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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독이 부럽다. | 인문 2008-04-27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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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권, 피도 살도 안되는 100권

다치바나 다카시 저/박성관 역
청어람미디어 | 2008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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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와 <고양이 빌딩>으로 잘 알려진 다치바다 다카시는 책에 파묻혀 사는 사람이다. 책을 사기 위해 사는 사람이다. 학생 때는 문학에 심취했고, 기자와 철학도로 살았다.


 


1974년 <다나카 가쿠에이 연구-그 금맥과 인맥>을 통하여 세인의 관심을 받았다. 그런 그가 이제는 자연과학, 종교, 뇌과학, 우주, 지구과학, 죽음, 예술, 테크놀로지, 국제정치경제학, 생명과학 등으로 지적 지향을 넓혀가고 있다.


 


어느 한 분야에 생명을 거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인간 군상만큼, 다양성이 지배하는 학문과 책에 대하여 대단한 열정으로 책 읽기를 한다.


 


우리는 그가 읽는 분야를 '논픽션'이라 부르면  이런 글쓰기를 하는 사람을 '논픽션 작가'라 한다. 책 한 권을 쓰기 위하여 책 100권을 읽어야 한다는 그가 이번에 <피가되고 살이되는 500권, 피도살도 안 되는 100권>을 냈다.


 


이 책은 2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는 <다나카 가쿠에이 연구>를 쓰기 전까지 자신이 어떤 책을 읽어왔는지(그는 이 시기를 '나의 수수께끼의 공백시대'라고 표현한다) 대담 형식으로, 1966년부터 1974년까지 책 읽기 족적을 실었다.


 


수수께끼같은 시대였지만 그는 이때 지적 자산이 충분히 축적되었으며, 진정한 의미에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책읽기 시기였다고 말한다. 책 한 권을 쓰는데 100권을 읽어야 한다는 말은, 껍데기 같은 책이 홍수처럼 밀려드는 우리 시대 글쟁이들이 새겨 들어야 할 말이다.


 


2부 나의 독서 일기에 소개된 책은 235권이다. 나의 독서 일기는 2001년부터 2006년까지 <주간문춘>에 신간을 읽고 쓴 독서일기를 연재한 것이다. 신간 서평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그가 서점에 가서 책을 선정하는 방법은 재미있다.


 


'도쿄도서점'에서 책을 고른다. 무턱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자주 들르는 도쿄도 서점과 미디어 서평을 먼저 참고한다. 처음에는 열 몇 권에서 스무 권 정도 선택한다. 표지와 띠지, 목차와 머리말, 후기 정도를 보는데 1시간 정도 걸린다. 한 권 당 1분에서 3분 정도 시간이 걸린다.


 


다음으로 15권 정도 고른 책을 2분 정도 살펴보면서 이거는 괜찮겠다는 생각이 드는 책 10권 정도 남기는데 한 권당 3분 정도 하여 7할 정도를 가지고 집에 와서 주의깊게 읽는다. 앞 부분 5, 6쪽을 읽는다. 그 책의 질이 대부분 5, 6쪽에 결정된다고 믿고 있다. 한 권당 6, 7분이 소요된다. 여기서 제외되는 책이 있고, 읽을 만한 책이 5권 정도로 줄어든다. 책 한권을 선택하기 위하여 그가 드는 품이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처음 읽은 책들이 대부분 문학 작품이었지만 그가 나의 독서 일기에서 소개한 책은 논픽션이다. 일본은 지금 문학보다는 논픽션이 강세라고 한다. 하지만 다치바나 다카시가 문학도로 삶을 살았던 시절은 지독히도 픽션이 대세였다. 그가 <문예춘추>에 있을 때는 문필가로 '선생'이라고 지칭되는 사람은 소설가 뿐이었다고 한다.


 


그는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오늘날의 문학 부진 현상의 근본 원인을, 독자가 문학 작품에서 멀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을 현대 문학 속에서 찾아 볼 수 없다는 데서 찾고 싶습니다."(45쪽)


 


하지만 논픽셕은 생생한 현실을 제공하는 재미에 빠져들게 한다고 말한다. 픽션보다 훨씬 재미있고 흥미와 생생함이 살아 있는 논픽션은 사방에 펼려져 있다고 다치비나는 말한다. 문학 작품에 대한 비판에 모두 동의하고 싶지는 않지만 우리 시대 소설들의 공허함이 지배하는 것에 분명 흥미를 잃어가고 있는 것은 나 개인적으로는 분명하다. 소설과 비교해도 논픽션 작품들이 흥미와 재미, 생생함이 강한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다치비나는 왜 그토록 책을 읽는가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인간이 살아가는 한 그리고 인간이 지적인 욕망을 상실하지 않는 한, 인간은 '더 책을 읽고 싶다', '새로운 책과 더 만나고 싶다'고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더 읽고 싶은 책이 계속해서 나타난다면 바로 그 사실 자체가 지적인 인간에게 있어서는 살이 있음의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 욕망이 사라진다면 그 사람은 이미 지적으로 죽었다고 해도 좋습니다."(52쪽)


 


한 마디로 정의하면 책을 읽지 않고서는 책 쓰기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단편과 표피만으로 글쓰기를 말 장난처럼 해대는 요즘 글쓰는 이들을 향한 일격이다. 다치비나의 책 읽기는 대충이 아니었다. 그를 세상에 알린 <다나카 가쿠게이 연구>는 탐사보도를 통하여 거대한 악과 일전을 겨루어 이긴 것은 지독한 책 읽기이라는 내공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치비나는 1984년부터 1986년까지 <아사히 저널>을 무대로 록히드 재판 비판파들과 논쟁을 했다. 그와 논쟁한 사람들은 법률 전문가들이었다. 그는 그들과 대항하기 위하여 15단 분량의 법률 전문서를 철저히 독파했다고 말한다.


 


"형법이나 형사소송법 주해서를 읽는 것은 물론이지만, 전문가들과 논쟁할 때는 그 수준으로는 당해날 재간이 없으니까 일본평론사의 <공판법 대계>(전4권) <증거법 대계>(전4권> 같은 책을 읽어야 했어요. 그 때 늘 곁에 두고 도움을 받은 것이 <판례 형사육법전서>입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최고재판판례집에 달려드는 식으로 해갔습니다."(170쪽)


 


결국 그는 법률전문가들과 논쟁에서도 지지 않았다. 다치비나는 어떤 분야를 읽어도 철저했으며, 분명했다. <피가되고 살이 되는 500권, 피도 살도 안되는 100권>에는 책 제목만 소개한 것들도 있지만 다치비나를 통하여 우리가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읽기가 필요하며, 얕은 지식으로 책 한 권 내는 우리 지식 풍토에 강한 경고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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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치열한 삶의 대화 | 사회 2008-04-27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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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대화

리영희 저/임헌영 대담
한길사 | 2005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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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된 삶을 살아온 자는 당당하다. 부끄러움이 없다. 거짓된 삶을 살아온 자는 항상 거짓되다. 진실 앞에서 서면 추해진다. 당당한척 하지만 가장 추락한 자신을 보여준다. 당당한 삶을 살아온 한 사람이 있으니 '리영희'다.


 


'리영희' 그는 누구인가?  <전환시대의 논리>로 1970년대 청년들에게 진리를 향한 외침을 부르짖게 했다. <우상과 이성> <분단을 넘어서> 등등 그가 내 놓은 글들을 진실을 향하여 당당한 삶을 추구했던 이들에게 지적 사유를 하게 했고, 나는 그가 남겨 놓은 글 앞에 무릎 꿇고 읽고 또 읽었다. 그는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아왔다. 그가 2005년 3월에 임헌영과 나눈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을 대담형식으로 담은 <대화>를 내 놓았다.


 


<대화>를 읽어가면서 든 생각은 사람은 대화를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진실하지 않으면 대화할 수 없다. 자신을 다 드러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특히 자신을 반추하는 대화는 녹록하지 않다. 가식을 담을 수 없다. 리영희 선생의 <대화>는 지식으로 살아온 자신의 삶이 무엇인지 말한다. '전문가'가 아닌, 시대가 고민하는 것을 자신과 일체시킨 삶이었다. 자신의 삶을 이렇게 말한다.


 


"나의 삶을 이끌어준 근본이념은 '자유와 책임'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더욱이 진정한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인 까닭에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해서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는 믿음이었다."(본문 7쪽)


 


전문지식을 자본에 팔고, 권력에 팔고, 명예에 파는 지식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그 지식을 팔아 권력을 만들고, 스스로 기득권에 들어가 결국 지식장사꾼으로 살아갈 뿐이다. 리영희는 자신을 지식장사꾼이 아니라 자유와 책임으로 시대의 고민과 가치가 무엇인지 깨닫기를 원했고, 그렇게 살아왔다고 말한다.


