미 돈에 정신줄을 놓고 노예임을 자처하고 있다. 《허수아비춤》은 그런 우리를 자각하게 만들고 거울을 들여다볼 것을 권한다. 못난 자화상이라도 일단 피하지 말자고 들이민다. 똑바로 쳐다볼 것, 그리고 정면 돌파 할 것. 나는, 노예임을 거부해도, 죽지 않음을 증명하고 있다. 경제적으로 ‘불편’한 것이 있지만, 대신 나는 ‘불안’을 내려놓을 수 있고, 더 이상 노예로 굴종하지 않아도 되는 것에 마음은 편하다. 회장님 모시지 않아서 좋고. 다른 삶도 있고, 다른 세계도 있다. 정의와 도덕은, 먼 곳에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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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시간에 숨은 ‘자유’의 의미를 끄집어내다! | 북카페 2011-01-31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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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8시간 VS 6시간

벤저민 클라인 허니컷 저/김승진 역
이후 | 2011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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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단 호크. 내가 좋아하는 이 배우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매일 세 시간은 책을 읽고, 세 시간은 일하는 것이 목표다.” 아마 이 말을 하면서 싱긋 웃었을 이 남자, 그 멋지고 뭉클했던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통해 ‘카르페 디엠(Carpe diem)’을 세상에 퍼뜨린 당사자답다. 아무렴, 지금, 현재를 즐기기 위해 필요한 것은 최소한의 일, 아니겠나.


정말이지, 나도 그러고 싶었고, 싶다. 세 시간 일하는 것. 그건 에단 호크가 배우라서, 가능한 얘기라고? 글쎄, 지금의 ‘일돼지’를 양산하는 구조, (풀타임) 일자리 창출 논리에 젖었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IMF’라는 말이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때, 나는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분위기, 안 봐도 비디오잖나. ‘일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라‘는 국가적 지령이 하달됐고, 다른 생각 따위 사치였다. 오로지, 일, 일, 일. 어디 감히, 떽. 일하라, 일이 너를 구원할 것이다. 오죽하면 ‘일한국’(잡코리아?)라는 사이트도 생겼겠나.


군대 행정병 시절, 죽도록 행정업무 하는 것에 시달렸다. 다짐했다. 사회 나가면 절대 야근 따위 하지 않겠다! 그 다짐, 꺾어야 했다. 엄한 분위기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어리바리다웠던 거지. 죽도록 일했다. 오죽하면 ‘회사인간’이라는 소리 들었겠나. 오직, 회사와 일(집이 아녔다!). 당시 겪었던 개인적인 아픔을 잊기 위함이라는 명목까지 덧붙여, 일에 몰두했다. 간간이 일 잘한다는 평가도 받았지만, 그건 미끼였다. “자발적인 노예가 돼라”는 시대적 명령에 복종했을 뿐이었다.


어쩌다 그리 했냐고? 핑계를 대자면, 베짱이(놀이)를 배격하고 개미(일)를 추앙하는 제도 교육의 병폐가 스며든 것 아니겠나.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의 본성을 억누르고, 호모 파베르(만드는 인간)로 살아갈 것을 강요했던 어른들 가르침에 충실했던 것? 호모 파베르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일해야 했다. 놀 줄 모르는 병든 현대인의 자화상. 대부분 그렇게 살지 않느냐고? 그러니, 문제다. 호모 파베르 천국, 호모 루덴스 지옥. 아, 대한민국, 일하다 죽을 지어다. (‘2008 OECD백서’에 의하면, 한국 직장인의 연간 근무 시간은 2357시간으로 OECD회원국 중 최고. OECD평균은 1777시간, 무려 600여 시간 오버다!)


미안하다. 잠깐 옆길로 샌다. 아트 축구의 대명사, 지단은 이런 말을 했다. “세상에는 축구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많다.” 그에겐 축구가 ‘일’이었을 텐데, 거칠게 그 말을 바꿔 말하면, “세상에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많다”가 아니겠나. 《8시간 vs 6시간》은 이렇게 말한다. “내 삶에는 회사에서 하는 일 말고 다른 더 좋은 일들이 있어요.” 아니, 일 하는 인간이 미덕인 지금, 대체 무슨 일하다 하루아침에 잘리는 소리냐!


호모 루덴스, 여가의 인간들


여기, “인간의 본성은 놀이”며, “일은 결코 내 삶에서 중심도, 가장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고 말하고 실천했던 사람들이 있다. 일 아닌 여가(혹은 놀이)가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달은 사람들이었다. 호모 루덴스. 1930년 12월, 대공황의 초입, 미국 배틀크리크 켈로그의 노동자들과 경영자였던 W.K.켈로그와 루이스 브라운 사장이었다. 놀이와 여가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으로 치부하지 않고, 그것을 위해 운명과 목숨을 걸고, 명예와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사람들.


《8시간 vs 6시간》은 그 이야기를 다뤘다. “필요와 불가피성을 넘어선 실질적 자유와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력을 위해 싸운 투쟁의 기념비”이자, “‘점진적인 노동시간의 단축’이 직업상의 합리적인 혜택이라고 보는 노동계 전통의 후예들”을 다룬. 책은 그들을 매버릭(mavericks)이라고 지칭한다. 즉, 주류에 거스르는 사람, 이단자. 8시간제(노동)가 대세가 된 후에도 6시간제를 고수한 소수의 노동자들. 일로부터의 자유를 꿈꾸고, 일보다 삶을 우선으로 삼던 사람들이다. 


책은 한편으로 먼 나라, 아주 머나먼 시대의 이야기 같다. 읽다 보면, 이런 한탄이 든다. 어쩌자고, 우린 일이 최우선인 시대에, 노예처럼 일에 굴종하며 살고 있을까. 대공황기, 고작 80년가량이 흘렀건만, 인류는 어쩌다 더 진보하지 못하고 퇴행했을까. 현대의 ‘과다 노동’이라는 전염병이 창궐하도록 내버려뒀을까.


물론, 한국은 그런 시대 겪지 않았다. 바로 조국 근대화를 위한 노동 착취의 시간을 관통했다. 어쩌면 노동 단축의 시대를 맞이해야 할 필연성이 부여된다고 할 수도 있겠다. “‘현대 세계에서는 과다 노동이 당연하다’는 통념에 반박하는 증거를 자신의 삶으로 보여 준, “추가적인 두 시간”을 가졌던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말이다.”(p.18)


켈로그 노동자들은 대공황기를 시작으로 2차 대전 등을 거쳐 1984년까지 노동시간 단축을 위해 투쟁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노동을 단순히 적게 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은 삶에서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 견해에 맞서 왔던 것이다. ‘(경제적) 불가피성’의 논리가 세를 키워 가는 와중에도, 그들은 쉬이 꺾이지 않았다. 산업화된 노동의 ‘외부’에서 보내는 시간(여가)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고 널리 알렸다. 즉, “일이 삶의 전부가 아니다.” 


