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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성경대로 | 기본 카테고리 2006-03-25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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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김성수
합동신학대학원출판부 | 2001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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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성경대로 해석하는 시대가 아니다. 세속의 사상과 이념, 철학, 자기 신념, 상황에 근거한 성경 해석의 시대이다. 성경이 인간의 지식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한 책을 만나기는 매우 어렵다.

그 중에 김성수 교수의 누가복음 강해 설교집은 자신의 지적 한계를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내려놓고 강해하였다.

강해설교를 읽어가면 알겠지만 그는 누구의 해석, 철학, 사상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오로지 성경을 성경대로 해석할 뿐이다. 중심에는 하나님이 자리잡고 있다. 지적 오만함을 보여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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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눈 높이 | 기본 카테고리 2006-03-11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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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하나님의 관점

토미 테니 저/이상준 역
토기장이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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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부터 1989년 9월까지 하루에 3번 씩 300고지를 올랐다. 지겨웠다. 힘들었다. 더운 여름 날 쏟아지는 땀을 친구 삼아 오르는 길은 고역이었다. 그 고역의 땀을 지나면 정상이다. 정상에 오른 감격도 일년에 한 번 두 번이지, 하루의 시간 중 3번을 의무라는 올무에 매여 살다보면 고역일 수밖에. 지금은 산을 오르는 고역에서는 벗어났지만 인생살이라는 고역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지극히 인간적인 오름 말이다. 인본주의 관점의 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하나님의 사람’의 인생살이다.
[하나님의 관점]을 읽어가면서 18년 전의 하루 3번의 땀의 고역이 새록새록 반추되었다. 의무라는 올무가 정상을 만끽하는 여유를 누리지 못하게 했던 기억들. 이제 하늘의 하나님, 가장 높으신 그 분을 만났다고 말하지만 아직 고역의 산을 오르는 일은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시지프의 신화가 나의 믿음이 아닐진대. 왜? 그렇게도 무거운 돌을 끊임없이 산 정상에 올려놓으려고 하는가? 이것 정도는 내가 할 수 있다. 는 나 자신에 대한 믿음 때문이 아닐까? 하나님께 명함 내밀 자격증을 따기 위함이 아닌가? 지독한 인본주의의 올무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 이름 하는 나 자신을 보았다. 시지프의 신화와 18년 전의 산에 오르는 인본주의 적 억센 삶을 지금도 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 존귀하신 하나님,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믿고, 신뢰한다지만 그 옛날 의무라는 고역의 땀만으로 산에 올랐던 나 자신처럼, 아직도 세상, 사상, 이념, 세상의 가치관으로 나를 보고, 환경을 본다. 세속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그렇다는 말이다. 이것 정도는 할 수 있다는 자신에 대한 믿음을 거두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 나는 할 수 있다는 믿음이 나를 고역의 굴레에 함몰되게 하는데 말이다. ‘너를 부정하라’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 굴복하지 못하는, 세속에 매여 있는 나의 것에 대한 집착을, 그 옛날 롯의 아내처럼 말이다.
자신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 이는 자학이 아니다. 굴종이 아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너를 부정하라, 너에 대한 집착을 버려라. 나에게 와라. 말씀하신다. 나를 예배하라 말씀하신다. 인본주의 적 절망 그것은 하나님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며, 그 분의 영광을 말하는 것이다. 내 중심에서 하나님의 중심 자리를 이동했다는 말이다. 이 위치 이동은 세속의 신분과 직분, 승진이 아니다. 세속, 사단의 아들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자리를 이동했다는 말이다. 나는 이를 겸손이라 부르고 싶다. 원래 겸손이란 할 수 있는 일을 다른 사람의 이해를 위하여 자리 양보가 아니다. 겸손은 오로지 하나님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만 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그 분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다.
이 무릎 꿇음은 나의 신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을 책임져주시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은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다는 절대적 기준이 된다. 하나님의 자녀만이 예배할 수 있다. 예배자는 착한 사람, 선한 사람이 드리는 일반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 무릎 꿇은 자, 하나님께서 너는 내 것이라 명함 받은 자가 드리는 거룩한 행위이다.
“나는 주님을 기다리겠습니다.” 빠르게 변한다. 오늘이 다르고 내일이 다르다. 교회도 세속의 빠름에 적응하기 바쁘다. 그 옛날 교회가 세속의 문화의 영역까지 번접하여 그들을 이끌었던 향수에 젖었다. 세속을 선도해야 한다고 아우성이다. 이 아우성에는 하나님이 없다. 하나님이 없는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가? 답은 뻔하다. 우리는 아니라고 하지만 하나님 없는 아우성과 변화의 외침은 이 시대 교회의 화두가 되었다. 하나님 기다리겠습니다. 저희가 기다리겠습니다. 이 고백을 쉽게 할 수 있지 않다.
내가 한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나의 의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외침을 우리는 아직까지도 하고 있다. 하나님은 말씀하실 것이다. 너의 모든 것을 다 거두리라. 인본주의의 모든 것을 거두리라. 그럼 네가 산다고.
예배를 통하여 그 분께 나아가고, 나의 부정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나의 신분의 영광을 경험하고, 오로지 나만을 기다리시는 그 분을 믿고, 오직 그 분의 영광을 위한 거룩한 삶을 원하시는 그 분을 위한 삶이 이제 필요할 때이다.
예배 자는 진정 영광스러운 자이며, 가장 복된 자이다. 예배 자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이며 가장 영광된 자이다. 그 영광을 우리는 알기에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예배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할 수 있다. 하나님의 관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결국 그 분의 은혜임을 알자, 그리고 하나님 만을 예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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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공부 좀 하자! | 나의 리뷰 2006-03-10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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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의식과 전쟁

