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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기자들, 파업시대를 열다~ | 바람구두 이야기 2012-02-29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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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기자들의 파업시대. 한차암~ 늦은 감 있지만, 그들(의 파업)을 나는 지지한다. MB~씨의 너절한 호텔 종지기 (김)재처리의 호텔 사랑에 토하고 있는 엠비씨 기자들을 필두로, 케이비에스, 와이티엔도 곧 파업 돌입을 예고했다. 방송3사 노조 모두 사장 퇴진과 공정방송 쟁취를 명분으로 한다. (사장 연임한 연합뉴스도 곧 파업하겠지?)

 

그 사장이라는 작자들, 찌질함의 대명사요, 나이를 똥구멍으로 처드시는 신공도 발휘해주신다. 재처리를 비롯해 (김)인규(KBS), (배)석규(YTN) 모두 '방송의 명박 짜웅시대'를 연 시정잡배들이다. 그들에게 나는 '기자출신'이라는 타이틀을 차마 달아줄 수가 없다.

 

재처리는 이젠 눈치 보여서 호텔 못 가는 분풀이라도 하는 양, 박성호 기자 짜르고, 파업 불참자들에겐 특별수당까지 쥐어주는 '돈잔치'까지 펼치고 계신다. 인규와 석규도 재처리 좇아 '찌질함 배틀'에 뛰어들 것 같은 분위기다.

 

이번 파업은 기자(를 비롯한 방송언론인)들이 자사의 편파왜곡불성실 보도에 못 견뎌 일어난 양상인데. 좀 양가감정이 오간다. 참 오래 그 모진 세월을 버텼다고 토닥여야할지, 레임덕 시즌에 와서 웃통을 벗어던지는 게 아쉽다고 해야할지. 그래도 지금이라도 반드시 해야하는 건 맞다. 그래서 지지한다. 

 

《기자수업》이라는 책, 지난해 12월에 저자와 함께 만났다. 글쎄, 여전히 기자가 되고 싶은 사람들에겐 나름 유용하겠다. 뭐든 잡고 싶은 심정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책은 너무 기능에 치우친다. 책의 콘셉트이겠으나 기능과 전형적인 방법론으로 기자를 설명하는 건, 너무 아쉬운 태도다.

 

나는 감히, 기자의 기능적 업무는 27.12%에 불과하다고 본다. 기자의 나머지 모두는 태도와 자세여야 한다고 본다. 아니, 사실은 전부다. 기자에게 필요한 덕목은 기능인으로서가 아니다. 세상을 대하는 태도. 무엇을 담아내고 어떻게 세상과 세상을 연결시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묻어난 기사.

 

사실 지금은 공공성에 대한 언론의 멘탈 붕괴는 심각한 지경이다. 더 나아가, 권력과 자본에 굴종하는 노예의 태도나 자세가 대세다. 그러니 이제야 폭발하는 게다. 이건 아닌데, 이건 아닌데, 뒤늦은 깨달음. 기자수업이 필요하다면, 그것을 말해야 한다. 자본과 권력이 휘어잡은 세상에서 기자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기자와 언론은 어떤 철학으로 스탠스를 잡아야 하는지. 그게 필요한 시대다. 물론 파업하는 법도 확실히 알려줘야 하겠다.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처하는 자세에 대해서도.  

 

그들의 파업, 길어져도 좋다. <무한도전>을 못봐도 좋다. (뭐, 하긴 원래 나는 <무한도전>을 안 봤지롱~ㅋ) 확실히 당신들의 결의와 자세를 보여다오. 그리고 이번엔 반드시 이겨다오. 기자가 되고 싶은 자들에게, 기자수업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아래, 지난해 12월 현직 기자들의 강연에 대한 기록이다.

 

 

 

현직 기자들, 기자와 언론을 말하다

『기자수업』 최철․강훈상


지난 12월 5일은, 리영희 선생님의 1주기였다. 진짜 기자였고, 고은 시인의 표현에 따르자면, ‘뼈 마디마디로 진실의 자식이고자 한 사람’. ‘사상의 은사’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았다. 리 선생님은 한국 기자의 표본이자 박제된 초상이었다. 철저한 단독자로서 사셨기에, ‘권력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악성 바이러스에 스스로를 노출시키니 않았’(안수찬)으며, ‘억압자에 저항함으로써 자유를 느꼈(이대근)으리라.


그런 분이 돌아가시기 3개월 여 전 프랑스 르몽드와 인터뷰를 했었다. 이런 질문이 있었다. 후배 언론인을 보면서 갑갑하다고 느끼지 않느냐? 그들에게 한 말씀해 달라. 선생님의 답변. “제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것 같다. 아니 갑갑하다고도 생각 안 한다. 아주 포기했으니까.” 그 답변, 지금 기자(언론)의 현실이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종편’으로 상징되는 지금 언론계는, 자본과 권력의 협잡에 주구처럼 끌려 다니고 있으니까. 시쳇말로, 쪽 팔린다.


이미 오래된 과거라, 박물관에나 박제돼 있을 법한 ‘사회적 목탁’은 본디 기자의 것이었다. 중국 노나라 때, 새로운 법령을 발할 때 목탁을 울려 사회의 주의와 관심을 환기시키고 계도하기 위해서 사용된 것이 목탁이었고, 진실과 실체에 대한 ‘알 권리’를 인민들에게 충족시킨 공공의 임무를 완수한 것이 언론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가.


지난 12월 21일은 또한 청암 송건호 선생님이 영면한지 10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는 일생을 독립 언론과 현대사 연구에 바치고 반독재 투쟁에 헌신했다. 많은 언론인이 독재에 부역하고 악행의 자서전을 쓸 때 그는 불의와 비정을 고발하는 칼럼과 사설로 독재정권에 맞섰다. 그가 글을 쓴 자세는 분명했다. “나는 글을 쓸 때마다 30년, 40년 후에 과연 어떤 평가를 받을까 생각한다. 크게는 민족을 위해, 작게는 내 자식들을 위해 어찌 더러운 이름을 남길 수 있겠는가.”


12월은 그런 달이다. 시비곡직으로 권력에 타협하지 않고 자존심과 자존감으로 기자직을 지켰던 두 진짜 언론인이 세상을 떠난 달. 지난 8일, 서울 신촌의 한겨레교육센터에서 현직 기자들이 이야기를 꺼낸 건 그런 이유도 있었음이리라. 『기자수업』 출간기념으로 최철 기자(CBS)와 강훈상 기자(연합뉴스)가 기자가 되고 싶은 혹은 기자세계를 알고 싶은 독자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기자라면, 임금보다 사명감!


“기자는 다만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 조금 더 많이 아는 시민일 뿐이지 특수 계층이 아니다. 조금 더 많이 안다는 것도 언론사에 입사했기 때문에 그런 정보를 좀 더 쉽게 취득할 수 있다는 정도이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p.21)


최철 기자. 원래 기자를 꿈꾸진 않았다. 폭풍한파가 불던 국제통화기금(IMF)체제, 취업전선도 꽁꽁. 시험보는 게 낫다 싶었다. 언론사 시험에 눈을 돌렸다. 여기저기 시험을 봤고, 4번째에 CBS에 붙었다. 2001년이었다. 하다 보니, 적성에도 맞고 보람도 있었다. 어느덧 10년 이상 흘렀다.


“기자가 되고 싶어서 하는 게 중요하다. 마음을 먹고 한 사람과 뜻하지 않게 어쩔 수 없이 하는 사람이 있는데, 나도 적성에 맞지 않았다면 못했을 것이다. 나는 학교를 다니면서 기자를 만난 적이 없는데, 기자가 된 뒤 학교 다닐 때 기자를 만날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그런 게 아쉬운 점인데, 여러분은 오늘 운이 좋은 거다. (웃음)”


그렇다면, 기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선 직업인으로서의 기자. 임금은 언론사마다 다르다. 임금만 놓고 기자가 되겠다면 다른 일을 찾는 게 낫단다. 기자에겐 임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말씀. 물론 기자가 된다고 마냥 행복해질 순 없다. 여느 직업과 마찬가지로.


“세상엔 훌륭한 사람이 많지만, 개인이 세상을 바꾸긴 쉽지 않다. 기자는 기사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기사로 삶이, 사회가 바뀐다면, 기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크다.”


