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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남자의 종말

해나 로진 저/배현,김수안 공역
민음인 | 2012년 10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그동안 억지로 보지 않으려고 했던 사실을 통계와 취재로 조목조목 드러낸다. 남자의 새로운 정의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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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훈, 뼛속깊이 마초인 남자. 이렇게 말했다

먹고사는 일보다 더 숭고한 남자의 길은 없다.”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 마초수컷에게 주어진 신성한 의무임을 강조한 것이리라. 아무렴. 그것은 여전히, 대한민국 남자의 목을 죈다. 가족을 제대로 부양하지 못한다면, 수컷의 자격은 없다. 그래서 외친다. 남자는 괴로워. 한국뿐이랴. 일본에도 동명의 영화가 있다. 그래서 가부장제는 유효했다. 괴로운 수컷의 입지, 가부장제라도 주어져야지. 수컷들, 일자리를 더 많이 가져야지. 그래야, 먹여 살리지. 숭고한 길인데, 아무렴. 

 

그러나 그것, 균열이 왔다. 증거는 곳곳에서 나온다. 요즘 한 법무부도 가세한다. 지난 21, 54회 사법시험 최종 합격자 506명 가운데 여성 합격자 비율이 41.7%에 달했다고 발표했다. 사상 최고치. 여성 합격자 비율이 40%를 넘어선 것은 2010(41.5%) 이후 역대 두 번째. 손쉬운 말로 여풍(女風)’. ‘월드컵 저주라는 남자들의 변명이 따라붙는다. 6월 말, 사시 2차 시험이 월드컵 기간과 겹쳐 남자 고시생들의 집중력을 떨어뜨린단다. 비겁한 변명. 얼마나 못났으면 월드컵에 책임을 돌리나.

 

여자들의 득세,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 똑똑하니까! 나는 그것을 눈으로 목격하고 몸으로 체험한다. 각종 강연을 가면, 여자들이 훨씬 많다. 모든 공부의 장, 여성들 숫자가 압도적이다. 남자? 희귀동물이다. 과거, 지성의 영역은 남자의 몫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여성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본디 지성의 영역은 여성의 몫이었던 양. 상대적으로 수컷, 공부를 멀리 했다. 고전평론가 고미숙은 디지털문명이 여성의 음기를 사회적으로 순환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나는 남자들의 뻣뻣함이 사회의 유동성을 감당하지 못하고 여성의 유연함에 밀려서라고 해석한다. 수컷은 점점 사회적으로 도태되고 있다.

 

미국 통계에서도 그것은 확인할 수 있다. 2009, 노동력의 추가 여성 쪽으로 기울었다. 역사상 처음 그렇게 여성 노동력이 남성을 능가한 뒤, 여성은 계속 5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남자의 종말은 그것을 조목조목 확인해준다. 저널리스트답게 통계와 취재를 바탕으로 남자들이 왜 종말의 상황에 도달했는지를 증명해준다. 사실, 현실에서도 느낄 것이다. 남자다움의 낡은 구조는 설 곳을 잃고 있다. 거기서 수컷의 딜레마가 생긴다. 그것을 대체할만한 새롭고 명확한 구조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것. 남자들, 설 곳이 없다. 그러니, 이런 말, 고개를 끄덕인다. “남은 것은 액세서리뿐, 말하자면 맨세서리(mancessory)’들뿐이다.”(p.19)

 

고개를 끄덕인다. 이 책, 일리가 있다. 새로운 남자의 정의가 필요한 시대가 왔음도 자각할 수 있다. 명백하다. ‘남자다움이라는 말로 표현했던 마초적 위상은 점점 약발이 딸린다. 요즘 남자들, 특히 젊은 남자들, 과도기에 놓일 만하다. 더 이상 아버지처럼 살지 못하는 것은 명백한데,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모른다. 배운 적이 없다. 그렇다고 유연하지 않은 남자들, 어찌하오리까. 저자 해나 로진은 남자의 종말이라는 자극적인 수사를 쓰면서 남자들 분발을 촉구하고 있다.

 

그녀의 처방전은 이렇다. “새로운 역할, 새로운 국면으로 이행하려면 일정한 자질이 필요하다. 유연성, 재빠름, 그리고 정체성에 대한 폭넓은 감각 등이 그것이다.” (p.27)

 

그러니까, '남자의 종말'은 '남자의 몰락'을 얘기하는 것, 아니다. (누군가에겐 그것이 몰락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다!) 관성과 관습에 얽매여 어떻게든 거부해 온 여성성을 온 몸과 오감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갖추자는 것이다. 남성 우월주의의 틀인 가부장제를 주장하는 것, 능사가 아니라는 것. 해나 로진은 그것을 가모장제라는 표현으로도 대신한다.

 

이 책은 달라진 섹스의 주도권부터 언급함으로써 충분한 주의를 끈다. 여성 스스로 원하지 않는다면 누구와도 섹스하지 않을 수 있고, 경제적 안정과 사회적 영향력을 위해 남자를 배경으로 하지 않아도 좋은 시절이 왔다. (미국과 우리나라는 아직 시차가 있는 것 같긴 하지만.) 바람직한 변화다. ‘성 혁명으로 명명된 이것은 여성의 태도와 행동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세상의 공고한 질서를 흔들었다. 문제는 남자들의 자세다. 그것은 성 혁명이 남성을 바꿔놓는 데 기여하지 못했다기보다 남자들이 저항을 한 것이다. 뭔가 뺏긴 것 같고 탐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 아무리 잘난 남자도 대세를 거스를 순 없다. 원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여자들은 전통적인 부양자역할에 발을 들이고 있으며, 고개 숙인 남자들이 할 수 있는 건, 복종이다. 남자들의 의기양양함을 부추겼던 신자유주의적 성장주의 엔진은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그건 남자다움으로 돌파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이미 전 지구적 경제는 여성이 남성보다 더 성공하는 곳이 되었”(p.167)으며, “장기적 관점에서 본다면, 현대의 경제는 여성이 규칙을 만들고 남성이 따라잡는 흐름이 되어 가고 있다.”(p.170) 대학을 장악한 여성의 수도 그렇고, 온갖 시험에서 수석이나 다수를 차지하고야 마는 여성들도 그렇다.

