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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 耽讀글방 2007-10-30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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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그리스도의 십자가

존 스토트 저
IVP | 2000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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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십자가의 섬광을 언뜻언뜻 포착하고 했으며-이것은 반드시 예수가 달린 십자가상이었던 것은 아니다. 아마, 전신주 위에 우연히 엇갈려 못질된 두 개의 나무 토막이었으리라-그럴 때면 나의 심장이 갑자가 정지되곤 했다. 어떤 본능적이고 직관적인 방식으로 나는, 우리의 좋은 대의가 아무리 존경할만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 대의보다 더욱 중요하고. 더욱 우리를 격앙시키고, 더욱 격정적인 어떤 것이 문제가 되고 있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강박적인 관심이었음을 알고 있다. 나는 내가 직접 나뭇가지를 십자가 모양으로 고정시키기도 하고 멍청하게 앉아서 종이 위에 십자가를 낙서하기도 했다. 우리 가정에서는 보잘것 없는 것으로 여겨지던 이 상징이 그러면서 또한 소망과 갈망의 초점이었다.

 

 이것을 기억하노라면 나 자신의 실패에 대한 의식이 납덩이처럼 나를 누른다. 나는 그 십자가를 내 심장 위에 입고 다녔어야 했다.그 귀한 상징, 그것을 지니고 다니면서 결코 손아귀에서 빠앗기지 말아야 한다. 내가 넘어 지더라도, 그것만은 높이 쳐들고 있었어야 했다. 그것이 나의 숭배자, 나의 제복, 나의 언어, 나의 생명이 되었어야 했다. 그렇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나는 아무 변명도 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내가 그것을 몰랐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처음부터 그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것을 외면했던 것이다.  56-57쪽

 

교회가 십자가를 상실했다.

돈과 권력, 인본주의가 교회를 지배하고 있다.

십자가 네온은 화려하지만

껍데기만 화려할 뿐이다.

죽은 십자가를 고이 모시는 교회다.

십자가 없는 교회가 무슨 생명력을 발휘하겠는가?

[출처]그리스도의 십자가 56-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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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참된 세계다 | 耽讀글방 2007-10-30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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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니체

뤼디거 자프란스키 저/오윤희 역
문예출판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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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참된 세계다. 음악은 또한 괴물이다, 우리는 음악을 들으면서 존재를 확인한다.바로 이런 방식으로 니체는 음악을 경험했다. 음악은 그에게 전부였다. 음악은 계속되어야 한다. 하지만 음악은 멈추었으며, 사람들은 음악이 없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된다.

 

음악으로 표현할 수 없는 모든 것에 대하 나는 구역질과 혐오감을 느끼네. 만하임 공연을 다녀온 후, 나는 밤새도록 이상스러울 정도로 일상적 현실에 대한 고양된 전율을 느끼네. 왜냐하면 현실적인 모든 것이 더 이상 사실로 느껴지지 않고 허깨비처럼 보이기 때문이네.

 

사람들이 음악이 없는 삶 속으로 다시 들어간다는 것은 사실이 바로 니체가 끊임없이 고민한 점이었다. 음악이 끝난 후에도 삶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러한 삶을 견딜 수 있을까? 음악이 없는 삶은 잘못될 수밖에 없다고 그는 주장한다.

 

음악이 어렵다. 음악을 잘하지 못한다. 음악을 알지 못한다. 음악에 조예가 없다. 니체 말을 듣고 보니 내가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지 의심한다.

[출처]<니체> 문예출판사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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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키스트 | 정치 2007-10-30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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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동아시아 아나키즘, 그 반역의 역사

조세현
책세상 | 2001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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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


 


한번쯤 이들의 사상을 동경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무정부주의자'로 불리워진 이들의 삶의 족적을 가기를 원했다. 군부독재가 인간 본성과 양심을 억압한 것을 경험했던 대한민국을 살아간 일부는 저항정신이라는 명목으로 '아나키스트'를 동경했고 그들의 사상을 체화(體化)하는데 무던히도 노력했다.