그는 입사지원서에 목에 칼이 들어와도 펜을 꺾지 않겠다고 썼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기자들에겐 유무형의 압력이 들어온단다. 기사 때문이다. 특히, 누군가의 치부나 부정 등을 드러내는 고발성 기사. 기자의 펜을 무서워하는 건, 기사로 직업적 생명이 끝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어떤 권력집단은 기득권 보호 등을 위해 기사가 나오지 못하도록 압력이나 협박을 넣는다. 보복이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


“그 당시 입사 지원서에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뜻을 굽히지 않았던 조선시대 학자 서거정을 본받아”라는 구절이 쓰여 있다.”(p.17)

 


기자라면? 사실(팩트) 앞에 당당해야 한다. 굴복하거나 비굴하지 않아야 한다. 기자는 언론사 사주나 조직보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 복무해야 하기 때문이다. 리영희 선생님은 그랬다.


최 기자는 2004년의 한 에피소드를 꺼냈다. 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으로 시끌시끌했던 시절. 탄핵찬성집회에서 송만기라는 사람이 “대통령 영부인이 고졸인데 자격이 있느냐”는 식의 말을 했다고 보도가 됐다. 그것이 사람들을 더 분노하게 만들었고. 그는 그때 현장에 있었다. 그리고 말이 왜곡돼서 전달됐음을 알렸다. 


“송만기 씨는 비유를 든 거다. 당시 노 대통령이 기자회견 석상에서 대우건설 사장에 대해 기분 나쁘게 얘기를 했다. 그는 한강에 투신자살을 했는데, 송 씨는 노 대통령이 한 마디해서 사람을 죽게 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예를 들어 ‘대통령 영부인이 고졸이니, 국모의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건 언어적 살인이라는 취지로 말을 했다.”


당시, 한 TV시사프로그램이 비유라는 말을 빼고, 대통령 영부인이 고졸이니 자격이 없다고 편집 방송했다. 송만기 씨, 공적이 됐다. 최 기자는 현장에 있어서 정확한 맥락을 알았다. 편집을 잘못하면, 사람들을 호도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정확한 맥락의 사실을 썼다. 그도 공적이 됐다. 죽이겠다는 댓글도 있었다.


“회사에선 일주일 정도 태국에 갖다오라는 얘기도 했다. (웃음) 그 일로 조금씩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생각한다. 그 기사를 안 썼으면 송씨는 매장됐을 거다. 두렵고 귀찮아서 눈 감고 지나갔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 사건은 영영 묻혔을 수도 있고, 방송사가 그랬던 것을 아무도 몰랐을 수도 있다. 기자는 사명감이 있어야 한다. 그런 일이 모든 기자에게 매일 찾아오는 건 아니나, 그런 일이 왔을 때 기자는 정직해야 하고 할 말은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기자가 되기 위해 특별한 재능이 있어야 할까? 최 기자의 자문은 이렇다. 언론에 기본적인 관심 갖기. 누구나 하는 정도의 스터디나 노력. 그 이후는 운빨. 순전히 그의 생각이다. 요즘 학생들, 이른바 ‘스펙’도 좋은데, 그렇다고 다 기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닌 법. 만고의 진리가 기자되기라고 비껴가지 않는다. 만고의 진리? 운이 인생을 좌우한다!


“과연 어떤 사람이 언론사에 합격하는 걸까? 실제로 기자가 된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운이 좋았다”는 대답이 가장 많다.”(p.39)


“기사 잘 쓰면 결국 인정 받는다” 


이어 강훈상 기자의 이야기가 따랐다. 그는 원자력핵공학을 전공했고, 과학자가 되고 싶었다. 허나 대학3학년, 운명적인 여인, 즉 팜 파탈(?)과의 만남이 그의 꿈을 틀었다. 오빠가 기자가 됐으면 좋겠어. 청년 강훈상, ‘조중동’이라는 이제는 대중적인 용어가 된 말은 물론, ‘언론고시’가 비유적인 표현이 아닌 행시, 사시와 같은 레벨의 국가고시인줄 알았다. 그러니 기자가 되려면, 언론고시를 패스해야 언론사에 들어간다고 여겼다.


“조선일보에 전화해서 물었다. 기자가 되고 싶다. 공대생도 될 수 있냐? 된다. 그런데 그때 알았다. 언론고시가 입사시험이라는 것을. 왜 고시냐고도 따졌다. 고시처럼 경쟁률이 높아서 그렇다는 핀잔을 듣고, 바로 군에 갔다. 제대 하는 날, 그녀와 헤어졌다. 그런데, (공부한 것이) 아깝잖나. 그녀가 원망스러웠지만 시험을 보고 붙었다. 스터디도 안 하고 독학해서. 운이 좋아야 한다는 말, 맞다. 나를 왜 뽑았는지도 모르겠고. (웃음)”


“‘언론고시’라는 말이 등장한 이유는 아마도 지원자에 비해 턱없이 적은 최종 합격자 때문일 것이다.”(p.31)

 


그는 ‘기자질’(강 기자의 표현)을 하면서 필요하겠다 싶은 책 3권을 소개했다. 첫째는, 국어사전. “항상 사전을 찾아봐라. 내가 쓰는 말이 옳은지. 보통 우리가 쓰는 말, 틀린 것 많다. 대중적으로 쓰는 어휘도 잘못된 것이 많다. 국어사전은 어휘와 관련이 있다. 어휘가 빈곤하면, 철학이 빈곤하고, 철학이 빈곤하면 기사가 안 보인다.”


둘째는, 통계학개론. 기사를 쓸 때, 숫자나 데이터가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경제부가 아니더라도, 쓸 일이 있다고 조언한다. 셋째, 이오덕 선생의 『우리글 바로쓰기』. “지금, 영어를 많이 쓰다 보니, 영어식 표현이 꽤 많다. 특히, 물주구문. 물건이 주어가 되는 구문인데, 이는 피동형이다. 우리말에는 피동형이 없다. 우리말은 사람이 반드시 주어가 돼야 한다. 피동형은 취재원 보호를 위해 전략적으로 쓸 때가 있으나,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다.”


우리는 최근 몇몇 영화를 통해 기자를 만났다. 우선, <모비딕>. 배우 황정민이 거악에 맞서 싸우는 기자로 나왔다. 또 하나,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 러셀 크로가 멋진 기자로 활약했다. 다른 한편으로, <라디오스타>. 흘러간 과거의 스타로 나오는 박중훈이 난동을 부리다 경찰서로 끌려가 조사를 받는다. 형사 옆에서 약 검사해보라고 깝죽대는 존재가 있다. 기자다. <부당거래>에서 기자는 권력과 야합하는 지질한 존재였다.


현실에서 기자는 어느 쪽에 가까울까? 강 기자 생각엔, <부당거래>나 <라디오스타>다. 하긴,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의 2003년판 동명의 영국 BBC드라마에선 이런 독설(!)이 나온다. 혹은 언론의 속성을 꿰뚫는 직설. “그건 직업도 아냐. 쓰레기일 뿐이지. 너 같은 놈들은 누가 가십이나 절망이나 온갖 쓰레기를 떠먹여 줄 때까지 앉아서 아무것도 못하잖아!”


장안의 화제, <나는 꼼수다>(이하 <나꼼수>)에 대한 이야기가 잇는다. “요즘 언론이 위기라고 한다. <나꼼수>, 언론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주진우 기자. 나도 그런 기자가 되고 싶다. (웃음) 기존 언론으로선 위협인데, 내 생각엔 정상화가 되고 있는 것이다. 기자가 기득권이 있을 이유가 없거든.”


그는 지금의 언론계 현실에 대해 좀 더 주석을 붙인다. “주진우 기자가 메이저언론의 기자는 아니지만, 그런 훌륭한 기자가 인정을 받기 시작하고 있다. 그래도 전반적으로 마이너언론 기자들은 무시 받는다. 돈도 적게 받고. 그럼 메이저언론 기자는 능력이 좋나? 아니다. 운이 좋은 거지, 실력이 좋은 것도 아니다. 회사 자체로 영향력 있는 기자가 될 뿐이다.”


그렇다면 기자가 되고 싶다면 어딜 가야할까. 그는 기사를 읽었을 때 편한 언론. 즉, 자신의 견해에 따라 갈 것을 권한다. 아울러 분명한 사실 하나. 세상은 기사를 잘 쓰는 사람을 알아준다는 것. 처음엔 메이저언론사 기자를 알아줄지 몰라도, 결국은 기사를 야무지게 쓰는 기자가 인정받음을 강조한다.


자본권력, 기자가 넘어서야 할 벽


기자와 권력. 떼려야 뗄 수 없는 이 관계에 대한 강 기자의 견해를 들어보자. 앞선 시대부터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기자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정치권력이었다. 허나 지금은 바뀌었다. 자본권력이 ‘왕’이 된 시대다.


