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블로그 | 랜덤블로그 쪽지
耽讀
http://blog.yes24.com/kdssae
리스트 | RSS
태그 & 테마링 | 방명록
耽讀
당신이 태어날 때 당신은 울었고, 세상은 기뻐했다. 당신이 죽을 때 세상은 울고 당신은 기쁘게 눈감을 수 있기를.
프로필 쪽지 친구추가
6월 스타지수 : 별3,494
댓글알리미 비글 : 사용안함
전체보기
기본 카테고리
나의 리뷰
Wish List
My Story
My Favorites
耽讀 쓴 기사
오마이뉴스기사
대한민국
성경읽기
노무현
창비주간논평
사색의 향기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
성약출판사
耽讀
MB
미디어
남북관계
정치기사
사회기사
국제
경제기사
4대강
천안함
김대중
한나라당
민주당
민노당
세종시
한국교회
인사청문회
문재인과 민주통합당
질매섬과 네 동무의 5.18
박근혜정부
박정희
나의 리뷰
기본 카테고리
리뷰
역사
인문
음반
문학
사회
소설
에세이
정치
어린이
기독교
자연과학
경제
인물
gift
문화
예술
DVD
나의 메모
耽讀글방
耽讀메모
태그
내용이 없습니다.
2009 / 05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월별보기

2009-05 의 전체보기
상트 페테르부르크 | 사회 2009-05-28 22:20
http://blog.yes24.com/document/1395001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도서]상트 페테르부르크

방일권 저
살림출판사 | 2004년 06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이 도시는 사방이 1백 여리에 인구가 1백 만이 되며 시가지와 집들이 웅장하고 큰데다가 네바 강이 온 도시를 껴안았고 황제의 대궐이 강에 임했다."

 

"아름답고 품위 있는 도시의 하나라는 말은 들었지만 처음 오는 사람에게도 안도감을 주는 도시이다. 혼자 솟은 집이 없고 혼자 낮은 집이 없다."

 

한 도시를 50년이라는 시차를 두고 두 조선 사람이 평가한 글이다. 윗글은 1896년 충정공 민영환 선생이 쓴 글이고, 아랫글은 월북 작가 이태준이 1946년 <소련기행>에서 쓴 글이다. 이 도시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이다.

 

민영환 선생은 정치인답게 제정 러시아 수도로 보았고, 이태준 선생은 문학가답게 소박하고 친밀함을 그렸다. 두 선인들이 50년 차이를 두고 다른 시각으로 보았듯이 또 한 명의 후손인 방일권이 60여년이 흐른 후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살림지식총서 105번째 책인 <상트 페테르부르크ㅡ유럽을 향한 창>에서 우리에게는 조금 낯선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소개한다.

 

러시아 제국 중흥을 위하여

 

페테르부르크는 표트르 대제로 잘 알려진 표트르 1세와 뗄래야 뗄 수 없다. 표트르 대제를 통하여 페테르부르크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서유럽과 비교도 할 수 없는 러시아를 유럽과 버금가는 제국으로 중흥시키기 위해 표트르 대제는 과감한 개혁을 시도하는데 그 중심에는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다른 곳으로 천도하는 것이었다.  

 

수도라면 지리적인 환경뿐만 아니라 자연환경도 뛰어나야 한다. 하지만 그의 눈에 들어온 곳은 태양은 더물게 찾아오고, 모든 곡식과 채소 익는 시기가 여름 석 달에 지나지 않고, 영하 40도는 추위도 아닌 사람살기 좋지 않고, 적들이 공격하기 쉬운 '상 피테르부르흐'였다.

 

하지만 표트르 대제는 "때로는 위대한 학자, 때로는 용사, 때로는 선원, 목수, 전지전능한 영혼을 가진 위대한 일꾼"이 되어 전통적인 차르 모습을 벗어 던지고 스스로 장인이 되어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는 것이 러시아 제국 재건임을 확신하고 밀어붙였다. 그리고 표트르 대제는 1712년 페테르부르크를 수도로 공포했다. 이리하여 이 도시 이름이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표트르 즉, '성인 베드로'의 도시가 된다.

 

중흥의 빛이 어둠으로

 

민영환 선생이 1896년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찾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표트르 대제가 페테르부르크 건설하기 위해 맨 처음 지었던 '아름다운 대저택'을 보고 적은 글에서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물러나 황제의 높은 자리 사양하고 사업을 세운 처음에는

여러 백성들 가리지 않고 같이 살기를 즐겼네.

위엄을 온 세상에 떨치고 일의 시작으로 인했고,

이름은 조그만 기술로 전하니 가지의 남음에 붙였네

부지런하고 검소한 일생이 피득(표트르대제)의 이진 이인데

본래의 마음이 이 띠집을 저벌리까 두렵네."(민영환 <해천추범소집>) 중에서

 

즉 나라를 다스리는 도를 알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스러져가는 조국 조선을 표트르 대제가 러시아를 중흥시켰던 것처럼 조선의 황제와 자신, 백성들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중흥시키는 바라는 마음으로 그는 페테르부르크에 발을 내딛은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민충정공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위대한 제국, 아무리 화려한 도시, 아무리 위대한 권력일지라도 시간 앞에서는 어쩔 수 없듯이 러시아를 중흥시킨 페테르부르스크도 민영환 선생이 페테르부르크를 들렸을 때는 저물어가는 제정 러시아의 중심이었다. 

 

표트르 대제가 이룩한 중흥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왜 페테르부르크는 힘을 잃었을까?

"허위와 탐욕이 판을 치고, 인생 전체가 계급에 의해 결정되는 도시"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민영환 선생이 "금으로 만든 대궐"이라고 말한 것처럼 왕정은 '겨울궁전'을 시작으로 네 개나 되는 궁궐을 세웠던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인민들을 가혹하게 수탈했다. 빛이 아니라 어둠이 지배하는 도시가 되어버렸다.

 

어둠에 저항하여 혁명을 일으키다.

 

결국 인민들은 저항한다. 1860년대 혁명의 열병이 걸린 대학생들의 전제정 비판으로 시작으로 1905년 1월 착취당한 헐벗은 14만여 명 노동자들은 네 개 궁정이 모여 있는 궁정광장에서 저항하자 군과 경찰은 무차별 발포했다. 이른바 '피의 일요일'이다.

 

이 저항은 1917년 볼세비키 혁명 도화선이 되었고, 볼세비키는 1917년 10월 24~25일 밤 노동자와 병사들과 함께 혁명을 성공시켰다. 어둠에 저항한 인민들이 이룬 혁명으로 로마노프 전제왕가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페테르부르스크도 러시아 제국의 상징에서 사라진다.

 

러시아 문화사의 '황금시대'를 연 푸슈킨

 

페테르부르스크를 "유럽으로 통하는 창"이라 표현했던 푸슈킨, 표트르 대제와 함께 페테르부르스크를 상징하는 푸슈킨은 "북국의 꽃이자 기적인 이 청년도시는 어두운 숲에서, 물 고인 늪지에서 화려하게, 당당하게 일어섰다."고 하면서 "늙은 모스크바는 광채를 잃어버렸다"고 했을 정도로 푸슈킨은 페테르부르스크를 좋아했다.

 

푸슈킨은 러시아 문화사에서 '황금시대'를 연 사람으로 기억된다. "당대 귀족들이 최고의 유럽인다운 유창한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프랑스인 선생과 요리사를 고용할 때, 그는 진짜 러시아적"인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면서 러시아인의 가슴과 언어로 사고하였기 때문이다.

 

"거친 광야에서 영혼의 갈증으로 지쳐

갈 곳 몰라 헤매고 있을 때,

여섯 날개의 세라핌 천사

갈림길에 나타나 내 파을 막아섰다

일어나라 예언자여, 보고 들어라,

그리고 나의 뜻을 전하라.

