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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만 역사를 왜곡한다고? 과연 그럴까 | 역사 2013-03-31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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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한국사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이주한 저
역사의아침 | 2013년 01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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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을 강력히 규탄한다"

일본 문부과학성이 '독도 영유권' 주장을 담은 고등학교 사회교과서 검증을 통과시키자, 지난 27일 새누리당 민현주 대변인 낸 논평입니다. 서남수 교육부 장관은 아예 서한을 보내 "일본 사회과 교과서에 독도 기술이 확대되고 가해자로서의 역사인식이 희박한 일본정부의 입장이 교과서 기술에 반영됐다"며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역사왜곡, 일본 '전유물'? 아닌 것 같은데...

'독도는 우리 땅'은 불변입니다. 하지만 과연 일본만 우리 역사를 심각하게 왜곡하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명박 정권 들어 현대사를 재해석하는 시도가 끊임없이 제기되었습니다. 뉴라이트 핵심 인물이자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여의도연구소 이사장을 지낸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는 "일본이 독도를 일본 것이라고 주장할 만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위안부를 강제 동원했다는 객관적인 자료는 하나도 없다"며 일본 극우와 근현대 인식이 비슷합니다. 

 <한국사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 역사의아침

 

그리고 박근혜 정부들어 '5.16군사반란'을 '쿠데타'로 부르지 못하는 고위공직자들이 수두룩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한 일본에 항의 서한을 보낸 서남수 교육부 장관입니다.

문제는 현대사만 왜곡된 것이 아니라 고대사(고조선·한사군·임나일본부)가 주류 역사학자들에 의해 심각하게 왜곡됐다고 주장하는 역사학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일제식민지사관 시각을 가졌다고 강하게 비판합니다. 이들 중 한 사람이 이주한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입니다.

"한국 주류 역사학계에는 '한국'과 '역사학'이 없다. 중국의 변방사나 일본의 지방사로 한국 역사를 보니 한국이 사라졌다. 역사적 사실에 성실하기는커녕 사실을 외면하거나 과장하고, 견강부화하거나 억단해서 진실을 매몰시키니 '역사학' 없다."-<한국사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이주한 지음 ㅣ 역사의 아침 펴냄) 서문에서

주류 역사학계가 한국사를 중국 '변방사'나 일본 '지방사'로 봤다는 주장에 동의하기 힘들지만, 이주한은 한국사 '거두' 이병도 전 서울대 교수와 그의 후예들이 얼마나 한국사를 왜곡시켰는지 강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한국사를 죽인, 조선사편수회 이어받은 주류 역사학

몇 년 전 한국사가 필수과목에서 빠져 논란이 빚어지고, 아직도 수능은 선택과목이라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는 비판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제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국사는 필수였고, 학력고사(1986년 학년도)는 20점짜리 필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나는 것은 '태정태세문단세...'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우리 역사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단재 신채호
ⓒ 다음백과사전

 

아직도 한국사를 '암기과목'으로 생각하니 제대로된 역사관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고대사가 일제식민사관 지배를 받고 있는 주류 역사학계 주장이 '정설'이 된 것에 대해 강하게 비판한 책이 <한국사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입니다.

"1945년 조선총독부는 해체되었지만,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는 한국 주류 역사학계로 승계되었다. 광복 후 독립운동가가 친일파의 손에 청산되면서 한국사 원형과 진실은 철저하게 부관참시 당했다. 조선사편수회가 날조하고  왜곡한 역사는 이른바 '실증주의'로 치장되었고, 조선사편수회가 가장 두려워한 독립운동가의 과학적 역사학은 '신념이 앞서 관념론, '국수주의'로 전락했다. 그렇게 한국사는 죽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려거든 역사를 읽을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읽게 할 것이다."고 했습니다. 단재 선생은 또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해석했습니다.

김삼웅 "단재 고대사만 제대로 연구했다면, 중국 역사왜곡 없을 것"

이같은 인식은 밖으로는 아의 단위인 우리 민족과 국가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안으로는 각 시대 다양한 역사적 모순은 투쟁을 통해 사회발전 한다는 변증법적 역사관입니다. 이주한은 "주류 식민사학자들은 단재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다. 그들과 단재는 양립할 수 없다. 식민사학자들은 조선총독부의 시각으로 한국사를 본다"면서 "일본 극우파 시각으로 한국사를 본다. 그리니 양립할 수 없다"고 질타하면서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지은 <단채 신채호 평전>(시대의 창)을 다음과 같이 인용합니다.

"한국 사학계가 단재의 고대사만 제대로 연구하고 고증에 충실해왔다면 감히 중국이 요즘 같이 황당무계한  역사 왜곡의 망설을 들고 나오지 못하였을 터이다. 이런 의미에서 단재의 고대사에 대한 인식과 100년 앞을 내다보는 진정한 사가의 진면목을 보인다."

 단재 선생은 역사를 보는 주체적 관점을 매우 강조했다.
ⓒ 역사의 아침

 


이주한은 단재 선생이 역사를 보는 주체적 관점을 무엇보다 강조했다면서 "주체적 관심이란 누가, 어떤 시각으로 역사를 바로보는가 문제"라고 합니다. 단재는 중화주의나 일제 식민주의 관점에서 보는 것을 가장 먼저 경계했다고 이주한은 강조합니다. 그 이유는 "침략과 지배의 관점에 서면 반드시 역사를 왜곡하기 때문"이란 것이 단재 신채호의 역사를 보는 관점이었습니다.

"식민주의사관은 일제 한국 침략과 지배 정당화 합리화"

그럼 식민사관은 어떻게 우리나라에 생겨났을까요?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역사학)는<식민사관은 어떻게 생겨났는가>에서 "일제 어용학자들은 한국사 연구를 '한국침략'이라는 그들 정책에 맞춰 진행시켰다. 따라서 식민주의사관은 일제가 한국 침략과 지배를 한국의 역사로 정당화 합리화 위해 고안해 낸 역사관"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근거해 이주한은 "이만열 분석은 정확하다"며 "침략과 지배를 위해 고안함 역사가 제대로 된 역사일 수 없다. 학문이 아니고 정치이고, 이론이 아니라 폭력이다"고 식민주의사관을 맹비난합니다.

옛 서독 대통령 바이체크가 2차 대전 패전 40돌 기념식에서 "기억을 생생하게 간직하는 게, 왜 중요한지 이해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극복이 아니다. 과거에 눈을 감은 사람은 현재도 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주한도 말합니다.

"기억은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끔 한다. 기억이 없는 인간은 인간의 정체성과 존엄성을 지키기 어렵다. 역사는 기억이다.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얼마든지 농락되고 누군가에 의해 지배당할 수 있다. 역사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그러나 역사를 기억하는 자는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책 서문)

우리 역사를 기억해야 합니다. 친일파와 수구기득권세력이 끊임없이 역사를 왜곡하고, 제대로 된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식민사관은 역사만 아니라 현대사 전반에 걸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식민사관 논란은 단순히 역사학계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역사관은 그 시대의 세계관을 함축한 것이어서,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젠더·교육·법·예술 등 사회 전 영역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한국사회의 모든 문제가 식민사관에서 비롯되지는 않겠지만, 그로부터 자유로운 것도 없다. 식민사관은 오늘도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사가 죽어야 한국이 산다는 말이 성립하는 것이다."(본문에서)

한사군이 한반도가 아니라 요동에 있다고?

'한사군'(낙랑·진번·임둔·현도), 시험 때마다 많이 외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사군 위치를 두고 주류사학계는 한반도 서북부라고 주장합니다. 우리들도 그렇게 배웠습니다. 하지만 이주한은 한사군이 한반도가 아니라 요동이라고 강하게 주장합니다.

 위만조선의 항신들이 제후로 봉해진 지역
ⓒ 역사의 아침

 


 주류 역사학계가 주장하는 한사군,임나일본부의 위치와 실제 위치
ⓒ 역사의 아침

 


서기전 1세기경 <사>》나 서기 1세기경 <한서>, 3세기 후반 <삼국지>, 5세기경 고대 남송의 <후한서>를 비롯한 중국 고대 사료들에서 한사군의 위치를 추적해야 한다. 1차 사료를 해석한 2차 사료보다 1차 사료를 우선해야 한다. 이것은 역사학의 기본이다. 중국 고대 사료는 일관되게 한사군 중심지인 낙랑이 요동에 있었다고 기록했다. 고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인 패수가 지금의 난하라는 사실도 중국 고대 사료에 근거해 어렵지 않게 비정할 수 있다. "패수가 압록강이다, 청천강이다" 하는 고정관념만 버리면 그렇다. - <한사군은 한반도에 없었다>

한사군이 한반도가 아니라 요동이나 중국에 있었다는 주장은 이전부터 제기되었습니다. 아직도 첨예한 논란입니다. 그러므로 이주한 주장이 완전한 정설로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지만, 한산군 위치가 어디인지에 따라 중국 동북공정을 반복하는 중요한 근거가 될 것임은 분명합니다.

역사는 늘 "왜"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다른 학문도 마찬가지

이주한 같은 주장을 '국수주의'로 비판할 수 있지만, 이주한은 "하나의 정설만 있어야 하는 한국사는 이미 역사도 아니고 학문도 아니다"면서 "이미 답이 다 정해져 있으니 연구할 필요가 없다. 역사는 늘 '왜'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고 강조합니다. 어떤 학문이던 끊임없는 연구를 통해 논쟁과 토론을 해야 합니다. 사료를 통해 상대방의 역사 해석을 반박할 때만 한국사는 발전하고 우리 사회 역시 진보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많은 분야 중에서 가장 먼저 바뀌어야 할 것이 역사관이다. 역사관은 한 사람의 종합적인 인식체계이자 한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시도한 발상의 전환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이 순간 영혼의 소리에 집중해보자. 우리의 사고와 의식, 일상을 지배하는 가치를 각자의 장에서 문제제기하고, 새로운 꿈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며 연대의 장으로 나오자. 모두를 위한 역사는 없다. 일제 식민사관에 균열이 생길 때, 우리는 역동적으로 굽이치는 변혁의 물결을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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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대독사과'...하지 않으만 못해 | 정치기사 2013-03-31 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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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행 청와대 대변인이 30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에서 긴급 브리핑을 열고 인사위원장인 허태열 비서실장 명의의 대국민 사과문을 대독했다. 허 비서실장은 사과문을 통해 "새정부 인사와 관련해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친 점에 대해 인사위원장으로서 매우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앞으로 인사검증 체계를 강화해 만전을 기하겠다"고 밝혔다.

그 동안 "사과는 없다"고 했던 청와대였기 때문에 그나마 다행이라는 소리가 나올 줄 알았지만 오히려 비판 목소리만 커졌다. 이유는 사과를 토요일 오전 그것도, 박근혜 대통령도, 허태열 비서실장도 아닌 김행 청와대 대변인이 허 실장 사과문을 '대독'했기 때문이다.

야당은 즉각 반발했다. 민주당 김현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비서실장의 직접 대국민 사과도 아니고 대변인이 비서실장의 사과문을 대독한 것은 또 다른 오기"라고 질타했다. 홍성규 통합진보당 대변인도 "정작 박 대통령의 진심을 전혀 느낄 수가 없다"며 "이는 거세지는 국민적 여론에 마지못해 응한 것으로 또 하나의 '국민 기만'"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특히 박지원 전 민주당 원내댜표는 트위터에서 "대변인 대독 발표는 국민을 졸(卒)로 보는 나쁜 사과"라고 맹비난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한나라당 의원 시절인 2007년 1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개헌을 주장하자 "참 나쁜 대통령"이라고 비판한 적이 있다.