“메이저건 마이너건, 자본권력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자본권력의 언론침탈은 정치권력의 것보다 예리하고 잔인하다. 한국 신문사들에게 구독료는 지국운영비일 뿐이다. 아마 광고에 90% 이상 기댈 것이다. 그러니 기업이 광고 안 줘봐라. 예전에 삼성그룹이 한겨레에 광고를 안 준 적이 있다. 결국 한겨레가 이겼는데, 그건 한겨레니까! 정치권력에 대항하면 정의롭게 보이고 지사 같은데, 자본권력에 대항하면 바보 소리 듣는다. 왜? 밥줄 끊는다고.”

 


그는 기자가 되면, 자본권력과의 관계에 대한 딜레마를 어떻게든 겪을 것이란다. 생각하건대, 지금은 자본권력과의 관계 설정을 어떻게 하느냐가 기자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제다. 이른바 ‘독립’언론이라는 선언을 볼 수 있다. 그건,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을 뜻한다. 돈(자본)없이 운영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본에 휘둘려 기사를 쓰지 않겠다, 자본권력에 종속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 시사인이나 경향신문 등이 일부 언론이 그렇다.


한때 언론사 기자로 체험한 바, 많은 언론사는 자본에 굴종하고 고개를 숙인다. 오죽하면 한 메이저언론의 어떤 기자는 출근할 때마다 집에 ‘기자정신’은 두고 나온다는 자조 섞인 말을 했었다. ‘한때 단독자’였던 기자는 ‘지금 직장인’이 됐다. 서글프고 씁쓸한 현실이다. 그러나 ‘먹고사니즘’이 직장인기자의 면죄부가 될 순 없다. 쪽 팔리는 일이니까.


강 기자도 쪽팔리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쓴다. 지금 5살인 아이가 아버지가 쓴 기사(와 댓글)를 볼 날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목표는 기자상을 받는 것도, 유명하고 훌륭한 기자로 이름을 날리는 것도 아니다. “아이가 학교에 가면 아버지 직업을 쓸 텐데, 자랑스럽게 기자라고 쓸 수 있는 것이다. 쪽 팔리지 않은 기자가 되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그는 안정적이고 수월한 출입처 자리를 마다하고 기획취재팀 기자를 자처했다. 출입처기자가 되면, 밥과 술은 으레 출입처를 통해 대접 받는다. 소수의 그렇지 않은 기자도 있으나. 그는 골프를 치지 않는다. 도덕적이어서가 아니고, 골프까지 치면 너무 나쁜 놈이 될 것 같아서. 신재민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의 비리 혐의는 기자 시절부터 받은 것이다. 받는데 익숙함이 부른 도덕적 해이라고나 할까.


“신재민 대놓고 욕할 기자는 많지 않을 걸? 신재민은 몇 억 받았지만, 사소하게 몇 천 원짜리라도 밥 얻어먹거든. 그러니 마음의 짐이 커서 출입처 없는 기자질을 하고 싶더라. (웃음) 출입처 없이 맨땅에 헤딩해서 캐내는 게 진짜 기자 능력이라고 본다. 밥, 술, 골프 잘 대접하는 물 좋다는 부서에 있었는데, 박차고 나왔다. 처음엔 후회됐으나 요즘 가볍다. 쓸데없는 관계에 짓눌려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기사는 독자를 바라보고 진정 그들의 알 권리를 위해 써야했지만 출입처에 대한 나의 영향력이 우선되는 유혹을 벗어나지 못한 때도 부지기수였다.… 앞으로 나의 기자질은 이런 갭을 최소화하는 데 그 목적을 둬야 하는 이유다.”(p.375)


강 기자는 후배 기자들에 대한 아쉬움도 토로했다. “요즘 후배들에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체제 순응적이다. 기사를 쓰면 어떤 파장이나 영향을 일으킬까, 생각하는 게 아니고 기능적이다. 부장이 시키면 잘 듣는다. 기사는 평생 남는데, 나중에 쪽 팔릴 기사도 말 한마디 않고 쓴다. 취직 어려워서 그런지, 그리 자라왔는지 모르겠으나, 왜 기자가 됐지? 이런 의문도 든다. 일반회사에 들어갔으면 될 텐데. 조직에서 출세는 못해도 쪽팔리게는 안 살아야지. 부장이 내 인생 살아줄 거 아니잖나.”


그 밖에 기자에게 필요한 것으로 체력을 든다. 기자는 체력싸움이란다. 싫어도 술 많이 먹고 근무시간도 길다. 그가 보기에 기자는 고소득 전문직 아닌 ‘고소득 일용직’이거나 ‘저강도 장시간 노동’이다. 취재를 많이 할수록 기사의 완성도가 높아지는데, 체력이 좋아야 그것도 가능하다. 아울러, <모비딕>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의 훌륭한 기자들 공통점! 독신. 농담처럼 그는 말한다. “장가 안 가면 기자질 정말 재밌게 할 수 있다. 늦게 결혼해라. 그거 중요하다. (웃음)”


그는 『기자 수업』을 통해 기자가 될 수 있는 팁과 함께 언론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무엇보다 기자는 끊임없이 공부해야 하는 직업임을 강조했다.


“대부분 기자는 순환보직제이라서 전문성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 몰라도 기사는 써야한다. 그래서 부단히 공부해야 한다. 운이 좋아서 기자가 되면, 그게 끝이라고 할 게 아니다.”


최철 기자도 기자가 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실용적인 팁을 덧붙인다. “학점관리도 중요하고, 영어는 필수다. 취재할 때도 영어를 잘 하느냐 못하느냐는 큰 차이가 있다. 토익점수가 없어서 난리치는 사람이 있는데, 100% 안 된다. 글쓰기도 재능이 있으면 좋은데, 그렇지 않으면 사설․논설 등 좋은 기사를 베껴보라. 인용한 구절은 메모했다가, 글 쓸 때 써보라. 그러면 글이 생동감이 있다. 그런 것들 챙겨서 하면, 글쓰기에 도움 된다.”

 


Q&A


기사‘거리’를 찾는 게 힘들 거 같다. 어떤 관점으로 취재아이템을 찾나?


기자는 대개 출입처가 있다. 거리를 찾으려면 취재원을 만나야 한다. 똑같은 주제인데도,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도 있다. 시기에 맞춰 옛날 신문이나 잡지를 보는 것도 좋다. 거리만 찾을 수 있으면 기자 참 좋은 직업인데, 그거 못 찾아서 힘든 거다. (웃음)


대학3학년이다. 기자가 되려면 고전 등 여러 공부를 해야 할 것 같다. 시간 할애를 어떻게?


3학년이면 시간 많지 않나? (웃음) 고전을 꼭 읽으려 하지 말고, 사설이나 논설을 보면 고전 인용도 많다. 그런 글을 정리만 해도 좋다. 입사한 뒤 고전에 심취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지금 고전을 다 읽으려 하기보다 기자가 되고 나서도 충분하다. 테크니컬한 부분에 치중해서 합격한 뒤, 나랑 같이 하자. (웃음)


기자하면서 소신에 반하는 기사를 써야할 때, 데스크와 어떻게 타협하는지?


데스크와 많이 싸운다. 누구나 소신이 있는데, 나는 거의 안 쓴다. 회사별로 사풍이 다르긴 하나, 기자의 소신과 다른 기사를 억지로 쓰게 하진 않는다. 회사마다 차이가 있는데, 쓰라고 하는데, 안 쓰면 나가야 하는 회사도 있다.

 

[예스24 기고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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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모집] 식량의 세계사 | 바람구두 이야기 2012-02-28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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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의 세계사]
 
 저자 : 톰 스탠디지 저

 출판사 : 웅진지식하우스

신청기간 : 2월 22일~ 2월 28일

 모집인원 : 15
 리뷰어발표 :  2월 29(수)

 

농업은 인류 최악의 실수?
최초의 식량은 유전자조작식품?

 

왜 인류는 주 2일 노동을 포기하고 고된 농업을 선택했을까? 지금 먹는 것이 1만 년 전의 유전자 조작 식품이라고? 『식량의 세계사』의 저자 톰 스탠디지는 인류도, 사회도, 정치도, 문화도 오늘 아침 식탁 위의 음식들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흥미로운 주장을 펼친다. 인류 문명이 뒤바뀌는 순간에 언제나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을 한 식량은 나폴레옹의 몰락을 부추기고, 19세기 세계대전을 뒤에서 조종했다.

 

이 책은 역사 전체에 걸친 사회 변화와 지정학적 경쟁, 산업 발전과 경제 팽창의 촉매로서 식량이 문명에 끼친 막대한 영향을 살핀다. 저자는 농사는 애초부터 자연적이지 않은 일이며, 오늘날 우리가 먹는 대부분의 곡물은 1만 년 전에 만들어진 GMO라는 도발적인 주장을 던진다. 야생식물을 다양하게 섭취할 수 있었던 수렵채집을 포기하고 농업에 의존한 결과 농민들은 평균 10센티미터 이상 키가 작아졌으며, 영양 부족에 기인한 각종 질환을 앓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잘못에도 불구하고 농업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문명의 근거가 되었고, 길들여진 식물과 동물이 현대 세계의 기반을 만들었다는 점을 인정한다. 다만 저자는 기존의 역사를 읽던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볼 것을 주문한다.