 

이 사회에서도 피부로 느낄 만큼 극적인 것이 있다. 바로 에 대한 선호. 불과 십 수 년 전만 해도 남아선호는 쉬이 바뀌지 않을 단단한 현상이었다. 그러나 지금, 다르다. 아들은, 과격하게 말해서 별로 쓸모없는 애물단지처럼 낙인 찍혔다. 반면 딸은 가정의 중요한 자산이다. 딸딸이 부모라고 구박 당하지 않는 집도 상당히 늘었다. 아들 더 낳겠다며 용을 쓰는 집도 보기 힘들어졌다. (물론, 아이를 가진다는 것 자체가 부담이 된 시대이기도 하다!)

 

남성성, 참으로 버거운 것이었다. 남자들에게도 그랬다. 강한 척, 센 척, 용감한 척, 삼척으로 겹겹이 둘러싸야 존재감을 인정받는 것으로 착각했던 현실. 울고 싶어도 울지 못했던 남자들(최소한 이 사회에서 말이다). 그러나 이것, 허장성세요, 자존감 없는 자의 비애였다.

 

이론가들이 오랫동안 주장한 바에 따르면, 남성성이란 전적으로 사회적 구성물로서, 여러 세대를 거쳐 남자들이 착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전투용 가면이나 갑옷의 일종이다. 이는 가면이나 갑옷이 벗겨지면 자신의 부드러움이 발각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p.354)

 

그래서 이 책은 결혼이라는 제도가 여성보다 남성에게 훨씬 더 필요하다는 불편한 진실을 폭로(?)한다. 생존하기 위해 남성은 결혼이 필요하단다. 주변을 둘러봐도 그건 타당한 주장 같다. 남자들은 홀로 서는데 익숙하지 않다. 취약하다. 유연하지도 않다. 가부장제의 관습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가 지적한대로, 미국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인 듯한데, 요즘 혼인 시장의 문제는 여성의 약함이 아닌 여성의 새로운 지배 때문에 초래되는 것 같다. 여자가 남자보다 교육을 잘 받고, 똑똑하여 결혼은 복잡한 방정식이 된다. 높은 지적 수준의 여성이 이른바 골드 미스로 남는 경우다.

 

여성의 위치 상향이 마냥 긍정적인 것으로만 작동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인데, 성 역할의 반전은 이전과 또 다른 현상도 야기함을 책은 지적한다. 여성의 폭력성이나 공격성에 대한 사례가 그것이다. 저자는 영악하고 잔인한 여성 살인자 등을 예로 든다. 그녀가 인터뷰한 베스트셀러 범죄 소설 작가 패트리샤 콘웰은 그것에 대해 이리 분석한다. “여성이 적절한 힘을 가질수록 여성의 행동은 다른 힘 있는 사람들을 더 많이 닮아 갈 겁니다.”

 

저자가 남자의 종말, 여자의 부상에 대해 다각도로 조사했음을 증명하는 건, 여성 지배가 마냥 유토피아만은 아니며, 여성의 부상엔 자본의 요구와 같은 요인이 있었음을 밝힌 대목이다. 여성이 지배하면 우리의 미래는 장밋빛일까. 그렇지 않다. 그런 환상은 외려 위험할 수 있다.

 

여성적 유토피아의 상상 뒤에는 늘 우월감이 숨어 있었다. 더 친절하거나 부드럽다거나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 무슨 일이라도 하는 것이 반드시 여성의 가장 큰 특성은 아니다. 트웬지 교수가 알게 되었듯이, 여성은 사회적 신호에 반응하여 시대의 허용치에 맞추기 위해서 인성을 바꾸는 성향이 있다.”(p.258)

 

더구나 우리는 지금, 물론 예단할 필요는 없겠으나, ‘최초의 여성 대통령운운하며 언어유희를 펼치는 대선후보를 알고 있다. 저자도 이에 긍정적이다.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점만 인지할뿐, 그가 어떤 인물인지는 모르는 것 같다. 박근혜, 여성이라는 타이틀을 대표할 수 있는 정치인이 아니다. 더구나 그는 지금까지의 정치적 행보에서 여성으로서의 장점과 역할을 제대로 보여준 적이 없다. 외려, 남성적이거나 퇴행에 가까웠다. 정상의 위치에 여성이 올라가야 하는 명제에는 동의하나, ‘어떤여성인가를 따져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아울러, 십 수 년 전부터 유리천장 운운하며 여성 임원에 대한 관심이 적극적으로 표현된 것에 대한 분석. 경제학자 조던 시겔을 필두로 한 하버드대 비즈니스스쿨 연구팀이 한국의 사례를 살펴본 뒤, 이리 종결 짓는다. “여성 임원에 대한 갑작스런 관심의 원동력은 공평성이나 형평성의 추구가 아니라 새로운 유형의 경쟁력을 찾는 예리한 시각이었다.”(p.331)

 

이렇게 또한 연결된다.

 

세상은 여성이 강력한 힘을 갖출 태세가 되어 있다는 것은 마지못해 의식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는 되어 있지 않은 전환점에 서 있다. 시겔의 분석에 따르면, 여성 임원을 채용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기업들은 결실을 누린다. 시겔은 기업이 여성 관리자들을 늘리면 시간이 흐르면서 수익성이 개선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p.332)

 

물론 그것,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여성의 가능성과 역량을 발굴한 것이 기업(자본)이었다는 점은, 좋은 말로 기업의 센스가 돋보였음을 보여준다. 아마도, 성장에 매달렸던 까닭이었겠지. 그것이 또한 다른 주체와 사회를 추동한 원동력이 됐을 수도 있다. 여성 임원의 탄생과 고위직 진출이 적극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준 사례는 이 책을 읽는 여성들의 자존감을 높여줌과 동시에 동기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건 뭐랄까. 이른바 잘난 여자들의 경우에 국한된 한계가 있다. 그렇지 못한 여성들의 경우는 여전히 가부장제와 남성 우월주의의 울타리에서 신음하고 있다. 계급의 문제가 소홀하게 다뤄지고 있다. 이 책의 한계다. 다국적 기업 등의 여성 경영자나 임원은 여성 중에서도 소수다. 숱하게 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여성의 지배'와는 먼 세계에 살고 있다. 계급적 이해관계에서 소외돼 있다. 육체노동의 약화가 여성 노동력의 증대를 가져왔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으나,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 상대적으로 임금이 높은 남성 대신 여성을 택한 자본의 꼼수도 있다. 똑똑한 여성의 도약과는 명백히 다른 지점이다.