 


지식인은 지식장사꾼이 되면 그는 지식을 배반한 자가 된다. 지식을 배반한다면 그 지식은 자신을 죽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죽인다. 리영희가 살았던 대한민국은 자유를 통제했고, 자유를 향한 외침을 탄압했다. 그는 그런 환경을 '반인간적 환경'(8쪽)이라 했다. 인간이 인간이 아닌 세상은 죽은 세상이다. 죽임이 난무하는 세상은 삶이 가치가 없다. 인간과 자유, 평등과 진실은 거짓될 뿐이며, 기득권에 항거하는 사악한 존재일뿐이다.


 


그 험혹한 대한민국 사회를 살았던 리영희의 삶이 <대화>에 녹아 있다. 대화를 통하여 한 지식인이 험혹한 사회를 어떻게 도전과 응전을 통하여 살아왔는지를 알게 된다. 험혹한 세상을 만드는 구성원들 중에는 전문가 지식인들, 지식을 팔아 살아가는 지식장사꾼들이 존재했음을 또한 알게 될 것이다. 그는 자신에 대한 청년과 학생, 지식인들에 의해서 '사상의 은사'로 불리운 것을 과분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사상의 은사는 리영희 자신의 삶을 험혹하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럴수록 야만의 권력은 나에게 '의식화 원흉'이라는 이름의 굴레를 씌워 핍박의 고삐를 조였다. 이 시기, 거짓(허위)로 덮인 깜깜한 한국의 하늘에 희미하나마 한 줄기 진실과 이성의 빛을 비춰주려는 나의 글과 사상이 '야만의 지배'를 물리치려는 선령한 인간들의 눈물겨운 싸움에 힘이 되었는지, 또 이 시대 한국사의 전진에 얼마만큼의 기여를 했을지 아는 알지 못한다. 어쨌든 1990년대에 이르러 나라에 광명이 비치게 되었을 때, 나는 허약한 한 지식인으로서 미미하나마 나의 사회적 책임과 시대적 소임을 다한 것으로 자위했다."(본문 8쪽)


 


사악한 권력은 진실을 말하는 자를 오히려 사악하다 말한다. 그 사악함에 어떤 지식은 진실을 판다. 진실을 팔아 권력과 하나 된다. 야만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는 것이다. 야만을 거역해야 할 지식인이 오히려 야만이 진실을 지배하는 세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리영희 그는 야만이 지배하는 세상을 거역했다. 그러기에 그는 의식화 원흉으로 지배권력이 핍박했지만 사상의 은사로 칭송받았다. <대화>는 리영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임헌영과 대화하면서 자신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 시대 대한민국은 또 다른 전문가 지식인, 지식장사꾼이 되기 위하여 공부한다. 지식을 통하여 사회와 국가, 인민을 위하여 사용하기 보다는 자본에 팔려 자신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대화>는 그리 달갑지 않은 책이다. 하지만 우리가 더 험혹한 세상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대화>를 읽음으로 작은 밑거름이 될 것은 분명하다. 리영희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다.


 


"내가 할 역할은 다 했고, 남은 역할은 내가 변치 않고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있어주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이 나라, 사회의 변화와 전진을 지켜보면서, 혹시 요구가 있으면 몇 마디를 해주는 것으로 족하지. "족한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는 성현의 가르침은 지금 바로 나에게 한 말이라 생각하게 됐어요. 그래서 자서전 같은 것을 마다했지.(본문733쪽)


 


인간은 언제든지 변절할 수 있다. 끊임없이 자기를 견책하지 않으면 변절할 수 있다. 리영희 선생은 끝까지 자신이 살아온 삶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간절한 소망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조금 사회가 원하다면 미력한 보탬을 하겠다는 말에는 숙연함마저 든다. 그렇다 그가 살아온 삶이 그랬기에 자신을 높이지 않는 그 모습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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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한 삶을 살아온 자의 40년 회화록 | 사회 2008-04-27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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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백낙청 회화록 1-7권 세트

백낙청회화록 간행위원회 저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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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태어나서 가장 복된 일은 무엇일까? 수십억짜리 아파트, 일류대학 졸업장, 권력을 가진 경력, 수십억이 넘는 재산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들은 육신 장막이 끝나는 순간 더 없이 사라지고 만다. 아무리 가지고 가려고 하지만 결코 가지고 갈 수 없으며 가지고 간다해도 아무런 가치가 없다. 


 


인생살이 40년 동안 자신의 생애와 행적을 기록한 책을 남긴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진짜 복이다. 창비에서 백낙청 서울대 명예 교수가 대담과 좌담을 통하여 공개적으로 표명한 '말'들을 정리한 <백낙청 회화록 1-5>은 정말 대단한 역작이다.


 


5권에는 40년 동안 창작과 비평을 통하여 각 시대마다 지식인들이 문학과 사회 민족 정치 역사 등을 주제로 벌인 치열한 논쟁을 담고 있다. 백철 김동리 선우휘 박현채 등 지금은 다시 육신을 통하여 만날 수 없는 이들과  리영희, 강만길, 고은, 김지하, 이매뉴얼 월러스틴, 프레드릭 제임슨, 가라타니 고진 등 국내외 지식인 133명(국외 12명)이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민족문학론, 분단체제론, 변혁적 중도주의 등 끊임없이 우리 사회의 진보라는 틀을 제시했던 백낙청이지만 1권 '작가 선우휘와 마주 앉다'에서 사르트르를 두고 선우휘남에소 나눈 대화를 보면 고통스러운 단면을 보여준다.


 


"싸르트르를 끝까지 충실하게 추종하게 되면 결국 프롤레타리아혁명까지 가는 것이 아니냐. 말하자면 그가 작가의 역할을 기존사회의 모순을 파헤쳐야 한다는 데 둔다고 할 그러면 그 다음에 오는 것은 무엇이냐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백낙청 회화록 1권> '작가 선우휘와 마주 앉다' 16쪽) 


 


선우휘의 도전적인 질문에 30살 평론가 백낙청은 말한다. “요즈음 특히 좌경하고 있는 사르트르의 모든 행동을 우리 지식인들이 맹종한다면 우리 지식인들도 그에 못지않게 좌경하리라는 것은 명백한 논리적 귀결이겠지요”라고 말한다.


 


이는 군부폭압정권이 사상과 사유의 자유를 완전히 빼앗은 시대 아픔을 느끼는 청년 백낙청의 안타까운 반응을 읽을 수 있게 한다. 거대한 보수논객 앞에 30살 청년 진보지식인은 작게 보인다. 그 작게 보이는 것이 질곡과 아픔을 뒤로하고 조금씩 나아져서 결국 40년 역작을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논쟁이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 논쟁이란 획일화된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다. 우리 사회가 논쟁이 없다고 하는 이유는 일제강점기와 독재권력이 사상과 사유를 획일화시켰기 때문이다. 논쟁은 자신의 생각을 상대방을 설득시켜 가는 과정이며, 또한 상대방 주장을 무조건적인 비판이 아니라 과학방법론으로 맞다면 인정해주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논쟁은 즐거움이다. 얼굴 붉히면서 격정적인 토론을 하지만 서로를 존중한다. 획일화된 사회는 존중을 찾을 수 없으면 흑백만이 난무한다. <백낙청 회화록>에서는 논쟁을 즐긴다. 상대방 주장을 인정 비판하는 과정을 상세히 전해준다. 백낙청은 항상 상대방 주장 가운데 자신이 동의하는 부분을 먼저 밝힌 뒤 이를 자신의 생각으로 새롭게 정립한다. 이를 반격이라고할까? “그 점은 저도 동감입니다만” “물론 저도 거기에 동감인데요” “그건 그렇지요, 그러나”와 같은 표현에서 그가 논쟁할 줄 아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우리 사회를 논쟁이 없는 사회라고 한탄하지만 40년 창작과 비평에는 분명 논쟁이 있었다. 사유와 사상이 다른 이들이 인간과 사회, 역사, 민족, 정치를 두고 치열한 지적 논쟁을 했기에 창작과 비평은 지금도 뭇 사람들에게 지적 자극을 주면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40년 우리 지성사를 아우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이론 투쟁에 적극적이다. 이론이 곧 실천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일은 무시가 아니라 더 나은 진보를 위한 노력이다. 백낙청은 말했다. "남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것은 저 나름으로 그런 진리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끊임없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글'이 아니라 '말'을 담았기에 읽는 독자는 좌담과 대담 자리에 자신이 앉아 있다는 생생한 감동을 경험할 수 있다. 사상과 사유의 영역과 철학이 달라도 그들은 논쟁했고, 무시하지 않았고, 서로를 설득하려고 했다. 자신의 철학과 사상은 지키려고 하지만 상대에게는 자신의 사유 영역으로 들어오라고 한다. 여기에는 강압이 없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 하나는 회화록을 보면 이전에는 긴 대담과 좌담이었지만 최근 들어서는 짧은 대담과 좌담이 많다. 2권(1985~90)과 5권(2005~2007)에 각각 실린 글은 9편과 34편으로 큰 차이가 난다. 책 두께가 비슷한데 실린 편수는 4배 가량 차이가 난다. 시대가 달라졌을 수도 있지만 논쟁은 많은 시대이지만 깊이 있는 논쟁이 점점 사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백낙청 회화록 부분에서 뽑은 말들이다.