 

인류 역사의 방향에 끼친 식량의 영향력은 특히 현대에 들어와서 더욱 두드러졌다. 따라서 세계사의 국면을 '식량'이라는 새로운 코드로 읽어내는 이 책은 신선하고 충격적이다.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인간에게 식량이 인류 역사에 있어 그토록 중요한 소재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역사 전체를 통틀어 사람이 한 모든 일은 말 그대로 식량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던 세계사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안겨주는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놀랍고도 흥미진진한 세계사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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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리벼c 입니다.

'식량'이 인류의 역사를 주도해왔다는 흥미로운 이야기. 이 책에서 펼쳐집니다. 인류가 농경생활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평균신장이 지금보다 10cm는 더 컸을거라네요! 우리가 먹는 농산물들이 1만년전의 GMO라는 이 책의 이야기. 어떻게 생각하세요? 확인해보고 싶으신 리뷰어 15분을 모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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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음식문화를 통해서 보는 맛집의 불편한 진실 | 북카페 2012-02-27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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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조선의 탐식가들

김정호 저
따비 | 2012년 02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재밌다. 맛집 블로거나 맛집이라고 간판을 단 음식점에게 이책은 필독서다. 미식과 탐식에 대한 사유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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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맛집 천국이다. 인터넷, 특히 블로그 등을 보면 그렇다. 너나할 것 없이 먹을 것을 탐하도록 포스팅하고 맛난 것을 먹었다고 자랑질한다. 향도 없고 맛도 볼 수 없는 것이 사진으로 덩그러니 폼을 낸다. 그러나 그 대부분, 나는 믿지 않는다. 맛집 블로그의 자기 과시적 소개 행태 때문이다. ‘맛집 소개’라는 명분을 달고 있지만, 많은 그들은 ‘난 이런 걸 먹는 사람’이라고 자랑하고 싶다. 남들과 ‘구별 짓’고 싶은 욕망이 똬리를 틀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브런치’라는 호명이 가진 의미와 비슷한 맥락이다. 과거 아점이라고 부르던 것과 천양지차의 무엇. 브런치는 뉴욕 라이프스타일을 대변하는 상품이 됐다. 브런치를 즐긴다는 블로그 포스팅은 엇비슷하다. 유럽(미국)풍의 레스토랑이 우선 배경이다. 메뉴명은 듣도 보도 못한 잡것이다. 재료가 어떤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럴싸하게 조립한 음식이 흉내만 그럴싸하게 낸다. 그리고 우아하고 여유 있게 그것을 먹었다는 ‘포스’. 그것으로 충분하다. 블로거는 뉴욕 라이프스타일 종결자로 거듭난다. ‘구별 짓기’에 성공했다.


뭐, 그게 그리 나쁜 건 아니다. 다만, 문제는 맛에 대한 주체성이 담겨 있지 않다. 내가 골라 먹은 맛집이라는 형식, 표방하지만, 내용을 보면 그렇지 않다. 오로지 남은 건 스타일뿐이다. 사진을 통해서 그럴싸하게 보이면 그뿐. 재료는 어떤 것이며,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는 없다. 사람들의 숨소리와 땀 냄새도 없다. 오직 소비하는 상품, 소비하는 장소, 소비하는 자의 쾌락만 배치돼 있다.


그건 ‘맛집’이 아니다. 줏대 없이 움직이는 혀에 의해, 소비하는 자의 쾌락만을 위해 복무하는데 무슨 ‘맛’을 가진단 말인가. 맛집만 60만개에 달한다는 시대. 어딜 가나 맛집 천국이다. 그러나 진짜 맛집은 없다. 언론과 미디어는 그걸 충분히 알고 블랙 커넥션을 형성했고(<트루맛쇼>에는 그것이 잘 나온다), 줏대 없고 무지한 일부 ‘맛집 블로거’들은 그것을 조건반사적으로 따른다. 주체성이 없다는 건 그것 때문이다. 그들만의 맛집, 사진의 구도만 달리할 뿐, 립싱크가 난무한다.


그런 욕망, 조선 사대부들의 것과 통하였느니라. 무슨 말인고 하니, 조선 사대부들에게도 음식의 그런 맥락이 있었다. 소고기, 고귀한 신분과 지위의 상징이었다. 문화인이라는 자부심까지 심어주기도 했단다. ‘구별 짓기’하면, 일가견이 있는 그들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일만하다. 당시 백성들은 소를 사람 대신 땅을 갈아 곡식을 심게 해 주고, 무거운 짐을 운반해 주는 동물이라 고기까지 먹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백성들의 육식관은 사대부들에 비해 염치가 있었던 셈이다.


헌데, 사대부들의 이런 ‘소고기 사랑(?)’은 조선의 건국이 큰 역할을 했다. 새 나라 조선이 들어섬과 함께 가장 사소하면서 강력하게 일어난 변화는 밥상이었다. 육식 금지가 풀린 것이다. 물론 힘없고 돈 없는 백성들에겐 이런 변화가 약 올리는 처사였다지만. 없어서 못 먹었으니까.


“조선 건국이 민중들의 식생활에 끼친 변화는 토지 개혁으로 ‘이밥’(이성계가 준 밥)을 먹게 된 것과 육식이었다. 고려 시대에는 소고기를 많이 먹지 않았다.” (p.48)


오호, 재밌는 음식문화사인 것 같지 않나? 《조선의 탐식가들》이 주는 쾌락(!)이다. 음식은 인간의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지만, 거기엔 늘 생존 이상의 무엇이 있다. 이 책은 음식에 늘 시대와 사회가 담길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다양하게 보여준다.


먹는 것이 곧 사람이다!


‘먹는 것 갖고 왜 그러냐?’고 우리는 묻곤 하지만, 사대부들에게 먹는 것이 곧 사람이었다. 즉, 정쟁 상대를 공격하거나 역모 죄인의 간악함을 까발릴 때, 식탐 버릇을 문제 삼았다. 그럼으로써 도덕성에 타격을 입혔다. 명분을 만든 셈이었는데, 방금 말한 대로 ‘먹는 것이 곧 사람’으로 치환됐다. 먹어서 남과 구별 짓는 행위와도 이는 통한다. 


《조선의 탐식가들》은 사대부들이 왜 우심적(소의 염통을 얇게 저며서 양념간장으로 간을 하여 구운 음식)을 좋아하는지 언급한다. 우심적에 담긴 이야기 때문인데, 이 음식엔 ‘당신을 왕희지처럼 여긴다’라는 뜻이 있다. 저자는 사대부들이 우심적의 맛보다 그런 호사가 더 즐거웠으리라 추정하는데, 브런치라고 다를까. 브런치의 맛보다 ‘뉴욕 라이프스타일을 즐긴다’는 호사를 즐기는 사람들이 더 많다고 나는 자신할 수 있다. 


조선시대, 권력싸움에서 패배하면, 먹는 것 갖고도 공격을 당했다. 재밌는 건, 탐식이 도덕적인 치명상이었다는 것이다. 도덕적인 흠집 내기로도 익히 사용됐다고 한다. 탐식은 그만큼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 행위였다. 물론 그런 분위기였기에 조선 시대 양반들의 탐식 기록은 많지 않다. 탐식이 까발려지거나 부풀려지는 건, 권력의 눈 밖에 날 때다.


“조선 시대의 간관들은 탐식을 하는 관료를 공개적으로 성토하기도 했고, 당쟁을 벌이는 관료들은 정적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기 위해 집요하게 상대방의 탐식 습성을 물고 늘어졌다.”(p.279)


그럼에도 먹는 것, 그것도 많이 먹는 것은 조선시대의 ‘대세’였던 것 같다. 외국에 조선하면, 대식국大食國으로 알려졌다고 책은 전한다. 18세기 조선의 일상을 쓴 샤를 달레, 《조선교회사서설》을 통해 이리 말한다. “조선사람들의 큰 결점은 폭식이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 양반이나 상민이나 많이 먹는 것을 영예로 여기고, 어릴 적부터 많이 먹어 위장을 늘려 놓는다.”


이런 말, 들어본 적이 있다. 중국인은 음식을 혀로 먹고, 일본인은 눈으로 먹고, 조선인은 배로 먹는다. 조선인을 비하하기 위한 말이었다고 생각했었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던 듯싶다.