특히, 여성이 왜 주부양자가 되는지 심층 있는 고찰은 부족해 뵌다. 단순히 여성 노동력이 지배적이 됐고, 그 증가를 확인하는 것에 끝날 것이 아니라, 어떤 사회적 현상과 요인이 자리잡고 있는지 좀 더 파고들었어야 했다. 여성이 노동시장에 나가는 다양한 이유를 캐고, 잘 나가면 결혼을 왜 하지 않으려 하는지, 좀 더 알고 싶다. 자아성취가 아닌 맞벌이를 할 수밖에 없는 그닥 달갑지 않은 상황도 분명 있을 테니까. 성과 함께 계급적 이해관계를 더 풍성하게 담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어쨌든, 세상은 하룻밤 새 뒤집어지지 않으나, 물방울 하나하나가 바위를 갈라지게 한다. 4만 년의 남성 지배에 금이 가게 한 여성들의 도약은 불과 40년 전부터다. 여전히 지뢰밭이요, 장애물이 포진해 있다. 이 책은 여성들의 보다 굳건한 지배를 촉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남자의 몰락을 당연한 것으로 조롱하는 책도 아니다. 변화의 양상, 지배 질서의 흔들림을 잘 보면서 여남(女男)이 서로에게 삼투할 것을 권한다. 바람직한 변화를 위한 두 성()의 깨달음과 성찰, 그리고 현상에 대한 직시와 이해를 돕는다.

 

한국 엄마의 이야기는 특히 인상적이다. 저자의 저널리스트적 자세가 돋보이는 대목이기도 한데, 아들에게 조용히 말하라고 가르치고, 분홍색 봉제인형을 사 주고, 태권도 대신에 요리와 발레 학원에 보내는 엄마의 이 말. “저는 새로운 시대에는 마초가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아들이 잘 살기를 바란다면, 아들에게도 여성적인 면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해요.”

 

, 여성은 자신의 변화뿐 아니라, 후대까지 내다보는 혜안을 지녔구나. 여성은 유연하고 민첩하게 자신을 바꿀 수 있음을 증명했다. 그것, 뻣뻣한 남성에게 필요한 덕목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가야할 것인지에 대한 힌트다.

 

처음으로 돌아가, 소설가 김훈이 정한 남자의 정의. “먹고사는 일보다 더 숭고한 남자의 길은 없다.” 뼛속 깊이 보수임을 자처한 김훈의 삶과 생활에서 우러나온 보수성을 타파할 수는 없다. 다만, 보다 젊은 남자에게 필요한 새로운 남자의 정의는 이런 것, 아닐까.

 

남자는 여자처럼 생각할 줄 알아야 남자라고 했는데, 이 말은 민감하고, 동정적이며, 자기 기분을 잘 아는, 그러니까 언제 웃고 울 지를 아는 사람이 남자라는 것이다.”(p.357)


나라는 수컷, 이런 남자가 돼야 할텐데. 관념과 생각으로 그칠 게 아니라, 감수성을 좀 더 연마하고 닦아서 몸과 삶에서 이런 기운이 퍼져나와야 할 일이다. 쉽진 않겠지만, 인생에서 꼭 해봄직한 것이 아닐까. 진짜 남자라는 것. 


참고로, 여자들이 수컷들을 만날 때 꼭 챙겨봐야 할 것이 있다. 삶의 미시성이다. 겉으로 진보나 보수를 언명하는 것, 그건 별로 믿을 게 못 된다. 더 중요하게 봐야 할 것은 부엌에서 어떤 행동을 하는가가 더 중요하다. 부엌에서의 행태, 진짜 남자와 수컷을 구분하는 중요한 경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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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9시의 커피] 안철수와 프레디 머큐리를 블렌딩한 커피! | 밤9시의 커피 2012-11-25 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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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9시의 커피] '하쿠나 마타타'로 떠올리는 프레디 머큐리

"난 스타가 되지 않겠다. 

전설이 될 것이다. 

로큰롤의 '루돌프 누레예프'가 되겠다!" 


- 그룹 퀸, 프레디 머큐리


이것은, 그저 넋두리입니다. 

어떤 의미도 부여할 필요, 없고요. 그저 커피 한 잔에 담긴 단상이라고만 해두죠. 특히, 여기 등장하는 남자 셋, 어떤 관련 없이 나열한 것에 불과해요. 커피를 만들다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른 생각의 가지들. 


어제, 한 남자가 다시 '양보'를 했습니다. 

그것, 깊이 파고들자면 양보라는 단어로 단순화할 수 없는 무엇이겠지만, 어쨌든 그는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습니다. '단일화'라는 말이 저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보다 더 좋은 말이 선뜻 떠오르진 않지만, 그는 자신이 걸어왔던 길에서 일단 '멈춤'을 합니다. 한 남자, 안철수입니다.



안철수라는 이름. 

저는 단 한 번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안철수'가 세상을 바꿀 이름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습니다. 세상의 흐름에 자신만의 인장을 새기며, 그 흐름을 바꿀 수 있는 어떤 초석이 될 순 있으리란 기대 정도는 했었죠. '혹시 어쩌면…'하고 살짜쿵 가슴이 뛰기도 했으니까. 진짜 이뤄야 할 무엇을 향한 과정으로서의 안철수. 그래서 그 이름, 개인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열망과 또 어떤 바람이 섞이고 뭉쳐 '안철수'라는 단어로 표현이 된 것이겠죠.  


그의 눈에 눈물이 맺히고 살짝 울먹입니다.  

개별의 인간에게 새겨진 구체적인 존엄 같은 게 있었어요. 그 눈물과 그 발언의 실체는 내가 알 수 없는 심연이겠지만, 그렁그렁한 눈망울에 맺힌 구체적 존엄 앞에 나는 겸손해야 했어요. 그의 발표는 내게 꼭 어떤 '고백'처럼 느껴졌습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어요. 


맞아요. 그는 내 스타일, 내 타입, 아니죠.

그럼에도 덩달아 슬펐습니다. 슬픔이 찰랑거렸습니다. 이상하게도. 살짝 아프기까지. 이상하게도. 아마, 안철수라는 개인때문이 아니라, 안철수라는 이름에 묻은 어떤 마음들 때문이었겠지만. 실토하자면, 안철수라는 이름 아래 3040자문단의 일원으로 살짝 참여했습니다. 어쩌다 그런 것이었지만, 그에게 조금씩 마음을 주고 있었나 봅니다. 슬프고 아픈 걸 보니. 그는 일단 멈추고 물러섰겠다고 고백했지만, 안철수라는 이름에 담긴 어떤 열망과 마음, 그것은 끝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안철수라는 이름의 약속이 계속 지켜졌으면 하는 바람, 아마 그럴 것이라는 기대, 갖고 있습니다.     