땅과 바다를 두루 돌아다니며,

인간의 가슴으로 불 질러라'(푸슈킨 <예언자>) 중에서

페테르부르스크의 마지막 영웅 '빅토르 최'

 

푸슈킨이 모스크바를 늙었다고 했다면 나는 레닌그라드(페테르부르스크)의 달과 별을 사랑할 뿐 "모스크바를 싫어한다"고 했던 시인이자, 록 가수가 있다. '빅토르 최'였다. 1962년 6월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태어난 빅토르 최는 가난한 미장공과 공장 보일러실 화부로 살면서 암울한 미래를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밤은 짧고 목표는 멀다. 밤이면 갈증은 더 일어나지.

부엌에 나가 물을 마시지만 한없이 쓰기만 할 뿐.

마지막 영웅 안녕, 너의 동무들도 안녕.

너는 홀로 있고자 원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지."(빅토르 최 <마지막 영웅>)

 

하지만 이 마지막 영웅은 1986년 6번째 앨범 <밤>이 200만장이 팔려나가면서 진정한 영웅이 되었다. 젊은이들은 그에게 열광했고, 당시 소련 지도자 고르바초프도 "동지들, 인민과 페레스트로이카를 위해 당신들의 힘이 필요하오 함께 일합시다"라고 제안할 정도로 새로운 변화를 이끄는 영웅이었다.

 

우리의 가슴은 변화를 요구한다.

우리의 눈은 변화를 요구한다.

우리의 웃음에, 우리의 눈물에,

그리고 우리의 맥박에 변화!

우리는 변화를 기다린다. (빅토르 최 <변화>)

 

젊은이들 가슴에 '변화'를 요구했던 빅토르 최는 고국 대한민국이 공연에 초청하자 흥분했다. 하지만 <마지막 영웅>처럼 "그건 불가능한 일이지" 노랫말처럼 서울 공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간은 그에게 28살밖에 삶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육신의 삶은 비록 스무 여덟에서 끝났지만 지금도 페테르부르스크에서는 "오늘 나는 자유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다"고 외쳤던 빅토르 최를 '마지막 영웅'으로 기억하고 있다.

 

 

YES24 책읽는 주말 - 6월 참여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0) 트랙백(0)
이 리뷰를 | 추천 0        
노무현과 조선일보 싸움은 끝났을까? | 인물 2009-05-28 08:50
http://blog.yes24.com/document/1393966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도서]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

유시민 저
개마고원 | 2002년 08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언론과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다. 특히 <조선일보>와는 쉴 새 없이 싸웠다. 대통령을 그만둔 후에도 <조선일보>는 노 전 대통령을 비난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왜 <조선일보>와 노무현은 싸웠을까? 아니 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웠을까?

 

16대 대통령 선거를 넉 달여 앞둔 2002년 8월 '노의 남자'로 불리는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장관이 쓴 <왜 노무현은 조선일보와 싸우는가>에서 그 실마리를 어느 정도 찾을 수 있다. 유 전 장관은 노 전 대통령이 "노무현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욕을 먹고 불이익을 당하면서 굳이 <조선일보>와 싸우는가를 해명"하기 위해 책을 썼다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조선일보>와 싸우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노무현과 <조선일보>의 싸움에는 대한민국을 반세기 동안 지배해온 '앙시앵 레짐(구체제)'의 목숨이 걸려있다. 어느 네티즌의 표현을 빌면, 우리는 '바스타유 감옥'을 부쉈지만 '앙시앵 레짐'을 해체하지는 못했다. 국민은 6월 항쟁을 통해 군부독재를 종식하고 민주화의 문을 여는 데는 성공했지만, 강고한 동맹을 맺은 극우언론과 극우정당의 사상적 ․ 정치적 지배에서 사회를 전면적으로 해방시키는 데까지는 못했다는 말이다. <조선일보>를 상대로 한 노무현 전쟁은 바로 이 '앙시앵 레짐'의 해체를 겨냥한 것이다." (7쪽)

 

노무현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임기를 지냈지만 '앙시앵 레짐'을 완전히 해체시키지 못했다. 그러므로 '노의 남자'답게 굉장히 노 전 대통령에게 너무 편파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유시민은 말한다. 자신은 '객관적 관찰자'가 아니라 "공정하게 편파적인 것이 가장 공정한 것이며, 공정한 것이 가장 편파적이라"는 한 누리꾼 말을 빌어 "노무현과 <조선일보> 가운데 어느 쪽을 응원해야 할지 분명하게 판단하지 못하거나, 어느 쪽인가를 편들면서도 싸움이 벌어진 이유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독자들에게 이를 알리기" 위해 책을 썼을 뿐이라고 했다.

 

노무현과 <조선일보> 싸움은 1991년 노 전 대통령이 민주당 대변인이 되었을 때 <조선일보>가 프로필을 소개하면서 "고졸 변호사 … 상당한 재산가"라는 제목 기사에서 시작되었다. 그 유명한 '호화 요트'였다. 노 전 대통령은 <조선일보>를 상대로 명예훼손소송을 걸었다 . 다른 정치인들이라면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후 싸움은 모두가 다 알고 있다.

 

정치인이라면 <조선일보> 같은 거대 언론과 잘 지내려하지만 노무현은 달랐다. 그 이유를 유시민은 "노무현은 '불관용'과 싸우며 통합과 화해를 추구한다."면서 "그는 '조선일보'가 지향하는 '멋진 신세계'와 어울리지 않는 정치인이다. 둘 사이의 싸움은 필연적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럼 이 싸움이 언제 끝날까 "노무현이 대통령의 꿈을 접지 않는 한, 또한 '조선일보'가 '밤의 대통령'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조선일보'의 공격과 노무현의 반격은 끝나지 않는다. 노무현이 대통령이 된다고 해도 이 싸움은 그의 임기 내내 계속될 것이다"라고 했다. 유시민 전 장관 말처럼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었지만 싸움은 끝나지 않았고, 퇴임 후에도 <조선일보>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난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은 2001년 6월 7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수구세력 선봉에 <조선일보>가 서 있다고"고 했으며, 2001년 12월 3일 <오마이뉴스>와 인터뷰에서는 "조선일보는 공정한 보도를 하지 않는 신문입니다. 친일경력과 군사독재정권과 결탁했던 과거가 있는 신문입니다. 기득권층의 편에 서 있는 신문이고, 중산층과 서민들에게 적대적인 신문입니다. 그들이 왜곡보도를 하는 한 국민들은 손해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언론의 정도를 벗어난 신문과 어떻게 인터뷰를 할 수 있겠습니까?"라면서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 약속은 대통령 임기 동안 지켰다.

 

하지만 이제 그가 갔다. 더 이상 싸우고 싶어도 싸울 수 없다. 유시민은 마지막 글에서 "노무현이 낙선한다고 해도 <조선일보>가 웃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고 했다. 그 이유로 "노무현이 벌였던 <조선일보>와 일전은 한국의 민주주의와 개혁, 국민톨합과 한반도의 평화를 가로막고 훼손하는 앙시앵 레짐을 백일하에 드러냈기 때문이라"했다.

 

유시민 말과 바람처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앙시엥 레짐을 완전히 해체하지 못했지만 <조선일보> 실체가 무엇인지 드러낸 것은 분명하다. 그러니 죽기 전까지 그토록 <조선일보>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난했다. 그럼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가고 없는 지금과 앞으로 <조선일보>는 노무현과 싸울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노무현을 기다리고 있을까? <조선일보> 일전을 벌여 앙시엥 레짐의 완전한 해체를 실행에 옮길 사람은 누군인가? 궁금하다.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0) 트랙백(0)
이 리뷰를 | 추천 12        
청중을 두려워한 연주자, 글렌 굴드 | 인물 2009-05-28 08:47
http://blog.yes24.com/document/1393963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클래식 음악계의 영원한 수수께끼" "고독과 광기를 예술로 승화한 음악가"로 불리우는 '글렌 굴드'를 을유문화사가 시리즈로 펴내는 '현대 예술의 거장' 일곱 번째 책에서 그의 절친한 동무였던 피터 F. 오스왈드가 쓴 <글렌 굴드-피아니즘의 황홀경>에서 만날 수 있다.