“일이 하루 중 대부분의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부분이 아니게 되면, 일은 진정으로 있어야 할 자리에 돌아갈 수 있었다. 곧, 일이 삶에 더 중요한 것을 제공하는 척 하지 않고 부차적인 위치에 있게 되는 것이었다.”(p.269)


일이 모든 것을 삼키고, 일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끓는 사람들이 도처에서 발생하는 이 시대. 과연 우리에게 직업과 일은 무엇인지,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아니, 삶에서 진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성찰해볼 것을 권한다. 그들에겐 하루 2시간의 시간이 그것을 만들었다. 8시간이 아닌 6시간 노동제. 8시간 노동이 붙박이처럼 고정관념이 된 우리에게 2시간의 차이가 삶의 어떤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이 책은 보여준다.


다만, 좀 약하다. 6시간제를 경험한 켈로그 노동자들이 2시간의 추가 시간 덕분에 할 수 있었던 일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풀어놨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 아카데믹하게 접근했다. 연구와 설문, 설명 등 학자적 태도로 일관한 것이 가독성을 해친다. 따옴표도 지나치게 많고, 괄호도 너무 많다. 


추가 2시간, 삶을 탐구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일은, 직업은 다른 더 좋은 일들을 위한 수단이었다. 추가적인 두 시간 덕에 그들은 회사 일과 집안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의무와 갈등과 통제의 바깥에 있는 시간을 가졌다. 자기 자신을 위해 다른 일들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었다.


그러니, 그들은 삶을 좀 더 깊고 의미 있게 탐구한 사람들이다. 적어도 대공황 시절, 배틀크리크의 켈로그에는 이런 노동자들이 다수였나 보다. 그들은 6시간제 반대자를 ‘일돼지’, ‘야근 돼지’, ‘이기적’, ‘돈벌레’ 등으로 묘사하며, ‘고립된 집단’이나 ‘부적합자’로 생각했다니 말이다. 일이 삶의 최우선으로 저당 잡힌 지금, 일을 안 하면 ‘게으름뱅이’, ‘낙오자’ 등으로 묘사하는 것과 정반대의 것이다. 


그들에겐 여가가 그랬다. ‘삶에서 가장 진지하고 풍성한 활동이 벌어지는 시간이자 자유와 통제력을 누리는 시간.’ ‘하찮고 무의미하고 공허하고 낭비적인 시간’이 아니었다. 어떻게 삶을 가꾸어야할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지금과 분명 다른 시대적인 여건과 환경이 있었겠지만, 그들은 선구자적인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새로이 알게 된 것이라면, 산업화의 병폐에 대해 노동계급이 제시해 왔던 치유책이 ‘노동시간의 점진적인 단축’이었다는 것이다. 켈로그의 6시간제 노동자들은 그것을 이어받은, 삶에서 진짜 자유의 의미를 찾고자 한 탐구자들이었다. 하긴, 지금의 우리는 잊고 있다. 아니, 생각하고 성찰하지 않는다. 살기 위해 일하지, 일하기 위해 살지 않는다는 것.


“배틀크리크에서 이들은 힘든 노동과 산업 진보의 보상이 더 많은 일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필요한 것들”이 충분히 충족되면 노동은 더 나은 것들에 자리를 넘겨주어야 한다는 전통적인 노동계급의 비전을 재확인한 마지막 노동자들이었다. “오로지 풀타임만”이라는 경영진과 노조의 새 수사법에 맞서, “살기 위해 일하지, 일하기 위해 살지 않는다”는 상식적인 말을 하고 “불가피성/필요성”을 상대적인 개념으로 이야기함으로써 그에 도전했다.”(p.324)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죽을 때까지 개처럼 일할 자유’다. ‘영원히 더 많은 일’을 하면서 삶을 좀먹는다면 그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직업은 세속의 종교가 됐다. 일자리, 생존을 위해 중요한 것은 맞지만, 과연 풀타임 이상으로 매일 그것에 목을 매는 것은 인간으로서, 자유를 아는 인간으로서 맞는 것일까.


“직업은 사람들에게 정체성, 구원, 삶의 목적과 방향성, 공동체의 소속감을 주겠다고 약속하며, “고된 노동”을 진심으로 믿는 자에게 삶의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마고 약속한다.”(p.32)


매버릭들은 문화적 굴종이 줄고, 문화적 부흥, 즉 속박되지 않은 자유로운 부흥을 꾀할 수 있었다. 여가가 게으름을 피우는 시간이라는, 조국 근대화의 논리는 틀렸다. 6시간 노동자들은 말했다. “일터를 떠나면 그게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시간이죠. 내 자신의 일을 하고 내 삶을 사는 시간이에요.”(p.284) 내 삶을 사는 시간. 이 말은 뭔가, 짜릿하다. 인간이니까. 


조지 버나드쇼와 줄리언 헉슬리는 20세기 말이면 노동시간이 최대 2시간으로까지 줄어들 것이라고 예측했었다. 물론, 그 예측은 맞아 떨어지지 못했다. 허나 그것을 마냥 ‘틀렸다’고만 할 수 없다. 그들도 이렇게 급격하게 자본주의가 암세포처럼 창궐할 줄은 몰랐을 테니까. 당시, 이처럼 소비주의의 발흥, 자본주의의 구조적 속성, 노동이 차지하는 지위의 변화 등이 일어날 줄은 몰랐을 테니까.


자유, 호모 루덴스의 언어!


자유. 내가 책에서 가장 짜릿하게 받아들인 것은 이 단어였다. 8시간제와 6시간제를 비교해 보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노동자들이 가장 많이 이야기한 것도 ‘자유’ 혹은 자유와 관련된 어휘였다고 한다. ‘자유’, ‘자유 시간’, ‘자유로운 저녁’, ‘무엇 무엇을 할 자유로운 시간’, ‘무엇 무엇을 할 수 있음’, ‘무엇 무엇을 할 기회를 가짐’과 같은 말들. ‘자유의 언어’가 지배적인 화법이었다. 즉, “매버릭들은 추가적인 두 시간이 문화적 자원이며, 기존의 문화를 확장하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데 쓰일 수 있는 시간임을 인식하고 있었다.”(p.296)


아마도 그들은 자유의 가치에 대해 알고 있거나, 본능적으로 따랐던 듯싶다. ‘단지 돈만이 아닌 가치들’, ‘재미’, ‘세상을 탐험하는 것’, ‘필요한 사람들에게 일자리 주는 것’ 등 호모 루덴스로서의 성정이 온전하게 발휘될 수 있었나 보다. 돈만이 최고의 가치가 아닌, 다른 가치를 찾을 수 있었던 시대와 정신. 잘 짜인 놀이 세계가 아닌 스스로 여가와 놀이를 통해 자유를 구현할 수 있었던 사람들. 시장지배와 교환관계로부터 자유로웠기에 가능했던 것 아닐까.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일상적으로 하던 활동들이, 자유의 언어를 통해 아름답고, 즐겁고, 더불어 즐길 수 있고, 아낌없이 나눌 수 있고, 다른 사람과 함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는 활동으로 변모했다. 자유의 언어는 이러한 활동에 의미를 부여했듯이 그런 활동으로 만들어진 물건과 서비스에도 의미를 부여했다.”(p.128)


지금 대부분의 우리는 더 많이 일하지만 더 적게 받는다. 기술적으로는 발달했는데, 왜 사람들은 시간에 쫓기고 있을까, 고민해본 적 없는가. 컴퓨터를 쓰면서 과연 일이 더 줄었는가, 생각해보라.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일하는 시간이 더 늘지 않았는가.