 


“극복의 대상으로서 분단체제를 말한 겁니다. …남북한 모두가 포섭된 하나의 체제를 인식하자는 거지요. 그렇다고 완결된 체제는 아니고 말하자면 분단체제는 세계체제의 한 하위체제로서, 남북 양쪽의 대다수 보통사람들의 이익에 위배되고 전세계적으로도 보통사람들의 일반적인 이익에 반대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제4권, 1999년 <창작과비평> 수록, 미 뉴욕주립 빙엄튼대 이매뉴얼 월러스틴 교수와의 대담 ‘21세기의 시련과 역사적 선택-세계체제, 동아시아 그리고 한반도’ 중에서)
 
“민족문학론이 지금 싯점에서 그 내용을 ‘분단체제 극복을 위한 문학’이라는 것으로 그 내용을 채울 수만 있다면 그것은 여전히 유효하다.”(제5권· 2005년 광복 60주년 기념 학술세미나 종합토론 ‘다시 민족문학을 생각한다’ 중에서)


 


40년 전 대담과 좌담이라 별 감흥을 받지 않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시대가 더 깊은 사유를 했음을 알 수 있다. 결코 쉽게 넘길 수 없는 말들을 만날 수 있다. 40년 동안 우리 지식인들이 남긴 치열한 사회와 민족, 국가와 나라, 정치, 역사, 문학을 논한 지식과 사유 논쟁 속으로 들어간다면 후회없는 선택이 될 것이다.


 


1권 1968-1980년, 2권 1985년-1990년, 3권 1990년-1997년, 4권 1997년-2004년, 5권 2005년-2007년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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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상과 양심의 자유가 존재하는가? | 사회 2008-04-25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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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위하여

조국 저
책세상 | 2007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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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산 쇠고기 수입 개방과 이명박 대통령 미국 방문, 학교자율화계획 등으로 주목받지 못했지만 지난 17일 대법원은 매우 중요한 판결 하나를 내렸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박일환 대법관)가 17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탈출죄)로 기소된 재독 사회학자 송두율(64) 교수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낸 판결이다.


 

국가보안법 탈출죄란 한국인이 외국 국적을 얻고 외국에 살다가 북한을 방문한 행위를 말한다. 기존 판례는 어떤 자의 방북 행위에 대해 국적에 상관없이 탈출죄를 인정했다.


 


대한민국 헌법 19조는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로 성문화했다. 하지만 국가보안법은 헌법보다 하위법이면서도 양심과 사상을 판결할 때는 상위법 행사를 했다. 헌법 19조에서 말하는 '양심'은 윤리 의미뿐만 아니라 사상적 의미도 포함된다.


 


서울대학교 조국 교수는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위하여>에서 아직도 우리 사회는 양심과 사상의 자유가 아직도 저열한 수준이며,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침해하는 제도와 문화가 존재함을 밝히고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국가 대한민국이 아직도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저해하고, 시민 의식도 저열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민주주의 국가가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헌법으로 보장하는 이유를 조국은 다음과 같은 주장한다.


 


"인간이 자신의 양심과 사상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할 수 없다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의 뿌리가 흔들릴 수밖에 없으며, 나아가 민주주의 체제의 존속과 발전 역시 보장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법률의 외피를 쓴 '불법국가' 가 등장했을 때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단초는 시민의 양심과 사상적 결단에서 비롯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양심과 사상의 자유는 '정신적 기본권 중 가장 근원적인 것'이며, '최상급기본권 Supergrundrecht'라고 할 수 있다." (본문 11쪽)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런 문구에는 동의했지만 사상과 양심, 특정 종교 신봉자들에게 배격과 침해를 일삼았다. 송두율 교수 뿐만 아니라, 사진작가 이시우씨,  범청학련 남측본부 윤기진 의장, 군산 동고등학교 김형근 교사를 통하여 아직도 우리 사회는 국가보안법은 실정법률로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 양심과 사상의 자유 보호 범위는 어디 까지 일까? 양심과 사상을 형성하고, 결정할 때 외부의 압력이나 강제를 받지 않았아 함을 조국은 강조한다. 즉, 국가와 사회가 특정 사상과 이념을 인민에게 강제로 주입시키는 세뇌 교육 같은 형식으로 양심과 사상을 형성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대한민국은 그 동안 반공이념을 기준으로 하여 사회안전법, 보안관찰법을 통하여 인민의 사상과 양심을 통제했다. 국가은 '빨갱이'을 사상전화시키는 억압을 일삼았다. 사회안전법은 1988년, 사상전환제는 지난 1998년 폐지되었다. 준법서약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부활하여 아직도 인민들의 사상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살아남았다.


 


사회안전법 폐지 투쟁의 상징이었던 서준식 씨는 사상전환제를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가장 깊은 성역에 대한 국가권력의 폭력적 침입이며, 극에 달한 정치적 폭력의 한 표현"이라고 했다.


 


"자신의 양심과 사상에 대해 침묵할 수 있는 시민의 자유를 침해하는 제도는 그 강도가 높든 낮든, 그 방식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간에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좌파사상법의 양심도 보호받고 존중받아야 할 양심인 것이다." (본문 48쪽)


 


우리 사회는 반공을 통하여 사상을 통제할 뿐만 아니라 종교신념과 양심에 따라 집총을 거부하는 것도 억압했다. '여호와 증인'의 집총거부는 정통 기독교와 맞물려 있는 사안이지만 집총거부자들이 병역 기피를 위하여 악용하는 것을 방지하고, 철저한 점검을 통하여 최종 판단하여 종교적 양심에 따라 행해지는 병역 거부는 인정해야 한다.


 


미국 연방대법관 중 한 사람인 홈스는 "사상의 자유의 원칙은 우리와 의견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증오하는 사상을 위한 자유의 원칙을 뜻한다"고 말했다. 나와 같은 사상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증오하고, 질시하는 사상을 위한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인정함을 선언하고 있다.  


 


홈스 대법관은 1919년 '아브람스 판결 Abrams v. United States'에서 반국가 선동죄의 유죄를 확정한 판결에 반대하면서 다음과 말했다.


 


"나는 우리가 혐오하며 죽음을 내포하고 있다고 믿는 의견의 표현을 억제하려는 시도를 영원히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의견이 법률의 합법적이고 긴요한 목적을 즉각적으로 방해하는 위협이 너무도 임박하여 imminent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곧바로 억제해야 하는 경우 외에는."(95쪽)


 


홈스 대법관 시절보다 못한 시대를 대한민국은 살아가고 있다. 특정 사상와 이념이 국가를 전복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 사상과 이념이 국가를 전복할 임박한 위험이 아닌데도 우리는 그 사상을 통제하고 있다. 그러니 형식민주주의는 실현되었지만 아직 사상와 이념의 민주주의는 실현되지 않았다.


 


'빨갱이를 타도하자', '좌익', '좌파'라는 말 자체가 아직도 우리 사회가 사상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사회임을 방증하고 있다. 획일화된 신념, 사상을 강조하고, 기존 체제에 순응을 강제하고, 기성 체제에 대하여 의심, 질문, 도전, 논쟁하지 않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 진보할 수 없다.


 


조국 교수는 국가보안법을 친미 · 반공 · 분단 · 자본의 논리를 일탈하는 사상과 행위를 처벌하기 위해 만든 '프로크루스테서의 침대'라고 했다. 인간의 정신을 해하는 법이 국가보안법인 것이다. 국가보안법을 통하여 사상을 통제함으로써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는 악법임을 말하고 있다.


 


나와는 다른 종교와 신념, 이념과 사상에는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들이 그 신념과 사상, 이념을 말하고, 지키는 일에는 전심전력해야 한다. 그 사상을 침해받았을 때는 나와 다른 사상일지라도 끝까지 지킬 수 있도록 함께 해야 한다. 이것이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위하여 살아가는 우리가 가야 길이다.


