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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과 사이비과학이 만든 '인종차별'... 20세기 대학살 배경 | 사회 2013-06-23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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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인종차별의 역사

크리스티앙 들라캉파뉴 저/하정희 역
예지(Wisdom) | 2013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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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는데 내 앞으로 백인 10명이 걸어올 때와 흑인(또는 동남아인) 10명이 걸어올 때, 이 두 그룹 중 어떤 무리가 다가올 때 더 두려움을 느끼는가? 만약 내 딸이 나중에 커서 외국인과 결혼하면 백인과 흑인 중 어느 누구와는 안 된다고 말하겠는가? 내 생각을 솔직히 말하면 흑인 10명이 백인 10명보다 훨씬 두려움을 느낄 것이고, "흑인만은 안 된다"고 할 것 같다.

내가 '인종차별주의자'인 이유

내 생각이 이렇다면 난 '인종차별주의자'인가? 프랑스 철학자 크리스티앙 들라캉파뉴(1949~2007)가 쓴 <인종차별의 역사>(예지)를 읽으면 인종차별은 아주 가까이, 바로 내 마음에서 똬리를 틀고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기사 관련 사진"담배 가게를 운영하는 B 부인은 딸이 흑인과 결혼만 하지 않는다면야 흑인에 대해서 아무런 감정이 없다. 스트라스부르의 카페 주인인 C씨는 아랍인과 이슬람교도 손님을 경계한다.(중략) E씨는 여자들을, F 부인은 젊은이들을 믿지 않는다. 사람들이 고용주와 경찰관을 싫어하듯이 G씨는 실업자와 공산주의자를 깔본다. H 부인은 동성애자들에 관해서 독설을 내뱉는다."(14-15쪽)

들라캉파뉴는 "이 모든 사람의 공통점은 뭘까?"라고 묻는다. 답은 '인종차별주의자'다. 들라캉파뉴는 우리에게 새로운 개념의 '인종차별주의'를 말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는 인종차별을 백인이 흑인을 차별하는 것쯤으로 생각했다.

동남아 사람들을 무시하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들라캉파뉴는 인종차별이란 "타자로서의 타자에 대한 증오다. 흑인으로서의 흑인, 경찰관으로서 경찰관, 동성애자로서의 동성애자에 대한 증오"라고 단호히 말한다. 달라캉파뉴 인종차별 개념에 벗어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말 한마디가 '대학살'을 부른다

문제는 지나가는 '흑인', '동남아 사람', '동성애자'에 대해 "짐승 같은 놈", "저주받을 놈", "냄새가 난다" 등의 독설과 내 속에 똬리를 튼 '증오'가 나에게서만 끝나지 않고, 그 사회 구성원과 그 사회 집단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그들에 대한 증오는 객관화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미국의 '아메리칸 인디언 학살'과 '흑인노예', 나치 '유대인 학살'과 터키인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 '르완다 학살', '코스보 인종청소' 등등 수많은 대학살은 사소한 말 한 마디에서 시작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메리카 인디언 파멸은 콜럼버스가 그들을 "'위험한 식인종'들, 가혹하게 다룰 것"이라고 권하면서다. 흑인 노예를 "저주받은 '검은' 인종"으로 취급해 노예로 삼은 기독교는 창세기 9장 20-27절에 나오는 "가나안 자손들이 영원히 셈과 야벳의 자손들의 종이 될 것"이라는 내용을 왜곡했기 때문이다. 히브리어 성경 중 어디에도 '노아의 아들'이 특정 피부색을 가졌다고 언급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기독교는 검은 '인종'을 저주받은 '인종'으로 만들어버렸다. 흑인들을 노예로 삼아도 죄책감은커녕 착취와 학살을 저질러도 죄가 되지 않았다. 

"노예 상인들은(그리고 그의 공모자들은) 고대사회의 '노예주인들'과는 달리-비록 단기적이라고 해도- 자기 노예들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어떤 배려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로 흑인들의 운명에 대해서 4세기 동안 한결 같이 너무나도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던 까닭에, 흑인들을 끝없이, 다시 말해서 죽을 때까지 착취하는 데만 집중했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는 사실이다."(178쪽)

볼테르, 당신마저 인종차별주의자라니...

놀라운 것은 저주받는 '검은' 인종이 끔찍한 노예 생활을 할 때가 인본주의가 고개를 들고 지배하던 '계몽주의 시대'였다. <샤를르 12세사>, <루이 14세의 시대>, <각 국민의 풍습·정신론>, <풍속시론>, <철학사전> 따위를 남겨 프랑스의 대문호인 빅토르 위고는 "이탈리아에 르네상스가 있다면 프랑스에는 볼테르가 있다"는 말을 남겼다. 볼테르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계몽 운동가이자 철학가이자 극작가고, 소설가며 시인이다. 하지만 그도 '인종차별주의자'였다.

"실제로 볼테르는 인류다원론자인 동시에 인종차별주의자이며 또한 반유대주의자다-라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 그에 따르면, 백인과 흑인이 '전적으로 다른 인종'이라는 사실이나 흑인은 원숭이와 결합해서 괴물 같은 존재를 낳을 수 있는 '동물'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수 있는 사람은 맹인밖에 없을 것이다."(199쪽)

볼테르 당신마저 인종차별주의자라니! 놀랍다. 놀라지 마시라 <박물지>를 지은 뷔퐁은 "검둥이와 사람의 관계는 나귀와 말의 관계와 같을 것"이라고 했고, 칸트도 흑인을 인류 등급에서 가장 바닥에 두었다. 인종차별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다. 인본주의를 지향하고, 인간중심 사고를 했던 이들마저 '인종'에서는 차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노예상인들이 '돈'에 팔려 흑인들을 사냥할 때, 계몽주의자들의 '이성'으로 인종을 차별하고 있었던 셈이다. 하긴 인종차별은 기원이 서양철학 아버지 아리스토텔레스에까지 올라간다는 들라캉파뉴 주장에 충격을 금할 수 없다.

이성과 사이비과학이 만든 '인종차별'... 20세기 대학살 배경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시작되고, 계명주의 시대를 지나온 서구문명은 흑인과 원숭이 두개골 유사성을 연구한 네덜란드 해부학자 캄페르 같은 이들도 생겨났다. 이 '사이비 과학'은 정치목적을 가진 특정 정치인이 악용하면서 12세기부터 터키 동부에 정착해 살고 있던 아르메니아인들을 열두 달 동안 몰살했다. 이는 150만여 명을 학살한 '아르메니아 대학살'과 나치 유대인 학살을 낳는 배경이 된다.

우리는 나치 유대인 대학살을 히틀러와 나치 수뇌부의 '작품'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당시 '평범한' 독일 사람들이 침묵하거나 동조했다. 대니얼 골드헤이건은 <히틀러의 자발적집행인들: 평범한 독일인과 홀로코스트>에서 "홀로코스트를 저질렀던 '평범한 독인들'은 반유대주의에 의해 자극을 받았고, 이 특별한 유형의 반유대주의는 그들로 하여금 유대인들은 죽어 마땅하다고 결론을 내리도록 이끌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평범한 독일인들이 반유대주의에 저항하고 따르지 않았더라면 히틀러와 나치 수뇌부도 약 550만 명이라는 유대인 대학살을 자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집단학살이 단순한 감정이 아닌 지적인 사고방식임을 알게 된다. 이것은 참 무서운 것이다.

말 한마디가 이론을 만들고, 만들어진 그 이론에 모두가 동조하면 비극을 낳고, 그 비극은 집단학살을 자행해도 자신들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모르게 된다. 일본 극우가 아직도 일제식민지 부정과 종군위안부에 대해 망언을 늘어놓는 것은 아무 생각 없이 해대는 말이 아니라 계획된 발언임을 알 수 있다.

나치 유대인 학살로 집단학살이 끝나지 않았다. 캄보디아 크메르루주는 200만 명을 학살했고, 코소보 인종청소, 르완다의 투치족 집단학살 등등. 미국의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침략도 인종차별과 별다르지 않다. 아이러니는 불과 몇 십 년 전 550만 명이 집단학살당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차별하고 있다.