그 고백이 있고, 다음날입니다. 

한 남자의 소식에 덩달아 그 남자를 떠올렸습니다. 아니, 그 남자는 며칠 전부터 계속 맴돌던 이름이죠. 더 정확하게는 노래. 그의 노래들, 며칠 전부터 듣고 있었거든요. 그는 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 태어났습니다. 인도에서 자랐고, 런던에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는 뮤지션입니다. 영원히 빛날 이름을 가진 멋쟁이입니다. 그 남자, 프레디 머큐리입니다. 



프레디 머큐리라는 이름.  

그룹 퀸의 보컬리스트입니다. 지루하고 따분한 삶을 사는 것이 싫었고, 1971년 퀸을 만듭니다. 전설이 되겠다는 호언장담, 허세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전설이 됐습니다. 그가 음악을 시작한 이유는 단순했대요. 음악을 듣는 사람들 심장박동을 더 빨리 뛰게 하기 위함. 그는, 퀸은 음악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건 존 레논이 하면 될 일이지, 자신들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 거죠. 음악을 듣는 그 순간만이라도 심장박동이 뛰고 즐겁고 신나면 되는 것. 그런데 재밌는 것은, 그의 죽음이 세상을 조금 바꿔놓았습니다. 에이즈에 대한 편견을 누그러뜨리기 시작한 것!


그는 한 마디로 잘났습니다. 

비아냥이 아니라, 진짜 그랬어요. 직접 음악을 만든 싱어송라이터였고, 공연을 기획하고 폭풍 무대를 만들었습니다. 무대에서의 끝내주는 퍼포먼스와 카리스마는 어떻고요. 뮤직비디오를 만들 때는 직접 아이디어를 내는 기획까지. 음악으로 사람들 심장박동을 뛰게 하겠다는 그의 장담은 허세가 아니었던 거죠. 20년 내내 노래를 했고, 무대에 설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겠죠. 


그의 이런 바람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난 온세상이 내 노래를 들었으면 좋겠고, 내가 무대에 섰을 때는 모든 이들이 내 노래를 듣고 날 바라봐 주길 바란다. 어떤 형태로든 내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는 사실이 좋다. 다만 30분이라도 사람들이 나로인해 운이 좋다고 느끼거나 기분이 좋아진다면, 찌푸린 얼굴을 펴고 잠시 미소를 지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나에게 가치있는 일이다."


그는 약속을 지킬 줄 아는 의리남이었습니다. 

잘난 그였기에, '퀸=프레디 머큐리'라는 등식을 떠올리기에 충분했기에, 주변에선 퀸을 탈퇴하고 솔로활동을 하라는 유혹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팀을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죽는 날까지 밴드를 떠나지 않은 '의리자(者)'. 퀸의 성공에 기여한 자신의 몫은 1/4이라고 말했다죠. 물론 퀸의 리더라고 생각한 적은 없어도 가장 중요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은 해봤다지만. 


프레디가 세상을 떠난 1991년 11월 24일. 

지금으로부터 21년 전. 나는, 그해 그를 처음 알았어요. 그가 세상을 떠난 직후. 당시, 더벅머릴 길러서 완전 어설픈 반항아 록스타 같던 시절, 한 무리의 또래들 중에 나름 가장 예뻤던 여학생으로부터 다양한 노래를 녹음한 테이프를 선물 받았었죠. A면 첫 곡이 'Love of My Life'(B면 첫 곡은 광석 형의 '사랑했지만'). 퀸의 노래를 처음 들었습니다. 프레디 머큐리라는 뮤지션도 처음. "오래 사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너무 지루할것 같다"면서도 "난 제발 에이즈만 걸리지 않게 해달라고 늘 기도한다"던 그는, 결국 에이즈로 세상을 떠납니다. 고백한 다음날, 에이즈로 그 좋아하던 음악을 멈춥니다. 프레디 머큐리의 폭풍 보이스도 이젠 안녕. 


물론, 오해하지 마세요. 

한 남자와 그 남자의 고백은 완전 다를 뿐더러, 퍼포먼스가 끝났다고 끝난 것 아닙니다. 안철수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계속 걸어갈 터이고, 프레디 머큐리의 노래는 21년이 지난 오늘도, 울려퍼지고 있습니다. 내가 그를 기억하고, 세상이 그의 음악을 영원한 전설로 인정합니다. "로큰롤의 '루돌프 누레예프'가 되겠다!"는 그의 말에 완전 수긍. '루돌프 누레예프'는 죽을 때까지 춤을 춘 전설의 발레리노입니다.  


두 사람, 위풍당당했습니다. 

한 남자, 국민을 사랑하고, 고전적이고 낭만적인 자유주의자 면모를 보이면서 약속을 지킨다며 일단 멈춰섰습니다. 그 남자, 여자와 남자를 사랑하고, 물고기와 고양이를 사랑하며, 자신의 호언장담을 죽는 그날까지 지켰습니다. 두 사람 모두, 누군가의 심장을 뛰게 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이 남자, 준수는 그렇게 두 남자를 기억합니다. 

오늘, 내 좋은 커피 동료들과 찾은 커피하우스. 안타깝게, 탄자니아가 없습니다. 프레디 고향에서 날아온 향미로 한 남자와 그 남자의 향을 음미할까 했는데 말이죠. 아쉬워서 같은 네 글자짜리 온두라스 커피를 마셨습니다. 물론, 탄자니아와 온두라스, 서로 대륙은 다르지만 말이죠. 하하.  



11월 23일, 안철수가 대선후보로서의 행보를 멈췄습니다. 

(정치인으로서 그는 계속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약속 때문에라도!!)  

11월 24일, 프레디 머큐리가 뮤지션으로서의 노래를 멈췄습니다. 

(전설로서 그는 영원히 살아 있을 것입니다! 호언장담 때문에라도!!)

그리고, 준수의 2012년은 이것으로 끝났습니다. 달력에 남은 날짜는 그냥 덤. 

(커피 만드는 남자로서 그는 계속 이야기를 만들 것입니다! 삶 때문에라도!!)  


오늘 밤9시의 커피는 탄자니아 킬리만자로를 준비했습니다. 그에 어울리는 노래는, 

Don't stop me now. 지금, 날 막지 마.

그래, 모두 멈추지 마. 프레디도, 안철수도, 나도, 커피도. 