그때와 지금, 자유시간과 돈의 비중도 바뀌었다. 지금은 이른바 ‘시간 궁핍’이다. 돈은 있더라도 시간이 나지 않는 상황. 예전에는 돈은 없어도 풍요로울 수 있었다. 시간이 많으니 여가나 전통적인 활동은 DIY로 이뤄졌다. 돈 처들인 ‘잘 짜인 놀이 세계’에 돈 들여 서비스를 받는 것이 아니었다.


미래를 향한 진보, 삶에서 어떻게 노동을 줄일 것인가


켈로그의 6시간 노동제는, 여가가 강력한 동기 부여 기제가 된다는 점을 보여준 사례 같다. 국내에도 유한킴벌리, 포스코 등의 사례가 속속 생기고 있는데, 좀 더 담론이 많이 이뤄졌으면 좋겠고.


뭣보다 켈로그의 경우, 경영자들도 현명하고 개념이 박힌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브라운 사장은 노동 강도 강화, 장인 정신의 상실, 지루함, 단조로운 반복 등 노동자들이 느끼는 불만에 6시간제가 답이 되어 줄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했다. 즉, “노동시간 단축은 노동자들의 불만을 흡수해서 흩어 없애고 노동자들에게 활력도 주는 피뢰침이었다.”(p.62)


그러니, 이런 말이 나오는 건 대수였겠지. “(6시간제 덕분에) 사람들이 덜 피로해졌고 일도 더 잘할 수 있었어요. (일에) 흥미도 더 가질 수 있었고요.”(p.141)


당대에도 켈로그의 6시간제는 국가적으로도 큰 호응을 얻었다. “대공황기에 벌어진 노동시간 단축 법제화 운동 내내(이 운동은 결국 실패했다), 노동계는 <켈로그>의 6시간제 실험을 일자리 나누기의 실제 사례로, 기업에게는 이윤을, 노동자에게는 자유 시간을, 실업자에게는 일자리를 주는 모범사례로 들었다.”(p.107)


모두에게 좋은 제도였고, 좋은 예로 자리를 잡는 듯했다. ‘일’이 아니라 ‘자유시간’이 삶의 중심이 될, 미래로의, 진보로의 길을 닦는 것처럼 보였다. 회사는 임금 총액 지출을 확대해 일자리를 늘렸고, 노동자들은 자유 시간을 더 많이 갖게 된 점을 반겼다.


당시 <인콰이어러> 기사의 결론은 이랬단다. “처음으로 노동자들은 진짜 여가를 가졌다.” 노동자들은 6시간제로 날마다의 일상이 바뀌었다. 일과 의무에서 자유가 중심인 삶으로 바뀌었다. 물론, 자유는 새로운 두려움들도 수반했다. 그것은 제도 교육의 탓도 있다. 여가에 대한 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제도 교육도 그렇지 않은가. 오로지, 좋은 직업, 좋은 일, 그 ‘좋은’에 들어간 뜻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혹은 번듯한, 보수가 많은, 혹은 삶에서 최대한의 시간을 쏟아야 하는, 그런 뜻이지만 말이다.


6시간제의 쇠퇴와 몰락에는 결국 현실 정치의 힘이 개입했다. 그건, 결국 돈으로 시장 지배를 꾀한 자본주의자들의 모략이었던 것 같다. 루스벨트가 일자리 ‘창출’을 적극 내밀었고, 일자리 나누기, 노동시간 단축과 같은 개념이 밀리면서 해방적 자본주의는 쇠락의 길을 걸었다. 노동시간 단축을 앞장 서 추진했던 기업들은 비판을 받았고, 돈 앞에 무력했다.


결국, “일돼지들이 이겼다.” 2차 대전 뒤 노사 합의로 일자리를 줄이고, 입지가 확고한 소수의 노동자에게 풀타임 노동시간을 유지해주기로 한 결정에 대한 한 노동자의 회상이었다. 노동계에서도 분열이 일어났다. 일을 적게 하는 것이 더 많이 받는 것이라며 시간과 임금을 연결하던 노동계의 언어는, 시간과 임금 가운데 하나를 택일하도록 만든 ‘단절의 화법’으로 바뀌었다.


“어빙 번스타인은 복지 자본주의가 노동자들에게 주는 여러 혜택에도 결국에 허물어진 이유는 작업장에서의 통제력과 [경영에의] 민주적 참여라는 노동자들의 근본 열망을 해소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p.151)


이 책, 6시간 노동제에 대한 피상적인 나의 인식을 다시 돌아보게 만들었다. 누구에게나 일이 목적은 아닐 것이다. 수단일 텐데, 그 수단에 거의 모든 것을 뺏기다시피 많은 우리는 그렇게 살아간다. 그 일에서 벗어나고자 택한 지금의 일에서, 나는 어떻게 자유와 시간을 내 것으로 만들 것인가.


또 “나는 일해야 돼”라는 말이 가족이나 공동체에 대한 다른 책임보다 도덕적으로 우선하는 화법이 아닌지, 되씹어본다. 그렇다. 이런 말이 창궐한 것은, 채 100년이 되지 않았다. 책은 2차 대전 즈음 이런 말이 생겼고, 1950년대에 광범위하게 유통된 것으로 본다. 이 말은 가족이나 지역사회에서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을 거부하는 데에도 충분한 이유로 작용했다. ““나는 일해야 돼”는 도적적인 언명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은 한 세대의 <켈로그> 남성들에게 후퇴의 외침이었다.”(p.247)


내가 하는 일이, 우리가 함께 하는 일이, 나는 W.K.의 좋은 예처럼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회사를 일궈 나가면서 W.K.는 돈을 가치 있게 쓰는 방법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됐고, 공장 사람들과 지역사회와 미시건 주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p.80)


노동시간 단축은 그런 것의 일환이었다. 그는 공공 레크리에이션 시설들을 지었고, 레저 서비스도 제공했다. W.K.는 공공 영역이 확장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회복지와 공공의 건강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자유에 미래가 있으려면 공공 영역이 확장돼야 했다. ‘자유롭고 공공적인 생활’에 대한 지원, W.K.의 전설과 희망. 나는 나와 몇 명이 함께 할 일이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공공성을 지닌, 즐거운 먹을거리가 있는 곳.


조직을 위해 개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이 개인을 위해 존재하는, 그런 회사. 회사가 개인의 삶보다 결코 중요하지 않은. 자유를 찾을 수 있는 수단으로 존재하는 회사. 자유에 대한 비전이 다시 살아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우리들.


과연 나는 나아갈 수 있을까. 스스로도 치를 떨었던 ‘회사인간’에서 나는 물론, 함께 하는 노동자들도 제대로 벗어나야 한다. 브라운과 W.K.처럼. 일을 다른 더 중요한 목적을 위한 수단이자, 더 짧은 노동시간, 확장된 임금 지급액을 진보로 여긴 그들처럼.