정치인들 인종차별 악행·악용하면 박탈할 권리 있어

우리는 "인종차별이 옳지 않다는 설교만으로는 인종차별과 맞서 싸울 수 없다"는 들라캉파뉴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나라도 외국인이 140만 명을 넘어섰다.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다른 민족보다 '더 위대한 민족'은 없다. 다른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없다. 사람은 같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인종차별은 '인종'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 정치 모든 영역에 해당한다. 한 마디로 '빨갱이', '홍어'라는 단어도 인종차별이라는 말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비판한다는 이유로 색깔론을 제기하는 것이 인종차별주의다. 이런 인종차별에 단호히 저항해야 한다. 만약, 정치 책임자들이 이를 악용하면 민주주의 절차에 따라 그들 권리를 박탈할 수 있다고 들라캉파뉴는 강조한다.

"악행을 허용했던 조건들을 제거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을 갖지 못한다면 그 악행을 규탄해 봐야 아무 소용도 없다. 그것은 철학자, 역사가, 교육자, 지식인 일반의 과제가 아니다. 그것은 정치인들의 과제이고, 그 너머로는 시민들의 과제다. 민주국가에서 시민들은 정치인들에게 실권을 주고 또한 박탈할 수 있는 권리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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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창제는 세종 아닌 박연? | 인문 2013-06-23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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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박연과 훈민정음

박희민 저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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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은 앞으로 50년 더 살기가 어렵다.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이 당신의 운명과 함께해서는 안 된다. 해례본을 공개하고 전문가들에게 맡겨 후손들을 위해 잘 보존될 수 있도록 해달라." - 2013.01.18 <한겨레>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갑갑한 운명'

지난해 9월 7일 대구고법 형사1부(재판장 이진만)는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을 훔친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은 배아무개(50)씨에게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하면서 한 말이다. 언론들은 상주본 가치를 1조 원라고 했다. 1조 원이라면 돈으로 매기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운 일'이라는 말이다.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가치는 1조 원

훈민정음 해례본은 한글 창제 원리를 풀이한 한문으로 된 해설서로 훈민정음 창제 3년 뒤인 1446년(세종 28년) 편찬됐다. 서울 간송미술관에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국보 70호)과 같은 판본이다. 학자들은 상주본이 간송본보다 보존 상태가 좋고 학자의 어문학적 견해가 많아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고 <한겨레>는 같은 기사에서 보도했다.

SBS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2011년 방영)에서 이도(세종대왕)는 광평대군을 잃어면서까지 해례인 소이를 지켜 한글을 반포한다. 광평만 아니라 집현전 학사들이 죽어갔다. 심지어 금기 중 금기였던 시신해부까지 했다. <뿌리깊은 나무>만 아니라 우리는 한글날만 되면 한글이 얼마나 위대한 글자인지 자랑한다. 방송들도 한글창제를 한 세종을 칭송하며 우리는 감격한다. 트위터, 페이스북, 카아오톡에서 줄임 글자가 등장하고, 한글 파괴 현장이 나타나자 지하에서 세종대왕이 운다는 말도 들린다.

상주본 가치가 1조 원, 뿌리깊은 나무에서 이도 모습, SNS시대의 한글 파괴현상에 대한 분노의 공통점은 한글은 위대하며, 이 위대한 글자를 만든 분은 세종대왕이라는 점이다. 이를 부정하는 것은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하지 않고 원균이 구했다는 것만큼 불경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항상 불경에 도전하는 이는 있기 마련이다. 한글날 556돌인 지난해 10월, <박연과 훈민정음>(박희민 지음, 휴먼앤북스 펴냄)은 훈민정음 창제자가 세종이 아니라 난계 박연(1378~1458)이라고 주장했다.

훈민정음 창제자가 세종이 아닌 박연?

기사 관련 사진
 <박연과 훈민정음>
ⓒ 휴먼북스

 

"훈민정음은 박연이 만들어 세종 25년(1443)에 임금의 이름을 발표하였다.  지금은 비록 하늘이 허공에 맞서는 기분이지만 언제가는 반드시 '박연의 훈민정음 창제'는 정설이 될 것이다."(6쪽)

뭐 이런 '개풀 뜯어 먹는 소리'가 어디 있느냐고 분노하겠지만, 밀양박씨 난계파 후손인 박희민씨는 <난계유고>(蘭溪遺稿),<세종실록> 따위 기록을 통해 나름대로 훈민정음 박연 창제설을 주장한다.

<난계유고>는 박연 시문집으로 16세손인 경하(景夏)가 1822년(순조 22) 초간했다. 김조순(金祖淳)과 김노경(金魯敬)의 발문이 수록되어 있다. 중간본은 1903년에 박심학(朴心學)에 의해서 간행되었고, 시 9수, 소(疏) 39편, 조하의절(朝賀儀節)과 가훈십칠칙(家訓十七則) 등 잡저 2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은이가 박연 창제설을 주장하는 근거를 보자. <세종실록> 세종 25년(1443) 12월 30일 훈민정음 창제에 대해 이렇게 기록되었다.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는데,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초성·중성·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만은 전환하는 것이 무궁하니,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세종실록>(세종 25년 12월 30일)

박연이 훈민정음 창제한 3가지 이유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는 50일 후인 세종 26년 2월 20일 "중국에라도 흘러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여 말하는 자가 있사오면,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라는 논리를 들어 훈민정음 반대 상소문을 올린다. 그러자 세종은 다음과같이 반박한다.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중략) '삼강행실을 반포한 후에 충신·효자·열녀의 무리가 나옴을 볼 수 없는 것은, 사람이 행하고 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자질 여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꼭 언문으로 번역한 후에야 사람이 모두 본받을 것입니까' 하였으니, 이따위 말이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중략),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 - <세종실록> 26년 2월 20일 재인용 178쪽

즉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제한 사람의 세 가지 요건으로 "'운서를 아는 사람', '사성칠음에 자모가 몇인지 아는 사람', '백성에게 훈민정음으로 된 삼강행실을 반포하자고 주장한 사람'"이라고 주장했고, 여기에 합당한 사람이 박연이라는 것이 지은이 논리다.

그럼 박연은 '운서를 아는 사람일까?' <세종실록>에서 '운서'는, 세종 20년(1438) 1월 예조와 관련한 것에서 시작해 세종 32년(1450) 윤1월까지 총 7번 나온다. 운서란 <홍무정운>(洪武正韻)을 말하는 것으로 1375년 명나라 태조때 악소봉 등이 칙명으로 편찬한 것으로 한시를 지을 때 필요한 최신 이론서였다.

한글창제에 반대했던 최만리는 말할 것도 없고, 집현전 학자들도 운서를 잘 몰랐기 때문에 "집현전의 그 누구도 세종 25년(1443) 12월 30일 훈민정음 창제 발표 이전에 <운서>를 몰랐다. 따라서 집현전 학자들은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이 없다"면서 운서를 잘 아는 이는 박연이므로 한글창제는 박연이라는 것이 그 첫 번째 근거라고 박희민은 주장한다.

'사성칠음에 자모가 몇인지 아는 사람'

다음으로 '사성칠음'이다. 사성은 중국어 한자음을 그 성조에 따라 평성(平聲), 상성(上聲), 거성(去聲), 입성(入聲)을 말한다.  박연은 세종 8년(1426) 4월 25일 "옛날에 사문(師門])이 거문고를 탈 적에, 봄을 당하여 상현을 타면, 서늘한 바람이 뒤따라 이르고, 여름을 당하여 우현을 타면 눈과 서리가 번갈아 내리고, 가을을 당하여 각현을 타면 따뜻한 바람이 천천히 돌고, 겨울을 당하여 치현을 타면 햇볕이 뜨거웠으며, 사성을 총합하면 상서로운 바람과 상서로운 구름이 잠시 동안 모였다 하였으나, 이것은 오성의 감소된 것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세종실록> 재인용)는 상소를 올렸다. 즉, 박연이 사성을 잘 알고 있다는 말이다.

칠음은 궁(宮), 상(商), 반상(半商), 각(角), 치(徵), 반치(半徵), 우(羽)다. 누가 뭐래도 박연이 가장 잘 아는 아악의 칠음계다. <운서>에서 칠음은 아음(牙音), 설음(舌音), 순음(脣音), 치음(齒音), 후음(喉音), 반설음(半舌音), 반치음(半齒音)이다. 아악별좌를 지낸 박연은 사성과 칠음 곧, 28자를 창제했다고 말한다.