 


"나는 당신이 말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당신의 의견을 말할 권리를 위해서는 죽도록 싸울 것이다."(볼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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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된 진실 | 사회 2008-04-23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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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거짓된 진실

데릭 젠슨 저/이현정 역
아고라 | 2008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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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된 진실, 진실이 거짓일 수 있을까? 첫 장을 열면서 던진 물음이다. 또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나선 후세인 오바마 민주당 후보가 힐러리 클린턴 후보에게 이겨 본선에 나가 당선된다면 데릭 젠슨에게 <거짓된 진실>에서 “흑인에 대한 인종 차별이 끝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묻고 싶었다.




하지만 <거짓된 진실>을 50쪽 까지만 읽어도 내 질문이 얼마나 허망한 질문인지 알 수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1918년 미국 조지아 주 발도스타에서 흑인 열한 명을 무참히 살해한 백인들, 살해 당한 흑인 남편을 둔 아내가 복수를 맹세하자 나무에 매달아 난도질 하고, 불에 태웠고, 배를 갈라 아이까지 발로 머리를 짖이겨 죽였다. 하지만 그것이 수백발을 그에게 발포했다.




오래 전 일이라 우리 시대는 아닐 것이라 애써 변명하려고 하는 순간 데릭 젠슨은 칼날을 들이댄다. 2001년 남미 콜롬비아 알토나야에서 ‘암살대’라는 이름으로 부활절 주말에 40명을 학살했다. 한 여성을 데릭 젠슨은 주목했다. 암살대는 그 여성을 전기톱으로 손을 자르고, 배와 목을 갈랐다.




그러기에 젠슨에게 던지 질문의 답은 이미 나왔다. 후세인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면 외적으로 인종 차별은 거의 끝났다고 볼 수 있지만 데릭 젠슨이 말할 것처럼 아직 미국과 우리의 인식은 1918년과 2001년에 일어났던 잔혹, 만행, 증오에 사무친 사건들을 일으킨 내적 증오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것을 말하기 위해 그는 <거짓된 진실>을 썼다.




“이 책은 하나의 무기다. 잔학 행위에 반대하고자 하는 사람들 모두의 손에 쥐어진 총이고, 그 총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려주는 매뉴얼이다. 이 책은 우리의 인식을 묶어두고 지금 같은 세상에 우리를 묶어두는 밧줄을 자르는 칼이다. 도화선에 붙이는 성냥이다.” (본문 11쪽)




<거짓된 진실>이라는 제목은 추상적이다. 개념 정리를 하려고 덤벼들다가는 젠슨이 말하고자 하는 진실을 읽지 못한다. 이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데릭 젠슨은 500쪽이 넘는 분량을 통하여 아주 구체적으로 지난 1세기 동안 일어났던 사건들을 하나하나 제시함으로써 백인 중심의 미국 주류 사회가 얼마나 증오와 잔혹한 삶을 살았는지 37쪽-40쪽에서 사람들이 경찰 지시를 따르다가 죽음 당한 사실을 말한다.




“앤토니 바에즈, 1994년 12월 22일, 뉴욕 시 길거링서 축구를 했다는 이유로 질식사. 갈랜드 카터, 17세, 1996년 1월 8일, 등 뒤에서 경찰이 쏜 총에 맞다. 대릴 하워턴, 1994년 9월 8일, 다른 사람의 집 지키는 개한테 먹이를 주다가 총알 여섯발을 맞았다. 티샤 밀러, 1998년 12월 28일, 고장 난 차에서 자고 있다가 깜짝 놀라서 깨는 순간 총알 열두발을 맞았다. 1996년 6월 13일, 자신의 차에 앉아서 손을 허공에 올린 상태에서 총알 열여덟 발을 맞다(첫발을 쏜 다음 한 경찰관은 이렇게 말했다. 검둥이 넌 이제 죽었어.).”




미국은 이렇게 만날 경찰관에게 4-5명이 죽임을 당하며 대부분이 흑인과 더불어 소수자, 유색인종, 약자들이다. 이는 드러난 잔혹하고 증오가 깃던 범죄다. 백인 경찰은 우연일 수 있다. 일상 업무에서 일어난 단순한 사건이다. 하지만 그렇게 당한 이들은 생명을 잃었다. 한 번 잃은 생명은 다시 찾을 수 없다. 증오는 아직도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전부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증오’가 수 없이 일어난다. 보이지 않는 증오에 희생당하는 이들 중 여성이 당하는 성폭력이 있다. 젠슨은 강간을 증오범죄로 규정하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강간을 통하여 경험한 여성들을 남성은 성폭력이라는 죄로 말할 뿐 그것은 인간성 자체를 파괴하는 증오로 보지 않는 것을 비판한다. 21-22쪽에는 FBI 직원과 대화에서 왜 강간이 증오범죄가 아닌지 대화 내용이 실려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강간이 포함되지 않은 이유는 동기가 명백하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강간은 피해자의 시민권을 침해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해를 입히려는 욕구, 또는 성관계를 하고 싶은 욕구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니까요."


"나는 FBI에서 정의하는 증오범죄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증오범죄는 개인, 재산, 또는 사회를 대상으로 저지르는 범죄로서, 전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특정 종교, 인종, 장애, 성적 취향, 민족에 대해 가해자의 편견으로 일어나는 범죄행위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강간은 증오범죄가 아닐까? 아니라고 말한다.


 


"그럼 강간의 정의는? "


“여성의 의지에 반하여 그 여성의 성기에 삽입하는 행위입니다.”


“그 정의에 피해자 남성은 포함되지 않는군요.” 내가 말했다.


“그것 참 흥미롭죠?”


“아, 그러니까 이런 얘기군요. 어떤 여성 또는 어떤 사람의 시민권은 원치 않는 성적 접촉을 하지 않을 자유를 포함하지 않는군요.”


“성별은 법에서 증오범죄로부터의 보호범주에 포함되어 있지 않아요.”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성별이 보호계층 범주라고 가정하면, 강간이 증오범죄에 포함될까요?” 내가 물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그 동기가 명백하게 다릅니다. 강간은 증오범죄가 아니에요.”


 


증오범죄가 개인, 재산 또는 사회를 대상으로 하는 범죄, 인간 기본권을 더 악랄하게 파괴하고, 잔혹한 범죄라 한다면 강간이 왜 해당되지는 않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지만 FBI는 끝끝내 강간은 증오범죄가 아니라고 했다. 우리나라도 어떨가? 성폭력을 증오범죄 규범에 포함시키려고 한 젠슨의 끈기있는 주장이 애처롭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리고 증오범죄라 주장하는 젠슨의 주장이 설득력있다.


 


증오범죄는 이런 것만 존재하지 않는다. 재산권을 빼앗고, 노동 착취가 있다. 다이아몬드를 빼앗긴 남아프리카 원주민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대대로 살던 그들의 땅을 빼앗겼다. 정복자들은 원주민들에게 땅과 다이아몬드 권리를 주지 않았다. 아니 그들에게 권리가 있다는 것 자체를 생각하지 않았다. 권리는 정복한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노동 착취도 마찬가지다.




"아직도 화가 가라앉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내 옷은 착취 공장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내 고기는 공장형 축산시설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빼앗아 가고, 내가 먹는 값싼 채소는 가족농을 몰아내는 농업기업이 공급하는 것이기 때문에 압수한다.--- 채소뿐 아니라 커피도 빼앗아 가버린다. 커피 재배가 열대림을 파괴하고 명금류 철새 개체군을 격감시키고 아프리카, 아시아, 중남미 소농들을 땅에서 몰아내기 때문이다. 지구 온난화를 이유로 내 차를 가져가버린다. 결혼 반지도 빼앗아간다. 광업은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자연 경관과 공동체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텔레비전, 전자렌지, 냉장고도 가져가버린다. 제기랄, 전기 배선까지 통째로 가져가버리는 이유는 전기를 만드는 환경 비용이 너무 크기 때문이란다"(본문 98쪽)


 


생각해보시라. 아무 권리도 없는 사람이 불쑥 내 집에 들어와서, 내가 이 집을 차지 했으니 이제부터 이 집은 내 집이요. 냉장고, 텔레비전, 컴퓨터, 집문서, 땅문서, 온갖 가구들을 차지 않고 나를 쫓아낸다면 어쩔 것인가?  




문명를 자랑했던 이들이 이것을 저질렀다. 오늘날 이런 일들이 이라크에서 일어나고 있다. 미국을 위협한다고, 독재자라고 침략하여  수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인도했다. 아직도 그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국익을 위하여 그럴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내 집에 들어온 강도가 나를 몰아내고 자기 것이라 주장하면 과연 나는 인정할 수 있는가? 젠슨이 던진 질문에 답할 삶을 우리는 살고 있는가?


 


석유를 빼앗기 위해, 자기 나라 안보를 위해 힘 있는 나라는 지금도 침략한다. '세계 평화'와 '세계 정의'라는 겉모습과 달리 내면에는 증오와 잔혹함이 담긴 목적을 위해서 말이다.