탐식에 대해 우리가 가장 많이 들었던 건, 아마도 중세 기독교의 칠거지악을 통해서가 아닐까. 정욕, 탐식, 탐욕, 나태, 분노, 시기, 허영. 탐식이 특히 지탄을 받은 건, 다른 죄악까지 불러 모으는 근원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만큼 탐식은 동서고금을 망라한 죄의 으뜸이었다.


그럼에도 탐식은 여전히 포기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순수하게 먹는 것에 대한 욕심 때문만은 아니다. 새롭고 진귀한 음식을 먹는 것, 지위와 권세를 확인하고 보여주는 기회였다. 조선에서 탐식은 소수의 권세가들이 누린 특권이었던 셈이다. 맛집 포스팅이 그렇게 끊임없이 이뤄지는 것, 물론 조선의 권세와 다르겠지만 다 숨은 이유가 있다.      


탐식에 대한 비판은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인 한편 권세가의 전횡을 견제하여 관료층의 부패를 억제하기도 하는 기능도 했다. 아울러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역할도 했다. 권세가에게 탐식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대다수 기층 인민은 기아에 시달렸다. 특권층의 호위호식을 통제하지 않으면 인민의 분노가 폭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맞다. 먹는 것은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지금도 일자리, 일자리 얘기하지만, 그것은 곧 먹는 것과 직결돼 있다. 체제의 붕괴를 막기 위한 방책으로 탐식을 건드리는 건, 지배세력의 자기 방어와도 같은 것이다. 지금이라고 다르지 않다. 인민의 분노 게이지가 위험 수위에 도달할 즈음, 권력은 재벌의 탐식(!)을 비판한다. 최근의 ‘재벌 빵집’건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그것은 체제 유지를 위한 임시방편이다. 시스템을 확실히 바꾸거나 뒤집지 않는다. 정부가 잊을 만하면 출총제(출자총액제한제도)를 꺼내드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이 책, 조선의 탐식가(혹은 조선의 음식문화)를 말한다. 그러면서 지금의 우리 사회와 연관 지어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먹는 것,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리라.


어떻게 먹을 것인가!


《조선의 탐식가들》은 더 나아가 어떻게 먹는 것이 바르게 먹는 것일까를 고민하게 만든다. 우선 저자는 바르게 먹는 것과 관련 두 가지 뜻이 있다고 언급한다. 하나는 낯설거나 부정한 음식을 먹지 말라는 것. 또 하나는 음식을 대하는 마음가짐과 자세를 바르게 하는 것이다. 이에 송나라 시인 황정견의 식시오관(食時五觀), 즉 ‘음식을 대하는 다섯 가지 마음가짐’에 대해서도 인용한다. 


․ 음식을 보면 그 속에 담겨 있는 노고를 헤아리고, 그것이 어디서 나왔는지 생각해 보라.

․ 자신의 덕행이 완성되었는지 결여되었는지를 헤아려서 공양을 받아야 한다.

․ 마음을 절제하여 지나친 탐욕을 없애는 것으로 근본을 삼아야 한다. 특히 맛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까탈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

․ 음식을 몸에 좋은 약으로 알고 몸이 파리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먹어야 한다.

․ 군자는 도업을 먼저 행하고 그 다음에 음식 먹을 생각을 해야 한다.


뭐, 다른 건 각자 알아서 해석하기로 하고, 내가 꽂힌 것은 바로 첫 번째 마음가짐이었다. 음식을 보면 그 속에 담겨 있는 노고를 헤아리고, 그것이 어디서 나왔는지 생각해 보라. 커피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늘 가슴 속에 품은 명제이다. 내가 공정무역 커피에 꽂힐 수밖에 없었던 이유라면 이유이다. 그러면서 나는 모든 먹을거리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내가 먹는 것은 어디에서 어떻게 왔는가’를 나는 생각하는 사람이 됐다.


내가 생각하는 탐식은,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가 말한 ‘탐식의 유형’, 시도 때도 없이, 너무 섬세하게 맛과 호화로운 음식을 추구하며, 게걸스럽게 너무 많이 먹는 것과는 약간 다르다. 이제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는 욕망은 더 이상 죄라고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심정적인 죄라고 할지라도, 이를 어긴다고 경찰이 잡아가지 않는다. ‘우리들의 아름다운(?) 약속’처럼 대량소비와 탐식을 미덕처럼 여기기까지 한다. 저자의 현실인식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거대한 식품기업과 언론이 가르쳐 준 ‘맛집’의 충실한 고객으로 살고 있다. 우리 사회는 개개인의 모든 욕구를 억압하면서도 유독 식욕만큼은 제동을 걸지 않는다. 도리어 더 많이, 더 맛있게, 새로운 맛을 추구하라고 부추긴다.”(p.330)


고로, 나에게 탐식은, 맛의 주체성을 잃고, 화학조미료가 이룬 ‘(감칠)맛의 평등’에 중독됐으며, 거대 브랜드(의 공세)에 아무 생각 없이 끌려 다니면서 ‘짱’을 외치는, 재료가 어떻게 왔는지조차 알 생각을 않는다는 뜻이다. 많은 맛집 블로거가 그렇다. 그럴듯해 보이면 그것으로 끝이다. 혀와 코가 줏대 없이 움직이는 한편 눈으로만 먹을거리를 대한다.


그것은 죄악이다. 저자는 다른 범죄와 달리 탐식은 남을 해치지 않고 자신에게 해를 입힐 뿐이라고 했지만, 블로그 등을 통해 자신에게만 미칠 해를 남에게 전파하고 있으니, 그건 죄가 아니고 뭔가. 무엇을 어떻게 먹을 것인지 분별해야 하는 이유이다. 맛있다는 음식을 찾아가 먹는 행위가 미식이 아니다. 저자는 내가 좋아하는 황교익 음식문화칼럼니스트(《미각의 제국》《한국음식문화박물지》)의 말을 인용해 미식을 정의한다.


황교익 칼럼니스트는 탐식을,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며 먹는 것”이라고 했고, 미식을, “음식에 담긴 삶을 맛보자는 것”이라고 했다. 당신이 이전에 가졌던 미식에 대한 개념, 송두리째 바꿔야 한다. 남까지 망치는 탐식을 하고 싶지 않다면, 음식에 담긴 삶에 좀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어려운 일도 아니다. 당신이 세상에 사소한 애정을 갖고 있다면 충분히 쉽다. 나는 세상의 일부이자, 세상도 나의 일부임을 안다면. 


다시, 미식을 생각한다


당연히 나는, 다산 정약용이나 성호 이익처럼 음식에 대해 지나치게 이성적인 태도를 요구하는 것, 아니다. 오랜 유배생활을 버텨 내기 위한 호구지책으로 개고기를 애호했다는 다산은 “음식이란 목숨만 이어가면 되는 것”이라면서 한 끼 식사에 재화를 낭비하거나 너무 많이 먹는 것을 경계했다. 평생 소식(小食)을 실천한 성호 이익도 부유한 집에서 하루 일곱 번이나 식사를 한다고 질타하면서 조선이 가난한 원인으로 음식 사치와 대식을 꼽았다. 


나는 그렇게까지 먹는 것에 엄격할 자신, 없다. 이 책을 읽고, 단지 시를 읊고 싶었다. 고려의 문신, 목은 이색은 ‘배부른 하증(중국 진나라 무제 때 재상으로 탐식의 대명사이자 전설적인 탐식가)보다 배고픈 시인이 낫다’는 의미를 담아, “방장(식전방장)이야 배부르게 먹을 줄만 알겠지만 / 굶은 배는 시를 토해 낼 줄도 아는 걸요”라고 말했다. 탐식에 대한 경계의 의미를 담은 것일 게다. 진짜 굶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좋은 재료로 만든 좋은 음식은 절로 시를 읊게 만든다고 믿는다.


고려의 문장가 이규보도 지인이 보낸 미나리를 먹고 시를 읊었다고 한다. 고작 미나리 먹으면서 웬 호들갑이냐 싶을지 몰라도, 역시 이것도 은유 아니겠는가. 채소 하나라도 이런 정성이라면 ‘미식가’라는 호칭, 충분하다. 저자의 생각에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안빈낙도의 삶에 허용된 착한 사치이자 청빈한 삶에 대한 메타포로 언급했던 ‘순챗국과 농어회’도 먹고 싶어졌다.   