 


하지만 우리는 아니키즘, 아나키스트의 개념 정립을 명확히 내리지 못하고 있다. 너무나 단순히 그들을 그냥 무정부주의, 무정부주의자로 결론지었고, 오늘 역시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아직도 국가와 정부가 자신을 옥죄고 있는 것을 거부하고 그들의 삶을 따라가고 싶은가? 그렇다면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029' 조세현의 <동아시아 아나키즘, 그 반역의 역사>을 만나보시라. 아나키즘과 아나키스트에 대한 이해가 우리에게 얼마나 빈약한지 채찍질하고 있다.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는 "아무도 아나키즘이란 용어를 독점할 수 없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이는 아나키즘을 어느 누구도 명확히 정의내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조세현은 아나키스트와 아나키즘을 서양의 시각이 아니라 동아시아 시각에서 보았다. 그는 동아시아의 아나키즘을 쓰게 된 동기를 이렇게 말한다.


 


"동아시아 아나키스트의 극적인 삶을 알아보고 싶은 충동 때문이다. '나의 양심은 나의 것이고, 나의 정의는 나의 것이고, 나의 자유는 최고의 자유'라 선언했던 역설의 명수 푸르동(Pieer Joseph Proudho), 자유에 대한 열정을 안고 '파괴는 새로운 창조'라면서 바리케이트 위에서 반역을 꿈꾸었던 바쿠닌(Mikhail Bakunin), 민중은 '권력에 쉽게 굴복하지만 그렇다고 권력을 숭배하지는 않는다'며 민중을 무한히 신뢰하고 사랑했던 크로포트킨(Peter Kropotkin)등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서양 아나키스트들의 삶은 한결같이 매우 열정적이다. 이런 모습을 동아시아의 아나키스트에게서도 찾아 그것을 독자에게 소개하고 싶었다."(7쪽)


 


인간 자체를 지독히 사랑했다. 체제와 구조, 권력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자신을 지독히 사랑하면서 다른 이가 가는 그 길을 막지 않았고, 다른 이가 가진 신념을 존중했다. 그 신념이 인간 자체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면.


 


일본의 아니키스트 '고토투 슈스이'는 사회주의자에서 아나키스트로 변화한 사람이다. 자신의 확고한 신념을 다른 신념으로 바꾼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반대자들로부터 '변절'의 표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보통선거를 통하여 권력을 창출하려는 의회주의를 비판하고, 직접 행동하기를 원하다 '대역 사건'으로 죽임을 당했다. 고토쿠는 일본의 애국주의를 이렇게 비판했다.


 


"그는 애국심이란 국민의 허구와 미신의 결과이며, 애국주의란 야수의 천성이자 미신이요, 광란이자 허구이며, 호전적인 마음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군국주의와 애국주의를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관계로 보아 함께 부정했고, 세계주의에 기초해 민족과 조국을 초월한 보편적 인류애를 강조했다."(28쪽)


 


'단일민족' 개념이 철저한 우리에게 고투쿠 슈스이 발언은 이해할 수 없다. 국가주의 망령을 비판하는, 군부독재를 비판하는 이들도 애국심에는 관대하다. 국가주의가 가장 강력하게 드러나는 것은 '국기에 대한 맹세'다.


 


얼마 전 문구를 조금 고쳤지만 아직도 양심과 사상을 옭아매고 있다. 모든 행사에 국기에 대한 경례는 필수다. 거부하면 국가를 반역했다고까지 비판을 받아야 한다. 체제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더라도 양심과 종교에 따라 국기에 대한 맹세는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오히려 일본제국주의의 코투쿠 슈스이가 지금 우리보다 훨씬 앞서 간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신채호는 과연 아나키스트인가? 민족주의자인가? 이승만과 안창호의 외교론과 준비론에 동의할 수 없었던 민족주의자 신채호! 그가 어떻게 아나키스트가 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많은 논의와 논쟁이 있다. 아나키스트는 민족주의를 지향하지 않는다. 그럼, 신채호는?