곧, ‘유쾌한 6시간제’ 씨의 26주기가 다가온다. 1985년 2월8일 사망했거든. 실은, 난 6시간도 많다고 생각하는 인간이다. 에단 호크처럼 3시간만 일하고 싶다. 그리고 그것도 4일제로. 난 참, 구제불능인가 보다. 그러니, 노조나 만들고, 상사나 경영진 들이 싫어하지.

 

올해, 노동자 사장무리의 한 명이 될 내게 그 2시간의 여가가 주어진다면 우쿨렐레가 최우선이다. 그리곤 매장에서 콘서트를 열 테다. 소식 듣거든, 오시라. 공정무역 커피와 유기농 디저트가 무료다. 물론, 6시간제를 찬성하는 매버릭들만 입장 가능하다! 일돼지는 오지 마시라. 구제역, 옮길지 모르니까. 지금 이 나라는, 소, 돼지를 ‘살처분’(이 말, 나는 반댈세!)하고 있는데, 진짜 살처분 해야 할 것은 따로 있다. ‘일 하라’고 무조건 다그치기만 하는 시장만능 사회지도층 자본가들의 대가리에 든 똥.

 

 

잘 가세요, 내 좋은 친구여 - “옛 친구 6시간제에게”


너에게 정이 무척 많이 들었구나.

슬프지만 정말이야.

너는 우리 가족들이 더 가까워지게 해 줬지.

하지만 8시간제 씨가 말하기를, “나가서 일해!”

그가 이겼지.

하지만 우리는 웃지 않았어.

이제 너는 떠나고 우리는 너무 슬프구나.

너와 함께 우리 친구들도 떠나가니까!

“너” 없이는 “그만 두겠다”는 의리 있는 친구들 말이야.

이렇게 너는 우리를 떠나 우리의 설립자인 “K씨” 곁으로 가는구나.

우리의 몸은 “너”를 결코 잊지 않을 거야.

너는 우리 몸에도 너무 잘 해 줬으니까.

그리고 이제 침묵의 시간. 눈물을 흘리자.

우리는 두려움을 없애려고 노력할거야.

그리고 이제 비타민을 꺼내고, 의사에게 전화를 하자.

8시간이 우리 “모두”를 잡았으니까.


- 슬픔에 잠겨서, 이나 사이즈 Ina Sides가 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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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책 2010 선정 도서 24권 리뷰대회 참여

[도서]생각의 좌표

홍세화 저
한겨레출판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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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우리는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의견이나 생각을 말할 때, 그게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은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내 생각이고, 내 사유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누군가로부터, 어디에선가, 주입된 것이 내 생각으로 자리 잡고 있을 뿐. 거기서 파생된 것을 내 것으로 삼았을 뿐. 그나마 ‘사랑’이라는 감정이 온전히 내 것이랄까. 그 사랑도 주입될 여지가 있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내 생각의 주인, 내 삶의 주인이 아닌 것일까. 그냥 무의식적으로 습관적으로 사는 것일까. 문득, 이 사람들을 떠올렸다. 《생각의 좌표》를 읽고, 이십대 내 민무늬 정신에 한 주름을 보탠 홍세화 선생님을 뵙고, 떠오른 사람들이었다. 우선 2차 대전 후 나치 전범 재판에 섰던, 나치스 친위대의 칼 아돌프 아이히만.


그는 수백만 명의 유태인을 학살한 장본인이다. 악마나 다름없는 사람. 허나, 법정에 선 그는 거침없이 유태인을 학살하던 그런 ‘악마’가 아니었다. 그는 그저 부지런한 직장인이었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충직했던 직장인. 유태인 학살도 그렇게 이뤄졌다. 집에선 아내를 사랑하고 자식을 아끼며 신앙심이 돈독한, 평범한 사람이었다. 즉, 성실한 남편에 자상한 아버지, 부지런한 직장인. 


그런 그였다. 히틀러와 나치스를 향해 생각의 좌표가 고정돼 있었을 뿐. 아니, 그의 생각이 아닌, 히틀러가 주입해 놓은 나치적 사고에 젖어있던 사람이었다. 그의 재판을 지켜본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창안했고. 어쩌면 악은 자신의 생각을 갖지 못한 데서 나오는 결과물이다.


그리고 한 명 더. 2002년 82세로 숨을 거둔 ‘트라우들 융에’라는 할머니. 독일인이고, 그녀는 히틀러의 비서였다. 나치에 소속된 적 없었지만, 타이핑대회에서 1등을 했고, 22세에 비서가 됐다. 그녀는 주어진 일에 묵묵히, 열심히 일했다. 일 잘 하는 직원이었다.


히틀러에 대해선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그는 상냥한 상사였으며, 아버지 같은 사람이었다. 상냥하다는 것은 내용이 아니라, 말하고 일하는 방식이 그랬다는 거다.” 그녀는 히틀러의 주선으로 그의 집사와 결혼도 했다. 그녀는 25세까지, 히틀러가 자살하는 순간까지 옆에 있었다. 유서도 그녀가 타이핑했다.


허나, 융에 할머니는 그의 옆에 있으면서도 유태인 대학살조차 몰랐다. 그러다 히틀러 정권에 반기를 든 백장미단의 일원이었던 ‘소피 숄’의 묘비를 보고 난 뒤, 뒤늦게 죄의식에 시달렸다. 뒤돌아보니, 그녀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으나, ‘전범’이었다. 무고한 사람의 희생에 원하건 그렇지 않건, 일조했던 거다.


깨달음을 얻은 융에 할머니, 이렇게 말했다. “정치적 무지가 면죄부가 될 수 없구나.” 그런 깨달음에 말년에 다큐멘터리(<맹점 : 히틀러의 여비서>)를 찍었고, 책(《히틀러 여비서와 함께 한 3년》) 출판에 동의했다. 다큐 감독에게 죽기 전에 이 말도 건넸다. “이제야 나 자신을 용서하기 시작한 것 같다.”


두 사람. 나치의 종적만 아니라면,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만의 생각을 갖지 않았다. 별 다른 생각 없이 지배계급이 주입한 가치나 질서에 갇혀 살았던 거다. 융에 할머니야 말년에 ‘인간의 길’을 깨달았다지만, 아이히만은 히틀러의 생각에 죽을 때까지 벗어나지 못했다. 생각의 좌표로 ‘히틀러’를 상정했던 비극이다.


20대에 반나치 투쟁을 하다가 붙잡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그것이 인생이다》의 프리모 레비는, 비록 일흔 살을 앞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이런 말을 남겼다. “괴물이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위험한 존재가 되기에는 그 수가 너무 적다.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의문을 품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믿고 행동하는 기계적인 인간들 말이다.”


지배계급의 주입에서 벗어나는 방법


모든 것이 돈으로 좌우되는 세상, 과연 그것은 이 세상을 구성하는 우리들의 ‘생각’이었을까. 우리가 그렇게 생각했기에, 세상 구조가 그렇게 짜여 진 것일까. 아니다. 그건, 그렇게 짜야 자신들이 통치하고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한 자들의 모략에 의한 것이다. 성찰하지 않고, 생각이나 이성이 아닌 ‘반응’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귀결된 것이다. 《생각의 좌표》는 그것을 꼬집는다. 야만의 세상은 그렇게 왔다.