 

이른바 ‘맛집 블로거’랍시고 호들갑 떠는 사람들이나, 맛집이랍시고 간판을 단 음식점들에게 《조선의 탐식가들》, 필독서 되겠다. 심리학에서는 식탐의 원인을 결핍감에서 찾는다고 한다. 미식과 식탐은 그래서 심리적으로 다른 문제라고 한다. 어떤 결핍이든, 게걸스럽게 먹는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먹는 것에는 진짜 중요한 삶의 문제가 늘 내포돼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맛집 블로거들, 이젠 먹을거리를 통해 제대로 삶을 담아낼 때다. 저자에 의하면, 조선 사대부들, 식탐은 많았지만 조리법을 외면해 조리서 하나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문자를 독점했던 양반층이 조리법에 관심을 뒀다면 조선의 음식문화, 훨씬 풍성하게 꽃피웠을 거라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 아쉬움에서 느낀 바 있을 것이다. 맛집 블로거들이 탐식 아닌 미식의 자세로 접근한다면, 우리는 장례식장에서 맛보는 공포의 육개장 같은 맛집 타령에서 벗어날 것이다. 그때, 우리는 개념을 탑재한 맛집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느낀 바가 없다고? 그냥 처먹고 뒤져라. 나는 그들에게 ‘악의 평범성’을 붙여주겠다. 고 투 헬(Go to Hell).

 

《조선의 탐식가들》, 재밌고 사유도 하게 만들어준다. 두 마리 토끼 잡는 것, 어렵지 않아요~! 앞서 언급했던 황교익 칼럼니스트의 저작, 《미각의 제국》《한국음식문화박물지》을 출판한 곳이 이 책과 같은 '따비'이다. 이들 저작물이 비슷한 맥락에서 출판된 것 같은데, 따비, 음식문화전문으로서 참 좋은 출판사로 여겨진다. 고맙다. 좋은 책들 내줘서, 내 세계를 넓혀줘서. :)

 

 

p.s. 커피와 두부의 공통점


이 책에서 하나 더 건진 것이라면, 커피와 두부의 공통점이다. 맛있는 두부를 만들려면 콩물을 끓이는 온도와 시간이 중요하단다. 즉, 몇 도의 온도로 몇 분을 끓이느냐에 따라 두부 맛이 달라진다. 커피라고 다르지 않다. 커피를 볶을 때, 커피를 추출할 때, 역시 온도와 시간이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두부를 언제부터 먹었을까. 책에 의하면, 두부는 고려 성종 때 최승로가 쓴 <시무 28조>에 처음 등장한다. 당시 두부는 사찰에서 만들어 부처에게 공양하던 귀한 음식이었다.

 

조선시대에도 두부는 인민들이 먹기 힘든 음식이었다고 한다. 콩을 갈고 콩물을 짜는 데 힘이 많이 들고, 뭣보다 인민들은 두부를 만드는 법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콩물을 끓이는 온도와 시간, 불의 세기를 잘 조절해야 하는데, 숙달된 기술과 경험이 필요했다. 잘 만든 두부는 사대부들 사이에 선물로 주고받을 만큼 귀한 대접을 받았다. 두부가 사대부가에 널리 퍼진 것은 제사상에 두부를 올리면서부터라고 한다.


커피도 귀한 음용수였다. 커피를 먼저 자신들의 음료로 받아들인 이슬람권에서는 커피를 다른 문화권에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철저하게 커피콩의 유출을 막았다. 아울러 커피의 초기 역사에서 수도원에서 커피가 제조됐고, 수도사들이 커피를 즐겼다. 이후 유럽으로 전파될 때도 커피는 왕과 교황, 귀족들 사이에 주고받는 선물로 성가를 드높였다.


얼마 전, 나는 커피를 마시러 부암동에 갔다. 헌데, 이 책을 보니 조선시대 최고의 두부는 “서울 장의문 밖 사람들”이 만든 것을 꼽았다고 한다. 장의문은 지금 부암동 자하문의 다른 이름인데, 지금 부암동에는 최고의 두부 솜씨를 이어받은 두부집이 없는 대신 최고의 커피집 가운데 하나가 있다. 최고의 두부 명맥이 끊어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나, 최고의 커피 명맥이 끊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도 부암동에서 커피를 만들고 내리고 싶다.


아울러, 조선 중종 때 안동 선비 김유가 전통 요리법을 기록한 책, ‘수운잡방’의 이름을 딴 음식을 나의 커피하우스에서 대접하고 싶다. ‘진짜’ 맛집 블로거들에게. 참고로, 수운잡방이란 ‘풍류를 아는 사람에게 대접하는 특별한 요리’라는 뜻이다.

 

(* 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작성됐다. 그러나 그런 사실에 영향을 받지 않고, 내가 느끼는 바 그대로를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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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9시 커피] 오늘만큼은 커피는 블랙을! | 밤9시의 커피 2012-02-21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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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커피는 반드시 강하고 뜨거워야 한다.

강한 커피가 싫다면 블랙커피를 마시지 말라.

그리고 블랙커피를 마시지 않는다면 그 어떤 커피도 마시지 말라.

- 앙드레 시몽 -

 

밤9시의 커피, 오늘 준비한 커피는 말콤 엑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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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너와 나를 살리고 치유하는 무엇 | 북카페 2012-02-19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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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내 마음을 만지다

이봉희 저
생각속의집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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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나와 당신을 살게 할 것이다. 문학이 만져줌으로써 우리는 치유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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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그저, '읽을거리'라고만 생각하진 않았다. 그렇다고 문학이 내 모든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문학은 내 삶에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문학에는 그 어떤 것보다 많은 것이 있다. 무엇보다 내가 살아가는 세상은 물론 내가 겪지 못한 세계도 있으며, 사람들의 삶이 꿈틀대고, 세상의 숱한 진실이 있다. 문학에는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이 있는 한편, 세상의 모든 더러움이 있다. 나는 감히, 비교나 시소 태울 건 아닐손, 문학이 의학, 법률, 경제 따위보다 훨씬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여기는 '치유'가 진짜 필요한 시대이자 공간이다. 과거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지 않은 채, 묵묵부답 흘러오다보니, 곪을 대로 곪았다. 내 마음에 어떤 상처가 있고, 아픔이 어땠는지, 알 지도 못했다. 만질 수도 없었다. 내 마음의 상태조차 알 수 없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둔 세월. 모든 것은 미쳤고, 내 마음도 미쳤다.  

 

《내 마음을 만지다》는 그 문학과 치유를 다룬다. 문학의 힘이 우리의 상처 입고 버림 받아 울고 있는 마음을 어루만져줄 수 있음을 알려준다. 저자인 이봉희 교수는 그것을 차근차근 말해준다. 시대의 것도, 내 마음의 것도 문학은 바다처럼 감싸고 품어준다. 그리고 치유까지. 문학이 의사이며 판사다. 의학이나 법률이 삶을 유지하는데 꼭 필요하다면, 그것마저 품은 큰 존재가 문학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 키팅선생은 말하지 않았던가. 아래 글에서 나는 그것을 언급한다. 키팅 선생님의 말씀을 믿고 있어서다.

 

《내 마음을 만지다》, 내 마음을 만져주는 책이다. 내 마음뿐 아니라 당신 마음도 그렇게 할 것이다. 문학이니까 가능한 것이다. 당신도, 나도, 우리는 그렇게 詩이자, 시인이니까. ^^

 

아래, 예스24 채널예스에 기고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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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안의 시인을 깨워라, 당신은 어떤 詩가 되고 싶은가!”

『내 마음을 만지다』 이봉희

 

 

<아웃 오브 아프리카(Out of Africa)>. 아시죠? 메릴 스트립과 로버트 레드포드 주연의,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로맨스 영화. 저처럼 커피 만드는 사람에겐 인상적인 아프리카의 커피농장을 볼 수 있었던 이 영화엔 동명의 원작이 있습니다. 덴마크 작가 이자크 디네센(Isak Dinesen, 본명 카렌 블릭센(Karen Blixen))이 원작자인데, 『아웃 오브 아프리카』는 그녀의 자전적인 이야기입니다.


블릭센 남작과 약혼 뒤 케냐에서 커피농장을 개척했고, 이혼 뒤 이를 경영했고,(결국 망했지만) 사냥꾼이자 사파리 안내자였던 데니스 핀치 해튼과 사랑에 빠졌습니다(그는 비행기 사고로 죽고 말았죠). 연인을 잃고, 대공황으로 인한 커피판매 부진과 농작 실패로 농장을 잃은 뒤, 그녀는 ‘아웃 오브 아프리카’, 덴마크로 돌아와 글을 썼습니다.


아프리카와 아프리카인들에 대한 애정이 드러난 『아웃 오브 아프리카』는 출간되자 큰 호평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비록 수상은 못했지만, 노벨문학상 후보에 2번이나 올랐습니다. 그녀가 처음 후보에 오른 195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헤밍웨이는 수상 후 이런 말도 남겼습니다. “이 상은 나보다는 다음의 세 사람, 칼 샌드버그, 버나드 베렌슨, 그리고 아름다운 작가 이자크 디네센에게 돌아갔어야 한다.”