 


한국의 아나키스트에게는 민족주의 냄새가 너무 많이 난다고 크럼은 비판했다. 그는 그 원인이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 있다고 했다. 한국의 아나키즘은 민족주의에서 출발했고, 민족주의 때문에 타락했다고 비판했다. 이는 서양의 아나키스트들에게는 매우 예외적이다. 국제주의를 옹호하는 그들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에 대하여 조세현은 말한다.


 


"근대민족주의는 영토와 국경을 확장하는 침략적인 제국주의로 나타나기도 하고, 타민족의 간섭을 반대하는 민족해방운동으로도 나타난다는 사실에 주목해서 민족주의가 무척 다의적인 개념이란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118쪽)


 


공산주의자가 민족주의자가 될 수 있다. 아나키스트도 민족주의자가 될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자도 민족주의자가 될 수 있다. 즉 민족주의는 일차적 이념이나 사상이 아니라 이차적인 개념일 수 있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002 <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에서 전재호는 민족주의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첫째, 민족주의는 다른 이데올리기와 결합하여 자신의 목표를 구체화시킨다. 둘째, 민족주의는 진보와 반동이라는 양면성, 이차성을 갖는다. 이런 개념으로 생각한다면 나는 신채호가 민족주의자이면서 아나키스트로 전향할 수 있다고 본다.


 


개인의 자유, 평등의 세상을 꿈꾸면서 어떤 때는 폭력을 정당화했던 그들, 권력자·민족주의자·공산주의자의 경계의 대상이었던 그들, 어느 누구에게도 동의받지 못하였던 그들. 이제 그들의 사상이 새로이 날개짓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미국의 일극주의, 국수주의, 폐쇄적 민족주의가 다시 창궐하는 현상 앞에 우리는 다시 아나키즘과 아나키스트를 생각하고 조명할 필요가 있다. 국가체제를 완전히 부정하고, 민족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지만 우리는 분명 한 개인의 무한한 자유와 양심을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파괴하는 일을 존중할 수는 없다.


 


개인의 자유를 갈구했던 아나키스트들이 걸어간 삶을 다시 반추할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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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 대하여 | 耽讀글방 2007-10-29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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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사상의 거처

김남주 저
창비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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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 대하여

 

할머니는 산그늘에 앉아 막대기로 참깨를 털고

어머니는 따가운 햇살 등에 받으며 호미로 고추밭을 메고

아버지는 이랴 자랴 소를 몰아 논수밭에서 쟁기질을 하고

나는 나는 학교 갔다 와서 산에 들에 나가

망태 메고 꼴을 베기도 하고 염소를 먹이기도 했지요

 

나는 보고는 했지요 어린 시절에

할머니가 깨를 터시다 말고 막대기를 훼훼 저어

모밀밭을 해치는 산짐승을 쫓는 시늉을 하는 것을

나는 보고는 했지요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김을 매시다 말고 사금파리를 주워

고춧잎에 붙은 진딧물을 긁어내는 것을

나는 보고는 했지요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쟁기질을 잠시 멈추시고 꼬챙이를 깎아

황소 뒷다리에 붙은 진드기를 떼어내는 것을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내 시에는

그 시절 우리 식구들이 미워했던 것들

산짐승 진딧물 진드기 같은 것이 자주 나오지요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내 시에는

그런 것들을 내치느라 일손을 잠시 놓으시고

우리 식구들이 대신 들었던 것들

막대기 사금파리 꼬챙이 같은 것이 많이 나오지요 8-9쪽

 

 

시는 자기를 말한다. 남을 말하지 않고

시는 경험을 말한다 들은 이야기를 말하지 않고

시가 어려워지는 이유는 자기를 말하지 않고 남을 말하고

경험을 말하지 않고 들은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어려운 말이 아니라 자기 말을 할 때 시는 시워지고

누구가 읽을 수 있다.

