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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영혼의 속사임 | 인물 2009-02-27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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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미국 일리노이 주 알턴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수줍음을 잘 탄 그 아이는 재즈를 절대예술로 승화시켰다는 찬사를 받았고, 시대를 앞서간 재즈의 황제라는 칭송을 받았던 ‘마일즈 듀이 데이비스 3세’이다. 흔히들 '마일즈 데이비스'로 부른다.

 

마일즈는 찰리 파커, 존 콜트레인들과 함께 연주하고, 디지 길레스피, 소니 롤린스, 웨인 쇼터, 그리고 또 다른 재즈 거장 길 에반스와 함께 음악 세계를 일구었지만 관객에게 등을 돌린채 연주한 외로운 재즈 연주자였다.

 

1991년 그가 생명을 놓은 후 그를 기리는 평전이 출간되었다. 그와 함께 했던 많은 이들의 입을 빌려 존 스웨드가 지은 <마일즈 데이비스> 평전이 을유문화사 현대예술의 거장 시리즈 6권으로 나왔다.

 

<마일즈 데이비스> 부제는 ‘거친 영혼의 속삭임’이다.  책 표지를 보고 책을 고르는 일들이 많아지고 있지만 나에게는 선택 기준은 아니었지만 <마일즈 데이비스> 표지는 강렬했다. 피부색부터 배경까지 온통 검다. 하얀 눈동자만 하얗다.

 

서글프게 보일 정도로 눈매는 자신의 피부색부터 받았던 아픔을 거부하거나, 혹은 관객 앞에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던 외로움을 이겨내면서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만들고가 했던 내면을 읽도록 인도하는 표지이다.

 

평전은 자칫 잘못하면 '진실'보다는 '전설'을 말하려는 오류에 빠져버린다. 시대를 앞서간 재즈의 황제, 재즈를 절대 예술로 승화시켰다고 칭송을 받는 마일즈 데이비스 같은 이의 평전을 쓴다면 진실을 전설로 말하려는 오류에 더욱 빠지기 싶다.

 

존 스웨드는 이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데이비스 가족과 동료 연주자들, 데이비스 자서전, 인터뷰 내용을 통하여 많은 모순으로 가득 찬 숱한 의미를 형상화, 한 개인의 삶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하고 광대한 공공의 자아를 창조하는 노력을 했음을 밝힌다.

 

존 스웨드는 인류학과 흑인 문학을 공부했는데 특히 재즈를 문화사적으로 조망하는 탁월한 능력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책갈피 한 장 한 장을 넘긴면 존 스웨드가 마일즈의 음악과 생애를 조망함에 있어서 음악뿐만 아니라 역사, 철학, 문학, 미술, 연극, 영화, 패션 따위를 사용하고 있음을 경험하게 된다.

 

마일즈 데이비스의 음악과 생애은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옮긴이 김현준 '냉속적 집착'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 집착의 의미와 그로 인해 빚어진 결과들 속에서 일련의 모순과 페이소스를 발견한다면, 그리고 '쿨'이라는 말로 그를 표현하는 것을 얼마나 무책임하고 피상적인 관찰이었는지 깨닫는다면, 비로소 마일즈 데이비스의 음악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8쪽)

 

우리는 <마일즈 데이비스>를 읽어가면서 피상적인 마일즈가 아니라 고등학교 시절 앞자리에서 말없이 앉아 책 한 권 손에서 놓지 않았던 그 녀석을 만날 수 있으리라 옮긴이는 말하고 있다. 음악만이 아니라 그 음악 세계를 만들어 간 사람을 만난다는 의미이다. 고독하고 외로운 사람이었다.

 

"무대 위의 마일즈는 어떠했는가? 그래, 정물화라는 표현이 좋겠다. 무릎을 조금 굽히고 고개는 앞으로 숙인 채 모든 것이 덧없다는 듯 미동 하나 없이 가만히 연주에만 몰두했다. 마일즈의 음악에는 외로움의 눈물이 담겨 있었다. 자아의 깊숙한 곳에서 넘쳐흐른 1950년대의 많은 이들이 느끼던 바르 그 진한 눈물."(371쪽)

 

이렇듯 마일즈 사운드는 '요아힘 에른스트가 표현했듯이 음악이라기 보다는 개인적 저항에 어울리는 무조건적인 슬픔과 체념의 소리였다. 그는 쉽게 화를 내었고, 자신에 대한 비평에도 쉽게 상처를 받았다. 그가 연주 중에 여유로워 보인 적은 없을 정도. 하지만 그는 이 고독함과 외로움을 무대 위에 무릎을 꿇은 채 날카로운 단검을 들어 자신의 육부 아낌없이 도려냄으로써 마일즈 데이비스를 만들어 갔다.

 

"마일즈 데이비스는 무대 위에 무릎을 꿇은 채 날카로운 단검을 들어 육부를 아낌없이 도려낸다. 테너 색소포니스트 조지 콜먼이 이를 받아들이고 능청스런 살풀이를 추어댄다. 마일즈의 손에 들렸던 단검이 피아니스트 허비 행콕에게 전해지고, 베이시스트 론 카터가 주머니에서 새하얀 손수건을 꺼내 허비 행콕에게 건텐다. 허비 행콕은 마일즈의 단검을 성스러운 손짓으로 곱게 닦아 다시 칼집에 집어 넣는다."(9쪽)

 

이 지독한 외로움을 소유했던 마일즈이기에 그가 남긴 음악을 듣다는 것만으로 마일즈를 다 알 수 없다. 아주 가까이 있지 않았다면 진실을 올곧게 알지 못하는 인물이라고 존 스웨드는 마일즈를 평가한다.

