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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선생님인지 빨갱이인지 역사가 기록할 것" | 인물 2009-09-11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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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만화 김대중 1

백무현 글, 그림
시대의창 | 2009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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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 전두환 · 김대중을 떼어놓고 한국 현대사를 논하는 것은불가능에 가깝다. 박정희와 전두환은 쿠데타로 집권했고, 김대중은 그 쿠데타가 민주주의를 유린했기 때문에 저항했다.
 
박정희와 전두환은 자신들이 일으킨 쿠데타에 저항한 김대중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박정희는 김대중을 감옥에 잡아넣거나 집에 감금했으며, 납치까지 저질렀다. 전두환은 그에게 '내란음모'라는 무시무시한 죄목을 뒤집어 씌워 사형을 선고했다.
 
얼마 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함으로써 박정희와 김대중은 역사 속 인물이 되었다. 박정희는 마지막까지 김대중에 대한 분노를 거두지 않았고, 전두환은 김대중 전 대통령 때가 전직들이 가장 살기 좋았다는 말 한마디로 자기가 저지른 죄를 씻어버리려고 했다. 그의 서거로 말미암아 우리 사회는 '김대중'을 다양한 방법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책을 통하여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살았던 삶을 돌아보는 것이다.
 
<만화 박정희> <만화 전두환>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백무현 화백이 김대중 전 대통령이 쓴 책과 그와 함께 했던 정치인, 언론인, 교수들이 쓴 저작물뿐만 아니라 그를 비판했던 사람들이 쓴 저작물까지 다 살펴 3년간 작업 끝에 <만화 김대중 1·2>을 내놓았다. 앞으로 3-5권이 더 나올 것이다.
 
백무현은 먼저 "'빨갱이'도 눈물이 있을까?"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한다. '빨갱이'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주홍글씨'였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명해도, 정당한 방법으로 권력을 잡지 않고, 그 권력을 통해 기득권을 유지해온 사람들은 김대중을 '빨갱이'라고 정죄했다.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았던 "빨갱이가 문익환 목사가 세상을 떠났을 때, 광주 망월동에서, 펑펑 울었다"고 백무현은 회고한다.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권양숙 여사 손을 잡고 통곡하는 모습은 결코 지울 수 없는 장면이었다. 그렇다. 빨갱이도 눈물을 흘렸다. 빨갱이라고 정죄했던 그들이 오히려 피도 눈물도 없었다.
 
김대중은 '사람'이었다. '빨갱이'와 '선생님'이라는 양극단으로 평가받았던 그. 백무현은 김대중이 살아온 정치적 삶을 무조건 따르지 않는 '비판적' 지지자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가장 즐겨보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동물의 왕국>이라는 사실과, 귀여운 강아지를 혼낸 것에 단단히 화가 나 국회에서 집으로 득달같이 달려와 아내 이희호 여사에게 따졌다"는 일화를 깨닫고 '인간 김대중'을 연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동물을 사랑한 김대중이라면 어찌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겠는가. 가난한 자들, 여성들을 사랑했다. 용산철거민참사를 보면서 가슴이 아렸다고 말했다. 그 사랑은 자기를 좋아한 사람만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빨갱이'로 매도한 자들까지, 정적까지 용서한 휴머니스트였다고 백무현은 <만화 김대중>에서 그리고 있다.
 
백무현은 말한다. 그의 정적들은 김대중을 '빨갱이'로 정죄하다가 먹히지 않으니 마지막에는 '대통령병 환자'라고 매도했다고. 그러나 민주주의를 유린한 박정희는 18년을 집권했다. 전두환도 민주주의를 유린하면서 죄 없는 광주시민을 무참히 학살했다. 오히려 박정희와 전두환이 더 대통령병 환자였다고 비판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는 명언을 남기고 흙으로 돌아간 김대중에게 백무현은 "진정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다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며 "그가 과연 '빨갱이 김대중'인지 '선생님 김대중'인지 이제 역사가 기록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밝히기 위해 그는 <만화 김대중>을 3년 전부터 기획했다고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9년 1월 7일 일기에서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한다"고 썼다. 마지막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백무현은 이를 두고 "'행동하는 양심'이 승리한다는 믿음이라"고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살았던 시간에는 일제식민지, 한국전쟁, 이승만 정권, 박정희 독재정권과 전두환 독재정권, 그리고 경제 식민지였던 IMF, 남북정상회담이 있었다. 여든 살이 넘은 사람들이 다 경험한 시간이었지만 김대중는 달랐다. 특히 박정희 독재정권부터 남북정상회담까지는 중심이었다.
 