'백성에게 훈민정음으로 된 삼강행실을 반포하자고 주장한 사람'

훈민정음 창제 세번 째 조건인 '백성에게 훈민정음으로 된 삼강행실을 반포하자고 주장한 사람'이다. <난계유고> 1번 소(疏) '널리 가례와 소학, 삼강행실을 가르치고, 오음정성으로 풍속을 바로잡자는 상소'에 있다.

"백성에게는 삼강행실을 가르쳐 미풍양속을 이루게 할 것이며, 그뿐만 아니라 오음의 바른 소리를 가르쳐 민풍을 바로잡도록 하시기 바랍니다."<난계유고> 재인용, 184쪽)

따라서 "이 세 가지 요건을 갖춘 박연이야말로 훈민정음의 진정한 창제자"라며 "15세기 조선 최고 학자였던 박연은 조선의 음악을 정립하였을 뿐만 아니라, 음악 서적에 전문적 지식으로 천, 지, 인의 바람소리·물소리·목소리를 아우르는 훈민정음을 탄생시켰다"고 주장한다.

그럼 세종은 무엇을 했을까?

훈민정음의 정착을 위해서 임금이란 강력한 힘이 필요했기에 박연이 문자를 창제했지만 세종의 이름으로 반포했다는 것이다. 그럼 세종은 한글창제에 무슨 역할을 했을까? 신하의 업적을 가로챈 것있을까? 지은이는 이렇게 말한다.

"세종 25년(1443) 12월 30일,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발표는 세종의 건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세종은 중국과 외교문제 등 '훈민정음 창제'로 빚어질 수 있는 국내외 온갖 어려운 문제를 혼자서 감당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건강히 악화된 세종 25년의 연말을 훈민정음 창제 발표시기로 잡은 것이다. 훈민정음을 만들려는 박연을 격려하여 이 일을 이루게 하고, 훈민정음을 임금의 이름으로 발표하여 강력하게 추진한 것이 세종의 역할이었다."(187쪽)

세종은 든든한 후원자라는 말이다. 한글을 누가 창제했는지 다양한 주장이 있다. 박연 창제설도 이들 중 한 이론일 수 있다. 한글창제는 세종대왕 단독창제설, 후일 문종이 되는 세자와 수양대군 등 '왕좌주도설, 또 세종대왕과 문종도 아닌 성삼문을 비롯한 '집현전 학자설', 그리고 세종대왕 둘째 딸인 '정의공주 도움설' 등이 다양하게 제기되었다. 그 중 정의공주 도움설 근거가 되는 죽산안씨대동보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세종이 우리말이 문자로 (중국과) 상통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해 훈민정음을 제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발음을 바꾸어 토를 다는 것에 대해 아직 연구가 끝나지 못해 여러 대군(大君)을 시켜 (이 문제를) 풀게 했으나 모두 미치지 못하고 공주에게 내려 보냈다. 공주가 즉시 이를 해결해 바치니 세종이 크게 칭찬하고 특별히 노비 수백 명을 내려 주었다."(죽산 안씨 족보인 '죽산안씨대동보' 중)

어떤 사람들은 이들도 아니라 신미대사(세종~예종, 생몰년 모름)가 창제했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누가 한글창제를 했는지 다양한 이론이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한글창제가 세종대왕 단독설, 문종을 비롯한 왕자 그리고 정의공주설, 집현전 학자설, 신미대사 그리고 <박연과 훈민정음>이 주장한 박연설 모두 세종대왕이 없었다면 한글창제는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세종대왕 없는 한글창제는 불가능

훈민정음 반포 후 최만리를 비롯한 조정대신은 거세게 저항했다. 설혹 박연이 창제해도, 세종이 없었다면 한글을 반포할 수 있었을까? 박연이 아무리 천재적인 능력을 가졌다고 해도 세종이 적극 지지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다. 반포와 배급도 마찬가지다. 주자소가 없었다면 한글을 제대로 배급할 수 있었을까? 주자소를 만들기 위해 세종이 힘을 보태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다. 집현전 학자도 마찬가지다. 세종은 집현전에 인재를 모았다. 서얼 출신이라도 능력이 있으면 썼다. 집현전 학문 중심은 세종이었다. 문종을 비롯한 대군들과 정의공주 그리고 신미대사도 마찬가지다.

한 마디로 세종대왕은 '문화혁명'을 일으킨 위대한 군주였다. 박연 창제설도 문종과 왕자들, 정의공주, 집현전 학자, 신미대사 창제설처럼 또 다른 주장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세종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는 한글이 아니라 다른 문자로 말하고, 읽고, 쓰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므로 훈민정음 창제자는 세종대왕이라는 주장은 흔들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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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문)에 '절대'는 없다....투퀴디데스를 의심하라 | 역사 2013-06-16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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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투퀴디데스, 역사를 다시 쓰다

도널드 케이건 저/박재욱 역/한정숙 감수
휴머니스트 | 2013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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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키디데스'(Θουκυδίδης, 기원전 465년경~기원전 400년경)'. 고대 그리스 아테네 역사가다. 그가 쓴 <필로폰네소스 전쟁사>(이하 전쟁사)는 고대 역사서 중 최고 역사서로 꼽힌다. 이 책은 기원전 431년부터 기원전 404년까지 고대 그리스 아테네 주도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 주도 '펠로폰네소스 동맹' 사이에 일어난 '펠로폰네소스 전쟁'(Πελοποννησιακός Πόλεμος)을 기술한 '미완성'(411년까지만 다룸) 작품으로 8권이다.

국제관계와 전쟁사 연구자들 '바이블'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사람들은 <전쟁사>를 통해 고대 그리스 역사와 정치, 군사, 문화 전반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스 역사를 알려면 읽어야 할 책이었다. 1947년 '마셜 플랜'(Marshall Plan)을 기획한 조지 마셜 (George Marshal)은 그해 2월 프린스턴 대학에서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나는 필로폰네소스 전쟁의 시대와 아테나이의 몰락을 적어도 한 번이라도 되새겨보지 않은 사람이 현대 국제관계늬 몇몇 기본 문제들을 매우 자혜롭게 혹은 자신감을 가지고 다룰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재인용-<투퀴디데스, 역사를 다시 쓰다>(휴머니스트) 11쪽


마샬 말 이후 국제관계와 전쟁사를 연구하는 전문가가 되려면 반드시 읽어야 했다. 더 나아가 '가방끈이 조금 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두꺼운' <전쟁사>를 들고 다니는 이도 있었다. <전쟁사>을 읽은 '너도 나도' 투기디데스가 최고 역사가이고, 그를 능가할 이가 없다는 평으로 이어졌다. 한 번 부여된 권위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 법이다. 그리고 그 권위에 도전하는 일 쉽지 않다.

하지만 모든 학문은 '의심'을 통해 진보한다. 역사도 마찬가지다. 2400년 전 투키디데스 눈으로 본 <전쟁사>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기술했는지 의문을 통해 사실을 따져 묻는 것 역사가로서 당연한 도전이다. 그리고 틀린 부분이 있으면 '틀렸'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미국 예일대학에서 고대 그리스 역사를 가르치고 연구해온 도널드 케이건은 <투퀴디데스, 역사를 다시 쓰다>(이하 투퀴디데스>에서 "투퀴디데스를 온전하게 이해하려면 비판적으로 보아야 한다. 그는 사상의 세계뿐 아니라 행동의 세계에서 살아간 인간이기 때문"에 "틀린 부분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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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퀴디데스, 역사를 다시 쓰다
ⓒ 휴머니스트

 

