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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보다, '선생님'이 더 어울려요" | 인물 2010-11-13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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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김대중 자서전 세트

김대중 저
삼인 | 2010년 07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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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또 광주 KBS냐 왜 우리 동네는 경상도인데 빨갱이 전라도 방송이 나오는 거야. 빨리 꺼라 꺼"

 

우리 집은 경남 사천이었는데 이상하게도 1980년대 초에는 진주 KBS(MBC인지 정확하지 않음)가 아니라 광주KBS가 나왔다. 어릴 때부터 알게 모르게 세뇌 교육이 되었는지 중학생이었지만 빨갱이들이 사는 동네 방송을 보는 것 자체가 항상 불만이었다. 빨갱이 중심은 '김대중'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백무현이 <만화 김대중>에서 "빨갱이가 문익환 목사가 세상을 떠났을 때, 광주 망월동에서, 펑펑 울었다"고 평하고, 김대중 대통령은 2009년 1월 7일 일기에서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한다"고 썼던 것처럼 김대중은 '빨갱이'가 아니라 '사람․선생․대통령'이었다.

 

나 역시 대학 진학 후 책들과 사람들을 만나고, 군 생활 도중 전남 목포 태생인 선임병을 만나면서 김대중을 조금씩 알아간다. 빨갱이 김대중은 점점 나에게 '사람'으로 다가왔고, 선생과 대통령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는 막을 수 없는 거대한 힘이었다.

 

이 거대한 힘은 "전라도 방송 나온"다며 텔레비전 꺼라 했던 사람에게 1992년 14대 대선에서 김영삼에게 패배한 날 부산 서면 한 포장마차에서 김대중을 열렬하게 지지했던 한 동무와 생애 처음으로 술과 눈물 그리고 빗물이 뒤엉켜 밤새도록 통음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1997년 12월, 5년 전 빗물인지 눈물인지 구별을 못했던 그 통음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전화하고, 전화했다. 다섯 달 전 나와 한 몸이 된 경상도 태생 아내도 설득에 설득을 거듭했고, 밤을 새웠다. 김대중 대통령은 마지막 유세에서 "내일 이 나라의 정권이 교체됩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탄생합니다. 고난의 시대가 끝나고 희망의 시대가 시작됩니다."(1권 673쪽)고 외쳤다. 그 외침이 내 마음을 때렸고, 승리를 확신했다. 그날 밤 "대통령, 김대중"이 온 나라에 울려 퍼졌고, '김대중 당선자'가 "서민의 권익을 철저히 보호하여 우리 경제가 민주적 시장 경제로 발전해 나가는, 그런 시대를 열겠다"는 다짐을 보면서 '그를 선택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5년 전 '통음'은 '희열'로 변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살았던 시간은 일제식민지, 한국전쟁, 이승만 독재정권, 박정희 독재정권과 전두환 독재정권, 그리고 경제 식민지였던 IMF, 남북정상회담이라는 20세기 대한민국 역사를 관통하는 삶이었다. 여든 살이 넘은 사람들이 다 경험한 시간이었지만 김대중은 달랐다. 특히 박정희 독재정권부터 남북정상회담까지는 대한민국 현대사 중심에 서 있었다. 박정희는 3선 개헌과 납치, 유신독재로 독재자와 민주주의를 유린하였고, 김대중은 저항했다. 그리하여 박정희는 독재자로서 반민주 상징이었고, 김대중은 민주주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독재의 살기는 갈수록 독했다. 긴급조치는 모든 분야에서 의욕과 희망을 거세해 버렸다. 사람들은 실어증에 걸린 듯 말을 잃었고, 지식인들은 자기 검열에 걸린 자신을 발견하고는 치욕에 몸을 떨었다. 당시의 침묵 속에는 온갖 수모가 들어 있었다."(1권 349쪽)고 박정희 독재정권의 살기를 회고했다. 살기가 넘치는 정권, 곧 '병영국가'였다. '살기'와 '병영국가' 박정희 정권을 이토록 잘 표현할 수 있을까? 병영에는 사실 죽임이 난무하는 곳으로 살기가 넘친다.