민변 이재화 변호사도 자신의 트위터(@jhohmylaw)에 "박근혜 정부의 인사참사는 대통령의 하향식 '수첩인사'의 결과다"면서 "사과는 당연히 인사참사의 책임자인 대통령이 해야 한다. 비서실장이 사과하고 끝낼 일 아니다. 비서실장 명의의 사과문을 대변인이 대독한 것은 국민을 무시하는 또다른 '오기정치'다"고 비판했다. 이상호 'go발뉴스' 기자(@leesanghoC)도 "사과는 대통령이, 비서실장은 사퇴가 정답.. 비서가 사과하는거 첨본다"며 사과할 사람은 비서가 아니라 박 대통령이라고 강조했다.

누리꾼들도 대독사과가 어처구니 없다는 반응이다. @jhs*****는 "박근혜가 대국민 사과를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허태혈도 아니고 김행이 대독하나?", @song*******도 "박근혜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을 허태열 비서실장이 작성하고 김행대변인이 대독. 이쯤되면 '3단 사과'쯤 되나요? 국민기만하는 방법도 여러가지입니다"고 질타했다.

@Iss******는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이 40% 초반대로 떨어진 이유가 바로 "청와대가 장,차관 낙마 사태 등 새 정부 인사와 관련해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대통령이 해야 할 사과를 비서실장 명의로 발표하고 그것마저 김행대변인이 대독하고 점점 추락하는 새 정부의 지지율이 이유 있어 보인다"고 주장했다.

@lb****** 역시 "부르르 박도 아니고 허태열도 아닌 김행 대변인의 대독이라...참으로 높으신 분들 많은 곳이군요. 시대의 흐름에 반기를 드는 역발상이 그저 놀라울 뿐"이라고 탄식했다.

사과를 대독하는 청와대, 민심을 읽어도 어떻게 이렇게 읽지 못하는지. 날개 없는 박근혜 청와대 더 떨어질 곳을 찾아 헤매는 모습이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윤여준 전 환경부장관은 지난 28일 '팟캐스트 윤여준' 6회'에서  '인사참사'과 관련, "박근혜 대통령이 표면적으로 전문성과 능력을 중시한다고 말은 하지만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더 따진 것 아니냐"면서 "인사풀(pool)이 좁아지고 좁은 범위 내에서 쓰는 사람들이 도덕적 흠결이 있어 낙마하는 악순환이 되풀이 됐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그는 "박 대통령이 꼭 하고 싶어하는 일이 없는 것 같다"고 했다. 대통령으로서 대한민국을 어떻게 이끌어갈 것인지에 대한 철학과 그림이 없다는 비판이다. 굉장히 뼈아픈 지적이다. 이같은 철학과 그림이 없기 때문에, 인사참사가 벌어져도 대통령 직접 사과는 커녕 대변인을 통해 비서실장 사과문을 대독하게 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연한 것처럼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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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여성에게 세족식... 이게 뭐가 문제? | 정치기사 2013-03-31 0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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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30일), 신문을 펼쳤을 때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성 목요일'을 맞아 이탈리아 로마 근교 청소년 교정시설인 카살 델 마르모 소년원에서 '세족식'을 하는 장면이었다. AP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마르모 소년원에는 이민자와 집시 출신 청소년 46명이 수용돼 있고, 이날 세족식에 참가한 소년원생 12명 중에는 소녀 2명과 이슬람교도 2명도 있었다.

교황이 이슬람 신자와 여성에게 세족식을 한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역대 교황은 남성이었고, 그것도 대부분 사제였다. 실로 놀라운 파격이다. 이같은 파격은 이미 교황 즉위명을 '프란치스코'로 정할 때부터 예견됐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평생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 병든 자 등 고통 당하는 와 함께 살았던 이였다.

교황은 지난 19일 즉위 미사때 "가장 가난한 사람을 보호하는 것이 로마 주교의 소명"이라며 "하느님의 창조물인 환경을 존중하며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특히 아이들과 노인들, 우리가 지나치기 쉬운 궁핍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보이고 보호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겨레>에 따르면 교황은 지금도 바티칸 관저가 아니라 바티칸의 카사 산타 마르타 게스트하우스에서 지내고 있다고 한다. 교황이 묶는 방은 나무로 짠 침대와 작은 책상, 소형 냉장고가 있다고 전해졌다.

이같은 파격 행보에 전통주의자들이 반발하고 있다. <연합뉴스>는 '전통주의자들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남자들에게만 세족례를 했던 전통을 깨고 여성에게 이를 행한 것은 전임 베네틱토16세 교황이 최우선시했던 가톨릭교회의 전통을 되살리는 일을 저버리는 결정적 증거라고 비판했다'고 보도했다.

세족식은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가 '최후의 만찬'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발을 씻어준 데서 시작한다.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요한복음 13장 12~14절)

전통주의자들은 제자들이 모두 남성이기 때문에 여성에게 세족식을 거행하는 것은 전통에 어긋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황당한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예수와 예수의 제자는 모두 유대인이다. 그럼 교황도 유대인에서만 나와야하고 세족식도 유대인 남성에게만 해당되는 걸까.

교황청 대변인은 이날 세족식에 참여한 12명 대부분은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전했다. 죄를 짓고 소년원에 갇혀있으면서 자신과 사회에 대한 원망을 살던 이들이 교황이 자신들 발을 씻겨주고, 무릎을 꿇어 발에 입맞춤을 할 때 참회와 감격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게 바로 세족식의 참된 의미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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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언론"한반도는 전쟁상태"...'전쟁 안 된다'는 굳건한 신념 필요 | 정치기사 2013-03-31 0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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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과는 무언가 다릅니다. 북한발 대남대미 위협 수위가 옥상(전쟁)을 향하 한 계단 한 계단 밟고 올라가는 분위입니다.'정전협정 무력화'부터 "남북군 통신선 단절", 김정은 조선노동당 1비서는 한밤중에 "미사일 사격대기"를 지시했습니다.

 

북한 연일 대남대미 위협....급기야 개성공단 폐쇄 언급

 

30일에는 급기야 "이 시각부터 북남관계는 전시상황에 들어가며 따라서 북남 사이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는 전시에 준하여 처리될 것"이라며 "조선반도에서 평화도 전쟁도 아닌 상태는 끝장났다"고 선언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전했습니다.

 

北김정은, 작전회의 긴급소집…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지난 29일 오전 0시 30분 전략미사일 부대의 화력타격 임무에 관한 작전회의를 긴급 소집하고 사격 대기상태에 들어갈 것을 지시했다고 조선중앙TV가 보도했다. 김 제1위원장이 심야에 최고사령부 회의를 소집하고 이를 북한 언론매체가 신속히 전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연합뉴스>

 

이같은 북한 행보에 대해 미국 정부는 29일(현지시간) 발표한 성명에서 북한이 30일 "이 시각부터 북남 관계는 전시 상황에 들어가며 따라서 북남 사이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는 전시에 준하여 처리될 것"이라는 특별 성명을 발표한 것과 관련, "우리는 일련의 도발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한국과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고 일본 지지 통신이 30일 보도했습니다.

특히 마지막 평화 한줄기 끈인 개성공단 마저 폐쇄 가능성을 언급했습니다. 북한은 30일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 대변인 담화를 통해 "괴뢰역적들이 개성공업지구가 간신히 유지되는 것에 대해 나발질(헛소리)을 하며 우리의 존엄을 조금이라도 훼손하려 든다면 공업지구를 가차없이 차단·폐쇄해버리게 될 것"이라고 위협했습니다. 대변인은 또 "지금 북남 사이에는 아무러한(어떠한) 대화통로도 통신수단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라며 "이로 하여 남측인원들의 개성공업지구출입도 극히 위태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미군의 스텔스 전략폭격기인 B-2(스피릿)가 28일 오후 평택 오산미공군기지 상공을 저공 비행하고 있다. 군 소식통은 미 본토에서 출격한 스텔스 폭격기 B-2가 이날 국내의 한 사격장에 세워진 가상의 목표물을 타격하는 훈련을 했다고 밝혔다.<연합뉴스>

 

한반도 상공에 뜬, 미군 전략폭격기....북한 위협

 

우리와 미국 역시 북한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키리조블 훈련과 함께 핵잠수함, B-52폭격기, B-스텔스전략폭격기가 한반도 상공에 날아들었습니다. 언론 보도를 종합하면 B-2전력폭격기는 폭 52.12m에 길이 20.9m로 좌우가 긴 형태로 최대속도는 마하 0.9, 무장탑재능력은 22t이며, 최대 비행고도는 5만ft(1만5000㎞)로 고고도 침투가 가능합니다. 최대항속거리는 무장 1만 6919kg을 탑재할 경우 1만1680㎞을 비행할 수 있습니다. 무장은 총 중량 1만8144㎏에 달하는 핵폭탄 16발을 탑재할 수 있습니다. B-2A는 수많은 업그레이드를 거쳐 블록 30은 통합직격탄(JDAM), 통합장거리무기(JSOW), 통합 공대지장거리무기(JASSM)을 운용할 수 있는 다기능 중폭격기로 변모했다. 무엇보다는 B-2는 스텔스 기능을 갖춰 레이더 방공망에는 새처럼 작은 물체로 나타나 '보이지 않는 폭격기'로 불리며 미군이 보유한 가장 위협적인 전략 무기로 꼽힙니다. 북한이 가장 두려워하는 전략폭격기입니다.

 

한 번 임미를 수행하는 데 엄청난 돈이 들어갑니다. 미국 외교 전문 매체인 포린폴리시(FP)는 29일(현지시간) 스텔스기 2대가 최근 한미 연합 독수리(FE) 연습에 참가해 한반도 상공에서 임무를 수행하면서 556만달러(약 62억원)를 소비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보도했다고<연합뉴스>는 전했습니다.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쯤 되니 국외 언론들이 한반도는 '전쟁상황'이란 기사를 쏟아낼 수밖에 없습니다.

 

3월 30일 영국 BBC 온라인 판 머릿기사톱기사 '전쟁 상황'이라는 제목이 눈에 띈다. <BBC> 

미국 CNN 머릿기사

국외언론들, '한반도는 전쟁 상황'

국외언론들이 한반도를 전쟁 상황으로 보는 이유는 북한발 위협 수준이 단계를 밟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북한이 '말'만 아니라 실제로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위협만 하는 것이 아니라 김정은 체제를 무너뜨리는 전면전은 아니지만 국지도발은 할 수 있다는 예상입니다.

 

영국 가디언

<미디어오늘>은 30일 영국 가디언의 베이징 특파원 타니아 브라니간은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 앞으로의 상황 전개와 관련해 5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했다면서 다음과 같이 보도했습니다.

 

첫 번째 시니라오는 북한이 미국 본토나 미국 기지 등을 공격하는 경우다. 두 번째 시나리오는 남한을 공격 목표로 하는 것. 그럴 경우 미사일 한두 발로 인천공항 인근이나, 서해 북방한계선 인근의 배를 목표로 미사일을 발사할 가능성을 점쳤다. 세 번째 시나리오는 추가적인 미사일 발사나 핵실험. 북한이 미국에 대한 메시지용으로나, 실질적인 이유로 이를 실행할 가능성이 꽤 있다고 보았다. 네 번째 시나리오는 북한이 비군사적인 방법을 취하는 경우다. 마지막 시니라오는 북한이 대화에 복귀하는 것이다.