역사서 '바이블'<전쟁사>...비판적 읽기

케이건이 <투퀴디데스>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위대한 전통의 권위라도 과도하게 존경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투퀴디데스를 무시하고, <전쟁사>가 모두 틀린 것이니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비판적 읽기를 통해 8권이란 엄청난 분량의 <전쟁사>를 쓰면서 "세상에 외치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이며, 그의 역사 서술은 올바른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 투퀴디데서 역사서술 방법과 목적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투퀴디데스도 무오류가 아니며, 다른 모든 저자를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그가 내린 결론도 검증해봐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작업을 한 뒤 그 결과를 투퀴디데스의 해석과 비교한 이후에야 비로소 투퀴디데스의 정신에 더 온전하게 접근할 수 있다. 우리는 그러한 차이와 충돌을 살펴봄으로써 투퀴디데스의 가장 창조적인 기여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투퀴디데스는 자기 시대에 통용되던 해석이 잘못되었다고 믿었고, 사건에 대한 이해를 교정하기 위해 역사를 서술하고 논증했던 것이다. 이러한 차이점을 이해한 뒤에야 비로소 우리는 왜 투퀴디데스가 그토록 자주 동시대인의 견해와 확연하게 다른 의견을 제시했는지 물을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투퀴디데스의 방법과 목적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37쪽)

케이건은 여기서 우리에게 학문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학문(여기서는 '역사')연구에서 절대는 없다. 그 어떤 위대한 역사가라 할지라도 역사해석에서 오류가 있으며 그 오류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케이건은 투퀴디데스를 최초의 '수정주의자'라고 칭한다. 조금 생각하면 투퀴디데스를 수정주의자로 부르는 케이건 주장에 고개를 갸웃뚱할 수밖에 없다. 이유는 <전쟁사>를 가정 먼저 썼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케이건은 "역사가는 모두 수정주의자"라면서 "'수정주의자'란 문제를 바라보는 기존 방식을 날카롭고 철저하게 재검토하여 새롭고 통합적인 해석을 제시함으로써 독자의 정신을 중대하게 바꾸려는 저자를 말한다"고 정의한다.

투퀴디데스가 <전쟁사>를 "'영원한 유산'되기를, 그리고 '과거에 벌어진 일과 무릇 인간사가 그러하듯이 미래에 똑같거나 비슷한 방식으로 다시 벌어질 일을 명확히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유용하게 쓰이기"를 바라면서 기록했기에 최초의 수정주의자로 정의해도 무방한 것이다.

'수정주의자' 투퀴디데스 "아테나이 민주정 아냐"...과연 그럴까

케이건은 투퀴디데스가 "스파르타인이 전쟁을 개시한 이유는 '동맹국들이 택한 논변에 설득되어사가 아니라 아테나이가 보유한 힘이 날로 커지고 대부분이 이미 아테나이의 영향력 안에 들어가 있는 모습이 두려웠기 때문이다'고 주장"한 것을  반박한다.

"헬라스 독립을 위해 페르시아에 대항한 위대한 전쟁에서는 아테나이와 스파르타는 협력"했고, "스파르트가 아테나이의 위험성을 더 이상 무시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는 이미 아테나이가 막강한 힘을 갖췄고, 아테나이를 넘어설 능력이 능력이 되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았기"때문이다. 그러면서 "동시대인 대다수는 전쟁은 피할 수 있었으며, 메가라 봉쇄령을 비롯한 페리클레스의 실책이 전쟁을 일으켰다"본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아테나이(아테네)가 민주주의 기원이라고 배웠다. 하지만 투퀴디데스는 "아테나이는 명목상 민주정었으나 사실 점점 제1시민(페리클레스)이 통치하는  정체가 되었다"고 기술했다. 이같은 투퀴디데스 주장에 대해 "나라의 모든 결정은 민회에서 다수결로 처리"되었고,"매년 선거를 치르고, 공식적인 재무 감사를 받아야 했으며, 언제나 소환되거나 공식재판에 회부될 가능성이 열려 있었기"에 이런한 체제가 진정한 민주정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케이건은 반박한다.

"투퀴디데스가 페리클레스 시대 아테나이를 민주정이 아니라고 부인한 것이야말로 당시 사람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졌던 견해를 수정하려는 특히 대담한 시도였다."(174쪽)

케이건은 이외에도 페리클레스 사후 니키아스와 아테나이 정치 지도자 자리를 두고 경쟁한 클레온에 대한 평가 "시민 중 가장 난폭했고, 당시 누구보다 가장 크게 시민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투퀴디데스 평가에 대해 이렇게 비판한다.

클레온의 동시대인 중 다수가 거의 항상 클레온 편에 섰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들은 대개 클레온이 제시한 정책을 기꺼이 따랐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비길 데 없이 높은 명예를 안겨주었다. 심지어 클레온이 큰 패배를 당하고 죽은 뒤에도 존경받고 성공한 장군에게 바치는 명예를 그에게 선사했다. 이와 달리 투퀴디데스는 클레온의 생애를 서술하면서 동시대의 견해를 근본적으로 수정하는 해석을 제시했다.(242쪽)

그리고 아테나이 쇠퇴로 이끈 시켈리아(시칠리아) 원정 책임에 대해 투퀴디데스는 "선동가이며 난폭하고 야심찼던 알키바데스"와 "원정군을 내보낸 아테나이인이 실수한 것"이리거 말한다. 하지만 케이건은 "자기 시대에 그런 일을 당하기에 가장 부적절한 사람"이며 "온 생애를 '아레테'-덕 또는 탁월함-에 따라 살았다"고 칭송한 니키아스에게 있다고 반박한다. 이유는 "아테나인들은 공공 묘역에 비석을 세우고 시켈리아에서 싸우다 죽은 장군들의 이름을 새켰는데, 니키아스 이름은 고의로 누락"했다. 아테나이 사람들이 자신들이 당한 재앙을 두고 니키아스에게 특별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의문 없이 받아 들이는 것...비극

그럼 왜 투퀴디데스는 이처럼 동시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당대 역사 해석을 '수정하려고 했을까? 케이건은 "투퀴디데스가 민주정 체제를 혐오했다"면서 "'페리클레스'와 그가 이끈 독재정이 틀렸다는 당대의 해석과 주장이 틀렸다고 믿었으며, 이러한 역사를 수정해서 기술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투퀴디데스는 헤르도토스처럼 '역사의 아버지'가 아니라 '정치사의 아버지'라고 말한다. 케이건은 "투퀴디데스의 해석을 비판 없이 그대로 받아 들이는 일은 마차 1,2차 세계대전에서 핵심 역할을 한 원스턴 처칠이 직접 자기 시대를 회고한 해석한 역사 서술을 아무 의문 없이 진실로 받아 들이는 것과 같다"고 경고한다. 사건과 역사, 학문에서 의문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야 말로 가장 위험한 것이다.

하지만 투퀴디데스 <필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역사상 최초로 인간 사회의 발전에 무수한 질문을 던졌고, 여러 종류의 정체(政體)가 가지는 특징과 장단점 검토한 주제를 담고 있다. 이들 주제는 아직까지도 인간사를 이해하고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에는 피할 수 없는 중요한 질문으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투퀴디데스가 수정주의를 취했을지라도 새로운 유형의 역사학을 발명하고 새로운 질문을 제기했으며 그로써 인간이 사고하는 방식을 형성하고 사고의 품격을 높였다는 사실만은 추앙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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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과 메이지의 '결정적' 차이는 이것 | 역사 2013-06-13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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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조선의 못난 개항

문소영 저
역사의아침 | 2013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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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황제 고종(1852~1919)과 일본제국 천황 메이지(1852~1912). 두 사람은 태어난 해가 같다. 왕위에 오른 해도 비슷하다. 고종은 1863년, 메이지는 1867년이다. 권좌에 오른 때 그리고 죽은 해도 엇비슷한 두 사람, 하지만 통치행위 결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고종은 재위 기간 동안 나라가 망했고, 메이지는 그 망한 나라를 차지했다.

역사에 가정이란 있을 수 없지만, 만약 역사가 거꾸로 진행돼 고종이 일본을 차지하고, 메이지가 쓸쓸하게 권좌에서 내려왔다면 2013년 한반도는 적어도 허리가 잘린 나라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역사는 그렇게 흐르지 않았다.