<만화 김대중 1>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태어난 하의도의 과거를 먼저 그렸다. 하의도를 먼저 다룬 이유는 하의도가 지닌 역사적인 의미 때문이다. '하의도' 그곳은 조선시대에는 선조 딸 정명공주 시댁인 풍산 홍씨 가문에게, 일제강점기에는 이완용을 등에 업은 홍씨 가문과 일본인들에게, 조국 해방 후에는 미군정에게 착취를 당했고 이에 분개하여 300년 동안이나 농민들이 농지탈환운동을 전개한 곳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마지막 고향 방문이던 2009년 4월 하의도 농민운동기념관 개관식에 참석해 "인생을 살아오면서 하의3도 농민의 정신을 가지고 끝까지 굴하지 않고 투쟁해왔다"고 말한 바 있다.
 
1권에서 하의도 농민들 토지반환역사를 길게 다룬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김대중이 '인동초'가 된 이유는 선조들이 300년 동안 자신들 권리를 위해 부당한 권력에 저항했던 삶이 육화되었기 때문이리라.
 

2권에서는 김대중과 박정희의 만남을 다루었다. 어쩌면 박정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아가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고 할 수도 있다. 박정희가 김대중이 주장하는 대로 3선개헌과 유신독재를 하지 않았다면 김대중은 40대에 대통령이 되었겠지만 독재정권에 저항한 상징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박정희는 3선개헌과 납치, 유신독재로 독재자와 민주주의를 유린한 상징이 되어버렸다. 김대중은 그에게 저항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저항하면 박해했다. 박해할수록 김대중은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았다. 이것이 김대중을 김대중답게 했고, 수없이 변절해간 이들과 다른 점이었다.

 

앞으로 나올 3권은 서울의 봄,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전 세계에서 일어났던 구명 운동, 미국 망명, 2.12 총선을 다룬다. 4권은 6월항쟁, 야권분열, 1992년 대선, 정계은퇴, 50년만에 정권교체를 이룬 청와대에 입성하기까지를 다룬다. 5권은 IMF와 2000년 남북정상회담, 노벨 평화상 수상, 노무현 전 대통령을 해양수산부장관에 임명, 정권 재창출 따위를 다룬다.

 

이제 다시 올 수 없는 길로 간 김대중 전 대통령. <만화 김대중 1-5권>은 민주주의와 남북화해, 서민을 위해 평생을 살았던 '행동하는 양심' 김대중을 우리에게 인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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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왕의 과다한 업무, 술도 마음대로 못마셔 | 역사 2009-09-05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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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조선 국왕의 일생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편
글항아리 | 2009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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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권자에게 선택받아 지도자가 되는 대한민국 '대통령'은 삼권분립을 통하여 견제받는 권력이다. 하지만 세습으로 권좌에 오르는 조선 '국왕'은 삼권을 손아귀에 쥔 절대권력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임금을 '지존'이라 칭했다.

 

그런데 왕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나라를 경영할 능력과 자질이 없는데도 지존이 된다면 조선은 생존 가능성을 위협받게 된다. 신분만 지존이 아니라 능력과 자질에서도 지존이 되어야 했다. '조선'과 '국왕'은 곧 하나로 운명 공동체였던 셈이다.

 

조선과 하나였던 조선국왕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역사학, 문학, 국악, 풍수지리학 따위를 전공한 한국학 전문가들이 섬세한 서술과 화려한 도판으로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펴낸 <조선국왕의 일생>은 멀게만 느껴졌던 조선국왕을 가까이서 만나게 한다. 

 

자질과 능력을 갖춘 국왕 탄생을 위해 조선이 쏟은 노력은 왕비 침전 이름에서부터 확인된다. 경복궁의 왕비 침전을 교태전이라고 하는데 "하늘(왕)과 땅(왕비)이 교차하면 장차 국왕이 될 적정자가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창덕궁 왕비 침전은 대조전으로 "큰 인물을 만든다"는 의미였다.

 

이뿐 아니다. 국왕와 왕비의 합궁은 반드시 좋을 날짜만 이루어졌는데 "뱀날과 호랑이날, 초하루, 보름, 그믐"은 피했으며 "바람부는 날, 천둥치는 날"도 안 되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날짜를 미루다보면 "국왕과 왕비가 만날 수 있는 길일은 한 달에 하루나 이틀 정도에 불과했다"고 한다. 조선 국왕은 이렇게 태어났다.

 

태어나는 것도 쉽게 태어날 수 없었던 국왕은 태어난 순간부터 엄청난 교육을 받아야 했다. 세자 때부터 보양청 교육, 강양청 교육, 서연(書筵)이란 교육 과정을 거쳤다.  맹자는 왕은 덕으로써 인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했었다. 즉 왕이 절대권력을 가졌지만 힘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덕으로 나라를 다스린다는 말이다. 이 덕은 어디서 나오는가? 바로 '배움'이다. '배움' 그것은 곧 조선 국왕이 평생을 해야 할 의무요 덕목이었다. 