 

모두가 '전쟁은 안 된다'는 굳건한 신념 가져야....

 

그럼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북한이 대화에 복귀하도록 하는 것이 유일한 대책입니다. 미국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까지 함께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섣부른 대응과 강경책은 북한을 오판하게 하고 그 결과는 참혹합니다.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실험 등 더 이상 도발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메시지와 함께 한반도 평화를 위한 당근책도 필요합니다. <가디언>은 북한 핵실험에 대한 유엔안보리 제재에 일몰제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보도했습니다. 브루킹스연구소 군사전문가인 마이클 오하니오는 "현재의 대치상황이 과거와는 다르다”며 우려를 나타내고 "긴장완화를 위해서라도 북한이 앞으로 2,3년 정도 추가적인 핵실험을 하지 않는다면 제재를 풀어주는 유인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고 <미디어오늘>은 보도했습니다.

 

한 순간 삐끗하면 "삽시간에 통제 불능의 상황"입니다. 모두가 냉정한 지혜가 필요한 때입니다. 대전제는 '절대 한반도에서 전쟁 안 된다'는 굳건한 신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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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건 취재, 몇 명의 기자가 뛰어들까? | 미디어 2013-03-30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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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남부 민다나오섬에서 가톨릭 계열의 한 방송국 기자 1명이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고 현지 언론이 9일 보도했다.-2012.05.9<연합뉴스>필리핀 방송국 기자 1명 또 피살
시리아 내전을 취재하던 일본국적 '재팬 프레스' 소속 기자가 사망했다.-2012.08.21<미디어스>시리아 내전 취재, '재팬프레스 소속 女기자 피살'

캄보디아 동북부 지역에서 최근 불법 벌목 등을 취재하던 현지 기자 1명이 살해됐다고 교도통신이 13일 보도했다-2012.09.13 <연합뉴스>캄보디아서 불법 벌목실태 고발 기자 피살

2012년, 진실밝히다 숨진 기자들 70명...

진실을 밝히다가 숨져간 기자들이다. 하지만 이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지난 2월 14일(현지시각) 미국 뉴욕에 본부를 둔 국제언론단체인 언론인보호위원회(CPJ)가 발표한 연례보고서 '언론에 대한 공격'부분에 따르면, 지난해 피살된 언론인이 70명이다. 이는 2011년에 비해 무려 43%나 증가했다. 또 취재 보도와 관련해 부당하게 투옥된 언론인 수는 232명이 되었다. 이같은 수치는 지난 1990년 관련 집계를 시작한 이래 가장 많다. 언론자유면에서 아직도 세계는 진보가 아니라 후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단체는 언론 자유와 관련해 '위험국 명단(Risk list)'도 함께 발표했다. 어떤 나라가 뽑혔을까? <미디어오늘> 2월 16일자 '취재중 '피살' 언론인 70명…세계 언론자유 악화' 제목 기사에 따르면, 파키스탄, 소말리아, 브라질, 에콰도르, 터키, 러시아, 에티오피아, 베트남, 이란, 시리아 등 10개국이다. 이들 나라 중 러시아는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정권에서 앞선 블라디미르 푸틴 정권에 비해 언론환경이 다소 개선됐으나, 푸틴 정권이 재출범하면서 상황이 다시 악화된 것으로 나타났다고 <미디어오늘>은 전했다.

 

 

러시아는 2000년 이후 지금까지 36명의 기자들이 희생당했다. 희생당한 기자 중 안나 폴릿콥스카야(이하 안나)가 있다. 안나는 1996년부터 러시아 신문 <노바야 가제타Novaya Gazeta> 탐사보도팀에서 격주로 칼럼을 연재하며 체첸 분쟁과 러시아 안보 정책에 대해 많은 기사를 썼다.

희망이 살해된 땅 체첸에 선 안나 폴릿콥스키야

'체첸'과 '러시아 안보'라는 글귀가 서늘한 느낌을 들게한다. dkssk 수많은 살해 위험에도 굴하지 않고, 체첸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했다. 러시아는 그를 내버려둘 수 없었다. 지난 2006년 10월, 괴한의 총격을 받고 자신의 집 아파트 엘리베이트에서 피살됐다.

<더러운 전쟁: 안나 폴릿콥스카야, 희망이 살해된 땅 체첸에 서다>(안나 폴릿콥스카야 지음 주형일 올김 | 이후 펴냄)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안나를 상상하게 보여준다. <더러운 전쟁>은 1999년부터 2000년까지 안나가 <노바야 가제타>에 실었던 칼럼을 뽑아 엮어냈다. 그는 다른 언론사와 기자, 정보원이 전해 주는 간접 소스로 기사를 쓴 것이 아니라 직접 발로 뛰면서 '보고', '듣고' '취재'한 것만 썼다. 이렇게 쓴 안나 글은 체첸에서 벌어지는 비극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유일한 길이었다고 출판사는 말한다. 그리고 안나는 어떤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글을 쓸 것임을 다짐했다.

 

 

<미디어오늘>

"나는 탈진한 여성들과 굶주림으로 청색증에 걸린 아이들, 제2차 세계대전과 스탈린의 압제에서 살아남았지만 현재 머물 곳이 없어 지치고 마비된 노인들, 암에 걸리고 피오줌을 싸고 화농성 부상에 시달리지만 치료받지 못하는 환자들에 대해서 계속 말할 것이다. (…)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나는 계속 글을 쓸 것이다."(본문에서)

안나는 자신의 다짐처럼 <더러운전쟁>에서 "전쟁의 비인간성과 비민주적 정부의 잔혹함을 폭로하는 르포이자 세상의 억압받는 사람들 편에서 오직 펜 하나로 무장한 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 온 한 여자의 생애에 대한 기록"을 독자들에게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제 살아남은 자들이 안나가 생생하게 전달한 '더러운 전쟁'의 진실을 기억하고, 전해주어야 한다.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나는 계속 글을 쓸 것"...살아남은 자들 이를 전해야

2차 대전 때 독일에서 뮌헨 대학을 중심으로 나치에 저항하다 처형당했던 '크리스토프 프롭스트와 한스 숄, 죠피 숄, 알렉산더 슈모렐, 크루프 후버의 실화를 바탕으로 잉게 숄이 지은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을 한스와 죠피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정부에게 요구해야 할 무엇보다 중요한 사항은 바로 개개인의 자유로운 견해와 신념의 보장이란다. 내가 너희에게 바라고 싶은 것은, 비록 인생의 길이 험난하고 고달프다 할지라도, 너희들은 인생을 자유롭고 올바르게 살았주었으면 하는 것이다."(<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본문에서)

그리고 뭔헨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강의했던 후버 교수는 "독일의 한 시민으로서, 독일 대학의 교수로서 그리고 한 정치적 인간으로서 독일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참여하고 그릇된 점을 공공연하게 폭로하면서, 그것에 맞서 싸우는 것인 권리일뿐더러 도덕적인 의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렇다 자신이 기자이든, 교수든, 인민이든 진실을 밝히기 위해 기꺼이 저항해야 한다. 안나는 그렇게 살다 갔다.

<더러운 전쟁>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독자들이 체첸을 가슴에 생긴 계기가 지난 2002년 10월23일에 일어난 모스크바 두브로프카 극장 인질극이다. 당시 두브로프카 극장에는 가장 인기있는 뮤지컬인 '노르트-오스트' 공연되고 있었다. 관객은 800여명이었다. 그 때 러시아 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주장하는 체첸 반군이 중무장을 하고 난입해 800명 이상의 관객과 배우 등을 붙잡고 인질극을 벌였다. 

푸틴, 체첸을 내버려두지 않았고...안나는 목숨 걸고 진실을 보도

사흘 동안 인절범들과 진압부대는 대치했다. 하지만 협상은 없었다. 진압 방법은 극장 안으로 독가스를 주입이었다. 인질 128명이 목숨을 잃었다. 여성 18명을 포함한 테러범 50명 전원도 독가스에 질식돼 숨졌다. 그 중심에는 푸틴이 있었다. 러시아에 도전하는 그 어떤 세력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푸틴의 진면모를 보여준 사건으로 모스크바에서 벌어진 최악의 테러로 기록됐고, 진압 작전 역시 최악이었다.

그리고 또 한 사건이 있다. 2004년 9월 러시아 남부 북오세티야공화국 조용한 한 학교에 체첸 반군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아이들을 인질로 잡았다. 푸틴은 또 전차와 공격헬기를 동원, 인질의 안전을 고려하지 않은 진압작전 끝에 330명이 숨지는 처참한 결과를 낳았다. 이 일은 국제사회의 큰 비난을 불러왔고 북오세티야 공화국에서도 과잉진압에 대해 강력 항의했지만 푸틴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

"위대한 국가 러시아는 불행하게도 현대세계에서는 맞지 않다. 옛 소련 붕괴 이후 보여온 나약함을 극복해야 한다"

푸틴은 한 번씩 그가 호랑이를 사냥하고, 오토바이를 타고, 유도를 하는 모습으로 '사내다움'을 보여준다. 하지만 푸틴은 체첸인들을 잔혹하게 진압하고 학살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음을 모스크바 두부로프카 극장 인질극과 북오세티야 학교 진압에서 보여줬다. 푸틴과 러시아 연방군의 체첸에 대한 잔혹한 진압과 학살을 자행했고, 체첸 반군 역시 체첸 인민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안나를 이를 취재해 생생하게 전달했다.

"죽이는 법과 강간하는 법"를 가르친 러시아

2001년 2월 러시아 연방군이 체첸 남부지역을 보복공격했을 때, 취재갔다가 잡혀 '가상처형식'까지 당한다. 북오세티아 인질극 취재를 비행기를 탔을 때는 독이 든 차를 마셔 죽음을 헤맸지만, 진실을 향한 '펜'은 꺾지 않았다. 일본제국주의가 그랬듯이 푸틴 러시아는 체첸을 방화, 강간, 학살 현장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모두 우리 아이들과 손자들 앞에서 우리가 이 파시즘의 공모자였고 파시즘을 막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시인해야 할 것이다.(본문에서)
그는 연방안전국(FSB)이 캅카스에서 군인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매일 밤 비디오를 보여 줬다고 말한다.
"그 비디오에서는 무엇이 나왔나요?"
"죽이는 법과 강간하는 법이요."(본문에서)

이런 체첸을 두고 안나는 "우리는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모든 것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고 말했다. 51명이 몰살 당해도, 술 취한 군인이 기분 내키는 대로 온 가족을 몰살 시켜도 정치인들과 공무원은 자기 자리만 지켰다고 안나는 전한다. 한 마디로 "체첸은 희망이 살해된 땅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체첸에도 생명을 살리는 의료진, 난민을 죽이는 군인이 아니라 살리는 대령를 보고 안나는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조건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나는 계속 글을 쓸 것"이라고 다짐했다.

안나는 죽었지만...그의 기자 정신은 부활

하지만 안나와 러시아 연방군과 체첸반군 특히 푸틴은 같은 하늘아래 살아갈 수 없었다. 어떤 난관에도 글을 쓰겠다고 했던 안나는 2006년 10월 7일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었다. 생명이 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나의 육신의 생명은 끝났지만,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라면 생명을 내놓는 기자 정신은 생생하게 부활했다.