 

민주주의는 '살림누리'다. 사람이 사는 세상이다. 그런데 박정희는 대한민국을 병영국가로 만들어 살기 넘치는 세상을 만들었다. 민주주의를 거세한 박정희, 그는 독재자였다. 김대중은 자서전 곳곳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독재자 박정희"라고 표현한다. 사람들은 박정희가 독재자는 맞지만 경제를 발전시켰다면서 그를 추켜세운다. 살림누리를 살기가 넘치는 병영국가로 만들었는데 추켜세우니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러기에 김대중 생각은 조금 다르다. 박정희가 장면 정부를 무너뜨리고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장면 정부는 '민주주의를 신봉했던 민주정부'였다. 그래서 말한다. "만일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장면 정권이 경제 부흥을 추진했다면 어찌되었을까? 장담을 할 수 없지만 국민들의 참여와 지지로 더 높은 효과를 보았을지도 모른다"고. 장면 정부를 무능하다고 비판하지만 박정희 독재정권 경제정책은 장면 정부가 세운 터 위에서 출발했고 그 열매를 따 먹고서 박정희가 다 이루었다고 자랑하고, 추켜세운다.

 

그렇다 독재자 박정희는 경제발전을 이룬 것은 맞지만 민주주의를 신봉하지 않았다. 배고픔은 해결했지만 민주주의를 유린했다. 여기에 속으면 안 된다.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 함께 이루어졌다면 1997년 IMF는 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박정희 독재정권의 대기업 위주 정책과 정경유착은 결국 한국 경제 뿌리를 뒤흔들었고, 인민들은 고통과 눈물로 통곡으로 21세기를 맞아야 했다.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다는 확신은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 첫 일성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드러나게 났고, 박정희가 남긴 IMF를 극복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함께 갈 때만이 이룩할 수 있는 일이었다.

 

민주주의를 배반한 박정희와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고자 했던 김대중은 격하게 대립할 수밖에 없었고, 독재자 박정희는 민주주의 신봉자 김대중을 박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박해가 통하지 않자 '부통령' 자리를 주겠다는 회유도 서슴치 않았다. 그럴 때마다 김대중은 민주주의를 위해 저항하고, 배반하지 않았다. 저항하는 힘의 원천은 신념인 "행동하는 양심" 때문이다. 이것이 김대중을 김대중답게 했고, 수없이 변절해간 이들과 다른 점이었다.

 

"난 좋은 자리에 가려고 이러는 게 아닙니다. 민주주의를 하느냐 안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내가 무엇이 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1권 301쪽)

 

이 대목을 읽는 순간 머리를 때렸고, 가슴을 저몄다. 모든 독재가 내가 '아니면'에서 시작된다. 어쩌면 김대중에게 독재자 박정희 핍박보다, 인간 근본을 뒤흔드는 '유혹'을 더 이겨내기 힘들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유혹을 이겨냈다. 그러기에 김대중은 오랫동안 민주주의를 위해 함께 투쟁했던 김영삼이 쿠데타 세력과 손잡자 "그 쿠데타의, 야합의 주역이 김영삼씨였다는 데 나는 충격을 받았다. 왜 역사에 버림받을 길을 선택했는지는 한때 민주화 동지로서 지금도 안타깝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보다는 집권 욕이 앞섰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1권 571쪽)고 회고한다.

 

이 내용을 말할 때 김대중은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이 온 몸을 휘감았을 것이다. 박정희와 전두환이 쿠데타로 민주주의를 유린한 것보다 더 고통스러웠으리라. 권력에 눈멀어 사상과 신념, 민주주의를 저버리는 일은 용서받기 힘들다. 이유는 그를 따랐던 수 많은 인민들 배신했기 때문이다. 독재자로 처음부터 살았던 자들보다, 독재자를 비판했던 이가 민주주의를 유린한 자들과 손을 잡았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앞으로 이런 자들이 다시는 생겨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하지만 아직도 김영삼은 야합에 대해 한번도 인민 앞에 사죄하지 않았다. 김영삼을 용서하기 힘든 이유다.

 

그러나 김대중은 함께 했던 민주동지가 변절하고 독재자들이 그를 핍박하고, 박해하고 회유하할지라도 김대중이 변절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마 그것은 김대중이 강조했던 '행동하는 양심'을 통하여 민주주의가 반드시 이기리라는 믿음 때문이었으리라. 그러기에 전두환이 그를 아무리 회유해도 마지막까지 그에게 굴복하지 않고 양심을 택했다. 그는 마지막 진술에서 말한다.