 

그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했고, 정체성 마저 과감히 바꾸었다. 1940년대 말에는 첨단을 추구한 비밥 수련생, 50년대 말에는 낭만적인 반항아, 흑인이라면 누구나 경험했던 1960년대 인종 문제에 날카롭게 대립했으며, 1970년대는 흑인 음악 신봉자로 살았다. 1970년대는 광적인 유배생활, 말년은 팝으로 살았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오늘날 음악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물어본다. 내 생각엔 짧은 악절들로 흘러가고 있는 것 같다. 잘 들어보면, 귀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것을 듣고 알 수 있다. 음악은 항상 변하고 있다. 뮤지션들은 사운드를 얻어 자기들의 연주로 구체화하므로 그들이 만드는 음악은 다르게 될 것이다. 신디사이저와 사람들이 연주하는 그런 다른 모든 새로운 악기들은 모든 것을 다르게 만든다. 악기는 나무였다가, 금속이 되었고, 이제는 딱딱한 플라스틱이다. 미래에는 어떻게 될지 내가 알지는 못하지만, 뭔가 다른 것이 되리라는 것은 안다.(<마일즈 데이비스 자서전 3권> 157쪽, 집사채 펴냄)

 

<마일즈 데이비스>에는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지 않다. 모던 재즈에서 록, 팝까지 아우른 음악 세계를 진지하게 만날 수 있다. 거친 영혼의 속삭임이라는 평가를 받는 마일즈의 음악 세계를 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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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에 맞선 춤꾼, 피나 바우쉬 | 인물 2009-02-27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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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피나 바우쉬


을유문화사 | 2005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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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로 이성 혁명을 몰고 왔던 철학에 데카르트가 있다면 무용에는 “나는 춤춘다, 고로 존재한다”는 춤꾼 ‘피나 바우쉬’가 있다. 그는 독일 출신 여성 안무가로 춤, 연극, 노래, 미술의 경계를 허문 탈 장르 양식 ‘탄츠테이터’(tanztheater)로 20세기 현대무용의 흐름을 바꿨다.

 

2003년 아카데미 각본상과 골든 글로브 외국어 영화상을 받은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영화 <그녀에게(Talk to her :2002)>는 피나 바우쉬의 작품 <카페 뮐러>가 열고, <마주르카 포고>가 닫는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은 "<그녀에게> 삽입된 피나 바우쉬의 <마주르카 포고>는 목가적 분위기와 고통에 찬 아름다움으로 나를 울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카페 뮐러>는 소통의 단절과 고통, 슬픔을 표현하였고, <마주르카 포고>는  강한 생명력, 기쁨과 희망을 전해주었다. 사람들은 그를 ‘현대 무용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라 부르는 데 <을유문화사>가 '현대예술의 거장 시리즈' 5번째로 <피나 바우쉬>-'두려움에 맞선 춤사위'으로 평전을 냈다.

 

현대 무용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우지만 그는 낯가림과 수줍움이 심한 내성적인 성격 소유자이다. <피나 바우쉬>는 낯가림과 수줍움을 가졌던 그가 어떻게 탄츠테아터라는 새로운 무용 세계를 어떻게 창조해갔는지 보여준다.

 

16장으로 구성된 <피나 바우쉬>를 한 장씩 읽어가면 "무대 위에서 예술적 목표를 관철시킬 때는 대단한 용기와 추진력을 드러내는 그가 실은 자신을 내보이는 것을 꺼리고 검은 복장을 즐겨 입으며 인도를 좋아하는 것, 겸손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평범한 거리의 사람들에게는 친절한 그가 이름난 비평가나 언론인 혹은 저명 인사들에게는 매우 유보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어떻게 인간이 움직이는가보다는 무엇이 인간을 움직이는가에 더 흥미를 느낀다." 이를 두고 <피나 바우쉬>를 지은 요헨 슈미트는 관객들이 피나 바우쉬 작품을 보고 당혹감을 가진다고 평했다.

 

"모든 사람이 적어도 가끔씩은 스스로에게 제기할 수밖에 없는 인간 실존의 핵심적인 질문들을 다룬다. 그것들은 사랑과 두려움, 그리움과 외로움, 좌절과 공포,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 어린시절과 죽음, 기억과 망각 등이다."(22쪽) 

 

이렇게 그는 '인간'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졌다. 사람들은 자신 내면 속에 자리잡고 있는 사랑과 두려움, 그리움과 외로움을 드러내는 그를 통하여 당혹감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된다.

 

사랑과 두려움, 그리움과 외로움, 좌절과 공포는 한 개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가 함께 가졌다. 두려움은 우리 시대 주요한 문제 중 하나이며, 좌절과 공포는 현재 온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금융위기, 테러와 전쟁 따위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신뢰가 붕괴된 사회, 믿음이 없는 사회가 던진 두려움을 그는 작품으로 표현했다.