 

글랜 굴드는 평생 우울증으로 고생한 때문인지 여느 연주자들처럼 화려한 쇼맨십은커녕 박수조차 내키지 않을 정도로 청중앞에서 연주하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한다. 무대 생활도 짧았고, 삶도 쉰 살에 마침표를 찍었다. 무대 생활과 삶이 짧았으니 단순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그에게 주목했을까?

 

"무대와 청중을 싫어했으나 그의 실황 연주가 스튜디오 녹음 연주보다 훨씬 아름답다는 평도 있다. 또 낭만주의 음악을 꺼려했으면서도 젊은 시절 연주한그의 쇼팽이 얼마나 낭만적이고 아름다운지 사람들은 기억한다. 그는 단순한 연주자가 아니라 음악에 대해 자신의 분명한 입장과 주관을 가진 음악가였으며, 자신의 해석을 옹호하기 위해 당시 음악 풍토를 거부하고 싸워나가 사람이었다."(10쪽)

 

모순과 독특한 면모는 매력과 호기심을 불러일으켰고, 많은 이들이 그 수수께끼에 도전했던 것이다. 오스왈드는 굴렌굴드가 1957년 2월 28일 캘리포니아 한 무대에서 바흐의 바(F)단조 협주곡 연주를 들을 때에 "진정 종교적 계시와 같았다"면서 "정말 대단한 연주자였다! 음악을 극히 지적으로 이해하면서 그토록 멋지고 당당하게 몸으로 녹여 보여주는 마술과도 같은 솜씨를 지닌 피아니스트를 나는 떠올릴 수가 없었다."고 했다.

 

글렌 굴드는 글을 읽기도 전에 악보를 읽었고, 방금 들었거나 연주했던 작품은 다 머리에 담을 정도로 음악 재능이 뛰어나 글렌 굴드 어머니는 모차르트와 자주 비교하면서 "글렌이 세 살짜리 천재"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뛰어난 천재 글렌은 동무와 동떨어진 외로운 아이였다. 동무들은 난폭했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평생 그와 함께 하면서 힘들게 했던 우울증의 시작이기도 했다. 동무없는 삶은 그를 우울증으로 고통스럽게 했지만 "그가 좋아했던 피아노나 오르간으로 음악을 연주하는 화려한 고독"이었으니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선물이었다.

 

글렌은 자기 방식대로 일을 해나갔다. 이 고집을 어느 누구도 꺾지 못했고, 현실과는 동떨어졌다. 자신보다 경험 많은 피아니스트에게 도움을 요청할 마음은 없었고, 자신을 교정해줄 다른 음악가들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나 극단적으로 자기 자신만을 의지했다. 하지만 그의 연주를 들었던 한 이스라엘 주부가 그에게 보낸 편지는 글렌의 연주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나는 평범한 이스라엘 주부랍니다. 당신들은 사람에게 관심이 없고 우리들을 싫어할 정도라고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당신에게 충심으로 감사 드려야겠어요. 당신의 연주를 듣고 딴 사람이 되어 집으로 돌아와 먀칠 동안 그 여흥으로 살았습니다. 신의 축복을 기원하면서"(274쪽)

 

청중 앞에 나서기를 싫어했던 그는 1964년 "내가 사람들은 음식 정도만큼만 중요하다"면서 "나이 들어갈수록 점점 더 음식이나 사람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깨닫게 됩니다. 나는 갈등이나 서로 대립하는 생각들에서 나 자신을 떼어놓고자 합니다. 수도원처럼 격리되어 지내는 것이 내겐 더 좋아요"라는 말을 잠시 무대를 떠났다. 그리고 그가 한 일은 녹음과 작곡, 프로그램 제작까지 했다.

 

솔직히 <글렌 굴드-피안즘의 황홀경>을 읽을 때까지 글렌을 몰랐다. 하지만 "고립은 인간 행복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지낸 시간만큼 혼자 있을 때 시간이 인간에게는 필요하다"고 말한 글렌의 삶과 연주, 녹음과 작곡 인생은 왜 그를 고독과 광기를 예술로 승화한 음악가로 칭했는지 알게 하였다.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0) 트랙백(0)
이 리뷰를 | 추천 1        
유교가 지배했던 조선의 성문화 | 역사 2009-05-28 08:44
http://blog.yes24.com/document/1393961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도서]조선의 성풍속

정성희
가람기획 | 1998년 10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남녀칠세부동석과 남존여비 사상이 지배했던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떤 성생활을 했을까? 그들은 어떤 성풍속과 성문화를 만들었을까? 궁금하다면 조금 오래 된 책(1998년)이지만 정성희가 지은 <조선의 성풍속>에서 우리는 궁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다.

 

<조선의 성풍속>에는 결혼·임신·이혼·수절·성범죄·간통·매춘 따위를 통하여 조선시대 성풍속과 성문화를 알 수 있다.  조선 초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린 남존여비와 같은 불평등 사회가 아니었다.

 

예를 들면 조선 초기 결혼 풍습에서 '시집살이'가 아니라 '처가살이'를 한다고 했다. 심지어 "며느리가 시부모 얼굴도 못 보는 형편이다"라는 말까지 유행했는데 이는 며느리가 시가가 아니라 친정에서 살았음을 보여준다. 시집살이는 2백년도 안 된 결혼 풍습일 뿐이다.

 

하지만 유교가 조선시대 이념을 자리잡으면서 '남녀칠세부동석' '남존여비'가 여성들 삶을 옥죄었다. 양반집 여성들은 바깥 나들이 자유를 제한 받았으며, 불효 중에 후손이 없는 일이 가장 불효라는 사상은 결국 대를 잇는 숙명을 떠안도록 했다.

 

아들을 낳기 위해 아들 낳은 집 금줄을 일주일 동안 차고 다니거나, 고추있는 금줄을 훔쳤으며, 상가집 상여 만장을 상주 몰래 찢어서 속곳을 해입었다. 경북 안동에서는 우물이나 냇물에 세로로 떠 있는 작은 나무토막이나 마디가 있는 짚토막을 물과 함께 마시면 아들을 낳는 '공구 뜬 물 마시기'라는 풍습까지 있었다. 심지어 "뒷간의 똥물이라도 마실 정성이 있어야 아들을 보는 것"이라는 말까지 있었다니 조선시대 여성들이 아들을 낳기 위해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는지 알 수 있다.

 

여성들은 아들을 낳지 못하면 '칠거지악' 중 하나를 어겼기에 언제든지 버림을 받을 수 있었지만 부인들이 남편을 버릴 수는 없었다. 아내가 남편에게 욕설만 해도 이혼당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수절은 여성이 가야 할 길었으며, 재가도 금지되었다. 왜 조선은 재가를 금지했을까? 정성희 설명을 들어보자.

 

"가부장적인 사회에서는 대개 전남편 집에 두고 가는 것이 일반적이겠지만, 고려나 조선 초기까지 재가하는 여성이 자녀를 데리고 가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따라서 재가는 자식이 어느 아버지의 성씨를 따를 것인가 또는 어떠한 상복을 입을 것인가에 이르기까지 남자 위주의 가계계승에 적지 않은 혼란을 가져다 주었다. 이렇듯 여성들의 재가 금지는 가계계승에 있어서 순수 혈통을 보장받고 싶어하는 남성들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여성의 정절은 단지 구실일뿐이었다."(122쪽)

 

순수 혈통을 위해 재가까지 금지했던 조선 양반네들은 부인만 평생 사랑하고, 함께 했을까? 아니다 그들은 기녀들과 사랑을 나누었다. 기녀들을 허용하면서 내세운 명분은 "아내 없는 변방 군사들을 위해서"였다. 

