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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리스도인 인가 | 기독교 2008-04-17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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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왜 그리스도인 인가?

한스 큉 저/정한교 역
분도출판사 | 1990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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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 1000만명(기독교내주장), 장로 대통령. <국민일보>가 4월 11일 국회의원 당선자 299명을 대상으로 집계·분석한 결과 당선자의 32%인 97명이 기독교신자로 파악됐다. 참고로 지난 17대 국회의 기독의원은 41%인 122명이다. '고소영'에서 '소'는 이명박 대통령이 다닌 소망교회를 말한다. 숫자와 권력 모든 면에서 이미 기독교는 정점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는 비기독교인과 사회의 강력한 비판에 직면해 있다. 지난 해 7월 아프가니스탄 피랍사태는 비기독교인과 사회의 교회를 향한 비판이 얼마나 가혹한지 보여준 사례였다. 한국 교회를 향한 가혹한 비판 앞에 교회는 뚜렷한 대응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어떤 목회자와 교회들은 반공산주의, 친미사대주의 성향까지 보여주면서 한국 교회를 더욱 궁지로 몰아넣고 있다.  


한국 교회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개념 정립 부재가 원인이다. 새벽기도, 철야기도, 예배는 끊임없이 참석하지만 삶의 현장에서는 전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지 않는 것은 '왜 그리스도인 인가?'에 대한 정확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한스 큉이 쓴 <왜 그리스도인인가>은 비판과 질책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이 읽어야 할 귀중한 책이다. 한스 큉을 소개하자면 이런 삶을 살아왔다.  


스위스에서 출생(1928년).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과정을 이수하고 사제로 서품됨(1948-55년). 파리의 소르본느와 가톨릭 대학에서 신학 연구(1955년). 거기서 박사학위 받음(1957년). 고향에서 사목활동(1957-59년). 뮌스터 대학 가톨릭 신학부에서 교의신학 교수(1959-60년). 교황 요한 23세에 의하여 공의회 신학 고문으로 지명됨(1962년). 튀빙겐 대학에서 기초신학, 교의신학, 에큐메니즘 연구원장(1960년 이래). 구미와 아시아의 가톨릭 및 프로테스탄트의 여러 대학에서 초청교수로 활약. 신학과 에큐메니즘에 관한 각종 정기간행물의 편집자 또는 편집 위원.(분도출판사) 


그는 <왜 그리스도인인가>에서 맑스주의자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세계혁명과 무산계급 독재라고 서슴없이 말하듯이 그리스도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에 그들은 '사랑' '의로움'이라고 말한다고 썼다.  


하지만 이런 답은 모호하고, 비기독교인들도 하는 말이며, 실천할 수 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으로 돌아가자!'이다. 기독교는 인본주의를 신봉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주장은 매우 불경하게 들린다.  


한스 큉은 이제 사람으로 돌아감으로써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인종 · 계급 · 민족적 증오에 대항하는 인간성 회복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를 강력하게 요구한다. 인간성 파괴는 세속사회뿐만 아니라 기독교 안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인종 · 계급 · 성 · 돈으로 인한 차별은 교회 안에서 인간성이 파괴되고 있는 증거이다.  


"그리스도교와 인본주의는 모순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인본주의자 일 수 있고 인본주의자가 그리스도인일 수 있다. 그리스도교란 철저한 인본주의로 이해되어야 바르게 이해된다."(26쪽) 


그럼 사람을 부르짖는다고 정말 인본주의인가? 코페르니쿠스(인간의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님을 입증함), 맑스(인간의 조건이 비인간적 사회에 의존함을 논증), 다윈, 프로이드를 통하여 사람은 끊임없이 인간을 부르짖었고, '성실한 인간'을 내세웠던 계몽적 인본주의, '인간다운 속석'을 추구하던 학구적 인본주의, 허무 속에 내던져진 개인의 '실존을 파고들던 실존적 인본주의가 모두 한때 한창이었다고 한스 큉은 말한다.  