나도 그들처럼, 관료주의에 잠식 당한 내 다른 일을 그만두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그것,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상업영화 시스템으로 들어간 내 몸을 빼고, 독립영화를 다시 찍기로 합니다. 나는 그것이 어울리는 사람이니까요. 그것은 곧 다시 시작이며, 영원한 향기를 뿜어내는 일이기도 해요. 좋은 것만 누리기에도 인생은 너무 짧습니다. 즐겁고 재미있게. 오늘 봰 윤광준 선생님도 내게 힘을 실어주셨어요!  


윤 선생님, 내게 이런 말을 남겨주셨습니다. 

"커피의 향이 곧 좋은 삶입니다." 



암요, 선생님. 고맙습니다. '잘 찍은 사진 한 장' 같은 '잘 뽑은 커피 한 잔', 그것이 커피를 처음 할 때처럼, 내 삶의 영원한 목표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잘 뽑은 커피 한 잔'!  :-) 밤 9시가 넘으면 1000원으로 내려가는 커피 한 잔이 있는 곳. 커피 한 잔으로 생을 확인하고 외로움을 위로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 커피 한 잔에 담긴 한 세계의 모든 것. 커피 한 잔을 통해 사유하는 한 줌의 삶. 오로지 당신 하나만을 위한 나의 커피. 그리고 당신과 나만 아는 이야기. 


아울러, 철수 형과 프레디 형에게도 커피 한 잔씩 건네고 싶은 내 마음 한 자락. 

내가 준비한 오늘의 커피 메뉴는, Don't stop me now. 




밤9시의 커피.

밤 9시가 넘으면 1000원으로 내려가는 커피 한 잔이 있는 곳. 그 커피 한 잔으로 생을 확인하고, 외로움을 위로받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커피 한 잔에 담긴 어떤 세계의 확장과 연결도 엿본다. 커피가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밤 9시가 되면, 낮에 만든 커피와는 또 다른 커피를 내린다. 그 커피는 오로지 당신 하나만을 위한 커피다. 그리고, 당신과 나만 아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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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 없이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요! | 함께 살자!(공유와 공동체) 2012-11-22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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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도 11월에는.

독일 작가, 한스 에리히 노삭의 이 소설, 죽기 전에 꼭 진심 뱉고 싶은 이 한마디가 툭 던져집니다. "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삶이 '안전'하기만 바라며 하루하루 버텨왔던 재벌가의 며느리 마리안네. 처음 만난 낯선 남자 묀켄이 건넨 그 한마디에 재벌가 생활 따위 내팽개치고 남자를 따라나서는 여자. 그야말로, '미친' 낭만.

 

뭐, 낭만? 현실 감각 없는 무능력자들이 술 한 잔에 기대어 부리는 치기 정도로 전락한 '낭만 소멸의 시대'. 칼럼니스트 김경이 전한 독일 철학자 프레데릭 바이저의 [낭만주의의 명령, 세계화를 낭만화하라]에 의하면, 초기 낭만주의자의 미학적 혁명은 당대의 현실을 개혁하기 위한 정치적 운동의 일환이었다고 합니다. 세계를 낭만화한다는 것은 곧, "우리의 삶을 소설이나 詩로 만드는 것을 의미했으며, 그리하여 우리의 삶이 파편화된 근대 세계에서 잃어버린 의미와 신비, 마법을 되찾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알다시피 어릴 때, 우리 모두는 예술가였죠. 그러나 '낭만끼'를 자본과 권력에 의해 강탈 당하면서 우리는 예술적 재능과 낭만적 삶을 잃었다는 불편한 진실!

 

독일 낭만주의 사상가 프리드리히 슐레겔, 낭만 명령으로서 "세계를 낭만화하라"고 선언했습니다. 다른 낭만주의자 노발리스는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시적 국가(poetic state)'라고 표현했고요. 바이저는 '낭만시'라는 용어와 '세계는 낭만화되어야 한다'는 명령을 정치와 윤리, 철학을 포괄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에게 '낭만'은 유미주의적으로 해석되는 것이 아닌, 개인과 사회, 자연에 대한 세계관을 집약한 표현이라는 것. '낭만화', 현실과 무관한 공상 속에서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는 보수적인 세계관이 아닙니다. 이 낭만주의자들은 자유로운 교제가 가능한 유기체적 국가 안에서 사람들이 아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길을 모색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낭만을 되살리고픈 누군가, 이렇게 외칩니다. "마을을 청춘화하라." 

마을을 품은 청년들이 이야기를 풀고 새로운 친구를 만나는 낭만, 어떤가요? '마을청년활동가'에겐 이런 정의, 어떨까요? 자유로운 교제가 가능한 유기체적 마을 안에서 사람들이 아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모색하는 자.   

 

청년과 마을 네트워크 첫번째 이야기,< 마을살이 몇 핸가요 >. 새로운 친구를 만나, 마을을, 세계를 낭만화합시다! 4회에 걸쳐 진행됩니다. 새로운 친구를 만날 수 있는 짝궁 프로젝트까지 곁들인 낭만의 최적화. 자, 신청하세요. 세상을 향한 감각의 촉수를 벼리고, 이를 차곡차곡 쌓아서 세계를 낭만화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것. 아울러, 녹색공유도시를 향한 낭만의 초대, < 녹색공유도시 100 >(11월26일 오후 6시)도 함께 곁들이오니, 신청하세요.

 

다시 돌아가, 늦어도 11월에는. 마리안느와 묀켄의 '미친 낭만'에 대한 노삭의 이런 읊조림.  

"일단 스쳐 지나가고 나면 계속 그리워지는 그런 순간 말이다. 다른 어떤 것은 그 순간만큼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 그리고 그 순간은 오직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것이다." 당신과 함께 나누고 싶은 그런 순간을 닥치게 만드는, "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대 좋아하는 계절이 와요(나윤권 노래 제목). 아참, 겨울이한테 인사 하는 것, 잊지 않으셨죠?