안나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 [국제기자협회(API)]와 유럽의회는 안나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유럽의회 브리핑실에 '안나 폴릿콥스카야 룸'을 만들었다. 전쟁 지역 여성 활동가를 지원하는 [전장에선여성들Reach All Women in War]은 안나의 이름을 딴 상을 제정했다. 안나는 죽기 전, 자신의 마지막 책, 마지막 장을 우크라이나의 오렌지혁명 같은 사건으로 끝맺고 싶다고 말했다. 안나가 죽은 뒤에도 그 정신은 살아남아 후배들에게 면면히 전해졌다.-출판사 리뷰

대한민국 언론 환경을 어떨까? 박근혜 정부의 언론탄압은 아직 없다. 5년 내내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지난 5년 동안 '언론부분자유국'이라는 오명을 썼다. 지난 2011년 4월 2일 인권·자유 감시단체인 <프리덤하우스>는 2010년의 세계 언론상황을 평가한 '2011 언론자유 보고서'에 우리나라를 '부분적 언론자유국'에 분류했다. 미국 여론조사기관인 갤럽도 지난 해 3월 28일 언론자유 순위를 발표했는데, 대한민국 순위는 133개국 중 87위였다.

대한민국 언론, 권력에 저항해야

또 국경없는기자회(RSF)는 지난 1월 30일 '2013년 언론자유지수'를 발표했다. 결과는 대하민국은 조사 대상 179개국 중 50위로 지난해보다 6단계 떨어졌다. 지난해에는 2011년 대비 2단계 하락해 44위였다. 2년 연속 떨어진 것이다. 이 단체가 발표한 자료를 보면 2008년 47위, 2009년은 69위였다. 이명박 정권 내내 언론자유가 심각하게 침해받았음을 알 수 있다,

지난 해 12월 3일 기준 전국언론노조가 집계한 해직 언론인은 19명이다. 정직은 132명, 감봉감급(66명), 경고(120명), 대기발령(62명)으로 총 450명이 언론인으로서 자유를 침해당했다.  이명박 정권은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래도 안나처럼 죽이지 않았다고.

기자란 누구인가? "기자라면 우리가 쓴 기사로 무엇이 바뀌는가? 우리가 기사를 쓰면서 고통 받은 결과 세상의 무엇이, 어떻게 바뀌는가? 하는 것을 늘 질문해야 한다."고 안나를 말한다. 그렇다 언론은 기자는 끊임없이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하고, 저항하고 진실을 위해 싸우는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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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 기준, '상식'에서 출발해야... | 정치기사 2013-03-30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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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지도층의 모럴 헤저드가 다시 이슈가 되고 있다.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의 특정업무경비 사적 유용 의혹과 김용준 국무총리 지명자의 재산과 두 아들의 병역 의혹이 제기된 탓이다.-01.28<이투데이>이 시대 '모럴 헤저드' 해법은… '경주 최부잣집'에서 배워라
[사회지도층 성로비 스캔들] 김학의 차관 '사표'…법무부는 '충격'-03.21<TV조선>

사회지도층 '목민심서' 부터 읽어라-03.24 <매일경제>
사회지도층 해외 비밀계좌, 한만수 씨뿐일까-03.25 <동아일보>
정 총리, 사회지도층 성접대 의혹 철저한 수사 지시-.03.26 <대한민국정책포털>

온갖 의혹으로 낙마한 공직자, '사회지도층'?

박근혜 정부 고외 공직자 후보자에 대한 다양한 의혹이 제기되고 결국 낙마하자 언론들은 이들을 '사회지도층'으로 부르면 비판했다. 나 역시 이들을 주저없이 '고위공직자' 또는 '사회지도층'으로 불렀다. 그런데 '낙마참사', '인사참사'가 이어지면서 과연 이들을 사회지도층으로 불러도 되는지 의문이 들었다. 이들 낙마자가 과연 '사회지도층'일까?

김용준(국무총리 후보자)·김종훈(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자)·이동흡(헌법재판소장 후보자)·김병관(국방부 장관 후보자)·황철주(중소기업청장)·한만수(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김학의 법무차관

다음 국어사전은 '지도층'(指導層)을 "어떤 목적이나 방향으로 남을 가르쳐 이끌 만한 위치에 있는 계층"이라고 풀이했다. 이는 한 사회를 올바른 방향을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도덕성, 자질, 능력을 두루 갖춘 것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이들이 바로 사회지도층이다. 낙마자들을 노블레스 오빌리주를 실천했다고 볼 수 없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프랑스어 'Noblesse oblige'"귀족성은 의무를 갖는다"는 뜻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즈 단어 탄생을 보면 이 단어가 가지는 의미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영국과 프랑스 '백년전쟁'(1337년~1453년) 때인 1338년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도시 '칼레'를 공격한다. 칼레 시민은 영국군 거센 공격을 막아냈지만, 결국 함락되고 만다.

프랑스 칼레 귀족들...노블레스 오블리주

에드워드 3세는 끈질기게 저항 칼레 시민들을 '진멸'시키고 싶었다. 그러자 칼레 시민들은 에드워드 3세에게 자비를 구하는 '항복사절단'을 파견한다. 그러자 "모든 시민의 생명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누군가가 그동안의 반항에 대해 책임을 져야한다"며 "이 도시의 대표 6명이 목을 매 처형 받아야 한다"고 한다. 몰살을 피하는 조건으로 칼레 대표자 6명의 목을 요구한 것이다.

혼란에 빠진 칼레시민들은 "누가 처형 당할 것"인가를 두고 논의 했다. 그 때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Eustache de St Pierre)'가 생명을 걸었다. 이어 시장, 부호, 상인, 법률가, 귀족들도 자신의 생명을 건다. 에드워드 3세는 귀족들이 칼레 시민들을 위해 목숨을 자신들 생명을 내놓는 것에 감복해 살려준다. 이 사건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상징이 된다.

역사를 조금 더 앞으로 돌려보자. '제국' 중에 로마만큼 오랫동안 존속한 제국은 없다. 아구스트 황제(기원전 27년)부터 동로마제국 멸망(1453년)까지 무려 1500년을 지속했다. 로마가 이렇게 오랫동안 존속한 이유는 "고귀하게 태어난 사람은 고귀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로마시대 황제와 귀족들의 높은 도덕의식, 곧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때문이다.

초기 로마 황제와 귀족들은 기부,헌납 특히 전쟁이 났을 때 먼저 나갔다. 로마 건국 이후 500년 동안 원로원에서 귀족이 차지하는 비중이 15분의 1로 급격히 줄어든 것도 계속되는 전투 속에서 귀족들이 많이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마 몰락은 사회지도층 부패가 한몫했다. 서구사회는 로마 황제와 귀족, 칼레 귀족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이어받았다.

1차대전과 2차대전 때는 영국 고위층 자녀들이 다니던 이튼칼리지 출신 중 2,000여 명이 전사했다. 한국전쟁 때는 미군 장성의 아들이 142명이나 참전해 35명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었다. 특히 미8군 사령관 밴플리트 장군 아들은 야간폭격 임무수행 중 전사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아들도 육군 소령으로 참전했다. 중국 지도자 마오쩌둥이 6·25전쟁에 참전한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 시신 수습을 포기하도록 지시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두산백과사전> '노블레스 오블리주

경주 최부잣집과 이회영 일가...노블레스 오블리주

우리 역사에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있었다. 경주 최부잣집과 전재산을 팔아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이회영 일가가 대표적이다. 경주 최부자집은 최국선(崔國瑄 1631~1682)으로부터 최준(崔埈 1884~1970)에 이르는 약 300년 동안이어졌다. 최부잣집은 육훈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  ▲만석 이상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 흉년기에는 땅을 놀리지 말라 ▲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주변 100리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하라 ▲ 시집온 며느리는 3년 동안 무명엇을 입으라 따위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조선조 백사 이항복 후손인 우당 이회영 선생 6형제는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가산을 정리하여 만주로 건너가 동지들과 함께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당시 우당 선생 6형제가 정리한 가산은 40만원(현재가치 600억원~800억원)이었다. 우당 선생은 "독립한국은 만인이 자유와 평등을 누릴 수 있고, 공평하게 행복을 누리며, 자유롭게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균등하게 부여될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한다. 지배 없는 세상, 억압과 수탈이 없는 세상이 실현돼야 한다"는 신념으로 아나키스트 운동과 무장독립운동을 펼쳤다.

현재 가치로 적게는 600억원, 많게는 800억원이라는 엄청난 재산을 가졌지만 조국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다. 결과는 우당 선생은 1932년 11월 66세의 나이로 중국 여순감옥에서 순국, 둘째 석영은 1934년 상하이에서 굶주려 죽고, 셋째 철영은 1925년에, 여섯째 호영은 1933년에, 첫째 건영은 1940년에 그토록 바랐던 조국 독립을 보지 못하고 삶을 놓았다. 다섯째인 이시영 선생만 조국 독립 후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 됐다. 진정 '노블레스 오블리주 삶을 보여준 진정한 사회지도층인게다.

"우리나라에는 부자는 있으나 제대로 된 지도층은 없어"

현대 자동차 대표이사 사장을 지내고 17대 민주당 의원을 지낸 이계안 전 의원은 <누가 칼레의 시민이 될 것인가?(위즈덤하우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나라에는 부자는 있으나 제대로 된 상류층 또는 지도층이 없다. 돈을 많이 번다고 해서, 가진 것이 많다고 해서 상류층이나 지도층이 되는 건 아니다. 잘살기를 바라는 것은 우리 모두의 희망 사항이지만, 잘산다는 것이 가진 것이 많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서는 곤란하다. 마음을 나누고 배려하며 더불어 사는 것이 진정으로 잘사는 것이 아닐까? 많은 사람의 희생을 바탕으로 소수만이 부자가 되는 것은 잘 사는 길이 아니다. 탈법적이고 불법적인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부를 축적하고 또 그것의 대물림이 일반화된 것도 좋은 사회는 아니다."

맞다. 부자는 있어나, 사회지도층은 없다. 권력은 가졌지만, 명예로운 자는 없다. 재벌가와 고위공직자와 아들은 어떻게 하나같이 군대 갈 때는 '환자'였다가 지금은 건강하게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 고위공직자 낙마자 중에는 세금탈루, 국외비자금 조성, 부동산투기 의혹, 위장전입, 국외군수업체 무기중계상, 성접대 의혹자들이다. 자신을 국가와 사회를 위해 희생은 커녕 오히려 자신의 배를 불리기 위해 온갖 추태를 다 보여주었다.

이들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바라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 찾는 일'이다. 그러므로 지도층, 그것도 '사회 지도층'으로 부를 수 없다. 그럼 어떻게 불러야할까? '기득권층'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다음 국어사전은 '기득권층(旣得權層)을 "사회, 경제적으로 여러 가지 권리를 누리고 있는 계층"으로 풀이했다. 온갖 권리를 누리는 자를 뜻한다. 낙마자들 삶을 보면 '기득권층'도 순화된 말이다.

인사 기준, '상식'에서 출발해야...