또 우리 시대는 과학 · 기술 발전으로 인간성 달성을 부르짖었지만 허상이 무너지고 있다. 실용정부를 내세우는 우리나라 현 정부도 자율화라는 논리로 인간성을 무너뜨리고 있다. 발전과 성장을 부르짖는 인본주의는 결국 "인간의 비인간화라는 뜻하지 않은 사실상의 겨로가를 수반한다."(31쪽) 


인간을 살리고자 했지만 이념은 결국 진정 인간을 살리는 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면서 다른 사람, 다른 인간을 기대한다고 한스 큉은 주장한다. 예수는 근본적으로 인간생활 전체가 하나님을 향하는 태세를 요망한다고 했다. 그리고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통하여 인간성 회복, 진정한 인본주의가 무엇인지 밝히고 있다. 


하느님의 뜻을 한스 큉은 '인간복지'로 표현한다. "하나님은 더도 덜도 말고 인간의 이익을 원하신다. 인간의 진정한 위대함, 인간의 궁극적 존엄성을. 하느님의 뜻이란 곧 인간의 복지다."(168쪽) 


한스 큉의 주장은 기독교인들에게 엄청난 도전이다.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하나님 영광'으로 배움받은 이들에게는 더욱 혼란스럽다. 하지만 사실 하나님은 인간 구원을 원하신다. 하느님은 사람의 생명 · 기쁨 · 자유 · 평화를 원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도 증오와 미움이 있을 때 먼저 형제와 화해하라고 했다. 화해하지 않고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없다고 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예배가 아니라 사람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분명 예수님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 하셨다. 원수까지 사랑하라 하셨다. 예수님은 자기가 한 말대로 사셨다. 예수님은 원칙적으로 가난한 자들 편이었다.  


하지만 가난한 자들 편이었지만 무산계급독재를 선언하지 않으셨다고 한스 큉은 말함으로써 공산주의 이념과 선을 긋고 있다. "예수의 요청은 착취자들에 대한 보복이 아니다. 피약탈자의 약탈과 피압제자의 압제가 아니라 평화 추구와 권력 포기다."(191쪽) 


예수님의 평화추구는 교회가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이념과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기독교는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전쟁에 개입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예수님은 광신적인 구호를 외친 것이 아니라 진정할 실천을 통하여 가난한 자들과 소외된 자들을 위하여 사셨고, 실천하셨다. 


그 예수를 믿는 교회도 인간성 파괴에서 별로 다르지 않다.  


"교회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교회가 사람들을 받들어 섬기지 않고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권력을 휘두르며, 교회의 제도 · 교리 · 법규가 그 자체로 목적이 되고 있는 곳, 무릇 교회의 대변자들이 자신의 의견과 용건을 하느님의 계명과 안배인 양 내세우는 곳-거기서는 으레 교회가 본연의 사명을 배반하고, 거기서는 항상 교회가 하느님과 사람들로부터 멀어지며, 필경 교회가 위기에 빠진다.(303쪽) 


교회가 파괴와 자본에 매여 있다. 교회가 진정한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는 일에 무관심하다. 자유 없는 현장에 무감각하다. 참으로 사람답게 사는 일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에 관심이 없으며 그와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왜 그리스도인인지는 감정으로만 믿는 우리 시대 기독교인이 반추해야 하는 중요한 질문이며, 찾아야 할 답이며, 실천해야 할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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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부론을 향한 일격 | 기독교 2008-04-16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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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바늘귀를 통과한 부자

김영봉 저
IVP | 2003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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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새 정부 캐치프레이즈가 ‘국민 성공시대’다. 이 이면에는 ‘자본’이 숨어 있다. 그는 이 캐치프레이즈로 집권했으며 앞으로 대한민국에서 5년 동안 끊임없이 정부는 말하고, 시민은 듣게 될 것이다. 1997년 IMF 체제 이후 대한민국은 양극화가 심화되어 계층 상호간에 분열 조짐까지 보이고 있다. 더 고착화되면 새로운 계급 사회가 도래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며 어쩌면 이미 새로운 계급 사회에 들어갔을 수도 있다. 양극화는 중심은 결국 ‘자본’이다. 자본은 대한민국 모든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삶의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다.