 

눈과 함께 하길, 기다렸어, 나의 겨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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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먹는다는 것, 제대로 생각하고 산다는 것이다! | 북카페 2012-11-19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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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식탁 위의 철학

신승철 저
동녘 | 2012년 10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밥상머리에서 생각하는 방법을 잃은 사람에겐 필독서. 먹을거리에서 세계를 사유할 수 있음을 알려주는 미시 인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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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우리에겐 '밥상머리 철학'이 있었다. 아이는 밥상머리에 앉은 어른을 통해 먹을거리를 둘러싼 자연과 세계를 알았고, 배웠다. 음식(요리)을 통해 자연스레 아이는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어른이 되어갔다. 인류의 식문화라는 것이 본디 그렇다. 먹을거리에는 인류의 지혜와 사유가 담겨 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생존해야 하니까. 생존을 위한 제1법칙, 먹어야 산다. 요즘 하루에 한 끼 먹자는 11이라는 책 덕분에 그것이 유행처럼 번진다지만(내 주변에도 벌써 몇 명 생겼다.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으나~^^;), 역시 먹지 않으면 안 된다. 인류의 시작부터 식문화는 빠질 수 없는 유산이었던 셈이다. 그러니, 세상을 향한 사유와 철학도 자연히 먹을거리에 녹아있을 수밖에.

 

인류의 모든 지혜와 생명과 자연에 대한 사유가 들어있는 소중한 밥상문화. 그러나 안타깝게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 이유 중의 하나, 먹을거리가 넘쳐나면서(그럼에도 굶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뼈아픈 사실!) 먹을거리에 대한 존중과 사유를 하지 않게 됐다. 그냥 액면 그대로 먹을 뿐이다. 배고프니까 먹고, 먹으니까 좋을 뿐이다. 밥상머리를 통해 생각하게 만들었던 능력은 퇴행했다. 요리도 그렇고, 먹는 것도 그렇다. 내가 생각하건대, 본디 그것들은 생각하는 능력이었다. 단순히 먹을거리를 만들고, 먹을거리를 먹는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전설적인 요리사들을 봐라. 그들, 칼질이나 테크닉이 좋아서 전설이 된 것이 아니라, 요리에 담긴 자기만의 철학이 있었다. 자연, 생명, 재료, 음식에 대한 철학. 생각 없이 가질 수 없는 무엇. 그런 요리를 먹는 사람들도 역시 사유를 했다. 음식을 만드는 사람과 먹는 사람 사이의 교감. 그것이 존재했다. 그러나 지금, 요리는 전멸하다시피 하고, 요리기능공 혹은 요리숙련공만 넘쳐난다. 먹는 사람과의 교감 따윈 안드로메다로 갔다. 먹을거리를 통해 사유할 줄 알았던 인류는 먹을거리가 풍성해진 대신 사유하는 능력을 잃었다. 밥상머리 철학? 흘러간 옛노래로 전락했다.

 

요즘 아이들 먹을 것 귀한 줄 모른다는 어른들의 툴툴거림. 그것은 자충수다. 어른들이 먹을거리에 대한 제대로 된 가르침을 주지 않았다. 먹을거리를 통해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지 않은 과오다. 자신의 배와 제 가족의 배만 부르면 그만이었다. ‘먹이면 된다는 것이 결국 많이먹이는 쪽으로 발달했다.

 

식탁 위의 철학은 음식을 통해 사유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철학()을 직접적으로 들이대며 음식과 철학의 연관성을 획득한다. 저자 신승철은 일상에서, 그것도 가장 원초적이고 낮은 단계의 일상(먹는 것)에서 철학을 길어낸다. 재미있고 흥미롭다. 맞다, 아니다를 떠나, 그것이 음식과 세계를 대하는 하나의 자세이자 태도임을 자각하도록 만든다. 가령, ‘잡채를 통해 전체주의와 독재적 권력의 사상으로 향할 요소를 내부에 갖는 동일성의 철학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한다. 그것이 차별과 시민사회를 위협하는 요소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잡채처럼 다름이 섞여 새로운 맛을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잡채에 대해 갖고 있던 내 생각을 확인시켜줘서 반가웠다. 물론 나는 그처럼 철학 용어를 사용하지는 못했지만.종 다양성, 생물다양성, 문화다양성이 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인지를 생각할 수 있는 잡채의 시간!


발효에 대한 생각도 그렇다. 천천히 다른 것이 되어가는 것, 기다림의 미학을 필요로 하는 것, 그리하여 삶 또한 내면의 발효에 의해 형성하는 것. 저자는 발효를 통해 삶은 본디 느림의 과정이며, 타인과 똑같지 않은 자신만의 맛과 향기를 갖게 되는 것임을 깨닫게 한다. 소수자는 곧 양적 소수가 아닌 자신의 특이함을 드러내는 사람이라는 견해와 더불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색다른 것이 생산될 수 있다는 이질발생의 개념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가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둘러봐라. 지금 우리를 감싼 글로벌이라는 이름의 폭력. 그것은 경쟁을 통해 내 것이 남의 것보다 우월함을 증명하고자 하는 개수작인데, 그런 개수작을 요구하는 자본의 폭정에 많은 사람들이 문제의식 없이 투항하곤 한다. 진짜 글로벌, 진짜 세계화는 이 세계가 작고 사소한 일이라도 연결돼 있음을 알고, 지구 저 어딘가 나와 상관 없을 것 같은 남의 고통과 아픔, 슬픔에 교감하는 것이다. 어딜 가도 똑같은 이름의 커피브랜드, 패스트푸드체인을 만나는 것이 대체 무슨 감흥이 있단 말인가. 여기 저기 비슷한 풍경으로 도배한다면 우리는 대체 왜 그곳을 가는가 말이다. 아파트 평수와 자동차 브랜드만 중요한 똑같은 질문. 복제와 반복에 의한 동질발생. 그것이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주입하는 주술인데, 우리는 그 주술에 주화입마를 입은 상태다.

 

따로 또 같이를 통해 뒤섞임의 미학을 자랑하는 비빔밥에 저자가 감탄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달라서, 다르기 때문에 어울릴 수 있는 것. 이질발생의 아름다운 맛과 향기.

 

그래서 이런 사유는 정말이지 반가워서, ‘만쉐를 부를 뻔했다.