 

"내 판단으로 머지않아 1980년대에는 민주주의가 회복될 것입니다. 나는 그걸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그때가 되거든 먼저 죽어 간 나를 위해서든, 또 다른 누구를 위해서든 정치적인 보복이 이 땅에서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부탁하고 싶습니다.(1권 422쪽)

 

'선견지명' 민주주의가 1980년대 회복되리라는 이 믿음이 있었기에 자기 몸을 지키고 권력을 가지기 위해 양심을 배반한 이들, 사상을 변절한 이들과는 달리 김대중은 이처럼 민주주의가 다시 회복되리라는 믿음을 간직했기에 양심을 배반하지 않았다. 김대중도 살고 싶었다. "살려주십시오. 아직 제게는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 국민들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저를 구해주십시오."(1권 313쪽)

 

생명에 대한 간절한 애착, 사람이라면 모두가 가지고 있다. 하지만 김대중은 김대중 '목숨'보다,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던 인민들의 생명을 더 귀하게 여겼다. 힘은 어디에서 왔을까? 바로 광주다. 그는 "광주는 영원히 민주주의 본향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독재자 전두환이 광주와 시민들을 유린하고, 자신을 회유하면서 "대통령만 빼고 다 주겠다면서 만약 듣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회유와 협박을 일삼았지만 김대중은 "광주에서 희생당한 사람들, 내 어찌 살아서 그들을 볼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옥중에서라도 싸우다 죽어야 했다"고 다짐했다. '일사각오'(一死覺悟)다. 죽기를 각오하면 진실과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다.

 

사람들을 주목한다.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 이 믿음은 '민주주의'도 감격하여 김대중을 배반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대중은 민주주의를, 민주주의는 김대중을 배반하지 않는 이 위대한 역사가 박정희-전두환 독재정권에 저항했던 힘이었고, 그가 마지막 숨을 몰아쉴 때까지 인민들에게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고 외쳤던 것이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그를 '김대중 선생'이라 불렀고, 세계 수많은 민주시민들은 "김대중을 살려라"고 외쳤던 것이다. 이는 지금 이 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질곡을 끝내는 기회가 왔다. 1987년 6월 전두환 독재를 끝장낼 수 있었다. 하지만 김대중은 자기 삶에서 가장 실패로 기록될 야당 단일화를 거부했다. 그도 "나라도 양보를 했어야 했다. 지난 일이지만 너무나 후회스럽다"고 했다. 하지만 이것은 그의 자서전에서 가장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다. 더 깊은 통곡이 있어야 했다. 단일화 실패로 광주 시민들이 "우리 눈물을 닦아 주십시오"라는 것을 들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1987년 단일화를 군사독재정권을 끝냈다면 민주주의는 훨씬 더 빨리 정착되었을 것이다.

 

단일화 실패에 대해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김대중은 박정희-전두환에 이어 노태우까지 그를 유혹했지만 "민정당과 평민당이 합치는 것은 민의를 배반하는 엄중한 사건"이라며 거부하면서 단일화 실패에 대해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김대중은 1997년 대한민국 15대 '대통령'이 된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선거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는 김대중에게만 영광이 아니라 인민 전체의 영광과 기쁨이었고, 한국 민주주의의 위대한 승리였다.

 

김대중 표현을 빌리자면 "사람들은 나를 '인동초'라 불렀다. 처연한 아름다움, 인동초에는 눈물이 깃들여 있었다. 맞다. 지지자들이 나를 바라보며 흘린 눈물, 그 눈물이 모여 강물을 이루었고 나는 그 강물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 마침내 대통령이 되었다"였다. 그렇다, 수많은 이들이 흘린 눈물이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인민의 눈물을 배반하지 않는 김대중 그가 대통령이 되다니 감격, 감격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대통령'보다. 더 울리는 존칭이 있다. '선생'이다. 정치인에게 '선생'이라는 존칭은 짧은 내 생각으로는 김구 선생 이후 처음이 아닐까? 하지만 많은 이들이 '선생'에 대한 알러지 반응을 가지고 있었다. 나 역시 '선생'보다는 김대중 '대통령'이 더 친근하다. 그런데 지난 해 여름 김대중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추모했다. 아내는 조의록에 "영원한 선생님"이라고 썼다. 물었다.

 

"당신 왜 '영원한 선생님'이라고 썼어요?"

 

"원래 '선생님'은 더 나아갈 수 있는 길에서도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깨닫게 하는 분인데 바로 김대중 대통령이 그런 분이잖아요. 김대중 대통령은 '대통령'보다는 '선생님'이 더 어울려요."

 

뒷머리를 맞은 기분이었다. 맞다. '대통령'보다 선생님이다. 대통령은 아무래도 '권위주의'냄새가 나지만 선생은 존경과 친근감이 함께 풍긴다. 하지만 김대중 '선생'은 인민들이 흘리는 눈물을 보면서 손수건을 건네 줄 수 있지만, 텅 빈 국가 곳간을 채울 수 없고, 북한 김정일 위원장과 만나 평화를 논의할 수는 있지만 서명을 통해 평화를 정착시킬 수는 없다. 이는 김대중 '대통령'할 수 있는 일이다.