낙마자가 '줄줄이 사탕'이자만 청와대는 "대국민 사과는 없다, 민정수석 교체 없다"고했고, 새누리당도 "최소한 100일 지난 뒤 사과나 교체 얘기해야"한다며 야당의 대국민 사과와 민정수석 교체 촉구를 일축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상식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고위 공직자 인선을 할 때 가장 기본 상식은 무엇일까? 고위공직자로서 도덕성은 기본이다. 자질과 능력은 그 다음이다. 박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 "사적인 부분까지 공격하며 가족까지 검증하는데 이러면 좋은 인재들이 인사청문회가 두려워 공직을 맡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했다. 이런 걱정을 하지 않기 위해 아예 도덕성에 흠결 있는 사람을 뽑지 않으면 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기득권층을 고위공직자에 앉히고, 그런 자들이 권세만 잡아 사회지도층이 되려다가 벌어진 인사참사였다. 참사를 막는 유일한 방법은 도덕성에 흠결 있는 사람은 아예 '인사수첩'에서 삭제해야 한다. 청와대 인사파일에 들어가있다면 '리셋'(reset)해야 한다. 수첩을 벗어나면 대한민국에도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가진 이들 찾으면 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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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에 대한 장준하 저항 | 정치기사 2013-03-30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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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삼천리 삼천만의 우리 동포들. 건질이 너와 나로다/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 싸우러 나가세/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때까지 싸우러 나아가세"

지난 해 방영된 KBS2 수목 드라마 '각시탈'(28부작, 2012.05.30~2012.09.06)에서 대한국 독립군 대장 목담사리(전노민 분)가 종로서 경부모 이강토(주원분)에 잡혔을 때 부른 '독립군가'다. 생소했던 노래 앞에 시청자들 관심은 폭발했었다. 이 노래가 28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장준하 선생 겨레장에서 다시 울려퍼졌다.


지난 26일 장준하 선생은 서거 38년만에 '실족사'에서 "장준하 선생은 외부 가격에 의해 사망한 뒤 추락한 것으로 보인다"는 이정빈(68)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의 감식결과로 '사실상 타살'로 드러났다. 광복군 장교 출신으로 황군 장교 출신인 독재자 박정희에게 저항하다가 1975년 8월 의문의 죽음을 당한 장준하 선생 죽음의 진실에 한발 다가선 것이다. 진실의 마지막은 박근혜 정부가 밝혀야 한다. 그게 민주공화국 대통령 의무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 관장은 <장준하평전>(시대의 창) 장준하를 "장준하의 올곧은 생애는 흙탕물 같은 우리 현대사의 연못에 핀 한 떨기 연꽃과도 같다"면서 "그는 민족이 식민지가 되었을 때는 총을 들고 왜적과 싸웠고, 조국이 해방되었을 때는 붓을 들고 청년과 학생들에게 민주주의 사상을 가르쳤다"고 평했다.

그러면서 "군사독재에 헌정질서가 짓밟히자 붓을 던지고 거리로 나서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싸웠다"고 강조했다. 장준하 삶이 얼마나 올곧고 치열한 삶의 여정이었는지 알게 한다. 우리 역사에서 장준하처럼 조국 독립과 민주화 투쟁을 함께 한 인물은 그리 많지 않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조국 독립을 보지 못하고 산화하거나, 민주화투쟁을 한 이들 중에는 일제식민지때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준하 선생은 1918년 생이다. 장 선생이 조국 독립에 뛰어던 때는 일본군 학도병 때인 1944년 7월 탈출해 53명의 동지들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던 충칭까지 2400㎞ 길을 걸어 백범 선생 광복군에 하면서부터다. 광복군 장교로서 국내 진공작전을 위해 미국 정보기관(OSS) 대원을 자원해 특수 게릴라 훈련을 받았고, 일본 패망 후 1945년 11월23일 귀국해 김구 주석 수행비서로 일한다.

장준하 선생이 일본군 학도병으로 끌려가 탈출한 이후, 임시정부 시절을 거쳐 광복과 함께 환국하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수기인 <돌베게>(세계사)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조국애를 몰라서 조국을 귀하게 여기지 못했고, 조국을 귀중하게 여기지 못하여 우리의 선조들은 조국을 팔았던가. 우리는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으련다. 나는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이 가슴의 피눈물을 삼키며 투쟁하련다. 이 길을 위해 나는 가련다. 나의 인생의 과정은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라는 이정표의 푯말을 꽂고 이제부터 나를 안내할 것이다."

"그립다는 말은, 내게는 그리 많지 않은 말이다. 그러나 나는 오늘 그리움은 고사하고 어느새 앓고 있었다. 고향이, 고국의 어느 곳이든 한 땅덩이 마을이, 아니 내 한 번이라도 지나가본, 살아본 곳이면 어느 마을이든, 내 머릿속에 다시 한 번 지나가고 있다. 그 풍경 그 모습대로 나를 앓게 만들며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끝내 조국을 버리지 못할 것이다.'"

"또 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나는 끝내 조국을 버리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을 통해 장준하 선생의 조국 독립에 대한 열정을 확인할 수 있다. 조국 독립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칠 것이라는 올곧은 결기다. 자신의 수기를 '돌베개'라 지은 것도 의미 심장하다. 장 선생은 목사 아들로 태어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기독교 신자라면 돌베개가 무엇인지 알 것이다.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이 하란으로 도망갈 때 베델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들었을 때 하나님이 나타나 반드시 너를 지켜주고, 고향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약속했다. 장준하의 독립의지는 이처럼 신의 약속에 가까웠다.

장준하 선생이 1975년 8월 숨졌을 때, '실족사'가 아니라 타살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 배후는 박정희 정권이다. 하지만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왜 장준하 선생 죽음 뒤에 박정희 정권이 있었다고 했을까? 장준하와 박정희 두 사람 삶이 달라도 너무 달랐고, 특히 장준하 선생이 박정희에게 끊임없이 저항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장준하 선생보다 한 살만은 1917년 생이다.

박정희가 만주군 장교 출신임을 누구나 알고 있다. 장준하 선생이 "또 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와 "나는 끝내 조국을 버리지 못할 것이다"고 할 때 박정희는 '조국'을 위해 충성맹세를 한다.

"나는 오늘 충량한 황국신민으로서 천황 폐하와 부의 황제 폐하께 멸사봉공의 정신으로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합니다. 나는 대동아 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에서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훌륭하게 죽겠습니다."-1942년 3월 만주육사 졸업하면서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1939년 3월 1일자 '만주신민'에 기고한 혈서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장준하 선생이 말한 조국과 박정희가 말한 조국이 글자만 같을 뿐이다. 장준하의 조국은 '대한'이고, 박정희 조국은 '일본제국주의'였다. 이처럼 젊은 장준하와 박정희는 그 시작부터 달랐다.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었지만 일제식민지와 박정희가 군사반란을 일으킨 1961년 5월 16일까지는 아니었다. 장준하 역시 5.16군사반란을 '혁명'으로 규정했다. <사상계>(1961년 6월호, 95호) 권두언에서 "4.19혁명이 입헌정치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민주주의 혁명이었다면, 5.16혁명은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사주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 혁명"이라고 했다.

하지만 장준하 선생은 같은 권두언에서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시급히 혁명과업을 완수하고, 최단시일 내에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한 후 쾌히 그 본연의 임무로 돌아간다는 엄숙한 혁명공약을 깨끗이, 군인답게 실천하는 길 이외의 방법은 없는 것"이라고 했다. 즉, 민정이양을 촉구한 것이다. 하지만 박정희는 그렇지 않았다. 장준하 그런 박정희에 끝없이 저항했다. <사상계> 권두언은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진리를 보여준다.

"굴욕외교에 엄중히 항의한다.
친일 사대주의를 고발한다.
이 민국은 민이 고수하자.
총칼로 이 숭엄한 민중의 항의를 막을 수 있다는 우상을 박멸하라!"(1964년 긴급증간호)

"인척과 측근자의 부정을 눈감는 '가족지배' 방식을 버리고 자체내 악과 싸우는 데 과감해야 한다. 이 결단 없이는 다시 하늘로부터 내리는 국민의 심판을 면할 도리가 없다."(1964년 5월호)

"우리는 패배할 수 없다. 저기서 저렇게 자리를 위하여 진리를 억압하는 인간 군상은 역사에 남을 수 없는 낡은 껍데기다."(1964년 11월호)

"이제 우리는 학정 밑에서 새로운 종교로 힘을 얻어 간 로마의 피치자 계급을 회상할 필요가 있다. 도리어 폭군 밑에서 전진한 영국의 헌정을 기억하여야 한다. 백인의 학대 밑에서 성장해온 마틴 루터 킹의 정신과 지도력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 기적이 일어나는 과정이다."(1965년 9월호)

"우리는 민주주의의 장송을 슬프게 바라만 보고 형장에 서서 그때 누구를 원망할 것이냐? 아무도 원망할 사람조차 없을 것이다. 국민은 주권자로서 우선 현을 가져애 하겠다. 국민은 또 주권자로서의 권리를 빼앗기지 않아야겠다."(1976년 4월호)

"우리는 진정 유령유권자의 대리투표에 의해서 집권자들의 취임식에 유령들의 축하박수를 듣고자 하지 않음을 선언하다. 듣느냐? '지도자'란 이여!"(1967년 6월호)-여기 인용된 권두언은 <장준하 문집-사상계 수난사>(1988년, 사상계)에서 발췌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장준하는 "나는 끝내 조국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고 한 것처럼 통일조국을 그토록 바랐다. 박정희가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자 "우리 민족의 거울이다. 이놈을 우리 민족의 현실 앞에 걸어 놓고 있으면 조만간에 가짜와 진짜가 가려질 것이다. 통일을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들이 한 짓인지 아니면 자기 정권을 유지하는 명분으로 한 짓인지 분명히 가려질 날이 곧 올 것이니 두고 보라"고 했다.

7.4남북공동성명 자체는 높이 평가했지만, 박정희를 이를 악용할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장준하 선생 예언은 적중했다. 그해 10월 박정희가 '유신쿠데타'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장준하 선생은 유신헌법 철폐서명운동을 펼치다가 1974년 1월 17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르다가 이듬해 2월 형집행정지로 풀러났다. 하지만 여섯달 후인 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 등반 도중 떨어져 숨졌다. 경찰은 실족사로 발표했지만, 38년 동안 박정희 정권에 의한 타살이라는 주장에 끊임없이 제기되었고, 지난 26일 타살 가능성에 무거를 둔 법의학 전문가 감식 의견이 나왔다.

"두개골 골절과 엉덩이뼈 골절이 동시에 추락에 의해 생겼다고는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머리가 먼저 (외부) 가격을 받고 추락한 것 같습니다. 적어도 약사봉 지면에 붙어서 떨어지지는 않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함석헌 선생은 장준하 선생을 이렇게 평했다.

그는 결코 우물우물하다 썩어지고 말 부류의 인간이 아닙니다. 뜻을 품은 사람입니다. 몸이 없어졌다고 결코 우리를 떠날 사람이 아닙니다. 20년간 같이 생활하여 나는 그것을 확신합니다. 그는 자기가 생전에 가졌던 목적을 사후에도 결코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우리와 교제하는 방법이 이제는 달라져야 할 뿐입니다."-함석헌, '아, 장준하'

"생전에 가졌던 목적을 사후에도 결코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함석헌 선생의 평이 울림이 크다. 장준하 선생이 생전에 가졌던 목적은 "또 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나는 끝내 조국을 버리지 못할 것이다."였다. 이런 장준하를 황군장교 출신 박정희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같은 하늘아래 살 수 없었던 것이다. 장준하 선생은 못난 조상으로 살지 않았다. 후손인 우리도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해" 살아야 한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장준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히는 것이고,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를 위해 온힘을 쏟는 것이다.