자유와 해방. 인간이라면 늘 생각해야 할 과제였다.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해야 했다. 허나, 사회적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시대가 됐다.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이 됐다. 진짜 내 생각을 찾는 작업은 뒷전이고, 그저 주입된 것에 끌려 다니는 신세. 야생이 아닌, 안온하게 집에서 길들여지는 애완견으로 전락했다. 야성을 잃어버린 채, 지배계급이 길들인 야만과 권력, 이권에의 의지만 번뜩이는 신세가 됐다. 겁이 난다.


책은 우리가, 세상이 부박해진 이유를 든다. 주체적으로 형성한 생각이 아닌 지배계급이 갖도록 요구한 의식을 비판 없이 수용했기 때문이다. 매트릭스다. 내 생각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 참 겁나는 일이다. 그럼에도 스스로 묻고 답하는 훈련을 하지 않은 탓인지, 내 생각이 어떻게 내 생각이 됐는지 고민하지 않는다.


그건 제도 교육이 지닌 폐해와도 연관을 맺을 수밖에 없다. 내 생각을 가질 수 있는 훈련을 하지 않은 탓이다. 책은 이것을 ‘윤리적 범죄’라고 단언한다. 암기와 문제풀이 능력으로 학생을 줄 세우고, 대학과 학문을 서열화한다. 학교는 이미 계층화되고, 지배세력의 입맛에 맞는 노예를 양산하는 훈육장소로 전락했다. 반학문이 판치는 학교. 이미 우리는 그것을 목도하고 있음에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다른 생각을 해보지 않은 탓이다. 사교육에 매달리는 이유도 매한가지고.


홍세화 선생님의 대안은, 독서와 글쓰기다. “독서는 사람을 풍요롭게 하고, 글쓰기는 사람을 정확하게 한다.” 그럼에도 한국은 독서하면 공부하지 않는다고 타박하고, 점수에 맞추기 위한 왜곡된 글쓰기를 한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자신의 생각을 가지지 못한 것은 ‘실질적 정직’을 갖춘 글쓰기가 없는 문화와도 관련이 될 테다. 남에게 보이고 점수를 따려는 글쓰기가 아닌, 자신을 성찰하고 돌아볼 수 있는 글쓰기가 요구되는 이유일 것이다.


세상과 제대로 관계를 맺는 방법


《생각의 좌표》는 무엇보다, 자유라는 가치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편한 비루함보다 불편한 자유를 선택하는 주체의 결정을 촉구한다. 인간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결국 자유가 아닐까. 억압이나 강요가 없는 상태에서, 사회적 존재로서 자신이 가진 능력과 적성에 따라 사회에 기여하면서 삶의 의미와 보람을 찾는 것. 그러면서 생존이 담보되는 존재. 누구라고 원하지 않겠는가. 허나 물신 앞에 많은 이들이 무릎을 꿇는다. 자발적인 복종을 맹세하며 세속적인 편안함을 선택한다.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다. 이 책이 지닌 미덕이다.


지배계급이 주입한 프레임에 갇힌 것도 이러한 복종을 불러온 이유도 됐다. 자유의 반대말이 억압이 아닌 무질서와 불안이라는 것. 생각을 하지 않은 결과다. 그러니 자유를 향한 이 책의 무한 애정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많은 선 가운데 단 하나의 고결한 선이 있으니 그것이 곧 자유이다. 우리가 만약 이것을 잃어버린다면, 곳곳에 악이 창궐하며 남아 있는 다른 선에서도 어떠한 맛과 흥미를 느낄 수 없게 된다. 자발적 복종은 모든 것을 망가뜨리며 자유만이 유일하게 선을 정당화한다.”(p.124)  


복지와 나눔도 진짜 자유의 생각이 있는 곳에선, 제대로 전개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포퓰리즘이나 공상적 발상으로 치부하는 건, 지배세력의 주입된 가치에 철저히 종속돼 있기 때문이다. 돈을 많이 가졌건, 권력을 가졌건, 그건 ‘사회’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함께 살기 때문에 돈이든, 권력이든 획득할 수 있었음을 생각하면 그건 생각만 제대로 해도 충분히 납득이 가는 문제다.


요즘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무상급식, 무상의료. 그것은 ‘무상’이 아니다. 근대공화국이 지닌 공공성의 기치가 발현돼야 할 의무다. 의무교육처럼, 인민과 민중이 근대공화국의 주체라면 공공성을 확보해 의무급식과 의무의료 역시 해결해야 할 과제다. 이 책을 통해 그것을 더욱 공고히 다진다. 공공성과 연대의식.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의무급식과 의무의료다. 무상교육제도 또한 사회적 연대의 구체적 실현이라는 말, 찬성표 한 표 던진다.


용산사태도 2년이 지났다. 국가가 그 안에 살고 있는 인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해주는 것이 첫 번째 의무이건만, 이 국가는 욕망의 노예로 전락한 기업처럼 됐다. 한 몸 기댈 국가를 잃어버린 고아들에겐 참으로 을씨년스러운 시절이다.


그렇다고 내 생각을 내동댕이칠 수 없다. 작은 것부터 나는 이 책을 통해 되묻고 질문한다. 나는 왜 아파트를 ‘소유’해야 하는가. 나는 왜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가. 나는 그것들에 매달릴 이유가 있는가. 내 존재의 요구인가. 아니로구나. 부풀린 욕망체계에서 덧씌워진 그 욕망을 내 것처럼 품을 이유가 없음을 확인했다.


나는 미래의 불안에 현재를 담보하는 ‘지구촌 불안동지’로 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오지도 않은 미래의 불안을 앞당겨 할 이유도 없다. 정작 필요한 것은 사회안전망과 공공성의 확충이니까. 나는 그것에 더욱 힘을 합쳐 연대해야 한다.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사회를 생각해 본다. 그 생각에 동조하는 사람들과 연대하면서, 관심과 힘을 보탠다면, 우리가 바라는 사회는 조금씩 더디게라도 오지 않을까. ‘무지와 무관심이 몰상식의 자양분이며 영악한 자들이 뻔뻔하게 군림하는 토양’이 될 테니까, 나는 작은 것부터 하고자 다짐한다. 세상을 당장 바꾸는 것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덜 슬프게 할 수 있는 사소한 일부터.

 

“이상사회를 미리 그려놓고 그것을 향해 사회운동을 펼쳐 나가기보다는 오늘 이 사회의 불평등과 고통과 불행을 덜어내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p.179)


아무렴, 나는 조금씩 지배세력의 독을 빼고 있는 가운데서도, 버티고 견디는 것을 멈출 수 없다. 이 말을 다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 끝내 죽더라도 싸우다 지쳐 시어질 때까지는 살아내야 한다.”(p.119) 진정한 자유인으로 한 순간에 완성될 것을 바라지 않는다. 인간성의 항체를 기르고, 상상력과 희망을 통해 진실과 관계를 맺으면서, 나는 뚜벅뚜벅 느리게라도 나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책은 그렇게 좌표를 던지고, 나는 나의 좌표를 가다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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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미밥 생체실험자, 내 몸이 원하는 식품을 고찰하다! | 북카페 2011-01-30 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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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책 2010 선정 도서 24권 리뷰대회 참여

[도서]현미밥 채식

황성수 저
페가수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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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빈’은 대세다. 그에 미치진 못하지만, ‘현’자 돌림인 ‘현미’ 역시,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상관성은 전혀 없다!) 그것은 나의 집에서도 감지되는 바이다. 1년여 전, 백미를 추방했다. 현미가 바로 그 자리를 꿰찼다. 이제 나의 집 식단은, 찹쌀현미를 가미한 현미가 중심이다. 중심축이 바뀌다보니, 다른 메뉴에까지 영향이 미쳤다. 식단 교체! 육식을 쫓아낸 것은 아니지만, 대폭 준 대신 채식이 늘었다. 입안에서 더 오래 씹고, 밥 먹는 시간이 길어졌다. 뭐, 전적으로 현미의 영향은 아니겠으나, 똥도 좀 더 튼실(?)해졌다.