맛의 변형과 재창조는 음식의 역사가 흐름의 역사라는 것을 말해줍니다.”(p.95) 


, 이 저자는 먹을거리를 통해 제대로 사유할 줄 아는 사람이구나. 밥상머리에서 철학을 길어 올릴 줄 아는 양반이구나. 감히 그런 생각까지도 했었다. 특히 커피를 만드는 사람인 내 입장에서 가장 반가운 대목은 ‘(인스턴트)커피에 대한 것이었다. 커피에 담긴 세계의 불공정함, 그 불편한 진실을 꺼내준 것이 반가웠다. 커피는 식민과 착취의 부산물일 뿐 아니라, 지배계급이 노동계급을 부려먹기 위해 모르핀처럼 주입한 검은 액체였다. 더 큰 문제는 기호와 취향을 획일화시키고 조정한다는 것이다. 거대 프랜차이즈 브랜드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제철 공장과 자동차 공장,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던 1980년대 노동자들은 노동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잠이 오지 않는 값싼 인스턴트커피를 먹고 일을 해야 했습니다. 인스턴트커피는 노동 현장마다 한 켠에 준비되어 있었고 권장되었으며, 실제로 많은 사람들을 취향과 기호를 평준화시키면서 그들의 입맛을 사로잡았습니다. 만약 당신이 고용주라면 인스턴트커피의 장점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여지는 굉장히 많습니다. 이를 테면 노동자들의 입맛을 만족시켜주는 것 같으면서도 생산 능률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야근과 철야를 하는 노동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카페인의 힘에 의지하여 버티는 것이었습니다. 2000년대를 살고 있는 중학생, 고등학생들도 이와 다르지 않은 방법을 통해 자신의 신체와 정신을 재생산하고 있습니다.”(p.127~128)

 

, 지금의 많은 커피는 내부 식민지를 구축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커피는 본디 사유하게 만드는 음용수였지만, 지금의 인스턴트커피 혹은 거대 프랜차이즈 커피가 생각하게 하는 것은 내 업무()로 국한돼 버렸다. 지배 질서의 커피 주술에 놀아난 결과다. 취향과 기호마저 저급해졌다. 고작 인스턴트커피를 놓고 갑론을박하는 수준이라니. 저자의 다음과 같은 말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일이다.

 

인스턴트커피를 권장하는 사회속에는 무의식적으로 더 빨리 일할 것, 더 오래 공부할 것을 강조하는 부드러운 지배 방식이 존재합니다.”(p.130)

 

먹을거리는 세심하며 섬세하고 예민한 지점이다. 커피를 하고 계속 공부를 해가면서 나는 그것을 절감하고 있다. 그것은 곧 세상에 대해서도 그리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즐겁다. 세상이 넓어지는 한편으로 혀의 감각처럼 촉수가 민감해지면서 미시적으로 접근하게 된다. 넓고 깊어진다는 의미다. 물론 아직 부족하며, 영원히 채워지진 않을 것이다. 그러면 또 어떤가. 커피와 먹을거리를 통해 나는 달리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됐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내가 보건대,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 하나는 다름이다. 다름이 섞이면서 또 다른 새로움을 만들어내고, 획일적이지 않은 소수의 특이성으로 발현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또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기제가 된다고 나는 읽었다. 은근히 먹을거리를 통해 혁명을 부추기는 심보(!). , ‘이렇게 밥상머리 철학이 이뤄진다면 참 즐겁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아주 소수이지만 그런 사람들과 함께 커피를 만들고, 그런 사람들과 만나고 싶다. 획일적이고, 증식에만 관심 있는 종자들 아닌 특이성 생산을 통해 새롭게 배치하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들.

 

저자의 또 다른 키워드는 정치. 음식을 통한 정치. 나는 먹는 것이 곧 정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어떤 것을 먹느냐, 그 작은 일이 미시정치를 일구는 중요한 지점이라고 본다. 취향, 기호, 맛까지 다국적 기업 혹은 재벌의 농간과 협잡에 놀아나는 것, 끔찍하지 않나? 지배질서에 의해 노예로 내부 식민지화하는 것, 스스로에게 미안한 일 아닌가?

 

우리가 먹는 것이 자본과 정치에 의해 조작되는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투표를 잘하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투표도 그래서 잘해야 한다. 깨놓고 말해서, 남 차려준 밥상만 깨작거렸을 생각 없는 박근혜 따위 찍으면 그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는데 돕는 것이다. 그럼 문재인이나 안철수는? 물론 아직 다르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부 식민지화를 조금씩 늦출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 후보 김소연을 찍는 것도 좋겠고.

 

이 책은 먹을 것 얘기하면서 은연 중 각성을 요구한다. 내가 먹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뭘 먹고 살지? 하는 질문을 던지며 삶에 대한 주체적인 인식을 강조한다. 커피 만드는 사람인 나는 이 책의 기조에 완전 공감! 내가 먹는 것이 어떤 것이며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는 것, 그것이 생의 감각을 깨우고, 삶의 주체로 서게 만든다. 먹는다는 건, 종종 강조하지만, 먹혀지는 셀 수 없이 많은 생명의 응원을 받아 힘껏 사는 것이다. 먹는 것을 존중하고 고마워하며, 미안해할 줄 알아야 하는 이유다.

 

들뢰즈가 가타리를 만나 타락과 방탕의 길로 들어섰다고 세간에서는 평가한다고 했다. 이 책을 만나서 당신도 타락과 방탕의 길로 들어서라고 권하고 싶다! 아름다운 타락이요, 근사한 방탕이로다. 혹시 그동안 먹을거리를 통해 생각하고 사유하지 않았다면, 유죄. 그 죄를 사하기 위해 이 책, 필요하다. , 113쪽의 영화 <빵과 자유><빵과 장미>의 오류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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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철들기 시작할 때 | 시네마카페 2012-11-17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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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볼케이노: 삶의 전환점에 선 남자(디지털)

루나 루나슨
아이슬란드 | 2012년 11월

영화     구매하기

 

(스포일러 있음! 알아도, 영화관람에 크게 지장은 없으리라 여겨지지만.) 


다음에 꺼내는 이 말, 우스개지만, 백퍼 진실을 담은 뼈대 있는 우스개. 

답을 보기 전, 한 번 유추해보는 것도 좋겠다. 


여자가 50대가 넘어설 때, 필요한 다섯 가지는? 


친구, 딸, 집, 돈, 건강.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렇다면 남자 50대는? 


아내, 부인, 와이프, 마누라, 집사람.


역시 고개를 끄덕이는 당신의 모습, 그려진다. 우리나라 남자를 놓고 한 뼈대 있는 우스개지만, 아이슬란드의 이 남자에게도 다르지 않아 뵌다. 



화장실에서 우는 남자


그 남자가 화장실에 앉아 울고 있다. <볼케이노 : 삶의 전환점에 선 남자>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 그것은, 온 슬픔을 담은 몸짓이다. 삶의 회한이 묻은 울먹임. 그 소리가 심상치 않다. 무뚝뚝하며, 퉁명스럽고, 가족들에게 심술 궂은 말만 내뱉는데다, 가시 돋힌 행동만 일삼던 남자. 중요한 것은 그 남자, 하네스(테오도로 줄리어슨)는 아버지였다. 우리네 아버지의 전형적인 모습과 다르지 않은 그 남자, 울고 있다. 왜? 