 교회도 여기에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세속 사회가 한국 교회를 물질주의로 비판하는 것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교회 내부에서 물질주의를 비판한다. 몇 해 전 한국 교회에 ‘청부론’을 두고 많은 논쟁이 있었다. '청부론' 풀어쓰면 ‘깨끗한 부자’이며 핵심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부자 되기를 원하신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돈을 일만 악의 뿌리로 가르침을 받았던 성도들에게는 솔깃한 개념이었고, 돈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할 수 있었다. 청부론은 부를 소유하는 것에 대한 부담을 들어주는 개념이었다.




 대한민국 경제체제는 ‘공산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를 국체로 삼고 있고 있기에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벌어 부자가 되는 것을 터부시 하는 일은 옳지 않으며, 성도도 대한민국 시민권자이기에 자본을 통한 부의 축적일지라도 정당하다면 별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이 청부론이 대두한 이유이기도 하다. ‘부자 되세요’가 한 해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의 희망으로 자리 잡을 때 성도도 추구하고 싶은 슬로건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청부론이 설득력 있는 개념이어도 성도는 자본을 주인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자들이며,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말씀은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살아가는 성도들을 갈등하게 한다. 무조건 ‘부자 되세요’를 삶의 기준으로 삼을 수 없다.




 청부론이 등장해야 할 만큼 한국 교회는 세속 사회까지 자본을 주인으로 모시는 자본에 매몰되었다. 돈을 버는 일이 하나님의 복으로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자 어떤 이들은 한국교회를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었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청부론’이 대두된 이유도 자본의 노예가 되어 버린 한국교회가 건전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물질을 소유하는 방법, 자본의 노예는 아니지만 그래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질의 부를 어느 정도 가지는 것은 문제되지 않는다는 인식을 통하여 세속 자본주의와는 다른 부의 개념을 도입하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한국 교회에 대두되어 건전한,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벌어 부자 되기를 원하는 이 청부론 마저 온당치 않다고 비판하는 이들이 있다. 그 중 한 사람이 김영봉이다. 그는<바늘귀를 통과한 부>를 통하여 청부론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김영봉 교수는 학부는 충남대학교에서 경영학을, 대학원은 감리교신학대학교 대학원에서 신학을 전공했다. IVP에서 발행한 <사귐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진 사람이다.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를 읽다보면 과연 그가 경영학을 전공한 사람인지 의심할 정도로 자본-돈에 대한 비판정신이 강하다. 청부론 자들은 돈 자체를 중립적으로 보기에 돈을 죄악시하거나 금기시하지 말 것과 최상의 축복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주장한다. 양비론처럼 보이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는 삶과 성경의 가르침에 놓여 고민하는 성도들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 경제체제하에 돈은 교환가치로 기능한다. 그렇다 돈 자체는 중립적이다. 하면, 돈 자체가 악하지 않다는 것에 반론 여지는 없는가?




 있다. 김영봉은 돈이 중립적, 악하지 않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돈이라는 것 자체는 중립적이지만 돈은 본질상 위험하다. 그는 마태복음 6장 24절과 오스 기니스 말을 인용하면서 돈을 ‘영적 세력’으로 개념을 확대시켜 교환가치라는 중립성에만 규정짓는 것을 비판한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태복음 6장 24절)




 “돈은 결정적인 영적 능력을 지닌 능동적인 매체로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는 의미이다. 돈은 우리가 선하게 혹은 나쁘게 사용될 때 힘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용하기 이전에 이미 하나의 능력으로 존재한다.”(오스 기니스)




 주님께서 돈을 하나님과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신 말씀에는 사람들이 언제든지 돈을 섬김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음 경고하신 것이다. 이는 매우 위험한 생각이며, 성도가 가져서는 안 될 개념이다. 김영봉은 돈을 주인으로 의미를 부여한 것에 주목하고 있다. 돈 자체는 물질과 무생물이기에 돈 스스로 인격성을 가지지 않지만 사람이 돈을 사용하면서부터 인격성을 지니면서 돈이 사람을 지배하고, 사회를 지배하게 되며 하나님 대신에 주인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음을 강하게 경고하셨다는 것이다. 사람이 돈에 인격성을 부여하는 순간 하나님 대신에 주인으로 섬기며 이는 우상숭배다.




