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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시아의 여정] 한 여자의 이야기, 어쩌면 모든 여자의 이야기 | 리뷰 2021-08-31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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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펠리시아의 여정

윌리엄 트레버 저/박찬원 역
문학동네 | 2021년 05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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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대 시절의 나는 좀처럼 미래의 나를 상상하지 못했다. 학교와 학원, 독서실만 왔다 갔다 하는 답답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날 수만 있다면, 공부 외에는 아무것도 허락되지 않는 생활을 끝낼 수만 있다면 그 방법이 대학이든 무엇이든 상관없다는, 지금 생각해 보면 체념이나 포기에 가까운 생각을 했다. 상황은 다르지만, 펠리시아도 비슷한 심경이었을 것 같다. 아일랜드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펠리시아는 어머니를 일찍 여읜 탓에 어릴 때부터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해야 했다. 매일 아침 식구 중 제일 먼저 일어나 식사를 차리고, 아버지와 두 오빠의 출근 준비를 돕고, 몸이 좋지 않은 증조할머니의 병수발을 들고, 빨래와 청소를 하고 식사 준비를 하는 일은 모두 어린 펠리시아의 몫이었다. 

 

집에서 '노는' 딸이 밖에서 일하는 식구들을 위해 이 정도는 당연히 해줄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다. 사실 펠리시아한테는 직장이 있었다. 수녀원 학교를 졸업한 후 육가공 공장에 취직했다. 하지만 갑자기 공장이 문을 닫게 되었고 자연히 펠리시아도 실업자가 되었다. 마을 전체에 실업자는 넘치고 일자리는 부족한 상황. 남성도 아니고, 교육을 많이 받은 것도 아니고, 의지할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닌 펠리시아에게 일자리를 제안하는 고용주는 없었다. 아버지와 오빠들도 펠리시아가 취직하지 않고 집에 있는 편을 원했다. 그 편이 펠리시아 대신 집안일을 해줄 식모와 간병인을 구하는 것보다 더 '싸게 먹혔기' 때문이다. 이때 조니라는 남자가 펠리시아 앞에 나타난다. 펠리시아와 같은 마을 출신으로 현재는 영국에 살고 있는 조니에게 펠리시아는 푹 빠진다. 외출도 자유롭게 못하는 펠리시아에게 조니와의 데이트는 꿈보다 달콤한 시간이다. 

 

자신의 뱃속에 조니의 아이가 있다는 걸 알았을 때, 펠리시아는 앞으로 받게 될 고통과 비난을 염려하며 괴로워했지만, 한편으로는 이것이 자신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기회임을 직감했다. 그래서 무작정 영국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새장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무한히 자유로울 거라고 믿는 새처럼, 영국으로 가서 조니만 찾으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 리 없다고 믿을 만큼 순진하진 않았지만, 지금보다 더 나빠질 순 없다고 생각할 만큼 절박했다. 집과 동네만 오가는 갑갑한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살림과 간병이 전부인 생활을 그만둘 수만 있다면, 가족들을 배신하고 그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결과가 되더라도 상관없었다. 

 

실상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영국에 왔지만, 영국에서의 여정은 기대 이상으로 힘들었다. 주소는 틀리고, 말은 안 통하고, 아는 사람은 없고, 돈은 떨어져 가고... 조니를 찾기 전까지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이제라도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을 때는 가져온 돈을 전부 잃은 상태였다. 펠리시아가 도와달라고 손 내민 사람들은 펠리시아를 외면하고, 펠리시아를 도와주겠다고 다가온 사람들은 펠리시아를 이용할 생각만 했다. 임신한 여성을 위한 복지 혜택이나 외국인을 위한 긴급 구제 수단도, 불법 체류자인 펠리시아와는 무관했다. 결국 펠리시아는 처음 영국에 왔을 때는 상상도 못했던 결말을 맞는다. 