왜 고종은 메이지처럼 되지 못했을까

궁금하다. 왜 고종은 메이지처럼 되지 못했을까. 일본은 1853년 미국 페리 제독에게 강제 개항했다. 일본은 23년 후인 1876년 미국이 자신들에게 했던 것처럼 조선에 개항(강화도조약)을 요구한다. 일본이 미국과 강제조항을 맺었지만, 메이지를 중심으로 유신을 단행해 아시아 강대국으로 자리매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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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못난 개항
ⓒ 역사의아침

 

 

하지만 조선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강제개항 후 1910년 대한제국이 망할 때까지 34년 동안 제대로 된 개혁과 근대화를 이루지 못했다. 34년 동안 조선에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었을까? <서울신문> 문화부 학술담당 문소영 기자가 쓴 <조선의 못난 개항>(역사의아침)은 그 작은 답을 제시하고 있다.

책 제목에 쓰인 단어 '못난 개항'은 독자의 입장에서 불편하다. 하지만, 저자 문소영이 이 책을 통해 "일본은 1853년 미국 페리 함대에 의해 강제 개항을 시작했지만, 하급무사와 지식인이 결합해 구체제를 해체하고 메이지 유신에 성공하면서 단숨에 동북아시아의 강국으로 부상했다"며 역사자료와 문서를 통해 주장하고 있다. 그 주장 앞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조선은 개항 이후 34년간 허송세월을 보냈다. 그 중심에는 고종이 있다. 사람들은 을사늑약 당시 '옥쇄'를 숨기고. 이준 열사 등을 헤이그에 보낸 것 등을 예로 들면서 고종이 나름대로 대한제국(조선)을 지키기 위해 힘썼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문소영은 이렇게 묻는다.

고종에 대한 우호적 평가 있을 수 없는 일

"대한민국의 어떤 대통령이 만약 일본과 분쟁을 일으키고 있는 독도를 포기하고 일본에 넘겨준다고 선언했다고 가정해보자.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그리해야 한다는 결정을 한다면, 대한민국 국민 5000만 명은 그 '어떤' 대통령의 결정을 따를 수 있을까? 아마도 탄핵과 같은 정치적 행위가 아니라 결사대를 구성해서 극단적이 행동을 할지로 모를 일이다."(본문 20쪽)

그런데 고종은 아예 '삼천리금수강산'을 송두리째 일본에 넘겨줬다. 35년 일제식민지배가 우리에게 남긴 상처는 깊고도 넓다. 아직도 상처는 낫지 않고 있다. 일본 극우만 아니라 역사교과서에서 이제는 당당하게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극우 성향의 총리는 일본제국주의 침략을 부정한다. 심지어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를 '직업여성'에 비유하고, 말뚝을 우리 사법부에 보내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자행하고 있다. 이 모든 책임 근원은 고종에게 있는 것 아닐까.

문소영은 "최근 고종의 일가나 조선 말기에 대한 대단히 우호적인 시선은 우려할 만한 대목이 있다"며 "정책적인 결정이었기에 책임을 묻지 않으려는 태도와도 관련이 있는데, 책임을 물을 일은 묻고 단죄할 일은 단죄를 하는 것이 한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바람직하다"고 고종에게 책임을 묻지 않으려는 시도를 강하게 반박한다.

일본 '교육개혁'할 때, 조선은 망한 명나라 숭배

고종은 부친 흥선대원군 섭정기간 10년(1863~1873)을 빼고, 1907년까지 34년을 권좌에 있었다. 34년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한 세대다. 충분히 한 나라를 개혁하고 근대화시킬 수 있는 시기였다. 고종이 통치한 대한제국을 삼킨 메이지는 달랐다. 메이지는 아버지 고메이 천황이 급사하는 바람에 1867년 1월 열다섯 살 나이로 즉위한다. 새 천황은 "죠수 출신 이토 히로부미와 사쓰마와 조슈·도사·에치젠 번 등이 연합해 막부를 제치고, 신지 개혁세력"과 함께 개혁을 단행했다. 무엇보다 메이지는 교육제도 개혁을 통해 유신을 성공적 안착시킨다.

"근대화 정신과 서양문화·제도 등 서양문명의 전국민적인 확산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교육 제대의 개편이었다. 메이지 정부는 1872년 프랑스 교육제도를 모방해 학제를 공포했다. '학제명령서'는 신분에 의한 취학의 차별을 철폐했다. 신분이 세습되지 않았기 때문에 학문은 입신 출세할 수 있는 자산으로 떠올랐다."(본문 174쪽)

하지만 조선은 흥선대원군이 1871년 '서원철폐'를 단행하자 최익현은 1873년 서원철폐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린다. 또 명나라 신종을 위해 세운 '만동묘' 폐지를 결정하자 "유생들은 통문을 내 사람들을 모았고 검은 두건과 가죽 허리띠를 한 사람들이 한성에 1만 명이 모여들어" 원상 복구를 주장한다. 흥선대원군이 1873년 하야하자 다음해 고종은 만동묘를 부활시킨다.

일본 메이지와 신진개혁세력들이 프랑스식 교육개혁을 통해 개혁과 근대화를 통해 대국으로 성장하고 있을 때 조선 고종과 지도자들은 400년 전 망한 명나라와 죽은 황제를 숭배하는 데 급급했다. 조선과 일본의 미래는 이미 결정난 것 아니었을까.

물론 조선도 서양 문물을 처음으로 접한 유길준, 1905년 '을사오적'에 가장 먼저 이름을 올렸지만 처음이는 반일파였던 이완용처럼 미국을 다녀온 이도 있다. 그리고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 같은 개혁파가 있었다.

하지만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냈다. 왜 실패했을까? 문소영은 "김옥균의 실패는 고종만 바라보고, 고종의 결단으로 대부분이 결정되는 왕조국가의 한계 때문이"이라며 "고종이 변심할 수도 있다는 점을 계산에 넣지 못했고, 힘으로 밀어붙일 만한 독자적인 군사력을 확보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특히 "조선을 선도해야 할 지식인인 선비들이 주자학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토 히로부미 같은 정치인이 조선에 있었다면

무엇보다 조선에는 우리에게는 민족원흉이지만 "영국 유학을 다녀와 '근대화론자'가 돼 메이지 천황 신정부가 들어선 뒤 유럽에서 배은 의회제도와 헌법제정 등 각종 제도를 일본에 이식시키며 급속하게 발전시킨 이토 히로부미"같은 이가 없었다.

"우리에게는 독자적으로 '조선의 길'을 제시해줄 만한 조선의 사상가가 부재했다. 개화의 필요성을 지식층인 양반과 선비들이 받아들이고, 선비와 양반들의 각성이 백성들에게 스며들어 가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흥선대원군이 만약 후쿠자와 유키치처럼 유럽과 미국을 주유했더라면, 최소한 1847년에 예정대로 중국에 사신으로라도 다녀왔더라면, 그의 대외정책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밑도 끝도 없는 상상을 하며 아쉬움을 달랠 뿐이다."(본문 113쪽)

조선 지식인 사회는 그들의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고 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친일파였다가 친청파가 되고, 친청파였다가 친러파가 됐다. 그리고 친러파였다가 친일파가 됐다. 주류기득권이 자리만 바꿨을 뿐 조선사회 근본은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은 달랐다. 일본은 "비주류가 주류를 전복"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막부에서 천황제로 권력체계가 변화하는 과정에서, 비주류가 주류로 올라섰"고 "인재를 등용하는 방식도 신분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발탁"함으로써 정치지형만 아니라 일본사회 전체가 거대한 변화를 겪게 됐다.

비주류가 주류를 전복한 일본... 무능한 주류가 존속한 조선

그럼 조선에서는 언제쯤 비주류가 주류로 올라섰을까. 1862년 진주농민전쟁과 1894년 동학항쟁은 비주류가 주류에 저항한 사건이다. 하지만 조선 기득권은 이를 강경진압했다. "조선 고급관리 사교모임 같았던 독립협회"는 동학농민전쟁과 의병활동을 폄훼했고 자주의식은 없었다. 강만길은 <고쳐 쓴 한국근현대사>(창비·2006)에서 이렇게 적었다.