박정희가 작사작곡한 일본군가풍 '나의조국'과 '새마을운동'이 전국방방곡에서 울려퍼질 때 장준하는 갔다. 어릴 적 학교에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불렀고, 들었다. 지금도 불렀다. 하지만 독립군가는 거의 모른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광복군 장준하와 황군장교 박정희가 작은 답일듯하다. 독립군가 2절은 이렇다.

"원수들이 강하다고 겁을 낼건가 우리들이 약하다고 낙심 할건가/정의의 날쎈 칼이 비끼는 곳에 이기리 너와 나로다/ 너 살거든 독립군의 용사가 되고 나 죽으면 독립군의 혼령이 됨이/ 동지야 너와 나의 소원아니냐 빛내리 너와 나로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뛰어 건너라/ 악독한 원수 무리 쓸어 몰아라/ 잃었던 조국 강산 회복하는 날 만세를 불러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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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숙 사장? ""히틀러 간 자리에 괴벨스냐", "바그다드 만들지 말아야" | 정치기사 2013-03-28 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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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철 후임에 이진숙?'

 

MBC를 망친 김재철이 "눈물로 호소했"지만 결국 사장에서 해임됐습니다. MBC 사장으로 거론되는 인물 중 김 사장 최측근으로 불리는 이진숙 홍보기획본부장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어 논란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차기 MBC 사장은 누구? ‘김재철 입’ 이진숙도…<헤럴드경제>

이상돈 “MBC 새 사장 이진숙? 그런 사람은 안돼"<파이낸셜뉴스>

MBC 김재철 사장 해임...이진숙 본부장 후임 거론<여성신문> 

김재철의 입’ 이진숙이 MBC 사장?<한겨레>

 

'김재철 후임에 이진숙?'

 

이 본부장 외에 황의만 전 울산 MBC 사장과 정흥보 전 춘천 MBC 사장, 구영회 전 MBC 미술센터 사장, 강성주 포항 MBC 사장 ,권재홍 보도본부장 등이 하마평에 오르고 있습니다. <한겨레>는 27일 문화방송의 한 관계자는 “지금 거론되는 인물들은 항상 후보군에 있었던 사람들이다. 개개인에 대한 평가가 다를 수는 있지만 김 사장보다는 낫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이진숙 본부장은 문화방송 구성원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인물”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왜 이MBC관계자는 "이진숙 본부장은 문화방송 구성원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인물"이라고 말했을까요?

 

지난 해10월8일 오후 5시께 정수장학회를 방문하기 위해 이진숙 문화방송(MBC) 기획홍보본부장(오른쪽)과 이상옥 문화방송 전략기획부장이 서울 중구 정동 경향신문사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다. 이날 이 본부장과 최필립 정수장학회 이사장이 나눈 문화방송 및 부산일보 지분 매각 논의는 7일 뒤인 15일 <한겨레> 최성진 기자의 보도로 외부에 알려졌다.<경향신문>

 

그는 김재철 사장 이후 MBC 홍보국장을 거쳐 기획조정본부장으로 승진했습니다. MBC 본사 첫 여성 임원(이사) 임명이라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김재철 사장 체제에서 승승장구한 이유는 충실하게 경영진을 대변했고 노조를 비판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MBC 기자회는 지난 해 3월 19일 "그가 과연 한 때 기자였는지를 의심하게 했다. 지난 1년 언론사로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이른바 소셜테이너법의 논리를 생산했을 뿐만 아니라 파업을 전후해 숱한 언론 브리핑을 통해 파업과 제작거부 의도를 적극적으로 왜곡했다"며 이진숙을 기자회에서 제명했었습니다.

 

특히 그는 지난 해 10월 8일 최필립 정수장학회 이사장과 이상옥 전략기획부장과 함께  '정수장학회의 문화방송 주식 매각·발표 방안'을 논의했었습니다. 당시 이 본부장은 "(장학회의) 언론사 지분 처분과 그 매각 대금의 이자수익화, 이를 통한 반값등록금 지원사업 등의 천명이 있었으니, 대학생 등 젊은층이 많이 지나다니는 대형 광장이나 대학을 발표 장소로 정했다"며 "정치적 임팩트가 크기 때문에 대중에게 가장 효과가 큰 방법을 찾으려고 한다"고 말해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바그다드 그 이진숙은 어디가고...."정수장학회 지분 처분 발표는 대학에서"

 

한 때 '이진숙'이라는 이름 석 자는 진짜 기자정신을 가진 기자로 추앙받았습니다. 지난 2003년 이라크전 당시 촬영기자도 없이 직접 전선으로 들어가 소형 카메라를 통해 미군의 공습 상황을 생생히 중계하기도 했었습니다. 한국 언론사의 전쟁보도에 길어 남을 족적을 남긴 것입니다. 총성이 곧 배경음이던 이라크 바그다드 시내 한복판에서 '기자 이진숙'은 MBC 마이크를 들고 당당히 선 이진숙은 대한민국에서 제대로된 '종군기자'있음을 증명했습니다. 

 

                                              

                                           

2003년 이라크 전을 보도하는 이진숙 기자


하지만 이제는 후배 기자들에게 기자에서 제명당했습니다. 이런 그를 김재철 후임자가 된다는 것은 상상 조차하기 힘듭니다. 이와 관련, 이상돈 전 중앙대 교수는 27일 오전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와의 인터뷰에서 "(후임 사장으로) 이진숙 본부장이나 권재홍 앵커 같은 분들 이름이 오르내리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느냐"는 질문에 "이진숙 본부장 같은 사람은 김재철 사장과 같은 책임론적 입장이 아니냐"며 "그런 사람은 아니라고 본다. 되지도 않을 것"이라고 사장 자격이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진보정의당 공식 트위터(@Jinbo_Justice)는 "후임사장으로 이진숙 본부장이 거론되고 있다는 소식에 진보정의당 트위터 담당자는 ‘히틀러 간 자리에 괴벨스냐’는 푸념이 절로 나온다"며 "누가 해도 김재철 씨 보다는 낫겠다는 생각, 고이 접어 하늘로 보내야"라며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누리꾼 "히틀러 간 자리에 괴벨스냐"..."바그다드 전쟁터로 만들지 말아야"

 

이기명 전 노무현 대통령 후원회장(@kmlee36)도 "이진숙 사장? 몇 사람이나 죽는 꼴 보려구 이러나"라고 분노했습니다. 누리꾼들도 "제가 예언했듯이 이진숙의 이름이 시작되는군요 박근혜는 공정방송 절대로 하지않습니다"(@em*****),  "김재철 해임은 쇼일뿐이다.. 이진숙이라니.. 기가 막히는구나"(@Selfis*******),"이진숙은 절대 반대!!! 개BC 뉴스로 만든 공로자가 사장이 된다면 징계탄압,보복성 인사는 계속된다 이진숙은 이라크등 전쟁터로 보내라ᆢ"(@ASe*****),"그녀가 사장? TV 전원코드 싹뚝!!!!"(@Uni****)라며 반대에 동참했습니다.  "또다시 MBC를 바그다드 전쟁터로 만들지 않으려면 이진숙은 쉬게 하는게"(@bulko*****)

 

"만약 박근혜가 MBC사장에 이진숙 앉히면 이건 김재철 해임쑈 뿐이 안되는 것이다 이진숙이 되면 김재철보다 더 친정부적 방송 무비판적 북한얘기가 주가 되는건 아닌지 노조탄압을 더 심하게 하는건 아닌지 걱정된다..그러기에 이진숙은 절대 안된다.."(@rkdrlt******)

 

@yo*****는 "이명박정부에서 낙하산 인사로 방송국을 장악하고 내란에 준할정도로 편파 보도를한 그중심에 MBC김재철 사장이 있었고 거기에 적극편승하여 만신창이 언론으로 만든 권재홍 이진숙등 몇몇은 이제 당연히 퇴출시키고 옳바르고 공정한 인물을 사장으로 모셔야 할 것"이라며 공정한 인사를 촉구했습니다.

 

 

하지만 이진숙 사장에 찬성하는 이도 있습니다. 바로 변희재씨입니다. 변씨는 자신의 트위터(@pyein2)에 "이상돈이 또 기어나와서 이진숙 본부장은 MBC 사장 자격없다, 야당이 인정할 만한 사장 선출해야한다며, 야합질 시작했네요. 하여간 이상돈, 김종인, 이준석 등 비대위파, 박근혜 정권 무너지길 기다렸다, 뜯어먹으려는 하이에나들 수준입니다."이라며 이진숙 반대을 자들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변희재 "종북노조 척결"....

 

그는 자신도 사장에 공모하겠다고 했습니다. 26일 "MBC 사장 선임 TV 생중계 공청회가 도입되면 사장에 응모하겠다"며 "무조건 생중계 공청회를 통해 MBC의 더러운 현실을 국민에 알려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개혁적인 MBC 사장이 임명되는 것은 종북노조의 최후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노조를 맹비난했습니다. 변씨는 이어 "양승은이든 배현진이든 MBC 개혁과정에서 40대 중년여성으로 교체해야 한다"며 "MBC에도 잘 찾아보면 40대 중년의 경험 많은 여성 앵커가 많이 있다. 앞으로 40대 이하는 뉴스 마이크 못 잡게 해야 한다"라는 말도 했습니다. 특히 "세상물정 모르는 20대 어린 여성을 불법파업 때 이용해먹으려니 앵커로 갖다 앉히는 거고, 경영진들은 대충 예쁘면 되지 않냐는 안일한 생각에 불법파업의 마스코트인줄도 모르고 어린애들 키우는 거죠"라는 인신공격성 글도 서슴치 않았습니다.

 

"손석희를 추천"....


하지@jhso***** 같은 이는 "mbc사장이 이진숙이 거론되고 있다니... 김재철이가 후임을 확실하게 키워놓고 떠났나! 이진숙이 사장되면 mbc 개선되기는 어렵겠다. 이진숙은 필요없고 손석희씨를 임명 하는것이 최고의 적임자라고 본다"며 손석희 교수를 추천했습니다.

 

한편 MBC 노동조합은 26일 성명을 통해 "'김재철 체제'가 안겨준 가장 큰 교훈은 공영방송이 더 이상 정권에 휘둘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라며 "방문진은 이같은 방송의 독립을 이룰 수 있는 차기 사장을 물색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노조는 "벌써부터 '박심'(朴心)이니 '청와대의 뜻'이니 하는 구시대 용어가 난무하고 있다"며 "우리는 방문진이 차기사장 선임에서부터 이같은 정치권으로부터의 독립을 이룰 수 있는지 주시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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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타살', 진상규명 위해 박근혜 정부 나서라 | 정치기사 2013-03-28 0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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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 따르면 '장준하 선생 사인진상조사 공동위원회'(공동위)의 이정빈(68)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는 26일 오전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기념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유해정밀 감식결과 발표에서 "장준하 선생은 외부 가격에 의해 사망한 뒤 추락한 것으로 보인다"는 의견을 냈습니다.