 

기녀들과 함께하니 스캔들도 일어났다. 국상과 부모상을 당했는데도 기녀와 사랑을 나누다가 탄핵받아 파직되거나 곤장을 맞거나, 상투가 잘린 관리도 있었다. 예를들면 조선 태종 때 정승까지 지낸 조영무 아들 조윤이다. 태종은 조윤에게 "부친을 배반하고서 어찌 아비의 음덕을 입겠느냐"며 곤장 1백 대를 때렸다고 한다.

 

상투 잘린 관리는 세종 때 이조정랑을 지낸 이영서이다.  기녀와 간통을 하다가 발각되어 가족들에게 상투가 잘리는 수모를 당했다고 한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영서는 생원 시절 성균관에서 일하는 종의 처를 범했다가 상투가 잘렸다. 이 때 병조정랑 이현로는 이영서에게 "자네 머리털은 꼭 베면 다시 나는 부추나물일세그려"라고 했다고 한다.

 

분명한 것은 조윤은 곤장 백 대를 맞았고, 이영서는 상투가 잘렸지만 여성이 간통을 했다면 사형이었다. 물론 세종 때 '감동' 같은 자유부인도 있었지만 이는 조선 초기였음을 알아야 한다.

 

<조선의 성풍속>는 19세기에 접어들면 성희(性戱) 묘사를 직설적으로 담은 춘화집이 유행한 사실도 실었다. 춘화는 풍속화가로 잘 알려진 김홍도와 신윤복이 많이 그렸다고 한다. 이들이 춘화를 그린 것에 고개를 갸우뚱하겠지만 '성'이란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자리를 차지 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당대 최고 풍속화가였던 김홍도와 신윤복의 작품으로 전하고 있는 춘화들은 사실성과 예술적 격조를 갖춘 작품들이다. 따라서 이런 유의 그림들이 빠지기 쉬운 음란 외설적인 차원을 뛰어넘는 높은 희화성을 지니고 있다."(245쪽)

 

조선시대에는 동성애도 있었다. 동성애는 구중궁궐에서 한 평생 한 남자(왕)만을 바라보았던 궁녀들 사이에 심심치 않게 있었다. 세종대왕은 며느리를 두 번이나 폐출시켰는데 두 번째 며느리이였던 세자빈 봉씨는 궁궐 여종 소쌍이란 여자와 동성애 때문에 폐출되었다.

 

이렇듯 조선시대는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종속된 성풍속과 성문화였음을 <조선의 성풍속>는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고 있다.

 

YES24 책읽는 주말 - 6월 참여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0) 트랙백(0)
이 리뷰를 | 추천 0        
고통도 망각도 없는 부에노스아이레스 | 사회 2009-05-28 08:40
http://blog.yes24.com/document/1393959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도서]부에노스아이레스

고부안 저
살림출판사 | 2004년 06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사랑하는 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내가 너를 다시 볼 때는

고통도 망각도 없을 것이다.

 

알프레도 레 베라가 작사를 하고, 아르헨티나 탱고의 황제인 까를로스 가르텔이 작곡한 <나의 사랑하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노랫말 중 일부이다.

 

왜 사람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고통도 망각도 없는 도시라 했을까? 아르헨티나 엘 살바도르대학에서 한국문화사 교수 역임했던 고부안씨는 <부에노스아이레스-남미의 파리>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포용적인 도시이다. 말 한 마디 못하는 사람들까지 다 포용한다. 수많은 이민자들이 말 한 마디 배우지 못한 채 아르헨티나 왔지만 세월과 더불어 집을 짓고 풍족한 가정을 이루게 한, 어머니의 품 같은 여유와 따뜻함이 있는 도시이다."(7쪽)

 

고향과 나라 떠난 '사람'들이 사는 도시

 

이민자들에 어머니 품 같은 여유와 따뜻함이 있는 부에노스아이레스는 1580년 정복자 환 데 가라이가 두 번째로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를 건립하게 되면서 이민자를 받아들인다. 온 세상에서 온 그들이었기에 문화와 언어, 생각과 철학이 달라도 위로하며, 사랑하였기에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아직도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아르헨티나)는 병원에서 한 두시간 기다려 겨우 1분 이내로 진료받는 상업적인 모습이 없으며, 아이가 열이 펄펄 끓는다고 무조건 해열를 놓아주지 않고, 미지근한 물에 아이를 앉혀놓고 열을 식히라고 처방하고, 수십 년 전에 무료급식을 했다니 어찌 '사람'을 생각하는 나라(도시)가 아닌가.

 

'땅고'의 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

 

부에노스아이레스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땅고'(탱고의 스페인 발음)다. 땅고는 "춤추는 슬픈 감정"이라는 표현처럼 1860년 무렵 부에노스아이레스 하층인민(이민자)들이 고향을 떠난 이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만든 절망과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춤이었다. 특히 땅고는 이민자들이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 사창가와 술집에서 많이 추었다고 한다.

 

"땅고에 담긴 아픔과 슬픔은 아메리칸 드림을 찾아온, 돈을 벌겠다고 홀로 이민을 온 사람들의 절망감과 외로움에 깊은 연관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창녀에게서 모든 감정을 다 해소할 수는 없지 않았겠는가. 말하자면 다 채울 수 없는 사랑, 즉 충체적인 사람에 대한 향수가 땅고에 담기게 된 것이다."(24쪽)

 

사람사는 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

 

도시는 사람 사는 곳이다. 하지만 어느 누가 살았는지 따져 물으면 달라진다. 20세기 혁명가 '체 게바라'는 부에노스아이레스 국립의과대학을 나와 의사된 곳이다. 또 훌륭한 선동가인 도밍고 페론, 성녀 '에비타'를 빼놓을 수 없다. 에비타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나는 이 큰 도시의 모든 마을을 걸어봤다. 그때부터 나는 내 조국의 땅 안에서 뛰고 있는 심장의 모든 생각을 다 꿰뚫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하얀 손수건의 어머니들인 '오월 어머니회'다 이들은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당한 수많은 아들과 딸들의 어머니와 함께 민주주의를 상징하고 있다.

 

이민자들이 세워 사람 냄새나고, 사람사는 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생기가 있고, 가슴을 뛰게하고, 다양한 인종들이 사람사는 빛깔이 있는 도시이기에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YES24 책읽는 주말 - 6월 참여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0) 트랙백(0)
이 리뷰를 | 추천 0        
책꽂이의 역사가 궁금하다면 | 사회 2009-05-21 09:53
http://blog.yes24.com/document/1384271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도서]서가에 꽂힌 책

헨리 페트로스키 저/정영목 역
지호 | 2001년 02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책이 방바닥 여기 저기 나뒹구는 모습을 볼 때마다 아이들을 다그친다. "제발 책꽂이에 책 좀 꽂아"라고. 그럴 때마다 아이들은 "왜 책을 책꽂이에 꽂아야 해요" 한다. "책이니까 책꽂이에 꽂는 것이라"고 하면 아이들은 또 "그럼 옛날에도 책을 책꽂이에 꽂았어요" 묻는다. 되풀이되는 다툼을 하다가 '그래 책을 언제부터 책꽂이에 꽂았을까?'라고 생각한 본 적이 있다.

 

책이 네모이니 책꽂이도 네모이다. 물론 네모 책이라고 네모 책꽂이에 책을 다 꽂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눕혀 두기도 하며, 어떤 이는 책꽂이를 아예 거부하고, 방바닥에서 천장까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쌓아둔다.

 

이런 거부가 있을지라도 우리는 네모 책과 네모 책꽂이에 익숙하다. 그렇다면 네모 책이 나오기 전 책이 두루마리일 때 책꽂이 모습은 어떤 모양이었고, 네모 책꽂이가 나올 때까지 앞서 살았던 사람들은 책을 어떻게 보관했을까? 궁금증이 더해졌다. 이때 손에 잡힌 책이 헨리 페트로스키가 쓴 <서가에 꽂힌 책>이다.