 

"두려움은 이 시대의 주요문제 중의 하나로, 피나 바우쉬의 창작 작업에서도 역시 가장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그녀 자신의 두려움이며 그녀의 등장인물들 두려움이다. 그것은 사람을 마비시키고 공격적으로 만드는 두려움이며, 자신을 드러내고 그래서 상대편에게, 파트너에게 무방비 상태로 내맡겨지는 데 대한 두려움이다. 상대방의 반응들이란 신뢰할 수가 없다."(23쪽)

 

하지만 이 두려움은 사랑을 받고 싶은 강렬한 소망이다. 피나 바우쉬는 두려움과 사랑받고 싶은 강렬한 소망을 표현했다. 사랑받고 싶다는 것은 혼자가 아니라 다른 이가 존재함을 말한다. 두려움에 휩싸인 인간이 사랑받고 싶은 열망을 자신의 창작활동을 통하여 보여주었다. 일종의 보호자 역할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두려움에 맞선 춤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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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천재'이면서도 우리말을 사랑했던 사람 | 인물 2009-02-22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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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특집! 한창기

강운구 등저
창비 | 2008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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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군부독재가 대한민국 모든 영역에서 음혹함이 극에 달했던 1976년 잡지 하나가 창간되었다. <뿌리깊은 나무>. 당시 <신동아>가 2만 부 정도 발행되던 시절에 6만에서 많게는 8만 부까지 발행했던 대한민국 잡지사에 길이 남을 잡지였다.

 

우리 잡지들이 국한문혼용과 세로 쓰기가 정석이던 시절에 <뿌리깊은 나무>는 '한글전용'과 '가로쓰기'였다. 잡지사의 혁명이라 할까? 이 잡지를 펴낸이가 '한창기'였다.

 

잡지 형식에만 혁명성을 담은 것이 아니라 <뿌리깊은 나무>는 민중까지 담았다. 박정희 군복독재의 엄혹함 속에서도 민중과 민족을 담아 글로 표현했다. 민족과 민중을 문화로 담은 잡지를 신군부는 1980년 8월 폐간조치하였다.

 

한창기는 굴하지 않고 1984년 <샘이깊은 물>을 펴냈다. 일반 여성잡지와 차원을 달리하는 잡지였다. 군부독재정권이 민중과 민족 문화를 압살하여 <뿌리깊은 나무>를 폐간조치하였지만 한창기는 <샘이깊은 물>을 통하여 부활했다.

 

쉰아홉명이 모여 한 사람을 기리다

 

그가 간 지 11년째다. 그를 아는 이들 쉰아홉명이 모여 <특집, 한창기>를 냈다. 참여한 이들의 면면을 보면 이렇다. <뿌리깊은 나무>와 <샘이깊은 물> 두 잡지의 탄생에서부터 절명까지를 되짚어 본 유재천. "한국 잡지사는<뿌리깊은 나무>이전과 <뿌리깊은 나무> 이후로 구분된다"고까지 한 강준만 교수, 두 잡지 편집장을 지냈던 윤구병, 김형윤, 설호정까지. 특히 이들이 시대별로 쓴 '나의 편집장 시절'은 <뿌리깊은 나무>의 족적이 어떠했는지 잘 보여준다.

 

<뿌리깊은 나무>기자 출신었던 전 문화부장관 배우 김명곤, 그를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편집자'라 평한 <오마이뉴스 >정치부장 김당 등 그 두 잡지 기자 출신들, 박원순 변호사, "동무들이 리영희를 읽을 때 나도 리영희를 읽었지만 동무들이 <사상계>를 읽을 적에 나는 <뿌리깊은 나무>를 읽었다"는 칼럼니스트 김규항을 통하여 우리는 '한창기'를 만날 수 있다.

 

쉰아홉 사람이 글로 한사람을 기린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된 일인가? 11년된 육신은 썩어 문드러졌지만 정신이 남아 있기에 육신 장막이 아직도 세상에 머문 이들이 그를 기리기 위하여 글을 모았고, 그가 갔던 길을 반추했으리라.  

 

"동양 사람 중에 이보다 더 영어 잘하는 사람 못 봤다"

 

서울 법대를 나와 법조인으로 탄탄대로가 열렸지만 그는 세일즈맨의 삶을 택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한국지사 창립자가 되었다. 그는 우리나라 직판 세일즈맨 1세대였다. 어쩌면 탁월한 영어 실력이 그로 하여금 법조인이 아니라 세일즈맨, 나중에는 잡지를 통한 문화운동의 길에 들어서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영어 천재였다. 브리태니커 부사장이 한창기 영어를 듣고 “동양 사람 중에서 한창기보다 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찬탄했다고 하니 얼마나 대단한 영어 실력인가?

 

하지만 그는 '우리말'을 팽개치지 않았다. 영어를 잘한다고 우리말을 무시하지 않았다. 우리말을 사랑했다. 우리말을 사랑한 것뿐만 아니라 잘했다. 국어학자가 그에게 와서 울고 갔다는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하니 언어에 조예가 깊었다.

 

영어와 일본어로 죽어가는 우리말을 되살리려 그는 노력했다. 당시 이미 우리말은 영어투 일본어투로 본래 우리말 형식은 죽어가고 있었다. 그는 이를 민중말과 본디 우리말로 새롭게 태어나도록 노력했다. <뿌리깊은 나무>와 <샘이깊은 물> 잡지이름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영어에 목숨거는 이들, 한창기를 아는가?

 

박정희식 사고가 지배하던 시절 그는 조용한 방법으로 저항했다. <뿌리깊은 나무>는 그 방편이었고, 그는 그렇게 살았다. 영어 천재였지만 그는 우리말 살리기에 일생을 보냈다. '한창기'를 떠올리면서 문득 떠오르는 생각은 지금 우리가 '영어몰입교육'에 목숨을 거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영어만이 살 길이라고, 세계화 시대에 살아남는 길이라고 외치는 이들이 우리 교육을 지배하고 있다. 우리말을 잘하는 것이 다른 나라말도 잘하는 일임을 그들은 왜 모를까? 우리말은 왠지 하찮은 존재가 되어버린, 우리를 먹여 살릴 수 없는 존재까지 되어버린 우리 시대를 보면 '한창기'는 뭐라 할까?