그것은 단순히 오십 넘은 남자에게 닥친, 아내의 뇌졸중 때문만은 아니다. 아내가 쓰러진 것이 결정적인 계기였겠지만, 그것은 스스로 바다에 뜨지 못한 배였기 때문이었다. 그 눈물은 결국 스스로를 채우지 못한 삶의 공허함과 홀로 서는 법을 배우지 못한 자의 두려움 때문이리라. 


하네스에겐 그랬던 것 같다. 그는 (아마도 피치 못할 사정으로) 섬을 떠났고, 어부의 이름을 포기했다. 나중에 실토하지만, 그는 섬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어부 역시 그의 진짜 꿈이었다. 꾹꾹 아니라고 눌렀으나, 결코 그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은. 학교 수위로 37년을 근무하다가 은퇴한 그에게 닥친 것은 공허함이요, 무상함. 평생 일밖에 모르고 살아온 자에게 은퇴가 주는 충격이란 그런 것이다. 죽을 것도 생각했으나, 결국 그것도 당장 그의 몫, 아니었다. 


한때 가장이었으나 이제는 '뒷방 늙은이(꼰대)'로 전락한 남자가 할 수 있는 건 뻔하다. 심술과 심통. 오랜 세월, 뒷바라지만 해 온 아내 안나(마그렛 헬가 요한스토디어)에게 줄 수 있는 건 면박과 트집뿐. 다른 가족들에게도 그는 외계인에 불과하다. 아버지의 존재는 곧잘 무시당하며, 가장의 권위는 안드로메다에 있는 무엇이다. 물론 그것이 그의 은퇴때문에 불거진 것은 아니다. 그는 이전부터 가부장적인 아버지였고, 가족에겐 '불통'의 대명사였다. 


물론, 안 됐다. 불쌍하게 보인다. 애초롭다. 아무리 자초한 것이지만, 뒷방 늙은이도 자신의 삶을 부정하고 싶진 않다. 하네스의 '버럭'은 그런 심리에 기초하리라. 자신을 알아달라는, 내 무력감을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절절한 호소다. 몸부림이다.

 


그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볼케이노'는 그럴 때 갑작스레 터진다. 오십 넘은 남자에게 꼭 필요한 존재, 아내가 쓰러졌다! 뇌졸중. 그것도 전날, 아내에게 쭈뼛쭈뼛 할 말이 있다며 힘겹게 다가가 모처럼 애정을 나눈 그들이었다. 못난 지아비는 아내에게 수줍은 사과를 건넸고, 아내는 지아비의 어린아이 같은 투정을 온몸으로 받아줬다. 오래된 부부의 진한 교감이 이어졌던 다음날, 터진 볼케이노. 아내가 좋아하는 넙치수프를 준비한 하네스 앞에서 아내가 쓰러졌다. 


그의 외로움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명은 여기서도 등장한다. 쓰러진 안나를 보기 위해 병원에 달려온 딸과 아들은 하네스와 뚝 떨어져 앉아 자기들끼리 위로한다. 그 장면을 멀리서 풀숏으로 찍은 장면은 그들이 감정적으로 얼마나 멀리 떨어진 존재인지 보여준다. 아버지, 외롭다. 슬프다. 


볼케이노의 폭발, 그 이후...


그런데 이 남자, 변한다. 아니, 이제야 본래 모습이 나오는 것일까. 남자가 철 드는 것도 그럴 때이다. 아내를 잃을지 모른다는 위기의 상황. 아내의 소중함을 뒤늦게야 깨닫는다. 아니, 알았는데, 쑥쓰러웠는지도 모르겠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아내, 그녀만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온전히 쏟는다. 병원에 두지 않고 자신이 온종일 옆에 두고 병간호를 한다. 아들의 반대도 킬. 평생을 함께 한 남편으로서의 권한을 내세워. 


잘할 수 있을까? 스크린을 응시하는 나의 염려는 곧 그의 염려였다. 하네스 자신도 그것이 궁금했고 불안했다. 그럼에도 그는 묵묵히 해낸다. 아내의 기저귀를 갈아주며, 몸 곳곳을 닦아주고, 수프를 떠먹이면서, 말 못하는 아내에게 계속 말 걸어주고 책 읽어주기. 그의 삶의 중심은 이제 아내다. 평생 구박만 했던 아내에게 그는 속죄를 하고 있는 것일까? 


여기서, 나는 속단을 했다. 그런 그의 정성에 감복해 아내가 깨어나리라는 흔한 결말을 떠올렸다. 아내를 병간호 하는 외에 그가 오로지 매달린 배의 수리. 증조할아버지부터 대물림하여 내려온 그 배, 그것의 재탄생과 함께. 치유된 아내와 그가 배를 타고 멀리 나갈 것으로 쉽게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틀렸다. 

설마했지만, 나는 살짝 경악했다. 아니, 그가 행한 행동을 수긍할 수 있었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것이 서로를 위한 길이리라. 배는 완성됐다. 손자와 함께 수리한 배는 어쩌면 그가 또 다른 삶의 전환점에 섰음을 보여주는 징표. 배의 존재는 곧 그였다. 배의 난파와 수리, 그것이 그의 삶이었다. 

 

다시 섬을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또 다른 오해를 했다. 기성 영화와는 다른 길을 걸은 영화임을 간과하고, 익숙한 관성에 의해 사유한 셈이다. 죄책감에 사로

잡힌 그가 아내와 함께 할 것이라는 신파를 떠올렸다. 


아내 덕분에 다시 섬으로 돌아온 하네스가 바다를 바라보는 모습, 잊지 못할 얼굴이었다. 그토록 많은 것을 담고, 또 많은 것을 비우는 얼굴이라니. 그 얼굴, 이 영화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저 얼굴만한 스펙터클은 없었다. 지 아무리 가파른 해안절벽과 드넓은 바다도 그의 표정에 비길 바는 아니었다. 나즈막이 읊조리고 말 나의 감상은 이랬다.   


삶은 그렇게 지속된다. 

모든 게 조금씩 빛이 바래도, 삶은 짧은 계절만큼이나 전환에 전환을 거쳐 흘러간다.   


(* <볼케이노>라는 영화 제목 때문에 흔하디 흔한 재난영화를 떠올린다면 오산이다. 삶에 닥친 '재난'을 다룬 것은 맞지만, 흔하디 흔한 할리우드식 재난영화와는 사유의 지점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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