 

[출처]사상의 거처 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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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좋은 것인디 | 耽讀글방 2007-10-29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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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하나님이냐 돈이냐

쟈크 엘룰 저/양명수 역
대장간 | 199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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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위선의 가면을 쓴 재물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실제로 덕망 있는 부자로부터 이 위선의 실례들을 자주 본다. 행실이 좋다고 하여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부자는 그 의로움에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는 그런 부자의 의는 불의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자가 의롭다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가 가진 부의 전체를 하나님께 돌리고 가난해질 때 그리고 하나님을 모든 재물의 주인되심을 인정할 때다.

 

우리는 돈과 재물이 하나님께 속한 것을 시인하든지 아니면 부인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됨을 알 수 있다. 57쪽

 

 

자본주의체제 하에서 이런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돈 노예가 되어 돈이 자기 주인임을 스스로 고백하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선한 부자가 없다는 엘룰의 경고는 두렵다.

[출처]하나님이냐 돈이냐 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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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풀 없는 세상이 정말 좋은 세상일까? | 耽讀글방 2007-10-2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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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야생초 편지

황대권 글,그림
도솔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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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운동장에 나가 보니, 세상에! 화단에 심어 있던 풀들이 마구 뽑혀져 땅바닥에 뒹글고 있는 게 아니겠어? 한 3분의 1 정도는 되는 것 같더라. 알아보니 교도소 구내 청소하는 사람들이 잡초 제거를 하다가 화단에 나 있는 풀을 멋도 모르고 그만 뽑아 버린 거야. 멍청한 양반들 같으니라구! 둔덕을 만들어서 화단으로 꾸며 놓은 걸 보면 몰라? 일부러 키우고 있는 걸 그렇게 무자하게 뽑아 버릴 수가 있는가 말이야. 아무리 잡초라 해도 그렇지. 하루 종일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우울하게 지냈다. 30쪽

 

잡초를 제거해본적이 있는가? 이 놈들을 좋아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이 글을 읽으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제거하지 않으면 알곡을 먹을 수 없다.

알곡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을까?

하지만 잡풀이 정말 쓸모 없는 것일까?

잡풀이 사라지면 알곡만이 자랄 수 있을까?

[출처]야생초 편지 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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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비하게 하는 교리 '인간의 전부 부패' | 耽讀글방 2007-10-29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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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인간의 전적타락

아더 핑크 저
청교도신앙사 | 1997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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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전적 부패 교리는 매우 '겸비하게'하는 교리다. 그 교리가 말하는 바는, 인간이 한쪽으로 기울어졌으니 다른 쪽을 받쳐 주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또는 인간이 그저 무식하니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리도 아니다. 사람이 쇠약하여졌으니 원기를 북돋아 주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파멸된 상태에 처하여 있으며 타락하고 영적으로 죽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이 인간의 전적 부패 교리다. 따라서 인간은 '힘' 없는 존재다. 자신을 선하게 할 능력이 전혀 없는 존재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다. 인간은 하나님께 받으심직한 일을 한 가지라도 할 능력이 없다. 성경의 모든 체계는 바로 이 점을 전제하고 있다. 구속의 전체계는 바로 이 점을 전제하고 있다. 19쪽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했다는 것은 사람들은 받아들일 수 없다.

인간은 존엄하고, 무한한 능력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교리와 인간 이성은 여기서 충돌할 수밖에 없다.