 이런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돈은 사람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고, 돈이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고 있다. 공부하는 목적과 이유가 부자 되어 잘 사는 것이다. 초등학생들이 자기 반에서 서로를 평가하는 기준이 아파트 크기에 달려 있다는 언론 보도는 어린이들까지 주님께서 경고하셨던 돈을 주인으로 섬기는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교회 안도 별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돈을 영적 존재로 규정한 김영봉 주장은 매우 중요하다. 영적존재로 규정했기에 돈은 하나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 우상이란 눈에 보이는 타종교의 형상이나, 특정한 이념이나 철학만 우상이 아니다. 하나님 대신, 하나님 자리에 앉는 모든 것은 우상이다. 그 중에 돈이 자리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돈에는 유독 우상 개념이 약하며,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우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한다.




 어떤 목사와 어떤 성도들은 말한다. 돈을 많이 벌어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여 어느 정도 구제와 선을 행한 후에 남은 모든 것을 나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신 삶이라고 한다. 참 좋은 의미로 들린다. 가난한 사람보다 좋은 부자, 깨끗한 부자를 하나님이 더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나 역시 이런 주장에 어느 정도 공감했으며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을 성도들에게 권했다. 지금도.




 하지만 김영봉은 단호하다. 돈으로 성취된 ‘부’ 자체에 대하여 근본 회의를 하고 있다. 부자가 선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하여 회의와 비판하는 모습을 보면서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 덮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가?’ 생각했다. 그냥 정당하게 벌고, 나쁘게 쓰지 않으면서 적당한 부를 누리면서 사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지 반문하고, 비판하고 싶었다. 하지만 김영봉이 그토록 청부론을 비판하는 생각에 귀를 한 번 기울여 보기로 했다.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잠언 23:4-5).




 김영봉은 잠언 말씀에 덧붙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진정으로 거듭난 성숙한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많은 물질을 혼자서만 누리지 않고 모두 함께 행복하게 살기 위해 사용한다. 돈을 벌고 많은 부를 축적하는 것은 처음부터 그의 목표가 아니기 때문에 욕심 없이 자신의 물질을 사용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숙한 신앙의 사람은 부자의 범주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부자 되기에 목마른 한국 사회, 자본이 주인이 된 세속, 하나님을 저버려 사람의 근본을 잃어버린 세속은 제외하자. 하나님과 돈을 두 주인으로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이 있지만 두 주인 양립하는 형국을 보여주는 한국 교회와 성도는 새겨야 할 말씀이며, 김영봉 주장이다. 자본이 신으로 자리한 시대에 자본을 거스르는 삶을 산다는 것, 이런 삶을 산다면 얼마나 거룩한 삶이겠는가?




 돈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능력을 이미 상실해버린 현대 사회를 비판하지 말고 돈이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주인이라 말은 하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기에, 끊임없이 돈을 추구하는 이런 삶을 단호히 거스르는 삶을 살아봄직 하지 않는가? 돈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는 삶은 사실 힘들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불가능하지만 성도라면 하나님 안에서 한 번 돈이 주인이 된 대세를 거스르는 삶은 거룩하기에 살아간다면 진정 거룩한 삶이며,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리라. 




 이는 부자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가난한 자도 마찬가지다. 가난한 자가 부자 되기 위하여 돈에 사로잡혀 오로지 부자 되기를 원하는 것과 부자가 돈을 권세와 권력으로 삼아 살아가는 것은 같은 삶이다. 누구를 욕할 수 없다. 이는 성도 모두에게 해당된다. 너는 틀렸고, 나는 옳다가 아니다. 자본을 한 번은 거스르는 삶을 추구함이 어떤가? 불가능하지만 한 번 살아봄이 어떤가? 대단한 삶이리라.