박대재 저
책세상 | 2003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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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과 전쟁-고대 국가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
삼국시대 율령반포를 한 왕이 누구인지 신나게 외웠던 기억이 난다. 가장 먼저 고대국가가 된 나라가 백제로 알고 있다. 근초고왕. 근구수왕. 이들이 생각난다.
국가란 강제설과 기능설. 신나게 외웠다. 지금은 그 의미가 가물가물하지만. 중앙집권적이다. 그런데 요즘은 달리보아야 한다는 말이 나돌고 있다나. 고대국가, 근세 그리고 근대국가를 다르게 말이다. 학자들은 역시 다르기는 다른 모양이다.

분권국가. 새로운 패러다임의 분권국가는 군장사회와 같은 국가의 기원적 단계가 아니라 중앙집권 국가의 대안으로 제시된 본격적인 고대 국가의 모델이다. 단일한 구조가 아니라 중앙과 지방세력, 정부와 집단 사이의 상호관계를 다양한 각도에서 역동적으로 파악.

사실 나는 이런 구분에 기분 나쁘다. 요즘도 중앙과 지방이다. 사실 서울은 중앙이고 여기 진주는 지방인가? 서울도 지역이고 진주도 지역이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했을지라도 앞으로는 제발 그러지 말자. 조금은 엉뚱하게 전개되고 있지만.

고대국가는 연합과 독점, 의식과 전쟁, 이데올로기와 물질체계, 도덕적 권위와 강제적 권력의 관계와 같이 보이지만 실상은 공존하고 조화되어 균형을 유지하는 상대 요소들을의 복합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쉽게 말하면 다양성이라는 말 아닌가? 이원론, 이분법의 틀에 끼어 넣어 생각하지 말자는 것이다.

아리스는 국가의 정체를 군주제 귀족제 국인제로 구분했다고 한다. 그럼 요즘은 군주가 지배하는 국가체제도 아니다. 귀족만의 나라도 아니다. 국인제 무엇이라 말할까? 인민 중심의 국가체제가 아닐까? 역사공부 좀 더 하자. 갈수록 어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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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공부 좀 하자! | 기본 카테고리 2006-03-10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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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의식과 전쟁

박대재 저
책세상 | 2003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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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과 전쟁-고대 국가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
삼국시대 율령반포를 한 왕이 누구인지 신나게 외웠던 기억이 난다. 가장 먼저 고대국가가 된 나라가 백제로 알고 있다. 근초고왕. 근구수왕. 이들이 생각난다.
국가란 강제설과 기능설. 신나게 외웠다. 지금은 그 의미가 가물가물하지만. 중앙집권적이다. 그런데 요즘은 달리보아야 한다는 말이 나돌고 있다나. 고대국가, 근세 그리고 근대국가를 다르게 말이다. 학자들은 역시 다르기는 다른 모양이다.

분권국가. 새로운 패러다임의 분권국가는 군장사회와 같은 국가의 기원적 단계가 아니라 중앙집권 국가의 대안으로 제시된 본격적인 고대 국가의 모델이다. 단일한 구조가 아니라 중앙과 지방세력, 정부와 집단 사이의 상호관계를 다양한 각도에서 역동적으로 파악.