 

그는 영어천재였지만 영어만이 우리가 살 길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말로도 삶을 풍요롭고 따뜻하게 살 수 있음을 보여주면서 살았다. 우리말을 망각하고서는 결코 우리 삶의 풍요를 누릴 수 없음을 또한 보여주었다.

 

영어몰입교육에 대한민국 미래가 달려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한창기'를 아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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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마에 이전에 토스카니니가 있었다 | 인물 2009-02-21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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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토스카니니

이덕희 저
을유문화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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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지난해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 '베토벤 바이러스'에. 내가 채널권을 행사할 수 없는 거의 유일한 시간대이다. 음악 전문지식이 없어 강마에의 지휘와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평가할 능력은 없지만 강마에와 연주자들이 만들어가는 새로운 음악 세상을 보면서 갈수록 빠져 들어가고 있다.

 

베토벤에 빠져들어가는 이유는 보는 이마다 다르겠지만 권력과 명예, 학연보다는 음악실력 자체에 둔 강마에의 가치관이다. 타협을 거부한 완벽주의자 강마에가 조금씩 '사람'을 알아가는 모습도 나를 빠져 들어가게 한다.

 

강마에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타협을 거부한 완벽주의자 마에스트로가 있으니 '토스카니니'(Toscanini, Arturo)이다. 불멸의 지휘자로 불리는 토스카니니는 일체의 타협을 거부하고 완벽주의로 불멸의 음악을 탄생시켰다.

 

법을 전공한 뒤 기자와 작가 생활을 하며 장편소설 <회생>, 산문집 <내눈의 빛을 꺼다오>, 발레입문서 <발레에의 초대>,  평전 <전혜린> 따위를 펴낸 이덕희씨가 쓴 <토스카니니-세기의 마에스트로>는 완벽함과 불멸을 나은 토스카니니에게로 이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는 음악을 전공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토스카니니>는 음악 비평서가 아니다. 전시대를 통틀어 종종 가장 위대한 지휘자로 불리우는 토스카니니의 삶과 예술을 말하고자 할 뿐이다.

 

토스카니니는 베르디 오페라와 베토벤 교향곡 해석에 정평이 있었으며 지휘는 섬세하였다. 거침없는 호흡과 셈여림을 잘 표현했으며 강렬하고 엄혹한 지휘자였다. 뛰어난 기억력으로 항상 암보로 지휘해서 좋지 않은 눈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암보는 전설이었다.

 

"토스카니니 이 얼마나 기막한 오케스트라 지휘자인가! 어쩌면 그렇게 확고하고 그렇게도 침착한지 이탈리아 음악의 최고의 지도자며, 이탈리아에서  바그너의 음악을 그처럼 장려한 수법으로 지휘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게다가 이 모든 것을 완전히 암보로써 지휘한다는 생각을 해보라."(24쪽)

 

<토스카니니> 1부에서는 토스카니니 전기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하베이 삭스의 <토스카니니>와 '토스카니니 숭배열'의 진정한 본질과 비밀 탐구에 독보적인 조지프 호로비츠의 <토스카니니 탐구> 따위를 바탕으로 거장의 생애와 예술 세계를 되짚어 본다.

 

2부에서는 수년 동안 토스카니니와 친밀한 관계를 맺었던 사뮤얼 초트치노프의 <토스카니니 - 친밀한 초상>에서 좀더 개인적이고 흥미 있는 에피소드를 발췌, 재구성함으로써 그간 왜곡되고 우상화되었던 거장의 인간적이고 진실한 모습을 생생하게 전한다.

 

"아름다움의 극치는 정확함에 있다." 토스카니 예술관을 가장 명쾌하게 정의한 말이다. '정확함'은 주관보다는 객관이다. 이는 지휘자 중심의 곡 해석이 아니라 작곡자 중심의 지휘를 일컫는 말이다.

 

같은 시대 지휘자들이 낭만주의 전통에 젖어 자신의 개성을 지나치게 발휘하여 곡을 해석하고, 음악 속에 자신을 투영하려 한 반면 토스카니니는 작곡자가 표현하고자 의도했던 것을 있는 그대로 살리는 데에 노력한 음악상의 강렬한 객관주의, 전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직역주의자(literlist)였다.

 

"토스카니니가 지휘의 개념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았고 그 이전에 한 세대의 지휘자들이 숱하게 범함 제멋대로식의 해석을 바로잡아놓았다는 사실은 이제 엄연히 확증된 역사가 되었다. 토스카니니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후기 낭만주의적 해석자들의 전횡을 일소해버린 데 있었다. 그는 수십년 동안 누적되어온 해석상의 뉘앙스에 덕지덕지 앉은 때를 씻어버렸다."(20쪽)

 

토스카니니는 심포니 악장마다 연주자들에게 마지막 땀한방울까지 요구하고 극도의 집중력을 이끌어내었다. 리허설 도중에는 어느 연주자가 부적당한 소리를 내거나 연주가 뜻대로 되지 않으면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는 것처럼 나가버렸다. 아니 공연중에도 나가버렸다고 한다. 

 

원칙주의자이면서 완벽주의자였던 토스카니니의 삶을 따라가면서 한 번씩 '똥떵어리'를 외쳤던 강마에와 겹치는 느낌을 가졌다. 토스카니니의 연주를 들은 청중은 '사랑과 무조건적인 존경 및 공포와 절대적인 복종'으로 반응했다.