"장준하, 외부 가격에 의해 사망"

이같은 감식 결과는 1975년 경찰이 포천 약사봉 등반 도중 '실족사'라고 한 당시 발표결과를 뒤엎는 것입니다. 1975년 8월 서거 후 38년 동안 '추락사'냐, '타살'이냐는 끊임없는 논란과 의혹이 사실상 '타살'로 드러났습니다. 물론 더 철저한 감식을 통해 타살로 최종 결론을 내리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장준하 선생 사인진상규명 공동위원회의 이정빈 서울대 명예교수가 26일 오전 정밀 감식 결과를 발표해 "장준하 선생은 누군가의 가격에 의해 숨졌다"고 주장했다. 사진은 이날 공개된 장준하 선생의 유골이다. 오른쪽 두개골이 6~7cm 가량 함몰됐다
ⓒ 장준하 선생 암살의혹규명 국민대책위원회

 


<오마이뉴스>는 따르면, 실족사라는 기존의 사인에 대해 이 교수는 "몸에 상처가 거의 없는 걸로 봐서 약사봉에서 실족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장 선생이 숨진 경기도 포천군 약사봉 계곡 사진을 띄운 이 교수는 "미끄러져서 죽었다면 당시 계곡 지면에 의해 찰과상 등의 상처가 있어야 하지만 장 선생의 몸에는 그런 흔적이 거의 없었다"고 밝혔습니다.

1975년 <동아>, '추락사' 의문 제기...

당시에도 타살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동아일보>는 1975년 8월 19일자 '검찰, 사고경위를 조사' 제목 기사를 보면 의문점 3가지를 제기했습니다.

▲추락사고 지점은 산이 너무 험해 젊은 등산가들도 마음대로 오르지 못하는 경사 75도 길이 12m 절벽인데 장씨가 혼자서 아무런 장비없이 내려오려 한점 ▲사고현장 벼랑 위에 오를 때는 멀리 등산코스를 돌아 올라갔는 데 내려 올 때는 등산코스도 아닌 벼랑으로 내려오려 한 점 ▲사고직후 김씨(사고현장 유일한 목격자 김용환)가 장씨의 시계를 차고 있던 점.

 1975년 8월 19일자 <동아일보>는 장준하 선생 사인에 대한 의문점을 보도했다.
ⓒ 동아일보

 


그러면서 당시 기사는 "검찰은 또 김씨가 65년부터 3년 동안 신민당 서울제4지구당 총무로 있었는데 사고 당일 등산길 버스 안에서 장씨와 우연히 만났다는 진술한점과 김씨가 사고 직후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군부대에 신고한 점도 의문을 갖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하지만 끝내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진실이 밝혀지지 않는 원인 중에는 유가족이 독재자 박정희 정권을 믿을 수 없었던 것도 한몫했습니다. 당시 장 선생 주검은 간단한 검안만 이뤄졌습니다. 장 선생 부인이 '군사독재 아래서 사인이 제대로 밝혀질 리 없다'며 부검에 반대했기 때문입니다.-(2012.08.15 <한겨레> 1975년 사망 당시 육안·손으로만 검안…'단순 실족사' 결론 참고)

박정희-전두환-노태우 권위주의 정권때는 진실 찾기에 나서지 못하다가 김영삼 정부 때인 지난 1993년 민주당 '장준하 선생 사인규명 조사위원회'와 2004년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가 사인 규명에 나섰습니다. 1993년 조사위 때 조철구 박사는 '시신 검사 소견을 통해 "직접 사망의 원인은 우측두 기저부 함몰골절상으로 인한 두 개강내 손상으로 추정된다"고 밝혔습니다.

1993년·2004년 진실규명 시도했지만...진실 규명 못해

그러면서 "두부(머리)를 비롯해 외상을 입기 쉬운 겹간부, 주관절부, 수·족관절부 등 돌출부위의 외상이 전혀없는 점으로 보아 넘어지거나 구른 흔적이 없고 후두부 골절부위가 해부학적으로 추락으로 인해 손상당하기 어려운 부위라는 것을 지적했"습니다-(장준하기념사업회 '1993년 장준하 선생 사인규명활동보고서)

하지만 타살 관련 진실을 끝내 밝히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2004년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도 "장준하는 높이 12m 또는 75m 절벽에서 추락하였음에도 후두부 함몰골절상 외에는 외상을 거의 입지 않았고, 옷에도 미끄러진 흔적 등이 없어 추락사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지만 진실은 끝내 밝히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해 8월 장 선생 유골을 이장하다가 두개골이 함몰된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지난해 11월 '장준하선생 암살의혹규명 국민대책위원회(대책위)'와 민주통합당 내 '장준하선생 의문사 진상조사위원회'는 공동위를 꾸렸습니다. 그리고 약 넉 달만인 26일 이정빈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에 의해 "두개골과 엉덩이뼈가 부러질 정도로 추락해 사망했다면 어깨뼈도 분명 깨졌어야 한다"며 "머리를 가격 당해 죽은 뒤 (추락에 의해)엉덩이뼈가 골절됐을 것"이라는 감식 소견이 나왔습니다.

그럼 장준하 선생는 누가 죽였을까요? 이를 알기 위해서는 장준하 선생 삶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장 선생은 기독교 목사인 장석인과 김경문 사이에서 4남 1녀의 맏아들로 1918년 평안북도 의주군 고성면 연하동에서 태어났습니다. 1944년 일본군의 학도병으로 중국에 파병됐으나 그해 7월 일본군 병영에서 탈출한 뒤 중국군을 거쳐 11월 53명의 동지들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던 충칭까지 2400㎞ 길을 걸어 백범 선생 광복군에 합류합니다. 광복군 장교로서 국내 진공작전을 위해 미국 정보기관(OSS) 대원을 자원해 특수 게릴라 훈련을 받았습니다. 일본이 패망하자 1945년 11월23일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미군 수송기로 귀국해 김구 주석 수행비서로 일합니다.

 영원한 광복군 광복군 장교로서 1945년 국내 진공작전을 위해 중국 시안에서 미국 정보기관(OSS) 특수 훈련을 받던 당시의 장준하 선생(오른쪽)과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가운데), 노능서 선생
ⓒ 자료사진

 


맥아더 사령부(GHQ)직원으로서 판문점 휴전 회담에 참여하게 하였고, 일본 망명, 문필 활동을 통해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을 지원했던 정경모 선생은 지난 2009년 8월 21일 <한겨레>[길을찾아서] '광복군 장준하 - 일본군 박정희' 제목 글에서 장준하 선생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광복군 장교' 장준하, '황군장교' 박정희와 피할 수 없는 일전

20대의 학생 장준하가 일본신학대학 재학 중 조선인 '학도지원병'으로 징집되어 평양 제42부대로 배속된 것은 41년 1월이었으며, 명령에 따라 부대와 더불어 중국을 향하여 고향(평북 삭주)을 떠나면서 남긴 말은 "나는 나의 할 바를 다하고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것이었는데, 그가 말한 '나의 할 바'라는 것은 일본군을 탈출하여 임시정부가 있는 충칭으로 가겠다는 뜻이었소이다. 

떠나면서 그가 부인 김희숙 여사에게 남긴 편지에는 '로마서 9장 3절'의 말씀이 적혀 있었는데, 그것은 사도 바울의 말 "내가 형제와 골육을 위하는 일이라면(즉, 사랑하는 민족을 위하는 일이라면) 비록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로부터 버림을 받는다 하여도 이는 원하는 바이라"는 구절이었는바, 만일 중국에서 보낸 서신 말미에 이 구절이 적혀 있을 때는 일본군에서 탈출했다는 뜻으로 알라고 귀띔을 해두었다는 것이외다.  

드디어 부인에게 뜻을 전하고서 서주의 일본군 쓰카다 부대 병영을 탈출한 것이 45년 1월 31일이었으며, 거기서부터 약 3개월 동안 걸어서 2400㎞의 험산준령을 넘어 임시정부가 있는 충칭에 도착해 김구 산하의 광복군과 합류하게 된 것이 그해 4월이었다는 것이외다.

한 마디로 장준하 선생은 '광복군'입니다. 그런데 장준하 선생이 박정희를 향해 "일제가 그냥 계속됐다면 너는 만주군 장교로서 독립투사들에 대한 살육을 계속했을 것이 아닌가"라고 일갈합니다. 알듯이 박정희는 만주군 장교 출신 '황군장교'였습니다. 물론 박정희가 1961년 5월 16일 군사반란을 일으켰을 때는 <사상계> 권두언에서 군사반란을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후 박정희 독재가 시작되면서 광복군 장교 장준하와 황군장교 박정희는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기 점점 힘들었습니다. 장준하 선생은 "자유는 감옥에서 알을 깨고 나온다", "민권을 찾고 싶거든 감옥으로 가라!",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군 장교가 되어 우리 독립 광복군의 총부리를 겨누었다", "우리나라 청년들을 남베트남에 팔아먹고 피를 판 돈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있다"며 박정희에게 끝없이 저항했습니다.

 만주군 장교 출신 박정희, 광복군 장교 출신 장준하 선생과 같은 하늘 아래 살기 힘들었을 것이다
ⓒ 자료사진

 


박정희는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매진된 <사상계>를 반품하거나 한 해에 두 번씩이나 세무사찰을 하는 방식으로 <사상계>를 압박했습니다. 장 선생은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옥중당선, 72년 10월 유신쿠데타를 일어나자 강하게 저항했고, 74년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15년형을 선고받았다가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되는 등 반유신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다가 1975년 8월 17일 의문의 죽임을 당했습니다.

장 선생이 숨진 뒤 명동성당에서 치러진 영결미사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장준하의 죽음은 별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더 새로운 빛이 되어 앞길을 밝혀주기 위해 잠시 숨은 것뿐"이라고 했습니다. 장준하 선생이 타살이라면 과연 누가 죽였을까요? 진실은 잠시 덮을 수 있지만, 사라지지 않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장준하 선생 사인 규명에 나서야 합니다. 박 대통령은 그 동안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장준하 선생 부인인 김희숙 여사를 찾았습니다. 첫 방문은 한나라당 예비 후보때인 지난 2007년 7월 11일입니다. 당시 박 후보는 김 여사에게 "돌아가신 아버지와 정치적으로는 반대 입장이셨고 방법은 달랐지만 두 분 모두 항상 개인보다는 국가와 민족을 먼저 생각하셨다"며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고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만드는 게 민주화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의 아픔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2007.07.11<한겨레> '과거와 화해' 시동건 박근혜

박근혜 대통령, 장준하 선생 진실 규명 나서야...

특히 그는 이 자리에서 김희옥 여사가 "과거는 과거지만 다시는 우는 사람이 없도록 해달라", "딸처럼 여길테니 정치하다 하소연할 데가 없으면 언제든 찾아오라"고 하자 "그러겠다"고 답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습니다. 지난 해 8월 장준하 선생 두개골에 6cm정도 함몰 부위가 발견 돼, '타살 의혹'을 밝히기 위한 진상 규명을 촉구했지만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오히려 8월 17일 "진상조사위원회에서 현장, 목격자에 대한 조사가 그동안 이뤄지지 않았나"며 "그런 기록들이 있는 것을 봤다"고 말했습니다. 박 후보가 봤다는 조사기록은 지난 2004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장 선생 타살 의혹에 대해 '진상규명 불능'이라고 내린 결론을 두고 말한 것으로 민주당은 "무책임"하다고 비판했습니다.