[출처]인간의 전적타락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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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것을 주시는 하나님 | 耽讀글방 2007-10-29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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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설교자의 열심

박영선
규장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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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성의껏 주시는 분입니다. 긴 서월 동안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듭거듭 계속해서, 반복해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성의가 있고 우리가 이해할 여백을 항상 남겨주십니다. 그것이 진리요 사실이라는 한 가지만으로 막 밀고 들어오지 않고 이해에 필요한 긴 시간을 주십니다. 우리가 반발하는 것을 용납하고 이해하십니다. 이런 부분이 계시 이해에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분이십니다. 전지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다 안다는 의미라기보다는 모든 일의 유일한 계획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만이 앞날을 계획하시는 주재자입니다. 예정론은 우리가 빼도박도 못하게 구원받았다는 식의 고정된 프로그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인격적으로 계획하셨다는 뜻입니다. 16-18쪽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주시는 데 우리는 욕심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망각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내가 구원받았다는 생각에 빠져 있다.

 

[출처]16-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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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주술이 만나다 | 예술 2007-10-29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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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예술, 세계와의 주술적 소통

김융희 저
책세상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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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치는 것'을 좋아하는가? 첨단 시대에도 점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미신이라 무시하지만 사람들은 과학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점치는 일에 관심이 높아진다. 나는 딱 한 번 길거리 점을 쳐보았다. 그 후로는 아예 생각도 해본 적이 없다. 과학과 주술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럴지라도 과학시대에 주술을 향한 사람들의 관심은 높아지고 있다.


 


과학과 주술의 만남이 변함없을진대 예술과 주술은 어떨까? '천지창조' '만종'이 점집에 걸려 있으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예술을 모욕한 것이라 비난할까? 새로운 점집이 등장했다고 호응을 할까? 인터넷 시대에 사람들의 다양성을 고려할 때 비판과 옹호가 있을 것이다.


 


호기심이 생기면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서는 사람이 있다. 김융희다. 그는 <예술, 세계와의 주술적 소통>에서 점치는 일에 관심이 많다고 밝혔다. 어느 날 타로(Tarot) 카드를 만나면서 점치는 일이 재미를 넘어 무엇인가가 존재함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타로 52장의 그림을 계속 보면서 이상한 힘을 방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예술은 과연 영성을 가지고 있을까? 있는 그대로, 이미지만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만 인가? 예술은 과연 무엇일까? 궁금해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예술을 규정하는 데에는 두 가지 태도가 있다. 하나는 예술을 세계와 자연을 재현하는 잘 훈련된 기술로 자리매김 하는 태도이고, 또 하나는 평범한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여주는 신비한 현현으로 보는 태도다." (본문 10쪽)


 


예술에 대한 두 갈래 의견 중 앞의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예술세계이며, 뒤의 것은 무당과 같다. 전자는 르포 작가처럼 일상에서 치열한 고민과 삶, 취재를 통해 진실을 찾아가는 길이며, 후자는 현실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진실을 찾아가는 사람이다. 과연 오늘은 어떤가. 후자와 같은 예술에 대한 갈래를 인정할 수 있을까? 비판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 김융희 생각이다.


 


사람이 삶을 영위하면서 경험하는 일들은 분명 합리성과 논리성만으로는 풀리지 않는 부분이 많다. 어떤 신비와 영적 실체가 존재함을 경험한다. 김융희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밤의 어두움과 모호함 그리고 침묵 세계가 밝은 낮 세계의 자양분이라 말하고 싶다. 세계에는 합리적으로 질서를 이루는 경험 과학적 담론들이 채 다 퍼올리지 못한 신비가 숨쉬고 있으며 그 수맥을 탐사하고 드러내는 통로는 이미지에 있을 것만 같다. 말과 논리는 조금만 더 가면 금방이라도 세계의 진상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손을 뻗지만 실제는 어느새 저만치 달아나 보이지 않는 곳으로 몸을 숨긴다. 그 잡히지 않는 여분의 것, 그러나 잡히는 세계 모태이기도 한 세계의 또 하나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예술 몫이다." (11쪽)


 


예술을 통하여 그 잡히지 않는 여분 캐내기를 시도하는 것은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을 수 있지만 역사 속에서 인간이 남긴 각종 예술 작품은 분명 신비한 무엇을 말하고 있다. 절에 가면 '산신도'가 있다. 절에서 보는 산신도는 영성과 신비함을 경험한다. 그렇다면 미술관에 걸려 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어떨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미술관에 걸려 있는 산신도와 절에 있는 산신도를 달리 보는 경향이 있다. 미술관 산신도는 예술이고, 절에 있는 산신도는 종교라는 이중적인 태도를 가지는 것이다. 김용희는 이런 이중적 태도를 비판한다. 그림이 주체가 아니라 장소가 주체가 되는 현실을.