 

 

YES24 책읽는 주말 - 2월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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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무트 뉴튼은 그냥 사진을 찍었다 | 인물 2009-02-14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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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헬무트 뉴튼

헬무트 뉴튼 저/이종인 역
을유문화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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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섹스하고, 사진찍고,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인생의 전부였던 사람이다. 생애
후반으로 갈수록 그가 유일하게 재미를 느끼는 것은 아름다운 여자를 사진 찍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섹스하기와 연장선상에 있는 활동이었다."
 

'그는' 누구일까? 1960년대 <보그> <퀸> <엘르> <플레이보이> 따위 세계적인 패션 잡지와 일하면서 패션 누드라는 영역을 개척한 공로를 인정받아, 모나코 문화 훈장(2001년), 독일연방공화국의 대십자 훈장(1992년), 파리시의 전국 그랑프리(1990년) 따위를 받았다.

 

헬무트 뉴튼이다. <플레이보이>에서 연상되듯이 사람들은 그를 '관음과 욕망의 연금술사'라고 했으며 그의 작품을 '외설이자 상업화된 포르노다', '불쾌하고 역겨운 변태성의 반영이다'라는 평가를 내렸다.

 

그렇다면 뉴튼 자신은 자기 작품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사진 작업에서 ‘예술’과 ‘고상한 취미’를 가장 지저분한 단어로 생각하면 내가 찍은 사진들은 세련된 포르노"라고 했다. 작품을 외설과 예술로 나누려는 끊없는 평론가들과 사람들 의식을 무너뜨리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포르노와 예술 경계를 무너뜨린 관음과 욕망의 마술사 헬무트 뉴튼이 자서전을 썼다. 이 자서전을 을유문화사가 '현대 예술의 거장 시리즈 ' 네 번째 편으로 <헬무트 뉴튼>를 펴냈다. 1부 1장-5장까지는 지신의 애정 편력을, 6-11장까지는 사진작가로 성공하게 된 과정을 썼다.

 

"1939년 12월 5일 아침, 나는 떠날 준비가 되었다. 아버지 눈에는 여전히 내가 독일어의 빈트훈트(Windhund: 바람의 개, 혹은 방탕아)였던 것이다. 아버지는 때때로 나를 빈트훈트라고 부르기도 했다. 아버지는 내가 원하는 게 여자와 섹스하고, 사진을 찍고,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는 것, 이렇게 세 가지 뿐이라고 생각했다."(95족)

 

2부는  노골적이고, 충격적인 작품 세계를 전하고 있다. 읽어가다보면 애정 행각 고백에 놀라고, 섹스만을 위한 삶을 살았는가 의구심이 들 정도이다. 하지만 사진작가로 성공하는 과정을 통하여 섹스가 삶이고, 삶이 섹스였던 헬무트 뉴튼이 찍고자 했던 패션 누드라는 세계를 만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깨닫는다.

 

그는 단순히 벗은 여자 몸을 찍은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물, 현실과 기억, 죽음과 부활, 빛과 그림자, 순간과  영원을 찍었다. 이렇게 찍은 작품 속으로 들어가면 독자들은 여성의 몸이 주는 예술성을 경험한다.

 

뉴튼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점은 그는 사진을 찍었다. 사람들은 사진을 찍기 전에 상상하고, 생각하고, 이론으로 설명한다. 뉴튼 그냥 사진을 찍었다. 사물, 사람 어느 것 하나 생각한 나머지 셔터를 누르지 못한다고 했다.

 

"최근에는 사진에 대한 이론적인 설명이 무진장 나오고 있다. 많은 사진작가들은 사진을 찍기 전에 그런 이론들을 너무 꼴똘히 생각하는 나머지 셔터를 누르지 못한다. 앞으로는 신문사의 사진 기자들만 열심히 사진을 찍고, 나머지 사진작가들은 사진은 찍지 않고 철학적 명상만 하게 되는 날이 올지 모른다."

 

그는 사람, 특히 여성 몸만 찍은 것이 아니라 마네킹에 겨드랑에 털과 음모를 붙여 찍기도 했으며, 남장한 여자와 여자를 함께 찍기도 했다. 이런 파격과 노골적인 표현은 311쪽-316쪽에 실린 '빅누드'와 함께 내가 가진 도덕에 바탕한 예술 관념으로서 받아 들이기 어려웠다.  

 

하지만 빅누드를 자세히 보면 에로틱한 감정보다는 섬뜩한 느낌이 들 정도로 새로운 미학을 만나게 된다. 앵글 하나 하나를 통하여 그는 몸을 말하였고, 그 앵글 뒤어 숨어 있는 사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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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도나에 맞먹는 국민 영웅, 피아졸라 | 인물 2009-02-11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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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피아졸라

마리아 수사나 아치,사이먼 콜리어 공저/한은경 역
을유문화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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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 무렵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하층인민들은 활기차고, 쾌활한 새로운 음악을 만들었다. '아르헨티나 탱고'이다. 아르헨티나 탱고는 '스페인 탱고'와  4분의2 박자로 빠르고 경쾌한 춤음악인 '말랑가', 보통 템포에 의한 4분의 2박자의 곡으로 2종의 리듬형이 특징을 이루는 '아바네라'가 혼합된 음악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태어난 탱고는 처음에는 환영받지 못했지만 1915년 경에는 유럽 사교계를 뒤흔들만큼 인기를 누렸다. 환영받는 춤곡으로 변신했지만 초창기 활기차고, 쾌활했던 리듬과 가사는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음악과 가사가 극도의 우수를 띠게 되었다.