1999년 프놈펜에서 '디나 찬'이라는 여성이 '제1회 젠더와 발전 전국 대회'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우리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동물이 아니고 우리는 바이러스가 아니고 우리는 쓰레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살과 뼈, 피부가 있고, 심장이 있으며, 우리는 어떤 이의 누이이고 딸이고 손녀입니다. 우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여자입니다. 존중과 품위로써 대우받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누리는 권리를 우리도 가지고 싶습니다. 나는 인신매매를 당했고, 강간을 당하고 구타당한 후 억지로 남자들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모욕을 당하고 물건처럼 취급되어 남자들이, 그래요, 남자들이 쾌락을 느끼게 해야 했습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돈을 벌어다주었고 또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는 쾌락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내게 남은 것은 수치심, 고통, 모멸감뿐이었습니다.” (본문 307쪽)


 


여기서도 여성은 성과 경제적 약자로 등장한다. 그는 동물이 아니다. 쓰레기가 아니다고 외쳤다. 우리는 사람이라고 했다. 남성과 자본은 그를 인간이 아니라 일하는 기계로 생각했을 뿐이다. 자본이 만든 증오가 그렇게 만들었다.


 


자본은 이토록 사람을 잔혹하게 만든다. 자본은 이토록 사람을 사람이 아니게 만든다. 자본은 여성을 성적 쾌락을 제공하는 도구로 만들어버렸다. 이것인 증오범죄다. 개인과 가족, 사회까지 모든 빼앗아가버리는 범죄다.


 


"돈이 목숨보다 더 중하다고 누가 정의하는가? 돈을 가진 자들이 더 힘이 세다고 누가 정의하는가? 결국 돈이 무엇인가? 종이다. 금속이다. 먹을 수도 없다. 종이는 열을 가하면 탄다.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갖다 붙인 의미를 제외하면 돈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돈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돈은 아무것도 아니다."(본문 312쪽)




데릭 젠슨 말이 틀렸는가? 가장 부자라고 각 시대마다 이름난 부자들이 영원히 죽지 않았는가? 아니다. 다 세월 무게에 힘을 쓰지 못하고 죽었다. 경제 살리기에 혈안이 된 우리 사회가 한 번 읽기를 간절히 바란다.


 


데릭 젠슨은 끊임없이 증오와 잔혹함이 난무하는 현실을 낱낱이 고발한다. 소수자 린치, 고문, 강간, 포르노 사이트, 아동학대, 노예화, 대상화, 계급착취, 생태파괴, 홀로코스트 등 현대 사회의 모든 문제를 아우르고 있다.


 


읽으면서 과연 이런 범죄가 과연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 공동체에서 일어나고 현실인지 의심이 들 정도다. 이 모든 것을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것을 타기 위한 문명이 나은 산물임을 젠슨은 지적한다. 여기에 해법이 있다. 


데릭 젠슨이 제시하는 해법은 문명의 제거다. 문명은 진보가 아니라 파괴로 드러나고 있다. 문명은 모두가 살기 좋은 세상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나'만을 위한 세상을 뿐이다. 다른 이를 주체로 생각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나 아닌 다른 이를 존중하면 된다. 인간이기에 미워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미움이 다른 이를 존중하지 못하는 것과는 다르다. 문명은 증오를 잉태했다. 이 말은 충격이다. 문명은 인간 삶을 더 나은 삶으로 인도한다고 우리는 믿고 있다. 하지만 그 믿음은 결국 파괴과 증오를 낳게 하였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 그것을 증명하지 않는가? 문명을 제거할 수 있는가? 그리고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가져라. 데릭 젠슨이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읽으면서 인간문명이 무엇을 남겼는지 알게 되었고, 그 증오가 현재 우리에게 무엇을 던저 주는 알게 되었다. 내가 증오범죄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마음에 새긴다면 문명에 대한 무조건적인 추종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게 되리라. 이런 세상을 다시는 오지 않는 것인가?



"옛날 옛적에 인간들이 여기 살았다. 그들은 시냇물 옆에 앉아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잠을 잤다. 섹스를 했다. 연어를 잡았다. 연어를 먹었다 이웃사람과 말다툼을 했다. 때로는 치고받기도 했다. 그들의 아이들도 여기 살았다. 그 아이들의 아이들, 또 그 아이들이 그 연어의 새끼를 먹었고, 그 이웃의 아이들과 말다툼을 했고, 그 이웃 아이들과 치고 받았고, 그 이웃 아이들과 의식을 거행했고, 이웃의 아이들과 결혼을 했고, 그 이웃 아이들과 아이를 만들었다. 그들은 햇볕을 받으며 걱정 없이 살았고, 아침에는 자신의 얼굴에 햇살이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밤에 피곤해서 곯아 떨어졌고, 그 다음 날 아침에는 일어나서 시냇가에 앉아 웃음을 터뜨렸다. 인간들은 이렇게 살았다."(본문 5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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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마르크스 | 耽讀메모 2008-04-23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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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더 레프트 THE left 1848~2000

제프 일리 저/유강은 역
뿌리와이파리 | 2008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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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마르크스는 그와 동시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마르크스가 아니다. 우리가 가진 이미지는 마르크스주의 전통이 후대에 거친 경로에 의해서만 아니라 마르크스가 죽기 전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마르크스의 저작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다.

 

후대 사람들-과 마르크스주의에 적대적이거나 동조하는 이데올로기들의 노력-에 의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역사 바깥으로 빠져나와버렸고, 이 때문에 우리는 두 사람이 당대에 서 있던 자리에 접근하기 쉽지 않다. 두 사람이 당대에 미친 영향을 이해하려면 19세기 말에 활동던 사회주의 정치인들과 노동운동가들의 인식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출처]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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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를 존중하는 정치 | 정치 2008-04-22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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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차이의 정치

이남석
책세상 | 2001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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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결원리' 근대 민주주의의 대원칙이다. 특히 선거에서 다수결은 모든 것을 결정한다. 단 한 표를 더 얻은 정당과 후보자가 행정부, 국회, 지방정부, 지방의회 모든 것을 결정한다. 다수결에 패배한 소수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민주주의가 다수결 원칙으로 운영됨으로써 소수는 다수에게 정책 결정뿐만 아니라 정의와 보편성까지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특히 특수 종교 신봉자, 외국인노동자, 동성애자, 절반이지만 소수로 자리 매김하고 있는 여성들은 다수자에게 철저히 배제되고 있다.


 


다수는 자기와 다른, 소수자를 용납하지 않는다. 소수가 주체로 등장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다수 지배 정치 문화를 비판한 이남석이 지은 책세상 문고·우리시대 044 <차이의 정치-이제 소수를 위하여>는 다수와 소수의 차이를 극복하고, 소수가 주체로 자리 잡기를 원한다.


 


"우리는 차이에 대하여 생각해본 적 조차 없는 것은 아닌가? 차이는 우리와는 무관한 주제였고, 정치의 주제로도 성장하지 못했다. 그보다는 차이 자체가 억압받고, 정치에서 배제당하는 것이 우리 현실이었다." (9쪽)


 


최근 들어 소수자에 대하여 '차이'를 인정하고, 그들이 차별받는 것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지만 그들이 주체로 등장하는 일 특히 정치영역에 참여하여 당당한 권리 행사에 이르지는 못하고 있음을 이남석은 지적한다. 즉, 진정 차이를 인정하는 일은 차이의 주체들이 권력체제 안에서 동등한 위치를 가져야 함을 강조한다.


 


주목할 점은 여성, 외국인 노동자, 동성애자, 무산자, 특정 종교 신봉자, 특정 이념자들은 소수이지만 이들을 다 합치면 다수이다. 그리고 다수결에 의하여 권력을 쥔 자들은 사실 소수다. 다수결 원칙이 민주주의 원리이지만 결국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구조이다.


 


다수결에 의하여 집권한 지배 집단은 '차이에 대한 무관심(indifference to difference)'하다. 지배집단의 이런 차이에 대한 무관심을 결과는 무엇일까? 이남석은 "지배집단은 자신의 경험, 문화, 사회적 능력과 상이한 차이 집단에게 끊임없이 불이익을 준다"고 말한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지배 이데올로기인 반공은 지금도 사상과 이념의 다양성을 옥죄이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경제체제를 지배하면서 경제적 약자에 대한 배려는 더욱 힘들어졌고, 그들이 내세우는 권리는 무시되거나 국가권력과 경제권력은 오히려 탄압까지 한다. 차이를 인정하지 않음으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비극은 지금 우리 눈으로 직접 보고 있다.