"조선은 세계 만국이 오늘날 독립국으로 승인하여 주어 조선 사람이 어떤 나라에 조선을 차지하라고 빌지만 않으면 차지할 나라가 없을지라. 그런 고로 조선에서는 해육군을 많이 길러 외국이 침범하는 것을 막을 까닭도 없고 다만 나라에 해육군이 조금만 있어 동학이나 의병 같은 토비나 진정시킬 만하면 넉넉할지라."(본문 207쪽에서 재인용)

자신들 동학과 의병들에게 자신들 기득권만 보호해주는 군대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조선 관리들이었다. 일본과 대결에서 승리한다는 자체가 허망할 수밖에 없다. 무능한 주류 때문에 나라를 잃고 많다. 문제는 이후에도 비주류가 주류를 전복한 일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저자의 주장 "한반도에서 비주류가 주류로 올라선 경험은 1997년 외환위기를 맞아 김대중 대통령이 호남을 바탕으로 정권을 잡은 것이나, 2002년 민주당 내에서 소수이자 비주류였던 노무현 대통령의 집권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처럼 비주류가 주류를 이기고 권력을 잡은 적은 있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1년 12월 10일 대선후보 출마 연설을 통해 "조선 건국 이래 600년 동안 우리는 권력에 맞서서 권력을 한 번도 바꿔보지 못했다"며 "비록 그것이 정의라 할지라도 비록 그것이 진리라 할지라도 권력이 싫어하는 말을 했던 사람은 또는 진리를 내세워 권력에 저항했던 사람은 전부 죽임을 당했다, 그 자손들까지 멸문지화를 당했고 패가망신했다"고 꼬집었다.

일본 극우 비난보다 조선 개항 실패를 직시해야

주류는 이런 노무현을 가만두지 않았다. 비주류 중 비주류인 노무현이 대통령이 됐지만, 기득권은 5년 내내 노무현을 비난했고, 심지어 1년 만에 탄핵을 시도했다. <조선의 못난 개항>을 읽으면서 노무현이 한 말이 귓가에 맴돌았고, 한편으로 불편했다. 이른바 '자학사관'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고종과 메이지가 같은 시기에 태어나고, 권좌에 오르고, 죽었다. 결과는 고종은 메이지에게 폐위당하고 자신의 나라는 망했다는 점이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 우기고,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를 직업여성이라 모독할 때 우리가 일본대사관에서 일장기만 불태운다면 어떻게 될까. 113년 전 대한제국 멸망의 교훈을 체득하지 못했다는 결과만 낳을 뿐이다. 불편하지만 냉정하게 그 시대를 평가하고 분석해 다시는 나라가 망하는 비극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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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참사' 자초한 박 대통령에게 권하는 책 | 사회 2013-06-09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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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대통령의 인사

박남춘 저
책보세(책으로 보는 세상) | 2013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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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 혁명의 불꽃이 타오를 때 최인규 내무부 장관은 독재자 이승만 앞에서 "총은 쏘라고 있는 것"이라고 했고, 유신독재가 종말로 향해 치닫던 1979년 10월 26일 밤 궁정동 안가에서 차지철은 독재자 박정희 앞에서 "캄보디아에서는 300만이나 희생시켰는데 우리가 100만 명이나 200만 명을 희생시키는 것이 무슨 대수냐"고 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지 다 알고 있다.

최인규와 차지철이 이승만과 박정희에게 직언했다면....

만약 최인규가 타오르는 혁명의 불꽃을 보고 "각하 이제 하야할 때가 되었습니다"라고 직언하고, 차지철도 "각하 민심은 천심입니다. 물러나십시오"라는 직언은 못해도, 최소한 김재규가 부산에서 보고 들은 천심에 동의했다면 역사는 그들을 달리 평가했을 것이다. 최인규와 차지철은 대한민국과 민주주의에 자신을 맞긴 것이 아니라 '독재자'에게 자신을 걸었다. 두 독재자는 최인규와 차지철만 아니라 자기에게 충성하는 이들을 뽑았다. 이승만-박정희 두 정부는 아니 두 정권은 민주공화국 인사시스템이 아니었다.

최고권력자와 충성파들이 밀실에서 뽑은 고위공직자가 국가와 인민을 위해 일하기보다는 자신을 뽑아준 이를 위해 충성할 밖에 없다. 결과는 인사가 망사가 되고, 참사가 될 수밖에 없다. 인사참사를 막기 위해서는 대통령이 사적 충성이 아니라 나라와 시민을 위해 일하는 이들을 뽑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수첩'이 아니라 '시스템'을 통해 공직자를 뽑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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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의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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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부 때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국정상황실장을 거쳐 인사제도비서관·인사관리비서관·인사수석비서관 등 주로 인사참모를 지낸 박남춘 민주당 의원(인천남동갑)이 대표집필한 <대통령의 인사>(책보세)는  "이명박근혜 새누리당 정권의 '대통령의 인사'가 잇달아 '인사 참사'를 빚으면서 비판의 도마에 오른 가운데 '대통령의 인사'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참여정부 인사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취임 100일은 '인사실패'였다. 김용준 전 국무총리 후보자를 시작으로 낙마한 박 대통령이 직접 임명한 장·차관급 고위 공직자 중 무려 14명이나 되자 '낙무축구팀'을 만들 수 있다는 비아냥을 들었고, 박근혜 '1호인사' 윤창준 전 청와대 대변인 사태는 '인사참사'였다.

<오마이뉴스>는 지난 4일 전병헌 민주당 원내대표는 이날 원내대책회의에서 "지난 100일은 '밀봉'으로 시작해서 '그랩(grab)'으로 끝난 인사참사였다"고 지적했다고 보도했다.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수첩' 중심 인사 때문이다. 고위공직자 인사를 수첩에서 공적시스템으로 바꾸지 않으면 제2 윤창중은 줄을 서서 기다릴 것이다.

공직인사는 '사적수첩'이 아니라 '공적 시스템'을 통해

우리는 세종을 '대왕'이라 부른다. 세종은 사람을 볼 줄을 알았다. 인재를 쓸 수 알았다는 말이다. 예조판서 허조는 세종에게 사람을 어떻게 써야 할지 이렇게 조언했다.

"어진 인재를 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인재를 얻으면 편안해야 하며, 일을 맡겼으면 의심하지 말고. 의심이 있으면 일을 맡기지 말아야 합니다. 전하께서 대신을 선택하여 육조의 장으 삼으신 이상, 책임을 지워 성취토록 하실 것이 마땅하며, 몸소 자잘한 일에 관여하여 신하의 일까지 하시려고 해서는 아니 됩니다. <세종실록> 제3권, 세종 1년 1월 11일 기사" (책 12쪽)

세종은 허조 말을 들었다. 세종이 대왕으로 추앙받는 이유는 그가 남긴 업적 때문이다. 그런데 세종 혼자하지 않았다. 사람을 제대로 쓴 것이다. 특히 허조 말 중에 "몸소 자잘한 일에 관여하여 신하의 일까지 하지 말라"는 내용이 눈에 띈다. 박근혜 대통령은 '깨알지시'로 잘 알려져 있다. 대통령이 장관, 차관 아니 국장급 공직자가 할 일도 직접 챙기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공직자들이 하는 일이 미덥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허조는 말했다. 임명했으면 맡기라고 했다.

임명권자가 공직자를 어떻게 신뢰하는 길은 수첩에서 나오지 않는다. 박 대통령은 윤창중 사태에 대해 "전문성도 검증하고, 다양한 분야에서 절차를 밟았는데 '그런 인물이었나' 하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괜히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하지만 윤창중 임명 때부터 대통령 자신만 빼고, 대부분 반대했다. 야당만 아니라 새누리당 그리고 진보언론만 아니라 <조중동> 같은 보수언론도 비판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끝내 밀어붙였다. 원인은 수첩이다. 공적시스템이 무너진 결과는 참사로 귀결됐다. 공직인사는 수첩이 아닌 공적시스템으로 해야 함을 '박근혜식 인사참사'가 단적으로 보여준다.

대통령 의무... 유능한 인재 키우기

박 대통령은 그 어떤 대통령보다 '국가'와 '국민'을 강조한다. "국가와 결혼했다"는 말을 할정도다. 대한민국을 잘 경영하기 위해서는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공직시스템을 통해 인사를 찾고, 배분해야 한다. 이것이 되려면 대통령이 사람을 보는 지혜와 혜안이 있어야 한다. 이는 의무이다.