 

아르헨티나 하층인민이 사는 뒷골목 춤곡을 클래식 음악으로 끌어올린 사람이 있으니 아스토로 피아졸라이다. 쉽게 말하면 그는 탱고의 역사를 바꾼 사람이다. 탱고와 함께 살다간 피아졸라의 삶을 파노라마처럼 엮은 책이 나왔는데 <피아졸라, 위대한 탱고>이다.

 

피아졸라는 아르헨티나에서 '에비타'(Evita)라는 애칭을 가진 에바 페론, 축구 영웅 디에고 마라도나 등과 함께 아르헨티나 국민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하지만  클랙식과 재즈와 결합시켜 전통 탱고와는 다른 새로운 탱고인 '누에보 탱고(Nuevo Tango)'를 탄생시켜 탱고 전통주의자들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어떤 택시 기사는 그를 "탱고를 파괴시켰다"고 하여 탑승 거부까지 했다고 한다.

 

"그는 철저하게 탱고 문화에 완전히 젖어 있으면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음악을 언제나 자신의 방식대로 연주했다. 그는 탱고와 클래식, 재즈를 하나로 묶는 데 근접한 작업을 했다. 그는 탱고를 현대 실내악의 형식으로 바꾸었다. 전통 탱고를 스스로 저버렸다. 바로 이런 이유로 전통주의자들은 피아졸라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다."(14쪽)

 

이런 비판에 아랑곳 하지 않았다. "탱고는 '영원한 전통이라는 법전' 안에 국한될 수 없다. 이제 '가로등과 목에 두르는 수건, 단도, 단조로운 신음 소리'라는 과거의 전형적인 탱고를 버릴 때가 온 것이다"고 말할 정도로 자신만의 탱고 세계를 만들었다.

 

전통을 거부하는 이 저항과 자신만의 탱고 속에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부산하고 요란한 현대 사회, 그리고 인간의 모든 감정을 쏟아부었다. 그는 항상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 가기를 원했다. 새로운 탱고를 탄생시켰을 때 결국 사람들은 피아졸라가 작곡한 탱고 곡을 연주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전율했다.

 

1955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간 그는 밴드를 결성하고 탱고의 작곡과 연주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커피 한 잔 마시면서 편곡을 한 곡 끝내고 빌린 피아노 앞에 앉아 몇 시간만에 곡 하나를 완성할 정도로 본능에 가까운 음악적 직관과 천재성을 갖고 있었다. 소원이 무대 위에서 반도네온을 연주하다가 죽는 것일 정도로 온몸과 혼을 바쳐 연주하고 일에 몰두했다.

 

"그는 자신의 악기와 하나가 되었다. 그는 마치 황소의 뿔을 붙잡듯이 양손으로 악기를 쥐었다. 그는 악기와 함께 춤추며, 조용히 타고 앉아 마침내 봄이 되어 활기차게 뛰노는 조랑말처럼 하늘 높이 도약한다. 뛰어난 마술사가 마지막 카드를 자랑하듯이, 또는 승리의 라오콘이 패배한 용을 잡아당기듯이 피아졸라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는 연주해야만 한다."(286쪽) 
 

그는 결코 패배를 몰랐고, 모든 면에서 최고가 되기를 원했다. "나는 다른 뮤지션들이 나와 같은 높이에서 보는 것을 싫어한다. 나는 내가 그들보다 위에 있다고 느끼고 싶었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내 탱고와 내 밴드가 이겼다는 대단한 만족감을 느낀다"고 할 정도로 자신에 대한 경외감까지 가지고 있었다.

 

피아졸라는 자신의 음악에 열정과 활력, 부드러움과 유머, 드라마, 고통, 즐거움, 강렬함, 감정을 몰아넣었다. 그는 육체적인 동시에 정신적이며 인생 그 자체처럼 예측할 수 없는 삶을 살았다. 그에게서 음악은 절대였다. 음악에 대한 분명한 이런 인식과 열정은 평생 3000곡 이상을 작곡했고, 전쟁이 나도 작곡하는 일에는 집중력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나에게 음악은 아내 이상이다. 아내와는 이혼할 수 있지만 음악과는 이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음악과 결혼하면 음악은 영원히 당신의 사랑이 되며, 결국 음악과 함께 무덤까지 가는 것이다."(277쪽)

 

음악과 결혼한 피아졸라, 음악 연주 자체였던 피아졸라는 사람들이 자신의 에너지를 확장시키고, 살아 있다는 기쁨을 경험하며, 도전하는 정신을 배울 수 있게 했다. 피아졸라는 댄스홀에 머물러 있던 탱고를 콘서트 홀로 가져왔다. 그렇다. 피아졸라는 탱고 역사를 바꾼 '위대한 탱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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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의 초상 빌 에반스 | 인물 2009-02-07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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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빌 에반스

피터 페팅거 저/황덕호 역
을유문화사 | 2004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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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케인 카트리나(Hurricane Katrina)가 2005년 8월 28일를 강타했을 때 자주 접한 도시 이름이 뉴올리언스였다. 파괴된 뉴올린언스를 보면서 고통스러워했지만 또 다른 기억을 떠올렸다.

 

미국 남동부 루이지애나주에 속한 뉴올리언스는 미국 어느 곳보다 흑인들의 문화전통이 풍부하다. 그들은 이곳에서 흑인가곡·춤곡·성가를 혼합한 뉴올리언스 재즈를 탄생시켰다. 뉴올리언스 재즈는 흑인의 강렬하고 펑키한 취향과 함께 활기 넘치는 격렬한 음으로 즉흥 연주와 함께 관조와 사색, 서정성이 극도로 정제된 음악이다.