 

페트로스키는 "책꽂이가 있는 곳에 책이 있다"는 말처럼 고대 두루마리 책은 '캅사'라는 상자와 낮은 선반에 눕혔고, '코덱스'-파피루스와 양피지를 접어서 꿰메어 철함-는 탁자에 보관했던 것처럼 지금 우리가 네모 책꽂이에 책을 꽂기까지 책 보관 방법은 수천년에 걸쳐 서서히 진화된 것임을 밝혀낸다.

 

한 집에 열 권만 있어도 부자였던 중세 시대, 책이 귀했고, 정직도 귀했던 중세에는 책을 군인들이 침대 밑에 두는 트렁크 비슷하게 생긴 장이나 궤에 넣고 잠궈두기도 했다. 열쇠 세 개를 수도사들에게 나눠주어 세 사람이 공모하지 않으면 궤를 열 수 없게 했다.  이런 사실은 움베르트 에코가 지은 <장미의 이름>에서 중세 수도사들이 책을 보관하기 위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다. 책을 사슬에 묶어 버리기도했다.

 

"중세 독서대에 책을 묶어 놓은 강력한 쇠사슬은 책을 펼치고 읽는 데 방해가 안 될 만큼의 여유 길이만 제공한다. 책은 읽지 않을 때는 마치 진열을 해 놓은 것처럼 표지를 위로 한 채 덮여 있다. 막대는 독서대 위나 아래에 있는데, 그에 따라 사슬은 책 표지의 위쪽에 붙기도 하고 아래쪽에 붙기도 한다. 사슬은 책 표지 가장자리, 즉 죔쇠 근처에 부착되기도 했다. 사람이 많이 들낙거리는 도서관에서는 곧 쇠막대로 대체했을 것이다."(104쪽)

 

쇠사슬에 묶고, 선반 위에 두었던 책을 사람들은 책을 세워서 꽂아두는 방법을 택했다. 현재 우리에게 익숙한 책꽂이가 탄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인쇄술을 탄생시켰다. 인쇄술은 엄청난 책들을 쏟아냈다. 책이 쇠사슬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아니 이제는 책을 사슬로 묶어 잊어버리는 것을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밀려드는 책을 어떻게 관리하는 것이 문제였다. 쏟아져 나오는 책은 도서관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집에 서재를 만들었고, 책꽂이를 만드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16세기 영국에서 가장 큰 서재를 갖춘 일기 작가 새뮤얼 피프스가 남긴 글이다.

 

"최근에 귀중한 책들을 아주 많이 샀다. 그러나 다음 크리스마스 때까지는 더 사지 않을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내 두 개의 책장은 꽉 찰 것이기 때문에, 몇 권은 남을 주어 버려야 한다. 내 서재의 책장들을 채울 정도의 책만 가지고, 그 이상을 내지 않는 것이 나의 계획이기 때문이다."(190쪽)

 

새뮤얼 피프스 이후에도 수많은 장서가들처럼 더 많은 책장을 구입했다. 이렇게 사람들은 벽을 빌려 책을 보관하는 책장을 만들었고, 그 모습은 아직까지 사람이 후손들에게 지식과 사상을 물려주는 가장 위대한 방법인 책을 꽂는 책꽂이를 통하여 책을 보관하고 있다. 

 

책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귀중품 보관하듯 쇠사슬에 묶었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홍수처럼 쏟아져나오는 책을 보관하기 위해 책을 지하 서고로 내려 보내고, 바퀴 달린 책장을 만들었고, 옆으로 밀 수 있는 책장들 천장에 매달기도 했다.

 

과연 책은 없어질까? 전자책이 나오면서 종이책 생명은 끝났다고 많은 이들이 말했지만 아직 전자책이 종이책을 앞섰다는 어떤 정보도 없다. 종이책이 살아있는 한 책꽂이는 책과 동반자로서 함께 할 것이다.

 

집안의 책꽂이는 가상이 아니다. 집안의 책꽂이는 컴퓨터의 하드 디스크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채워진다. 물론 책꽂이를 비우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할때는 종종 그런 일이 벌어진다. 사실 저녁에 친구들과 함께모여 책꽂이에서 계속 책을 꺼내가며 좋아하는 구절을 찾기도 하고, 잘 기억나지 않는 사실을 확인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엉터리 기억을 놀리기도 하던 것이 나의 가장 따듯한 추억들 가운데 하나다.(348 쪽)

 

참 우리 선조들은 책을 어떻게 보관했을까? 사극을 보면 어렴풋이 떠오를 것이다. 세로로 꽂아두지 않고, 눕혀 보관했다. 눕혀 보관하는 방법이 책을 찾거나, 꺼내는 데 불편할지는 몰라도 시대를 거스르는 방법으로 무조건 세워 보관하는 방법보다는 눕혀 두는 것도 책과 동무하는 또 다른 방법이 아닐까? 책과 동무하고 싶은 이들이 있는한 책꽂이도 함께 하리라.

 

YES24 책읽는 주말 - 6월 참여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0) 트랙백(0)
이 리뷰를 | 추천 0        
철학, 고장난 문고리에서 시작하다 | 인문 2009-05-21 09:50
http://blog.yes24.com/document/1384261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1986년 대학 새내기가 되었을 때 눈길을 끈 과목은 '철학개론'이었다. 책을 사기 위해 서점에 가니 '철학개론'이라는 제목을 붙인 책은 수없이 많았다. 재미있는 것은 제목부터 철학개론이듯 목차와 내용도 거기서 거기였다.

 

대학생이랍시고 철학을 배우기 위해 '철학개론'을 공부했지만 이내 철학에서 멀어지게 했다. 물론 소광희.이석윤.김정선 공저인 <철학의 제문제>를 통하여 철학의 'ㅊ'자는 알았지만 쉬우면서도 가볍지 않은 철학입문서와 개론서는 만나기 힘들었다.

 

철학이 어려운 이유는 철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어렵기도 하지만 '삶'과 별 관계 없이 철학을 논하고, 말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철학을 '삶'과 함께 말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철학에 조금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노자: 국가의 발전과 제국의 형이상학>, <장자의 철학: 꿈, 깨어남 그리고 삶>이라는 책을 펴낸 강신주가 지은 <철학, 삶을 만나다>는 쉬우면서도 가볍지 않는 책이다. 강신주는 철학과 삶이 견우와 직녀처럼 사랑하는 연인 사이라고, 그래서 철학은 삶과 반드시 만나야 한다고 말한다.

 

"철학이 없는 삶이 맹목이라면 삶이 없는 철학은 공허한 것이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책을 쓴 이유도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책을 통해 저는 삶에 철학의 차가움을 제공하고, 철학에 따뜻함을 부여하고 싶습니다."(17쪽)

 

강신주는 제1부 '철학적 사유의 비밀'에서 철학이 결코 난해하거나 어려운 것이 아니라, 삶을 영위하는데 핵심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제2부에서는 우리가 친근하거나, 친숙하다고 생각하는 '사랑', '가족', '국가', '자본주의'를 낯설게 바라보도록 이끈다. 제3부는 우리 삶을 어떻게 철학적으로 성찰할 것인지 말하고 있다.

 

그 옛날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말한 이후 사람들은 아무 생각없이 받아 들였다. 하지만 강신주는 생각 앞에 '항상'을 놓으면 문제는 달라진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화장실에 갈 때를 보자. 어제까지 이상이 없던 문고리가 열리지 않고, 변기 뚜껑이 부서져 있다면 우리는 '이건 뭐야 물건을 뭐 이따위로 만들었어!'라고 말한다.

 

어제까지만 해도 문고리는 무의식 속에 열었지만 오늘 문고리가 고장 남으로써 비로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문고리가 고장나지 않았을 때는 무의식 속에서 친숙했지만 문고리가 고장남으로써 '낯섦' 찾아오면서 인간은 생각이 활동하기 시작하는 순간이라 말한다.