"대통령에게는 국민의 참정권을 위임받은 자로서 선거에서 표방했던 정치적 이념과 정책을 책임감 있게 이끌어가야 할 의무가 있고, 또 국가를 대표하는 최고지도자로서 지역사회 통합을 실현해야 할 의무가 있다. 미래를 위해 유능한 인재를 키워내야 하는 것도 대통령의 의무이다." (책 48쪽)

노무현은 대통령 의무인 미래를 위한 유능한 인재를 키워내는 혜안을 가졌다. 그 중 하나가 '적소적재'(適所適材)였다. '적재적소(適材適所)'는 익숙한 말이지만, 적소적재는 생경하다. "알맞은 인재를 알맞은 자리에 쓴다"는 적재적소가 인재를 쓰는 방법으로 알고 있지만 노무현은 달랐다.

노무현 인사철학은 "어떤 일을 맡기기에 적합한 재능을 가진 인물을 그 일에 맞는 자리에 앉혀 쓴다"는 적소적재였다. "그동안의 잘못된 통념을 넘어 인사문제를 핵심을 찌른 혜안"이었던 셈이다.

대통령 권한 내려놓으니 오히려 권한 강화돼

적소적재를 하려면 인사과정이 투명하고 공정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 인사는 청와대 참모조차 잘 모르는 '밀봉인사'였다. 노무현은 집권하자 마자 '인사추천위원회의' 설치를 지시했다.

"인사를 할 때는 일반 참모수석들이 모여서 하십시오. 특별 참모들은 해당 분야의 인사를 할 때 참여하십시오. 인사보좌관이 자료를 준비해 비서실장 주재로 인사추천위원회의를 마쳐주십시오. 그 결과를 가지고 인사보좌관이 와서 보고를 하되, 선택의 과정에 대해 소상히 설명해주십시오." (책 104쪽)

인사는 대통령 고유권한이라는 생각이 젖은 이들이 보기에 노무현식 인사정책은 있을 없는 일이다. 하지만 노무현은 자신의 권한을 내주었다. 노무현은 "인사추천위원회의가 대통령 권한을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하는 장치"라고 말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참모들이 추천하는 사람을 그대로 임명하면 참모진에 줄을 대는 이들이 분명있다. 인사가 공정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참모진들이 공적기구를 통해 해당 인사에 대한 검증을 공론화하고 최종적으로 대통령이 결정하면 "인사가 왜곡되는 일도, 특정 실세에 의해 좌우되는 것도 막을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집단 논의체제인 인사추천위원회의가 대통령의 오류를 걸러내주고, 극소수 측근이 득세하지 못하도록 막아주기 때문에 오히려 대통령 권한이 남용되거나 훼손되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 노무현식 인사정책이었다. 참모들도 잘 모른다는 박근혜식 인사와 참 다르다.

'낙마축구팀'이 만들어질 정도로 인사참사가 일어난 이유는 검증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 김용준 국무총리 후보자가 낙마하자 "사적인 부분까지 공격하며 가족까지 검증하는데 이러면 좋은 인재들이 인사청문회가 두려워 공직을 맡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도덕성은 보조수단이 아닌 리더십 핵심 요소

하지만 검증을 철저히 했다면 김용준 후보자가 공직자 자격이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참여정부는 "병역에서부터 부동산, 음주운전, 탈세에 이르기까지 공직자의 비위, 비리 사실을 낱낱이 파헤치"는 혹독한 인사검증을 했다. 얼마나 혹독했으면 "제발 저는 빼주세요"라는 '역 인사 청탁 해프닝'까지 일어났다. 도덕성에 흠결있는 사람 중에 탁월한 능력을 가진 공직자가 분명있다. 하지만 도덕성은 보조품이 아니라 필수품이다.

"도덕성은 공직자의 자질 판단에서 보조적,부수적 잣대가 아니라 업무수행 능력과 함께 리더십을 구성하는 핵심 축이다. 능력 있는 사람이 도덕적으로도 떳떳해야만 국민의 신뢰를 얻고 리더십 또한 제대로 발휘될 수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도덕성에 문제가 있어도 "일만 잘하면 된다"고 했다. 전임자 인사기준을 팽개친 것이다. 결과는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이 아니라 "도둑적으로 완벽한 정권"이 되었다. 박근혜 대통령도 비슷하다. 허태열 청와대 비서실장은 손가락 마비로 병역면제를 받았고, 부인이 부동산투기를 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무엇보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경쟁했던 2000년 16대 총선에서 지역감정 조장 발언은 국민대통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사였다.

"대통령이 책임지겠습니다."... 인사시스템 완성은 '사람'(대통령)

자신이 임명해 줄줄이 낙마해도 국민 앞에 사과하지 않았다. 윤창중 사태도 자신이 인사를 잘 못해 일어난 사태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노무현은 "각료와 참모들은 대통령에게 책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총체적인 결과에 대해서는 대통령이 책임지는 것"이라고 했다. 각료와 참모들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은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인사추천위원회의를 통해 임명된 인사라고 해도 최종 인사권자는 대통령이다. 당연히 공직자가 도덕성과 업무에서 문제를 일으키면 대통령이 책임지고 사과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본받아야 할 책임의식다.

물론 참여정부가 인사도 많은 문제점을 노출했다. 2005년 1월 이기준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이 서울대 총장시절 판공비 과다사용, 사외이사 겸직, 장남 병역 의혹과 부정특례입학, 재산은폐 의혹, 따위가 쏟아졌다. 결국 이 장관은 임명 4일만에 물러나 '최단명' 교육부총리이라는 오명을 썼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기준 파동 직후 국회인사청문회 대상을 장관까지 확대했다. 비싼 대가 였지만 노무현은 공직자 인사를 더 철저히 하는 계기로 삼은 것이다.

당시 국무위원까지 검증 대상과 법제화를 제안했던 이가 바로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다. 만약 노무현 정부 인사시스템을 도입해 더 발전시켰다면 '낙마축구팀'과 '윤창중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명 박정부 5년 내내와 박근혜 정부 조각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른 길은 없다. 공직인사스템을 확립해야 한다. 그리고 인사 시스템 완성은 '사람'이다. 그 사람은 바로 대통령이다.

"국민으로부터 신뢰받는 인사는 공정하고 투명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사를 하는 사람 스스로가 이 원칙을 훼손하지 않으려는 자세를 지켜가야 한다. 인사권자가 먼저 솔선수범해야 잉를 바라보는 정치권이나 국민도 믿고 따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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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보다 무서운 독성... 이래도 먹겠습니까? | 사회 2013-06-03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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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아이 몸에 독이 쌓이고 있다

임종한 저
예담friend | 2013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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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이 떠나갔다."
"국민DJ."


<별이 빛나는 밤에>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 <이종환 최유라의 지금은 라디오 시대>, <이종환의 음악살롱> 등을 진행한 이종환씨(76세)가 숨지자 사람들이 평한 찬사다. 원인은 폐암이었다. 이씨는 지난 해 폐암 진단을 받을 때까지 담배를 즐겨 피웠다. 2002년 '코미디계 전설'이 이주일씨는 폐암으로 마지막 숨을 몰아 쉬면서 "담배 맛있습니까?"라는 말로 금연을 강조해 웃음 아닌 눈물을 흘리게 했다.

서울대 의대 등이 폐암과 흡연의 연관성을 규명하기 위해 16년 동안 성인 남성 1만5000 명을 추적조사한 결과 흡연자의 폐암 발생률이 비흡연자보다 4배 이상 높았다. 이주일-이종환 그리고 서울대 의대 조사 결과가 주는 교훈은 담배는 '발암 덩어리, '독성 덩어리'라는 사실이다.

'살인무기' 담배보다 더 무서운 '조용한 살인무기' 독성물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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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아이들을 병들에게 하는 '조용한 살인무기'는 먹을거리와 주위에 널려 있다.
ⓒ 예담

 


1980년대는 고속버스 안에서도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큰길에서도 담배를 피우면 눈치를 보거나 아예 국가가 금지하는 곳도 있다. 

아이에게 담배 피우게 하는 부모는 이 세상에 거의 없다. 하지만 담배보다 더 무서운 살인무기가 있다. 이 살인무기를 부모들은 어제도, 오늘도 아이에게 먹였다. 어쩌면 내일도 자연스럽게 먹일 것이다. '살인무기'가 너무 과격하다면 '조용한 살인무기'라고 부르고 싶다.