이제는 예비후보와 대통령 후보가 아니라 대통령입니다. 특히 국민이 직접 뽑은 민주공화국 대통령입니다. 민주공화국 대통령이라면, 권위주의 정권이자, 독재정권하에서 비판세력 핵심이었던 장준하 선생 사인이 '타살'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전문가 의견이 나왔다면 당연히 진실규명이 나서야 합니다. 그게 민주공화국 대통령으로서 의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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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를 'MB씨'로 만든 김재철 '아듀' | 정치기사 2013-03-27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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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26일 MBC 최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가 임시이사회를 열어 찬성 5, 반대 4로 김재철 사장에 대한 해임안을 가결했다. 이 숫자를 얻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통을 당했는지 모른다.

애초 김 전 사장은 '공영방송' MBC 사장에 오르면 안 되는 인물이었다. 김 전 사장은 지난 2010년 2월 26일 방문진 이사회에서 MBC 사장으로 뽑혔다. 당시 그와 사장직을 두고 겨룬 이들은 구영회 MBC 미술센터 사장, 박명규 전 MBC 아카데미 사장이었다.

당시 방문진 이사진 중 정상모, 한상혁, 고진 이사 등 야당 추천 이사들은 기권해, 김우룡 이사장 등 6명의 여당 이사들만로 이루진 '반쪽짜리' 사장 투표였다. 야당 추천 이사들은 투표에 기권한 이유를 "후보 중 적격자가 없다"라고 밝혔다. 특히 김재철 사장은 울산 MBC 사장(2005 ~ 2008), 청주 MBC 사장(2008 ~2010)를 지내면서 '친한나라 성향'을 보여왔고, 무엇보다 이명박 대통령과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노조와 시민단체들이 강하게 반발했다. 물론 김재철은 "MBC의 공정성과 독립성을 지키겠다"며 노조와 시민단체 비판을 일축했다.

 

 

                           
김재철 MBC사장이 26일 오전 자신에 대한 해임안이 논의될 방문진 이사회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 여의도 방송문화진흥회 사무실에 도착하고 있다.

하지만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김 사장은 지역 MBC 사장과 자회사 사장을 내정하면서 지역 MBC 광역화를 밀어붙였다. 지역MBC 광역화 첫 작품이 진주MBC와 창원MBC를 통합해 MBC경남으로 만든 것이다. 진주 시민인 난 아직도 이 일에 분노하고 있다. 졸지에 진주 시민들은 오랫동안 함께했던 진주MBC 이름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큰집에서 쪼인트 까인 김재철...큰집 눈치

김재철 사장 하면 생각나는 일 중 가장 씁쓸한 장면은 지난 2010년 <신동아> 4월호에 실린 기사다. 김우룡 당시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이 김재철 MBC 사장이 "큰집에 가서 조인트를 까이"고 "좌파 척결을 위한 '청소부'" 역할을 했다고 말한 것이다. '큰집'은 청와대를 비유한 말이니, 큰집에 갔다가 혼쭐이 난 김 사장은 큰집 눈치만 봤다. 당시 김 사장은 김우룡 이사장을 상대로 법적 책임 운운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낙하산 사장 반대를 외쳤던 MBC노조는 4월 5일부터 39일간 총파업을 단행했다. 황희만 특임본부장을 부사장으로 승진 발령한게 계기였다. 노조는 "MBC를 지키겠습니다"라며 MBC 살리게 나섰지만, MBC 출신인 김 사장은 MBC와 언론자유보다는 이명박 정권이 눈에가시처럼 여긴 시사프로그램을 폐지하거나 제작진을 탄압했다.

김재철 MBC는 2010년 6월 4일 인사위원회를 열고, 파업을 주도한 이근행 노조위원장과 사내 자유게시판에 김재철 MBC 사장을 원색적으로 비판한 시사교양국 오행운 PD 등 2명을 해고했다. 또 연보흠 노조 홍보국장 등 13명은 정직 1~3개월, 다른 노조집행부 7명은 감봉 1~3개월의 징계를 각각 내렸으며 입사 동기별 성명서를 주도한 비조합원 이채훈 PD에 대해서는 정직 1개월의 징계를 결정했다. 이렇게 김재철 사장은 '국민의 방송' MBC를 'MB 방송'으로 만들어 닻을 올렸다.

그런데 노조탄압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정권 비판과 자신에 대한 진실을 전하거나 비판하는 노조원들을 줄줄이 잘랐다. 전국언론노동조합 3월 5일자 자료에 따르면, 김재철 사장 취임 이후 해고 10명, 정직 84명 등 총 233명이 징계를 받았으니 '노조대학살'로 봐도 무방하다.

노조 파업하자, 정치인 얼굴 새긴 광고내 '정치파업'으로 매도

이같은 노조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MBC를 살리기 위해 노조원들은 투쟁했다. 지난 2012년 1월부터 7월까지 무려 170일 동안 "'MB씨'을 국민 MBC로'"를 외쳤다.  하지만 'MBC'는 <경향신문> 등 일부 일간지와 무가지에 '상습파업, 정치파업의 고리를 끊겠습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문재인 민주통합당 의원 등 야당 인사 21명 사진까지 포함된 광고를 냈다. 광고 문구는 '이래도 정치파업이 아닌가', '그들은 왜 노조 집회에 왔을까', 'MBC 노조 집회에 참석한 정치인들, 이들은 모두 야당소속'이라며 노조 파업을 정치파업으로 매도했다.

노조는 트위터를 통해 "오늘 광고를 '자발적 탈의 광고'로 명명한다"며 "김재철 사장과 그 일당의 광고는 100만 서명운동의 10배쯤 효과가 있을 것 같다, 자기들의 수준, 실력, 철학을 스스로 시민에게 까발린 것"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sida*****도 "중립을 지키고 공정 보도를 해야 할 공영 방송 MBC 김재철 사장의 광고 찌라시를 보니 야당 의원들 비난… 이게 제정신으로 광고할 수 있는 건가요?"라며 질타했었다.

김재철의 'MB씨'는 노조만 탄압한 것이 아니라 이명박 정부에 비판적인 트윗을 했거나, 말을 한 프로그램 진행자와 출연자들을 하나둘씩 내쳤다.  MBC라디오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를 8년 동안 진행했던 개그우먼 김미화씨를 지난 2011년 4월 그만뒀다. 당시 김미화씨는 노조와 인터뷰에서 김 사장이 7층 엘리베이터에서 1층 복도까지 김미화를 쫓아가며 프로그램을 떠나도록 요구했다고 폭로했었다. 그리고 일명 '김여진 법'을 만들어 <손석희의 시선집중> 출연을 금지시켰다.

<PD수첩> 무죄판결...오히려 사과

 
 지난 2011년 9월 6일 <한겨레> 1면 광고에 실린 mbc의 피디수첩 사과문


 

지난 2010년 8월 17일 <PD수첩>은 '4대강 수심 6m의 비밀'을 방영하려고 예고까지 내보냈다.국토부가 방송금지가처분 신청을 내짔지만 법원이 기각했다. 하지만 김재철 사장은 방송보류 결정을 내렸다. 이같은 일은 <PD수첩> 탄생 이후 20년 동안 처음있는 일이었다. 김 사장은 청와대 '끄나플'이라는 모욕을 당했다. 누리꾼들은 '4대강 수심6m의 비밀' 방송을 위한 100만명 서명운동까지 벌였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1년 후인 2011년 9월 대법원 2부(주심 이상훈 대법관)가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성을 왜곡·과장 보도해 정운천 전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MBC <피디수첩>의 조능희 CP 등 제작진 5명에 대해 무죄를 확정했다. 그럼 이명박 정부가 무리한 기소였다고 사과를해야 했지만 오히려  MBC는 메인 뉴스인 <뉴스데스크>와 중앙일간지 광고를 통해 사과했다.

당시 MBC는 대법원이 "다우너 소를 광우병으로 지칭한 부분 △미국 여성 아레사 빈슨이 인간 광우병으로 사망한 것처럼 언급한 부분 △한국인이 인간광우병에 걸릴 확률이 94퍼센트에 이른다고 지적한 부분 등 3가지 내용을 '허위'라고 결론 내렸다"는 점을 들면서 국민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면서 "PD수첩이 한미 쇠고기 협상 절차를 점검하고 문제점을 지적하려한 것은 정당한 취재 행위였다"면서도 "기획 의도가 정당하다 해도 프로그램을 지탱하는 핵심 쟁점들이 허위 사실이었다면 그 프로그램은 공정성과 객관성은 물론 정당성도 상실하게 된다"고 판단했다. 무죄판결을 받은 프로그램을 두고 사과 방송과 일간지에 광고를 낸 것은 김재철 MB 씨가 처음일 것이다.

시사프로그램 폐지, <뉴스데스크> 시청률은 날개 없이 추락

김재철 MB씨는 MB정권이 싫어하는 것 중 하나인 '시사프로그램'을 없애거나 제작진을 바꿔버렸다. 그가 사장으로 있으면서 없앤 것은 <후 플러스>와<김혜수의 W>다. 이들 폐지는 시청률 하락 등을 꼽았다. 또 <시사매거진 2580>과 <PD수첩> 제작진을 다른 부서로 발령하거나 회사 명예를 실추시켰다며 중징계했다.

하지만 MBC 메인뉴스인 <뉴스데스크>는 KBS1 <뉴스9>와 아예 경쟁이 되지 않았고, 민영방송인 SBS <8시뉴스>보다 시청률이 낮았다. 결국 뉴스 시간대를 8시로 옮기는 수모를 당했다. 하지만 시청률은 3월 22일 TNmS 기준 8.5%를 기록해 같은 조사기관 SBS <8시뉴스>의 10.1%보다 낮았다. 무엇보다 지난 대선 기간 중 전국언론노조가 누리꾼 상대로 '최악의 대선 보도'를 선정하는 공모를 총 10차례 진행한 결과 MBC는 7차례나 선정되는 '최악보도 면류관'을 머리에 썼다. 이것보다 MBC의 명예를 더 실추시킨 것이 어디 있나.

한 때 정치에 기웃거렸다는 소문....

김재철 사장 고향인 경남 사천은 내 고형이기도 하다. 아직도 어머니와 형님 둘, 막내동생이 산다.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간다. 지난 2011년 8월 김 사장은 '사표 쇼'를 낸 적이 있었다. 그때 고향은 "김재철이가 명년('내년' 경상도 사투리, 2012년) 총선에 나온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추석을 앞둔 시점이라 소문은 '사실'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당시 MBC노조도 김재철 사장이 주민등록법을 어기고 아직도 주소지가 서울 서초구 아닌 경남 사천 용현면 소재 한 아파트라고 주장했었다. 지역구 하동남해와 통합되기 전이고, 경남 사천에 강기갑 당시 의원을 대적할 만한 인물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라고 고향 사람들은 받아들였다. 하지만 결과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지연을 따지는 것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고향 사람이 MBC 사장쯤 되면 괜히 어깨에 힘이 조금 들어가겠지만, 참아 김재철 사장이 우리 고향 사람이라고 자랑하지 못했다. 너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정권을 위해 충성하더니 '퇴출'당했다. 권력 무상을 느꼈을 것이다. 지금까지 김 사장이 걸어온 길을 보면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사과할 가능성은 낮지만 그는 갔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더 이상 김재철 같은 사람은 공영방송 사장이 되면 안 된다. MBC를 MB씨로 만든 것처럼, MBC를 '그네방송'으로 만들 사장이 낙하산 타고 오면 안 된다. MBC를 MBC로 만들 사장이 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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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는 철새에 대해.. 
wkdf qhrh rkqlsken 
멋집니다!! 
저도 윗분의견 공감. .. 
이 글 쓴 사람 지금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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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19 개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