 

"세계와 친숙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때, 우리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가 낯설게 다가올 경우, 오직 이때만 우리는 생각이란 말에 걸맞게 사유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사건과 마주치며 삶을 영위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시간이 내뿜는 기호와 무의미 속에서는 우리는 낯섦을 경험할 수밖에 없게 되지요. 이 점에서 우리의 '생각'은 바로 이 낯섦을 친숙한 것으로 바꾸려는 삶의 무의식적인 의지로부터 기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47쪽)

 

철학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문고리와 변기 뚜껑이 고장나는 것을 통해서 어떻게 고칠 것인가를 '생각'하는 순간부터 철학은 시작되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이 있는 우리 삶에서 철학은 시작된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따위 위대한 철학가들만 철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힘을 가진 모든 이는 철학이라는 봉우리에 오를 수 있다고 강신주는 강조한다. 

 

철학자들이 사유하고 조망했던 그 봉우리들을 우리의 삶과 사유를 통해서 조망할 수 있고, 그들이 올랐던 그 봉우리에 오를 수 있다. 철학자들만 생각과 사유를 통하여 위대한 철학 봉우리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생각과 조망, 사유를 통하여 그들이 올랐던 위대한 봉우리에 오를 수 있다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철학자들이 올랐던 정상을, 그들의 안내에 따라 직접 올라가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다리는 튼튼해지고, 우리의 균형 감각도 단련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한 가지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이런 훈련도 결국 여러분만의 산봉우리를 찾기 위한 연습에 불과하다는 점을 말입니다.(76쪽)

 

결혼을 앞둔 대부분 예비부부들에게 사랑은 '둘'을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둘'을 끈덕지게 유지하는 것일까요라고 묻는다면 어떤 답을 할까? 우리는 지금까지 부부란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라 배웠다. 하지만 강신주는 산과 등산가를 비교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내 바깥에 있는 사람임을, 그래서 만약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면 기적과도 같은 축복이자 은총이라는 사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진리이자 '둘'의 진리라고 강조한다.

 

"산에 올랐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산과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매번 산에 오를 때마다 우리는 '산'과 '우리 자신이' 씨줄과 날줄로 얽혀서 구성되는 '둘'의 관계를 무한히 펄치게 될 뿐입니다. 산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등산가들은 항상 산을 모르겠다고 겸손하게 고백하며, 산을 알기 위해서 다시 산을 찾을 뿐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사랑하는 산은 '둘'이라는 사랑의 관계를 끊임없이 발산하면서 그들을 매혹시키기 때문입니다."(131쪽)

 

국가는 무엇인가? 과연 국가는 인민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국가는 인민을 보호해줄 수 있는가? 하지만 국가가 생긴 이래 국가가 인민에게 자신에 대한 충성과 복종을 강요해왔을 뿐이다. 요즘 이명박 정권도 우리에게 복종을 강요하고 있지 않은가?

 

아리스토텔레스도 <정치학>에서 "국가는 전체이며, 개인은 그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개인은 고립되어서 자족적일 수 없으므로 전체에 모두 같이 의존해야 한다고"고 하지 않았던가. 이런 국가에 대하여 강신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의 소중한 자유를 양도해버리고 국가권력에 복종하기 시작한다면, 그리고 그런 메커니즘에 완전히 적응하게 된다면, 여러분은 자신이 자유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또 하나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국가가 자유인을 죽일 수는 있어도, 그 자유인으로부터 자유를 빼앗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163쪽)

 

우리 시대 최고의 경제체제라고 칭송하지만 자본주의는 약육강식이 지배한다. 강신주가 바라본 자본주의는 인간을 상품으로, 화폐를 신으로 만든 체계라고 일괄한다. 결국 인간은 삶의 대부분을 돈을 벌기 위해 산다면서 자본주의 속에는 애초부터 진정한 행복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람이 살 만한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인간을 상품으로 그리고 화폐를 신으로 만드는 체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돈을 벌기 위해서 고단하게 보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단지 소비의 행복, 소비의 자유만이 존재했을 뿐이니까요. 우리는 자신만의 삶을 위해서 시간을 보내고 있지는 못합니다. 오직 잘 팔리는 상품으로 자신을 만들기 위해서 하루하루를 열심히 보내고 있습니다. 영어를 공부하기 위해서라면 언제든 학원에 나가지만, 역사 강의를 듣는다거나 혹은 판소리를 익히기 위해서 편안하고 여유 있게 학원에 나가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역사, 문학, 철학, 판소리 등을 배워서 무엇하겠습니까? 이런 것들은 여러분을 구매할 산업자본에게는 전혀 불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197쪽)

 

그러니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자유롭고 공평하게 일할 수 있는 조건을 얻어내야만 한다. 하지만 오늘도 이 땅의 노동자들은 30원때문에 생명도 끊고, 파업도 해야 한다. 최손한의 인간의 권리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이를 도와줄 세력은 그리 많지 않다. 어떻게 해야 할까? 맑스는 말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생각하는 힘을 잃어버린 시대이다. 철학은 불편하고 불쾌한 학문일 수 있다. 강신주는 행글라이더를 타 본 일이 있는지 묻는다. 행글라이더를 타면 온갖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만난다. 하늬바람, 마파람, 강한 바람, 산들바람 따위를 만난다. 바로 그 바람 하나하나를 타게 되면서 처음 내리고자 했던 곳이 아닌 전혀 다른 곳에서 내릴 수 있듯이 예상치 못한 설렘과 기대로 가득 찬 삶을 꿈꾸라고 한다. 국가와 자본주의에 대한 진단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결국 자신을 존중하고, 자유를 무한히 사랑하면서 물질이라는 노예가 되지 않아야 사람이다. 여기에 이르는 길을 가기 위한 첫걸음은 의외로 간단하다. 철학은 고장난 문고리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0) 트랙백(0)
이 리뷰를 | 추천 1        
순례자의 도시 | 역사 2009-05-18 09:57
http://blog.yes24.com/document/1380016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도서]예루살렘

최창모 저
살림출판사 | 2004년 06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3000년 전 이스라엘 다윗 왕이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한 이후 예루살렘은 유대인, 기독교인, 무슬림들이 번갈아가면서 성지로 삼은 '거룩한 땅'이다. 예루살렘은 히브리어로 '평화의 도시이다. 하지만 거룩한 땅과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은 갈등과 분쟁, 테러와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예루살렘은 유다 광야 불모지 언덕 위에 있는 도시로 사람 살기에 좋은 곳은 아니다. 수메르의 울, 히타이트의 하투사스, 이집트의 테베보다 오래된 역사를 가진 도시도 아니다. 로마처럼 위대한 제국을 건설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예루살렘 때문에 울고, 웃었고, 삶이 뒤바뀌었다.

 

왜 그런가? 군사와 정치, 경제적인 힘이 아니라 '영적인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히브리대학에서 제2차 성전대사와 유대묵시문학을 전공한 최창모 교수가 지은 <예루살렘- 순교자의 도시>에서는 수많은 역경 속에서도,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어도 하나의 신앙만을 고집하고 살아온 이들이 지켜온 도시 예루살렘을 만날 수 있다.

 

유대인의 예루살렘

 

예루살렘 첫 주인은 히브리 민족 시조 아브라함이 아니라 살렘 왕 멜기세덱이 이끄는 원주민들이었다(창세기 14:18). '살렘'은 '평화'라는 뜻이며,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루살렘이 이스라엘 수도가 된 것은 지금부터 3000년 전 이스라엘 최고의 왕,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인 다윗 왕 때였다. 다윗은 자신이 세운 예루살렘을 노래했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시편 122편)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고, 형통하고, 사랑하기를 다윗은 구했지만 아들 솔로몬은 하나님 대신 군사력에 의존했으며, 많은 외국 여자를 후궁으로 맞았다. 이는 모세법을 어긴 것이고 하나님을 반역한 것이다. 결국 그 화려했던 예루살렘은 기원전 586년 바빌로니아 군대에 의하여 철저히 파괴되었다.

 

바빌론 포수 이후 제2성전시대를 열었지만 그리스와 로마 지배를 받았다. 132년-135년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하드리안 황제는 예루살렘을 초토화시켰다. 이후 예루살렘은 1948년 이스라엘을 건국할 때까지 2000년 동안 유대인의 도시가 아니었다.