"또 햄이에요?"
"만날 먹는 것도 아니고... 일주일 아니 한 달에 한 두 번도 안 돼요?"

아내와 한 번씩 햄 때문에 다툰다. 아내는 일주일에 한 번쯤 괜찮다는 것이고, 나는 그것도 안 된다는 생각이다. 바로 한두 번은 괜찮다면서 먹이는 햄이 '독성물질'이다. 햄만 그런게 아니다. 햄버거, 과자, 아이스크림, 화학조미료, 플라스틱 제품, 코팅된 주방기구 등등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담배보다 나쁜 독성물질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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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 몸에 독이 쌓이고 있다>
ⓒ 예담

 

"한 번 몸속에 들어온 독성물질은 뇌와 간, 뼈와 근육, 정액과 모유에 쌓여 신체를 오염시킨다. 세계적으로 유통되는 화학물질은 10만여 종에 이르고, 한국에서 현재 사용되는 화학물질은 3만6000여 종, 4억3250만 톤에 이른다.

게다가 해매다 200여 종의 새로운 화학물질이 들어오고 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과자, 아이스크림, 패스트푸드는 물론이고, 먹고 자고 싸는 생활 공간 어디에나 촘촘하게 녹아 있다." - <아이 몸에 독이 쌓이고 있다: 담배보다 나쁜 독성물질 전성시대> 서문

2011년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터졌을 때 '폐 손상 조사위원회' 조사위원으로 참여한 임종한 의학박사는 <아이 몸에 독이 쌓이고 있다: 담배보다 나쁜 독성물질 전성시대>에서 "방부제 범벅인 햄버거, 환각물질이 검출된 중국산 장난감, 알러지를 일으키는 학용품, 발암물질로 코팅된 프라이팬, 연약한 피부에 스며드는 섬유유연제 독성 따위에서 아이들을 구해내자"고 호소한다.

소시지, 라면, 햄버거... 아이들에게 쓰레기를 먹여

아이들 손이 닿는 곳, 눈이 가는 곳, 발이 가는 것, 숨쉬는 곳이 다 독성물질로 가득하다. 남편이 담배를 피우면 닥달하면서 독성물질은 마구 먹이고 있는 것이다. 지은이는 "아이들이 열광하는 간식인 어린이용 소시지"에 들어있는 "아질산나트륨은 과다 섭취하면 혈관 확장, 헤모글리빈 가능 저하를 일으키고 먹었을 때 몸 속에서 단백질과 결합해 니트로소아민이라는 발암물질로 둔갑하는 화학물질"이라고 말한다. 대한민국 간식인 라면에는 "1급 발암물질인 벤조피렌이 검출"되었다. 이는 나중에 위암으로 이어질 수 있다. 암을 부르는 '소리없는 살인자'인 셈이다.

이뿐 아니다. 설탕이 함유된 탄산음료, 과자도 비슷하다. 한 달 동안 실험용 쥐에게 설탕을 먹이다가 중단하자 "마약 금단 증상에 가까운 행동"을 했다는 연구는 충격 그 자체다. 이것만 아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햄버거, 피자, 치킨, 감자튀김 등 대부분이 '유전자가 조작된' 농작물로 짜낸 기름으로 퇴긴다"고 한다. 이쯤 되면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쓰레기"를 먹이고 있는 것과 별 다르지 않다.

살기 바쁘고, 먹기 편한 편의점 음식 중 가장 인기 있는 것 하나인 '삼각김밥'. 하지만 다음글을 읽는 순간 다시는 삼각김밥을 먹지 않겠노라고 말할 것이다. 

"삼각김밥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쌀은 보통 2~3년 묵은 것이 대부분이다. 묵은 쌀은 특유의 역한 냄새와 맛이 날 수밖에 없는데, 그 냄새와 맛을 가리기 위해 온갖 식품첨가물이 등장한다. 묵은 쌀을 햅쌀처럼 둔갑시키기 위해 화학조미료와 유화제 등 15~20종의 첨가물이 들어간다. 또한 보습성을 높이고 광택을 내서 얼려도 딱딱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효소, 사과산칼슘, 에탄올, 지방산글리세린에스테르 등이 첨가된다. 이쯤 되면 이것이 쌀인지, 화학물질 덩어리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다. - 62쪽

삼각김밥이 아니라 '화학물질 덩어리'로 배를 채우고 있었다니. 문제는 어제처럼 오늘도, 아니 내일도 삼각김밥은 살기 바쁜 이들 배를 가장 쉽게 채워주는 먹을거리다. 바빠도 집에서 밥을 해먹자.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집' 아니지 '가장 위험한 집'

올해는 조금 덜하지만 황사가 오면 "노인과 어린이는 되도록이면 외출을 삼가해달라"고 한다. 또 여름에는 대기오염지수가 노약자는 바깥 출입을 자제해달라고 말한다. 집안이 바깥보다 훨씬 안전하다는 이유에서다. 그럼 집은 안전할까? 지은이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집"이라고 말한다. 집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다니 억지 주장도 이런 억지 주장이 없다고 하겠지만 집이 위험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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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집'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집'
ⓒ 예담

 


아이들 건강을 위해 쓰는 '항균탈취제'는 "살균에 대한 집착이 좋은 균을 죽이고 불필요한 화학물질을 남발해 오히려 아이들 면역력을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여름철 가장 강력한 적이 모기를 잡기 위해 뿌리는 '분사모기약'과 '전자모기향'도 환경호르몬이다. 아이들이 입에 달고 사는 장난감에는 "초산에틸과 초산부틸, 자일렌"이 들어있다. 이 물질을 피부에 닿으면 피부염을 일으킨다. 생선을 구워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들러붙는다. 들러붙지 않는다면 고기를 맛나게 구워 낼 수 있다. 바로 이것을 덜어주는 '코팅' 프라이팬은 박수를 받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어떤 음식도 절대 눌어붙지 않는 마법의 코팅으로 사랑받는 프라이팬을 싸게 구입하기 위해 아침부터 주부들의 한판승이 벌어진다. 음식이 들러붙지 않아 주부들의 설거지 수고를 덜어주는 이 프라이팬의 이면에는 퍼플루오로옥탄산염PFOA이라는 발암물질이 도사리고 있다.(중략) 이 화학물질은 암을 유발하는 발암물질로 특히 임산부에게는 유산을 일으킬 수 있는 위험한 물질이다." - 122쪽

자연으로 돌아가자

편리함을 추구하다 우리 스스로 죽음을 재촉하고 있는 셈이다. 가장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우리는 독성물질을 먹이고 있다. 이나즈 노리히사는 <내 아이에게 대물림 되는 엄마의 독성>(전나무숲, 2010)에서 "세대 전달 독성은 '유전'이 아니라 '전달'되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희망이 보인다. 유전은 막을 수 없지만 전달은 얼마든지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조용한 살인무기 독성물질에서 구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의외로 간단하다. 햄이나 소시지 등 가공식품을 멀리하고, 소금을 적게 먹는다. 치킨 대신 마늘소스가 들어간 닭튀김,'즉석00' 먹을거리는 되도록 멀리하기, 사과와 토마토같은 껍질이 얇은 과일은 식초와 레몬즙에 담가두었다가 흐르는 물에 씻어 먹는다. 방향제와 탈취제보다는 창문을 열어 환기한다. 프라이펜은 코팅제품보다는 스텐레이스 제품을, 천연세제 등등이다.

너무 어렵고, 귀찮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이들 옆에서 담배는 '절대' 피우지 못하게 하면서 담배보다 더 나쁜 조용한 살인무기 독성물질 천국을 만드는가. 이제 우리  아이들은 독성물질에서 구하자. 늦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고 했다. 답은 자연으로....

자연이 우리 아이들 건강에 좋은 이유는 의학적인 차원 그 이상이다. 자연의 가치는 모든 것을 초월한다. 물질적인 측면에서 성장이 지연되더라도, 우리의 환경과 건강을 지키는 데 많은 관심과 시간이 투입되어야 한다. 도시의 공기와 식품, 생활용품 등은 보다 안전하게 관리되어야 한다. 이제는 공존이 답이다. 더 늦기 전에 자연과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훈련을 해야 한다. 자연은 그 자체로 치유이자 생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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