 


짐작컨대 그녀는 이야기를 만들면서 자신의 슬픔을 다스리고 위안을 받은 것 같아요. 연인과 농장, 두 사랑을 앓고 놓친 슬픔이 글쓰기 동력이 됐다고나 할까요. 그녀가 남긴 이 말이 그것을 입증합니다. “All sorrows can be borne if you can put them into a story or tell a story about them(모든 슬픔은 당신이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견뎌질 수 있다).”


이 말은 그녀가 뉴욕타임즈와 전화인터뷰를 한 뒤 1957년 11월3일자 북리뷰에 실렸는데요,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1958)에 인용함으로써 유명해졌습니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 책이든 영화든 보셨다면, 아마도,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토록 사랑했던 연인도, 모든 것을 쏟았던 커피농장도. 그런 그녀를 견디게 한 것은 글쓰기였고,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당신도, 혹시 슬픔과 고통, 아픔이 있다면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에 관해 이야기 해 보는 건 어떨까요? 당신 안에도 그런 문학가가 있거든요.


키팅 선생님과 카르페 디엠(Carpe Diem)으로 유명한 <죽은 시인의 사회>도 그런 이야길 던집니다. “의학, 법률, 경제, 기술 따위는 삶을 유지하는데 필요해. 하지만 시詩와 미美, 낭만, 사랑은 삶의 목적인 거야.” 아무렴요. 당신은 혹시 삶에 필요한 것과 목적을 혼동하고 있진 않는지요? 행여 그랬다면 지금부터 하는 이 이야기에도 귀를 한 번 기울여보시죠. 2012년, 그래서 당신은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거예요. 삶의 목적에 좀 더 충실한.

 


지난 5일, 서울 명륜동 시문화회관이었습니다. 『내 마음을 만지다』의 저자이자 문학치료사 이봉희 교수와 ‘내 마음을 만지’고 싶은 사람들이 만났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감정이 흐르는 대로 내버려뒀던, 느낌이 충만했던 겨울밤. 바깥은 추웠지만,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마음은 충만하고 따듯했습니다.


“우리가 직면해야 하는 현실은, 바로 삶은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실존적 한계상황들로 가득하다는 사실입니다. 마음이 건강해지고 치유된다는 것은 그런 현실, 즉 한계상황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pp.72~73)


‘좋은’ 부모가 되고 싶은 당신에게


좋은 부모. 아이가 있는 부모라면, 누구나 바라는 것. 이봉희 교수는 좋은 부모가 되는, 꼭 필요한 전제를 말합니다.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상처와 고통은 대물림되고, 폭력은 악순환합니다. 무의식적으로 아이에게 악을 행할지도 모릅니다.


이 교수는 페스탈로치의 말을 꺼냅니다. “당신은 당신의 정원에서 악마를 쫓아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악마를 당신 아들의 정원에서 다시 발견할 것입니다.” 말인즉슨 자신의 억눌린 과거와 감정을 해소하지 않으면 그것이 아이들에게 전이될 것임을 경고하는 것이죠.


“부모 자신이 먼저 과거 속 고통의 거미줄을 거두어내고, 자신과 자신의 행복을 전적으로 책임질 수 있도록 건강하고 성숙해져야 합니다. 나는 불행하면서 자녀에게 행복하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부모가 먼저 행복하면 자녀는 자연히 행복해집니다.”(p.24)


이 교수는 헨리 나우엔 신부의 말을 꺼냅니다. “잊혀진 상처는 정녕 잊힌 것이 아니라, 치유될 기회를 놓친 것이다. 잊혀진 것은 치유 받을 수 없고 치유 받을 수 없는 것은 더 큰 악(고통)의 원인이 된다.” 치유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치유해야 할까요? 이 교수는, 브레드 쇼의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통과하는 것뿐”을 들며 슬픔이 바로 치유감정임을 지목합니다.


“남자들도 치유과정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최근 20여명의 대학원생과 문학치유 시간을 가졌는데, 전원이 울었어요. 내가 왜 이러지, 하면서 눈물을 흘리더군요. 우리 모두가 아프구나. 참 할 이야기가 많구나, 느꼈어요. 눈물은 치유의 시작입니다. 슬퍼하는 것을 허락하면 치유가 됩니다.”


그러니, 아이가 울 때, 부모들은 흔히 하는 말, “울지 마”. 이 교수는 그 말을 하지 말라고 권합니다. 되레, “실컷 울렴. 엄마가 안아줄게”라는 것이 더 좋습니다.


“감정은 에너지입니다. 감정을 억압하면 몸속에 다른 에너지로 저장돼 이유 없이 아프거나 우울증 등 다양한 증세로 나중에 나타나요.”


“영어로 감정 Emotion은 ‘흐르다’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그 어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캐슬린 애덤스를 비롯한 저널테라피스트(저널치료사)들의 표현대로 감정(이모션)은 좋고 나쁜 윤리적인 것 이전에 움직이는 에너지 Energy in Motion, 즉 E-모션일 뿐입니다. 따라서 감정을 무조건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게 표현해서 해소시켜야 합니다.”(pp.47~48)


문학치료와 저널치료

 


‘문학치료’란 뭘까요? 여기 정의를 한 번 보죠. ‘문학치료는 성장과 치료, 문제 해결을 위한 문학치료사와 내담자, 그리고 문학 간의 상호작용이다.’


“제 책은 문학치료서가 아니에요. 문학치료는 지식을 주고자 함이 아닙니다. 같이 공감해주고 위로해주고 포기하지 않는 게 약입니다. 문학치료사는 같이 아파하려고 애를 써요. 이때 문학은 촉매로서 역할을 하며 치료사는 문학을 선별․사용해 내담자가 성찰과 성장, 정신적․육체적 자유와 치료로 나아가도록 안내합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내담자의 자기표현이죠. 즉, 글쓰기/시창작/그림/저널쓰기 등 언어표현이 중요한 요소라고 합니다. 문학치유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글쓰기입니다. 문학은 문학적 가치와 무관하게 내담자의 반응을 어떻게 이끌어낼 것인지가 중요하고요. 그래서 남의 사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깨닫고 찾아가고 탐구하도록 만드는 것이 문학치유의 목적입니다.


그렇다면 ‘저널치료’는 뭘까요. 이 교수에 의하면, 글쓰기 치료의 일부입니다. 곧 일기입니다. 정의를 잠깐 살펴볼까요? ‘정신과 육체, 감정의 건강과 행복의 증진, 문제해결, 성장과 치료를 목적으로 한 지극히 사적이며 자유로운 성찰적 글쓰기, 즉 자신의 마음을 읽는 행위다. 성찰적 글쓰기다.’


“내 안의 분노를 어떻게 건강하게 표출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안전한 글로 감정을 쏟아내는 것입니다.”(p.48)


이 교수는, “글쓰기는 말하기와 다른 독특함이 있다”(Bolton)을 인용하면서, SBS플러스의 부부관계치유클리닉 프로그램 <미워도 다시 한 번>의 한 커플이 치유과정에서 ‘저널치료’가 가장 좋았다고 했던 이야기도 꺼냅니다.


“토해내듯 글 쓰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알고자 하는 강박에 시달리고 에너지를 써요. 모든 일을 다 알고자 하는 욕구는 예측 불가능한 부모 때문이에요. 이런 부모 밑의 아이는 포로수용소에서 성장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해결 못한 악은 언젠가 꼭 대물림해요. 그들은 과거를 치유할 때까지 모든 걸 이해하려고 계속 시도해요. 감정을 다루는 작업이 필요한데, 글쓰기나 문학치료가 좋습니다.”