 

기독교인의 예루살렘

 

1996년 예루살렘을 갔었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도 예수의 흔적은 없었다. 예수님이 남긴 흔적이 아니라 로마가 만든 흔적이었다. 예루살렘을 기독교 성지로 만든 이는 콘스탄틴 황제였다. 그는 교회를 건축하면서 여기가 예수가 나신 곳, 가르치신 곳, 승천하신 곳으로 했다. 하지만 그곳은 예수가 나신 곳도, 가르치신 곳도, 승천하신 곳도 아니었다.

 

예루살렘이 이슬람 지배에 들어가자 기독인들은 거룩한 땅을 되찾기 위해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다. 첫 번째 십자군 전쟁에서 예루살렘을 되찾자 그들은 피의 살륙을 자행한다. 이슬람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피의 살육을. 이뿐 아니다. 유대인들까지 살육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피 묻은 곳에서 깨끗한 새 옷을 걸치고 맨발로 걸어와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밟고 지나간 거룩한 곳을 바라보며 울었다. 그리고 발치에 서서 한 지점에 입을 맞췄다."(48쪽)

 

거룩한 땅, 생명과 평화의 땅을 기독교인들은 '십자가'를 앞세우고 철저히 짓밟은 것이다. 예수님 없는 십자가가 남긴 피의 살육이다. 기독교인들은 십자가만 앞세웠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없었다. 기독인들에게 지금도 예루살렘은 거룩한 땅이지만, 아직도 다른 이를 향한 사랑은 없다.

 

무슬림의 예루살렘

 

638년~750년 무슬림은 예루살렘의 새 주인이 되었다. 주목할 점은 유대인과 기독인이 예루살렘 주인일 때는 피의 살육이 자행되었지만 무슬림이 638년 예루살렘 주인이 되었을 때 기독교인들은 교회를 지킬 수 있었다.

 

"예루살렘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자유로운 예배가 허가되었으며, 기존의 비잔틴 영토 내의 거주도 허락되었다. 비잔틴에게 내던 세금은 아랍에게 내면 되었다. 도시의 일상생활과 무역활동은 정복 이후에도 크게 방해받지 않았다."(63쪽)

 

그들은 정복자였지만 저항하지 않으면, 어떤 희생도 파괴도 하지 않았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무슬림이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다. 하지만 그 박해는 1099년 십자군이 이슬람에 자행한 학살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예루살렘은 유대인과 기독교인, 무슬림과 함께 3000년을 이어왔다. 거룩한 땅과 평화의 도시라고 말했지만 평화를 지켰던 때는 얼마되지 않았다. 지금도 통곡의 벽 앞에서 수많은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이 순례를 하고, 무슬림은 성전 산 위에 있는 '바위 사원'에서 알라에게 예배를 드린다. 언제쯤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가 될 수 있을까?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0) 트랙백(0)
이 리뷰를 | 추천 0        
엄청난 거짓말쟁이 셍게 | 문학 2009-05-11 11:51
http://blog.yes24.com/document/1371309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도서]세계 민담 전집 3

유원수 편
황금가지 | 2003년 09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몽골' 800여년 전 칭키스 한 후예들이 고려를 침략하여 엄청난 피해를 입혔지만 싫지 않다. 20세기 한반도를 침략과 수탈로 식민지배를 한 일본제국주의와는 아직도 응어리가 풀리지 않는 것과는 비교된다. 물론 몽골은 800여년이고, 일제는 100년도 안 되었다고 비판할 수 있다.  

 

싫지않은 몽골이지만 아직 우리는 칭키스 한과 13섹초 유럽까지 정복한 대제국을 건설했고,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 있는 나라 정도로만 알 뿐 자세한 것은 잘 모른다. 이럴 때 정치와 군사, 경제보다는 몽골 인민들 입속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민담'은 단순히 싫지 않은 몽골이 아니라 정감과 친숙함으로 더 깊어지는 나라가 될 것이다.

 

도서출판 황금가지 <세계민담 전집3- 몽골편>은 문화, 언어, 풍속, 사람들 생김새까지 우리 닮은 몽골 인민들의 의식주 및 몇백 년 간 그들 사상을 지배해 온 겔룩바 불교에 관련된 내용 따위 흥미로운 풍속을 맛진 입담에 실어 펼친 77편의 이야기들을 담았다.

 

우리 민족 그랬던 것처럼 몽골 인민들도 노래와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몽골은 조상들이 불렀던 노래와 들려주었던 이야기들을 아직까지 잘 지켜오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잘하지 못한 일이다. <세계민담 전집 3-몽골편>에서는 중간중간 가락에 실어 부르는 운문 구절을 지니 몽골 식 이야기의 본래 형태를 충분히 맛볼 수 있다. 

 

몽골 민담에서 대표하는 두 주인공은 '척척 셍게'와 '바다이 탁발자'가 있다. 척척 셍게는 '엄청난 거짓말쟁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하다. 얼마나 셍게가 거짓말을 잘하는지 나중에는 가짜 거짓말쟁이 셍게까지 나타난다.

 

"엄청난 거짓말쟁이의 아들 당당한 거짓말쟁이

당당한 거짓말쟁이의 아들 척척 거짓말쟁이

척척 거짓말쟁의 아들 뛰어난 거짓말쟁이

뛰어난 거짓말쟁이의 아들 척척 셍게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가짜 생게의 엄청난 거짓말쟁이 타령'(265쪽)


별명처럼 그는 여름날 우리 집 근처에서 뻐꾸기가 우는데 언 가축 똥을 집어 던졌더니 맞아서 죽었다는 누가 들어도 뻔한 거짓말을 한다. 여름에 언 똥으로 뻐꾸기를 맞혀 죽였다는 뻔한 거짓말을 쉽게 하는 셍게다.

 

'올리야스태 총독' 이야기에는 셍게는 자기 아버지가 태어나기 전에, 할아버지 낙타를 돌봤다고 했다. 자기 아버지가 태어나기 전에 할아버지 낙타를 돌뵜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고 올리야스태 총독이 화를 내자 셍게는 말한다.

 

"제 나라가 아직 생기기도 전에

보잘 것없는 몽골이

할아버지인 만주의 임금님께 부역하는 것은

제 아버지가 태어나기도 전에

할아버지의 낙타를 돌보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우리 몽골 사람들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총독 각하!"-'올리야스태 총독'(157쪽)

 

이쯤 되면 뻔한 거짓말쟁이 셍게가 아니다. 나라를 빼앗긴 몽골 인민의 저항다. 용감한 군인들보다 더 강력한 입담을 청나라 총독에게 저항하고 있다. 착취자들을 향한 저항이다. 몽골 인민들이 셍게를 나쁜 거짓말쟁이로 비난하지 않는 이유이다.

 

뻔한 거짓말쟁이 셍게만 있나, 가난한 서민들 주인공 '바다이'도 있다. 바다이는 '탁발자'이다. 탁발자는 옛날 몽골 사회에서 한 끼 음식, 하룻밤 잠자리를 제공받는 대가로 설교와 염불을 해주거나 이곳 저곳 다니면서 들었던 사소한 이야기를 전해주는 최하급 승려들이다. 바다이는 영악하지만 조금 덜 영악하다. 악랄한 면도 있지만 한 순간 착해진다. 지혜롭다가도  멍청해 보이는 사람이다. 바다이는 영주, 중국 상회 주인, 잘난 체하는 고위 라마들을 골탕 먹인다.

 

"영주님의 이름을 염불하듯이 외우면서

개 대가리가 솜털이 되도록 작대기질을 하면서

자갈길이 흙먼지를 일으키도록 속력을 내면서

가죽 털이 천 쪼가리가 되도록 돌아다니겠습니다"-'호쇼의 영주를 속이다'(308쪽)

 

민중들 피를 빨아 먹는 영주를 향한 바다이의 말은 민중들 마음을 속 시원하게 해준다. 셍게와 바다이는 이처럼 민중들이 원하고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팍팍한 민중들 벗으로 살았던 것이다.