 


문화와 정치, 이념과 성별, 종교와 신념, 성적지향성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국가와 사회 구조를 극복하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차이를 인정함으로 우리 사회는 좋은 사회, 동반자 관계로 나아갈 수 있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단까지 밀고 가며, 근·현대 정치의 토대가 되는 추상적 개인주주의를 부정하며, 개인이 아닌 집단을 정치의 주체로 내세운다. 이러한 차이의 정치가 가정하는 '좋은 사회'란 집단의 차이를 제거하거나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문화적으로 차이가 있는 집단들이 모두 평등하며, 서로를 존중하고 차이를 인정하는 사회이다. 결국 좋은 사회란 각 주체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그 차이를 정치의 동반자 관계로 설정하는 사회." (24쪽)


 


이남석은 Chantal Mouffe의 말을 빌어 민주주의를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평등한 입장으로 정치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인민에 의한 인민의 지배' 또는 '정부와 피지배자의 동등성'으로 정의"된다 말하고 있다. 인민의 능동적 참여. 이는 각 인민 개체가 주체적으로 자기의 의견을 개진하고, 권리의 행위자인 동시에 권력의 주체라 할 수 있다.


 


유럽이 근대 국가로 발전한 배경에는 파벌간의 대립, 중세 자유인 간의 대립을 의미하는 싸움을 조정하고, 명분 대립이었던 종교 존쟁을 종식시키고, 그 지역 내의 '평화, 인전, 질서'를 도입하는 데 성공하기 때문이라고 이남석은 말한다.


 


차이의 정치를 성공시킨 나라로 캐나다를 예로 든다. 캐나다 안에서 퀘벡주는 프랑스언어권로 영어권이 지배하는 캐나다에서 독립을 끊임없이 주창하고 있다. 하지만 퀘벡주 안에 사는 인디언들은 연방정부에서 독립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독립과 연방정부에 귀속되는 상황은 폭력으로 나아갈 수 있지만 퀘벡주는 그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았다.


 


"캐나다 내의 다민족과 다인종이 요구하는 자치정부 권리와 다인종의 권리는 분리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공영을 위한 자치 정부와 다인종의 권리로 해석되어야 한다. 즉 더 큰 캐나다 안에서 공영을 위한 다민족과 다인종의 권리를 확보하는 것이다." (122쪽)


 


캐나다는 헌법과 정치의 다양성 인정, 각 주체들의 다양한 참여, 공영을 통하여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인종과 언어 차이를 극복함으로 차이의 정치가 현실 사회에서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음을 이남석은 말한다.


 


정치는 권력이다. 권력은 원래부터 선하지 않다. 하지만 정치를 통하여 사회는 운영되고 있다. 그러기에 모든 이가 정치에 참여함으로 특정 집단, 소수집단, 특정이념, 특정 신념만이 정치 주체가 되어 국가와 사회를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된다.


 


차이를 인정하는 사회, 정치가 필요하다. 타자성을 회복해야 한다. 형식민주주의는 실현되었지만 실질과 평등 기준으로 보면 아직 민주주의가 갈 길은 멀다. 우리는 이 실현을 위하여 나아가야 한다. 차이의 정치는 보편인간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공간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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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의 후예들 | 역사 2008-04-22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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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춘향의 딸들, 한국 여성의 반쪽짜리 계보학

백문임
책세상 | 2001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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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을 살아가는 '여성'은 무엇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남성들이 바라보는 '대상'일까? 그저 남성이 바라보기맨 해도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아니면 '주체'로 살아가고 있을까?


 


백문임은 책세상문고 · 우리 시대 043<춘향의 딸들, 한국 여성의 반쪽짜리 계보학>을 통하여 우리 역사 속에 자신을 드러내었던 여성들이 근대 대중물의 여주인공들이 어떤 방식으로 형식화되었고, 어떤 의미들을 유포시켰는지 말한다.


 


'춘향'은 우리 의식 속에 지고지순한 여성, 오직 한 남자만을 위한 정절의 여인, 봉건신분사회 조선에서 신분제에 항거한 인물로 그리워져 있다. 춘향에 대한 이런 평가는 우리나라 여성들의 원형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백문임은 한국 여성의 원형이라는 '춘향' 과연 우리나라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만든 것인지 근대 문학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을 통하여, 여성 내부가 만든 것인지, 거대한 외부 담론을 통하여 의식화가 된 것은 아닌지 반문하면서 한국 여성의 반쪽짜리 계보학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진정 여성이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서 살아가기를 원한다.


 


춘향은 지금도 리바이벌 되고 있다. 소설, 영화, 드라마를 통하여. 판소리를 당연히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백문임이 주목한 것은 먼저 <춘향전> 초기 판본은 춘향은 미인이 아니라 추녀였고, 사랑하는 양반 남성을 차지하기 위한 과감성, 적극성와 당돌함, 명민한 인물로 그렸지만 후기 판본으로 오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정절과 지고지순한 여성상을 변모되었다고 말한다.


 


"봉건제의 질곡을 타파하기 위하여 고군분투하던 여성에서 봉건제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한 여성으로 변모해 나간 것이다. 이는 여러 차례 만들어진 영화 <춘향전>의 시각적인 이미지에 힘입은 바가 크며, 여기에 개입되는 것은 철저하게 근대 이데올로기이다."(41쪽)


 


춘향의 후예들, 봉건신분제하에서 지고지순과 정절을 강요받았던 조선 후기 시대를 뒤로하고 근대 사회의 대중물은 여성들은 어떤 존재로 다루었을까? 백문임은 근대 대중물 속에 등장하는 여성 주인공들 좌표를 세 가지로 나누어 짚어본다. 정절 이데올로기, 돈이냐 사랑이냐의 문제에서 발생하는 삼각관계, 민족 알레고리로서의 '팔려가는 딸' 모티프가 그것이다.


 


조중곤의 <장한몽>의 '심순애,' 이광수의 <무정>의 '박영채,' 그 유명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의 '홍도' 통하여 정절 이데올로기, 돈이냐 사랑이냐를 다룬다. 박영채, 심순애, 기생 홍도는 가난한 집 아이, 고아, 기생이었다. 이들은 정절을 통하여 대중들 인기를 모았다. 하지만 강요된 정절이라 가치에 내던져진 존재였다고 말한다.


 


"이 여주인공들은 정절이라는 가치를 단순히 믿고 떠받드는 것이 아니라 그 가치 때문에 자신의 온 존재를 내던지게 된다."(46쪽)


 


정절 이데올로기든, 돈과 사랑이든, 팔려가는 딸이든 그들은 결국 '정절'이라는 전통가치 안으로 수렴된다. 정절로 수렴된 여성에게는 주체가 없다. 그들은 가부장적 가치 기준에 매몰되어 관리 되어야 할 존재일뿐이다. 정절을 강요당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가족을 위하여 몸까지 팔아야 하는 여성은 주체가 아닌 가부장과 민족의 관리 대상인 것이다.


 


"전통적 가치를 담지한 여주인공들에 대한 대중의 사랑과 연민, 그리고 그 가치를 유독 '정절'로 고착시킴으로써 생겨나는 분노와 폭력, 이는 대중물의 여주인공들이 가부장-민족의 노스탤지어를 충족시키는 가장 적절한 대상이었음과 동시에 가부장-민족의 무능과 불안을 상기시키도 하는 복합적인 주체였음을 흥미롭게 드러낸다.(66쪽)


 


백분임은 마지막 5장을 할애한 '여귀(女鬼)' 공포 영화(<흡혈귀마녀><미녀공동묘지> <여곡성>)를 통하여 홍도와 심순애과 다른 이미지를 그리려고 했다. 자식을 낳지 못하거나, 정절을 잃었을 때 자살을 통하여 전통 가부장과 가족 제도에 항거하여 '한'으로 저항한 것이다. 아이를 낳지 못함, 정절을 잃어버린 것으로 죽음을 택한 것은 적극적인 항거가 아니다. 결국 죽어서도 '정절'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을 밝힌다. 가부장 질서 붕괴까지 넘어설 수 없었던 것이다.


 


"여귀들은 내러티브가 진행되면서 어느덧 악한에서 가문의 최후의 보루로 변한 남성에 의해 제거당하고, 관객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극장문을 나섰을 것이다."(137쪽)


 


백문임은 근대 우리나라 대중물 속에 나타난 이런 여성에 대한 인식, 춘향 초판본이 신분제도에 항거하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현모양처와 지고지순한 여성, 정조를 강요받는 춘향으로 담지되었고, 그 후예들은 스스로 그들이 만든 가치 체계가 아니라 대중문화를 통ㅎ여 강요받게 되었고, 그들 역시 정절과 팔려가는 딸을 통하여 주체로서 살아가는 인간이 아니라 결국 남자와 가족을 위한 희생을 강요받고, 하나의 대상으로만 그려진 사실을 비판하면서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여성으로 자리매김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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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라는 선물 | 어린이 2008-04-20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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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마음이 ...