 그럼 가난하게 사는 것이 정답일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럴 수 없음이 정답이지만 김영봉은 그렇다고 말한다. 왜 일까? 가난이 주는 유익이다. ‘가난이 주는 유익이라?’고. 인정하고 싶지만 왠지 심연에서는 거북함이 솟아오른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본을 어떻게 거스를 수 있는가? 하지만 김영봉은 가슴을 짓누르는 말을 한다.




 “부가 영적 생활의 목을 조른다면 가난은 영적 생활을 자유하게 한다. 부를 많이 소유하게 되면 자신의 삶을 스스로 보장하려는 유혹을 받게 되지만 자발적으로 가난을 택한 사람은 하나님께 믿음을 둔다. 부는 우리의 눈을 멀게 하지만 가난은 눈을 뜨게 해준다. 부는 우리 자신을 지배자로 만들지만 가난은 겸손하게 만든다. 부를 잘못 다루면 심판에 처하게 되는 반면, 스스로 택한 가난은 그런 위험을 원천적으로 제거한다. 지나친 가난은 악이지만 스스로 택한 가난은 선이다.”




 가난 그 자체를 미화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남이 주는 도움만으로 사는 사람들이 겪는 가난을 말하지 않는다. 김영봉이 말하는 가난한 자, 청빈한 자의 삶이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스스로 청빈한 삶, 가난한 자의 삶을 선택하는 것은 고귀하며, 존귀하다는 말이다. "나는 가난을 자랑하리라"는 말은 패배주의가 아니라 믿음에 근거한 승리주의라는 고백이란 말에는 조금 섬뜩한 느낌마저 들었다. 사실 나 자신은 이런 고백적인 삶을 살아갈 자신이 없다. 조금 넉넉한 삶을 누리는 것이 인간의 근본 목표가 아닌가? 다른 사람에게는 가난을 자랑하라고 할 수 있지만 자신에게 적용하는 일은 죄를 지고 태어난 인간 자신에게는 적용과 실천하기 힘든 일이다. 과연 스스로 가난을 택할 수 있을까? 심히 힘들다.




 한데 그는 ‘부(富)’가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부’ 일반적으로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자신을 말한다. 돈 자체가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돈이 영적 세력이라 할 때 그 돈을 주인으로 섬기는 자는 진리를 보지 못한다는 말이다. 사실 마음의 부자, 영적 부자도 있다. 쟈크 엘룰은 <하나님이냐 돈이냐>에서 이렇게 말했다.




 “성경이 저주하는 대상은 부자들의 어떤 행위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하나님께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그들의 전체적인 삶 자체다. 아브라함과 욥과 솔로몬을 제외하면 의로운 부자나 좋은 부자는 없다. 아브라함과 욥과 솔로몬은 비록 돈은 많이 소유하고 있었지만 성경에  말하는 [부정적]부자들과는 전혀 다른 영적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쟈크 엘룰이 한 말을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끊임없이 자본 곧, 돈에 자신을 팔아 벌인다면 결과는 뻔하다. 김영봉이 하고 싶은 말은 정직하게 돈을 벌자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삶은 하나님 뜻에 따라 의롭게 살자는 것이다. 물질은 하나님께서 주실 수도 아니 주실 수도 있다. 부자를 축복으로 규정하는 것에 김영봉은 단호히 배격한다.