 

이런 음색과 음악성, 음질을 가진 재즈 세계에 '재즈계의 쇼팽,' '재즈 피아노의 음유 시인,' '재즈 피아노의 인상주의자'로 불리우는 빌 에반스를 앨범이 아니라 책으로 만나는 일은 재미와 함께 글을 통해서 재즈를 만날 수 있는 더 깊은 기회이다.

 

<을유문화사>가 2004년부터 펴낸 <현대예술의 거장시리즈>에서 첫번째로 나온 <빌 에반스 :재즈의 초상>이다. 글쓴이 피터 페팅거는 에반스에게 닥친 많은 문제를 통하여 성공과 낙담, 좌절이 어떻게 인격을 형성하게 했는지 보여줌과 동시에 예술성과 감수성을 형성하는 과정을 하나하나 추적해 간다. 이 장면은 읽는 이에게 에반스를 옆에서 만나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가지게 한다.

 

페팅거는 빌 에반스의 앨범과 연주곡 하나하나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으며, 작은 클럽에서 빌 에반스가 연주한 날짜와 배경, 상황까지 소개하고 있다. 특히 책 맨 뒷부분에 '디스코그래피(discography)'를 두어 빌 에반스가 녹음한 모든 음반의 참여 연주자와 녹음 일자, 장소, 앨범의 특징, 녹음 과정 및 변경 사항 따위를 전부 기록하여,'전체 빌 에반스 음반의 작은 역사'를 구현하고 있다. 또한 빌 에반스의 연주 장면과 악보, 지인들의 사진 50여 컷이 본문에 실려 있다.

 

<빌 에반스>를 읽어가면서 느끼는 경험은 열렬한 추종자들이 작품에 대한 진지한 평가 없이 무조건 칭송하고, 찬양하고 앨범 몇 장 가지고 있으면서 빌 에반스를 알고 있다는 생각하는 사람들을 무색하게 한다. 피터의 세밀하고 면밀한 기록들은 빌 에반스 작품 자체를 이해하는데도 좋은 선물이지만 20세기 재즈 역사를 풍미했던 위대한 음악가 역사를 담은 귀중한 자료로도 손색이 없다.

 

피터 베팅거는"그는 결코 화려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청중들이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 연주한다."고 빌 에반스를 평가했다.

 

피터 베팅거가 자신을 평가한 것에 답을 주는 것처럼 빌 에반스도 "오로지 음악과 함께 혼자 있었던 수많은 시간들이 내 삶이 나아가야 할 에너지를 한데 모아줬다는 생각이 난다. 홀로 연주하면서 혼자 있다는 느낌에 도달했을 때, 음악의 기술적이며 분석적인 측면들은 하나의 적극적인 진실이 되어 내게 다가온다."고 했다.

 

연주를 자신과 하나 되게 하는 일, 그것이 음악이다. 다른 이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먼저 생각하고 자신을 위하여 연주할 때 결국 다른 이를 위한 연주가 된다는 사실 앞에 보여주기 위한 연주회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알게 한다.

 

"여러분께서 재즈를 가르칠 때 가장 위험한 것은 스타일을 가르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겐 열한 명의 피아노 학생이 있었는데, 저는 그 중 여덟 명에게 코드나 그 무엇에 대해서도 알려고 하지 말라고 이야기했죠. 심지어 그들은 누가 뭘 했는지도 알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모방자가 되길 원치 않으니까요?재즈를 가르친다는 것은 매우 예민한 일이죠. 궁극적으로 지닞한 재즈 연주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스스로를 가르치야합니다."(159쪽)

 

음악과 자신을 하나되게 하지 못하면 연주는 연주가 아니며, 음악은 이미 음악이 아니라는 의미로 읽히는 빌 에반스 말은 가슴을 후빈다. 에반스는 손재주로 재즈를 연주한 것이 아니라 영혼으로 재즈를 연주한 사람이었다. 기술로 재즈를 연주하지 않고 재즈를 통하여 사람을 연주한 사람이었다. 빌 에반스는 자신이 생각하는 예술과 음악세계를 언급하면서 화가와 비유했다.

 

“하지만 화가는 그림을 그리는 순간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야 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 보여주게 되는 것은 그의 인간적인 측면이다. 그 점은 내게도 정확하게 동일하다. 난 기술적인 개념으로 생각하지만 내가 연주하는 것은 바로 인간이다. 원칙과 자유는 섬세하고 창조적으로 섞여야 하며 정말로 훌륭한 결과를 낳아야 한다. 난 모든 음악이 낭만적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극단적인 감상주의에 빠지면 낭만성은 방해받게 된다. 반면에 원칙에 의해 운용되는 낭만성은 가장 아름다운 미적 상태다.”(204쪽)

 

화가가 그림을 통하여 자신들을 드러내듯이 연주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음악이다. 기술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는 일, 바로 인간을 말하는 것이 음악이었음을 에반스는 말하고 있다. 인간을 드러내는 연주를 기교와 기술로만 생각하는 경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던지는 울림은 크다.

 

위대한 예술가를 그냥 칭송하는 책이 아니라 그가 갔던 길 모두를 다시 되짚어 가면서 자료를 수집한 후 수집된 자료를 있는 그대로 싣고 읽는 이가 스스로 평가하게 할 수 있게 한 배려는 에반스를 새롭게 알게 한다. 칙 코리아가 에반스를 '금세기 가장 위대한 예술가 중 한 명'이라 했는데  <빌 에반스>는 과장이 이 말이 아님을 확인해주는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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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마지막까지 웃은 사람, 체게바라 | 인물 2009-02-02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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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CHE 한 혁명가의 초상

페르난도 D.가르시아,오스카 솔라 공저/안종설 역
서해문집 | 2001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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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쿠바 혁명이 50주기를 맞이했다. 50년 동안 혁명의 주역은 하나 둘씩 떠났거나 떠나가고 있다. 쿠바 인민을 50년 동안 통치했던 피델 카스트로도 세월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다.