신동익 원작/오은영 글
홍진P&M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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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 어떤 영화볼래?"


"마음이 보고 싶어요?"


"왜 마음이 볼려고 하는데."


"아빠가 성탄절 선물로 <마음이>를 사주셨는데 영화도 보고 싶었어요?"


"<마음이> 읽고 무슨 생각을 했어?"


"마음이 아팠어요? 어른들이 마음이를 때릴 때에 눈물이 났어요? 왜 예쁘고 착한 마음이를 때리는지 모르겠어요?"


 


지난 1월 경기 구리 목사님 댁에서 나눈 이야기 한토막이다. 지난 해 성탄절에 아내가 아


 

이들에게 받고 싶은 선물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둘째 서헌이가 고른 선물이 <마음이>였다. <마음이>는 그렇게 우리 집에 들어왔고, 결국 영화까지 보게 되었다.


 


대부분 책이 먼저 나오고 영화가 제작되지만 <마음이>는 영화로 제작되고 책으로 나온 특이한 경우다. '찬이'와 '소이' '마음이'는 사랑을 잃어버린 존재였다. 찬이와 소이는 버림을 받았고, 강아지 한마리도 어미개 젖에서 철저히 외면 당했다.


 


외면 받은 이는 외면받는 마음을 알았을까? 찬이는 강아지를 훔친다. 훔쳐 동생 소이에게 생일선물로 준다. 그 때까지 강아지로 존재했던 그에게 소이는 '마음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오빠, 우리 이 강아지 이름 마음이로 하자."


"마음이?"


"나, 엄마한테 강아지 갖다 달라고 기도했거든. 근데 엄마가 내 마음을 알았나 봐. 그러니까 마음이로 하자. '윤. 마. 음"(12쪽)


 


소이는 버림 받았지만 그는 아직 분노를 알지 못한다. 오히려 마음이를 통하여 사랑을 회복하고자 한다. 어른 그를 버렸지만 아이는 아직 버림을 증오로 변화시키지 않고 있다. 마음이를 통하여 소이는 사랑을 확인해가고 있었으며 거의 다 자란 마음이는 소이와 동화된다.


 


하지만 찬이는 아니다. 미술 시간이 만나고 싶은 얼굴을 그리지만 뭉개진 얼굴이다. 눈과 코가 뭉개진 얼굴 '엄마?'


 


"전 … 만나고 싶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안만들었습니다."(21쪽)


 


거짓말? 참말?만나고 싶었지만, 버림받았다는 분노때문일까? 아니면 정말 만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만나고 싶었지만 기억나지 않았을까? 그 날 찬이는 PC방에서 게임을 하다가 엄마 아빠가 없다는 동무들 놀림에 분노하고 만다.


 


찬이가 분노할 때, 소이는 그런 오빠를 한없이 기다린다. 누구를 기다린다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희망이다. 버스가 지나가도 오빠는 오지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 오빠는 올 것이다. 아이스크림을 먹기 위한 기다림이지만 그것은 사람에 대한 기다림이다. 비록 다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을 오빠가 안겨다 주어 눈물이 났지만 오빠와 마음이와 함께 그들은 하나가 된다.


 


엄마가 버렸지만 소이는 엄마놀이 빠졌다. 엄마 옷, 엄마 스카프, 엄마 립스틱. 소이가 마음이와 하는 엄마 놀이.


 


"엄마가 돈 많이 벌어 올 테니까. 너 학교 잘 갔다 와. 애들하고 싸우지 말고 아이스크림 두 개만 사먹어. 자, 돈."


 


엄마 소이는 딸 마음이에게 다정한 엄마였지만 엄마는 그렇게 돈 벌러 갔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마음이를 자신으로 생각하였지만, 엄마는 소이가 아니었다. 마음이에게는 가방도 매어주었지만, 마음에게는 금방 돌아왔지만 엄마는 소이에게 가방을 매."어주지 않았고,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 아이들에게 돌아가지 않는 부모들이 많다. 아이들은 한 없이 사랑을 주지만 어른은 사랑을 주지 않는다. 돈과 공부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한다. 소이를 겨울 강물에 잃어버리고 엄마를 찾아나선 찬이 하지만 엄마는 그에게 너무 멀었다.


 


"보고 싶어도 참고, 힘들어도 참고, 잊어버리고 그렇게 살아야지 …."(66쪽)


 


엄마 방에 누웠지만 엄마 냄새 조차도 낯설었을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엄마가 내민 것 역시 돈이었다. 사랑과 아픔을 나누는, 이미 강물과 동무가 되어버린 소이는 엄마와 찬이에게 아무런 존재도 아니었다. 사랑과 아픔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소이가 없는 그곳은 엄마와 찬이를 영원히 하나되게 하지 못하는 간극이다.


 


찬이는 부산에 갔다. 씨뎅을 만나고 잃어버린 아이들을 만났다. 하지만 그곳은 또 다른 죽음이 도사리고 있었다. 폭력만 존재하는, 힘이 진리인 곳이었다. 찬이와는 비교할 수없는 권력, 그 권력의 지독한 사랑을 받는 마음이와는 다른 베키가 있었다.


 


마음이는 소이가 남긴 보관함에서 소이 냄새를 맡았다. 작은 불빛은 소이 목소리가 되어 마음이에게 속삭인다.


 


"여기 있으면 오빠가 꼭 올거야. 우리 둘이 기다리는 거야. 이렇게 둘이 있으니까 하나도 안무섭다. 그치?"(83쪽)


 


여기에 이르자 거룩함을 경험했다. 소이와 소통하는 마음이. 이는 인간이 범잡할 수 없는 일이다. 인간 이성을 뛰어넘는 무엇인가가 있다. 두목과 하나인 베키와 소이와 마음이, 그리고 찬이를 통한 극명한 두 세계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같은 공간이지만 전혀 다른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두목을 개를 죽음으로 이끈다. 권력을 통하여 개뿐만 아니라 버림받은 아이들까지 죽음이라는 난장으로 이끌어가기를 원한다.


 


"마침내 베키가 마음이 목을 물었습니다. 마음이는 목을 물려 꼼짝 못하다가 간신히 몸을 빼냈습니다. 마음이 목에 핏물이 번져 나왔습니다. 피를 보자 두목 눈빛이 미친 사람처럼 번득였습니다.."(110쪽)


 


두목과 베키가 만든 죽음이라는 세상은 무엇일까? 두목도 버림 받는 자였고, 베키도 마음이 같은 개다. 다를 바가 없다. 그들도 버림 받았으면서도 그들은 지금 죽음이라는 공간을 만들었다. 그 죽음이라는 난장을 마음이와 찬이, 씨뎅은 거부한다.


 


죽음의 저주를 만든 두목을 향하여 마음이는 저항한다. 마음이에게 이 저항 정신은 어디서 왔을까? "이 새끼 죽이삐라"고 외치는 두목을 향하여 마음이는 저항한다. 그렇다. 생명을 해하는 그 어떤 누구도 마음이는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소이의 죽음을 통하여, 찬이가 겪은 고통을 통하여 생명이라는 존엄성을 해하는 것을 마음이는 인정할 수 없었기에 그는 저항했다.


 


마음이도 인간존엄성을 해하는 것에 저항한다. 그가 존엄성이라는 고귀한 것을 이해할 능력은 없지만 그는 본능을 통하여 깨달은 것이다. 자신을 버림으로 얻는 것은 무엇일까? 훔쳐온 개 '마음이' 그가 아프다. 죽음이 그를 어떻게 맞아줄까? 죽음이 찬이와 영원히 만나지 못하게 할까? 아니면 소이와 영원한 삶을 누리게 할까?