 


김융희는 말한다. "예술은 주술에서 시작되었다." 라스코의 동굴벽화와 빌렌도르츠의 비너스는 분명 예술이지만 당시 그들에게는 주술적 상징이라고. 이런 주장은 물론 비판 받을 수 있다. 우리가 지금 보기에는 '예술적' 요소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들은 그냥 그들의 들소 사냥이 잘될 수 있도록 신에게 제사지낸 것이지 예술작품으로 그린 것은 아닐 수 있기 때문에.


 


고대에 등장하는 것 중 '뱀과 새'가 있다. 아마 거의 모든 나라와 민족의 신화에 등장할 것이다. 성상 - 예수, 성모 마리아, 성인. 불상 이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들의 얼굴을 항상 기억하기 위하여 만들었을까?


 


아닐 것이다. 상징과 영성, 숭배의 의미가 있다. 인간이 남긴 많은 작품들 속에 담긴 보이지 않는 세계를 무조건 미신이라 비판하지 말고 관심을 갖는 것은, 예술을 더 깊은 상상 세계 속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김융희는 말한다.


 


예술 속에서 영성을 찾는 작업.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예술 모두를 상징, 이미지, 영성으로 이해하고자 함도 문제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술은 예술일 뿐, 어떤 상징과 의미도 없다고 말하는 것 역시 문제다. 예술은 박물관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박물관 밖으로 나와 인간과 함께 하며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예술품을 보고 그들 나름대로 이해하고 의미를 찾아야 하리라.


 


"예술이 태고적에 지니고 있던 하나의 역할, 다시 말해 인간과 우주와의 간극을 매개하여 행복한 화해에 이르게 한다는 주술적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일은 그래서 필요하다."(127쪽)


 


예술이 돈벌이로 전락한 시대다. 미술관 안에만 고이 모셔 놓은 미술작품(예술품)은 예술을 도외시 하는 일이다. 감상과 미술만을 위한 장소, 평안한 안치소에만 존재하게 하는 일은 예술을 비하하는 일이다.


 


원래 있던 그 자리에서 혼을 담아 구현했던 그 시대, 그 작가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주술과 신비함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며 그 노력을 미신으로만 취급해 비하하는 것은 예술을 더 깊이 이해하는데 방해된다는 것이 김융희의 생각이다. 과연 독자는 어떻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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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자가 되어버린 교회 | 耽讀글방 2007-10-29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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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명자는 낙심하지 않는다

옥한흠 저
국제제자훈련원(DMI)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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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갱신을 하고 싶습니까? 작은 자를 주목하는 하나님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먼저 내가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작은 자인가를 묻고, 그 다음에 작은 자를 과연 하나님의 눈을 가지고 주목하는가를 다시 한 번 물읍시다. 이것만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하나님의 능력, 치유하시는 능력, 개혁하시는 주의 능력이 우리를 통해서라도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영광 받으시고, 주의 신부되신 교회가 이 세상에 다시 한 번 그 놀라운 영광을 드러내는 그날이 오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27-8쪽)

 

 

큰 자가 되어버린 교회

큰 건물이 되어버린 교회

큰 아파트가 복인양 외치는 교회

일류대학만 복이라 외치는 교회

과연 작은 자로 다시 거듭날 수 있을까?

작은 자는 복받지 못한 교회

작은 아파트는 복받지 못한 성도

임대 교회는 교회가 아닌 한국교회

[출처]소명자는 낙심하지 않는다 27-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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