 

먼저 떠난 이들 중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혁명가가 있으니 '체 게바라'다. 체는 카스트로와 함께 1959년 1월 1일 바티스타 정권을 끝내며 아바나에 입성했지만 1965년 4월 쿠바를 떠나 볼리비아로 향했다. 볼리비아에선 또 다른 독재정권 바리엔토스 정권이 인민을 핍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권력에 안주하지 않고, 혁명가로 부활할 것이다. 그리고 1967년 10월 9일 미국이 가담한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잡혀 삶을 마감했다.

 

영원한 혁명가 '체'를 잊을 수 없어, 많은 이들은 '체'를 혁명의 우상으로 가슴에 담았고, 그를 기념하는 책들이 나왔다. 그 중 하나가 페르난도 D. 가르시아와 오스카 솔라가 지은 <CNE, 한 혁명가의 초상>이다.

 

<CNE, 한 혁명가의 초상>는 게바라의 탄생부터 죽음까지의 긴 여정을 사진 400여점으로 보여준다. 어린 시절부터 정치가로 활동하던 시절까지 체가 남긴 흔적들 따라간다. 또 그동안 공개 되지 않았던 사진들과 체 게바라 자신이 남긴 글 외에도 혁명 동지였던 피델카스트로가 쓴 글들이 실려있다.

 

알고 있듯이 체는 가난한 자로 태어나지 않았다. 선조 중에는 스페인 총독 출신도 있었고, 아버지는 지리학자이면서 탐험가 출신이었다. 어머니는 무신론자였다. 주류 가문에서 태어난 그가 가난한 민중들을 위해 평생을 받쳤다는 것은 언뜻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하지만 하늘은 그에게 '천식'을 주었다. 천식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대담한 행동과 돌파력을 가지게 하였고, 고등학교 시절 그는 천식환자들에게는 절대 금지인 럭비를 하는 등 자신에게 닥친 운명을 피해가기보다는 맞서 싸우는 쪽을 택했다.

 

천식과 맞서 싸웠던 체는 4500km의 여행을 마치며 단순히 자기를 위한 삶이 아니라 민중을 위한 삶을 살겠노라 다짐하면서 게릴라 투쟁에 몸담게 되고, 쿠바혁명을 승리로 이끈 혁명가로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젊은 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떠난다. 자신과 다른 세상을 만나고, 자기가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여행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하고, 새로운 역사를 만나게 한다. 그는 다섯 나라를 지나는 8개월 동안 가난한자들을 만났다. 나환자를 만났다. 여행 도중 그는 많은 기록을 했지만 그 땐, 할아버지 로베르토 게바리처럼 '탐험가'로서의 시각이 더 컸다. 하지만 그가 여행을 끝냈을 때는 달랐다.

 

"나는 민중의 편에 설 것이며, 교의의 해부자이자 교조의 정신분석가인 나는 마치 미친 사람처럼 비명을 지르며 바리케이트와 참호를 공격하고, 붉은 피로 내 무기를 적시하리는 것을 안다. 나는 싸움을 준비하며 내 몸을 긴장시키고 내 존재를 성소로 준비함으로서 승리의 노동계급과 무산자의 처절한 외침 속에 깃든 감동과 희망을 찬양할 것이다."(39쪽)

 

그는 의사와 탐험가가 아니라 게릴라 전사로서 거듭났고, 그 삶을 성실히 살았다. 피델과 많은 이들을 만나 쿠바 혁명을 이룩했다. 혁명을 성공했다면 권좌에 앉이 권력을 누릴 수 있었지만 그는 떠났다. 궁금했다. 권력에 탐닉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왜 그는 볼리비아로 갔을까?

 

<CNE, 한 혁명가의 초상>은 어떻게 답했을까? 1964년 '체'는 사회주의 국가들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1964년 12월 체는 알제리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우리는 착취하는 자와 착취당하는 자, 억압하는 자와 억압받는 자의 공존을 인정하는 국가들 사이에서 평화의 공존을 유지해왔습니다." (151쪽)

 

이는 소련을 겨냥한 경고였다. 사회주의란 겁떼기만 걸쳤을 뿐 알맹이는 착취하는 자들과 별 다를 바 없는 모스크바와 함께 할 수 없었다. 모스크바와 결별할 수 없는 피델을 위하여 체는 페델과 '정치적 결별'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피델은 작별 편지를 체에게 보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쿠바의 모든 책임을 면제시켜주려 하오 .쿠바가 나에게 보여준 모범에서 제외하고 말이오. 만약 내가 다른 하늘 밑에서 나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야 한다면, 내 머리 속에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것은 쿠바의 인민들, 특히 바로 당신일 것이오."(164쪽)

 

"끊임없이 전진하지 못하는 혁명은 혁명의 후퇴와 다를 바 없"으며 "나는 괜찮소. 우리는 이 전쟁에서 반드시 이길 수 있고, 또 그럴 것"이라 했던 체는 1967년 10월 8일 생포되었고, 다음 날 볼리비아 정부 지시와 미국 CIA의 묵인 하에 혁명가로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체는 마지막 순간에도 웃음을 머금었고, 시신은 자신의 적들에게 조소를 남겼다. 그들은 그가 정말로 생명을 잃기까지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리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마지막에 웃는 자, 가장 오래까지 웃는 자는 바로 그였다."(1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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