 물질만능주의는 이 글을 쓰는 나 자신까지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성도들의 가치를 지배하고 있다. 돈과 부자 논리가 오히려 교회에서 일반사회로 확산되고 있는 형국이다. 교회가 비판받는 것이 성경과 교리의 배타성도 이유겠지만 더 큰 이유는 성경의 가르침과 교리의 가르침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부’가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주님은 우리에게 부자 되라, 성공해라, 행복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라, 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라, 섬겨라 명하신다. 부자 되기 위하여, 성공을 위하여 주님을 믿으라 하지 아니했다. 그렇지 않은가? 바울 사도는 말씀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립보서 3장 18-19절)




 우리의 신은 하나님이시지, 배가 아니다. 자본주의보다 더 지독한 돈의 노예가 되어버린 한국 교회가 생명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청부론에 함몰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삶, 자족의 삶, 노동의 삶,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김영봉은 말하며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가 요구하는 삶이기도 하다. 돈이 지배하는 한국사회를 조금이라도 회복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읽을 만한 책이다.




 복이란 자본을 쌓음이 아니라 나눔에 있다고 그는 말한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다. “거룩한 열망은 우리가 제거하는 물질적 욕망의 양만큼만 우리 마음에 채워진다. 그러므로 자신을 채우고 싶어 하는 그것들을 먼저 비워 버려야 한다. 좋은 것으로 채워지기를 바란다면 악한 것들을 먼저 쏟아 버려야 한다.”




 자본을 통한 소유의 넉넉함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를 통하여 넉넉해져야 함을 그는 강조한다.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가난해져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복이란 하나님과 연합하여 그분 안에서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고 그것을 이루어 가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욕망에서 자유하라! 기도를 통하여 부자 되고자 함이 아니라 기도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부인하는 시간이며, 나의 욕망을 채우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분별하는 시간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소원을 품는 시간이다. 성도가 할 일이다. 이것이 진정한 부(富)다.


 


 절제는 성령의 열매다. 나눔은 이웃과 함께 내가 건강해지는 것이다. 소유를 통한 행복이 아니라 존재와 관계를 통한 행복이다. 군림하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섬김 길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약한 것이 강하다고 하셨다. 이를 우리 자신들의 삶에서 실천해야 한다. 하지만 이 일은 우리 스스로는 할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지배하실 때 가능하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하실 때 가능하다는 말씀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작아지는 것도 불가능하지만,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적합하도록 스스로 변화되는 것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하나님은 둘 다 하실 수 있다고 김영봉은 말한다.




 하나님은 낙타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문을 크게 만드는 것은 원하시지 않는다. 우리가 작게 만들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하신다. 우리가 자본에 매여, 돈을 주인으로 삼아 살기를 원하시지 않는다. 우리로서는 불가능하다. 김영봉도, 나 자신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2000년 교회 역사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는 돈에 사로잡히고, 물질에 사로잡혀 하나님이 아니라 돈을 주인으로 모신 삶을 살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께 사로잡혀 산,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다.




 성신 하나님의 지배와 다스리심을 간구하면서 자본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께만 사로잡히기를 원하셨다.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제시하는 작은 책이다. 사실 나도 가난하지 않다. 먹을거리가 있으며, 잠 잘 곳이 있다. <세계가 만일 100명의 마을이라면> 이라는 책에 따르면 나는 상위 1%에 해당되는 사람일 정도로 부자다. 이토록 부자인데도 돈과 자본에 눈이 멀어 버렸다. 남 탓할 일이 하나도 없다.




 그렇기에 김영봉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외쳤다. 돈의 노예가 되지 말라고, 하나님께만 사로잡히라고, 책을 읽으면서 고개는 끄덕거렸지만 실천은 하지 않는 나 자신을 분명히 보았다. 남을 향한 것, 남 탓할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문제임을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결국 하나님께 나아갈 수밖에 없다. 성신 하나님께 사로잡히지 않고는 해결할 수 없는 자본- 돈 문제임을 알았다. 돈이 나를 지배하고, 세속 성공이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성삼위 하나님이 나를 완전히 지배하고 다스리고 인도하도록 내가 그 분께 무릎 꿇는 일 외에 다른 길은 없음을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는 알게 한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물질적으로 부유해질수록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빈곤해진다.


우리는 새처럼 공중을 날고


물고기처럼 바다를 헤엄치는 복잡한 기술을 터득했지만


모두가 형제처럼 살아가는 간단한 기술을 터득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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