“답답하고 이유 없이 울고 싶다면, 세상에 나만 남은 듯 외롭다면, 나의 고통이 누군가에게 웃음거리가 된 것 같다면, 그래서 어떤 비난도 하지 않는 안전한 친구가 필요하다면 이때 저널이 필요합니다. 펜을 꺼내 공책에 글을 써보십시오. 펜 끝에 숨어 있는 말들을 해방시켜보십시오.”(p.36)


많은 우리는, 어쩌면 감정불구로 자랐고 살았습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이 지극히 정상적인 흐름임에도 부모들이 허락하는 감정만 나도 허용하는 감정의 감옥. 특히 “남자는 울면 안 돼”라는 식으로 남자는 감정을 더욱 짓눌러야 하는 악순환이었죠. 저는 남자인데, 어릴 때부터 저 말 참 많이 들었습니다. 울고 싶어도 저 말이 떠오르곤 했죠. 학습의 결과였을 겁니다. 하지만 그건 나쁜 학습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상대적으로 남자는 여자보다 더 감정이 메말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백곰의 딜레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잊을만하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튀어나오는 빙산 같은 것. 생각을 억압하려 들수록, 그 생각은 다시 떠오를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 이런 겁니다. 1분 동안 백곰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해 보세요. 아마 실패할 걸요? 백곰의 모습이 계속 나타날 테니까요. 백곰의 딜레마는 댄 웨그너 버지니아 대학교수의 『백곰과 원하지 않은 생각(White Bears and Other Unwanted Thoughts)』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고통 받는 사람들은 그 고통스러운 생각을 피할 수 있는 무슨 일이든 하려고 해요. 그래서 무엇엔가 중독이 됩니다. 무엇엔가 생각을 몰두해서 내속의 아픔을 기억하지 않으려고 하는 거죠. 그러나 그건 ‘바보 되기’에요. 높은 수준의 의식은 (고통과 아픔이라는 감정을) 정면으로 대면하는 것이에요. 내 안의 목소리를 찾아주세요. 문학치유는 그래서 내가 나를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건강과 심리적 억압의 관계에 관한 연구를 보면, 우리가 경험한 감정적 격변이나 심리적 외상(트라우마)은 그것의 심각성 그 자체보다는 그것을 털어놓지 못하고 억압하기 때문에 정신적, 육체적 질병을 초래한다고 합니다.”(p.47)

  

아픔,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


왜 나는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지 못할까요?

왜 나는 연약하며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안 된단 말인가요?


우리는 아픔을 말하면 약해서 그렇다는 오해를 받습니다. 경쟁과 효율중심의 사회에서 아픔과 고통은 곧 약함과 동격으로 취급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더 힘들게 하는 게 아닐까요?


이 교수는 말합니다. “아픔은 인격적 결함이 아닌 살아있다는 증거예요. 역설 같지만 아픔은 아름다운 겁니다. 느끼지 못하는 게 고통이죠.” 그리고 <여인의 향기>에서 알 파치노가 분한 프랭크의 예를 듭니다. 프랭크는 “나는 나쁜 인간이야. 아니, 나쁜 게 아니라 썩은 인간이지”라고 자책하는데, 크리스 오도넬이 분한 찰리, 이렇게 말해줍니다. “당신은 나쁜 게 아니에요. 다만 고통 받고 있을 뿐이에요.”


“분노나 슬픔의 감정들을 내면화하여 표현하지 않거나 억압한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해소하지 못하고 억압한 감정 에너지는 마음속에 여러 다른 형태로 저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다가 예기치 않은 순간에 공허감이나 우울함, 대인관계의 문제, 원인을 알 수 없는 육체적 통증 등 뜻밖의 형태로 나타나서 내 자신과 타인에게 고통을 안겨줍니다.”(p.47)

 


자존감에 대한 이야기가 따릅니다. 이 교수는 낮은 자존감은 나를 잃어버린 것, 혹은 없어진 것과 같은 상태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나를 찾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이 나의 일부임을 받아들이고 현재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느껴야 합니다. 타인의 판단이나 의견이 아니라 자기 내면으로부터 자신의 독특함을 깨달아야 해요. 내 존재를 타인(의 인정)에 기대지 마세요. 자존감을 키워 나를 발견한 사람은 창의성이 높아집니다. 내면의 비판자에게 해방된 후에만 자아는 명확히 표현하기 시작하고 창조성을 발전시켜요. 감정을 다루는 글쓰기가 그래서 아이에게는 필요해요.”


이 詩를 한 번 보시죠. 김지하 시인의 「속3」입니다.

솔직한 것이 좋다만/ 그저 좋은 것만도 아닌 것이/ 詩란 어둠을/ 어둠대로 쓰면서 어둠을/ 수정하는 것/ 쓰면서/ 저도 몰래 햇살을 이끄는 일.


문학의 치료적 힘은 이어지는 문구에서도 드러납니다. “나를 찾으려면 낯선 자를 찾아가라.” 낯선 자가 곧 문학이요, 문학치유사 등입니다. 이 교수는 문학치유를 한 계기를 설명합니다. 수업을 할 때 학생들에게 문학감상문 숙제를 주고, 자신의 느낌을 쓰도록 했답니다. 학생들이 수업 중 울기도 하고, 어떤 문제나 우울증 등이 치유됐다는 편지를 많이 받았답니다. 그것이 계기가 돼 문학치유라는 학문을 개발하고 싶었고, 마침 찾아보니 미국에선 이미 의사들이 오래 전 시작을 했습니다. 이 교수, 본격적으로 문학치료사로서의 길을 나섰습니다. 


“문학에는 정답이 없다고 학생들에게 말했어요. 지금 이 순간, 시를 읽고 느낀 게 그 학생에게 진실이고 정답이라고 했어요. 어떻게든 자기 이야기를 하도록 만들려고 했고요. 언어는 하나의 사인(sign)이고, 독자는 그 죽은 암호에 숨결을 불어넣습니다. 그러면 그 죽은 문자가 내게 의미가 돼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피그말리온 신화와 같은 것이죠.”


문학과 치료

 


아이와 어른의 차이는 뭘까요. ‘놀라워하는 능력.’ 아이 때, 모든 게 놀랍고 경이롭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모든 게 낯익고 생의 경이로움을 느낄 수 없습니다. 문학은 그런 어른에게 놀라움과 경이로움을 선사하는 무엇입니다. 문학은 곧 ‘낯선 사람/낯설게 하기’입니다.


“<소피의 선택>에는 이런 말이 나와요. “철학하는 유일한 힘은 놀라는 것이다.” 어른은 아이처럼 놀라워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요. 어른은 지식, 지혜, 경험이 있으나 경이로움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날이 그날 같고, 매일 똑같아요. 어른의 그것을 회복하도록 하는 게 문학입니다. 어른의 지혜와 지식에 아이의 놀라워하는 능력을 동시에 가진다면 어떨까요? 그런 능력을 가졌던 사람, 그래서 세상을 바꾼 사람이 뉴턴입니다. 뉴턴은 ‘사과가 왜 떨어지지?’하고 의문을 가졌지요. 놀라워하는 능력을 회복시키는 것이 문학의 힘이고 철학도 유사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이 교수는 말하지 않은 침묵의 언어에 대해서도 덧붙입니다. “침묵의 언어를 읽는 힘이 삶을 풍요롭게, 외롭지 않게 해요.”


이 교수, 문학의 궁극적 힘은 ‘자아의 확대’라고 강조합니다. 타인은 변하지 않으니 기대하지 말 것. 문학은 눈에 보이고 들리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존재. 즉, 삶과 사유의 영역을 확대해주는 것이 문학입니다. 문학은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인식시키고, 전인적 자아의 완성을 돕습니다. 프로이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의식의 세계를 발견한 사람은 내게 아니고 시인이다.”


이 교수 생각에는 우리 안에 시인이 있고, 그 시인을 깨우는 것이 곧, 문학치료입니다. 이 교수,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있는 이 말을 꺼냅니다. “내 속에서 솟아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그리고 도종환 시인의 「내 안의 시인」을 함께 읊습니다.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는 시인이 살고 있었다는데/ 그 시인 언제 나를 떠난 것일까/ 제비꽃만 보아도 걸음을 멈추고 쪼그려 앉아/ 어쩔 줄 몰라하며 손끝 살짝살짝 대보던/ 눈빛 여린 시인을 떠나보내고 나는 지금/ 습관처럼 어디를 바삐 가고 있는 걸까 (…) 의롭지 않은 이가 내미는 손은 잡지 않고/ 산과 들 서리에 덮여도 향기를 잃지 않는/ 산국처럼 살던 곧은 시인 몰라라하고/ 나는 오늘 어떤 이들과 한길을 가고 있는가(…) 내 안에 시인이 사라진다는 건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최후의 인간이 사라지는 거라는데(…)


“우리 각자가 하나의 詩이자, 언어라고 생각해요. 여러분 각자는 詩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언어인 상대를 각자 자신의 언어로 번역합니다. 가끔 ‘나를 함부로 펼치지 말라. 나를 당신의 언어로 번역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을 때가 있어요. 여러분들 안에 있는 시인을 깨우세요. 우리의 일생은 하나의 긴 연작시를 써내려가는 과정이에요. 여러분에게 마지막 도전을 던지고 싶어요. 여러분 각자는 어떤 詩가 되고 싶으신가요.”


“시인은 자신의 은밀한 고통으로 우리를 위로해주는 사람들입니다. 문학은 내가 아프다고 말하면 “너만 그런 게 아니야 나도 그래”라고 말해줍니다. 시인 가이 존슨의 말처럼 문학이 주는 가장 큰 위로는 우리가 인생의 어떤 어두운 길목에 서 있든지 누군가는 이미 나보다 먼저 그곳을 지나갔고, 그리고 승리했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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