 

펠리시아가 어리석어서 안 좋은 선택을 한 걸까. 펠리시아가 운이 없어서 유난히 나쁜 사람들을 만난 걸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무지와 불운 때문에 인생을 망치는 사람이 많은 사회는 바람직한 사회가 아니다. 어리석고 운이 없는 사람도 최소한의 생활은 보장이 되는 사회, 미래를 다시 계획하고 인생을 스스로 꾸릴 수 있도록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가 좋은 사회다. 

 

아일랜드 출신 작가 윌리엄 트레버가 이 소설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한 여성이 얼마나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나 얼마나 불행한 일들을 겪었는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소위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영국 내부에 어떤 병폐가 있는지, 더 자세히 말하면 - 과거 영국이 아일랜드를 침략하고 탄압한 역사로 인해 최근까지 얼마나 많은 아일랜드인들이 고통받고 있는지, 심지어는 침략을 경험해본 적 없고 전쟁과도 무관한 여성이 어떤 식으로 전쟁에 사로잡힌 가족에 의해 소외당하고 학대당한 결과 스스로 영국으로 도망치는 길만이 희망이라고 믿고, 그로 인해 영국에서 아일랜드 출신(인 데다가 임신한 여성)이라는 이유로 어떤 절망스러운 경험들을 하게 되는지를 고발하는 것이야말로 이 소설을 쓰게 된 동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작가는 이 소설의 최대 빌런인 힐디치가 왜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하는데, 나는 이러한 설명이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펠리시아와 유사한 일을 겪은 여성들에 대한 모욕이라고 느꼈다. 힐디치가 어릴 때 성폭력을 당했고 아버지 없이 성장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세상에는 어릴 때 성폭력을 당하고 아버지 없이 성장하고도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모범적인 시민으로 사는 사람이 훨씬 많다. 그리고 그러한 분노나 원한을 또 다른 범죄를 막거나 범죄자를 잡는 데 쓰지 않고, 자신보다 훨씬 약하고 불우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괴롭히는 데 썼다는 점에서 그 자신의 비겁함 내지는 졸렬함을 증거할 뿐이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어쩌면 작가는 펠리시아에게서 조국인 아일랜드를, 힐디치에게서 아일랜드를 오랫동안 식민지로 삼고 탄압했던 영국을 보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렇게 작정하고 집필했거나, 무의식적으로 그런 식의 구도를 상정했는지도. 어찌 됐든, 아니 그렇다면 더더욱, 펠리시아가 힐디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비록 길바닥 인생일지언정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결말을 택한 건 조금 약한 결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힐디치도 그런 식으로 - 그에게는 과분한 동정을 받으며 - 죽음을 맞을 게 아니라 아주 비참하게, 기왕이면 펠리시아를 포함한 피해 여성들에 의해 처절한 복수를 당하는 식으로 죽었어야 하지 않나. (내가 보기에 남성 작가는 여성 캐릭터보다 남성 캐릭터에게 모질지 않은 경향이 있다.)

 

작가는 펠리시아가 결국 길 위에서 그토록 원했던 평화와 안정을 얻은 것으로 묘사했지만, 오늘날 길 위에 있는 '펠리시아'들의 사정이 그때보다 더 나아졌는지는 의문이다. 적어도 한국의 경우에는 같은 노숙자라도 남성 노숙자보다 여성 노숙자들의 형편이 훨씬 안 좋다. 노숙자가 아니라도 여성은 거리를 걸을 때 스토킹, 묻지마 폭행 등을 당하거나 성희롱, 성폭행 피해에 노출되는 경우가 남성에 비해 훨씬 더 많다. 길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는 공중화장실이나 공원, 지하철, 버스 등의 대중교통 수단에서 겪는 피해까지 더하면 그 수가 엄청나다.

 

나는 펠리시아처럼 가난한 여성, 가정에서 보호받지 못한 여성, 교육을 받지 못한 여성,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 성희롱 또는 성폭력을 당한 여성 등에게 충분한 지원이 주어지기를 바란다. 그들 모두의 이야기가 펠리시아라는 한 여성의 이야기로 읽혔으니, 이 책은 과연 대단하다. 전 세계의 여성들에게 지금보다 나은 삶이 보장될 때까지, 이 책은 더 많이, 더 깊게 읽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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