이상은, 1년여 생체실험을 간략하게 정리한 결과다. 현미 위주의 채식 중심 식단에 지금은 어느덧 익숙해졌다. 내 의도적인 노력보다는 아버지의 주장이 먹힌 결과지만, 딱히 거부감은 없었기에 충분히 익숙해졌다. 현미도 먹어보고 싶었고, 육식보다는 채식을 선호했던 식성도 있었던지라, 오케이, 별 무리 없다. 이 책도 여기에 한 몫 했다. 현미전도사 황성수 박사의 《현미밥채식》.


지금도 그렇지만, ‘편식하지 마라’는 절대 금언(金言)이었다. 몸에 나쁘단다. 나쁜 습관이란다. 입이 원하는 것만 먹고 싶은데,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일침을 놨다. 골고루 먹어야 잘 클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편식이라는 말, 참 듣기 싫었다. 허나, 이 책의 저자, 황 박사는 “편식하라”고 주장한다. 골고루 먹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먹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론이다. 즉, 문제는 먹을거리. 잘 먹는 것이, 곧 잘 사는 길이렷다. 


그의 ‘현미 채식론’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1. 백미 대신 현미를 먹어라.

2. 고기․생선․계란․우유 먹지 마라. 안 먹으면, 고혈압․당뇨병 등이 어렵지 않게 치료된다.


아니, 이 편식론, 기존의 상식에 반기를 든 것 아닌가. 고기는 그렇다 쳐도, 생선, 계란, 우유는 몸에 좋은 거라며, 특히 계란과 우유는 완전식품이라고 알려진 품목이 아닌가! 황 박사는 그런 고정관념에 휘둘리지 말라고 권한다.


물론, 쉽지는 않다. 먹던 습관, 고정관념 때문이다. 사회에서도 자꾸 먹이려 든다. 황 박사는 그래도 꿋꿋하다. 의사생활을 걸고 말하는데, 귀 한 번 귀기울여봄직하다. “의사생활 35년 동안 가장 보람 있게 생각하는 것이 무어냐고 물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바로 이 식생활교육이라고 답한다. 앞으로도 기회가 허락하는 한 교육을 계속하고 싶다. 현미밥채식이 널리 보급되어 많은 사람들이 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기대한다.”(p.19)


내 몸은 식물성 식품을 원한다?!


그는 동물성 식품을 너무 가까이하지 말 것을 권한다. 단백질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단백질은 혈액을 산성화시켜 골다공증이나 요로결석 등을 초래할 수 있다. 흠, 충분히 공감할만한 얘기다. 과도한 육식이 불러올 수 있는 부작용이니까. 고기․생선․계란․우유 역시 산성이라, 조심할 필요가 있단다.


헌데, 단백질이 적으면 문제지만, 많아도 문제란다. 필요 이상 많으면 몸에 부담이 된다는 것이다. 필요 이상의 단백질 분해를 위한 에너지 낭비 등의 문제가 발생한다. 단백질에 대한 새로운 지식이다. 물론 단백질 과다섭취로 몸이 산성화되면 몸에 여러 적신호가 올 수 있음은 알았지만, 책은 단호하다. 동물성 식품의 유해성에 대해 아주 날을 세운다.


우선, 중성지방의 과도한 함유. 비만, 당뇨병, 암(유방암, 대장암, 전립선암)을 유발한단다. 그래서 중성지방이 알맞게 들어가 있고, 중성지방이 몸에 축적되지 않는 식물성식품을 권한다. 특히 현미밥만 먹어도 이 문제는 깔끔히 해결된단다. 또 변비․대장암 등을 예방하고 혈압을 낮출 수 있는 섬유질이 없고, 암 발생이나 노화를 억제하는 항산화 성분도 없다. 이래저래 동물성 식품은 좋은 것 없이 나쁜 것투성이다. 아니, 그것보다 식물성식품의 장점이 더 많다고 보는 시각이 낫겠다.


이 책은 사람들의 동물성식품에 대한 편견에도 칼끝을 겨눈다. 성장 장애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우려, 빈혈이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골다공증이 생기면 어떡하나 싶은 생각 등을 비롯해서 식물성식품만 먹다간 힘도 제대로 쓰지 못할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자른다. 근거를 들어가면서. 더불어 등푸른 생선이 몸에 좋다는 상식(?)에도 태클을 건다.


황 박사는 병에 안 걸리려면 식물성식품과 친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입이 아니고 몸에 필요한 것을 먹는 것. “입이 좋아하는 대로 할 것이 아니라 몸에 필요한 대로 먹어야 한다.”(p.156) 그런데, 입이 심심한 것을 사람들은 잘 견딜 수 있을까. 이성적으론 가능해도, 향과 맛 등의 자극 앞에선 이성도 무용지물이지 않은가. 침이 고이는 것 앞에 장사 없는데, 어떡하나 싶은 생각도 든다.


허나, 황 박사의 이 말은, 자극적이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때때로 목숨을 아주 사소한 것과 맞바꾸려는 어리석음을 드러낸다.”(p.64) 사실 많은 우리는, 아프고 병이 없는 삶을 바란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안다. 우리가 먹는 것이 우리의 몸을 지탱할 것임을.


현미밥채식은 직접 생체실험을 하고 있는 입장에서, 충분히 공감을 할 만한 부분이 많다. 그렇다고 절대적으로 추종하고 맹신한다고 말하기엔 조심스러운 측면도 있다. 중요한 것은, 좋은 먹을거리에 대한 사유와 올바른 정보를 찾는 노력이 수반돼야 한다는 것이다. 몸의 근육은 단순히 고기를 먹는다고 붙질 않는다. 운동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다. 좋은 먹을거리를 찾기 위해선 발품을 팔고, 정보를 선별하고 취합할 줄 아는 것이 필요하다.


약간 비약한 얘기지만, 식량과 식품 문제는 좀 더 깊고 넓은 사유가 필요한 문제다. 작금에 튀니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재스민혁명은 식량 문제와도 연관이 있고, 이집트의 민주화 요구 이면에도 식량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꿈틀대는 식량 위기는 그동안, 지나치게 자본과 밀착해서 사람들의 입맛을 제멋대로 조작한 공장형 육식 체제와 동물성식품의 과잉 생산에도 일정부분 기대고 있지 않을까.