사실 나는 이런 구분에 기분 나쁘다. 요즘도 중앙과 지방이다. 사실 서울은 중앙이고 여기 진주는 지방인가? 서울도 지역이고 진주도 지역이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했을지라도 앞으로는 제발 그러지 말자. 조금은 엉뚱하게 전개되고 있지만.

고대국가는 연합과 독점, 의식과 전쟁, 이데올로기와 물질체계, 도덕적 권위와 강제적 권력의 관계와 같이 보이지만 실상은 공존하고 조화되어 균형을 유지하는 상대 요소들을의 복합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쉽게 말하면 다양성이라는 말 아닌가? 이원론, 이분법의 틀에 끼어 넣어 생각하지 말자는 것이다.

아리스는 국가의 정체를 군주제 귀족제 국인제로 구분했다고 한다. 그럼 요즘은 군주가 지배하는 국가체제도 아니다. 귀족만의 나라도 아니다. 국인제 무엇이라 말할까? 인민 중심의 국가체제가 아닐까? 역사공부 좀 더 하자. 갈수록 어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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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쉽게 쓰자 | 기본 카테고리 2006-03-10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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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노동소설, 혁명의 요람인가 예술의 무덤인가

유기환 저
책세상 | 2003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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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소설, 혁명의 요람인가 예술의 무덤인가] 아직 우리의 노동 소설은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하지 못하였을까? 사실 나 자신도 우리 노동소설을 접해 본 적이 별로 없다. 그래도 유기환은 좀 너무 했다. 왜 꼭 세계적 보편성만 중요한가? 우리의 노동현실을 담은 소설이 세계 보편성을 획득하지 못하였을지라도. 그럼 제르미날, 어머니 , 강철군화, 황혼가 공간성, 시간성, 예술성을 가졌다고 할 수 있지만 어쩐 너무 서구적 시각 아닌가?

그래 인정하자. 사실 책세상 문고를 읽어가면서 항상 말하였지만 내가 직접 접하지 않고 남이 평가한 내용을 가지고 평가한다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아마 영화부분이 그럴 것이다. 오늘 이 책 역시 마찬가지이다. 강철군화, 황혼, 제르미날을 직접 접하지 못한 연고로 유기환의 평가를 통하여 평가한 것이 나의 추악한 한계임을 말한다.

제르미날과 황혼은 모두 노동계급과 부르주아 계급의 사회역사적 상황을 가리키는 주요한 상징으로 낮과 밤을 사용하고 있다 말한다. 낮은 의식이 깨어있다. 밤은 인간 의식이 잠들어 있다는 말인가? 과연 이 땅의 노동자들에게 의식은 깨어 있는가?

요즘 보도 중 항공사 기장들의 파업 기사가 있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그들이 노동자인가? 얼마의 임금을 받는 자들이 노동자인가? 어쩌면 자본보다 더 나은 삶을 영위하는 노동자가 있다면 그를 노동자라 할 수 있는가? [황혼]에서 황혼에 선 자신의 자기 자신을 보는 장면과 오늘의 일부 자본보다 더 나은 노동은 무엇이라 말할 수 있는가?

그래 어머니, 황혼, 강철군화 다 좋다. 그 책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이것이 중요할 수 있다. 요람일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일 수 있다. 자본은 더 집요하게 노동을 공격하고 있다. 하지만 더 문제는 노동이 권력화되어 자기보다 약한 노동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난해한 접근은 나도 어렵지만 과연 몇 명의 노동이 이 책을 읽고 고개로 동의할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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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기본 카테고리 2006-03-09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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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노근리, 그 해 여름

김정희 저/강전희 그림
사계절 | 2005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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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윤동주는 말했다. 왜 그는 이렇게 말했을까? ‘슬퍼하는 자’는 자기의 근본을 잃어본 자이다. 절망의 끝을 경험한 자이다. 근본을 잃어보았기에 다른 이를 생각할 수 있고, 절망의 끝을 경험하였기에 부활의 영광을 경험한 자이다. 생명이 무엇인지 알며, 생명의 존귀를 아는 자이다. 슬퍼하는 자가 되게 하는 자는 모르지만 슬퍼하는 자는 알기에 복이 있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은실은 선생님이 우리를 구해줄 것이라는 미군에게 자기의 모든 것을 잃었다. 엄마, 동생, 언니, 현수 오빠. 더 이상 그가 상실할 것은 없다. 미군이 빼앗아 갈 어떤 것도 없다. 할머니, 아버지가 살아남았기에, 자기의 육적 생명이 있다는 것이 삶의 위안이 될 수 있지만 은실은 발견하지 못한다. 할머니의 핏줄에 대한 열망은 생명에 대한 경외가 아니라 은실에게는 생명의 짐일 뿐이다. 핏줄에 매인 생명 사랑은 참 생명의 존귀함을 깨닫지 못하게 할 뿐이다.