 

왕이 된 후에도 배움은 계속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경연(慶筵)이다. 경연에서 국왕은 신하들과 조선의 국정 이념인 성리학을 국정에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 논의와 논쟁, 토론을 했다. 궁궐 전각 중에 정치 현안을 논했던 '편전'이 있는데 삼봉 정도전은 편전을 '사정전'이라 지었다. 사정전에서 "온갖 일이 결정되니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결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조선국왕은 이렇게 배움을 통하여 조선을 경영했다.

 

국왕만큼 중요한 존재가 왕비다. 왕비가 중요한 이유는 다음 조선을 이어갈 왕세자를 생산할 존재이기 때문이다. 왕비가 되기 위해서는 집안과 성품은 당연한 일이었고, 용모도 중요한 조건이었다. 세종 대왕은 세자빈을 간택하기 위해 황희와 맹사성, 변계량과 논의하면서 "세계(世係)와 부덕(婦德)은 본래부터 중요하나, 혹시 인물이 아름답지 않다면 또한 불가할 것이라" 했으며 <영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적고 있다.

 

아조(我朝)에 와서 간택한 것이 어느 세대에서 시작되었는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비루하고 또 불경하여 단지 용모의 예쁘고 누추함과 언어의 조용하고 우함으로써 취한다(55쪽)

 

간택을 받은 후 국모가 되기 위한 수업은 혹독했다. 국모로서 갖추어야 할 교양과 예절, 품위, 걸음 걸이, 동작과 태도를 배워야 했을 뿐만 아니라 '소학'까지 익혀야 했다. 간택에서 혹독한 교육, 그리고 세자까지 생산하여 모든 영광을 다 이루었다면 그들은 행복했을까? 고종과 결혼한 명성왕후는 평소 "내 죽으면 사대문 안을 돌아보지 않으리라"고 했고, 정조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지은 <한중록>은 국모가 되는 심경을 이렇게 적고 있다.

 

선친께서 근심 걱정을 하시며 훈계하는 말씀이 많으시니 내가 무슨 죄를 지은 것만 같아 몸둘 바를 몰라 하면서도 부모 옆을 떠날 일이 서러워 어린 간장이 녹을 듯하며 만사에 아무 흥미도 없었다.(58쪽)

 

조선국왕들 평균 수명은 마흔일곱 살도 되지 못했다. 오래 살지 못한 이유로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가 엄청난 업무 때문이다. 조선국왕은 입법과 사법, 행정권까지 모든 업무를 담당할 뿐만 아니라 "신과 인간의 두 세계를 연결하는 존재"였다. 때문에 조상신과 토지신, 농업신에게 제사를 지내며 나라와 백성들 안위까지 구해야 했다. 업무량이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정조 6년(1782년) 2월 20일자 일기를 보면 정조는 아침 8시에 업무를 시작하여 밤 9시가 넘어야 끝냈다. 정조 4년 1월 1일 사직단에 제사를 지낼 때는 오전 10시에 사직단에 나아가 다음 날 새벽 3시에 제사를 마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국왕들의 업무량을 알 수 있다.

 

드라마 <대장금>을 보면 국왕은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산해진미를 먹는다. 과연 조선국왕들은 그렇게 먹었을까?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된 수양대군은 1463년 <의약론>이라는 책을 지었는데 세상에는 여덟가지 의사가 있다고 했다. 그 중 으뜸이 심의요, 다음이 식의라고 했다. 음식을 통하여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말로 곧 식치(食治)다.

 

음식에도 차고 더운 것이 있어서 처방하여 치료할 수 있다. 그러니 어찌 쓰고 시어야 한다거나 마른풀이나 썩은 뿌리를 먹어야 낫는다고 핑계하겠는가? 과식을 막지 않는다면 이 또한 식의가 아니다.(185쪽)

 

조선국왕들의 식치는 '죽'이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죽은 '쌀죽'으로 "설사가 심해 탈수 증세가 있고 기운이 떨어진 경우" 먹었다. 차 또한 중요한 식치로 '인삼차'는 "원기를 회복하는 데 사용"되었다. 한 마디로 "조선 왕실의 건강법은 유교(성리학)의 이상대로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 미리미리 조심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절제하는 삶' 그 자체"였다. 마음대로 산해진미를 먹지 않았다는 말이다.

 

조선국왕은 술 마시는 날도 정해져 있었으며, 백성들과 함께 하는 연회도 열었다. 평생을 이렇게 살았던 왕도 일반 사람들처럼 똑같이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과 다른 점 하나는 국왕의 죽음은 또 다른 권력이 등극하는 것이었다. 조선국왕의 일생은 이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종묘에 가서 후손들에게 섬김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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