아, 물론 나는 채식주의자라고, 채식 위주로 먹는다고 그 사람을 단정적으로 평가할 생각은 없다. 얼마나 될지는 몰라도, 영향은 일정부분 미치겠지만, 그게 절대적일 순 없다는 거다. 히틀러도 채식주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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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면 소는 누가 키워? 내가! 왜? 사랑하니까!! | 북카페 2011-01-29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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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책 2010 선정 도서 24권 리뷰대회 참여

[도서]스님의 주례사

법륜 저/김점선 그림
휴(休) | 2010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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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결혼(생활)에 대한 한 풍경.


한 여자와 남자가 결혼했다. 각자의 일을 가졌다. 공간 역시 각자의 것을 가졌다. 서로의 작업에 간섭하지 않았다. 서로를 독립된 인격체이자 성인으로 대접했다. 상대를 존중하니, 나에 대한 존중이 따랐다. 상대를 얽매거나 행동을 구속하지 않았다. 개인적 행동의 자유를 보장했다. 사상의 자유는 당연. 비밀은 없다? 아니, 비밀은 각자의 소중한 재산이다.


여느 부부와 좀 다르다. 뭔가, 최신식 같다고? 모던한 결혼생활의 표상 같은? 허나, 이 풍경, 꽤나 오래 전의 것이다. 18세기 영국,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 1759.4.27~1797.9.10)와 윌리엄 고드윈의 결혼 생활. 열혈 여권 운동가이자 페미니스트였던 울스턴크래프트와 아나키스트이자 사회사상가인 고드윈의 그것. 

      

결혼 후 울스턴크래프트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여전히 독립적이라고 느낀다. 나는 앞으로 내 자신의 생각과 원칙들을 발전시킬 것이고, 남편이 거부한다고 하여도 그것들을 내 아이들에게 넘겨줄 것이다.” 울스턴크래프트의 두 딸은 그런 어머니의 자장 안에 있었다. 첫째 프랜시스는 시인 바이런의 애인으로 문학과 사상을 논하며 삶을 꾸렸다. 둘째, 셸리는 시인 퍼시 비시 셸리와 사랑하고 예술적 영감을 공유하면서, 《프랑켄슈타인》을 창조했다.


여성이 사람이 아니었던, 사람취급을 못 받던 시절, 울스턴크래프트의 각성된 자아는 권리와 개념을 장전했다. 결혼은 그런 연장선상이었으리라. 그녀라고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에 앞서, 미국의 사회평론가 길버트 이무레이를 만나 사랑하고 딸을 낳았다. 하지만, 불화가 생기고 헤어졌다. 그녀는 자살까지 시도한 적이 있다. 


남녀 간 불평등한 애정관계가 빚은 비극. 헤어짐 이후 여성에게만 닥치는 비참함과 따가운 시선을 몸소 체험한 그녀는, 여권 신장에 더욱 힘을 쏟았다.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고, 결국엔 사회를 움직였다. 한편, 고드윈은 그런 그녀의 상처를 달래줬고, 여성과 남성의 평등을 전제로 한 프러포즈를 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이를 받아들였다. 두 사람의 결혼은 그런 개념을 탑재했고, 이어 결혼에 대한 바람직한 풍경을 연출했다.


(결혼 안 한) 스님도 안다, 중생들아!


결혼하지 않았으나, 결혼에 대해서라면, 주례사라면, 일가견이 있는 스님, 법륜스님이다. 아니나 다를까, 《스님의 주례사》는 결혼을 말한다. 가만 보면, 우와, 직설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결혼은, 의외로 핑계가 많다. 외로워서, 자식 낳으려고, 부모에 대한 효도, 때가 됐다, 행복하려고, 혼자 살기 싫어 등등. 사실, 핑계라는 수사는 적절치 않을지 모른다. 내 까짓 노총각이 뭐라고, 그들의 결혼을 ‘핑계’라고 재단한단 말인가. 쿨럭.


적어도 법륜스님처럼, 이렇게 말해야지. “행복은 결혼 자체와는 상관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혼자 살면 외롭고, 같이 살면 귀찮아하면서 끝없이 갈등합니다. 이 마음을 잘 살펴야 합니다.”(p.18)


어릴 때야, ‘사랑하면 결혼한다’는 어른들의 주입(?)이 있었다손, 커서 봐도, 결혼에 대한 진중한 고민은 의외로 많지 않은 것 같다. 공고한 제도로서의 결혼이 지닌 무게감 때문일까. 으레 나이가 어느 정도에 도달하면, 세간에선 그것을 ‘적령기’라고도 부른다만, 결혼은 거칠게 말해서, 하나의 의무이자, 사회적 요구가 된다.


물론, 결혼이 인류의 통념이자 공고한 제도로 자리매김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다른 나라의 속사정을 일일이 아는 게 아니라서 딱 부러지게 말할 순 없으나, 다른 사회 제도 혹은 현상과 맞물려 한국엔 좀 더 민감하고 특수한 지점이 있는 것 같다. 사랑과 결혼이 이미 등가물이 아닌 지금, 조건적 태도로서 결혼 같은 것 말이다. 덕 좀 봐야겠다는 태도.


그러니, 법륜스님은 일갈한다. “결혼할 때 마음이 어떻습니까. 선도 많이 보고 사귀기도 하면서 남자는 여자에 대해, 여자는 남자에 대해 이것저것 따져 봅니다. 이때의 근본 심보는 덕을 보자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돈이 얼마나 있나, 학벌은 어떤가, 지위는 어떤가, 성질은 어떤가, 건강은 어떤가, 이렇게 따져 가며 이리저리 고릅니다. 이것이 바로 ‘어떻게 하면 덕 좀 볼까’ 하는 마음입니다. 손해 볼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습니다.”(p.32)


고로, 이런 거다. 내가 재는데, 상대방은 안 재니? 법륜스님의 직설이다. 십자가 앞에 두고 염불하는 짓거리 하지 말란 거지. 내가 기대는 게 있으면, 상대방도 그런 법이건만, 착각이라는 거. 사랑? 덕 볼라고 하는 주제에, 쯧. 법륜스님이 혀를 찰만하다. 


그러니, 아예 이해관계로 결혼해도 괜찮다고 위로(?)한다. 서로 이익을 정확하게 나누고, 주고받는 관계. 한 만큼 돌아오는 혜택. 더 뭘 바라? 이 깔끔한 것을 주는 것 없이 받으려고만 하니, 갈등이 커진다는 거다. 딱딱 맞아떨어진다. 이만하면, 결혼(상담) 종결자의 태도다.


법륜스님의 진짜 결론은 이거다.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만나 장사를 하고 거래를 하지만 부부지간에는 장사를 하거나 이해득실을 따져서는 안 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진정한 부부가 됩니다.”(p.138)


세속에 찌들어 살다보면, 이게 잘 안 될 때가 있다. 거래하고 이해관계 득실 따지는 통에, 아내나 남편한테까지 이런 잣대를 들이대는 실수를 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자기 성찰이요, 반성이다. 내 안의 스트레스를 살피고, 자신의 말과 행동을 돌아봐야 한다. 그것도 연습이 필요하고, 훈련이 필요하다. 결혼이 사랑만으로 그냥 되는 것이 아닌 이유다.