오히려 은실은 노근리 굴속에서 아카시아로 육화(肉化)한 구더기를 통하여 생명을 알게 된다. 구더기가 유월의 꽃인 아카시아가 되었다. 어머니가 아카시아로 변한 것이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가 경험할 수 있는 숭고함일까? 은실은 잃어버린 자가 되었을 때, 무의식이 이성을 지배하게 됨으로써 그는 구더기의 더러움이 향기 나는 유월의 꽃의 육화를 경험하게 하였다. 죽음의 동무인 구더기는 유월의 꽃인 아카시아에게 생명을 내어주었다. 죽임의 잔치가 벌어졌던 곳에 생명의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미군은 살덩어리는 죽일 수 있었지만 구더기에서 아카시아로 변화는 생명의 경이까지는 범하지 못하였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다.’ 어머니의 몸은 죽음의 상징은 구더기로 부패되어 갔지만 은실은 어머니를 유월의 생명인 아카시아로 승화시켰다. 어머니는 죽지 않았고 자기에게 살아남았다.

구더기의 육화는 사람이 가장 잔인할 때, 잔인함으로 인간의 이성이 상실될 때 일어났다. 이성이 지배하지 못할 때,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엄한 가치를 존중받지 못할 때 일어났다. 육화의 존엄함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인간의 이성은 가장 존귀한 것 같지만 이토록 그 잔인함을 노래할 수 있다. 이성의 자신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할 때 이미 이성은 이성이 아니었다. 아니다! 인간의 이성이 숭고할 것 같지만 가장 잔인함을 드러내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노근리의 그 해 여름은 보여주었다. 이성은 정말 잔인함의 도구인가? 노근리 굴속의 그해 여름은 정답이라고 말해주고 있다.

이성의 숭고함을 그렇게 존중하고픈 마음이 없다. 노근리의 살육은 이성을 놓은 인간이 행한 잔인함이 아니라 이성의 지배를 받았던 인간이 행한 완악한 행위 곧 전쟁의 자기 증명이다.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쉽게 결론 내릴 사안이 아니다. 인간이기에 그렇게 한 것이다. 노근리의 굴속에 일어났던 은실의 경험이 1950년 유월의 삶이 얼마나 잔인하였는지, 경험한 자의 생명의 경외를 우리는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다. 아니 이야기 거리로 생각하고 있다. 이념의 장난, 사상의 장난, 친북과 친미의 장난의 도구로 말이다.

노근리는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은실의 경험은 우리에게 무엇을 던져주는가? 우리는 아직도 평화라는 이름으로 전쟁을 하고 있다. 인간은 과연 평화를 만들 수 있는 자격과 능력을 가지고 있을까? 전쟁의 원인자들은 어느 누구도 평화를 해치는 자로 자기를 드러내지 않았다. 우리도 그들과 동고동락하는 길목에 이미 들어섰다. 죽임의 잔치인 전쟁을 평화라는 이름으로 속이는 전쟁 원인자들에게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지지를 보내고, 동맹이라는 이름을 지지를 보낸다.

노근리의 굴속에 피어났던 아카시아의 원인이 무엇인지 모르는 자는 진정 ‘슬퍼하는 자가’ 아니다. 그렇기에 ‘복 있는 자’가 될 수 없다. 은실은 모든 것을 잃었던 자였지만 그는 아카시아의 생명을 보았다. 그는 죽임의 잔치가 자기 앞에 일어나고 있을 때 절망했지만 그는 생명을 경험하였다. 노근리의 그 해 여름은 은실에게 가장 숭고한 경험의 해였다. 우리가 그것을 우리의 시간에, 우리의 의식 속에서 경험하지 못할 뿐, 이 무경험이 또 다른 죽임의 잔치 우리 자신을 내어주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그러기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은실이 모든 것을 갖추었다고 말하는 우리보다 ‘복 있는 자’이다. 진정 ‘슬퍼하는 자는 복 있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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