 

2009년 대한민국 서민들 삶도 팍팍하다. 팍팍한 서민들에게 셍게처럼 뻔한 거짓말이지만 웃으면서 들을 수 있고, 바다이처럼 권력자들을 골탕 먹이는 멋진 입담을 가진 이들이 많았으면 한다.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0) 트랙백(0)
이 리뷰를 | 추천 1        
조선시대 백과서전 | 인문 2009-05-03 20:21
http://blog.yes24.com/document/1361836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도서]벌레들의 괴롭힘에 대하여

이옥 저/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 편역
휴머니스트 | 2009년 03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18세기 소품 문학을 풍부하게 일군 문인 이옥은 하층 여성, 천한 노비, 도적, 저잣거리의 다양한 인물군상들로 생생한 저잣거리 이야기를 글로 담는 일을 좋아했다.

 

'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가 펴낸 <이옥 전집 3>은 이옥이 지향한 또 다른 문학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이옥 전집 3권에는 <백운필>과 <연경>을 실었다.

 

<백운필>은 이옥 문학 백미로 비둘기, 도요새, 꿩, 매 사냥 따위 새 이야기와 장수피, 용, 범치, 청어 따위 물고기 이야기와 승냥이, 말, 소, 여우, 고양이 따위 짐승 이야기, 거미, 이와 벼룩, 나비, 송충이, 좀벌레 따위 벌레 이야기, 거울, 파리채, 오이 생활 주변의 자질구레한 사물들을 담아 조선시대 백과사전으로 불러도 문제없다.

 

<연경>은 '담배'를 뜻하는 것으로 담배 재배, 담배가 우리나라에 어떻게 들어왔고, 성질, 담배 도구와 쓰임새를 적었다.

 

새와 물고기, 곡식, 벌레, 사물, 채소, 꽃 따위 이야기를 책으로 펴내기 위해서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한자사전인 <훈몽자회(訓蒙字會)>, 역관들의 주로 보던 만주어 한어사전 <한청문감(漢淸文鑑)>, <본초집해(本草集解)>, <술이기(述異記)> 비롯해 많은 의학서적들을 인용했다. 이쯤 되면 이옥의 독서량이 얼마나 방대했는지 알 수 있다. 책 한 권을 펴내는  위해 쏟았던 이옥의 열정과 집요함, 성실함은 부럽기도 하고, 얄팍한 지식나부랭이로 책을 펴내는 요즘 사람들은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모르게 한다.

 

요즘 도심 비둘기들은 '평화'보다는 사람들을 귀찮게 하는 새가 되어 버렸다. 그럼 이옥 살았던 시대 비둘기는 어떤 대접을 받았을까?

 

비둘기란 새는 이미 시각을 깨우쳐주지도 못하고, 제사상에도 오르지 못하는 것으로, 다만 그것이 서로 좋아 장난치는 모습이 극히 예쁘고 거리낌 없을 취할 뿐이다. 못된 아이들과 방탄한 자들이 기르는 것도 오히려 부끄러운 일인데, 간혹 늙어 물러난 재상이나 부잣집 젊은이들이 울을 울긋불긋하게 만들어 놓고 뜰에서 기르기도 한다. 문득 주인의 품위가 열 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이는 후생들이 경계할 만한 일이라 할 수 있다.(66쪽)

 

비둘기가 사람들을 품위를 열 발 아래로 떨어지게 하는 것이라고 이옥을 설명하고 있다. 후생들에게 이를 경계하라고 했는데 지금 우리는 비둘기를 아직도 '평화'를 상징하는 새로 생각한다. 새에 대한 생각도 시대마다 다른 것 같다.

 

요즘은 없지만 우리 조상들은 새 점을 친 모양이다. 93쪽에는 새집 점 이야기를 했다. 까치는 남쪽에 있으면 상서롭고 북쪽에 있으면 해로 일이 있다고 했다. 제비집이 기둥 안에 잇으면 식구가 불어나고, 기둥 밖에 있으면 노복들이 흩어져 도망간다는 점괘가 있다고 이옥은 전한다. 하지만 이옥은 이런 새집 점은 믿을만 하지 않다고 말했다.

 

요즘 우리를 괴롭히는 벌레는 무엇일까? 벼룩과 이는 없어졌다고 하지만 한 번씩 어린 아이들 머리에서 머릿니가 나왔다는 보도가 나오는 것을 보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이옥 시대에는 많은 벌레들이 나와 괴롭혔던 모양이다.

 

오뉴월이 교차할 즈음, 바람이 무덥고 비가 지루하게 내려 습기 차고 후덥지근해지면 모기·파리·벼룩·이 외에 또한 벌레들이 많다. 분진(粉塵)처럼 하얗고 아주 미세하여 식별할 수 없는 것이 상 위에서 꿈틀거려, 자세히 살펴보면 벌레이다. 창틈에서 또닥또닥 먼 마을의 다듬이질 같은 소리를 내는 것이 있는데, 자세히 들어보면 벌레이다. 밤에 누워 있는데, 크기가 기장 알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팔을 타고 올라오는데, 어루만져 살펴보면 벌레이다. 방 안 지척 간에 어찌 이리 벌레가 많은가? (181쪽)

 

<연경>은 담배 이야기를 담았다. 담배는 언제쯤 들어왔을까? 이옥이 살았던 시대가 정조 시대이다. 그 때에 2백 년이 되었다고 했으니 4백 년이 넘었다. 이옥은 담배가 들어온지 2백 년이 되었는데도 문자로 기록한 것이 있어야 할 터인데, 편찬하고 수집한 자들이 이를 기록하였다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면서 안타깝다고 했다.

 

결국 자기가 <연경>을 통하여 담배 재배와 담배가 우리나라에 어떻게 들어왔고, 성질, 담배 도구와 쓰임새를 적었다. 눈에 띄는 것 하나는 담배를 피워서 안 될 때와 장소에 대한 이야기이다.

 

'높은 분 앞에서는 안 된다'고 했다. 아마 이 때부터 어른 앞에서 담배를 피우면 안 되는 풍습이 생겨난 모양이다. '아들과 손자가 아버지와 할아버지 앞에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는 아버지와 할아버지 앞에만 아니라면 나이는 상관없다는 투로 이해해도 되지 않을까? 조선시대는 어릴 때부터 담배를 피웠음을 보여준다. 물론 손자가 성인일 수도 있지만. '천한 자가 귀한 사람 앞에서 안 된다'는 말은 이옥 역시 조선시대 지배계급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끈 대목은 '혹심한 더위나 가뭄이 들 때 안 된다'와 '태풍이 불 때 안 된다'는 말이다. 재해를 당했는데도 한가롭게 담배를 피우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인지, 아니면 자연재해가 담배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풍습이 있었는지 정확한 설명이 없지만 참 재미있는 이야기임은 분명하다.

 

<백운필>은 당시 유행한 백과전서적 글쓰기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담배의 경전인 <연경> 또한 담배라는 소재가 매우 특이하며, 문체도 색다르다. <백운필>과 <연경>은 보잘것없는 사물이라도 기록할 가치가 있으면 책을 담는 충분한 자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런 것까지도 책으로 썼던 이옥의 치열한 산문정신을 보여준다.

 

 

YES24 책읽는 주말 - 6월 참여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0) 트랙백(0)
이 리뷰를 | 추천 0        
1
진행중인 이벤트
나의 북마크
이벤트 세상
조금은 뭐 하지만
눈을 조금 넓히자!
나라사랑
나의 친구
나의 친구들
최근 댓글
wkdf qhrh rkqlsken 
언젠가 티브이 재방으로 우연히 '실종.. 
리뷰읽다말고 책이 궁금해져서 주문하고.. 
오늘 64 | 전체 2264008
2004-11-19 개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