 

정치인 김대중, 아니 '선생' 김대중은 "'통일'은 순결한 과제"라고 표현할 정도로 한반도 평화는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고, 이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김대중은 '평화공존교류-연방-완전통일'을 이라는 '공화국 연방제 통일방안'을 제시하였고, '대통령'이 되자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추진하였고, 정상회담이 합의되자 "가슴이 복 바쳤"을 정도로 그는 한반도 평화를 위해 자기를 걸었다. 김대중은 김정일과 만남 자리에서도 "통일은 당장 이루지 못해도 한반도에서 전쟁의 먹구름은 벗겨 내고, 이산가족 문제는 꼭 해결해야 한다"는 다짐을 했다. 이 간절함이 얼마나 진했으면 "김 위원장 본관은 어디입니까"라는 '인간적인 호소'를 하였고, 끝내 해방 55년, 분단 52년 만에 위대한 '6․15남북공동선언'을 성사시켰다.

 

하지만 김대중은 끝까지 "6․15 공동 선언은 각본 없는 거대한 드라마였다. 모두가 맡은 배역에 최선을 다했다. 이를 지켜보는 국민의 뜻대로 이뤄졌다. 나는 국민의 뜻을 받들었고, 그래서 진정한 주역은 국민들이었다"(2권 312쪽)고 한다. 인민에게 모든 공을 돌리는 김대중을 존경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독재자와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았던 김대중이 다른 점을 여기서도 발견할 수 있다. 독재자는 모든 것을 자기 업적으로 미화하고, 신화로 만들지만 김대중은 인민을 앞세웠고, 이들이 없었다면 한반도 평화는 이를 수 없었다고 한다. 이것에서도 '대통령'보다 '선생'이 그에게 어울린다.

 

하지만 그는 "나는 그를 머지않아 다시 만날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 포옹이었다. 그를 배웅할 기회는 끝내 오지 않았다."(2권 306쪽)는 말처럼 김정일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바람'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바람이 이루어졌다면 김정일 위원장이 서울에 왔다면 한반도 평화를 더 진전되었을 것이다. 물론 다음 대통령이었던 노무현은 '10․4선언'으로 뒤를 이어 한반도 평화를 정착시켜나갔지만 이명박 정권은 6․15 공동 선언과 10․4선언을 모두 내팽개쳐버렸다.

 

참 어리석은 일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1994년에 이미 "미국의 주장을 무조건 따르던 시대도 지나갔다. 우리가 외교 역량을 강화해서 미국과의 관계를 계속 튼튼히 하고 별도로 주변 각국 그리고 세계 여러 나라들과 다각적인 외교 활동을 해나가는 것이 필요했다(1권 638쪽)"는 선견지명을 보여주었지만 16년이 지난 오늘 이명박 정권은 정반대로 가고 있으니 통탄할 일이다. 전임자들이 그에게 물려준 한반도 평화의 위대한 유산을 살리지 못한 어리석음을 넘어 우매함을 보여주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마지막 한해를 참 치열하게 살았다. 그것은 박정희-전두환 독재정권이 다시 부활하는 모습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1987년 이후 다시는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일은 없으리라. 자기 생애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이명박 정권은 1987년 이전으로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되돌렸다. 민주주의를 배반하는 이명박 정권을 향해 김대중은 마지막 저항을 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을 마지막 보내면서 "당신은 우리 마음 속에 살아서 민주주의 위기, 경제 위기, 남북관계 위기 이 3대 위기를 헤쳐 나가는 데 힘이 되어 달"라고 했고, 육신을 놓기 마지막 연설에서는 "'행동하는 양심'됩시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입니다. 우리는 행동하는 양심으로 자유와 서민 경제를 지키고, 평화로운 남북 관계를 지키는 일에 모두 들고 일어나서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나라, 희망이 있는 나라를 만듭시다"고 뼛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온힘으로 절규했다.

 

이명박 정권이 얼마나 민주주의를 훼손하였고, 평생을 민주주의를 위해 살아온 '선생' 마지막 숨을 몰아시면서 까지 민주주의를 위해 행동하라 절규는 인민들에게 민주주의를 위해 각성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김대중 자서전>을 덮으면서 "나는 마지막까지 역사와 국민을 믿었다"는 말에 그를 영원한 선생으로 평했던 아내의 말이 사실이며, 진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기에 인생은 생각할 수 록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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