여기 스님의 직설은, 이미 결혼한 사람은 뒤를 돌아다보고, 결혼을 생각하는 사람은 눈여겨 볼만한, 결혼에 대한 어떤 진실이다. 아, 그래서 많은 부부관계가 질곡과 고난에 빠지는구나.


“부부관계는 사랑으로 맺어졌다고 흔히 말하지요? 그러나 실제로 부부가 사랑으로 맺어진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백에 하나 있을까, 말까예요. 그럼 부부는 무엇으로 맺어질까요? 대부분의 경우 극도의 이기심으로 맺어집니다. 인간관계 중에서 이기심이 가장 많이 투영되어 맺어진 관계가 바로 부부관계예요. 여러분이 지금까지 알았던 것과는 정반대죠?”(p.76)


결혼의 아이러니가 그렇다. 누구나 행복하려고 하는 결혼인데, 희한하게도 결혼 때문에 불행이 더 드러난다. 거참, 결혼의 역설이라고 해야 하나. 남편이나 아내를 원수라고 부르고, 가족이라는 핑계로 섹스도, 교감도 되레 더 멀어진다. 뭐, 늘 행복하란 법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결혼 거참…


혼자서도 잘 서야, 둘이서도 잘 선다


“결혼은 반쪽 두 개가 합쳐져서 온 쪽이 되는 것이다.”

그 놈의 반쪽 얘기. 어릴 땐 의아했고, 커서는 지겨웠다. 무슨 얼어 죽을 반쪽인가, 말이다.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건 분명하지만, 반쪽이라고 표현할 건 또 뭐고, 두 반쪽 모인다고 온전해지는 것 맞아?


투덜이 스머프에 가까운, 나는 저 말을 만든 사람은 이혼 않고 온 쪽으로 진짜 잘 산 걸까, 의구심도 가졌다. 혹은 국가 노동력 확보, 기득권 유지 등의 목적을 가진 지배세력의 수사가 아닐까, 의심했다. 물론, 지금도 의구심을 갖고, 의심하고 있다. 결혼이 또 다른 세계를 열어주고, 배움을 추가시키는 것도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해질 수 있는 방법은 아니다.


그러니, 이런 수사에 현혹돼 외로워서, 반쪽을 찾고 싶다며 결혼부터 생각하는 사람들이 양산된 건 아닐까. 아직 사랑도 잘 몰라서 버벅 대는 노총각의 짱구로도, 결혼은 외로움의 해결사가 아니다. 결혼이 외로움 종결자는 아니다. 앞서 언급한 울스턴크래프트와 고드윈의 관계에서도 그렇듯이.


숱하게 동서고금에 울려 퍼질 이 말. 엄마 혹은 아빠가, 딸 혹은 아들에게 건넬 이 말. “사랑이 밥 먹여 주냐.” 자식의 안정과 편안을 바라는 부모의 마음을 타박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그 말을 건네는 부모는 사랑이 밥 먹여준 결혼을 하지 못한 미경험자라서 그럴 것이다.


나는, 사랑이 밥 먹여준다고 생각한다. 덕 본다는 게 아니라, 사랑으로 행복한 순간. 내 식대로 바꾸려거나, 내 방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가 다른 방식이 공존할 수 있어서 좋은 것. 배고프면 한 술의 밥에도 행복이 있다고 했다. 그 사랑해서 나오는 순간순간의 행복을 위해 사람은 움직인다. 밥이 나온다. 


물론, 그 전에 중요한 것은 스스로 일어나서 행복해지는 법을 터득하는 것이다. 혼자 있어도 행복할 수 있으면, 둘이서도 행복할 수 있다. 결혼하면 혼자라고 느끼는 외로움을 타파할 수 있을 것 같나? 아니, 둘이 있을 때의 외로움은 더욱 처절한 법이다. 그건 자명하다. 서로의 존재에 대한 존중과 독립을 인정해주는 것. 내 욕심대로 상대를 재단하지 않는 것. 나는 법륜스님을 통해 또 하나를 건진다. 함께 살면서 사랑이, 결혼이 더 풍성하고 깊어지지 않음에 대한 통찰.


행복은 결혼한다고 저절로 오는 것은 아닙니다. 결혼과는 상관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혼자 살면 외로워하고, 같이 살면 귀찮아합니다. 결혼은 혼자 살아도 외롭지 않고, 같이 살아도 귀찮지 않을 때 해야 합니다. (p.9)


결혼하면 소는 내가 키워야지!


스님은, “상대를 인정하고 상대를 이해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했다. 그건 일종의 내려놓기다. 다른 존재를 내 욕심에 맞춰 개조하고, 상대의 문제까지 내가 몽땅 해결해주겠다는 건 그저 과욕이다. 결혼에 대한 환상도 그만. 외로움을 날린다거나, 행복만 지속될 것이란 꿈도 그만. 존재의 결합은 변화를 수반하지만, 서로 인정하고 합의하면서 살 준비가 돼 있느냐, 상대에게 덕 볼 생각이 아닌 덕을 줄 것이 있느냐를 놓고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이 주례사는 여느 주례사와 다르다. 듣기 좋은 말만 늘어놓는 것이 주례사라지만, 스님의 것은 다르다. 듣기 싫으면 책을 덮으면 그만이겠으나, 그러기에 이 책은 아깝다. 결혼은 온 쪽이 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많은 경우, 상대 덕 보고 대가를 요구하는 마음 때문에 한다. 스님이 그것을 제대로 포착했다. 반쪽을 맞춘다고 아귀가 딱 맞아떨어지리란 보장도 없고, 맞아 떨어진다손, 금이 간 것이 완벽하게 없어질 리도 없다. 고로, 결혼은 종착역이 아니라 출발점이다. 종결자가 아니라, 시작자.


책을 읽고 다짐(?)한 것이 있다. 결혼을 하면, “소는 누가 키워”라고 말하지 않겠다. 소는 내가 키우겠다. 구제역 창궐로 소들을 하늘나라로 보내는 일만 없으면 참 좋겠다. 올해 한 살 더 먹었다만, 별로 궁금하지도 않으면서, “왜 결혼 안 했느냐”고 묻는 사람, 별로 흥미 없다. 그런 사람들에게 나는 되레 “지금, 사랑하고 있니?” “결혼하고 더 행복하니?”라고 되묻고 싶다.


스님을 통해 얻은 결론이라면, 결혼은 언제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어떤 사람과 하느냐가 중요하고 포인트다. 결혼은 외로움 타개책 혹은 외로움 종결자가 아니며, 홀로 설 수 있는 성숙한 사람들의 동맹이라는 것. 다만 결혼을 한다면, 혼자 사는 것보다 손해를 보면서도 살 수 있고, 그것을 기쁨으로 삼고 싶다. 그렇게 나를 닦아 놓고 싶다. 이 책은 그러니까, 일종의 ‘The Art of Wedding’이 되겠다. 광고 카피대로, 결혼하기 전에 읽으면 좋겠다. 어쩌면 읽고 나서 결혼을 유보하거나 없었던 일로 했던 사람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뭐 어때. 깨달음을 얻었다면 결혼쯤이야,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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