 


"소이, 소이 보고 싶으면, 정말 소이가 많이 보고 싶으면 … 그렇게 해. 더 이상 아프지 말고 …. 소이한테 가. 난 괜찮으니까…… 더 이상 아프지 마."(159쪽)


 


아이들과 아내가 <마음이>를 읽고 울었다. 왜 울었을까? 슬픔, 아픔, 폭력, 애잔한 사랑. 그 무엇이든지 중요한 것은 마음이를 통하여 아이들이 사랑을 통하여 더불어 사는 삶, 사랑이 우리를 슬퍼게 할 수도 있음을. 사랑은 많은 고통과 아픔이 따름을. 함께 나누는 일이 얼마나 중요함을. 폭력을 통한 죽음이 얼마나 잔인한지를 알았으면 좋겠다. 버림과 폭력을 통한 죽음이 난무하는 세상이 아니라 사랑과 나눔, 희생을 통한 더불어 사는 세상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알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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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가 26살 어린 고봉에게 잘못을 시인하다 | 에세이 2008-04-20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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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이황,기대승 저/김영두 역
소나무 | 2003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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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말할 필요가 없지만, 그가 누구인지 묻는다면 쉽게 말할 이가 그리 많지 않다. '고봉.' 조금은 알 것 같지만, 말하라면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은 단편 지식에 머물 뿐 깊이 알지는 못한다. 우리는 단편으로 모인 지식 나부랭이를 가지고 온지식으로 착각하면서 산다. 퇴계과 고봉을 말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1558년 명종 13년 10월, 퇴계는 지금의 국립대학 총장격인 성균관 대사성이었고 고봉은 대가에 막 급제한 청년이었다. 당대 최고의 유학자로 존경받던 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1570)이 1558년 문과에 갓 급제한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1527∼1572)과의 만남을 기뻐하며 편지를 썼다. 두 사람의 편지는 1570년 11월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퇴계가 육신을 내려놓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지극히 사적인 내용에서부터, 평생, 온 힘을 다하여 이런 사유와 지식 산물인 사상과 이념을 주장하는 치열한 지적 사유 논쟁까지 포함한, 13년 동안 오간 편지를 모은 책이 있다.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이 책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1부는 두 분 사이에 오간 '일상 편지들'이고 2부는 두 분이 '사단칠정' '태극' '상례나 제례' '국가와 왕실의 전례' '묘갈명'을 논한 것을 모았다.


 


이기이원론으로 유명한 퇴계와 이기일원론으로 퇴계의 이론을 논박한 고봉이 편지형식으로 소개되었기 때문에 마음을 구성하는 이-기, 그리고 성-정, 사단-칠정 등의 사유 논쟁을 읽을 수 있다. 이기이원론과 이기일원론. 이-기, 성-정, 사단-칠전에 관한 깊은 지식이 아니라 나부랭이도 안 되는 미천함 때문에 편지글 하나 하나를 읽어가는 것은 고역이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대목은, 오늘날로 치자면 국립대 총장격인 퇴계 선생이 나이가 한참 어린 26살 연하의 고봉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제 견해가 잘못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부분이다.


 


이는 그냥 겸손이 아니다. 고봉의 지적 깊이가 어떤 부분에서는 퇴계를 능가했다는 것이며, 퇴계는 자신과 견해가 다를지라도 논리와 타당성이 있다면 고봉의 지적 사유를 인정했다는 의미다. 지식과 사상이 발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고봉은 지식 나부랭이를 논한 것이 아니다. '젊음'이라는 객기도 아니다. 객기만 가지고 구세대를 탓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이미 조선 사상의 지랫대인 성리학에 성큼 들어섰고, 퇴계와 같은 성리학 반열에 있었지만 진리에 이르는 길을 조금 달리 했을 뿐이다. 퇴계는 이를 인정했다.


 


오늘날 자신의 제자가 '스승님 견해가 잘못되었습니다' 라고 논박할 때 스승은 어떻게 대답할까? 아니 '스승님 견해가 잘못되었습니다' 라고 할 만한 제자들의 지식과 사유는 얼마나 깊을까? 껍데기만 가르치고, 배운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지적 사유 논쟁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 세태다. 사유와 지적 논쟁 없는 가르침과 배움만 반복되는 대한민국 대학가이다. 학원가이다. 껍데기 가지고 옳으니, 틀렸니만 외쳐대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조선 시대보다 사상과 철학이 더 진보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스승과 제자 사이에도 지적 논쟁이 없지만 교수와 교수 사이에도 이념적 틀이 다르면 지적 논쟁이 성립되기 어려운 시대다. 사상과 철학이 천박한 시대이다. 천박함은 돈만을 추구하기 때문이 아니다. 학문에서, 사상과 사유가 사라져버리고 빈껍데기로 학문인양 외쳐대기 천박하다. 실용과 이익이 남지 않으면 학문이 아니라고 하는 시대이니 천박하다. 퇴계와 고봉이 지적 사유 논쟁을 논할 때까지만 해도 조선은 정말 살아 있는 시대였다. 지금보다 그 시대는 살아 있었다.
 


“옛 배움을 익히고 연구해 처음 세웠던 뜻을 저버리지 않고자 합니다만, 잡다한 일이 저를 얽어매어 종일 겨를이 나지 않습니다. 또 속마음을 털어놓을 만한 곳도 없으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고봉)


 


“언제나 빼앗을 수 없는 의지와 꺾을 수 없는 기개와 속일 수 없는 식견을 지녀야만 합니다. 그리하여 학문의 힘을 나날이 담금질한 뒤에야 발꿈치가 단단히 땅에 붙어서, 세속의 명예나 이익 그리고 위세에 넘어지지 않기를 바랄 수 있을 것입니다.” (퇴계)


 


배움과 연구를 통해 학문을 알아가고자 했지만 벼슬길에 들어선 고봉은 잡다한 일로 학문을 알아가는데 안타까움을 말한다. 어디 배움을 구할 때가 없다고 말한다. 세속 일이지만 나라일이고, 나라 일을 하려고 하는데 잡다한 일이고, 학문을 해야 할 시간을 빼앗긴다는 안타까움에 퇴계는 학문은 나날이 담글질해야 하는 일이라 한다. 담금질해야 세속의 명예와 이익에 넘어지지 않는다 말한다.


 


조선시대나 이 시대나, 고봉과 퇴계나 우리 세대도 마찬가지다. 세속의 이익과 명예는 끊임없는 도전이다. 우리 시대 대학은 이미 학문을 잃어버렸다. 초등학교부터 학문은 관심대상이 아니다. 세속의 명예와 이익에 학문이 천박해졌다. 학문을 처세의 방편으로까지는 삼는 시대다.


 


"저는 늘 말하기를 처세가 어려운 경우 나는 내 배움이 완전하지 못함을 걱정할 뿐이다. 내 배움이 만약 완전하다면 반드시 처세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했습니다." (고봉)


 


"이른바 미진했다 함은 다름이 아니라 학문을 이루지도 못했으면서 자신을 높이고, 시대를 헤아리지 못했으면서 세상을 일구는 데에 용감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실패한 까닭이니, 큰 이름을 걸고 큰 일을 맡은 사람은 반드시 경계해야 합니다." (퇴계)



큰 이름을 걸고 큰 일을 해야 할 사람이 학문을 이루지 못하고 큰 일을 도모하는 우리 시대다. 퇴계는 학문만이 아니라 정치를 알고 있다. 정치란 처세가 아니라 학문이 바탕이며, 학문 없는 처세가 나은 정치는 비극임을 갈파한다.


 


우리 정치는 정말 껍데기다. 학문에 바탕한 정치가 아니라 처세에 밝은 이들이 오로지 '정권'을 잡기 위해 하는 잡다한 말싸움, 기세싸움만 하고 있다. 처세만 있는 정치는 비극이다. 나라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이들이 지적 사유의 깊이를 통한 바탕 없이 처세를 통한 정권 잡기에만 붙잡혀 있으니 우리 정치가 비극으로 갈 수밖에 없는 이유다.


 


대운하, 학교자율화, 미국산쇠고기 수입을 보시라. 어디 인간이 있는가? 사람이 없다. 우리 미래를 결정하는 중대한 문제에 대한 진지한 논쟁이 없다. 진지한 논쟁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비전문가 매도한다. 발목잡기리 몰아친다. 사실 그들에게는 진지한 논쟁을 할 지적 능력과 가진 것이 없다. 속이 텅 빈 것을 가지고 무조건 밀어붙이니 무슨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인가? 시민들도 이런 사유 논쟁에 관심이 없다. 오로지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이익에 매몰되어 버렸다. 돈과 자본에 노예가 되어버렸으니 오늘은 배부를 수 있으나 내일은 없다. 내일이 있다고 할 수 있느가? 없다.


 


사람없는 경제, 학교, 대운하다. 오로지 돈만 되면 다 된다. 조선을 누가 봉건시대라고 욕할 것인가? 성리학에 매몰된 퇴물로 취급할 것인가? 인간에 대한 논쟁은 대한민국이 조선보다 후진국이다.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는 만남과 대화를 통해 퇴계와 고봉이 지적사유논쟁을 어떻게 이루어가는지 자세히 보여준다. 자기완성이라는 영원한 숙제를 풀고자 그들도 고민하고 논쟁했다. 서로에게 묻고, 답했고, 논박하고 비판했다. 수긍과 인정이 반복된다.


 


퇴계와 고봉, 대사성과 급제한 신출내기, 26살 차이, 이기이원론과 이기일원론 지적사유 사이가 있었지만 그들은 13년간 편지를 통해 생각을 나누었다. 우리 시대는 이런 논쟁을 찾아볼 수 없다. 이런 논쟁이 있어야 학문도 발전하고 정치도 발전한다. 없다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논쟁을 시도하면 된다. 퇴계와 고봉이 논쟁했던 13년간의 '조선'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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